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와 나비 혹은 찢음의 존재론-박방희의 시와 세계
김상환 (시인)
말년의 양식이 있다면, 그것은 적어도〈결을 거슬러 올라가는 무엇〉이다. 글렌 굴드와 장 주네에서 보듯이, 그것은 예술가의 주관성이 극도로 전개된 예술이며, 조화로운 완성이 아닌 어떤 충돌과 긴장이 표출된 예술이다. 주네를 읽는다는 것은 반항과 열정, 죽음과 재생이 서로 긴밀하게 얽힌 곳으로 끊임없이 돌아가는 것이자, 전혀 길들여지지 않은 특유의 감수성을 받아들이는 것이다(E·사이드,『말년의 양식에 관하여』). 박방희의 시를 읽으며 이런 생각을 떠올리는 것은, 일차적으로 고희가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현재의 시인으로, 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그의 언어와 세계 때문이다. 그의 산에는 낙타가 산다. 그의 사막에는 뱀이 뛰어다닌다. 그가 거처하는 방구들에서 새어 나오는 연기는 새로운 길이자 사라지는 힘이다. 그는 분뇨에서 생명의 꽃을 피워내며, 그의 시는?남은 것들의 쓸쓸한 노래(와) 고단한 생애?를 이야기한다. 거스름을 말한다. 이 경우 거스름의 정신은 부정을 위한 부정이 아닌, 순리에 기반해 있다. 그의 시에는?풍경 하나에 우주의 비밀을 읽어내고/ 어느 한 순간의 풍경 속에 깃든 영원?(「풍경風景에 관하여」)이 있다. 생명과 우주, 경계와 나무, 그리고 길의 모티브가 지배적인 이번 시집『나무 다비』에서 크게 돋보이는 것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매 순간 뛰어넘으며 원초적인 생명 의지生命意志를 구현하는 존재”(「뛰어 다니는 뱀」)의 비밀 내지는 “온힘을 다해 가지를 하늘로 뻗으며 자신의 生을 이어가려고 애” (「죽은 나무를 노래하다」)쓰는 시인의 의지와 표상이다.
“처음 세상이 생길 때 속으로 끓던 그 무엇이 위로 치솟았을 것이다.” 이렇게 시작되는 시「山에는 낙타가 산다」를 유추해 보면, 시는 갈망이다. 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상상과 에너지다. 시인의 산에는 낙타가 산다. 전체와 무한을 향한 갈망은 내면의 융기로 인한 산과 봉우리, 구릉과 산중 호수를 낳는다. 호수에 고인 물의 기쁨, 아니 슬픔은 천상의 새와 달과 별에 가 닿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가 닿지 못하는 하나의 심연이다. 그러다가도 시인에게는 광야와 평원을 내달리는 한 필의 말이 있다. 줄기차게 이어지는 산과 맥이 있다. 여기서 산이라는 사막은 인간의 실존과 대면하는 장소다. 사막의 낙타에는 업보처럼 스스로 걸머지고 가야할 산이 있다. 열사의 태양과 고독이 있다. 그런 초인으로서 시인은 “안으로 절벽을 감춘 山”(「민둥산에서 하룻밤」)의 아들이다. 시를 쓴다는 것은 절망 속에서 희망을 갖는 일이며, 고통 속에서 생의 환희를 맛보는 일이다. 시집『나무 다비』에는 이러한 사유와 감각을 기반으로 한 정신과 자연, 인간과 우주, 침묵과 소리, 말의 예지와 힘이 잘 드러나 있다. 그럼 먼저 정신과 자연에 관한 시편을 보기로 하자.
북극해를 떠다니는 軍艦처럼 겨울 잿빛 하늘 떠다니던 검은 옻빛의 새들이 높다란 겨울나무에 다닥다닥 붙어 앉아 장엄미사를 드리고 있다. 울긋불긋 황칠한 인디언들이 조상의 魂을 불러내는 거룩한 의식을 집전하듯 바람 불어오는 쪽으로 머리를 두고 찬바람을 맞고 있는 것은 北風에 빗질하며 제 정신을 벼리는 것이리라.
