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서(帛書)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2022년 6월 12일 주일

나뭇잎숨결 2022. 6. 9. 14:09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2022년 6월 12일 주일

 

제1독서 잠언 8,22-31 / 제2독서 로마 5,1-5 / 복음 요한 16,12-15

 

 

 

 

- 프란치스코 교황 강론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부옹지오르노!

 

우리가 하느님을 경축하는 이 축일에, 즉 유일하신 하느님의 신비. 그리고 이 하느님은 아버지이시며 아들이시며 성령이십니다. 세 위격이지만 하느님은 한 분이십니다! 아버지는 하느님이시다. 아들은 하느님이시다. 성령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세 신이 아니다: 그것은 세 위격 안에 있는 한 하느님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예수 우리에게 계시하신 신비, 즉 거룩한 삼위일체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신비를 축하하기 위해 잠시 멈춰 섰는데, 왜냐하면 개인들은 하느님의 형용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실제적이고 다양하며 다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철학자가 말하곤 했듯이 '하나님의 발산'이 아닙니다. 그들은 인격들이다. 내가 우리 아버지와 함께 기도하는 아버지가 계신다. 내게 구속과 칭의를 주신 아들이 계신다. 우리 안에 거하시고 교회에 거하시는 성령이 계십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의 마음에 말하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요한계시록의 모든 것을 요약한 성 요한의 표현, 즉 "하느님은 사랑이시다"(요한1서 4:8-16)라는 표현에 포함되어 있음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사랑이시다. 아들은 사랑이시다. 성령은 사랑이십니다. 그리고 그가 사랑인 만큼, 하느님은 홀로 하나이시면서도 고독이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사이의 교제이십니다. 사랑은 본질적으로 자아의 선물이며, 그 본래의 무한한 실체 안에서, 자신의 아들을 생성함으로써 자신을 내어주시는 분은 아버지이시며, 그분은 아버지께 자신을 바치시며, 그들의 상호 사랑은 성령이시며, 그들의 일치의 결속이기 때문이다. 이해하기가 쉽지 않지만, 우리는이 신비를 살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우리는 그것을 많이 살 수 있습니다.

 

삼위일체의 이 신비는 예수 자신에 의해 우리에게 계시되었다. 그분은 자비로우신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얼굴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는 참된 사람인 자신을 하느님의 아들이자 아버지의 말씀, 우리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구세주로 제시했다. 그리고 그는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나오는 성령, 진리의 영, 파라클레테 영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 우리는 지난 일요일에 콘솔러와 옹호자를 의미하는 '파라클레테'라는 단어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부활 후에 사도들에게 예수이 나타났을 때, 예수 그들에게 "모든 민족을 전도하여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는]"(마 28:19)을 권유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축하 행사는 우리가 와서 지상의 여정을 인도하는 사랑과 빛의 놀라운 신비를 생각하게합니다.

 

복음의 메시지에서, 그리고 모든 형태의 기독교 선교에서,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일치에 따라, 예수이 부르시는 우리 사이의 이 일치를 간과할 수 없다: 우리는 이 연합을 간과할 수 없다. 복음의 아름다움은 살아나기를 요구한다―일치―그리고 매우 다양한 우리 사이의 조화 속에서 목격된다! 그리고 내가 감히 말하건대, 이 일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수적이다: 그것은 태도, 말하는 방식, 아니오가 아니다; 그것은 사랑으로부터, 하느님의 자비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의롭다 하심으로부터, 그리고 우리 마음 속에 성령의 임재로부터 생겨나는 일치이기 때문에 필수적이다.

 

지극히 거룩한 마리아는 단순함과 겸손 속에서 삼위일체 하느님의 아름다움을 반영하는데, 이는 그녀가 자신의 삶 속으로 예수을 온전히 환영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우리의 신앙을 지탱해 주시기를 빕니다. 성모님께서 우리를 하느님을 경배하는 자로 만드시고 우리 형제자매들의 종으로 삼으시기를 빕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오순절 이후의 일요일인 오늘, 우리는 지극히 거룩한 삼위일체의 엄숙함을 기념하며,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라는 세 위격의 친교 안에서 하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의 신비를 묵상하고 찬양하는 축제입니다. 우리에게 자신의 삶을 자유롭게 제공하고 전 세계에 전파하도록 요청하는 새로운 경이로움으로 축하하기 위해 하나님 사랑.

