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 26

침묵에 대하여

침묵에 대하여 ​ 고재종 ​ 용구산 아래 있는 나의 오래된 우거는 용과 거북이가 오랫동안 나타나지 않는 사방이 단단한 침묵으로 둘러쳐 있다 ​ 침묵은 녹슨 함석대문에 붙어 있고 마당가에 비쭉비쭉 솟은 망촛대로 자라고 침묵은, 재선충병에 걸린 뜰의 반송으로 붉어지고 토방에 벗어 둔 검정고무신으로 암암하다 ​ 어느덧 내 몸조차 침묵으로 하나 됐다가 그중 몇 개쯤 파계하여 들고양이로 울다가 때론 용과 거북이가 재림하길 염불하게도 하는 무자비하고 포악한 침묵이란 짐승은 ​ 송송 구멍이 뚫리는 외로움의 골다공증과 사괘가 마구 뒤틀리는 고독의 퇴행성관절염과 바람에 욱신거리는 그리움의 신경통을 앓는 앞집 폐가에 달라붙어 와지끈, 그 근골이 주저앉을 때까지 시간의 공적(空寂)에 대하여 더는 묻지도 않는다 ​ 침묵의 폐..

시(詩)와 詩魂 2024.03.31

출렁거림에 대하여 / 고재종

출렁거림에 대하여 ​ 고재종 ​ 너를 만나고 온 날은, 어쩌랴 마음에 반짝이는 물비늘 같은 것 가득 출렁거려서 바람 불어오는 강둑에 오래오래 서 있느니 잔 바람 한 자락에도 한없이 물살 치는 잎새처럼 네 숨결 한 올에 내 가슴별처럼 희게 부서지던 그 못다 한 시간들이 마냥 출렁거려서 내가 시방도 강변의 조약돌로 일렁이건 말건 내가 시방도 강둑에 패랭이꽃 총총 피우건 말건 ​

시(詩)와 詩魂 2024.03.31

봄 마당에서 한나절 / 고재종

봄 마당에서 한나절 ​ 고재종 ​ 하늘은 쪽빛이고 마당은 환하다. 햇병아리 몇 마리가 무언가를 콕콕 찍고 토방의 늙은 개가 그걸 물끄러미 쳐다본다. 나도 세상 살며 바람에 꾸벅이는 제비꽃이나 처마 밑에 떨어진 참새 주검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일이 잦아진다. 담 너머 대숲의 고요 모르는 수런거림과 사립 옆 윤기 나는 감나무 잎의 반짝거림에, 한때는 목숨이라도 걸 듯 그리움과 노여움을 옹호하기도 했던 것이다. 먹이 모자라던 까치 지난 겨울엔 개밥 그덩에까지 내려와 어슬렁거리더니 그 까치 시방은 마당을 차고 오르며 흰 무늬 날개 활짝 펴서 대숲 위를 다닌다. 그 부신 꿈의 비상엔 언제나 차고 오를 마당과 몇 알의 밥알이 필요했던 것인데, 나는 시방 생의 어디쯤 어슬렁거리며 날개 짓 해보는 것인가. 마당은 환하..

시(詩)와 詩魂 2024.03.31

숲의 묵언 / 고재종

숲의 묵언 ​ 고재종 ​ 숲은 아무 말 않고 잎사귀를 보여준다. 저 부신 햇살에 속창까지 길러 낸 푸르른 투명함 바람 한 자락에도 온 세상 환하게 반짝이며 일렁이는 잎새 앞에서 내 생 맑게 씻어내고 걸러낼 것은 무엇인가 ​ 숲은 아무 말 않고 새소리를 들려준다. 저것이 어치인지 찌르레기인지 소리 떨리는 둥그런 파문 속에서 무명의 귀청을 열고 들어가 그 무슨 득음을 이루었으면 한다 숲은 그러자 이윽고 꽃을 흔들어 준다 ​ 어제는 산나리꽃 오늘은 달맞이꽃 깊은 골 백도라지조차 흔들어 주니 내 생 또 얼마나 순해져야 맑은 꽃 한 송이 우주 속 깊이 밀어 올릴 수 있을까 ​ 문득 계곡의 물소리를 듣는다 때마침 오솔길의 다람쥐 눈빛에 취해 면경처럼 환한 마음일 때라야 들려오는 낭랑한 청청한 소리여 이 고요 지경을..

시(詩)와 詩魂 2024.03.31

무늬 / 고재종

무늬 ​ 고재종 ​ 나뭇잎 그늘이 일렁일렁 오솔길을 쓸고 오솔길에 무늬를 짠다 ​ 나뭇잎 그늘 없는 나뭇잎이 어디에 있는가 ​ 나뭇잎 그늘에 누워 마음의 상처를 쓸지만 상처 없이는 생의 무늬를 짜지못한다 ​ 아. 사랑의 그늘은 나를 이윽하게 하지 이윽함 없는 봄날은 찬란히 갔지 ​ 나뭇잎 그늘이 일렁일렁 내 생의 이정(里程)을 쓸고 그 이정의 무늬를 밟으며 ​ 나는 이제 막 중생의 하루를 통과하는데 ​ 시방 눈앞에 일렁이는 게 나뭇잎인가 그 그늘인가