무슨 나막신 귀신같이 앉아서 일제히 한 곳을 보지만 무얼 보는 것은 아니다. 막연히 북쪽 바람 부는 쪽을 향하고 있어 바람 부는 곳이 고향인가 싶으나 혹한의 極地를 그리워함이리라. 까마귀의 검정빛이 푸른빛을 띠는 것은 스스로 독을 머금으며 서슬 푸르게 氣를 단련하고 스스로 매질한 흔적일 뿐,
-「까마귀, 정신을 벼리다」전문
이 시의 중심 모티브인 까마귀는?무슨 나막신 귀신?이거나 천형天刑의 새가 아니다. 그것은 검은 옻빛의 사제가 하느님에게 드리는 제의로서, 아득한 그 옛날 사람들의 혼이 서려 있다.?지상에서 가장 순정한 새?(「枯死木」)로서 까마귀는 정신을 벼리고 혹한의 절대 극지를 동경한다. 서슬 푸른 기운으로 스스로를 단련하며 무두질한다. 까마귀가 있는 겨울 산과 나무는 높고 속이 훤히 들여다보인다. 거기 떼 지어 앉아 미사를 드리고 있는 모습에서 까마귀의 빛은 어느 하나가 아니다. 현묘한 까마귀는 새벽의 별빛처럼 검푸르다. 검은 옻빛의 새 까마귀는 거울의 이미지를 갖고 있다. 그 거울-물은 검기 때문에 능히 비출 수 있다. 이런 자태와 신비로운 모습은 거저 주어진 게 아니라, “바람 불어오는 쪽으로 머리를 두고/ 찬바람을 맞(으며)/ 北風에 빗질”한 인고의 결과이다. 바람 부는 곳이 새의 고향이라면, 해가 비치고 에너지가 차고 넘치는 곳이라면 어디든 까마귀의 정신적 거처가 된다. 이런 까마귀의 이미지가「그루터기만 남은 나무」(“어떤 집 뒤꼍에 큰 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어느 날 웬 까마귀 한 마리가 날아와/ 제일 높은 가지 위에 앉아 우는 것이었다 ...... 그리고 얼마 안 있어 그 밑동마저 그루터기만 남기고 베어졌다// 까마귀란 놈이 거기까지 와서 울었던 것이다”)에 오게 되면, 묘오한 울음과 울림을 자아내게 된다.
정신의 끝간 데에는 까마귀의 울음과 빈 나무의 울림-공명이 있다. 시집『나무 다비』에는 나무 시편들이 많이 눈에 띤다. 표제작인「나무 다비茶毘」(“나무는 태생적으로 선골이다./ 줄기 하나로 시작한/ 나무의 길은 하늘로 가고/ 천수관음의 손으로 우주를 만진다. ...... 마침내 한 짐 화목으로/ 스스로 다비 한다.”)에서는 나무의 선禪과 도道를 말하고,「그루터기만 남은 나무」에서는 나무의 희생과 자비를,「旦山 갈참나무」에서는 나무의 비밀(“나무는 제 안으로 들어오는 모든 길을 감추고 있다.”)을,「枯死木」에서는 하늘을 우러러 수도하는 고승의 모습을,「임고서원 은행나무」에서는 시절을 거역하는 푸른 정신을 말하고 있다. 그런가하면, 그에게 정신은「낭」(“一筆揮之 거침없던 운필, 한 호흡에 딱 멈추고 스스로를 거둔 자리. ...... 아, 절체절명의 순간에 존재를 거둔 자리.”)에서 보듯이, 위험천만이며 경계의 의미가 있다. 문명의 속도와 욕망의 길에 서 있는 우리는 그저 한 호흡만이라도 늦추고, 스스로를 거둘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절체절명의 순간에 하나 뿐인 존재를 거둘 수 있다. 그 (무)의식의 단애가 낭이다. 다음은 좀더 미시적인 읽기와 깊이가 요구되는, 침묵과 소리의 시편이다.
