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와 詩魂

장이엽의 작은 것들의 존재론

나뭇잎숨결 2020. 11. 6. 12:08

작은 것들의 존재론

― 장이엽의 시세계

 

장석주(시인·문학평론가)

 

 

뒷모습을 바라보며 밥을 먹을 때도

맨 뒷줄 끝에 붙어 단체사진을 찍을 때에도

다만 외로울 뿐 사라지거나 죽는 건 아니더군

― 「생략」 부분

 

단체사진 속에서 눈을 감는다는 것은

깜박이는 눈동자에서 힘을 빼는 일

대열에서 걸어 나와 기웃거려 보는 일

사소한 움직임도 놓치지 않으려는

카메라와 나의 즐거운 한 판

― 「단체사진 속에서 눈을 감는다는 것」 부분

 

두 편의 시에 나오는 구절을 시인의 경험적 사실이라고 그대로 믿는다면, 시인은 단체사진을 찍을 때 맨 뒷줄 끝에 서기를 좋아하고, 또 눈을 감은 적이 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시인이 남들 앞에 나서기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순간을 포착하는 카메라의 움직임과 어긋나는 실수를 한다는 것이다. 시인이 고백하는 두 개의 경험에서 무의식의 욕망이나 사회적 처신과 태도를 연결해서 읽어내거나 하고 싶지는 않다. 그것은 해석의 과잉일 수도 있다. 눈에 안 띄는 조역의 자리가 외롭지만 더 편안함을 느낀다는 점에서, 애써 주목받는 자리를 피하려는 무의식의 태도에서 시인의 시세계로 들어가는 마음의 지도地圖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생각한다. “눈꺼풀을 꿈쩍 않고 렌즈를 응시하다가/ 이쯤 하면 되겠지, 눈 깜박하는 사이” 카메라의 셔터는 찰칵하고 작동해서, 다들 눈을 뜨고 있는데 혼자만 눈을 감고 있는 단체사진을 받아들었을 때 민망할 수도 있었겠다. 하지만 시인은 단체사진 속에서 눈을 감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눈을 감는다는 것에 대해 다르게 생각한다. 그것은 “깜박이는 눈동자에서 힘을 빼는 일”이고 “대열에서 걸어 나와 기웃거려 보는 일”이기도 하다. 사소함을 사소함으로 흘려보내지 않고 그것을 골똘하게 들여다보고 그 안에서 의미를 찾아내는 것, 그게 시인이 잘 하는 일이다. 사소한 실수에 주눅 들지 않고 실수를 “사소한 움직임도 놓치지 않으려는/카메라와 나의 즐거운 한 판”으로 의미론적 전화轉化를 이룬다. 두 편의 시를 읽으며, 직관으로, 시인의 시세계를 작은 것들의 존재론이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과연 그럴까?

 

