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라너의 하느님 이해
Karl Rahner's Understanding of God
심 상 태
(수원가톨릭대학교 교의신학 교수 ․ 한국그리스도사상연구소 소장)
Rev. Shim Sang-Tai, S.T.D.
(Prof. of Dogmatic Theology in Suwon Catholic Univ. &
Dir. of Korean Christian Thought Institute)
I. 주제 설정
칼 라너(Karl Rahner, 1904-1984)는 지난 세기에 62년의 긴 세월동안 예수회 수도자로서, 52년에 걸쳐 사제로서, 그리고 반세기 가까이 신학자로서의 삶을 살았던 독일 가톨릭 신학자이다. 그는 신학 거의 전 주요 분야뿐만 아니라 인접 학문에도 해박하기 그지없는 식견을 드러내는 4000여종에 이르는 방대한 양의 작품을 통하여 동학 내지 후학들을 압도하였다. 그가 수행한 작업 내용의 다양성 및 사상과 전망의 풍요성, 그리고 심오성에 직면하여 그를 제대로 평가하기란 지난한 일이다. 이 위대한 신학자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이자 서거 20주년이 되는 해를 맞아 신학의 기본이자 중심 주제인 하느님에 관한 그의 상념을 구명하는 글을 집필하게 된 것을 뜻 깊게 생각한다.
라너의 하느님 상념은 전통적 라틴 스콜라 신학과는 접근 방법이나 기본 입장에서 구별되는 인간학적 ‘초월신학’(超越神學, Transzendentaltheologie)의 핵심에 해당하는 내용과 상관한다. 논자는 이미 앞서 다른 기회에 라너의 이 초월신학의 기본 취지와 방법원리에 관한 연구를 발표한 바 있기에 본고에서는 간략하게 요지만을 서술하고자 한다.
사상계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으로도 불리는 소위 ‘인간학적 전환’이 고대로부터 당연시되고 더 나아가 신성시되었던 전통적 우주 질서의 붕괴 체험을 통해 이루어졌음은 널리 주지되어 있다. 17세기 이래 급격한 발달을 보인 자연과학의 제 발견이 유사 이래 자명하게 인정되어 온 지구 중심의 우주 질서와 이에 입각했던 일체의 세계관과 전통적 기성 사회 질서를 철저하게 의문에 처하기에 이르고 기성 질서의 붕괴 속에서 인간이 급변하는 시대 상황 속에서 자신과 일체의 실재, 그리고 실재 안에서의 자신의 위치를 새로 인식해야 할 필요성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리고 인간이 자신을 주체로 의식하고 모든 실재를 이해하는 기본 축이자 중심점으로 삼으면서 자신의 주체행위, 즉 인식(認識)과 의지(意志)의 행위 속에서 세계 안에서 만나는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대상을 초극하여 실재 전체를 지향하는 초월성 안에서 자신의 본질을 발견하고, 이 본질을 가능케 하는 조건을 구명하는 가운데 하느님의 존재와 접하게 되면서 여기서 소위 인간학적인 ‘초월철학의 신’ 규정이 형성되었다. 라너는 이러한 초월철학을 방법론적 도구로 하여 중세 이래 신학계 안에 깊이 정착되어 있던 우주론적 신학의 장벽을 넘어 신학의 인간학적 전환을 도모한 것이다.
라너는 신학의 인간학적 전환 필요성의 근거를 대략 세 관점으로부터 제시한 바 있다. 우선, 그는 인간의 자유에 전 우주의 운명이 좌우되기도 한다는 현대 서구의 인간중심의 사조 속에서 정신사적 시대의 징표와 함께 그리스도교적 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그는 하느님의 계시의 수용자 인간이 구원되기 위해 계시로부터 관통될 수 있어야 한다는 요청에 의거 여하한 신학 대상도 인간 본질과 관련된다고 보고 끝으로, 신학이 인간의 자기 체험과 신학적 명제들과의 연관성을 규명하며, 더 나아가 이들 연관성의 가능성의 조건까지도 규명해야 하는데 바로 이러한 과제를 인간학적 신학이 성취한다고 본 것이다.
라너는 ‘감각적 표상에로의 정신의 정향’을 말하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인식론적 기본 명제에 의거하여 모든 인간 인식은 유한하고 감각적 직관에 의존하며, 감성이란 정신에 의해 작용된 정신 자신의 수용성이라고 간주하면서 현실 세계 안에서 만나는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인식 대상을 초월하는 능동적 정신의 초월능력인 전취(前取, Vorgriff; excessus)를 여하한 대상 인식의 가능성의 조건으로 규정한다. 라너는 이 ‘초월적 방법’을 적용하여 신학의 인간학적 전환을 이룩하고자 시도하였다.
라너가 뜻하는 ‘초월적’(traszendental)이란 표현은 ‘선험적 인식의 가능성의 조건’의 의미로 칸트(I. Kant)가 사용하는 ‘초월적’ 개념과 반드시 부합되지는 않는다. 라너는 이 표현을 거의 통속적 의미로 사용한다. 그에 따르면, 일체의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범주적 실재’ 일반에게서 이루어지는 인간의 인식과 행동, 그리고 체험은 인간의 출생과 함께 이미 주어져 있는 선험적 소인의 수용 없이는 도저히 불가능하다. 이 ‘선험적인 것’의 실상을 규명하는 것이 ‘초월적 방법’의 목표설정이다. 초기 종교철학자로서의 라너가 칸트처럼 사물적 대상 인식의 가능성의 조건 규명에 치중했던 데 비해서 후기 신학자로서의 라너는 사물뿐 아니라 사물과 상관하지 않는 인간 인식을 포함하는 일체의 주체행위의 가능성의 조건을 인간과 인간역사의 자기 해석 속에서 구명하고 있다. 그래서 라너는 초월적 방법이란 인식 주체와 한 특정한 대상과의 상호연관 내지 조건관계 등을 구명하는 원리라고 그 나름대로의 일반적 정의를 내린다.
