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와 詩魂

숲의 묵언 / 고재종

나뭇잎숨결 2024. 3. 31. 14:07

 

숲의 묵언

고재종

숲은 아무 말 않고 잎사귀를 보여준다.

저 부신 햇살에 속창까지 길러 낸 푸르른 투명함

바람 한 자락에도 온 세상 환하게 반짝이며

일렁이는 잎새 앞에서

내 생 맑게 씻어내고 걸러낼 것은 무엇인가

숲은 아무 말 않고 새소리를 들려준다.

저것이 어치인지 찌르레기인지

소리 떨리는 둥그런 파문 속에서 무명의 귀청을 열고 들어가

그 무슨 득음을 이루었으면 한다

숲은 그러자 이윽고 꽃을 흔들어 준다

어제는 산나리꽃 오늘은 달맞이꽃

깊은 골 백도라지조차 흔들어 주니

내 생 또 얼마나 순해져야

맑은 꽃 한 송이 우주 속 깊이

밀어 올릴 수 있을까

문득 계곡의 물소리를 듣는다

때마침 오솔길의 다람쥐 눈빛에 취해

면경처럼 환한 마음일 때라야 들려오는 낭랑한 청청한 소리여

이 고요 지경을 여는 소리여

그러면 숲의 침묵이 이룬 외로운 봉우리 하나

이젠 말쑥하게 닦을 수 있을 것 같다

설령 내 석삼년 벙어리 외로움일지라도

이 숲 앞에선 아무 것도 아니다

숲은 다만 시원의 솔바람 소리를 들려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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