장이엽의 시적 정체성은 모서리, 옆구리, 의존 명사 ‘등’, 말과 말 사이를 잇는 조사 ‘과’ 속에 찾을 수 있다. 이것들은 당당한 정면이나 문법적 중심 주체가 아니라 그 가장자리를 차지하는 것들이다. 처음부터 가장자리는 아니었을 테다. 본디 그것은 “짐은 안 나고 뜨겁기만 한 압력솥”, “말뚝을 갉아대며 날뛰었던 뿔 달린 염소”(「짐은 안 나고 뜨겁기만 한 압력솥」)였을 것이다. 이때 압력솥과 염소는 오로지 자신에게만 골똘하는 자에 대한 적절한 은유다. 압력솥이 뜨거웠던 것은 제 가슴에 품은 태양으로 자가발전기를 무한가동한 까닭이다. 그로 인해 달아오르지만 밀폐되었으니 점점 뜨거워질 수밖에! 이때 뜨거움은 중심에의 열망과 정비례한다. 그러나 밀폐된 용기 속의 압력이 빠져나가자 압력솥은 식고, 저항의 징표인 뿔을 제거해버리자 염소는 유순해졌다. 그쯤에서 맨 앞자리나 집중된 조명을 받는 중심에서 한 걸음 물러난 자리에 제 실존의 자리를 정한 자의 안정과 평화가 오롯하게 빛난다. 중심에서 비켜 서 있는 자는 눈잣나무, 산양, 망개나무, 참갈겨니, 모데미풀, 팔색조, 거머리말, 상괭이, 금강모치, 오색딱따구리와 같은 깃대종일 것이며, 이것들은 생존경쟁의 한복판에서 밀려나 멸종위기에 처한 생물종의 이름이고, “발붙일 곳을 찾아 떠돌아야 하는 사람들의 이름”(「거처居處」)이다. 비켜 서 있음은 장이엽 시의 화자들에게 그리 낯선 일이 아니다. 그것은 앙앙불락과 안달복달을 다 지나서 시의 화자가 얻은 체념과 달관의 지혜들을 반영한다. 시의 화자는 “내 인생의 가장 뜨거운 여름”에도 “저 건너 초록은 지천이고/울타리마다 넝쿨장미 흐드러지게 핀 날들도/내 안의 일과는 무관하리”(「여름 간다」)라는 것을 이미 안다. 이것을 주변부 의식이라고 말해도 좋으리라. 주변부 의식은, 시인의 어법을 빌려 말하자면, 생략법의 세계 속에 속한 것, 불명의 정체인 것, 즉 “보는 것과 보이는 것의 간극에 숨어있는 생략들 사이에서/회전하고”(「생략법」) 있는 의식이다. 주변부 의식을 내면화 하는 존재란 여러 가지 이유에서 자만할 수 없고 주눅이 들 수밖에 없는 존재, 그래서 “나는 늘 한쪽으로 기울여져 있었다”(「삐뚤어질 테다」)라고 말하는 존재다. 삐뚤어짐은 자기 안에서 소용돌이치는 욕망의 흐름이 아니라 그것을 안고 있는 자기 전체에 대한 규정이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이 삐뚤어짐을 제 정체성의 한 요소로 긍정해버린 자의 씁쓸한 긍정주의가 펼쳐진다.

 

기울어진 내가 비탈에 선 나무가 되려 한다

 

비대칭의 균형을 선택하기로 한 나무

삐뚤어지게 앉아 바람길 열어주고

삐뚤어지게 엎드려 진달래 뿌리와 손가락 걸고

삐뚤어지게 누워 잎사귀 흔들면

구석구석 골고루 햇빛 비쳐들 터이다

잔가지 사이사이로 주먹별이 내려올 터이다

모난 돌이 돌탑을 받쳐주듯

나를 고여 주는 삐뚤어진 생각의 작대기 두드리며

삐뚤어지게 뛰어가 시를 부르고

삐뚤어지게 서서 밀어줄 테다

― 「삐뚤어질 테다」 부분

 

감히 삐뚤어지겠다는 발칙한 선언은 모자람에 대한 자의식에서 나온다. 이 삐뚤어짐은 모자람에 대한 자의식이 만든 자기 소외에서 벗어나 정신의 자유를 찾고 사회화된 어떤 균형의 실마리를 찾는데, 이게 바로 “비대칭의 균형”이다. ‘나’는 사회에서 배제되지 않고 그 안에서 어울리는 존재로 묻어간다. 이것은 ‘나’의 내면에 통일된 자기에 대한 자긍심이 깃들기 시작했음을 암시한다. 중심과 주변을 나누는 의식 따위에서 초탈해버린 것이다. 이쯤에서 ‘나’는 실존의 최소주의에서 벗어나 어느 정도 자유를 얻고, “마음대로 무성해지고 마음대로 가지를 뻗어”(「여름 간다」)가는 존재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그 처음은 갈팡질팡이고, 움찔거림이고, 종종걸음이었다.

 

바스락대는 소리만 들려도 갈팡질팡

헛기침에도 놀라 움찔거리는 모습

뭐가 그리 다급해서

숨 한 번 돌리지 않고 종종걸음 치면서

검은 바닥을 맴도는 것이냐

― 「갯강구야」 부분

 

 

시인은 갈팡질팡 대고, 움찔거리고, 종종걸음 치는 갯강구의 움직임에서 한없이 약한 존재들을 본다. 큰 존재들의 “바스락”과 “헛기침”에 반응하는 작은 존재들의 갈팡질팡과 움찔거림과 종종걸음은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제 존재를 보존하려는 몸짓들이다. 이 동작태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약한 존재들의 한시도 마음 놓을 수 없는 불안과 서글픔이다. 그들은 큰 존재들의 작은 움직임에도 다급하게 반응해야 한다. 자칫하면 생명을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생명의 세계 안에서 살아남음은 약한 존재들이 따르고 추구해야 할 궁극의 정의이다. 시인은 “검은 바닥을 맴도는” 갯강구에게 자기를 투사한다. 그래서 “너를 보면 나를 본 듯 숨이 멎고 자꾸 눈물이 나”는 것이다.

