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소서 성령님. 주님의 빛 그 빛살을 하늘에서 내리소서.
가난한이 아버지, 오소서 은총주님, 오소서 마음의 빛.
가장좋은 위로자 영혼의 기쁜 손님 저희 생기 돋우소서.
일할때에 휴식을 무더위에 시원함을 슬플때에 위로를.
영원하신 행복의빛 저희마음 깊은곳을 가득하게 채우소서.
주님도움 없으시면 저희삶의 그모든것 해로운것 뿐이리라.
허물들은 씻어주고 메마른땅 물주시고 병든것을 고치소서.
굳은마음 풀어주고 차디찬맘 데우시고 빗나간길 바루소서.
성령님을 굳게믿고 의지하는 이들에게 성령칠은 베푸소서.
덕행공로 쌓게하고 구원의문 활짝열어 영원복락 주옵소서.
프란치스코교황강론(1)
성령 강림 대축일 강론 “성령께서 하느님 사랑을 바탕으로 한 열린 교회가 되게 하십니다”
Alessandro Di Bussolo / 번역 이재협 신부
“성령의 학교로 갑시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6월 5일 오전 조반니 바티스타 레(Giovanni Battista Re) 수석 추기경의 집전으로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거행된 성령 강림 대축일 미사 강론에서 이 같이 초대했다. 교황은 상처 입은 우리에게 다시 시작하라고 가르쳐 주시는 성령을 만나는 자리가 성령의 학교라고 설명했다. 아울러 성령께서는 우리를 바라보시는 하느님의 사랑스러운 눈길을 삶의 우선순위에 놓아주신다며, “성령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결정을 내리고, 교회로서 함께 걷고, 성령께 순종하고, 세상을 향해 마음을 열도록” 성령을 부르며 기도하자고 권고했다. 추기경단과 미사에 함께한 교황은 성령께서 “이상적인 세상, 이상적인 교회”가 아니라 “환한 곳에서 꾸밈없이 실재하는 있는 그대로의 세상과 있는 그대로의 교회를 사랑하도록 이끄신다”고 강조했다. 반면 악한 영은 “뒷담화, 수군거림, 잡담을 조장한다”고 말했다.
모든 것을 새롭게 바라보게 하시는 분
교황은 이날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 곧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요한 14,26)라는 구절을 묵상하며 강론을 시작했다. 교황은 이 구절에서 “모든 것”이라는 단어에 주목하며 “성령을 받은 이에게 이 같은 온전하고 새로운 이해가 어떻게 가능한가?” 하고 되물었다. 이어 여기서 말하는 “모든 것”이란 “양의 문제가 아니라 질적인 문제, 전망의 문제”라고 설명했다.
“성령께서는 예수님의 눈으로 모든 것을 새롭게 바라보도록 해 주십니다.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인생의 거대한 여정에서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어디서부터 출발해야 하는지, 어떤 길을 가야 하는지, 어떻게 걸어가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의 출발점은 거저 주어진 선물인 하느님 사랑
교황은 첫 번째로 우리가 어디서부터 출발해야 하는지, 곧 “영적 삶의 출발점”이 어디인지 성령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다고 설명했다. 예수님께서는 이날 복음을 통해 이미 그 출발점을 언급하셨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요한14,15). 이것이 바로 성령의 논리다. 성령의 논리는 “계명을 지키면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생각, “사랑이 본질적으로 우리의 계명 준수, 우리의 능력, 우리의 종교심에서 나온다”는 우리의 확고한 생각을 뒤집는다.
“성령께서는 사랑이 우리의 기초가 되지 않으면 나머지 모든 것은 헛된 것임을 일깨워 주십니다. 그 사랑은 우리의 능력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선물입니다. 우리 마음에 사랑을 부어 주시는 분이 사랑의 성령이십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사랑받고 있음을 느끼게 해 주시며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십니다. 성령께서는 우리 영적 삶의 ‘원동력’이십니다.”