라너의 하느님 상념은 인간학적 초월신학의 이러한 취지 안에서 형성되었다. 라너의 초기 철학 내지 종교철학 작품 안에 담겨 있는 초월철학적 하느님 규정 과정과 그의 신학 작품들 안에서 만나게 되는 초월신학적 하느님 상념을 전통 라틴 신학의 신관에 대한 비판적 입장과 함께 구명하려고 한다.
II. 라너의 초월철학적 하느님 규정
라너의 초월신학은 초월 철학적 통찰을 내적 소인으로 포함하고 있고 그의 하느님 상념 안에서도 초월 철학적 신 규정 내용이 담겨 있다. 그래서 우선적으로 초월 철학적 신 규정 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1. 먼저 인간 정신 능력으로서의 지성적 인식 행위 안에서 하느님의 존재가 긍정되는 경위를 살펴 본다.
세계 안에 피투된 처지에서 세계 내 존재자들과 관계를 맺는 인간의 인지적 ‘주체의 완전 귀환’ 과정은 인간이 현실적으로 성취하는 모든 판단(判斷, das Urteil) 속에서 생긴다. 존재일반에 대한 질문 자체가 인간의 모든 생각과 말, 그리고 행동 속에서 발생하는 가장 일반적이고 형식적인 판단이다. 존재 일반에 대한 질문 안에서 인간의 존재 자신이 질문에 처해진다. 이 질문 안에서 인간이 자신을 세계와 자기로부터 분리시키는 일이 발생한다. 이러한 분리 작용은 외부 감각적 실재와의 접촉을 필요로 하는 감성에 의해서 발생한다고 볼 수 없다. 질문자가 감성적으로 체험된 일체의 범주적 대상으로부터 분리하여 대치하는 가운데 주체로서 자기 자신에게로 귀환하는 것은 정신능력으로서의 지성에 의하여 가능하게 된다. “감성에 주어진 타자를 자기로부터 분리시켜 의문에 부치고, 이에 대해 판단하고 대상화함으로써 인식자를 비로소 주체로 만드는 인식의 능력을 우리는 사고(思考), 지성(知性)이라고 부른다.”
라너는 여기서 초월적 방법원리에 따라 판단[존재 질문]의 가능성의 조건을 주체 안에서 묻는다. 판단 속에서 이루어지는 주체의 ‘자기 내 존립’의 최종 근거에 대한 물음은 감성 속에 주어진 개별적 사상(事象)을 개념화하는, 즉 특수한 것 속에서 일반적인 것을 파악하는 가능성의 조건에 대한 물음으로 구체화된다. 여하한 판단 안에서 감성 속에 주어진 개별적 사상을 개념화하는, 즉 특수한 실재 속에서 일반적인 것을 파악하는 일이 발생한다. 구체적으로 개별적이고 특수한 실재로부터 일반적인 것을 파악하는 것은 추상(抽象)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 추상 능력을 지성이 소유한다. 지성이 감각에 주어진 특수한 개별 실재로부터 일반적 형식(形式, Form)을 추상해낸다. 여기서 존재질문 제기의 가능성에 대한 조건을 구명하는 일이 실제로는 지성의 본질에 대한 물음의 규명이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어떠한 실재의 한계는 인식하는 사람이 그 한계를 실제로 넘어설 때에만 비로소 인식될 수 있다. 이것은 감성을 통해서 제한된 개별 대상의 하성(何性, quidditas: Washeit)의 한계성 인식에도 해당된다. 감성 속에서 체험된 하성의 제한성이 감각적으로 주어진 개별 사물 속에서 인식되려면, 이 개별 사물을 파악하는 행위가 이 사물의 한계를 넘어서 ‘보다 많은 것’(das Mehr)을 지향해야만 가능하다. 라너는 감성 속에서 구체적으로 주어져 있는 형식을 제한된 것으로 파악하고 추상하는 가능성을 ‘전취’(前取, Vorgriff)라고 부른다. 전취는, 말하자면, 인간이 세계 안에서 만나 직접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개별 대상을 유한한 것으로 파악하고 이 개별 대상의 하성(何性)을 추상하여 ‘무엇’으로서 판단하는 지성적 가능성이다. 라너는 이 전취 속에서 지성의 본질을 보고 있다. 이 전취가 개별 사물을 능가하여 지향하는 ‘보다 많은 것’은 개별사물과 같은 유형의 범주적 대상일 수는 없고, 인식될 수 있는 개별 대상들의 절대폭(絶對幅, Absolute Weite)이라고 라너는 지칭한다. 개별 대상은 이 절대폭을 채우지 못하는 속에서 제한된 실재인 그 무엇으로 인식된다. 그리고 개별대상이 제한된 것으로 인식되는 한, 그것의 하성적(何性的) 규정이 추상화된다는 것이다. 라너에 의하면 전취가 개별대상의 인식을 가능케 하는 지평을 의식하도록 만든다.
