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수 시에 나타난 생태 존재론적 사유
김유중
(한국항공대학교 교수, 문학평론가)
1. 생태론적인 관심에 대하여
평소부터 쭉 느껴온 바이기도 하지만, 문인수 시인의 시에는 다양한 생태론적인 관심사가 묻어 있는 것처럼 생각된다. 소박한 의미에서의 자연 친화적인 경향은 물론이려니와, 환경이나 문화를 둘러싼 다양한 생태론적 문제 의식과 그것의 시 ․ 공간적인 확장으로서의 민속, 혹은 설화적 세계에 대한 관심,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바탕으로 한 생태에 대한 근원적인 사유의 태도에 이르기까지, 그의 시편들은 한 마디로 우리 시대 생태시의 보고(寶庫)라고 해도 좋을 정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그의 시세계를 생태론적 관점에서 본격 조명한 논의가 없었던 점은 다소 의외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원인들을 생각해볼 수 있겠는데, 무엇보다도 그가 명시적으로 자신의 시작 활동을 생태적인 것으로 내세운 적이 없다는 사실이 가장 크게 작용한 듯하다. 이런 점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소위 말하는 의식적인 생태론자, 생태주의자는 아니다. 다시 말해서 그의 시편들 가운데에는 우리 주변의 공인된 생태시들에게서 흔히 발견되는 생태론적 관심사에 대한 천착이나, 환경 생태와 관계되는 현장 고발적인, 혹은 문명 비판적인 인식이나 내용들을 드러내놓고 강조한 경우는 드물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바로 이런 점들이 필자가 그의 시를 진정 생태적인 시각에서 바라보게 된 계기였다고 할 수 있다. 필자의 관점으로는 그는 말뿐인 생태론이 아닌, 그 나름의 체질화된 생태론을 실천하고 있는듯이 보였기 때문이다. 정당한 의미에서의 생태론적인 관심이란 이처럼 자연스럽게 체질화된 삶을 바탕으로 한 것이라고 한다면, 이런 그의 태도는 보다 본질적인 의미에서 우리 시대 생태론자들이 마땅히 본받아야할 대목이 아닌가 한다.
실제 그의 시편들을 살펴보면, 거기에는 체질화라는 말이 실감이 날 정도로 은근하고 유현한, 생태 환경과 관련된 관심 요소들이 지속적으로 반영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폭발적이라고 할 수는 없을지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관심의 폭이나 깊이가 결코 작다고도 할 수 없는 그런 내용들이 꾸준히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실들로 미루어, 시인 자신이 의식을 했던 안 했던, 생태 환경에 대한 관심은 이미 문인수 시학의 핵심 요소를 이루고 있다고 이해해도 좋을 듯싶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특징적인 사실은 그가 기존의 생태론에서 강조하고 있는 심층 생태학의 국면들을 문예학적인 차원에서 새롭게 조망하여 해석해내고 있다는 점이다. 구체적으로 그가 시도하고 있는 이러한 방식은 존재론적인 사유의 특성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이러한 그의 태도는 종래의 생태시론이 갖는 약점으로 지목되어 온 목적 문학적인 한계를 유려하게 비껴갈 수 있는 효과적인 대안으로 간주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인식에 기초하여, 이 글은 문인수 시인의 시편들에 나타나는 생태 환경과 관련된 존재론적인 사유의 궤적들을 더듬어보는 한편, 그 속에 내재된 삶과 문학에 대한, 그리고 존재 자체에 대한 시인의 궁극적인 이상을 추출해내는 것을 목표로 한다.
2. 시작의 근본 자세
시인이라면 누구나가 자연스럽게 시작 활동의 과정에서 자신만의 고유한 세계를 전유해 보고픈 소망을 갖게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문인수 시인의 경우도 물론 예외는 아니다. 그렇다면 과연 문인수 시인이 그의 시작 활동을 통해 펼쳐 보이고자 한 세계란 과연 어떤 종류의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의 단서를 우리는 다음과 같은 그의 진술 속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인간에게도 나무나 풀의 그것과도 같은 섬세하고도 집요한, 흰 뿌리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고향을 향한 그리움일 것이다.
