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와 詩魂 749

입김/박용하

입김/박용하 말할 수 없는 것들 말 안 해도 되는 것들 말하나 마나 한 것들 말하고 나면 후회할 것들 말 안 하면 우습게 보는 것들 기어코 말해야 하는 것들 굳이 말 안 해도 되는 것들 말만 많은 것들 한 말 또 하고 또 하는 것들 그 말이 그 말인 것들 말 들으나 마나 한 것들 말만 잘하는 것들 닳고 닳은 것들 말없이는 안 되는 것들 말로는 안 되는 것들 할 말 안 할 말 막하는 것들 말없이도 되는 것들 아예 말없는 것들 말이면서 노래인 것들 여벌이 없는 것들 이번 생만 있는 것들 수평선만 있는 것들 까진 무르팍만 있는 것들 심장인 것들 번개인 것들 말없는 손들 말없는 발들 말없는 입김들 숨들 목숨들

시(詩)와 詩魂 2020.12.27

散散하게, 仙에게

散散하게, 仙에게 -최승자 한밤중 문득 잠에서 깨어날 때 여기가 어디일까 하는 당혹감, 그리고 족쇄 같은 기억들을 이끌고 지나온 모든 길 모든 도시를 더듬어 마침내 거기가 이국 어느 도시의 기숙사 방임을 깨닫게 될 너의 한밤중. 내가 예감하는 너의 한밤중. 하지만 누가 누구를 구원할 수 있으랴. 위장이 간장을? 심장이 허파를? 고통의 물물교환은 말처럼 그렇게 쉽게는…… 일찌기 나는 흘러가는 것은 마찬가지라고 생각했었다 다른 사람들이 길이로 넓이로 흘러가는 동안 나는 깊이로 흘러가는 것뿐이라고. 그러나 깨닫고 보면 참으로 엄청나구나. 내가 파놓은 이 심연 드디어는 내 발목을 나꿔챌 무지몽매한 이 심연. 깊이와 넓이와 길이로 동시에 흐르기 위해선 역시 물처럼(바다!) 흘러가야 하지 않을까. 모든 숨을 다 내..

시(詩)와 詩魂 2020.12.27

버클리풍의 사랑 노래/ 황동규

버클리풍의 사랑 노래 -황동규 1. 내 그대에게 해주려는 것은 꽃꽂이도 벽에 그림 달기도 아니고 사랑 얘기 같은 건 더더욱 아니고 그대 모르는 새에 해치우는 그냥 설거지일 뿐. 얼굴 붉은 사과 두 알 식탁에 얌전히 앉혀두고 간장병과 기름병을 치우고 수돗물을 시원스레 틀어놓고 마음보다 더 시원하게, 접시와 컵. 수저와 잔들을 프라이팬을 물비누로 하나씩 정갈히 씻는것. 겨울 비 잠시 그친 틈을 타 바다 쪽을 향해 우윳빛 창 조금 열어놓고, 우리 모르는 새 언덕 새파래지고 우리 모르는 새 저 샛노란 유채꽃 땅의 가슴 간지르기 시작했음을 알아내는 것, 이국(異國) 햇빛 속에서 겁없이. 2. 그러나 이 시편들을 쓸 무렵 학교는 아직 방학이라 혼자 아파트에 남아 있는 날이 많았고, 아름답고 화려한 전망이 오히려 더..

시(詩)와 詩魂 2020.11.19

율포의 기억 /문정희

율포의 기억 -문정희 일찍이 어머니가 나를 바다에 데려간 것은 소금기 많은 푸른 물을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바다가 뿌리 뽑혀 밀려 나간 후 꿈틀거리는 검은 뻘밭 때문이었다 뻘밭에 위험을 무릅쓰고 퍼덕거리는 것들 숨 쉬고 사는 것들의 힘을 보여주고 싶었던 거다 먹이를 건지기 위해서는 사람들은 왜 무릎을 꺾는 것일까 깊게 허리를 굽혀야만 할까 생명이 사는 곳은 왜 저토록 쓸쓸한 맨살일까 일찍이 어머니가 나를 바다에 데려간 것은 저 무위한 해조음을 들려주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물 위에 집을 짓는 새들과 각혈하듯 노을을 내뿜는 포구를 배경으로 성자처럼 뻘밭에 고개를 숙이고 먹이를 건지는 슬프고 경건한 손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시(詩)와 詩魂 2020.11.19

나뭇잎 편지 /복효근

나뭇잎 편지 -복효근 누가 보낸 엽서인가 떨어져 내 앞에 놓인 나뭇잎 어느 하늘 먼 나라의 소식 누구라도 읽으라고 봉인도 하지 않았다 누군가의 손길이 펼쳐놓은 한 뼘 면적 위에 얼마나 깊은 사연이기에 그 변두리를 가늠할 수 없다 가장 소중한 것들은 이렇게 발음할 수 없다는 듯 가장 깊은 사랑은 다만 침묵으로만 들려줄 수 있다는 듯 글자는 하나도 없어 보낸 이의 숨결처럼 실핏줄만 새겨져 있어 아무나 아무렇게나 읽을 수는 없겠다 누구의 경전인가 종이 한 장의 두께 속에서도 떫은 시간들은 발효되고 죄의 살들이 육탈하여 소멸조차 이렇게 향기로운가 소인 대신 신의 지문이 가득 찍힌 이 엽서는 보내온 그이를 찾아가는 지도인지도 모른다 언젠간 나도 이 모습으로 가야 하겠다