라너는 개별 대상의 유한성을 현실적으로 인식하도록 하는 지평 자체도 대상 인식의 가능성의 조건으로서 그 속에서 나타나는 추상적 형식을 인식할 수 있는 것처럼 참으로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간주한다. 추상된 형식은 판단의 술어, 빈사(賓辭) 내용이고 대상의 제한성은 이 빈사형식으로부터 인식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실제로 존재하는 대상의 유한성을 인식하게 만드는 지평 자체도 당연히 즉자존재자(卽自存在者, das An-sichseiende)이어야 한다고 본다. 그는 전취의 지향점인 이 즉자존재자가 바로 존재(存在, das Sein)라고 규정한다. 인간의 주체적 행위를 가능케 하는 초월적 전제인 전취는 바로 무한한 존재를 지향하는 전취라는 것이다. 라너에 의하면 존재를 지향하는 이 전취가 인간이 필연적으로 제기하는 존재 일반에 대한 질문 속에서 발생한다. 그래서 존재 지향의 전취는 인간 현존재의 기본태세에 속한다고 규정된다. “이 전취는 존재를 지향한다. 이 전취의 폭은 단순히 감각 속에서 표상될 수 있는 것의 총체성이 아니라 자신의 부정적 비제한성 속에서의 존재 바로 그것이다.” 전취의 지향점으로서의 존재는 ‘절대존재’(esse absolutum)는 아니고 ‘일반존재’(esse commune)로서 자신의 비제한성 안에서의 존재를 가리킨다. 여기서 존재의 부정적 비제한성이란 말은 전취의 지향점으로서의 존재가 유한하지 않음을 시사한다. 이를테면, 전취가 존재를 자체로 무제한한 실재로 드러낸다.
라너는 인간의 인식적 주체작용 속에서, 존재를 지향하는 전취 속에서 절대 존재로서의 하느님의 존재가 함께 긍정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인식의 필연적이고 따라서 항상 이미 성취된 조건으로서 이 전취 속에... 절대 존재의 실존이 함께 긍정되고 있다. 가능한 대상으로서 전취의 폭에 맞닿을 수 있는 것이 함께 긍정되고 있기 때문이다. 절대 존재가 전취의 폭을 남김없이 채울 것이다. 이러한 의미, 오직 이러한 의미에서만 말할 수 있다. 전취는 하느님을 지향한다.” 라너는 절대존재로서의 하느님의 존재가 전취의 폭을 통하여 함축적으로 함께 긍정되고 있다는 의미에서 전취가 하느님을 지향한다고 강조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실존은 인간이 세계 안에서 직접적으로 관계를 맺는 유한한 존재자들을 파악하는 가능성의 조건으로 요청된 것이다. “한 존재자의 현실적 유한성의 긍정은 그 가능성의 조건으로서 절대존재의 실존의 긍정을 요청한다. 이 긍정은 이미 유한한 존재자의 제한성을 인식케 하는 존재로서의 전취 속에서 생기고 있다.” 라너는 인간이 유한한 존재자들을 존재의 지평 안에서만 인식하기 때문에 동시에 절대존재인 하느님께 항상 개방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인간)는 이것을 명시적으로 알고 있거나 모르거나, 원하거나 원치 않거나 상관없이 하느님께로 이르는 도상에 있음으로 비로소 인간이다. 그는 항상 하느님께 무한하게 개방되어 있는 유한자이다.”
2. 라너는 인간의 의지적 주체작용 속에서도, 존재를 지향하는 전취 속에서 절대 존재로서의 하느님의 존재가 함께 긍정된다는 논지를 개진한다. 라너의 초기 저서 「세계 내 정신」이 토마스 아퀴나스의 인식론 연구 차원에서 지성적 인식 가능성의 조건 구명에 머물러 있는데 비해, 종교철학서인 「말씀의 청자」에서는 인간의 지성적 인식뿐만 아니라 의지적 자유의 가능성 조건 구명을 통하여 하느님의 존재 긍정을 추론하고 있다.
라너는 존재에 대한 질문을 제기해야 하는 필연성으로부터 인간 존재 자체의 피투성(被投性)을 추출한다. 그는 인간 존재의 피투성을 필연적으로 긍정하는 것을 인간 존재 자체의 절대적 긍정과 동일시한다. “그(인간)는 자신의 피투성을 필연적으로 긍정하는 가운데 자신의 피투성 안에서 그리고 피투성에도 불구하고 자기 현존재를 절대적으로 긍정한다.” 우연적 사실의 긍정이 불가피하게 필연적이기 때문에 인간 존재의 우연성 안에서 절대성이 현시된다는 논리이다. 인간의 실존은 자신의 우연성에도 불구하고 자기 존재를 부정하는 가능성을 자체적으로 배제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이 사실은 인간이 유한하고 우연적인 자기 인간 존재와 필연적 관계를 맺고 있음을 시사한다고 라너는 보고 있다. 인간의 절대 존재에로의 초월 역시 ‘오로지’ 비필연적인 우연한 실재와의 관계의 필연성 안에서만 성취될 수 있음을 말한다는 것이다.
라너는 우연한 인간 존재의 절대 정립의 요체를 ‘의지(意志)’ 안에서 본다. 우연한 존재의 절대 정립은 단순한 정적 정립일 수는 없고 의지적 정립이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우연한 것의 인식적 정립의 근거는 우연히 인식된 실재 자체에 정초되어 있지 않고 의지적 정립 자체에 자리한다는 것이다. 이는 인간의 본질을 구성하는 존재 일반에로의 초월이 결국 의지를 통해 작용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라너는 의지를 인식의 내적 소인(素因)으로 규정한다.
라너는 우연한 인간 존재의 의지적 긍정의 필연성으로부터 절대적 존재의 수용과 존재 일반의 조명성(照明性)을 추론한다. 라너에 의하면 우연한 인간 존재의 절대 정립은 필연적으로 자유로운 존재자에게서 나오는 것이고, 인간의 자기 자신에 대한 필연적 처신은 자유로운 정립의 추성취(追成就)로 이해되어야 한다. 우연한 인간 존재의 필연적 정립이 자유롭지 않다면 이 정립은 ‘어두움에 차 자기 자신에 대하여 모르고 있는, 조명되지 않은 근거에서 나오는 것임에 틀림없으리라’는 것이다. 이러한 통찰에 의거하여 라너는 의지를 ‘자유로운 정립의 정립된 추성취(der gesetzte Nachvollzug einer freien Setzung)'라고 규정하면서 인간의 이러한 의지적 정립이 하느님의 정립이라고 추론한다. “인간인 현존재의 이 자유롭고 본원적 정립은... 절대 존재의 정립, 하느님의 정립일 수 밖에 없다.”