자기 존재의 발원, 고향이란 그러나 멀거나 가까운 어떤 공간이 아니라 이제는 도저히 가 닿을 수 없는, 시간의 아득한 저 편일 것이다.
이 땅의 神이옵신 그리움은, 그리운 것들은 그런데 왜 하나같이 궁핍한가, 가련한가, 지리멸렬한가, 그런데도 또 어찌하여 하나같이 아프게 아름다운가.
--- 「自序」 부분, ?홰치는 산? (천년의시작, 2004)
주위의 존재들에 대한 깊은 애정과 연민은 문인수 시학의 기본 뼈대이다. 그 위에 근원에 대한 관심과 그것을 향한 그리움의 구도가 얹어지는 형태를 취한다. 위 진술은 그러한 내용을 한층 감상적으로 풀어내고 있다.
원래 생태나 환경에 대한 관심이란 우리 주변의 자연 환경에 대한 사소한 관심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런 만큼 그것은 공간에 대한 애정어린 관찰의 시선에서부터 출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런 사실에 비추어 봤을 때, 문인수 시인의 경우에도 물론 공간에 대한 관심과 탐색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알 일이지만, 그의 시편들에 등장하는 공간적 배경은 정선에서 우포늪으로, 섬진강과 지리산으로, 채석강으로, 그리고 다시 인도로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며 이동, 확대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좀더 유심히 살펴보아야 할 부분은 공간에 대한 그와 같은 그의 관심은 기본적으로 그리움의 정서 위에 머물러 있다는 점이며, 그것은 다시 본질, 근원 등에 대한 관심 및 애정 등과 단단히 밀착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 경우 공간은 그가 본래 관심을 두고 있는 근원적인 요소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매개체로서 기능한다.
위 인용문은 바로 그런 사실을 우리에게 적절하게 제시해주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시인 문인수에게 있어 시작 활동이란 바로 우리가 떠나온 고향에 대한 본원적인 그리움의 표출 방식이라는 것이다. 이 때 고향은 가 닿을 수 없는 시간의 아득한 저편 너머에 위치한 자기 존재의 발원, 그것에 대한 아픈 아름다움의 기억과 일치한다. 그것은 이제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은 총체성에 대한 향수이며, 훼손되지 않은 세계를 향한 마지막 열망으로 이해해도 좋으리라. 이러한 그의 태도는 기실 이상과 현실 사이의 간극에서 비롯된 낭만주의적 정서에서 그리 멀리 벗어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의 시편들은 사유의 내재적인 깊이를 간직하고 있다는 점에서 단순한 낭만주의적 서정시들과는 구분된다.
사실 그의 시는 어떤 의미에서 생태 환경을 배경으로 전개되는 존재론적인 명상 시편이라고 말하는 편이 타당할지 모른다. 그만큼 존재의 본질 내지 근원과 관련된 고민의 흔적들이 구석구석에 배어 있기 때문이다. 생태나 환경에 대한 관심은 이 경우 인간 생활과 자연, 우주를 포함한 우리 주변의 모든 존재와 존재자들에 대한 근원적인 사유의 형태로 발전한다. 그러므로 그에게서 생태의 문제란 단순히 우리 주변의 자연 환경에만 국한되는 문제가 아닌, 우주 만물의 조화와 관계되는 본질적이고도 근원적인 질서를 발견하고 이를 추출해나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 생태 존재론적 사유의 구체적인 양상들
어설프게나마 존재론적 관심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긴 했지만, 이 용어만으로 문인수 시에 나타난 세부적인 양상들을 속속들이 훑고 진단하기에는 지나치게 포괄적이고 방만하게 느껴는 것도 사실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시편들에 나타난 생태적 관심의 내용들은 존재의 순환에 대한 그 나름의 이해로부터 존재론적 모순에 대한 근원적인 의문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한 스펙트럼들을 두루 보유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순환의 감각은 그의 시에서 긴 여행 끝에 맞게 되는 고향으로의 회귀라는 구도로 제시되기도 한다. 이 때 고향이란 단순히 어린 시절의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시공간만은 아니다. 그것은 존재의 뿌리찾기와 관계되는 보다 원천적이고 근원적인 시간이자 공간인 것이다.
母川. 다 떨어져 너덜거리는 연어의 몸이 화면 가득 들어온다. 다 떨어져 너덜거리는 저 아가미 이제 마저 쫘악 찢어지면서 크게 외쳐 부르는 母川.
