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원(始原)과 몸의 탐구를 통한 형이상의 존재론
-김세영의 시세계
유성호(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교수)
1.
대체로 시인의 의식이나 무의식에 숨겨져 있는 ‘원체험’은, 시인 특유의 사유와 감각을 지속적으로 생성시켜가는 상상적 거소(居所)가 된다. 아닌 게 아니라 대개의 시인들은 자신의 원체험을 부단하게 탐색하면서 자신만의 동일성을 변형적으로 구성해간다. 여기서 원체험을 변형하는 데 시인의 선명한 ‘기억’이 일정한 매개 역할을 하는 것은 꽤 자연스러운 일이다. 원래 기억이란, 자신이 겪은 경험이나 사건에 대한 충격적 잔상(殘像)에 의해 형성되고 보존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강렬한 기억으로 인해 결코 잊을 수 없는 일들과, 옅은 기억으로 인해 쉽게 망각되는 일들을 자신의 삶 속에 가지게 된다. 자신의 육체 속에 새겨진 수많은 기억들은 의식과 무의식의 심층을 형성하면서 끊임없이 삶의 준거가 되어주는데, 이처럼 원체험의 파생적 변형을 돕는 기억은 경험적 구체 속에 웅크리고 있는 천혜의 생성적 토양이 아닐 수 없다. 그 점에서 ‘원체험’과 ‘기억’은 서정시의 제일의적 모태이자 필연적 내질(內質)이라 할 것이다.
김세영 시인의 세 번째 시집 ?하늘거미집?(천년의시작, 2016)은, 인간의 존재조건에 대한 탐구를 주밀하게 담고 있는 거대한 시적 형상으로서, 이러한 원체험과 기억을 매개로 하는 남다른 사유와 감각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결실이다. 우리 시단에 널리 알려져 있듯이, 그는 ‘의사 시인’으로서 해부생리학이나 정신분석의 경험과 식견을 인간 내면 탐구에 적극 활용하고 있다. 등단 10년을 채워가는 늦깎이 시인으로서, 그는 매우 열정적인 방법론과 독자적인 시적 공정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러한 과정을 통해 김세영은 일종의 상징 질서를 통해 현실 질서를 넘어서는 이른바 ‘너머(beyond)’의 시인으로 첨예하게 다가오고 있다. 이렇게 현실을 넘어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형이상적 의지로 충일한 그의 시편은, 우리 시단에서 보더라도 매우 드문 시적 공명(共鳴)을 가져다주는 세계를 구성하고 있다. 이제 그 세계 안으로 한 걸음 들어가 보자.
2.
먼저 김세영 시인은 자연 사물 속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깊이의 시학’을 추구하면서도, 보다 높은 정신적 차원을 지향하는 형이상(形而上)의 지경을 줄곧 탐색해간다. 그만큼 그는 심미적 자연을 섬세하게 돌아보면서도, 그저 풍경에 단순하게 도취되거나 몰입하기보다는, 그 안에서 가장 근원적인 삶의 이법(理法)을 발견하고 표현하는 시인이다. 동시에 그는 이러한 이법을 관통하면서 궁극적으로 가 닿아야 할 자신의 실존적 모습을 다양하게 상상하는 시인이기도 하다. 이때 ‘시’를 통한 실존적 투사(投射)가 선연하게 이루어진다.
적도의 심장이 화차처럼 이글거려도
내 몸이 녹아내리지 않는 것은
북해의 냉류가 등줄기를 냉각 코일처럼 감고 내려와
골짜기에 얼음골을 이루고 있음이다
산짐승의 울음소리에 달뜨지 않는 것은
정수리 위 오로라의 서기瑞氣가
온몸을 감싸고 있음이다
열기의 박동소리가 능선의 나뭇잎을 흔들어도
뜨거운 핏물이 윗계곡의 바위를 달구어도
암반의 고드름은 흰 건반처럼 가지런하다
저물녘 암벽의 견고한 그림자로
골짜기 저수지의 얼음판 위로
별빛의 징소리를 내며 건너오고 있다
열대야의 밤에도 남극의 펭귄처럼
불면의 맨발로 빙판 위에 서서
몽당날개지만 파닥이며 그를 기다린다.