 

오늘의 성경 읽기는 하느님이 우리에게 자신이 존재하신다는 것을 보여주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가까운 '우리와 함께하는 하느님'이시며,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와 함께 걷고, 우리의 개인적인 삶의 이야기에 관심을 갖고 계시며, 가장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들부터 시작하여 각자를 돌보신다는 것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그분은 "위에 계신 하늘에 계신 하느님이시며" 또한 "아래 땅에"(교리와 성약 4,39 참조)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 존재를 믿지 않습니다. 무관심한 존재에서, 아니! 그러나 반대로, 우주를 창조하시고 한 민족을 일으키신 사랑 안에서 육신이 되셨고,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셨으며, 성령으로서 모든 것을 변화시키고 성취하도록 이끄십니다.

 

하느님-사랑으로 인한 이러한 변화를 직접 경험한 성 바오로(로마 8,14-17 참조)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분의 품에 자신을 버린 어린아이의 전적인 확신을 가지고 참으로 '아빠'―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다―라고 불리고자 하는 하느님의 소망을 우리에게 말해준다. 우리 안에서 행동하시는―사도가 다시 회상한다―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과거의 품성으로 축소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분이 가까이 계시고, 우리의 동시대인이며,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들이 되는 기쁨을 느끼도록 보장해 주신다.

 

마지막으로, 복음 안에서 부활하신 주님은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그분의 임재와 그분의 영의 권능 덕분에 우리는 그분이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을 조용히 수행할 수 있습니다. 사명은 무엇입니까? 모든 사람에게 선포하고 그분의 복음을 증거하며, 그럼으로써 그분과의 교제와 그로부터 오는 기쁨을 확대시키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걸으시며 우리를 기쁨으로 채우시며, 어떤 면에서는 기쁨이 그리스도인의 모국어입니다.

 

따라서, 지극히 거룩한 삼위일체의 축일은 항상 사랑과 사랑으로 끊임없이 창조하시고, 구속하시고, 거룩하게 하시며, 그를 환영하는 모든 피조물들이 그분의 아름다움과 선하심과 진리의 광선을 반영할 수 있게 하시는 하느님의 신비를 묵상하도록 우리를 이끈다. 그분은 항상 인류와 동행하기로 선택하셨으며, 아무도 제외하고 모든 나라와 각 개인에게 축복이 될 수 있는 백성을 만드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고립된 사람이 아닙니다. 그 또는 그녀는 한 민족, 즉 하느님이 형성하시는 이 백성에 속한다. 이 회원 자격과 친교 없이는 기독교인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한 백성, 즉 하느님의 백성입니다. 성모 마리아께서 우리가 세상에 증거하고, 사랑에 목말라 하며, 삶의 의미가 바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무한한 사랑, 가시적인 사랑이라는 사명을 기쁘게 완수하도록 도와주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거룩한 삼위일체의 축일, 성 요한 복음은 우리에게 그의 수난 직전에 예수이 선포한 긴 작별 담론의 일부를 우리에게 준다. 이 강연에서 그는 제자들에게 자신에 대한 가장 깊은 진리를 설명하고, 따라서 예수와 아버지와 성령 사이의 관계를 개괄적으로 설명한다. 예수 아버지의 계획의 성취가 다가오고 있으며 그의 죽음과 부활로 완성될 것임을 아신다. 이 때문에 그는 자신의 사명이 성령에 의해 연장 될 것이기 때문에 추종자들에게 그가 그들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시키고 싶어합니다. 예수의 사명을 계속하시는 분은 성령님이시며, 즉 교회를 앞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예수 이 사명이 무엇인지 밝혀 줍니다. 우선, 성령은 예수 자신이 여전히 말해야 할 많은 것들을 이해하도록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요한 16,12 참조). 이것은 새롭거나 특별한 교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들이 아버지로부터 들으시고 제자들에게 알려 주신 모든 것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을 의미한다(15절 참조). 영은 새로운 실존적 상황에서 우리를 인도하시며, 동시에 예수에 고정되어 있는 시선과 동시에 사건과 미래에 열려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복음에 굳건히 뿌리를 내리고 우리의 전통과 관습에 역동적인 충실함으로 역사 속에서 걸을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그러나 삼위일체의 신비는 또한 우리 자신에 대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우리에게 말한다. 사실, 세례를 통해 성령님은 우리를 사랑의 친교이신 하느님의 마음과 생명 안에 두셨습니다. 하느님은 하나의 전체를 이루기 위해 서로를 너무나 사랑하는 세 인격의 "가족"이시다. 이 "신성한 가족"은 그 자체로 닫혀 있지 않고 열려 있습니다. 그것은 창조와 역사 속에서 그 자체로 소통하며, 모든 사람에게 그것의 일부를 형성하도록 부르기 위해 인간의 세계에 들어갔다. 삼위일체론적 친교의 지평은 우리 모두를 둘러싸고 있으며, 사랑이 있는 곳에는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을 확신하면서 사랑과 형제애 나눔 안에서 살도록 우리를 자극한다.