母川엔 어머니가 없다.
수만 리 일생이 뿌옇게 무너지는 산란.
뿌옇게 무너지는 제 목소리 아래
스스로 어미가 되어 죽는……
그것이 연어가 듣는 대답이다.
--- 「연어」 전문
연어의 회귀는 산란을 위한 본능적인 행위일 뿐이라고 일축해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 넓은 의미에서 보면 이것 역시 자연의 섭리에 따른 행동이며, 또한 생태론적 순환 질서의 한 부분일 것이다. 연어의 일생은 이처럼 그의 회귀 과정, 산란 과정과 더불어 끝이 난다. 그것은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가져오게 하기 위한 마지막 찬란한 여정인 셈이다.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이루어낸 과정이라는 점에서, 이 장면은 그것을 바라보는 모든 이들에게 진한 감동과 여운을 전해준다.
존재의 의미는 여기서도 부각된다. 생태론적 순환 질서에 봉사하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해가며 고향을 향해 회귀하는 연어의 사투 속에서, 우리는 우리 시대의 존재가 되찾아야 할 본래적 삶의 태도와 그 질서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사투 속에 펼쳐지는 여정과 아낌없는 자기 존재의 희생을 통한 후대에의 넉넉한 배려, 그리고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 완성되는 자연의 순환 질서, 그 속에 고향의 의미가 놓여 있고, 존재의 의미가 놓여 있다. 우리 인간은 지금까지 너무 눈앞의 자그마한 이익에만 집착하여, 더 큰 것들을 잃어버리고 살지는 않았는지. 지금부터라도 이런 인간의 삶의 자세를 수정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닌지. 삶에 있어 진정으로 가치 있고 보람 있는 행동이란 과연 무엇인지. 위 시를 통해 문인수 시인은 우리 모두에게 이렇게 묻고 있는 듯하다.
삶과 죽음을 둘러싼 문제는 기실 문인수 시에 나타난 생태론적인 순환 구조의 핵심적인 고리에 해당한다. 자연계의 모든 순환은 결국 이 문제와 어떤 방식으로든 연결될 수밖에 없기 때문일 터이다. 생태론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이는 하나의 존재 전환일 뿐, 그 이상의 어떤 특별한 의미도 지니지는 않는다.
섬진강 가 동백 진 거 본다.
조금은 시들지 않은 채 동백 져 비린 거
아, 마구 내다버린 거 본다
대가리째 뚝 뚝 떨어져
낭자하구나.
나는 그러나 단 한번 아파한 적 없구나.
이제 와 참 붉디붉다 내 청춘,
비명도 없이 흘러갔다.
--- 「동백」 전문
나무 한 그루를 얹어 심는 것으로
무덤을 완성하면 어떨까.
평평하게 밟아
그 일생이 보이지 않으면 되겠다.
너무 많이 돌아다녀 뒤축이 다 닳은 족적은 그 동안
없는 뿌리를 앓아온 통점이거나 罪,
쓸어모아 흙으로 덮는다면 잘 썩을 것이며
그 거름 빨아올려 내뿜는 한탄 무성하면 되겠다.
어떤 춤으로 벌서면 다 풀어낼 수 있겠는지,
느티나무든 측백나무든 배롱나무든 이제
오래 아름다운 감옥이었으면 좋겠다.
--- 「樹葬」 전문
존재의 죽음은 생태적인 시각에서 본다면 일상적이며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비록 그것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 다소간의 아쉬움과 안쓰러움이 배어 있다 할지라도, 그러한 그의 시선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죽음은 전체 자연의 질서를 이루는 한 부분이며, 그런 만큼 생태계의 조화와 균형을 위해서는 꼭 필요한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가 핏빛으로 낭자하게 지고 있는 동백의 꽃잎들을 바라보면서도 ‘단 한번 아파한 적 없’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나, ‘붉디 붉’은 스스로의 청춘을 ‘비명도 없이’ 깨끗이 흘려 버리는 여유를 지닐 수 있는 것(「동백」)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인간 존재의 죽음에 대한 인식 역시 이런 사유 의 틀에서부터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위 인용시 「수장」에서 그는 ‘평평하게 밟아 / 그 일생이 보이지 않’도록 만드는 수장의 조건에 대해 공감하는 태도를 보인다. 그러한 공감은 ‘쓸어모아 흙으로 덮는다면 잘 썩을 것이며 / 그 거름 빨아올려 내뿜는 한탄 무성하면 되겠다.’에서 보듯, 인간 존재라고 해서 거기에 반드시 별도의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는 견고한 생태 의식의 바탕 위에 기초한 것이다.