좌절 속에서 체험하는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신뢰
예수님께서는 “성령께서 (…)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요한14,26)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구절과 관련해 교황은 “성령은 능동적인 기억”이라며 “성령께서는 우리 마음속에 있는 하느님 사랑을 끊임없이 불러 일으키신다”고 설명했다. 이어 우리는 죄를 용서받을 때 성령을 체험한다며, 이러한 영적 기억을 소중히 여기는 게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제대로 되지 않는 상황”을 떠올리곤 한다. 우리는 우리의 “실패와 부족함”을 떠올리는 목소리, “넌 할 수 없어, 넌 부족해”라고 속삭이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하지만 성령의 목소리는 이러한 목소리와 완전히 다르다.
“성령께서는 완전히 다른 것을 우리에게 떠올려 주십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여러분은 유일무이한 존재, 선택된 존재, 언제나 사랑받는 소중한 존재입니다. 여러분이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을 잃을 때조차도,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신뢰하십니다!”
기억을 치유하시고 우리를 과거와 화해시키시는 분
“나에게는 단순한 위로의 말로 해결될 수 없는 많은 문제, 상처, 걱정거리가 있다”고 이의를 제기하는 이에게 교황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위로자이신 성령께서는 치유와 부활의 영이십니다. 성령께서는 여러분 내면에서 화끈거리게 하는 상처를 고치실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상처를 준 사람이나 그러한 상황에 대한 기억을 송두리째 잘라내라고 말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성령의 현존을 통해 그러한 기억을 정화하라고 가르치십니다.” 수난 전에 예수님을 부인했던 베드로, 그리스도인을 박해했던 바오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성령께서는 사도들이 좌절을 겪었을 때에도 같은 방법으로 위로하셨다. 교황은 혼자서는 잘못과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없지만 “위로자이신 성령과 함께라면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기억을 치유하시기 때문입니다. 어떻게요? 성령께서는 가장 중요한 것을 목록의 맨 위에 두십니다. 곧,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기억과 우리를 바라보시는 하느님의 사랑스러운 눈길입니다. 이런 식으로 성령께서 우리 삶의 우선순위를 바로잡아 주십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인정하고, 우리 자신을 용서하며, 과거와 화해하도록 가르치십니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다시 시작하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올바른 길을 선택하기 위해 악령의 목소리와 성령의 목소리를 식별하기
교황은 출발점에 대한 묵상에 이어 두 번째로 “성령께서는 우리가 어떤 길을 택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신다”고 강조했다. 성령께서는 “우리 삶에서 마주하는 온갖 선택의 갈림길에서 우리에게 최선의 길을 택하도록” 이끌어 주신다. 교황은 “이를 위해 악령의 목소리와 성령의 목소리를 식별하는 법을 아는 게 중요하다”며 몇 가지 사례를 들어 설명했다. “성령께서는 당신의 여정 안에서 모든 것이 잘 되고 있다고 절대 말씀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죠. 성령께서는 여러분을 바로잡아 주시고, (…) 여러분을 변화시켜 주시고, 여러분의 거짓말과 기만에 맞서 싸우도록 재촉하십니다. 심지어 그것이 힘든 일, 내면의 투쟁과 희생을 필요로 할 때에도 말입니다. 하지만 악령은 이와 반대로 여러분의 생각대로, 여러분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도록 부추깁니다. 악령은 여러분이 원하는 대로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게 만듭니다. 그러다 언젠가 여러분의 내면이 공허해지면, 악령은 여러분을 비난하고 나락으로 던져 버립니다.”
“삶의 여정에서 여러분을 바로잡아 주시는 성령께서는 결코 여러분이 나락으로 떨어지게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성령께서는 여러분의 손을 잡아 주시고, 여러분을 위로하시며, 끊임없이 용기를 북돋아 주십니다.”
