시(詩)와 詩魂 749

가지 않은 길/로버트 프로스트

가지 않은 길 -로버트 프로스트 노란 숲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습니다. 나는 두 길을 다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오랫동안 서서 한 길이 굽어 꺾여 내려간 데까지, 바라다볼 수 있는 데까지 멀리 바라다보았습니다. 그리고 똑같이 아름다운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그 길에는 풀이 더 있고, 사람들이 걸은 자취가 적어, 아마 더 걸어야 할 길이라고 나는 생각했었던 게지요. 그 길을 걷다 보면, 그 길도 거의 같아질 것이지만. 그날 아침 두 길에는 낙엽을 밟은 자취는 없었습니다. 아, 나는 다음날을 위하여 한 길은 남겨두었습니다. 길은 길에 연하여 끝없으므로 내가 다시 돌아올 것을 의심하면서...... 오랜 세월이 지난 후 나는 어디에선가 한숨을 지으면서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

시(詩)와 詩魂 2020.09.28

서시/한강

서시 - 한강 어느 날 운명이 찾아와 나에게 말을 붙이고 내가 네 운명이란다. 그동안 내가 마음에 들었니, 라고 묻는다면 나는 조용히 그를 끌어안고 오래 있을 거야. 눈물을 흘리게 될지, 마음이 한없이 고요해져 이제는 아무것도 더 필요하지 않다고 느끼게 될지는 잘 모르겠어. 당신, 가끔 당신을 느낀 적이 있었어, 라고 말하게 될까. 당신을 느끼지 못할 때에도 당신과 언제나 함께였다는 것을 알겠어, 라고. 아니, 말은 필요하지 않을 거야. 당신은 내가 말하지 않아도 모두 알고 있을 테니까. 내가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후회했는지 무엇을 돌이키려 헛되이 애쓰고 끝없이 집착했는지 매달리며 눈먼 걸인처럼 어루만지며 때로는 당신을 등지려고도 했는지 그러니까 당신이 어느 날 찾아와 마침내 얼굴을 보여줄 때 그 윤곽..

시(詩)와 詩魂 2020.09.27

몰랐다/유안진

몰랐다 -유안진 히말라야 오르는 길 어느 외딴 高山마을 밖 비어있는 마을 어귀, 비어있는 길 가운데 새끼 나귀 한 마리가 혼자 서 있었다 고삐 매지 않은 채로 마냥 서 있었다 올라갈 때 서 있더니 내려올 때도 서 있었다 행복한 눈빛으로 무작정 서 있었다 한참을 내려와 돌아다보니 도포자락 같은 흰구름을 따라가고 있었다 神을 기다리는 줄은 상상도 못했다.

시(詩)와 詩魂 2020.09.27

종소리/박남수

종소리 -박남수 나는 떠난다. 청동(靑銅)의 표면에서 일제히 날아가는 진폭(振幅)의 새가 되어, 광막한 하나의 울음이 되어, 하나의 소리가 되어. 인종(忍從)은 끝이 났는가. 청동의 벽에 ‘역사’를 가두어 놓은 칠흑의 감방에서. 나는 바람을 타고 들에서는 푸름이 된다. 꽃에서는 웃음이 되고, 천상에서는 악기가 된다. 먹구름이 깔리면 하늘의 꼭지에서 터지는 뇌성(雷聲)이 되어, 가루 가루 가루의 음향(音響)이 된다.

시(詩)와 詩魂 2020.09.27

꽃을 위한 서시/김춘수

꽃을 위한 서시 -김춘수 나는 시방 위험한 짐승이다 나의 손이 닿으면 너는 미지의 까마득한 어둠이 된다 존재의 흔들리는 가지 끝에서 너는 이름도 없이 피었다 진다 눈시울이 젖어드는 이 무명의 어둠에 추억의 한 접시 불을 밝히고 나는 한 밤 내 운다 나의 울음은 차츰 아닌 밤 돌개바람이 되어 탑을 흔들다가 돌에까지 스미면 금이 될 것이다 ...... 얼굴을 가리운 나의 신부여

시(詩)와 詩魂 2020.09.27

담쟁이는 결국 그 벽을 넘는다

담쟁이/ 도종환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시(詩)와 詩魂 2020.09.25

가을 저녁의 시 /김춘수

가을 저녁의 시 - 김춘수(金春洙) ​ 누가 죽어가나 보다 차마 다 감을 수 없는 눈 반만 뜬 채 이 저녁 누가 죽어가는가 보다 살을 저미는 이 세상 외로움 속에서 물같이 흘러간 그 나날 속에서 오직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면서 애터지게 부르면서 살아온 그 누가 죽어가는가 보다 풀과 나무 그리고 산과 언덕 온누리 위에 스며 번진 가을의 저 슬픈 눈을 보아라 정녕코 오늘 저녁은 비길 수 없이 정한 목숨이 하나 어디로 물 같이 흘러가 버리는가 보다

시(詩)와 詩魂 2020.09.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