― 「얼음골에서 견디다」 전문
이 시편에서 ‘얼음골’은 한기(寒氣)의 공간이라는 일차적 문맥을 넘어, 극한의 견인(堅忍)을 경험케 하는 시원(始原)의 공간으로 기능하고 있다. 시인은 “적도의 심장”과 “북해의 냉류”를 대비시키면서, ‘화차’와 ‘냉각 코일’의 이미지를 파생시키면서, 자신의 몸이 녹아내리지 않는 것이 골짜기의 ‘얼음골’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자신이 “산짐승의 울음소리”에 들썽거리지 않는 것 역시 “정수리 위 오로라의 서기瑞氣”가 자신의 몸을 감싸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몸에 내장된 ‘냉류/코일/瑞氣’의 연쇄적이고 점층적인 장치들이 시인으로 하여금 가지런한 “암반의 고드름”을 견지하게끔 한 것이다. 그러니 “열기의 박동소리”나 “뜨거운 핏물”이나 “열대야의 밤” 같은 뜨거움의 계열체들이 “골짜기 저수지의 얼음판”이나 “남극의 펭귄” 혹은 “빙판” 같은 차가움의 계열체들에 의해 하나 하나 지워지는 곳이 바로 시인이 상상하는 ‘얼음골’의 이미지이다. 그러한 이미지를 온몸에 감은 채 시인이 기다리는 ‘그’는, 마치 “태초의 어둠 속을 운행하던 율려의 기파”(「어둠의 결」)처럼, 시원의 이미지를 띠면서 시인의 몸과 영성을 가지런하고 차갑고 견고하게 만들어주는 존재론적 근원으로 부상한다. 어쩌면 그 이미지는 ‘시(詩)’를 닮기도 하였고, 김세영 시인이 궁극적 의미를 부여하고자 하는 ‘시인’의 모습에 가까워지기도 한다. 다음 시편은 어떠한가.
조각난 하늘만 쳐다보다가
시야가 좁아지고 흐릿해질 때는,
당산목 나뭇가지에 걸터앉아
그물을 손질하는 그를 찾아간다
바느질하는 그의 긴 손가락이
와이퍼처럼 내 각막을 닦아준다
낙엽처럼 떨어지는
조각 천을 모아 짜깁기해서
무채색의 칸칸에 미끼를 달듯
오감의 문양을 채워 넣어
공중에 그물 병풍을 세운다
구름떼로 몰려다니는
청어들을 그물로 포획해서 살은 발라 먹고
공갈빵 같은 부레와 숨통에 구멍을 내었던 뼈다귀는
그물집 한 구석에 쌓아 둔다
그와 공생하는 새들이 가져가서
그들 족속의 오랜 염원의 방식으로
허파 속에 꽈리로 채워 넣고
날개 죽지에 심으로 다져 넣어서
견비통을 견디며 천산산맥을 넘을 수 있다
피톨에 쇠 편자가 박혀
중력에 항거하다 버둥거리며
바람에 쓸려 다니지 않고, 차라리
절벽의 낙석처럼 수직으로 떨어지고 싶어
매일 밤 번지 점프에 중독 되어버린
몽상가를 새벽마다 건져 올리는 것도,
빛살무늬로 직조한 강보 같은
그의 그물 해먹이다.
― 「허공의 어부」 전문
이 작품은 허공에서 그물질하는 어부라는 독창적 형상을 통해 시인으로서의 자의식을 토로한 인상적인 시편이다. 시인이 찾아가는 ‘그’는, 앞에서 본 시원적 이미지를 다시 한 번 환기하면서, ‘시인’으로서의 메타적 형상으로 다가온다. 시야가 좁아지거나 흐릿해질 때, 시인은 “당산목 나뭇가지에 걸터앉아/그물을 손질하는 그”를 찾아간다. “바느질하는 그의 긴 손가락”은 혼탁해진 시인의 각막을 닦아주고, “오감의 문양을 채워 넣어/공중에 그물 병풍”을 세워주기도 한다. 여기서 “오감의 문양”은 그 자체로 감각적 언어예술로서의 ‘시’를 은유하고 있거니와, ‘그’와 공생하면서 ‘그’가 허공에서 낚아 올린 것들을 가져가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새들은 ‘시인’의 영혼을 닮아 있다. 그렇게 ‘그’는 공생과 공감과 공명의 사유와 감각을 통해 “바람에 쓸려 다니지 않고, 차라리/절벽의 낙석처럼 수직으로 떨어지고”자 하는 “몽상가를 새벽마다 건져 올리는” 사람이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빛살무늬로 직조한 강보 같은/그의 그물 해먹”은 김세영 시인이 생각하는 ‘시쓰기’의 공간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여기서 ‘허공의 어부’는, “격정과 몽상의 짐승으로” 살아가면서 “새로운 신화의 텍스트”(「지중해에서 변이하다」)를 써가는 시인의 형상이자, “붉은 기억의 문양들이,/수많은 벽돌들로 쌓은”(「알함브라」) 세계를 언어로 번안해가는 시인의 형상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니 이번 시집은 시인 스스로의 말대로 “허공의 해류를 떠도는//청어 떼를 품으려고 던진//어부의 그물망,//하늘 거미의 집”(「시인의 말」)인 셈이다.