여기서 라너는 인간의 자기 자신에 대한 필연적이고 절대적 처신이 자유로운 창조주 존재의 긍정을 내포한다고 본다. 인간이 자신의 피투성에 대한 자신의 필연적인 처신 속에서 자기 자신을 하느님의 자유로운 의지적 정립으로 긍정한다는 것이다. “그는 자기 존재가 순수 존재의 자유로운 힘에 의하여 지탱된다고 알고 있다.” 라너에 따르면, 하느님은 자유로운 의지력으로 유한한 존재자를 지탱해 준다. 라너는 순수 존재의 자유로운 행업으로부터 하느님의 인격성을 연역해 낸다. 하느님은 강대한 자유로운 인격체라는 것이다.
자유로움을 고유한 특징으로 지니는 인격체는 의지 행위를 통해서만 자기 자신을 다른 인격체에 드러내 보일 수 있다. 인간은 정신으로써 강대한 자유로운 인격체 하느님과 대치한다. 인간이 자신의 초월 안에서 자유로운 하느님 앞에 서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일차적인 존재에 대한 질문에서 이미 하느님이 자유롭게 행동할 가능성 앞에 서고 이로써 가능한 계시의 하느님 앞에 선다고 파악된다. 본연의 의미에서 하느님의 계시는 자신의 은폐된 신성의 사실적 개현으로 발생한다. 인간은 자신의 기본태세의 힘으로 이러한 계시를 필연적으로 요구할 수 없다. 그래서 하느님의 절대 존재는 유한한 인간 존재에 대하여 자유로운 존재로 머문다.
인간 인식에 주어지고 존재의 지평 안에서 전취를 통하여 포착된 구체적 개별 실재는 인간 주체의 대상으로 파악된다. 인간의 의지적 소인이 인식의 구성적 소인으로서 인간의 초월을 함께 규정하기 때문에 인식 대상들은 동시에 의지적 행동의 가능한 목표로, 즉 가치(價値)로 파악된다. 따라서 하느님 존재가 가치로 파악된다. 그래서 인간이 절대 가치, 하느님 지향의 절대 초월이라고도 규정된다. 그런데 절대 가치로서의 하느님이 인간에게 질료적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형상 대상으로서 지평의 최종 지향점으로 주어지기 때문에 하느님은 구체적 질료 대상의 유한한 가치의 파악 가능성의 조건으로만 나타난다. 정신이 인식 안에서 유한한 인식 대상을 절대 존재로의 초월을 통하여 자신으로부터 분리시킴으로써 자신을 자유롭게 드러내듯이, 가치를 인식하는 정신이 직접 대하는 유한한 개별 가치를 절대 가치로의 초월 안에서 유한한 것으로 파악함으로써 자신을 자유롭게 드러낸다.
3. 요컨대, 라너는 인간이 세계 안에서 사람이나 사물을 만나면서 말이나 행동으로 드러내는 존재 일반에 대한 질문 제기 속에서 존재에 대하여 주제적이고 명시적인 지식은 아니지만, 비주제적이고 함축적(含蓄的)인 선험적 지식을 가진다고 본다. 그 어떤 면에서도 전적으로 미지의 것에 대해서는 질문하기란 도대체 불가능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선험적 지식을 부정할 경우에는 의심할 수 없이 명백한 질문 제기의 현상 자체를 부정하게 되는 모순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라너에 따르면, 존재질문 제기 현상은, 인간의 개별적인 인식과 의지의 주체작용이 선험적으로 주어진 존재의 지평 안에서 비로소 가능하게 된다는 사실을 아울러 시사한다. 인간이 세계 안에서 만나게 되는 모든 실재들을 유한한 것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도 그가 존재의 지평 안에서 이들을 보기 때문이다. 라너는 전취의 지향점으로서의 존재는 유한한 존재자의 부정 속에서 추후로 반성된다고 보고 있다. 여기서 인간이 절대 존재에 이를 수 있는 통로는 그가 세계 안에서 만나게 되는 유한한 존재자의 부정을 통해서만 열리어 있다. 인간은 유한한 대상에 항상 내포되어 있는 제한성 내지 부정성을, 전취 속에서 명시적으로 만듦으로써만 절대 존재를 인식하고 판단하게 된다는 것이다. 인간이 세계 안에서 만나게 되는 개별 존재자는 전취가 지향하는 절대폭을 채우지 못하는 속에서 유한한 것으로 인식되는 가운데, 전취의 지향점으로서의 존재가 절대폭을 남김없이 채우는 실재로서 동시에 함께 인식된다는 말이다.
라너는 인간이 주체 행위 속에서 지향하는 지평으로서 절대 존재가 인간정신의 본질인 전취의 폭을 남김없이 채운다는 점에서, 이 절대 존재인 하느님이 인간의 주체행위가 성취되는 속에서 함께 긍정된다고 보고, 이러한 의미에서 인간을 ‘하느님 지향의 초월’ (Transcendenz auf Gott)이라고 규정한 것이다. 하지만 라너에 의하면 인간이 세계 안에서 만나는 모든 존재자들의 유한성을 부정하면서 유한성의 피안을 지향하는 가운데에서만 무한성 속에서의 하느님을 인식하게 되기 때문에 하느님의 무한성 자체는 인간의 유한한 정신에 은폐되어 머문다. 여하간, 라너에게서 하느님은 세계내 존재 사물처럼 결코 객관적 인식의 질료적 대상(objectum materiale)으로서가 아니라 절대적으로 부인할 수 없는 세계내 존재자들의 인식과 판단을 가능케 하는 선험적 조건으로 형상적 대상(objectum formale)인 지평으로 긍정된다는 점이 강조될 것이다.