비관적인 생각은 악에게서 나옵니다
교황은 “억울함과 비관적인 생각, 부정적인 생각으로 괴로워할 때마다 이런 것들이 결코 성령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는 게 좋다”고 말했다. “억울함, 비관적인 생각, 슬픈 생각들은 결코 성령에게서 나오지 않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부정적인 마음 안에 자리잡은 악으로부터 나옵니다. 악은 다음과 같은 전략을 종종 사용합니다. 곧, 조급함과 피해의식, 자기연민을 통해 우리의 모든 문제에 대해 남 탓을 하게 만듭니다. 신경질적이고 의심을 품게 하며, 불평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성령께서는 절대 낙심하지 말고 언제나 새롭게 다시 시작하라고 초대하십니다. (…) 우리가 어떻게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요? 다른 누군가가 시작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먼저 뛰어들 때 가능합니다. 또한 우리가 만나는 사람 누구에게나 불평불만이 아니라 희망과 기쁨을 퍼뜨림으로써 새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절대 다른 이를 질투하지 마십시오. 그들의 성공을 함께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상적 교회가 아닌, 있는 그대로의 교회를 사랑하도록 이끄시는 분
교황은 “성령께서는 이상주의자가 아니라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라고 설명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지금 여기’에 집중하길 바라십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간과 장소는 그 자체로 은총의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악령은 우리의 생각을 ‘지금 여기’가 아니라 다른 곳으로 향하게 한다. 곧, 우리의 후회나 향수, 잘못들에 사로잡힌 과거에 머물러 있게 한다. “혹은 두려움, 착각, 잘못된 희망을 부채질하며 미래를 바라보게 합니다.”
“하지만 성령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사랑하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이상적인 세상, 이상적인 교회, 완전무결한 수도회가 아니라, 환한 곳에서 투명하고 꾸밈없이 실재하는 있는 그대로의 세상과 있는 그대로의 교회를 사랑하도록 이끄십니다. 뒷담화, 수군거림, 잡담을 조장하는 악령과는 얼마나 다른 분이신지요!”
교회가 어떻게 걸어가야 하는지 가르쳐 주시는 성령
교황은 “성령께서는 우리가 한 교회로서 일치를 이루길 바라신다”며 “교회가 어떻게 걸어가야 하는지 가르쳐 주신다”고 말했다. 이것이 강론 서두에 언급한 성령의 세 가지 가르침 중 마지막 내용이다. 이날 복음은 제자들이 두려운 마음에 “다락방에 숨어 있었으며, 성령께서 내려와 그들을 밖으로 나오게 하셨다”(요한 20,19-23 참조)고 전한다. 성령께서는 제자들로 하여금 모든 이에게 문을 열도록 이끌어 주신다.
“어느 시대에나 성령께서는 우리의 계획을 뒤엎으시고, 당신의 새로움에 마음을 열도록 하셨습니다. 성령께서는 교회가 자기 자신 안에 갇힌 채로 남아있지 말고 밖으로 나가 선포해야 한다는 중대한 필요성을 가르쳐 주십니다. 교회는 울타리를 튼튼하게 만드는 양떼가 아니라 모든 이가 하느님의 사랑으로 길러질 수 있는 초원이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교회는 분리 장벽이 없는 환대의 집이 돼야 합니다.”
오직 사익을 옹호하는 방향으로 이끄는 세속의 영
교황은 세속의 영을 경계해야 한다고 말했다. “세속의 영은 우리가 오로지 자신의 문제나 사익에만 집중하도록, 오직 우리가 속한 나라나 공동체만을 용감하게 지키게 만듭니다.” 하지만 성령께서는 이런 방식으로 활동하지 않으신다. “성령께서는 우리 자신을 잊고 모든 이를 향해 마음을 열라고 초대하십니다. 이런 방식으로 성령께서 교회를 젊어지게 하십니다.” 교회를 살아 숨쉬게 만드는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성령이시다. “교회는 프로그램이나 현대화 노력만으론 충분치 않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는 조급한 마음의 집착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십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우리 자신으로부터 해방시키시고 세상으로 보내시기 위해 오래고도 여전히 새로운 길, 곧 증거의 길, 가난의 길, 선교의 길을 걸어가도록 초대하십니다.”
분열을 일으키는 것처럼 보여도 조화를 이루시는 분
끝으로 교황은 원고에 없지만 즉석에서 다음과 같은 설명을 덧붙였다.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아침 장면을 보면 성령께서 “다른 언어와 다른 행동”을 하게 만드시는 것처럼 보인다. 교황은 성령께서 “분열과 무질서”를 창조하시는 분이신 동시에 “조화를 이루시는 분”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성령께서는 다양한 은사를 구분하시지만, 오히려 차이 안에서 조화를 이루시는 분이시다. “이것이 교회의 풍요로움입니다.” 교황은 다음과 같은 초대로 성령 강림 대축일 미사 강론을 끝맺었다. “우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시는 성령의 학교에서 정진하도록 합시다. 날마다 성령을 부르도록 합시다.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우리를 바라보시는 하느님의 눈길에서 출발하고, 성령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결정을 내리고, 교회로서 함께 걷고, 성령께 순종하고, 세상을 향해 마음을 열도록 합시다.”