이처럼 김세영 시인은 현실에 즉(卽)한 정신적 고투 대신, 현실을 넘어선 시원적이고 스케일 큰 시적 상황과 캐릭터를 통해 ‘시’에 대한 자의식을 선보인다. 곧 궁극적 자아 탐구로 남을 수밖에 없고 심미적 축약을 욕망할 수밖에 없는 ‘시’에 대해 적극적으로 사유하는 의식을 보여준다. 그래서 자연 사물을 통한 대상화(代償化)를 쉼 없이 수행하면서, ‘시인’ 자체에 대한 시원적 탐색에 무게중심을 현저하게 할애해간다. 그 점에서 김세영 시편은 ‘시’ 자체에 대한 경험적 고백이자 다짐의 예술이다. 여기서 시인은 도구적 언어를 다루는 사람을 뛰어넘어, 언어를 찾아 헤매는 존재로 몸을 바꾸게 된다. 우리는 김세영 시인의 이러한 감각이 언어의 표층적 기능을 넘어 언어 자체에 대한 심층적 탐색을 심원한 차원에서 수행하게끔 해갈 것이라고 믿게 된다. 그렇게 시인은 ‘몸’에 새겨진 강렬한 기억을 통해, 결핍과 충일이 끊임없이 교차하는 시인으로서의 자의식을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3.
두루 알다시피, ‘몸’은 인간 존재의 가장 기본적인 처소이다. 그것은 근원적으로 물질 세계에 연계되어 있고, 인간의 의식은 몸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우주적 섭리로서 ‘영혼의 집’을 구현해간다. 김세영 시인은 자신의 시학적 준거를 이러한 몸과 영혼의 상호작용과 연계시키고자 한다. 몸과 마음, 의식과 무의식, 소멸과 생성은 그렇게 호혜적으로 그의 시 안에서 확장해간다. 이 확장 과정을 통해 시인은 숭고하고도 심미적인 세계를 주조(鑄造)해간다. 아닌 게 아니라, 대체적인 시적 정서는 숭고하고 심미적인 방향으로, 그리고 균형과 조화를 이루는 방향으로 조직되어가는 속성을 지닌다. 하지만 현대시에서는 그것이 비속성 그대로를 노출하기도 하고, 일탈과 부조화로 나아가기도 한다. 하지만 김세영 시인의 상상력은, ‘몸’이 견지하는 결핍과 충일의 내력(來歷)을 충실하게 보여주면서, 참된 생명을 찾아가는 에너지로 충일한 채로 우리 시대의 숭고하고도 심미적인 시적 표지(標識)가 되어주고 있다.
누대의 생에 걸쳐서 보낸 송신을
수천 광년 거리에서 이제야 수신했다고
깜박거리며, 아포피스처럼 다가오지만
그냥 지나치고 말 것이라는 둥,
내 그림자 끄트머리에 잠시 머물다가
개기월식처럼 슬그머니 빠져나갈 것이라는 둥,
허블망원경으로 파파라치처럼 추적하는
나의 간구한 기도의 중력으로 끌려와
손아귀 속에 갇혀도, 타다 남은 운석가루만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갈 것이라는 둥,
유니버설 조인트로 두 손을 깍지 끼어 잡고
거부의 혀를 입 속에 가두고
너트 속에 볼트를 끼우듯 한 몸이 되어도
어느새 몸체 밖, 어둠으로 빠져나가는 너,
너를 호명하며 잡은 대나무가 접신으로 진동할 때
죽통 속의 마디진 파동들이 일제히 공명하여
폭죽으로 터져 나가는 찰나,
순간 진공이 된 통발 속으로 쏙 빨려 들어온 너,
한 덩이 몸빛으로
수천 광년을 달려오다
마지막 기층의 틈 속에서
무거운 몸은 태워버리고
날카로운 빛도 마모되어, 이제
대나무 속청의 떨림 같은
기파氣波로, 어둠 속 하늘거미집 같은
둥지를, 내 울림통 속에 짓지 않을래?
