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 서정주
귀기우려도 있는 것은 역시 바다와 나뿐.
밀려왔다 밀려가는 무수한 물결우에 무수한 밤이 왕래하나
길은 항시 어데나 있고, 길은 결국 아무데도 없다.
아- 반딪
딧불만한 등불 하나도 없이
울음에 젖은 얼굴을 온전한 어둠속에 숨기어가지고……너는,
무언의 海深에 홀로 타오르는
한낱 꽃 같은 심장으로 침몰하라.
아- 스스로히 푸르른 정열에 넘처
둥그란 하눌을 이고 웅얼거리는 바다,
바다의 깊이 우에
네구멍 뚤린 피리를 불고…… 청년아.
애비를 잊어버려
에미를 잊어버려
형제와 친척과 동모를 잊어버려,
마지막 네 계집을 잊어버려,
알래스카로 가라 아니 아라비아로 가라
아니 아메리카로 가라 아니 아프리카로
가라 아니 침몰하라. 침몰하라. 침몰하라 !
오- 어지러운 심장의 무게우에 풀잎처럼 흩날리는 머리칼을 달고
이리도 괴로운 나는 어찌 끝끝내 바다에 그득해야 하는가.
눈 뜨라. 사랑하는 눈을 뜨라…… 청년아,
산 바다의 어느 동서남북으로도
밤과 피에 젖은 국토가 있다.
알래스카로 가라!
아라비아로 가라!
아메리카로 가라!
아프리카로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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