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와 詩魂

그리하여 흘려 쓴 것들/이제니

나뭇잎숨결 2021. 9. 11. 13:47

발화 연습 문장

 -그리하여 흘려 쓴 것들

 

 

- 이제니

 

 

 혼자이기 위해 집으로 가듯 너는 쓴다. 종이 위에서 쓴다. 흘려서 쓴다. 자신에게조차 발각되어서는 안 된다는 듯이. 팔분음표에 하나씩. 한 걸음에 하나씩. 천천히 일정한 박자로. 끊어지듯 이어지며. 이어지듯 끊어지며. 어떤 기계음처럼. 단속적으로. 소리 아닌 소리로 발음되기를 바라면서. 발화자의 입술은 굳게 닫혀 있다. 문이라는 듯이. 그리움이라는 듯이. 열고 열리는 마음이라는 듯이. 마음은 통과한다. 기억은 건너뛴다. 너는 너라고 썼다가 지운다. 너는 나라고 썼다가 지운다. 인칭은 끝없이 나아간다. 일인칭에서 이인칭으로. 이인칭에서 삼인칭으로. 삼인칭에서 다시 일인칭으로. 너는 여러 겹을 가진 인칭 속으로 숨는다. 여러 겹의 목소리는 여러 겹으로 드러나게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너는 어떤 주어 속에 숨는다. 너는 어떤 술어 속에 숨긴다. 숨기기 쉬운 방식으로 서술되는 것. 서술되는 양식 그대로 변모되는 것. 변모되는 형식 그대로 변주되는 것. 목소리는 전진한다. 목소리는 굴절된다. 내면에서 내면으로. 국면에서 국면으로. 나는 지금 임의의 선분을 사이에 두고 나에게 말을 거는 연습을 하고 있다. 하나의 선분 너머로 이쪽과 저쪽이 생겨났으므로. 각각의 자리에 의자를 하나씩 놓아둔다. 고통이 있는 자리에 마음이 있다고 말해도 됩니까. 마음이 있는 자리에 고통이 스미고 있다고 말해도 됩니까. 마음이 있는 자리에 고통이 스미고 있다고 다시 말해도 됩니까. 입 없는 발화자와 귀 없는 내담자 사이에서. 나는 지금 무언가가 무언가를 투과하는 것을 보고 있다. 상상할 수 있는 것은 오고 가는 입방체의 사랑 같은 것이었으므로. 얼굴은 반쪽. 사과로 나뉘는 것. 사과는 나뉘고 그것은 조금 슬픈 기쁨을 줍니다. 조금 슬픈 기쁨을 받으면 두 볼은 붉게 물들고. 물드는 동안은 무언가 잊을 수 있습니다. 사과가 자꾸만 나뉘는 것은 열어볼 수 있는 속살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어루만질 수 있는 표면을 갖고 싶었기 때문이다. 너는 종이 위로 끝없이 끝없이 목소리를 불러들인다. 흘려 쓴 글자들은 왼쪽 끝 맞춤으로 속속 도착하여 정렬되고 있다. 몇 개의 자음과 몇 개의 모음이 겹쳐 흐르기 시작하고. 목소리와 목소리가 더해질수록 어두워지는 어제의 입말들.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있었으므로. 들리지 않는 것을 듣고 있었으므로. 다시금 새롭게 보이고 들리는 장면들이 끼어든다. 고르지 않는 노면의. 갈라진 틈에서. 자라나고. 있는. 뿌리를. 내리며. 자꾸만. 자꾸만. 자리를. 벗어나는. 풀잎들. 꽃잎들. 어둡고. 좁은. 배수관을 타고. 흘러내리는. 물줄기들. 한낮의. 나무. 그늘 속. 잉잉대는 말벌들의. 가없는. 한없는. 날갯짓. 차양막을 뚫고 들어오는. 헤아릴 수 없이. 멀리에서부터 오고 있는. 아직도. 도착하지 않은. 머나먼. 아침 빛의 투과율. 중단된. 생각이. 다시. 이어지는. 궤적을. 가리키는. 손가락들. 자포자기의 말을 내뱉기 직전의. 누구에게도 받아들여진 적 없는 사람의. 눈빛들. 낯빛들. 움츠러드는. 휘굽어드는. 구름 너머 닫힌 어깨로 둥근 나무 꺾임.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치는. 두려움을 바라보는 두려움. 돌멩이를 바라보는 돌멩이. 눈동자를 바라보는 눈동자. 유일한 사라짐으로 유일하게 남으려고 했던 헛된 욕망들. 손톱 위의 흰 반점이 생기기 이전의 시간으로 거슬러 올라감. 흘려 쓴 것들. 흘려 쓴 것들. 흘려 본 것들. 흘려 본 것들. 환각. 환청. 환촉. 환시. 숨겨둔 목소리를 받아 적는 너의 손가락은 점점 떨리고. 불안이 잦아드는 동안 삼켜야만 했던 알약의 종류와 숫자는 점점 더 늘어났으므로. 언젠가부터 불안을 숨기는 대신 떨리는 손가락을 숨겨야만 했고. 너 자신도 알 수 없는 병의 이름들에 잠식당할수록. 그렇게 늘어만 가는 병명으로 네 존재를 규정당할수록. 