― 「너」 전문
시원적 형상의 ‘그’를 지나, 시인은 ‘너’라는 이인칭을 새롭게 불러온다. ‘너’는 “누대의 생에 걸쳐서 보낸 송신”을 이제 막 수신했다고 하며 다가오는 아포피스 같은 존재이다. 태양 빛을 삼키는 어둠의 뜻을 가진 소행성 ‘아포피스(Apophis)’는, 지구에 근접하여 운행함으로써 충돌의 가능성을 가끔씩 주는 존재이다. 하지만 ‘너’는 아포피스처럼 “그냥 지나치고 말” 것이며, 더러는 “내 그림자 끄트머리에 잠시 머물다가/개기월식처럼 슬그머니 빠져나갈” 것이고, 궁극에는 “나의 간구한 기도의 중력”에도 아랑곳없이 빠져나갈 것이다. 갖은 방법으로 육체를 결박하고 가두고 한 몸이 되어도 ‘너’는 어느새 “몸체 밖, 어둠으로 빠져나가는” 존재일 뿐인 것이다. 그러한 ‘너’를 호명하면서 시인은 어떤 파동들이 일제히 공명하며 터져나가는 찰나에 빨려 들어온 ‘너’를 발견한다. 그렇게 “한 덩이 몸빛”으로 그리고 “떨림 같은/기파氣波로” 존재하는 ‘너’는, 그야말로 “어둠 속 하늘거미집” 같은 둥지를 가져다주는 존재일 것이다. 이처럼 ‘너’는 커다란 우주적 스케일을 수반하면서, “보이지 않아도/줄기의 수관 속으로 올라온/향기가 아우라로 번져”(「코멜리나」)가는 궁극적 대상으로서의 의미를 띤다. “별자리에 갇혀있던 한 생의 잔상들”(「가야 여인」)이 그로부터 번져 나오기도 하는데, 이처럼 김세영 시인은 ‘나’와 ‘너’가 그저 수동적 관조자와 대상의 관계가 아니라 함께 삶을 나누어가는 공생적 관계임을 선언한다. 그만큼 그의 시편은 사물의 안쪽에 담겨 있는 우주적 상상력을 가득 펼쳐 보이고 있는 것이다.
당신의 탯줄 속으로
스며드는 안개의 젖빛,
저 몽유의 숨소리
하상河床의 수초를 헤치고
뻗어가는 붉은 연어,
저 팽팽한 원형질
이제야 허물을 벗는
부드럽고 촉촉한
단전의 속살
저 농밀한 살풀이
저 끈적한 점액
몸짓에 감겨
꿈틀거리는, 파닥거리는
흰 세포들의 군무
팔랑이는 나비들
날갯짓에 출렁이는,
저 원류의 물소리
끝없이 흘러도
다 호명할 수 없는
저 물결의 이름들
꿈속에서 보았던
아득히 젖은,
저 모성의 목소리!
― 「강」 전문
‘강’이라는 은유를 빌려 ‘당신’이라는 이인칭을 찾아 나선 시편이다. 시인은 “당신의 탯줄”에서 “몽유의 숨소리”를 듣고, ‘강’의 흐름을 역류해가는 붉은 연어들에게서 “팽팽한 원형질”을 발견한다. 이 ‘몽유’와 ‘원형’의 몸짓은, “이제야 허물을 벗는/부드럽고 촉촉한/단전의 속살”로 이어지면서 생성적 모태로서의 ‘강’을 도드라지게 해준다. 그렇게 자연 사물들이 이루어가는 “농밀한 살풀이”와 “군무”는 끈적한 점액과 몸짓으로 감싸여 있는데, 이렇게 꿈틀거리고 파닥거리고 팔랑이고 출렁이는 “원류의 물소리”는 곧바로 모든 존재자들을 생성시키는 “아득히 젖은,/저 모성의 목소리”일 것이다. 여기서 시인이 바라보고 듣고 만지는 ‘당신=강’은, 일차적으로는 “꽃잎의 젖은 그림자처럼/속살로 번져가는 검은 멍 자국”(「오래된 사월」)이겠지만, 궁극적으로는 “달빛에 투영된 꽃문양 화석 하나”(「딩아돌하」)이자 “안개를 헤치고 세워야 할 무상無相의 집”(「바람의 시제」)이기도 할 것이다.