 

하느님-친교의 형상과 모습으로 창조된 우리의 존재는 우리 자신을 관계 속의 존재로 이해하고 연대와 상호 사랑 속에서 대인 관계를 맺도록 요구합니다.

 

그러한 관계는 무엇보다도 우리 교회 공동체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므로 삼위일체의 아이콘으로서의 교회의 이미지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그러나 또한 가족에서 우정, 직장 환경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회적 관계에서 : 그들은 점점 더 인간적으로 부유하고 상호 존중과 무관심한 사랑이 가능한 관계를 구축하기 위해 우리에게 제공되는 구체적인 기회입니다.

 

지극히 거룩한 삼위일체의 축일은 우리가 매일의 사건들에서 친교와 위로와 자비의 누룩이 되는 것에 헌신하도록 초대한다. 이 사명에서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힘에 의해 지지를 받습니다: 그는 불의와 억압과 증오와 탐욕으로 상처 입은 인류의 육체를 돌보십니다.

 

성모 마리아는 겸손하게 아버지의 뜻을 환영하고 성령으로 아들을 잉태했습니다. 삼위일체의 거울인 성모님께서 우리가 삼위일체론적 신비에 대한 우리의 신앙을 강화하고 그것을 사랑과 일치의 선택과 태도로 행동으로 옮기도록 도와주시기를 바랍니다.

 
 
 
 
 

 

 

삼위일체 대축일 -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사랑의 신비

     
가톨릭신문사 2022.06.12 발행 [1666호]
 
 
   
 - 함승수 신부(서울대교구 수색본당 부주임)
 



“하느님께서 성부, 성자, 성령 세 위격으로 존재하시지만, 그 본성으로는 하나로 일치하고 계신다”는 ‘삼위일체’ 교리는 가톨릭교회에서 가장 핵심적인 내용이지만, ‘서로 다르면서 동시에 같다’는 그 심오한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거나 설명하기 어려워 ‘신비’라고 부릅니다. 위대한 교부인 아우구스티노 성인조차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신비를 인간의 머리에 담아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규정할 정도이지요. 매년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이 되면 사제도 신자도 참 난감해집니다. 사제는 그 신비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난감하고, 신자는 알쏭달쏭한 그 말이 뭔 뜻인지를 몰라 난감합니다.

‘삼위일체’라는 개념은 ‘세 분이신 하느님이 오묘하게 하나로 계신다’는 식으로 이해하려 들지 말아야 합니다. 세 위격이 ‘어떻게’ 일치하고 계시는지 그 원리를 논리적으로 분석하려 들지 말라는 겁니다. 그렇다고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라는 것도 아닙니다. ‘원리’가 아니라 ‘이유’에, ‘결과’가 아니라 ‘마음’에 집중해야만, 하느님 사랑의 신비를 가린 무지의 장막을 걷어낼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아버지’, ‘아들 예수 그리스도’, ‘성령’ 이렇게 세 분으로 계시는 것은 우리를 더 다양하고 적합한 방식으로, 보다 깊고 완전하게 사랑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살아갈 세상을 ‘좋은’ 모습으로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일은 성부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죄로 인해 하느님과 멀어진 우리를,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온전히 내어놓는 가장 큰 사랑으로 구원하시고 성체로 양육하시는 일은 성자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가도록 진리의 빛으로 이끌어주시고 보호하시는 일은 성령께서 하고 계십니다. 이렇듯 성부 성자 성령께서 각자의 고유한 방식으로 함께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를 그 깊고 충만한 사랑의 관계 안으로 초대하십니다.