프란치스코 교황 강론(2)
“내가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로 보낼 보호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요한 복음 15:26). 이 말씀과 함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성령, 그 최고의 선물, 선물 중의 선물을 보내 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성령님을 설명하시면서 특이하고 신비한 단어를 쓰십니다. 바로 파라클리토[Paraclito(Paraclete)]입니다. 오늘 이 단어에 대해서 묵상합시다, 이 단어는 많은 의미들을 갖고 있어서 번역하기 쉽지 않습니다. 본래 그것은 두 가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즉, 위로자와 보호자.
파라클리토는 위로자이십니다. 우리 모두는, 특히 현재 팬데믹으로 겪고 있는 것들과 같은 어려움의 때에, 위로를 찾습니다. 그러나 자주 우리는 오로지 세속적인 위로들, 빨리 사라지는 덧없는 위로들에만 의지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천상의 위로, 성령님을 주시는데 그분께서는 “가장 좋은 위로자”이십니다(부속가). 무엇이 다릅니까? 세상의 위로들은 진통제와 같습니다. 그것들은 잠깐 순간적인 위안을 줄 수 있지만 그러나 우리가 내면 깊이 갖고 있는 병을 고치지는 못합니다. 그것들은 우리를 달래 줄 수는 있지만 그러나 우리를 마음 깊은 곳에서 치유하지는 못합니다. 그것들은 피상적으로 감각의 차원에서 작용하지만 그러나 좀처럼 우리의 마음을 어루만지지 못합니다. 오로지 우리가 있는 그대로 사랑 받는다고 느끼게 만드시는 어떤 분만이 우리의 마음에 평화를 주실 수 있으십니다. 성령님, 하느님의 사랑께서 바로 그렇게 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내면으로 내려 오십니다. 영으로서 그분께서 우리의 영 안에서 활동하십니다. 그분께서 “마음 안으로” 내려오십니다, “영혼의 기쁜 손님”(부속가). 그분께서는 바로 하느님의 사랑이신데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홀로 외로운 이들에게 현존하심은 그 자체가 위로의 원천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자매님, 사랑하는 형제님, 만약 당신이 고독의 어둠을 느낀다면, 만약 당신이 당신의 내면 안에 있는 장애물이 희망으로 가는 길을 막는다고 느낀다면, 만약 당신의 마음에 곪아 터진 상처가 있다면, 만약 당신이 출구를 찾지 못한다면 그렇다면 당신의 마음을 성령께 여십시오. 성 보나벤투라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시련이 더 큰 곳에서는 그분께서 더 큰 위로를 가져다 주십니다. 그것은 일이 잘 될 때는 우리에게 위안을 주고 아첨하지만 잘되지 않을 때는 우리를 조롱하고 비난하는 세상의 것과 같지 않습니다”(Homily in the Octave of the Ascension). 그것이 세상이 하는 짓입니다, 특히 적대적인 영, 악마가 하는 짓입니다. 먼저 그는 우리에게 아첨하고 우리가 천하무적이라고 느끼게 만듭니다(왜냐하면 악마의 감언이설이 우리의 허영심을 먹여 키우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우리를 내동댕이치고 우리가 실패자라고 느끼게 만듭니다. 그는 우리를 가지고 놉니다. 그는 우리를 넘어뜨리기 위해서 모든 일을 하지만 부활하신 주님의 성령께서는 우리를 일으켜 세우고 싶어하십니다. 사도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그리스도를 부인했기 때문에 그날 아침에 외로웠고 갈피를 못 잡으며 닫혀 있는 문 뒤에 웅크리고 두려움 속에서 살면서 그들의 나약함과 실패와 죄에 짓눌려서 그들은 외로웠습니다. 그들이 예수님과 함께 보냈던 수년이 그들을 변화시키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원래 있었던 모습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성령을 받았고 모든 것이 바뀌었습니다. 문제들과 실패들이 남아 있었지만 그러나 그들은 더 이상 그것들이 두렵지 않았고 그들에게 적대적인 누구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내면에서 위로를 느꼈고 그들은 하느님의 위로가 흘러 넘치기를 원했습니다. 예전에 그들은 두려워했습니다. 이제 그들의 유일한 두려움은 그들이 받은 사랑을 증언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뿐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예언하셨습니다.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그리고 너희도 (…) 나를 증언할 것이다(요한 복음 15,26-27).