물론 모든 사물은 일정한 시공간 속에서 있다가 그 물리적 유한성으로 인해 결국 사라져간다. 그 어떤 사물이나 현상도 어떤 곳에 순간적으로 존재했던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소멸의 물리 형식을 통해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유한한 기억 속에 웅크리고 있는 불모와 폐허의 형상으로서의 삶이다. 이러한 사유와 감각은 김세영 시학을 구성하는 원질(原質)이 되어 좀 더 심화된 형상으로 펼쳐져간다. 그렇게 김세영 시인은 ‘영원한 몽상가’로서, 인간과 자연, 몸과 마음, 생성과 소멸이 불가피한 공존 관계임을 역설해간다. 이 모든 것이 시원과 몸을 근간으로 하는 감각에서 온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4.
이렇게 ‘그’라는 삼인칭과 ‘너=당신’이라는 이인칭을 모색하던 김세영 시인은 궁극적으로 일인칭으로서의 자기 탐구에 자신의 시를 바쳐간다. 시인은 희미해져버린 과거를 재현하는 ‘기억’의 원리를 일관되게 구현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자신의 상처를 들여다보는 성찰의 모습이기도 할 것이다. 그의 시학에서 기억과 성찰은 이처럼 한 몸으로 움직여간다. 일찍이 파스(O. Paz)는 ?활과 리라?에서 “일상적인 개념에서 시간은 미래를 지향하는 현재이지만 숙명적으로 과거에 닻을 내리는 미래가 된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김세영 시편 안에는 이러한 속성 곧 과거를 말하면서도 그 안에 미래를 향한 치유의 에너지가 담겨 있는데, 이제 우리는 그 시간 형식으로서의 절절한 자기 고백과 탐구 과정을 김세영 시학의 원형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나는 자전거를 탈 줄 모른다
나의 부끄러운 일급비밀이다
걸음마도 늦게 시작한 선천성 평형 장애자이다
어릴 적 세발자전거를 타다
두발자전거로 승급을 못한 것이다
무릎이 몇 번 깨어진 후 날기를 포기한 새가 되었다
어른이 되어서도 그 세발자전거를 남몰래
세반고리관에 장착하고 다니고 있다
양재천 길을 걸어가면 나를 앞질러서
바람처럼 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들이 부럽다
가끔 외발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을 보면 신기롭다
자전과 공전을 하는 세상에서
센스 없고 균형감각 없는 장애를 숨기고
중심 잡으며 지금껏 살아오느라 힘이 들었다
나의 기특한 세발자전거도 이제는 낡고 닳아서
베어링의 볼이 빠지고 체인이 헐거워져서
요즈음은 이석증과 이명으로 어지러울 때가 많다.
― 「자전거 타기」 전문
시인은 자전거를 탈 줄 모른다는 “부끄러운 일급비밀”을 털어놓는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걸음마도 늦게 시작한 선천성 평형 장애자”라는 고백을 이어간다. 마치 “선천성 심실중격결손증인 나는/검은 입술의 신생아 때부터/허기가 질 때마다 붉은 꽃잎을 따먹는다”(「흑장미」)라는 고백처럼, 실제적 층위의 자기 연원(淵源)을 드러내는 순간이 아닐 수 없다. 그렇게 시인은 “무릎이 몇 번 깨어진 후 날기를 포기한 새”처럼 “세발자전거를 남몰래/세반고리관에 장착하고 다니고” 있을 뿐이다. 바람처럼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순간적으로 부럽기는 하지만, 자신은 오히려 “자전과 공전을 하는 세상”에서 장애를 숨긴 채 중심을 잡고 살아온 삶에 대해 깊은 연민과 자긍(自矜)을 느끼고 있다. 그런데 세반고리관 안에 장착하고 다니던 그 “기특한 세발자전거”도 이제는 낡고 닳아버렸다. 그 낡고 닳은 시간 끝에 찾아온 “이석증과 이명”은 ‘자전거 타기’ 대신 ‘자전거 없이 중심 잡기’를 해온 시인이 최근 겪고 있는 병증(病症)이겠지만, 그 귓속의 울림처럼, 그것은 “바람에 날려가는 것이 아니라/자신의 가벼움으로 올라가는” 동시에 “중력에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자신의 무거움으로 내려가는”(「해우」) 자유로운 삶에 대한 긍정의 고백이기도 할 것이다.