우리는 그 초대에 응답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을 귀감으로 삼아, 성령의 이끄심에 따름으로써 하느님 아버지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 안에서 삼위이신 하느님이 사랑의 일치를 이루십니다. 그렇게 우리는 그 사랑의 친교에 참여하게 됩니다.

이 사랑의 친교는 기본적으로 일치를 지향합니다.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하는, 무시와 묵살의 일치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친밀한 사랑의 관계 안에서 양보와 희생, 배려와 이해를 통해 서로 다른 생각을 하나의 뜻으로 모아가는 부부처럼 ‘일심동체’를 이뤄야 하는 것입니다. 이는 ‘사랑으로 하나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면 마음이 하나가 되고, 마음이 하나가 되면 서로 다른 너와 내가 공동의 목표를 향해 함께 나아가며 기쁘고 행복하게 ‘공존’할 수 있지요. 이처럼 우리도 우리를 위해 사랑으로 하나 되신 하느님과 마음으로 일치를 이루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마음과 뜻을 적극적으로 헤아리며, 사랑 안에서 내 뜻이 그분 뜻과 하나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면 언제 어디서나 하느님과 함께하는 ‘기쁨의 삶’이 시작되지요.

삼위일체 교리를 ‘신비’라고 부르는 것은 그것을 머리로는 이해하지 못해도 삶으로 살아내자는 뜻입니다. 우리는 ‘인체의 신비’를 다 이해하지 못합니다. 호흡, 소화, 맥박 같은 항상성의 유지가 어떤 원리로 이루어지는지를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 신비는 내 몸 안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신비를 머리로 이해하지 못해도, 나의 노력과 관리를 통해 얼마든지 내 삶 속에서 구현할 수 있는 겁니다. ‘사랑의 신비’인 삼위일체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그 신비의 심오한 의미를 다 깨닫지 못하지만, 우리가 드리는 기도 안에서, 신앙생활 안에서, 삼위일체 하느님이 살아 움직이시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열심히 기도하면,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면, 성령께서는 기도하도록 이끌어 주시는 분으로, 성자는 기도하는 법을 알려주시며 중재하시는 분으로, 성부는 기도를 들으시며 응답해 주시는 분으로서 우리 안에서 활동하십니다. 그렇게 사랑의 신비가 내 삶 속에서 실현되면 아버지께서 베푸시는 좋은 것들을 함께 누릴 수 있습니다.




 
                                                  장 푸케 ‘삼위일체와 모든 성인들’.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 구별되지만 한 분이신 하느님

제1독서 잠언 8,22-31 / 제2독서 로마 5,1-5 / 복음 요한 16,12-15

 

서로 다르지만 동시에 하나인 신비 삶을 관통하는 주님 사랑을 통해 삼위일체 하느님 깨닫게 되는 것

 

가톨릭신문사 발행일2022-06-12 [제3298호, 19면]

 

- 박용욱 미카엘 신부 (대구대교구 사목연구소장)

 
 

「H마트에서 울다」는 작년 미국 서점가를 떠들썩하게 했던 미셸 자우너 작가 회고록입니다. 버락 오마바 전 미국 대통령이 추천했고 여러 매체에서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었다는 광고 문구는 다소 식상하지만, 많은 이들이 눈물을 흘리며 이 책을 읽은 것은 저자의 이야기가 누구나 겪는 관계의 문제에 닿아있기 때문입니다.

미국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저자 미셸은 미국 소도시에서 성장하면서 친구들 엄마와 너무 다른 자기 엄마와 갈등을 빚습니다. 늘 ‘예쁘게’ 입히려 하고 음식 장만에 별나게 공들이는 엄마, 매사에 엄격한 엄마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음악가로 자유롭게 살기 원했던 딸은 급기야 엄마와 대판 싸우고 독립합니다.