모든 발 달린 것들이,
금방이라도 쏟아지듯
곧장 구를 것 같은 바퀴들이
붉은 신호등을
바라보며
가쁜 숨을 내쉬며 잠시 멈춘 사이
일사불란한 아, 그 모든 멈춤 위로
나비 한 마리
팔랑팔랑 날아간다
우주가 운행을 멈춘
그 틈새 사이로
-「날아가는 나비: 사람들은 모두 기둥이 되어 우람하게 서 있고 그 빽빽한 기둥 사이를 나비 한 마리가 팔랑팔랑 지나가고 있었다」전문
오시프 만델스탐(1891~1938, 러시아 시인)의 말처럼, 시인은 공기를 훔치는 사람이다. 박방희에게 공기의 시학은 나비의 이미지로 드러나 있다. 없는 듯 있는, 작고 가벼운 나비 한 마리가 하늘을 난다. 지상의 모든 발 달린 것들이 붉은 신호등 앞에 멈춰 섰을 때, 경계 너머 저만치 나비가 날아간다. 나비는 사람과 기계들이 숨을 고르는 사이, 우주가 운행을 멈춘 사이, 우람한 기둥과 기둥 사이를 마음껏 유영한다. 모든 멈춤 위에는 고요라는 움직임이 있다. 그리고 동적인 이미지에서 정적인 이미지로의 전개에는 자연의 질서와 리듬이 존재한다. 나비는 나를 부정하고 무화시키는 순간 발현되는 사이 존재다. 그 나비의 현실과 환상의 세계에서 나는 그야말로 탄사를 내지르지 않을 수 없다. 두 발로 걷는 인간, 바퀴들의 로망은 지상이라는 굴레를 벗어나는 데에 있다. 길 잃은 나비, 아니 자유로운 나비가 허공을 난다. 그것은 곧 시인의 꿈이자 세속에서의 초월이다. 나비蝶는 이음接인 동시에 승화의 국면을 갖는다. 다음 시편은 인간과 우주 혹은 찢음의 존재론에 속한다.
꽃 꺾다가 넘어져 무릎이 까졌다. 애써 피운 꽃 꺾는다고 화난 땅이 무릎에다 고만한 꽃을 피워 놓았다. 무릎의 살을 찢고 핀 붉은 꽃처럼 모든 꽃은 몸을 찢어 핀다. 풀이든 나무든 구름이든 자기 몸과 살을 찢어 피우는 것이다. 나뭇가지를 찢고 나오는 순 묵은 살 부풀려 툭, 툭, 터지는 꽃 모두 제 몸을 열고 나온다. 생살 찢는 아픔이 있어 꽃향기 아련하고 피와 살은 물들어 고운 것이다.
작은 씨앗들처럼 우주라는 것도 처음 생길 때 그 몸을 찢고 해와 달과 별이 태어난 것이고 사람의 거룩한 꽃인 아기도 어미의 몸을 열고 나와 어미 가슴에서 솟아나는 하얀 피를 먹고 자라 사람이 되는 것이다.
-「무릎에 핀 꽃」전문
이 시는 우주에서 인간의 존재론적 지위를 드러내고 있다. 꽃이 새롭고 아름다운 것은 어두운 땅을 뚫고 나온 데에 있다.?나뭇가지를 찢고 나오는 순?과 몸을 찢어 피어나는 꽃이 그렇듯 자기 몸과 살을 찢어 피우지 않는 꽃이,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생살 찢는 아픔?으로 꽃의 향기가 더욱 깊고 멀다면, 아픔의 문지방은 둘을 잇는다. 그 결과?피와 살(이) 물들어?저리도 고운 법이다. 몸을 연다는 것은 몸을 찢는다는 것, 몸꽃이 핀다는 것이다. 상처가 풍경으로 전화轉化하는 순간으로서, 무릎에 핀 꽃이다. 이 경우 무릎은 신체의 이음Fügung이다. 그 이음의 자리에 꽃이 핀다. 자연 현상의 신비와 아름다움은 시의 후반에 접어들게 되면 아기가 등장한다. 아기는 더 이상의 아기가 아니라,?사람의 거룩한 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아기는 어원상 말할 수 없는in-fant, 심오한 존재로서 현玄의 사유 이미지에 속하기 때문이다. 작은 씨앗처럼 우주가 처음 생겨났을 때의 카오스를 한번 떠올려 보라. 아기는 생명의 근원인 우주의 몸을 찢고 나온 해와 달 그리고 별이 아니던가. 그런가하면, 찢음의 존재와 언어에는 반反의 사상, 역逆의 정신이 있다. 별안간 침묵과 소리의 관계가 궁금해진다.