숨길도 얼어붙어
빙폭으로 드리워진 하늘자락
유성처럼 미끄러져 내려오는
천 개의 빛살을 가진 한 사람
남산의 돌계단을 내려오는 그가
방전된 시간바늘이 온몸에 꽂혀
달빛에 번뜩이는 고슴도치 같네
어긋나 지나쳐버린
그때 그 사람을 다시 만날 수 있을지
천년 묵은 달이 길 위에 영사하는
옛 도성의 흔적을 더듬어 가네
달하 노피곰 도다샤
어귀야 머리곰 비취오시라
아직 육탈하지도 않은
설익은 그리움에 몽유하는
나를 보고, 마애불이 설핏 웃는구나
동 트자, 혼백의 그림자만
향나무 밑에 남겨두고
황망히 돌아가는 저 사람
어긔야 즌데를 드디욜세라
어긔야 어강됴리
나뭇가지에 걸린 청동거울,
그 속에 비친 나와 뒷모습이 닮았구나
어귀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 「천년 묵은 달아」 전문
백제 가요 「정읍사(井邑詞)」의 서사적 흐름을 좇아가면서 ‘나’의 모습을 탐색하고 있는 시편이다. “빙폭으로 드리워진 하늘자락”과 “천 개의 빛살을 가진 한 사람”을 대조적으로 설정한 이 시편에서 ‘나’는, “어긋나 지나쳐버린/그때 그 사람”에 대한 그리움을 강렬하게 토로한다. “아직 육탈하지도 않은/설익은 그리움”에 몽유하는 ‘나’는, “혼백의 그림자만/향나무 밑에 남겨두고/황망히 돌아가는 저 사람”에게 상상적으로 가 닿으려는 ‘시인 김세영’의 비유적 분신이 아닐 수 없다. 그렇게 “나뭇가지에 걸린 청동거울” 속에 비친 ‘나’의 뒷모습은, 마치 윤동주의 「참회록」에서처럼, “어느 隕石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슬픈 사람의 뒷모양”으로 다가온다. 이 슬픔과 그리움은, 앞에서 본 ‘선천성 평형 장애/심실중격결손증/이석증/이명’ 등을 지니고 살아온 이의 자기 긍정 방법이요, “다 버리지 못한, 인화성 강한 기억들이 몸속 구석구석에 쌓여 있는”(「흑해에서 사르다」) 것에 대한 정서적 대응 방법일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최대 진폭의 공명으로/온 척추 마디마디가 떨리는”(「곱사등이의 노래」) 기억에 대한 자기 긍정의 탐구 의지가 발현된 결실일 것이다.
이처럼 김세영 시편은 ‘나’라는 일인칭에 의해, 더 정확히는 그 일인칭의 정서적 슬픔과 그리움에 의해 포착되는 대상들에게 자신의 경험과 기억을 저며넣는 방식으로 씌어진다. 대상을 대상 자체의 특성으로 묘사하고 사물 스스로 주체가 되게 하는 어법과 그의 시는 근원적으로 차원이 다르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한데, 그의 시편은 ‘나’의 경험과 무의식을 사물과의 우의적(寓意的) 유추 관계 속에서 써가는 방법에 의해 씌어지고 있고, 궁극에는 풍경을 전경화한 후 거기에 자신의 감각과 정서를 병치시키는 작법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5.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몸’은 인간을 구성하는 가장 구체적이고 감각적인 물리적 실체이자 모든 문화가 생성되는 최초의 지점이다. 하지만 그동안 ‘몸’은 ‘이성(정신)’에 비해 현저하게 그 중요성이 떨어지는 범주로 평가절하되어왔다. 그러다가 근대가 억압해온 가치론적 범주로서의 ‘몸’은 서서히 부활하게 된다. “몸을 통한 세계의 무한한 해석 가능성”을 강조했던 니체(F. Nietzsche)를 연상시키는 이러한 패러다임 전환은, 마이너리티의 목소리로 존재하던 육체성의 발현을 도우면서 당당하게 자신만의 역동적인 인식론적 표지를 그려가게 된다. 이러한 움직임은, 말할 것도 없이, 그동안의 인류 역사가 ‘몸’에 대한 억압의 역사이자 이성 편향의 불구적 역사였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또한 이는 가장 구체적인 원형적 실체인 ‘몸’이 근대의 항구적 타자로 몰려 있던 역사에 대한 재발견을 통해 인간의 ‘지워진’ 역사를 복원하려는 기획이며, 억압된 육체에 대한 기호화의 과정이기도 하다. 김세영 시학의 미적 차원은, 이러한 ‘몸’의 미학을 복원하는 데 무게중심을 할애하고 있다는 점에 그 독창성이 있다 할 것이다.