몇 년이 흐른 다음, 미셸은 엄마가 말기 암 진단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부모님 집으로 돌아와 투병과 임종 과정을 지키지요. 장례를 마친 미셸은 엄마와 함께 한국 음식재료를 사러가던 H마트에서 비로소 엄마의 삶이 자기 삶 안에 얼마나 진하게 녹아있는지 깨닫고 오열합니다. 엄마의 잔소리, 엄마가 해주던 음식들, 그 모두가 지금의 자기를 만드는 뿌리였고 엄마 나름의 사랑이었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비슷한 성장과정을 겪습니다. 부모님께 껌딱지 마냥 붙어있던 어린 시절을 지나면 ‘내 인생은 나의 것’을 외치며 독립하기를 바랍니다. 나는 내 부모와 같은 삶을 살지 않겠노라 다짐하기도 합니다. 부모의 관심과 기대가 너무 무거운 짐으로 느껴지기도 하지요. 그렇게 부모와 다른 길을 걸으려 하다가, 어느 시점이 되면 알게 됩니다. 자기 삶이 결코 자신만의 것이 아니었음을, 부모의 삶은 나와 달랐지만 그 깊은 바닥에는 같은 무엇이 흐르고 있음을…. 인격적으로 성숙한다는 것은, 이렇게 내 삶이 타인의 삶과 구별되는 고유한 것이지만 동시에 하나의 사랑이 서로를 관통하고 있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내 삶이 고립된 무인도의 삶이 아니라 수많은 생명과 사랑의 결정체임을 깨달을 때 인생을 보는 눈이 깊어집니다. 더 나아가 존재하는 모든 생명과 내 삶이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게 되면 그의 삶은 범속한 단계를 넘어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런 깨달음을 온전히 실현하신 분이었습니다. 이미 탄생에서부터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루카 1,35)라는 천사의 예고가 있었습니다. 성자 예수의 삶은 근본에서부터 성부와 성령과 하나라는 말입니다. 이것을 오늘 첫째 독서는 “한처음 세상이 시작되기 전에 영원에서부터 모습이 갖추어졌다”(잠언 8,23)고 표현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삶은 시간의 범주를 넘어 영원으로부터 하나라는 뜻입니다.

공생활을 시작할 때도 성령께서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분 위에 내리시고 하늘에서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루카 3,21; 마태 3,13-17; 마르 1,9-11)이라는 소리가 들립니다. 예수께서 당신 자신을 어떻게 이해하셨는지 암시하는 구절입니다. 그분은 아버지께 사랑받는 아들로서, 성령께 인도되는 아들로서 완전한 친교를 누리고 있음을 아셨습니다. 그렇게 당신 신원을 성부와 성령의 친교 안에서 이해하신 까닭에, 하느님의 친교에로 모든 이를 초대하는 것이 당신 사명임을 받아들인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께서는 고립된 사람들, 단절된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친교의 풍요로움을 누리게 하는데 진력을 다하셨습니다. 외롭고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알리시며 인간에게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주신’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셨습니다. 고난에 지친 사람들마저도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 주시나이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아 주시나이까?”(화답송, 시편 8)하고 탄복할 수 있도록, 소외받은 이들과 함께 머무시며 그들이 버려져 있지 않음을, 하느님께서 함께하심을 알려 주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사명이 정점에 달한 것은 수난과 부활의 파스카 신비를 통해서였지요. 뭇 사람들 눈에는 철저히 버림받은 것처럼 보이는 십자가의 죽음, 그 누구도 함께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까지 예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께 순명하셨습니다. 부활은 그런 성자의 죽음이 버려진 시간이 아니었음을 입증합니다. 죽음에 이르기까지 성부께 순종하신 성자는 부활을 통해 성부 오른편에 앉으십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 우리 신앙인들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리게 되었음을 힘차게 선포하지요.

그 누구도 하느님으로부터 버려지지 않았고, 그 어떤 고통의 순간에도 하느님께서 함께하신다는 믿음 때문에 신앙인은 결코 희망을 버리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리라는 희망을 자랑으로”(로마 5,2) 여기고, 환난조차도 인내와 수양과 희망을 자아내는 계기로 여깁니다.