한 걸음 더 나아갑시다. 우리도 또한 성령님 안에서 증언하도록 파라클리토 위로자가 되도록 부름 받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그분이 가져다 주신 위로의 몸이 되라고 청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습니까? 위대한 연설을 함으로써가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 가까이 다가감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진부한 말이 아니라 기도와 친밀함으로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친밀함과 동정과 다정한 사랑이 언제나 하느님의 “트레이드마크”라는 것을 기억합시다. 파라클리토께서는 오늘날이 위로의 시대라고 교회에 말씀하고 계십니다. 오늘날은 이교와 싸우기 보다 오히려 더욱 기쁘게 더 많이 복음을 선포하기 위한 시대입니다. 세속화의 드라마를 한탄하기 보다 오히려 부활하신 주님의 기쁨을 가져다 주기 위한 시대입니다. 세속화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사랑을 부어주기 위한 시대입니다. 규칙과 법규들을 설득하기 위한 때라기보다 오히려 더욱 자비를 증언하기 위한 때입니다. 파라클리토 성령님의 시대입니다! 파라클리토 성령님 안에서 마음의 자유의 시대입니다.
파라클리토 성령께서는 또한 보호자이십니다. 보호자께서는 그분들이 오늘날 하시는 일들을 예수님의 시대에는 하지 않으셨습니다. 피고인들을 대신하여 말씀하시기 보다는 그분들은 그저 그들의 옆에 서서 그들이 자기 자신의 변호를 위해서 쓸 수 있는 논거들을 주셨습니다. 그분은 “진리의 영”(요한 복음 15,26)이시기 때문에 그것이 파라클리토 성령께서 하신 일입니다, 그분께서는 우리를 대신하시는 것이 아니라 느낌과 생각들을 불어 넣으심으로써 악의 기만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억지로 하게 하지 않으시고 그토록 사려 깊게 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제안하시고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기만의 영, 악마는 반대의 일을 합니다. 그는 우리에게 억지로 시키려고 합니다. 그는 우리가 항상 악의 유혹과 유도에 굴복해야 한다고 생각하도록 만들고 싶어 합니다. 파라클리토 성령님 우리 보호자의 전형적인 세가지 제안들을 받아 들입시다. 그것들은 오늘 날 너무나 퍼져 있는 세 가지 유혹들에 대한 본질적인 세 가지 해독제들입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첫 번째 충고는 “현재를 살아라”라는 것입니다. 현재, 과거나 미래가 아닌. 파라클리토 성령께서는 우리 자신을 과거에 대한 회상이나 원한 또는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나 두려움에 마비되도록 놓아 두라는 유혹에 반대하여 오늘이 제일임을 확언하십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지금 현재의 은총을 일깨워주십니다. 우리에게 더 좋은 시간은 없습니다. 지금, 여기 그리고 지금이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그리고 우리의 삶을 선물로 만들 수 있는 유일한 한번뿐인 시간입니다. 현재를 삽시다!