절지동물보다 마디가 많다
그들보다 무게가 많아
아파서 못 쓰게 된 마디가 많다
직립으로 걸을 때부터
발가락 마디마디들
발목, 무릎, 고관절들이
크랭크축처럼 움직여 왔다
앞발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손가락 마디마디들
손목, 팔꿈치, 어깨 관절들이
삼단노선의 노잡이처럼 움직여 왔다
손가락 마디를 꺾으며
캐스터네츠 소리를 낸 적도 있었지만
이제는
팔을 들면 어깨마디에서
일어서면 무릎마디에서
뚝,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가 난다
꼬리뼈마디를 텔로미어처럼 깎아내는
손목시계의 초침의 칼날이
매장된 기억의 무덤을 파헤쳐서
소리 뼈마디 하나를 보여준다
내 손목을 놓지 않으려던 굳은 마디의 손목이
무게를 견디지 못해 부러지는 노송의 가지처럼
뚝, 꺾어지며 들렸던, 그 마지막 소리를,
직립원인이 된지도 백만 년이 훨씬 지났는데도
아직도 서툰 직립보행으로 발목이 잘 접질리고
등뼈마디마저 가끔 삐끗하여
유인원의 보행법이 그리울 때가 있다
짧고 마디 진 다리로 긴 몸통을 받쳐 들고
산악열차처럼 올라가는 절지동물의 보행법을
깔딱고개에서 흉내 내어 볼 때가 있다
절지동물보다 마디가 많다
그들보다 오래 살아
굳어서 못 쓰게 된 마디가 많다.
― 「마디」 전문
제9회 미네르바 작품상 수상작이기도 한 이 시편은, ‘마디’라는 은유를 통해 인간 ‘몸’의 철학적이고 미학적인 해석을 도모한다. 이는 시인 고유의 인생론적 성찰 과정을 병리학적 상상력으로 그려낸 가편(佳篇)으로서, 이때 작품 제목 ‘마디’는 우리 몸을 구성하는 ‘마디’이자, 우리 삶을 구성해온 시간 단락으로서의 ‘마디’이기도 하다. 흡사 크랭크축처럼, 노잡이처럼, 오랫동안 움직여온 시인의 ‘마디’는, 이제 아파 못 쓰게 된 것이 많고, 여기저기서 “뚝,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가 날 정도로 낡았다. 하지만 그 안에는 “손목시계의 초침의 칼날이/매장된 기억의 무덤을 파헤쳐서/소리 뼈마디 하나를 보여준”다는 묵시적 경험이 날카롭게 들어 있지 않은가. “노송의 가지처럼/뚝, 꺾어지며 들렸던, 그 마지막 소리”는, 그 점에서 시원을 그리워하는 노경(老境)의 한 자연인이 들려주는 근원적 목소리이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오래 살아/굳어서 못 쓰게 된 마디”는 인간의 불가피한 존재조건이자, 더없이 소중한 삶의 결실이기도 할 것이다.
이처럼 김세영 시편은 매우 신선한 상상력과 언어를 통해 오랜 물리적 기억을 구체적 이미지로 정교하게 변환시키는 과정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시간의 흐름 속에 놓인 풍경과 내면의 결속 과정을 아름다운 표상으로 잡아내면서, 존재와 시간의 관계를 한결 더 심미적인 “기억의 파동”(「첨성瞻星」)으로 형상화해간다. 모두 ‘몸’의 구체적 이미지와 생명을 존중하는 시정신이 깃들인 세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때 그는 “성벽이 다 녹아내리기 전에/날개의 문양으로 재현하기 위해”(「나비의 창세기」) 시를 써가는 미학적 사제(司祭)가 된다.