이는 결국 생태론적 인식이 갖는 인간중심주의적 세계관의 극복 의지와 밀접한 관련을 지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말하자면 인간 역시 대자연의 일부일 뿐이며, 그것이 자연의 일부로 생각되는 이상, 생태계 전체의 순환 원리로부터 예외일 수 없다는 생각을 분명히 해둘 필요성을 느꼈던 것이다.
가문 봄날이에요.
쑥잎들 자잘자잘 번져
오르고 이어요. 복사꽃 무더기
무더기 터져 오르고 있어요.
내려가시는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일평생 농사지으신
이제는 밥상처럼 내려다 보이는
들녘, 물웅덩이 바닥까지
힘껏 긁던
물두레
줄, 흰 광목줄
끝의
아버지
……
뻐꾹뻐꾹 퍼올리는
치밀어 오르는 봄, 봄……
--- 「하관」 전문
가문 봄날임에도, 어김없이 꽃은 피고 잎들은 올라온다. 그런 봄날에 아버지를 잃은 시인의 마음은 마냥 무겁기만 했으리라. 무겁게 가라앉아 있을 화자의 심경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치밀어 오르는 봄의 생명력과 그 기운이 야속하게 느껴질 법도 한, 그런 시이다.
그러나 어차피 생태계의 질서란 원래가 인간적인 정서나 욕망과는 무관한 지점에 위치해 있다. 위 인용시에서 시인이 강조하고자 하는 바 또한 그런 대목이다. 자연은 정해진 원리에 따라 조화롭게 움직인다. 그런 자연의 조화 앞에 무심타, 야속타 하는 불평들을 늘어놓는 것은 인간적인 시각에서 비롯된 이기적인 사고의 결과일 뿐이다. 넓게 보면 이것 역시 순환이며, 생태계의 질서 유지를 위해 필수적인 과정인 것이다. 존재란 어쩌면 거역할 수 없는 이러한 거대한 순환의 질서 속에 잠시 머물다 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이러한 순환 가운데서도 존재의 의미와 그것이 지닌 무게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순환의 원리가 존재의 의미 자체를 원천적으로 무화시키지는 않으리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허공 멀리
새 한 마리 날아가고 보이지 않습니다
빈 들판에 말라붙은 새의 흰 똥엔
이름 모를 시앗들이 섞여 눈 뜨고 있음을 봅니다
어디에 있는가
새의 살다 간, 세상 그 어느 갈피의 의미는
무엇이었더라
한 줌 흙엔들 나는
그 무슨 짐작으로 스민다 하리요
--- 「새똥」 전문
예컨대 위의 시에서, 시인은 자연계의 순환적인 질서에 주목하면서, 한편으로는 이를 통해 스스로의 존재 의미에 대해 되돌아보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모든 것이 돌고 돌아 원점으로 회귀한다고 했을 때, 존재의 의미를 따진다는 자체가 얼핏 무의미하게 생각될 수도 있다. 그러나 완전한 무(無)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아닌 이상, 이러한 순환적인 질서 속에서조차 존재의 의미는 소중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의도되지 않은 상황 속에서도 존재의 흔적은 어김없이 남는다는 사실이다. 어떻게 본다면 순환 자체가 존재의 흔적이며, 그것의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순환 속에 이미 의미가 깃들어 있는 이상, 무리를 해서라도 자기 존재의 흔적을 후대에 남기기 위해 애쓰는 태도는 이와 같은 존재의 본질적인 의미를 오해한 데서 온 잘못된 행동일 뿐이다. 더욱이 무리를 해서라도 흔적을 남기고자 하는 태도는 우리 주변의 생태와 환경에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이에 반해 의도되지 않은 가운데서 행해지는 이러한 존재의 흔적 남기기는 생태계에 전혀 위협적이지 않을 뿐 아니라, 그 자체가 이미 생태계의 한 부분이 된다. 생태란 이처럼 자연스러운 순환이며 조화요 질서인 것이다. 그러한 조화와 질서의 흐름을 이해하고 순응할 때, 존재의 진정한 의미는 다가올 것이다.