빈집에는 소리가 산다. 그것도 빈 소리가 산다. 문 여닫는 소리 기침소리 시렁에 그릇 달그락거리는 소리 숟가락질 소리 화로에 부삽 놓는 소리 뻑뻑 담뱃대 빠는 소리 벽 따라 무럭무럭 연기 오르는 소리 두런두런 말소리 간간 한숨소리 혀 차는 소리 우물에 두레박 내리는 소리 마당 쓰는 소리 해거름 때 땅거미 지는 소리 뒤란에 감 떨어지는 소리 마당에 고추 마르는 소리 다듬이질 소리 디딜방아 찧는 소리 여물 써는 소리 소 방귀 소리 소댕 여는 소리 마루 건너가는 발걸음 소리 빛과 그늘이 자리 바꾸는 소리 뒷바라지 문에 햇살 튀는 소리 못에 녹스는 소리 비오기 전 청개구리 울음소리 병풍 속 장닭 우는 소리 빈집이 내는 빈 소리 빈 것들의 소음.....
모든 고요가 소리를 내듯 시간 또한 소리를 내고 모든 비어 있는 사물들도 소리를 낸다.
-「빈집에는 빈 소리가 산다」전문
박방희의 시에는 농경 사회의 전통과 습속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특히 소리의 상상력과 관련하여?시렁에 그릇 달그락거리는 소리, 화로에 부삽 놓는 소리, 우물에 두레박 내리는 소리, 마당에 고추 마르는 소리, 다듬이질 소리, 여물 써는 소리, 마루 건너가는 발걸음 소리?등이 그렇다. 시인의 기억과 상상 속에 존재하는 소리의 세계는 부재의 시간과 장소를 더욱 아련하고 새삼스럽게 만든다. 그런 그것이?땅거미 지는 소리?와?빛과 그늘이 자리 바꾸는 소리?에 와서는 정서의 깊이와 음영은 물론, 감각의 형이상학으로까지 발전하여 더욱 새롭고 이채를 띤다. 그의 빈집은, 비어있음으로 충만한 시적 공간은 온통 고요가 지배하고 있다. 모든 고요는 발길을 멈추고 자신의 말과 소리를 드러낸다. 시간과 사물들은 어디에나 있지만, 누구라도 보고 듣는 건 아니다. 고요라는 말과 소리가 이토록 아름답고 유의미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사제인 안셀름 그륀Anselm Grün에 의하면, 고요는 깨어있음 그 자체로서 하느님을 소유할 수 있는 순간을 말한다. 가장 심오한 신체와 영혼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가 울려 퍼진다(?깊고 심오한 가슴에서 울려 퍼지는/ 가장 아름다운 소리?,「종소리」). 시인에게 있어 고요는 “안이 더 깊고 큰 山”으로서, “黙言精進이 쌓은 내공(이자) 無心無量의 경지”(「민둥산에서 하룻밤」)에 다름 아니다. 다음은 그 연장선에서 살펴 볼 말의 예지와 힘에 관한 시편이다.