복음서 가운데서 삼위일체 하느님을 가장 분명하게 드러내는 요한복음은 시종일관 예수님의 삶이 삼위일체의 친교 안에 있음을 증언합니다.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고, 성령께서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요한 16,15 참조)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하느님께서 서로 다르지만 동시에 하나인 신비이심을 알려 줍니다.

우리가 신앙의 희망 속에 사랑의 삶을 추구할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삼위일체 하느님을 닮도록 창조되었고, 삼위일체 하느님의 친교 안에서 완성될 것입니다. 삼위일체의 신비는 하나가 동시에 셋이라는 이상한 산수가 아닙니다. 모든 인간이 고유한 가치를 가지면서도 사랑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게 하는 진리인 것입니다.박용욱 미카엘 신부 (대구대교구 사목연구소장)

 

 

 

 

▲ 정미연 화백 작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마태 28,19)

 

삼위일체 대축일, 하나이고 셋이시며, 셋이면서도 하나이신 분

 

-평화신문사

 

 

 

하나가 셋이 되고, 셋이 하나가 되는 신비! 가톨릭 교회 안에서 가장 중요하면서도 가장 이해하기 어렵다는 신비! 이 신비에 대해서 혹시 들어보셨나요? 아~ 네. 어려우시다고요? 가톨릭교회에서는 하느님께서 한 분이시면서도 셋이시고, 셋이시면서도 한 분이시라고 말하는데요. 바로 삼위일체 교리입니다. 오늘은 그 삼위일체 교리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스스로 완전하시고 완벽하신 하느님께서는 왜 하나이고 셋이시며, 셋이면서도 하나이신 분으로 우리에게 오셨을까요? 당신을 위해서였을까요? 우리를 위해서였을까요?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우리에게 알려 주셨는데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한 분 하느님이시다.” 이것이 가톨릭 신앙의 핵심인 ‘삼위일체’ 교리입니다.

삼위일체라는 말은 성경에 직접적으로 나오지는 않습니다. 다만 간접적으로 여러 부분에서 언급되고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삼위일체 하느님을 “우리”라고 표현하거나 “말씀”, “영”, “지혜”라는 말로 암시적으로 드러내고 있고, 신약에서는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께 예수님의 탄생을 예고하면서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루카 1,35)라고 삼위의 신비를 표현했으며, 예수님께서 세례받으실 때는 “하늘이 열리며 성령께서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분 위에 내리시고,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루카 3,21-22)라고 전하면서, 삼위께서 동시에 현존하시는 모습을 묘사했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복음 선포의 사명을 주실 때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마태 28,19)라고 말씀하시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세 위격이 함께하심을 분명히 언급하셨습니다.

초대 교회로부터 내려온 삼위일체 믿음: 이러한 삼위일체에 대한 믿음은 사도들의 초대 교회로부터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믿을 교리’로 선포됐습니다. 그 ‘믿을 교리’는 삼위일체 하느님께서는 실제적으로 구분되지만 하나의 동일한 본성을 지니시고, 한 본체를 이루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성부께서는 만물을 창조하셨고, 성자께서는 성부로부터 세상에 보내진 성부의 아들로서 사람이 되시어 우리를 구원하셨으며, 성령께서는 성부와 성자로부터 오시어 교회 안에서 머무르시며, 우리를 성화시키고 사랑으로 일치시키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각자 고유한 활동을 하시되, 각각의 활동에 다른 두 위격이 함께 현존하고 함께 작용하신다는 것입니다.

가톨릭교회는 이러한 삼위일체의 신비를 신앙 안에서 받아들이고, 믿고, 고백하고, 가르칩니다. 또 전례 예식을 비롯해 신앙생활 전반에 걸쳐 삼위일체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신앙 행위의 기본인 십자 성호에서부터 영광송, 그리고 사도신경에 이르기까지 모든 기도문에 드러나고 있으며 세례성사를 위시한 모든 성사 생활에서 표현됩니다. 그리고 교회는 성령 강림 대축일 다음 주일을 삼위일체 대축일로 기념하며, 삼위일체 하느님의 인류 구원 활동에 감사와 찬미를 드립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요한 15,9)