 

서정시는 흔히 개별적 자아를 뜻하는 ‘나’의 영역이다. ‘나’의 기억들, ‘나’의 경험들로 빚어진 것들로 채워진다. ‘나’의 슬픔과 기쁨, ‘나’의 과거와 현재들이 이 안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물론 서정시의 어조는 다양하다. 고백의 어조, 독백의 어조, 대화의 어조가 다 허용된다. 이 다양한 어조 속에서 서정시는 ‘나’는 단순한 표상이나 감응으로서가 아니라 자기 가치적 언어의 주체로서 드러난다. 서정시는 흔히 생각하는 ‘나’의 감정 표출이 아니라 상상적인 것 자체의 발화이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인가? 무리에서 낱낱으로 쪼개져 개별화되고 고립된 주체다. 주체성의 기원이 되는 그 무엇이다. 본디 ‘나’는 철학의 근대가 내놓은 발명품이다. 이를테면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했을 때, 철학자는 이 유명한 선언을 통해 정신적이면서도 신체적인 주체의 탄생을 알린 것이다. ‘나’는 자아이고, 무언가에 대한 의식의 주체를 가리킨다. 이 ‘나’라고 뭉뚱그릴 수 있는 자기동일성의 주체를 가리키는 영어의 ‘아이(I)’와 ‘미(Me)’를 다 포괄한다. 조지 허버트 미드는 『마음·자아·사회』에서 “‘I’란 타자의 태도에 대한 생물체의 반응이고, ‘Me’란 타자의 태도(와 생물 자신이 상정하고 있는 것)가 조직화된 한 벌”이라고 말한다. 전자와 후자의 거리는 주체로서의 자기와 객체로서의 자기의 거리를 보여준다.

 

나는 은하수를 건너온 처녀좌의 원숭이

나는 꼬투리 속에 갇힌 콩알

나는 가로등 밑 거미줄에 걸린 나방

나는 깊은 밤에 혼자 우는 귀뚜라미

나는 뿌리 없이 꺾어 심은 마른 개나리

나는 과자 부스러기를 물고 가는 배고픈 개미

나는 바비 인형의 벗겨진 신발 한 짝

나는 고흐의 파란 방에 놓인 귀 떨어진 컵

나는 억새풀의 반짝이는 은비늘

나는 사하라 사막에 숨어 있는 모래늪

나는 빙하 속에 정박당한 낡은 어선

나는 황태덕장에 걸려 있는 눈 뜬 명태

나는 사라진 명왕성의 먼지 입자

나는 탱탱하게 몸을 조여 울리는 소가죽

나는 투망에 잡힌 물뱀

나는 앙코르와트의 오래 된 사원

나는 악보 안의 4분 쉼표

나는 티베트 고지에서 펄럭이는 오색 깃발

나는 어항 속 수초 사이를 누비는 체리새우

나는 세렝게티 초원의 치타와 달리기를 하던 톰슨가젤

나는 개망초 얼굴 위로 예고 없이 쏟아지던 소낙비

나는 징검다리 사이의 물보라

나는 이솝 동화 세상의 황금알을 낳는 거위

나는 한 발 한 발 으름넝쿨을 재며 걷는 어린 자벌레

나는 천축국을 찾아가는 근두운 탄 손오공

― 「나는」 전문

 