그런데, 신학자로서 라너는 하느님을 인간과 세계를 지탱하는 요원한 근거로만 머무는 분으로 이해하지 않고 인간에게는 신비로 머무는 자기전달로서의 계시를 통하여 당신의 창조세계에, 특히 당신의 피조물 인간에게 내밀하게 현존하는 분으로 파악한다. 물론, 하느님이 당신의 창조물 안에서 생기게 된 다른 원인들과 병존하는 하나의 외적 원인으로서 역사하시는 것이 아니고 피조물 안에서 직접적으로 현존함으로써 역사(役事)하는 분으로 제시된다. “따라서 소위 하느님의 특별한 ‘개입’이란 오직 구체적인 세계에 항상 내재하고 있는 하느님의 초월적 자기양여, 역사적인 구체화로서만 이해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개입’이 이루어지는 것은, 첫째로 유한한 소재와 생물적인 조직체가 가지고 있는 정신과 정신의 역사에 대한 근본적인 개방성에서이다. 둘째로 하느님과 피조적인 인격간에 서로의 자유에서 이루어지는 초월적인 관계의 역사에 대해서 정신이 가지고 있는 개방성에서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세계에 대한 진정한 개입은 모두 하느님의 자유로운 행위로서 어떤 것에서도 연역될 수 없는 것이지만, 역시 세계의 초월적인 근거인 하느님이 처음부터 자신을 양여하는 근거로서 당신 자신을 세계 내에 주셨다고 하는 그 ‘개입’의 역사적인 구체적 나타남인 것이다.”
III. 라너 초월신학의 하느님 상념
라너 초월신학의 하느님 상념은 내부적으로 초월철학적인 형이상학의 소인을 내포하면서도 그 자체로서는 구세사적 신관의 특성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라너는 하느님에 관한 신학 논고(論考)인 신론(神論, De Deo)이 신에 관한 철학적 내지 종교학적 담론을 지향하지 않고, 인류 역사 안에서 자유롭게 발생한 계시된 하느님, 즉 역사상 구체적 인물 나자렛 예수에게서 절정에 삼위일체의 하느님, 곧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신 하느님의 실상을 구명해야 한다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기본 입장을 자신의 입장으로 수렴하면서 전통적 라틴 신학의 신론 입장이 지니는 문제점들을 지적하면서 초월신학적인 하느님의 실상을 제시하려고 노력하였다.
1. 전통적 라틴 신학의 신관 비판
라너는 신학자로서 하느님을 추상적 형이상학적 본질을 보유하는 중립적 신성으로서가 아니라 창조 이래 인류의 역사 안에서 세계를 능가하는 인격성으로 인간과 세상을 향하여 바로 당신 자신을 전달하고 마침내 나자렛 예수 안에서 절정에 이른 인격적 하느님으로 이해한다. 이러한 그의 하느님 상념은 지난 세기 중엽까지 수세기에 걸쳐 가톨릭 신학을 규정해온 전통적 라틴 신학의 신론에 대한 비판적 면모를 드러낸다.
라너는 전통적 라틴 신학이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의 신학대전(神學大全, Summa Theologiae)을 거의 표본적인 교과서로 채택한 이래 신론(神論, De Deo Uno)이 교의신학의 첫 논고(tractatus)로서 일종의 자연신학(自然神學)의 기능을 담당하면서 환원적으로 취득된 하느님의 형이상학적 본질로부터 완전성, 무한성, 영원성, 무량성, 불변성, 단순성, 유일무이성, 전재성과 같은 추상적 ‘속성’(屬性, Eigenschaften)이 연역되고 있어 형이상학과 거의 구별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구세사 안에서 당신 자신을 계시하면서 인간과 맺는 관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구체적 구원 ‘처신’(處身, Verhalten)에 관하여는 직접적 언급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신론에 이어지는 삼위일체론(三位一體論, De Deo Trino) 역시 신론을 통해서 제시된 하느님의 본질 가운데에서 인간 지성에 의해 온전히 구명되지 않는 신비 부분을 다루기는 하되 인간과 세계와의 관련성이 명시적으로 제시되지 않고 영원으로부터 존재하는 신적 삼위일체의 신비만이 마치 자체 안에 폐쇄된 실재처럼 객관적으로 구명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라너는 전통적 삼위일체론을 대할 때 사람들은 이 가르침이 무엇을 뜻하고 여기서 도시 무엇을 이해할 수 있으며, 왜 이 삼위일체의 계시가 이루어졌는지 질문하게 되고 하나의 명제가 다른 명제를 지양하는 듯한 변증법적인 개념유희처럼 느껴진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하느님의 육화가 제 2위 말씀을 통해서 일어나기는 하나 라틴 서방 그리스도교 신학에서 아우구스띠노 이래 하느님의 각 위격이 제 2위처럼 육화될 수 있다고 함으로써 말씀과 다른 위격의 기능이 구별되지 않게 되어 있다고 지적하면서 삼위일체의 신비가 명료하게 제시되지 않음을 비판한다.
라너는 그동안 하느님 교리가 신자들의 일상 생활에 결정적 영향을 주지 못하고 지성적 교리 명제로만 머문 이유는 신자들이 믿어야 할 의무를 지니는 하느님 교의(敎義) 자체가 하느님의 내재성 구명에 그치고 인간과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계시되는 하느님의 구원 역사(救援役事)에 대해서는 명시적으로 언급하지 않은 때문이라고 본다. 그래서 라너는 이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이 있을 수 있고 생각할 수 있는 지극히 복된 신비임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이 이를 실감하지 못하고 단순히 유일신론자로서 생활하는데 머물고 삼위일체 교리와 신학은 전체 신학과 신자들의 신심 생활 안에서 고립되어 있다고 지적한다.