이러한 순환 원리의 핵심은 인간 역시 자연의 일부라는 생각, 그러므로 이제부터라도 인간과 자연의 연속성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한다는 생각이라고 할 수 있다. 자연 속에 인간이 깃들어 있고, 인간 속에 자연이 깃들어 있다는 인식은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의 의미를 깊이 있게 탐구하고 이를 생태론적으로 실천하기란 여전히 쉽지 않은 일임에는 틀림 없다.
저 산이 흰내를 흘려보낸다.
흰내에 큰물 질 때도 있다.
그러면 그 물 건너 물꼬 보러 간다.
소꼬리 붙잡고 천천히
시뻘건 물살 속으로 천천히 몸 밀어 넣던
몸 감기던 아버지, 나도 용 쓰며
둑 위 진창에다 발끝을 박았다.
거듭 발끝을 박으니 부르르
부르르르르 땡기며 복받치던 거
저 산의 뿌리를 느낀 적 있다.
--- 「방올음산」 전문
위에서 시인은 ‘저 산의 뿌리를 느낀 적 있다’라고 쓰고 있다. 이 시에 등장하는 <방올음산>은 시인 자신의 고향 마을에 위치해 있는 뒷산이라는 점에서, 단순한 자연 경관이 아니라 고향으로 대표되는 근원 내지는 뿌리에 대한 감각을 일깨워 주는 존재이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이 말은 단순히 눈에 비치는 자연만을 의식한 발언은 아니다. 근원으로서의 자연, 본질로서의 자연으로 회귀하고픈 심경을 토로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한 자연이야말로 인간이 떠나온 진정한 고향이며, 집이다. 뿌리로서의 고향은 뿌리로서의 가족(아버지)와, 그리고 다시 뿌리로서의 자연 환경(산)의 의미와 겹쳐진다. 우리가 자라난 뿌리를 잊지 않아야 한다는 말은 결국 인간이 자라난 근원적인 고향으로서 자연의 존재를 잊지 않고 기억하라는 말과 동일하다. 그 존재를 확인하는 순간, 시인은 전율을 느낀다. 산의 뿌리는 ‘부르르 / 부르르르르 땡기며 복받치’는 느낌과 더불어 그에게 다가온다.
자연의 존재는 때론 인간에게 색다른 교훈을 주기도 한다. 인간은 곧잘 자신의 뿌리가 자연임을 잊고 지내는 경향이 있는데, 그런 가운데서 문득 마주친 자연의 어떤 장면은 우리에게 인간의 삶의 태도와 관련하여 생각해볼 기회를 제공해주기도 한다. 인간이 이루어낸 어떤 의식적인 노력의 결과물보다도 더 위대한 창조의 질서와 원리가 자연 속에 내재되어 있는 까닭이다. 뿐만 아니라 거기에는 어떤 교만도, 무리수도 발견할 수 없다. 오직 여유롭게 풀어가는 자연적인 질서와 조화만이 그것을 완성하는 길이다.
방패 같은 커다란 잎이 우포늪 가득 착 발려 있다. 잎의 표면엔 무슨 두드러기 같은 가시가 섬뜩섬뜩 돋아 있는데, 그렇듯 제 뿌리짬의 그 무엇을 무섭게 덮어 누르고 있다. 그런데 그걸 또 불쑥 뚫으며 솟아오른 꽃대궁, 창 끝 피칠갑의 꽃봉오리에도 줄기에도 그런 가시가 돋아 있다.
저 온갖 적의와 자해의 시간이 오래 무더웠겠다.
그러나 누가 말할 수 있으리.
마침내 고요히 올라앉은 滿開, 만 개의 캄캄한 문, 만 번은 또 무너지며 신음하며 열어제쳤겠다 악의 꽃, 저 길의
끝
오, 저 고운 웃음에 대해 숨죽여라 지금
소신공양 중이다.
--- 「가시연꽃」 전문
채석강의 장서는 읽지 않아도 되겠다.
