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가 된 나무 2 -이영주 시인에게 / 김경주 엄지 아모레스 페로스, 너의 아름다운 짝짝이 슬리퍼를 신고 내 방에서 몰래 피아노를 친다 방문을 몰래 열고 들어와 네 극지에 핀 파충류를 보러 왔다 마라 오늘은 녹색 건반들의 반짝임, 내일은 음의 첨벙에서 아물자 나의 건반 속엔 정교한 물고기들이 둥둥 떠다닌다 눈을 뒤집고 검지 건반을 누르면 검은 대륙이 흰 대륙으로 흘러오고 너의 흰 대륙이 나의 검은 대륙으로 넘친다 오늘은 이론을 주장하기보다는 유리가 된 손가락을 펴보는 일 남자는 페달을 밟고 있고 여자는 그 남자의 발등 위에 두 발을 올려 놓는다 중지 동굴을 발견하고 포크레인으로 떠서 배에 싣고 오는 학자가 있었다 선실에서 피아노를 치며 그는 흐뭇해한다 저 동굴 속엔 가장 영리하게 적응해온 녹조류들이 살 거야 이것이 위조인 것으로 밝혀질 아름다운 지질 오늘은 네 악보에 알 수 없는 백만 개의 지층이 생겨도 좋다 약지 여자가 개화식물처럼 몸을 구부리자 남자가 물방울처럼 굴러 그녀에게 스몄다 손톱은 낙하한다 건반은 번식한다 둥둥 입영 중인 너의 손가락들 손바닥 피아노는 혈관이 파래진다 남자가 피아노를 보라색 수증기라 불렀을 때 여자는 피아노를 달이 가진 적 없는 색으로 덮었다 로켓 속의 물결처럼 잇몸의 재료로 해변이 바뀔 때 피아노야 그대의 입술 속으로 들어가 밤마다 그대의 몸에 천 개의 천문대로 떠올라라 시집『기담』(문학과지성사, 2008)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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