라너는 하느님의 추상적 형이상학적 속성 구명에 치중하는 나머지 인간과 세계를 향한 하느님의 구체적 역사상의 처신과의 관계에 대해 명료한 구별을 하지 않거나 상호 연관성을 언급하지 않았던 전통적 라틴 신학의 입장을 지양하여 하느님의 신비를 인간과 세계로부터 요원한 가운데 군림하는 초월자의 신비로서가 아니라 창조 이래 역사 안에서 구체적 처신(Verhalten)을 통하여 예수와 성령 안에서 인간과 세계 실재 일반에게 그지없이 가깝게 현존하는 구원의 신비로서 분명히 제시하는 것이 요청된다고 역설한다.
2. 라너 초월신학적 하느님 상념의 기본 소인
라너는 하느님의 자기 전달을 통하여 인간이 역사와 현실 세계 안에서 하게 되는 구원 체험에 입각하여 내재적 삼위일체(內在的 三位一體, trinitas immanens)의 하느님과 구원경륜적 삼위일체(救援經綸的 三位一體, trinitas oeconomica) 하느님의 단일성을 그리스도교적 하느님 이해의 기본 원리로 규정한다. 내재적 삼위일체란 인간과 세상 사물과의 관계를 고려하지 않고 영원무시로부터 하느님 안에 내재하는 삼위일체성을 뜻한다. 그리스도교계 안에서 정착되어 있는 삼위일체에 관한 전통적 교리들이 내재적 삼위일체 본질적 내용들이다. 구원경륜적 삼위일체란 인간과 세상 사물을 향한 하느님의 역사적 구원행업 속에서 드러난 하느님의 삼위일체성을 뜻한다.
라너는 그리스도교의 삼위일체적 하느님 신앙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하여 역사 안에서 체험하게 된 하느님의 구체적 행업에 대한 그리스도 신앙 공동체의 생활 안에서 생겨났음을 지적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구약 성서의 유일신 신앙에 정초하면서도 나자렛 출신 유다인 예수 그리스도와 이어진 성령을 통한 하느님 체험에 의거하여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성령으로서의 삼위일체적 하느님을 고백한다. 그리스도교 신학은 하느님께서 삼위일체적인 분이심을 제시하고 삼위일체가 무엇을 뜻하는가를 설명하기 위해 성서 증언에 의지하는데, 성서는 바로 역사 안에서 인간과 세상을 구하기 위해서 구체적 처신을 통하여 역사하는 하느님의 구원경륜의 면면을 증언하고 있어서 여기서 개현되는 하느님은 바로 인간과 세계를 구원하는 구원경륜적 삼위일체의 하느님이다. 성서는 구원사와 계시사 안에서 계시된 성자와 성령에 대해서 증언하며, 무원천적 내지 무근원적 하느님 성부께서 인간으로 육화되어 구원을 이룩한 성자와 인간을 성화하는 성령을 통하여 인간과 세상 만물에 그지없이 가까이 계시다는 의미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서의 하느님에 관하여 논하고 있으며, 이러한 구세사적 진술 속에서 삼위일체의 신비가 계시되어 있다.
라너는 하느님을 이해하는 데 있어 형이상학적 원리에서 연역되지 않고 역사 안에서 구체적으로 발생하는 하느님의 처신을 주목한다. 인간이 은총 체험과 역사 안에서 그리고 신론 안에서 진술하게 되는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구체적 처신인 신의와 자비, 그리고 사랑은 단순히 형이상학적 하느님의 본질의 필연적 속성들이 아니고, 본질적으로 그 이상이라고 본다. “신의, 자비, 사랑, 요컨대 우리가 초월적 은총 체험과 구세사의 단일성 안에서 체험하고 신론에서 진술해야 하는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구체적 처신은 단지 하느님의 형이상학적 본질의 신학적으로 증언된 ‘속성들’만이 아니고 본질적으로 그 이상이다. 하느님께서 형이상학적 의미에서 신실하고 사랑하는 등등을 그대로 그치지 않으면서도 우리에게 사실로 제시하시는 이 신의, 사랑 등등을 거부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가능성의 인정이, 하느님의 자유로운 사랑의 기적이 그분의 ‘속성들’이 신적인 것으로, 즉 그 인식이 우리에게 그것을 점유할 수 없게 하는 것으로 파악될 수 있게 하는 지평을 비로소 올바로 제시할 것이다.” 라너의 하느님 규정에서 관건이 되는 것은 하느님의 고정된 ‘속성’(Eigenschaften)이 아니라, 하느님의 역사적 ‘처신'(Haltungen)이다. “물론, 세계에 대한 하느님의 처신은 하느님의 필연적 본질로부터 발해지는 형이상학적 구조를 지니기는 한다. 하지만 이 구조를 통하여 하느님의 구체적 처신이 명확하게 고정되지는 않고 있다.”
결국,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께서 삼위일체인 분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구체적인 역사 안에서 체험되는 구원경륜적 하느님에 정초하고 있다. 여기서 인간이 체험하는 것은 효능인을 통하여 하느님에 의해 생산된 무엇이 아니고 내재적 하느님 자신이라는 것을 라너는 강조한다. “하느님이 자유롭게 세계에게 전달하시는 선물은 (하느님으로부터 효과적으로 생산되어 그분을 대신하는 것이 아닌)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바로 그분이시어서 그분이 삼위일체적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이 ‘삼위일체성’이 선물의 존재를 함께 규정하고 그것을 삼위일체적으로 만든다.”