긴 해안을 이룬 바위벼랑에
격랑과 고요의 자국 차곡차곡 쌓였는데
種의 기원에서 소멸까지
하늘과 바다가 전폭 몸 섞는 일, 그 바닥 모를 기쁨에 대해
지금도 계속 저술되고 있는 것인지
또 한 페이지 철썩, 거대한 수평선 넘어오는
책 찍어내는 소리가 여전히 광활하다. 바다책,
바다책, 바다책,
공부를 하지 않아도 되는 이 작은 각다귀들
각다귀들의 분분한 흘레질에도
저 일망무제의 필치가 번듯한 배경으로 있다.
이 푸른 내용의 깊이를 잴 수 있겠느냐
미친 듯 몸부림치며 헐뜯으며 울부짖는
사랑아, 옆으로 널어 오래 말리는
채석강엔 강이 없어서 이별 또한 없다.
--- 「바다책, 채석강」 전문
시인은 자연 속에서 존재의 새로운 의미를 배운다. 가시연꽃을 피워올리고 채석강의 기묘한 형상을 완성한 것이 순전히 자연의 질서와 조화라면, 그러한 모습들은 인간 삶의 태도와 비교해볼 때 한결 여유롭고 초연해 보인다. 적의와 자해의 시간마저 넉넉하게 이겨내고, 마침내 가시 위에 연꽃을 피워 올리는 우포늪의 생태와, 오랜 인고의 세월에 걸쳐 조금씩 조금씩 침식되며 결국 오늘날의 모습을 완성하게 된 채석강의 환경은 자연의 질서가 인간적인 노력과 창조의 과정에 비해 결코 녹록치 않음을 말해주는 장면일 수 있다. 그러나 그 모든 험난한 과정들을 자연은 묵묵히, 담담하게 받아들였으며 그리고는 이겨내었다.
인간이 어떻게든 애써 자신의 흔적을 남기기 위해 몸부림칠 때, 자연의 존재는 이처럼 그 자신의 모습으로서 자신의 역사를 증명한다. 자연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순리대로 따르는 것, 순리에 맞서지 않는 것이다. 따라야 할 것은 당장은 모순되고 괴롭게 느껴지더라도 따라야 하며, 그것에 맞서 무리하게 대응하고자 할 때 생태계의 조화로운 균형 관계는 파괴되고 깨어지고 만다.
어차피 주어진 길이라면 피하지 말아야 한다. 피하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 고통스러울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시선은 여기서 느릿느릿 눈앞을 지나가는 한 마리 달팽이에게로 고정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검은 수렁 한복판을 느릿느릿 간다 저런 절 한 채를 뒤집어쓰고 살 수 있다면…… 동해안 아름다운 길 길게 풀린다.
--- 「달팽이」 전문
인간의 몸이란, 시인에겐 섬같은 ‘유배지’(「비」)이다. 우리가 그것에게서 벗어날 방법은 없다. 존재에겐 존재가 짊어져야 할 조건이 있다. 그걸 회피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은 자연의 순리에 벗어나고자 몸부림치는 일이다. 차라리 순리대로 받아들이고 그걸 당연시 여기는 것이 보다 건전하다. 각각의 존재에겐 그가 짊어지고 감당하여야 할 짐이 있기 마련이다.
정취암 한쪽 모서리가 이제 슬쩍 보인다.
거기 차게 걸리는 하늘 냄새가 고운 작설차 같다.
이 막바지 가파른 오솔길을 뱃속 깊이 마저 삼켜야
암자에 닿는다. 암자에 닿으면
또 터질 듯 한 번 숨이 막히고
몸이 이루 천 근이다. 그 짐 쿵 부려놓고 큰 대자로
한참 널브러진다. 아, 날 뒤집어 널어놓은 걸까
귀목 한 그루의 굵은 뿌리가, 뿌리의 지옥도가
절개지 비탈에 드러나 무슨 짐승의 해부 같다.
제 마음끼리 구불텅 자꾸 뒤얽히는 내용인데
납작 이지러진 데도 있다. 적개심이나 오기 같은 거,
못 먹는 바위를 또 오래 깨물며 쪼개며 칭칭 감으며
지금도 사타구니에 덜렁 매달고 꿈틀대는 장면이,
잘못 든 길의 불알이 참 너무 무겁다.저기
못 올라갈 고요가 우듬지 끝에 새파랗다.