성령께서는 또한 우리에게 “전체를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전체, 부분이 아닌. 성령께서는 고립된 개인들을 만드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교회로 우리 카리스마의 넓은 다양성 안에서 결코 획일성이 아닌 일치로 우리를 만드십니다. 파라클리토 성령께서는 전체가 제일임을 확언하십니다. 성령께서는 그곳 전체 안에서 공동체 안에서 일하시며 새로움을 가져다 주시는 것을 좋아하십니다. 사도들을 바라봅시다. 그들은 모두 매우 달랐습니다. 예를 들어 그들 중에는 로마인들에게 협력했던 세리 마태오 그리고 로마인들과 싸웠던 열혈당원이라 불리는 시몬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반대되는 정치적 이념을 갖고 있었고 세상에 대한 다른 비전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일단 성령님을 받자 그들은 제일의 우선권을 그들의 인간적인 관점들에 주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계획이신 “전체”에 주는 것을 배웠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성령님께 귀 기울여 듣는다면 우리는 보수주의자와 진보주의자, 전통주의자와 개혁자, 우익과 좌익에 관심을 두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들이 우리의 기준이 될 때 그럴 때 교회는 성령님을 잊어버려 왔습니다. 파리클리토 성령께서 우리를 일치로, 화합으로, 다양성의 조화로 밀어 주십니다. 그분께서 우리가 우리 자신을 한 몸의 지체들로 서로 서로의 형제 자매들로 보게 만드십니다. 전체를 봅시다! 원수는 반대가 되는 다양성을 바라고 그리하여 그는 그것들이 이데올로기가 되도록 만듭니다. 이데올로기들에 대해 아니오, 전체에 네 라고 말하십시오.
성령님의 세 번째 충고는 “하느님을 너 자신의 앞에 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성 생활에서 중대한 결정적인 단계인데 그 영성 생활은 우리 자신의 장점들이나 성취들의 총합이 아니라 하느님에 대한 겸손한 열림입니다. 성령께서는 은총이 제일임을 확언하십니다. 오로지 우리 자신을 비움으로써 우리는 주님을 위한 자리를 마련합니다. 오로지 우리 자신을 그분께 내어드림으로써 우리는 우리 자신을 발견합니다. 오로지 마음이 가난해 짐으로써만 우리는 성령 안에서 부유해 집니다. 이것은 또한 교회에도 해당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노력으로는 아무도 구원하지 못합니다, 우리 자신조차도 구원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프로젝트들과 우리의 조직 기구들과 개혁을 위한 우리의 계획들에 우선권을 준다면 우리는 오로지 효과와 효율성만을 염려할 것입니다, 우리는 오로지 획일적인 수평적인 조건들 안에서만 생각할 것이고 결국 우리는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할 것입니다. “-주의(ism)”는 분열시키고 갈라 놓는 이데올로기입니다. 교회는 사람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인간의 조직이 아닙니다, 교회는 성령님의 성전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의 불을 세상에 가져다 주셨고 그리고 교회는 은총의 기름 부음으로, 은총의 기름 부음으로 거저 받은 선물로, 기도의 힘으로, 소명의 기쁨으로 그리고 무장 해제된 가난의 아름다움으로 개혁됩니다. 하느님을 첫째 자리에 놓읍시다!
성령이시여, 파라클리토 성령이시여, 우리의 마음을 위로하소서. 우리를 세상 앞에서 당신 위로의 선교사로, 당신 자비의 파라클리토가 되게 하소서. 우리의 보호자, 영혼의 감미로운 조언자시여, 우리를 하느님의 “오늘”에 대한 증언자로, 교회와 인류를 위한 일치의 예언자로, 그리고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새롭게 하시는 당신 은총을 딛고 서 있는 사도가 되게 하소서.
http://www.vatican.va/content/francesco/en/homilies/2021.index.html
htps://www.vaticannews.va/en.html
『성령 강림』 강론
-송영진 모세 신부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 성령께서 표현의 능력을 주시는 대로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하였다. 그때에 예루살렘에는 세계 모든 나라에서 온 독실한 유다인들이 살고 있었는데, 그 말소리가 나자 무리를 지어 몰려왔다. 그리고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저마다 자기 지방 말로 듣고 어리둥절해하였다. 그들은 놀라워하고 신기하게 여기며 말하였다. ‘지금 말하고 있는 저들은 모두 갈릴래아 사람들이 아닌가? 그런데 우리가 저마다 자기가 태어난 지방 말로 듣고 있으니 어찌 된 일인가?’(사도 2,4-8)”
1)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기 전에는, 제자들은 유대인들이(박해자들이) 두려워서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숨어 있었습니다(요한 20,19). 그랬던 그들이 성령을 받은 뒤에는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대담하게’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박해자들을 두려워하는 모습은 하나도 없었고, 모두 다 위대하고 용감한 선교사로 변화되었습니다. 그 모습은 예수님의 다음 말씀이 그대로 실행된 일입니다. “너희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에서 말하는 것을 너희는 밝은 데에서 말하여라. 너희가 귓속말로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선포하여라(마태 10,26ㄱ.27).” 제자들에게 ‘성령의 은사’가 내린 일의 첫 번 째 목적은 ‘복음 선포’입니다.그리고 ‘복음 선포’의 목적은 ‘모든 사람의 구원’입니다. 따라서 ‘성령의 은사’가 내린 일은 ‘모든 사람’을 위한 일입니다.
