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와 詩魂

화엄(華嚴)에 오르다 / 김명인

나뭇잎숨결 2021. 9. 28. 09:15

화엄(華嚴)에 오르다 / 김명인

 


어제 하루는 화엄 경내에서 쉬었으나/ 꿈이 들끓어 노고단을 오르는 아침 길이 마냥/ 바위를 뚫는 천공 같다,/ 돌다리 두드리며 잠긴/ 山門을 밀치고 올라서면 저 천연한/ 수목 속에서도 안 보이는/ 하늘의 雲板을 힘겹게 미는 바람소리 들린다/ 간밤에는 비가 왔으나, 아직 안개가/ 앞선 사람의 자취를 지운다, 마음이 九折羊腸인 듯/ 길을 뚫는다는 것은/ 그렇다, 언제나 처음인 막막한 저 낯선 흡입/ 묵묵히 앞사람의 행로를 따라가지만/ 찾아내는 것은 이미 그의 뒷모습이 아니다// 그럼에도 무엇이 이 산을 힘들게 오르게 하는가/ 길은, 누군들에게 물음이 아니랴/ 저기 산모롱이 이정표를 돌아/ 의문부호로 꼬부라져 羽化登仙해 버린 듯 앞선 일행은/ 꼬리가 없다, 떨어져도 떠도는 산울림처럼/ 이 허방 허우적거리며 여기까지 좇아와서도/ 나는 정작 내 발의 티눈에 새삼스럽게 혼자 아픈가/ 길섶 풀물에 든/ 낡은 經소리 한 구절 내내 떨쳐버리지 못해/ 시큰대는 발자국마다 마음 질척거리는데/ 화엄은 화음 속에 얼굴 감추고 하루종일/ 굴참나무 잔가지에 얹히는 經典을 들어 나를 후려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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