우리의 신앙생활은 반드시 삼위이신 하느님께서 이루시는 친교와 일치에 참여하면서, 우리도 서로 친교를 이뤄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를 바칠 때는 성령 안에서 성자를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바치는 것입니다. 기도만이 아니라 우리 구원의 길 역시 성령 안에서 성자를 통하여 성부께 이르는 것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으로 오시는 하느님은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배려입니다. 우리에게 보다 가까이 다가오고 싶으신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한 분이시면서도 셋이시고, 셋이시면서도 한 분이신 하느님, 감사합니다. 찬미와 영광 받으소서. 이제와 영원히. 아멘


 

삼위일체 대축일: 다해

 

- 조욱현 토마스 신부

 

우리는 지난주일 성령강림 대축일을 지내며 부활시기를 마쳤는데, 이제 오늘 삼위일체 대축일을 지내는 것은 세상을 구원하신 모든 업적은 바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업적임을 다시 한번 기억하고 감사하며 찬미하기 위함이다. 즉 아버지께서 성령 안에서 아들을 통해 이루신 구원에 대해 깊이 묵상하고 동시에 삼위일체의 신비의 영광에 대해 흠숭의 예를 바쳐드리는 것이다.

 

복음: 요한 16,12-15: 아버지의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은 살아 계신 실체이시기 때문에 당신의 구원적 업적을 통해 당신 자신을 드러내신다. 삼위의 신비는 우리가 우리에게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나타나시는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한다면 결코 삼위의 신비에 가까이 가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삼위일체에 대한 계시는 역사적 체험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결코 어떤 신학적 이론으로 추론되거나 그렇게 정립되고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진리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일깨워주시면서 당신의 구원 사명을 완성해줄 성령의 선물을 약속하시는 오늘 복음은 교훈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께서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주실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다.”(15절)

 

이 말씀에서 우리는 위격적 다양성이 나타나지만, 단일성을 말하고 있다. 즉 아버지와 아들은 구별되지만, 아버지와 아들은 성령 안에 하나이다. 성령을 우리는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구원은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며, 아버지의 뜻을 아드님은 성령 안에서 이루신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성령의 특성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성령 안에 살 때, 성령께서는 진리를 온전히 깨닫게 해주시며 앞으로 다가올 일들을 알려주실 것이다(13절). 요한복음에서 진리는 철학적 진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구원을 위해 제물이 되신 나자렛 예수를 통하여 드러나는 하느님의 구원계획이다. 이 진리를 얻기 위해서는 지성이 아니라, 사랑을 동반한 신앙이다. 즉 그분을 구세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이미 진리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이 진리를 받아들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알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할 말이 많지만, 그들이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없을 것이라고 하신다(12절). 이 말씀을 하실 때가 주님의 수난과 죽음의 상황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구원업적을 올바로 알아듣기 위해서도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14절) 성령이 오셔야 했다. 성령은 유일한 진리이신 그리스도의 신비에 더 깊이 참여케 해주시는 분이시고, 그 진리를 살게 해주시는 분이시다. 그리스도의 진리는 추상적인 이론이 아니라, 실천적인 실재적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진리의 성령’은 ‘생활케 하는 성령’이 되신다. 그래서 우리 모든 신자는 구원의 기쁜 소식을 살도록 노력함으로써 자신 안에 성령께서 현존하심을 입증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은 사람들은 “하느님과 더불어 평화”(1절),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심으로써 보증해주시는(로마 5,5)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할 희망(로마 5,2)의 은총을 누린다고 말한다. 성령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구원받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충실히 이끌어 주시는 분이시다. 성령은 우리 마음을 차지하시어 우리 행위의 내적 원리가 되고자 하신다. 그분이 우리의 내적 원리가 되신다면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 행동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하느님의 영의 인도를 받는 이들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입니다.”(로마 8,14) 우리의 삶을 모두 성령의 인도에 따른다면 우리는 결코 구원에 대한 확고한 기다림 속에서 실망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성령 안에 살려 노력하는 삶이 필요하다. 즉 삼위일체의 신비는 추상적인 앎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에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성령 안에서가 아니면 성령이 무엇인지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지 못한다. 하느님은 사랑의 관계로서 하나이신 분이심을 잊지 말고 우리의 사랑의 관계를 통하여 그분을 드러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삼위일체의 신비를 깨닫는 것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