2) 제자들이 성령을 받아서 모두 위대하고 용감한 선교사가 되었다는 말은,그들이 용기를 내서 사람들 앞에 섰을 때 성령 께서 도와주셨다는 뜻입니다. (성령을 받는 일은, 사람이 로봇처럼 되는 일이 아닙니다. 용기를 낸 일, 사람들 앞에 선 일, 복음을 선포한 일은 제자들이 능동적으로 한 일입니다.) 그들이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의 승천을 목격함으로써 자신들의 신앙에 대해서 ‘확신’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성령을 받지 못하고, 믿음이 있어도 아무것도 안 하면 성령의 은사를 받지 못합니다. (우리가 아무것도 안 해도 성령께서 다 알아서 해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3) 성령께서 ‘표현의 능력’을 주셨다는 말은, 예수님의 다음 약속이 이루어진 일입니다. “어떠한 적대자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루카 21,15).” 이 말씀에서 ‘언변’을 주시겠다는 말씀은, 인간적인 말재주를 주시겠다는 뜻이 아니라, 신앙을 증언할 때 그 증언에 힘을 실어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구체적인 방법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어떤 표징이 나타날 수도 있고(마르 16,20), 증언의 설득력을 높이는 어떤 힘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지혜’를 주시겠다는 말씀은, 더 깊은 믿음과 깨달음을 얻도록 인도해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복음을 선포하고 신앙을 증언하는 일은 인간적인 말재주로 하는 일이 아니라, ‘믿음으로’ 또 ‘삶으로’ 하는 일입니다.
4)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했다는 말은, 표현으로는, ‘배운 적 없는’(또는 ‘사용한 적 없는’) 외국어로 복음을 선포했다는 뜻인데, 당시에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는 모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듣는 사람들’이 사도들의 말을 알아들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은사’는 사도들에게 내렸지만, ‘말씀의 은혜’는 복음 선포를 들은 사람들에게 내렸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도들에게 내린 ‘성령의 은사’는 그들만을 위한 일이 아니라 ‘듣는 사람들’을 위한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을 위해서, ‘모든 사람’에게 하느님의 은혜가 내린다고 해도, 그 은혜는 받아들이는 사람들만 받게 됩니다. 성령 강림 때 많은 사람들이 자기 언어로 사도들의 복음 선포와 베드로 사도의 설교를 들었지만, 놀라기만 하면서 은혜를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이 많았고, 그날 세례를 받은 삼천 명만 그 은혜를 받아들였습니다(사도 2,41).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21-23)”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첫 선물은(은총은) ‘평화’입니다. 그런데 무슨 물건을 주고받듯이 평화를 주고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예수님이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확신할 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얻어 누릴 수 있습니다. (믿음 없이는 평화도 없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첫 지시는 ‘복음 선포’입니다. " 나도 너희를 보낸다.” 라는 말씀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라는 지시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하신 마지막 지시도복음 선포입니다(마르 16,15).> 여기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이라는 말씀은, “복음 선포의 목적은 사람들의 구원”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였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두 번째 선물은 ‘성령’입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으로부터 성령을 받았고, 오순절 때에는 성령의 은사를 받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시면서 ‘용서’를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면 죄를 용서받는다고(구원받는다고) 선포하라는 지시입니다(루카 24,47).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용서하지 않을 권한’을 주신 말씀이 아니라, “사람들이 용서받지 못한 채로(구원받지 못한 채로) 남아 있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로 해석됩니다. 예수님의 구원과 용서를(복음을) 선포하는 것은 모든 신앙인의 의무입니다. 만일에 우리가 복음 선포를 하지 않아서, 복음을 모르는 채로 살다가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그것은 교회와 신앙인들의 잘못이고, 주님께서는 교회와 신앙인들에게 책임을 물으실 것입니다.
원문보기▶ Rev.S.Moyes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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