3. 라너 초월신학의 하느님 상념의 이해
라너는 하느님 자기 전달 상념에 입각하여 전통적 라틴 신학의 삼위일체론을 대치하는 초월신학적 삼위일체론의 기본입장을 정립하고자 시도하였다. 라너는 구명된 주체작용의 존재론적 구조에서부터 주체 대상의 존재론적 구조를 연역해내는 초월적 연역방법을 적용한다. 하느님이 자기 전달의 수취자로 세계를 창조하였고 모든 인간의 구원을 원한다는 그리스도교 계시의 기본진리가 여기서 전제된다. 존재, 즉 하느님에 대한 질문을 필연적으로 제기해야 하는 인간에게 하느님은 자신을 전달하는 가운데에서도 그의 인식능력으로는 파악 불가능한 신비로 머문다. 피조물에 대한 하느님의 자기 전달의 가능성은 실증적으로 간파될 수 없는 하느님의 자유로운 행위로서 선험적으로 연역 가능한 사실이 아닌 본질상 신비이기 때문이다.
1) 인간과 세계를 지향하는 하느님의 자기전달은 구원경륜적 삼위일체(救援經綸的 三位一體, Trinitas oeconomica) 구조를 지닌다.
하느님의 자기 전달이 인간에게 실제로 도달되기 위해서는 수취자인 인간의 존재론적 구조에 상응해야 한다. 말하자면, 라너는 하느님의 자기 전달도 정신과 육신의 결합체인 인간의 구조에 따라 초월적이고 역사적인 두 가지 양식으로 발생한다고 규정한다. 인간의 역사성에서 출발하는 인류사와 세계사는 하느님의 계시사와 구세사와 공존한다. 하느님이 자기 전달을 통하여 세계의 심층적 근원으로서 작용하면, 구체적인 인간 역사는 하느님의 자기전달의 현현이고 중재이면서 동시에 자유로운 조물, 즉 인간을 통한 하느님의 자기 전달의 수취의 현현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처럼 라너의 삼위일체적 하느님 이해는 역사 안에서 개현된 하느님의 자기 계시에로 소급된다. 하느님의 계시로부터 살아계신 하느님이 영원으로부터 당신을 타자에게로, 비신적인 것에로 관계를 맺을 때에 말씀과 성령의 두 가능성을 가지심이 드러난다. 이 두 가능성들은 ‘하느님’에게 무엇인가를 의미한다. 이들은 하느님 삶의 내적 약동성을 드러낸다. 자신을 타자에게 전달하는 하느님의 두 가능성으로부터 창조와 인류 안에서 하느님은 당신 자신을 말씀과 성령으로 전달하였다고 파악한다.
라너는 하느님의 두 파견들이 한 분 하느님의 자기 전달의 상호 규정적 소인들이라면, 인격적이고 역사적인 수용자 인간의 존재 구조에 따라서 이 자기 전달은 상이한 이중적 국면을 지니며 발생한다고 본다. 그는 유래-미래; 역사-초월; 제공-수용; 인식-사랑 등 상이한 이중 국면들이 하느님의 자기 전달의 발생에 형식적으로 분명히 작용하게 된다고 본다. 그는 유래 - 역사 - 제공 - 인식 등 국면이 한편에, 그리고 미래 - 초월 - 수용 - 사랑이 다른 편에 속하게 되어 각기 이 자기 전달의 한 소인을 형성한다고 본다. 이 두 사중적 소인들이 성령과 성자의 두 파견들과 연계될 수 있다는 것이다.
라너는 여기서 구세사의 체험 안에 주어져 있는 파견에 착안한다. 성령 파견의 본질은 하느님이 당신 자신을 유한하고 결핍된 피조물에게 전달한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나서 타자에게 미소한 자가 될 수 있게 자신을 건네줌은 바로 사랑, 아가페이다. 이 자기 전달이 인간의 내밀한 인격 중심을 향함으로써 선물로서 뿐만 아니라 이를 수용할 수 있는 힘으로도 작용하는 한에서 더욱 그러하다. 성자 파견의 이해를 위해서 라너는 로고스 사변에 착안하지 않고 하느님의 진리 계시 파견으로 대한다. 그는 진리는 온전한 의미에서 행해진 진리로서 이 안에서 누구나 자신의 성취된 본질을 자신과 타인을 위해서 확실하고 신실하게 역사적으로 드러나게 하고 돌이킬 수 없도록 만든다는 사실에 주목토록 한다. 이것이 바로 계시적이고 구속적(救贖的) 국면이 일치되는 진리와 신의의 파견인 성자 파견의 본질이다.
라너는 이 전제 하에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고 본다 “하느님의 자기 전달은 두 기본 양식성(樣式性)으로 진리와 사랑으로서의 자기전달을 지닌다. 역사 안에서 발생하고 하느님의 자유로운 신의의 제공인 진리로서; 그리고 수용을 이룩하도록 작용하고 하느님의 절대 미래를 향하여 인간의 초월을 열어주는 사랑으로서의 자기 전달을 지닌다. 하느님 (성부)의 역사적 현현이 진리로서 하느님의 절대 미래 지향의 초월의 지평 안에서만 수용될 수 있는 한에서 그리고 절대 미래의 약속이 신실한 하느님의 구체적 역사 (절대 구원자) 안에서 확실하게 됨으로써 사랑으로 약속되는 한에서 하나의 신적 자기 전달의 이 두 국면들은 분산되지도 장식적으로 결합되어 있지 않고 상호 동일시되지 않으면서 역사, 유래와 제공 안에서 진리로서 그리고 절대 미래의 초월 안에서 수용 안에서 사랑으로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자기 전달을 구성한다.” 여기서 한 분 하느님의 전달이 세 측면에서 동일시되거나 아주 독립적으로 분리되는 일이 없이 온전히 주어진다는 것이다.
라너는 이렇게 도달한 구원경륜적 삼위일체의 하느님을 다음과 같이 부연 설명한다.