장이엽은 ‘나’를 자기의 전체성 안에서 규정하려고 한다. ‘나’를 원숭이, 콩알, 나방, 귀뚜라미, 개나리, 개미, 신발 한 짝, 컵, 은비늘, 모래늪, 어선, 명태, 먼지 입자, 소가죽, 물뱀, 사원, 쉼표, 깃발, 체리새우, 톰슨가젤, 소낙비, 물보라, 거위, 자벌레, 손오공으로 은유하지만, 사실 이것들은 하나의 기표 놀음에 지나지 않는다. ‘나’의 추상은 그 다양한 것들 앞에 붙는 의미를 한정하는 형용사에 의해 협애화되고 구체적 형상을 얻는다. 그냥 원숭이가 아니라 “은하수를 건너온 처녀좌”의 그것이고, 그냥 콩알이 아니라 “꼬투리 속에 갇힌” 그것이며, 그냥 귀뚜라미가 아니라 “깊은 밤에 혼자 우는” 그것이고, 그냥 개나리가 아니라 “뿌리 없이 꺾어 심은” 그것이다. 그것은 그냥 먼지 입자가 아니라 “사라진 명왕성”의 그것이고, 그냥 물뱀이 아니라 “투망에 잡힌” 그것이고, 그냥 깃발이 아니라 “티베트 고지에서 펄럭이는 오색” 그것이다. ‘나’를 이렇게 다양한 은유로 분화할 수 있는 것은 그만큼 현실 세계 안에서 ‘나’의 모호성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암시한다. 모호성과 가능성이 무한확장할 때 그것은 추상에 가까워지고, 그것을 축소할 때 현실의 구체성을 띠게 된다. ‘나’는 현실 안에서 끊임없이 부가되고 가공되어 나타나는 신기루와 같은 존재이다. 심하게 말하자면 ‘나’는 고정되지 않은 채 끊임없이 떠도는 기표다. 그것은 “분리되고 자율적인 실존에게 그의 행동의 공상적인 원인을 만들어 주기 위해 부당하게 부여하는 문법적 주체”(야니스 콩스탕티니데스, 『유럽의 붓다, 니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장이엽의 서정시는 바로 ‘나’에 대한 의미 탐색을 위한 장치다.

 

비주류에 대한 가장 함축적인 이름이다

 

열거된 각각의 명사 뒤에서 때로는 ‘들’로

때로는 ‘따위’로 바뀌어 불리기도 하는

확인할 필요가 없는 초대 손님

 

솜털로 채워진 낙타의 귓속에 관심이 있는 당신이라면

‘등’의 존재를 알고 있을 것이다

바위 그늘에 주저앉아 종일토록

바람을 기다리는 노루귀가 되어본 당신이라면

‘등’의 구별 방법을 알고 있을 것이다

 

당신이여!

행여나 부피를 재려고 실린더 눈금을 읽게 될 때는

위에서 내려다보지도 말고

밑에서 올려다보지도 말고

눈높이를 액체 표면과 수평이 되도록 맞추어야 한다

 

그러다 어느 날인가,

당신 옆에서 간간이 물잔 비우는 나 등을 만나거든

혼자서 술을 따라 마시는 나 등을 만나거든

 

당신의 이름을 받쳐주는 기타 등등을 만났다고 기뻐해 주시라

당신의 얼굴을 밝혀주는 기타 등등을 만났다고 반가워해 주시라

― 「등等」 전문

 

‘등’은 의존 명사다. ‘등’은 기타 등등의 준 말인데, 이것은 사물들을 나열할 때 접미사로 쓰는 ~들이나 따위와 같은 뜻을 가진 말이다. 저 혼자서는 아무 뜻도 없는 품사다. 시인은 바로 그 의존 명사 ‘등’에서 ‘나’의 구체적 실존을 꿰어본다. ‘등’은 독자적인 실존을 드러내는 이름이기보다는 의존적이고 독자적인 것들에 기대 슬며시 제 존재를 드러내는 기표다. 시인은 ‘등’을 은유나 비유 없이 곧바로 “비주류에 대한 가장 함축적인 이름”이라고 단언한다. 그것은 주류가 아니라 비주류, 손님이 아니라 “확인할 필요가 없는 초대 손님”이라는 뜻이다. ‘당신’이라는 대타자가 있고, ‘나’는 그 이름을 받쳐주고, 그 얼굴을 밝혀주는, 기타 등등 안에서 증식하는 존재다. 이 시에서 느낄 수 있는 시인의 마음은 무심히 열려 있음의 편안함이다. 이것은 달관이라고 해도 좋고, 초탈이라고 해도 좋다. 지는 게 이기는 것이고, 옆으로 비켜서는 건 열등한 탓이 아니라 유유자적하는 여유를 가졌기 때문이다. 어느덧 시인은 고요한 평정 속에서 세상을 관조하는 태도를 갖게 된 것이다.

