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와 詩魂 749

문득,/허수경

문득, 허수경 새싹은 어린 새의 부리처럼 보였다 지난 초봄이었다 그리고 겨울은 왔다 억겁 동안 새들과 여행하면서 씨앗은 새똥을 닮아갔다 새똥도 씨앗을 닮아갔다 붉어져 술이 든 겨울 열매를 쪼면서 아직, 이라는 시간 속에 걸린 잎사귀를 보면서 문득, 새들은 제 깃털을 잎사귀 모양으로 바꾸었다 그 일이 억겁의 어디쯤에서 일어났는지 아무도 모른다 얼음 눈빛으로 하얗게 뜨겁던 겨울 숲을 걷던 어느 날 그 열매의 이름을 문득, 알고 싶었다 새들이 잎사귀를 아리게 쪼다가 잎사귀 모양을 한 깃털을 떨구고 날아간 문득, 숱이 두터운 눈바람 속, 새이던 당신에게 날개의 탄생을 붉게 알려준 그 나무 열매의 이름이 알고 싶었다

시(詩)와 詩魂 2021.09.18

不醉不歸(불취불귀)/허수경

不醉不歸(불취불귀) 허수경 어느 해 봄 그늘 술자리였던가 그때 햇살이 쏟아졌던가 와르르 무너지며 햇살 아래 헝클어져 있었던가 아닌가 다만 마음을 놓아보낸 기억은 없다 마음들끼리는 서로 마주 보았던가 아니었는가 팔 없이 안을 수 있는 것이 있어 너를 안았던가 너는 경계 없는 봄 그늘이었는가 마음은 길을 잃고 저 혼자 몽생 취사하길 바랐으나 가는 것이 문제였던가, 그래서 갔던 길마저 헝클어뜨리며 왔는가 마음아 나 마음을 보내지 않았다 더는 취하지 않아 갈 수도 올 수도 없는 길이 날 묶어 더 이상 안녕하기를 원하지도 않았으나 더 이상 안녕하지도 않았다 봄 그늘 아래 얼굴을 묻고 나 울었던가 울기를 그만두고 다시 걸었던가 나 마음을 놓아보낸 기억만 없다 출처: https://hangil91.tistory.co..

시(詩)와 詩魂 2021.09.18

우연한 감염/허수경

우연한 감염/허수경 만일 내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이 모든 것을 몰랐을까 나의 출생지는 우연한 감염이었네 사랑 이나 폭력을 그렇게 불러볼 수도 있다면 폭력에서 혹은 사랑에서 어디에서 내가 태어났는지 모르지만 지금 보고 있는 이 세계는 내가 태어나 지 않았다면 나에게는 없는 것일까 태어나지 못한 태아라고 고독이 없는 것은 아냐 사랑의 태아 폭력의 태아 태어나지 못한 태아들은 어쩌면 고독의 무시무시함을 안고 태어나지 못한 별에서 긴 산책을 하는지도 몰라 태어난 시간 59분에서 아직 태어나지 않은 0시 사이, 미쳐버릴 것 같은 망설임으로 가득 찬 60초 속에 는 태어나기 직전의 태아와 사라지기 직전의 태아가 서성거리네 태어나게 해, 태어나게 하지 마, 폭력이든 사랑이든 이건 조바심과 실망의 모래사막에 건..

시(詩)와 詩魂 2021.09.18

저 잣숲/허수경

저 잣숲 허수경 내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 여린 푸른 가시들은 햇빛으로 나를 향해 저의 침을 겨누고 있었지요 나는 일종의 포획된 짐승 같은 거였는데 그러니까 저 수성의 내가 느끼는 건 뭐였겠습니까 나는 저 여린 가시들 속에 그러나 혼곤해 있었는데 가시들이 몸을 뚫고 들어와 나는 꿈틀거리며 가시를 바투어내느라 팥죽같이 끓어올랐는데요 그러나 그렇게 약든 마음은 푸른 여린 가시만이 보였을 터지요 일종의 포획된 짐승이었던 나는 실히 기린이나 한 마리 되어 이 세계에 보이지 않는 그러나 지금은 잣이나 쏟아내는 거였는데.....

시(詩)와 詩魂 2021.09.18

달이 걸어오는 밤/허수경

달이 걸어오는 밤 허수경 저 달이 걸어오는 밤이 있다 달은 아스피린 같다 꿀꺽 삼키면 속이 다 환해질 것 같다 내 속이 전구알이 달린 크리스마스 무렵의 전나무같이 환해지고 그 전나무 밑에는 암소 한 마리 나는 암소를 이끌고 해변으로 간다 그 해변에 전구를 단 전나무처럼 앉아 다시 달을 바라보면 오 오, 달은 내 속에 든 통증을 다 삼키고 저 혼자 붉어져 있는데, 통증도 없이 살 수는 없잖아, 다시 그 달을 꿀꺽 삼키면 암소는 달과 함께 내 속으로 들어간다 온 세상을 다 먹일 젖을 생산할 것처럼 통증이 오고 통증은 빛 같다 그 빛은 아스피린 가루 같다 이렇게 기쁜 적이 없었다

시(詩)와 詩魂 2021.09.18

혼자 가질 수 없는 것들/문정희

혼자 가질 수 없는 것들 -문정희 가장 아름다운 것은 손으로 잡을 수 없게 만드셨다 사방에 피어나는 저 나무들과 끛들 사이 푸르게 솟아나는 웃음 같은 것 가장 소중한 것은 혼자 가질 수 없게 만드셨다 새로 건 달력 속에 숨 쉬는 처녀들 당신의 호명을 기다리는 좋은 언어들 가장 사랑스러운 것은 저절로 솟게 만드셨다 서로를 바라보는 눈 속으로 그윽이 떠오르는 별 같은 것

시(詩)와 詩魂 2021.09.11

당신이 살아있다는 것은/이근화

당신이 살아있다는 것은 -이근화 사람들에게 새해 인사를 건넸어 일월 일일 영시 세계 각국의 인사말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순차적으로 이 지구를 돌고 있겠지 그래 그 말이야 당신이 살아 있다는 것 그래서 그걸 축복하고 당신의 살아 있음을 내가 안다는 거 지금 우리가 놀랍게도 이백번을 말한다 해도 자연의 속도로 조금씩 늙어가겠지 벌을 서듯 잠을 자는데 겨드랑이를 집요하게 파고드는 것들 이미 죽은 네가 새해 인사를 건넨다 이미 죽은 내가 새해 국수를 먹는다 자라다가 만 손톱 가는 머리 더이상 살찌지 않는 몸 나도 나를 새롭게 사랑할 수 있을 것 같다 공원 계단에 술 취해 쓰려져 자는 남자의 검은 외투 속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조용하게 잠을 자고 살을 부비고 새해를 낳아주고 싶다 버석버석 일어나 길고 긴 하품을 하고 ..

시(詩)와 詩魂 2021.09.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