시(詩)와 詩魂 2024.03.31

면면함에 대하여 / 고재종

면면함에 대하여 ​ 고재종 ​ 너 들어 보았니 저 동구밖 느티나무의 푸르른 울음소리 ​ 날이면 날마다 삭풍 되게는 치고 우듬지 끝에 별 하나 매달지 못하던 지난 겨울 온몸 상처투성이인 저 나무 제 상처마다에서 뽑아내던 푸르른 울음소리 ​ 너 들어 보았니 다 청산하고 떠나버리는 마을에 잔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그래도 지킬 것은 지켜야 한다고 소리 죽여 흐느끼던 소리 가지 팽팽히 후리던 소리 ​ 오늘은 그 푸르른 울음 모두 이파리 이파리에 내주어 저렇게 생생한 초록의 광휘를 저렇게 생생히 내뿜는데 ​ 앞들에서 모를 내다 허리 펴는 사람들 왜 저 나무 한참씩이나 쳐다보겠니 어디선가 북소리는 왜 둥둥둥둥 울려나겠니

시(詩)와 詩魂 2024.03.31

눈물을 위하여 / 고재종

눈물을 위하여 ​ 고재종 ​ 저 오월 맑은 햇살 속 강변의 미루나무로 서고 싶다 미풍 한자락에도 연초록 이파리들 반짝반짝, 한량없는 물살로 파닥이며 저렇듯 굽이굽이, 제 세월의 피로 흐르는 강물에 기인 그림자 드리우고 싶다 그러다 그대 이윽고 강둑에 우뚝 나서 윤기 흐르는 머리칼 치렁치렁 날리며 저 강물 끝으로 고개 드는 그대의 두 눈 가득 살아 글썽이는 그 무슨 슬픔 그 무슨 아름다움을 위해서면 그대의 묵묵한 배경이 되어도 좋다 그대의 등 뒤로 돌아가 가만히 서서 나 또한 강끝 저 멀리로 눈 드는 멀쑥한 뼈의 미루나무나 되고 싶다

시(詩)와 詩魂 2024.03.31

너의 얼굴 / 고재종

너의 얼굴 ​ 고재종 ​ 예기치 않은 어느 날 내 앞에서 눈물로 중독된 눈을 하고서는 무언가를 애써 말하려고 더듬, 더듬거리는 그러나 끝내 온몸이 뒤틀려버려 말을 못하는 너의 얼굴은 내게 계시(啓示)다 ​ 다른 어떤 것으로도 돌이킬 수 없는 무력한 네 얼굴로 나는 상처 받고 무력한 네 얼굴에 저항할 수 없다 ​ 버려진 고아처럼 나는 나를 얼마나 울어야 하나 홀로된 과부처럼 나는 세상을 어떻게 읽어야 하나 한밤중 나그네처럼 별의 지도도 없이 ​ 예기치 않게 나타난 내 앞의 너는 네가 당하는 가난과 고통으로 나의 하늘이다 나는 너로 인해 죄책 하지도 않고 나는 너를 연민하지도 않고 그러므로 나는 다만 너를 모실 뿐이다 ​ 기막히게는 말할 수 없는 네 뒤로 기막히게는 번지는 밀감 빛 노을을 네가 잃어버린 날에..

시(詩)와 詩魂 2024.03.31

꽃의 권력 / 고재종

꽃의 권력 ​ 고재종 ​ 꽃을 꽃이라고 가만 불러 보면 눈앞에 이는 홍색 자색 연분홍 물결 ​ 꽃이 꽃이라서 가만 코에 대 보면 물큰, 향기는 알 수도 없이 해독된다 ​ 꽃 속에 번개가 있고 번개는 영영 찰나의 황홀을 각인하는데 ​ 꽃 핀 처녀들의 얼굴에서 오만 가지의 꽃들을 읽는 나의 난봉은 ​ 벌 나비가 먼저 알고 담 너머 大鵬도 다 아는 일이어서 ​ 나는 이미 난 길들의 지도를 버리고 하릴없는 꽃길에서는 꽃의 권력을 따른다

시(詩)와 詩魂 2024.03.31

기도하는 사람 / 고재종

기도하는 사람 ​ 고재종 ​ 길가의 오락기에서 아무리 두들겨대도 한사코 튀어나오는 두더지 대가리처럼 한사코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퇴행성 고독의 습관 같은 게 그를 홀로 세운다 ​ 기도할 수 있는데 왜 우느냐고 하지 말아라 울 수라도 있다면 왜 기도하겠느냐고 반문하는 데에도 지쳐 있다 ​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게 없는 생이 나를 참을 수 없게 한다던 랭보여 중대장의 명령 하나에 인분을 먹은 병사들의 굴욕 같은 생도 이미 참았으니 ​ 다만 오그라지고 우그러지고 말라비틀어진 과일 도사리 같은 것으로 그를 아무도 눈여기지 않는 곳에 홀로 세우는 저주받은 고독의 습관이라니, ​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은 저 풍찬노숙의 나날을 누구에게 물을까

시(詩)와 詩魂 2024.03.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