 

말과 말 사이에는 ‘과’가 있었다

그 ‘과’를 이어가기 위해 입속에 조각칼을 종류별로 숨겨놓고

비누에 나무에 꽃잎에

심지어 하얀 종이의 심장까지 말의 문양을 새겨가는 것이다

 

계획적이고 반듯한 삶을 살고 있노라는 당신의 말에

나는 건강한 삶을 살고 있군요 라고 답했다

계획적이고 반듯한 삶이 건강한 삶이라고 표현한

나의 감정이 참 평화로워 보인다면서

당신은 기다란 여백에 화살표를 올려놓고 음 음…하며 배회하고 있었

말줄임표 사이로 감추어진 거리는 얼만큼인가

 

‘과’가 징검다리로 놓여 있을 때

나는 다리가 짧아 건너뛸 수가 없으면서

생각은 이미 넘겨짚음으로 저편까지 건너가

당신의 마음을 알겠다고 경솔하게 내뱉어버림으로

‘과’ 뒤에 이어질 진실에 대한 오해는 깊어진다

 

그럼 바람 한 자락 주머니에 담아 다른 하늘 아래로 잘 가라고

얼굴도 모르는 사람끼리 건네는 작별인사도

현실은 외면당한 채 말과 글의 오해와 이해 사이에서 부유하고 있는데

사실을 더 이상 다른 이면으로 착각하지 않기 위해서

 

말과 말 사이에는

마주보는 창문처럼 맞바람이 쳐야만 한다는 걸

                                                              ― 「조사 ‘과’에 대한 오해」 전문

 

조사 ‘과’도 ‘등’과 그 의미가 겹쳐진다. ‘과’는 말과 말 사이에서 겨우 제 문법적 존재를 드러낸다. ‘과’는 비교되는 대상을 나타내거나 혹은 함께 함의 뜻을 나타내는 부사격 조사로 쓰인다. 아울러 둘 이상의 사물을 같은 자격으로 이어주는 접속 조사로 쓰이기도 한다. ‘과’는 말과 말 사이에 놓인 징검다리와 같다. ‘과’는 독자적으로는 아무 의미를 이루지 못한다. 의미를 이루고 그 의미로써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언제나 말이다. ‘과’는 그 말들에 빌붙어 산다. 그 말과 말 사이를 이어주는 조사 따위에는 눈길도 주지 않는다. 세상에 득세하는 말들은 쉽게 변질하고 쉽게 부패할 수도 있다. 그러나 ‘과’는 이미 최소의 의미 속에 있는 까닭에 변질과 부패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 시인은 사람들이 흔히 지나치는 ‘과’의 기능과 속성에 새삼 주목한다. ‘과’는 “오해와 이해 사이에서” 부유하는 말과 글에 균형을 잡아주고, 말과 말 사이에서 “마주보는 창문처럼 맞바람”이 치도록 기능한다. 시인은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과’라는 조사를 눈여겨보고 그 의미를 키워 작은 것들의 존재론으로 확장한다.

 

 

 

귀도 없고 눈도 없이

뭉툭한 몸매로 꿈틀꿈틀

꿈의 틀을 짜는 걸

― 「지렁이의 꿈틀처럼」 부분

 

시인은 지렁이의 꿈틀거림에서 작은 것들의 존재론을 읽어낸다. 꿈틀꿈틀은 작은 존재들이 “꿈의 틀”을 짜려는 움직임이다. 1980년 무렵,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고, 뜻하는 것은 무엇이든 될 수가 있어.”라는 노랫말을 가진 대중가요가 유행했다. 당시 잘 먹고 잘 사는 사람들에게는 이 노랫말이 현실로써 실감을 가졌을 지도 모르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이 노랫말의 지나친 낙관주의는 생뚱맞은 것으로 여겨졌다. 그 시절은 서슬 푸른 군사 독재가 펼쳐지는 암울한 디스토피아였다. 사회의 근간이 되는 윤리나 기강은 흐트러지고, 삶은 팍팍하고 나날을 살아내는 일은 처절했다. 현실의 곤핍이나 추악함과는 동떨어진 이 노랫말의 달콤함은 제대로 된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순한 양들도 사나와질 수 있다. 거악巨惡은 해체되었어도, 여전히 작게 쪼개진 악들이 일상 속에 숨어 있다. 우리가 나날의 삶을 산다는 건 그 작은 악들과 쉬지 않고 싸운다는 의미다. 작은 존재들은 저마다 제 “꿈의 틀”을 짜기 위해 그것들과 부단하게 싸워야 한다. “삐뚤어질 테다”는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없고, 뜻하는 것은 무엇이든 될 수가 없는 정의가 사라진 현실 속에서, 일상 속에서 무수히 많은 작은 악들과 만나야 하는 순한 양들이 낼 수 있는 아주 작고 쓸쓸한 저항의 외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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