시(詩)와 詩魂 2020.11.12

순수 원형을 찾아가는 존재론적 개진의 상상력

순수 원형을 찾아가는 존재론적 개진의 상상력 ㅡ오현정의 시세계 유성호, 문학평론가 1. 새로운 존재론을 지향하는 언어 오현정(吳賢庭) 시인의 아홉 번째 시집 『라데츠키의 팔짱을 끼고』(책만드는집, 2019)는, 문헌과 풍경, 말과 글, 사막과 초원, 산록과 바다, 시와 신화와 별자리, 정치와 역사와 종교, 우주와 시원(始原), 분단과 통일, 고대와 현대, 국경과 전쟁과 혁명의 흔적을 찾아나서는 커다란 스케일의 모험과 극한의 답파(踏破) 기록이다. 시인은 “햇살과 나무와 사람들은 구름으로 흐르고/내일의 꿈들은 상상보다 먼저 날아가”고 있는 순간을 지극한 상상력과 열정으로 담아내면서, “살아있다는 것은/먼저 간 사람의 몫까지 더 멀리 깊이 가보라는 행진곡”(「시인의 말」)이라고 은유한다. 이러한 선언에서 우..

시(詩)와 詩魂 2020.11.06

문인수 시에 나타난 생태 존재론적 사유

문인수 시에 나타난 생태 존재론적 사유 김유중 (한국항공대학교 교수, 문학평론가) 1. 생태론적인 관심에 대하여 평소부터 쭉 느껴온 바이기도 하지만, 문인수 시인의 시에는 다양한 생태론적인 관심사가 묻어 있는 것처럼 생각된다. 소박한 의미에서의 자연 친화적인 경향은 물론이려니와, 환경이나 문화를 둘러싼 다양한 생태론적 문제 의식과 그것의 시 ․ 공간적인 확장으로서의 민속, 혹은 설화적 세계에 대한 관심,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바탕으로 한 생태에 대한 근원적인 사유의 태도에 이르기까지, 그의 시편들은 한 마디로 우리 시대 생태시의 보고(寶庫)라고 해도 좋을 정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그의 시세계를 생태론적 관점에서 본격 조명한 논의가 없었던 점은 다소 의외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시(詩)와 詩魂 2020.11.06

시원(始原)과 몸의 탐구를 통한 형이상의 존재론

시원(始原)과 몸의 탐구를 통한 형이상의 존재론 -김세영의 시세계 유성호(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교수) 1. 대체로 시인의 의식이나 무의식에 숨겨져 있는 ‘원체험’은, 시인 특유의 사유와 감각을 지속적으로 생성시켜가는 상상적 거소(居所)가 된다. 아닌 게 아니라 대개의 시인들은 자신의 원체험을 부단하게 탐색하면서 자신만의 동일성을 변형적으로 구성해간다. 여기서 원체험을 변형하는 데 시인의 선명한 ‘기억’이 일정한 매개 역할을 하는 것은 꽤 자연스러운 일이다. 원래 기억이란, 자신이 겪은 경험이나 사건에 대한 충격적 잔상(殘像)에 의해 형성되고 보존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강렬한 기억으로 인해 결코 잊을 수 없는 일들과, 옅은 기억으로 인해 쉽게 망각되는 일들을 자신의 삶 속에 가지게 된다. 자신..

시(詩)와 詩魂 2020.11.06

인화되지 않은 음화陰畵의 기록

인화되지 않은 음화陰畵의 기록 ― 박성현 시의 존재론과 정신분석 이 도 연 박성현의 시는 존재자의 속살을 어루만지고 싶어 한다. 가령 바람의 파동을 감지하거나 덧없는 그 체취를 기꺼이 흠향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정인情人의 살결 하나하나를 헤아리는 애무의 손길처럼 바닥없이 깊고 부드러우며 한없이 관대하다. 그렇지만 속살은 좀처럼 맨얼굴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단단한 씨앗을 내장하고 있는 살구 열매의 과육처럼, 표면 아래로 스스로를 깊숙이 감춘 채 종적마저 가뭇없다.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그것의 흔적과 더불어 드문드문 우연히 돌출된 표지들뿐이다. 시적 인식으로 표현된 하나의 존재론으로서 박성현 시가 동원하는 구체적인 방법론이 무엇인지, 따라서 지대한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이 자리에 발표된 신..

시(詩)와 詩魂 2020.11.06

나무와 나비 혹은 찢음의 존재론

나무와 나비 혹은 찢음의 존재론-박방희의 시와 세계 김상환 (시인) 말년의 양식이 있다면, 그것은 적어도〈결을 거슬러 올라가는 무엇〉이다. 글렌 굴드와 장 주네에서 보듯이, 그것은 예술가의 주관성이 극도로 전개된 예술이며, 조화로운 완성이 아닌 어떤 충돌과 긴장이 표출된 예술이다. 주네를 읽는다는 것은 반항과 열정, 죽음과 재생이 서로 긴밀하게 얽힌 곳으로 끊임없이 돌아가는 것이자, 전혀 길들여지지 않은 특유의 감수성을 받아들이는 것이다(E·사이드,『말년의 양식에 관하여』). 박방희의 시를 읽으며 이런 생각을 떠올리는 것은, 일차적으로 고희가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현재의 시인으로, 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그의 언어와 세계 때문이다. 그의 산에는 낙타가 산다. 그의 사막에는 뱀이 뛰어다닌다. 그가 ..

시(詩)와 詩魂 2020.1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