암자로 오르는 길 野生의 깨들이 군데군데 자라 허리까지 차오른다. 아무도 베어들이지 않으니 소문처럼 무성하다. 저대로 나서 목탁 소리나 듣고 자란 깨를 누가 따로 추수하랴. 그냥 그 자리에 꼿꼿이 서서 잎은 지고 대궁은 마른 채로 바람에 흔들거린다. 명상에라도 빠진 것일까, 하도 기척 없이 고요하여 슬쩍 옆구리를 쳐 본다 그러자 涅槃에라도 든 듯 눈감고 흔들거리던 늙은 깨가 자르르― 말씀을 쏟아 놓는다. 말씀의 깨알들, 깨알 같은 말씀들……. 신기하고 놀라와 툭, 한 번 더 건드려 본다. 다시 자르르―. 열반 중인 깨는 여전히 지혜의 말씀, 기름진 말씀의 알맹이들을 쏟아 놓는다. 마른 풀잎과 단풍 진 낙엽들에 떨어지는 말씀은 經 읽는 소리와 같다. 아니, 쏟아지는 깨알 하나하나가 바로 經이고 法이다. 고소하고 오묘한 法文, 거죽을 때려 속까지 울리는 명징한 말씀의 法會가 지금 한창이다.
이놈의 늙은 깨가 선 채로 涅槃하더니 이제 舍利까지 내 놓는구나!
-「암자 오르는 길-野生의 깨」전문
숨은 화자의 시선이 향해 있는 지점은 길의 끝에서 발견되는 아미타불이 아니라, 과정으로서 암자에 오르는 길이다. 그 길에는 야생의 참깨들이 무성하다. 아무도 베어들이지 않고 이렇다 할 관심조차 갖지 않은 야생의 식물은 저대로 나고 자라서 거기 그렇게 서 있다.?잎은 지고 대궁은 마른 채로 바람에 흔들거?리는 참깨는, 숫제 참선 중이다. 툭, 하고 건드리는 순간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의 늙은 깨가 마구 쏟아진다. 말씀의 깨알들이다.?거죽을 때려 속까지 울리는 말씀의 法會?에는 깨알 같이 기름진 지혜의 말씀들이 마른 잎 위로 마구 떨어진다. 늙은 깨의 죽음은 마침내 사리舍利를 내어 놓는다. 누군가가 경經을 읽는다. 소리와 음에 의해 공간은 무한으로 화化하며, 존재의 언어는 인간을 응시한다. 인간은, 시인은 그 말의 아름다움과 비밀을 안다. 말의 힘과 예지를 믿고 있다. 딴은, 암자에 오르는 길이란 제 몸 속으로 나 있는 길이다. 진리의 말씀은 그 길을 거슬러 오르는 이에게 주어지며, 오늘 이 하루에 있다(“꽃보다/ 더 아름답게 핀/ 오백 년 전 그 어느 하루!” (「연꽃」). “떠오른 달을 목말 태우고 별들의 길마로 지워진 아름다운 민둥산에서 하룻밤!” (「민둥산에서 하룻밤」).
박방희의 이번 시집『나무 다비』에 드러나 있는 자연-사물은 자아와 현실을 매개로 한 정신의 표상이자 의경意境이며, 실존의 국면이다. 그의 시가 꿈꾸는 나무의 아름다움과 힘은 나무와 나비 사이에 있다. 그 사이를 찢음으로 가능한 경계의 미학은 비스듬한 균형과 비움이다. 꽃의 향기와 열매의 맛은 바로 거기서 비롯된다. 오래된 나무는 나비를 닮아 있다. 그런 나비의 나무가 새롭고 드높은 것은, 생명과 우주에 대한 피할 수 없는 그리움 때문이다. 그리고 그?그리움이 몸을 열어 오아시스를 만들고 풀과 나무를 기르며 꽃을 피워내 스스로에 反逆?(「사막」)한 결과다. 그의 시-집에는 푸른 생각, 푸른 목청, 푸른 길이 산다. 정말이지, 생이라는?하나의 울림: 그것은/ 진리 자체가/ 인간들 가운데로/ 들어오는 것/ 은유의 눈보라?(파울 첼란,『하나의 울림』)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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