--- 「정취암엔 지옥도가 있다」 전문
지옥을 짊어진 존재도, 자연 속에서는 그것을 받아들이며 불평 없이 살아간다. 이런 존재란, 인간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아마도 모순이며, 고통의 연속일 것이다. 그러기에 인간의 역사는 그러한 모순의 역사이며 고통과 인내의 역사이다. 그러나 자연은 그러한 모순과 고통을 기꺼이 자신의 일부로 삼는다. 그리고 그러한 흔적들을 자신의 몸 속에 고스란히 담는다. 바로 거기에 자연의 위대함이 있다. 인간이 자연에 배워야 할 점은 이와 같은 자연의 넉넉함과 포용력이다.
넓은 의미에서 우리가 추구하여야 할 바람직한 생태 환경의 모습은 그런 자연의 여유로움, 넉넉함과 포용력을 배우는 길일 것이다.
4. 생태시론의 미래와 전망
이상, 위에서 필자는 거칠게나마 문인수 시인의 시들에 나타난 생태론적인 관심을 존재론적인 시각에서 풀어보기 위해 노력하였다. 솔직히 이러한 필자의 작업에는 앞으로 마저 해결해나가야 할 두 가지 난제가 가로놓여 있다. 존재론과 생태론을 무리 없이 결합하는 작업이 과연 가능한가에 대한 물음 및 과제가 그 하나요, 문인수 시인의 시를 생태론적인 시각에서 바라본다는 것에 어떤 의의를 둘 수 있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 그 하나이다. 이 모든 내용들을 솜씨 좋게 정리해나가기에는 아무래도 필자의 능력이 너무 모자람을 느낀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위의 내용들에 대해, 이 글은 하나의 시금석이 될 것이라는 점이다.
그와 더불어 이 글의 내용은 아직까지는 문인수 시의 극히 일부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라는 점에서, 구체적인 후속 작업들을 거쳐 보다 철저하게 보강될 필요가 있음을 인정하는 바이다. 생태 환경에 대한 관심은 문인수 시편들의 기본 구도인 만큼 앞으로도 이 부분에 대한 논의거리는 상당히 풍부한 편이라고 할 수 있는 까닭이다. 그런 점에서 이 글의 내용은 지나치게 부분적이며 빈약하다. 어쨋건 이 글은 문인수 시를 대상으로 한 최초의 생태시론이라는 점에 그 의의를 두고 싶다.
사실 우리 시대에 쏟아진 의식적인 많은 생태 시인들의 작업을 제쳐두고, 왜 하필 문인수 시인의 시냐 하는 점에 대해서 의아해할 독자들도 있을지 모른다. 그의 시편에서 생태 환경이란 그리 두드러진 주제도 아니요, 조직적으로 추구된 흔적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자의 경우는 도리어 의식적이라고 표나게 내세우지 않는 시인들, 예술가들의 작업 가운데 진정 생태적인 시각에서 가치 있는 작업들을 찾아내어 발굴하는 것이 보다 보람있는 일처럼 생각된다.
생태 담론 자체가 자본주의적 문화 사업의 아이템으로 부상하게 된 작금의 환경은, 우리로 하여금 무엇이 과연 진정한 생태의 본질이며, 생태론을 그토록 힘주어 역설하게 되는 이유인지를 묻게 만든다. 역설적으로 표현한다면 필자는 문인수 시인과 같은 비의식적인 생태론자들이 우리 주변이 많이 등장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생태란 상품이 아니며, 유행이나 소비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이 하나의 상품으로 시장에 유통되고 유행할 때, 본질적인 의미에서의 생태 자체는 우리에게서 더욱 멀어져 간다.
시인에게 바라고 싶은 것이 있다면, 흔들림 없이 꾸준히 지금 현재의 기조대로 자신의 작업을 견지해주길 바랄 뿐이다. (끝)
김유중 (金裕中)
1965년 서울 출생. 서울대 국어교육과 및 동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석, 박사) 졸업.
1991년 ?현대문학? 평론 추천으로 등단. 현재 한국항공대학교 교양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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