바다와 사막,
그 끝없는 전선
바다의 파도는 모래를 밀어 올리고
사막의 바람은 모래를 쓸어 내린다
그 전선의 해안에
나미브의 양서류가 산다
아득한 시절
양수 속의 태아처럼 살았지만
아가미가 굳어
어깨뼈가 된 지 오래인지라
바다로 돌아갈 수 없다
새벽안개 속, 소수스플라이의
붉은 모래언덕 위의 스테노카라처럼
물구나무서지도 못한다
수십 개의 위버 새둥지를 품은
에보니 나무처럼 수십 미터 깊이
모래 속으로 뿌리내리지도 못한다
제의를 올리듯 앞발을 치켜들고
해 뜨는 수평선과
해 지는 사구의 능선을
방울눈으로 바라본다
축복처럼 비가 내려
잠시 황무지에 풀이 돋을 때,
페어리 서클 안에 들어가
그의 어깨뼈를 묻는다
바다와 사막이 함께 잠드는
태반 같은 무덤이 된다.
― 「나미브의 양서류」 전문
시인이 경험적으로 답사하고 있는 이 “바다와 사막,/그 끝없는 전선”은 아마도 삶을 은유하는 공간적 형상일 것이다. 그렇게 ‘바다/사막’ 혹은 ‘파도/모래’의 상호작용은, 그 자체로 그 전선(戰線)으로서의 삶을 잘 보여준다. “아득한 시절/양수 속의 태아”처럼 살기도 하였고 이제는 아가미가 굳어 바다로 돌아갈 수 없는 해안의 양서류처럼, 시인은 “모래 속으로 뿌리내리지도” 못하는 가파르고도 불모적인 인간 보편의 삶을 노래해간다. 그래서 그것은 시인 자신의 삶이라기보다는, 축복처럼 비가 내려 잠시 황무지에 풀이 돋는 순간처럼, “바다와 사막이 함께 잠드는/태반 같은 무덤”으로 비유되는 인간 보편의 존재조건에 대한 적실한 은유로 다가오는 것이다. “새벽별 하나가/혼불 한 조각을 화살촉에 붙여”(「해맞이」) 지상으로 쏘는 것처럼, “새벽 독경소리가, 세상의 첫 소리로 들리기 시작하는”(「일주문」) 것처럼, 거대한 시원의 시공간을 펼쳐가면서 시인은 생명의 경이로운 순간들을 노래하는 것이다.
6.
지금까지 우리가 읽어왔듯이 김세영의 이번 시집은, 시원과 몸의 탐구를 통한 형이상의 존재론을 밀도 있게 보여준 창의적 결실이다. 형이상적 의지로 충일한 그의 시편들은 우리 시단에 매우 드문 시적 공명을 전해주는데, 그는 그렇게 심미적 자연을 섬세하게 돌아보면서도 그 안에서 가장 근원적인 삶의 이치를 적극 발견해간다. 자신이 써가는 ‘시’에 대한 깊은 자의식을 토로하면서도, 그는 ‘영원한 몽상가’로서 인간과 자연, 몸과 마음, 생성과 소멸의 관계를 통합적으로 역설해간다. 이 모든 것이 시원과 몸을 근간으로 하는 감각에서 온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김세영 시편은 ‘나’라는 일인칭의 정서적 슬픔과 그리움을 통해 대상들을 묘사하면서, ‘나’의 경험과 무의식을 사물과의 유추 관계 속에서 써가는 방법을 견고하게 유지해간다. 김세영 시학이 가 닿은 이러한 차원들은 시원과 몸에 대한 지극한 사유와 감각이 거대한 시공간이 펼쳐내는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생명의 경이로운 순간들을 노래하는 이 형이상의 표현이 우리 시단을 한동안 밝혀줄 것이라고 기대하게 된다. 그리고 다음에 펴낼 네 번째 시집에서는 이러한 지향이 더욱 영성과 관련된 깊이를 첨예하게 획득해가지 않을까 예감하게 된다. 아닌 게 아니라 이번 시집은, 그러한 진경(進境)을 가늠케 해줄 김세영 시학의 중요한 ‘마디’가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번의 ‘마디’를 딛으면서, 김세영 시학이, 더욱 심원하고 심미적인 형상과 언어로 이월해가기를, 마음 모아 기원해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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