보이지 않았고 들리지 않았던 사물과 사건들이. 오래도록 부당한 이름과 증후들을 뒤집어쓴 채 숨죽여왔음을 더욱 뚜렷이 인지하게 되었으므로. 흘려 본 것들. 흘려 본 것들. 복도와. 짐칸과. 계단과. 골목 사이에서. 흘려 쓴 것들. 흘려 쓴 것들. 후회와. 반성과. 원망과. 자책 속에서. 딱딱하고 각진 낱말들을 발음하면 왜 그런지 깨어 있는 기분이 듭니다. 어둠 속에서 써 내려가듯 흘려 쓴 글자들은. 그리하여. 젖어 있다. 울고 있다. 깊은 밤 잠의 한가운데에서 문득 깨어나. 너를 지나쳐 간. 너를 지나쳐 온. 너의 전 생애를 증거하는 듯한. 암시하는 듯한. 꿈의 풍경을.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뒤섞인 어떤 문장을. 받아 적으려고 헸으나. 종이 위로 옮기려는 순간 무연히 사라져버리곤 했던. 그 모든 형체를 알 수 없는 자음과 모음들처럼. 흘려 쓴 글자들은. 머뭇거리고 있다. 멈칫거리고 있다. 그리하여 너는 다시 흘려 쓴다. 놓쳐버린 그 문장의 질감 그대로를 재현하기 위해서는 사라져버린 속도 그대로 뒤쫓아가야 한다는 듯이. 아주 짧은 순간 네가 보았던 그 문장들을 되찾기 위해서. 네 의식의 저 깊은 곳으로 흘려버린 그 목소리들을 되짚기 위해서. 발견되기를 바라며 흘러들듯 숨어버린 그 목소리들을 다시 불러들이기 위해서. 오직 너 자신만이 밝혀낼 수 있는 꿈의 내용을 오직 너 자신만이 써내려갈 수 있는 문장 위에 얹어두기 위해서. 문장이 되지 못한 꿈의 세부가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잃어버린 낱말들로만 밝혀낼 수 있는 어떤 너머가 있다는 말이었으므로. 말할 수 없는 바로 그 자리야말로. 너의 말들과 말들이. 살고 있는 곳이었으므로. 살아 있는 곳이었으므로. 살게 하는 것이었으므로. 그리하여 너는 말하지 않는 입으로 다시 흘려 쓴다. 네 속에 묻혀 있는 어떤 말들을. 사무치고 사무치는 그 말들을. 그리하여 흘려 쓴 글자들 속에서. 너 자신도 알아볼 수 없는 몇몇 글자들로 인해서. 꿈의 기억은 꿈의 기록으로 읽히기 시작했고. 꿈의 기록은 꿈의 가족이 되었고. 꿈의 가족이 된 꿈의 기록은 오래 간직해온 고통을 내면으로 내면으로 불러들였고. 고통은 그렇게 자꾸만 자꾸만 불러들여야만 끝난다는 것을 알았으므로. 너는 스스로에게도 들리지 않도록 깊숙이 숨겨둔 바로 그 말들을 하나하나 내뱉기 시작했고. 그렇게 꿈의 가족은 꿈의 가죽이 되어 너의 말들을 부드럽게 받치고 있었으므로. 다시. 이쪽에서 저쪽으로. 저쪽에서 이쪽으로. 하나의 공이 흘러가듯이. 하나의 공이 흘러오듯이. 닫혀 있는 입을 대신하여 낱말들은 또 다른 낱말들로 사라지면서 흐르고 있었고. 그렇게 영원히 오고 가는. 어떤 움직임만이. 어떤 방향성만이. 발화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으므로. 선분의 이쪽과 저쪽에서 자꾸만 나뉘고 있는 것은 조금 슬픈 기쁨을 주는 사과가 아니라 오래전 묻어놓은 나의 얼굴들이었고. 그때 나는 나를 감싸고 있었던 어떤 오래된 공기를 느꼈고. 공기는 외부로 흐르기 이전에 내부로부터 먼저 얼어붙을 수 있는 것이라고 이해했고. 사람은 진흙처럼 흘러내릴 수 있다는 사실을 바닥으로부터 받아들였고. 그러므로 그것을 그것으로 다시 되돌릴 수 있습니까. 그러므로 그것을 그것으로 다시 되돌릴 수 있습니까. 진흙은 여기에서 그리고 저기에서 무수한 가능성으로 흘러내리고 있었고. 흘러내리면서 보여주고 있는 것은 시간의 틈새였고. 시간의 시선만이 시간 속을 가만히 열고 들어갈 수 있다고 믿었으므로. 너는 시간에게 너의 눈과 코와 입을 빌려주었고. 그리하여 시간은 무수한 목소리를 뒤집어쓴 채로 뒤집히고 뒤덮이고 있었으므로. 너는 밤의 간격과 낮의 입술로 이쪽 의자에서 저쪽 의자로 다시 옮겨 앉는다. 너를 흔들어 깨우러 오는 말을 보고 싶다고 쓰면서. 울면서 넓어지는 마음을 만나고 싶다고 쓰면서. 팔분음표에 하나씩. 한 걸음에 하나씩. 너는 지금 발화 연습을 하고 있다고 했다. 너는 지금 발화 연습 문장을 쓰고 있다고 했다. 노래가 되지 않으려는 읊조림처럼. 단속적인 말의 속도로. 어디선가 단선율로 흐르는 축복송이 끼어든다.

 122~12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