한 분 하느님의 자기 전달 속에서 하느님이 파악할 수 없는 신비로 머무는 한 성부라고 부른다. 인간이 찾으며, 자기 자신을 인간에게 개현하면서 체험토록 하는 무한한, 파악불가능한 신비는 유다-그리스도교 신앙 전승 안에서 ‘아버지’로 불린다. 그 안에서 인간은 살고 움직이며, 존재하면서 인간 삶, 인류역사와 창조의 시작이며 목표인 인간의 신적 ‘당신’이 하느님 아버지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 분 안에 있다. 그 분 밖에는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느님은 비신적인 것과의 관계 안에서 해소되지는 않는 분이다. 그분의 존재가 피조물인 타자와의 관계 안에서 고갈되지 않으며, 자기 전달 안에서 당신 자신을 해소시키지 않는다. 그분은 비신적인 모든 것을 무한한 양식으로 초극한다. 하느님은 하느님이기 위하여 창조물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하느님은 하나의 과정 안에서 자신을 타자에게로 양도함으로써 비로소 하느님이 되지는 않는다. 하느님은 당신 안에서 비신적인 것 없이 하느님이다. ‘시간에 앞서’라는 정식은 시간적이고 자체로 모순적 정식이다. 비신적인 것과 인간은 이 하느님-신비가 자신을 선사하는 선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인간 정신 안에서 영으로서의 당신 자신을 인간 생명의 약동이자 목표로 체험토록 한다.
라너는 창조된 정신과의 통교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역사를 하느님의 성령으로 대하면서 당신 자신을 인간의 초월성을 이끄는 원리로 전달하는 한 성령이라고 부른다. 그는 성령이 인류 역사 안에서 현존하고 역사함으로써 자기 삶의 무한한 신비에 대한 최종적 경의와 무조건적 의탁을 드러내는 인간을 충만케 한다고 본다. 라너는 인류 안에서 존재하는 선한 모든 것을 이룩하는 분이 하느님의 성령이라고 본다.
라너는 하느님의 자기전달의 역사가 결정적으로 절정에 도달하는 때에, 하느님의 자기 전달의 제공이 자유로운 조물 편에서 유보 없이 받아들여졌을 때, 즉 하느님과 인간의 자유로운 역사가 사실상 성공하는 종말론적 정점에 이르렀을 때, 신성과 인성의 위격적 결합(位格的 結合, Unio hypostatica)이 이루어진다고 본다. 하느님의 이 자기 전달은 역사 안에서 배신하지 않는 충실로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현현되고 이를 성부의 육화된 말씀, 성자라고 부른다. 그에게서 예수는 역사 안에서 발해진 지양될 수 없고 초월 불가능한 하느님의 말씀으로서 아들이다. 이처럼 라너는 하느님 성자의 육화를 인간 역사이기도 한 구세사의 정점으로 파악하면서 창조 이래 초월적으로 세계역사를 이끌어 온 하느님의 자기전달이 역사적으로 승리를 이루는 사건으로 규정한다. 이 사건의 주체가 바로 신성과 인성의 위격적 결합체인 신인(神人)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와 역운과 그대로 합치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신성과의 위격적 결합에서 인간 본성은 자기 완성을 보기 때문에 인간이 역사 안에서 이 위격적 결합상태를 지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느님이 무한한 신비이기를 그치는 일이 없이 세계와의 취소불가능한 일치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생한다는 것이다.
2) 라너는 역사 안에서 하게 된 구원 체험을 통하여 도달한 구원경륜적 삼위일체으로부터 내재적 삼위일체(內在的 三位一體, Trinitas immanens)와의 단일성을 말한다.
라너는 하느님의 자기전달의 삼위일체성, 곧 인간을 위한 하느님의 구원경륜적 삼위일체성으로부터 인간이 하느님 안에서의 내재적 삼위일체성을 추정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그는 하느님 자기 전달의 본질상 구원경륜적 삼위일체가 이미 내재적 삼위일체라고 규정한다. “하느님은 피조물에 대한 절대적 자기전달 안에서 ‘내재적 삼위일체’가 ‘구원경륜적 삼위일체’가 되고 그러므로 역으로 우리로부터 체험된 구원경륜적 삼위일체가 이미 내재적 삼위일체이도록 당신 자신을 전달하셨다. 이것은 우리를 향한 하느님 처신의 삼위일체성이 당신 자신 안에 있는 하느님의 실재인 삼위일체임을 말하고자 한다.” 구원경륜적 삼위일체가 하느님 존재 자체에 해당되지 않는다면 진정한 의미에서 하느님의 자기 전달에 대해서 거론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느님 자신에 해당되지 않는 구별은 순전히 조물적인 것이어서 인간은 있는 그대로의 하느님을 지닐 수 없고, 하느님의 자기전달 개념은 부정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라너는 성령과 위격적 일치 안에서 이루어지는 세계를 향한 하느님의 자기 전달은 하나요 동일한 하느님의 자유 행업의 대상으로서 상호 규정하는 한 분 하느님의 자기 전달의 내적 소인이기도하다고 지적한다. 이 이중적 자기 전달이 참으로 하느님의 자기 전달이라면 이것이 하느님의 실재 자체에 해당되어서 하느님 자신의 규정이어야 한다는 요청이 따른다. 하느님의 창조적 행위는 하느님의 본질과 동일하게 영원히 머물고 그러면서도 세계에 대하여 자유로워야한다는 것이다. 하느님 자기 전달의 파견들과 이와 함께 우리 인간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위격’들이 하느님께 해당되지 않고 단지 조물적 영역에만 속한다면 하느님의 자기 전달에 관한 언급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성령과 성자 안에서 발생한 이 파견들은 하느님 안에서의 실제적인 발출들(Hervorgänge, processio)이라는 것이다. 라너는 이 발출들이 구별되는 파견들이기 때문에 서로 구별된다고 규정한다. “하나의 자기 전달의 두 소인들은 하느님으로부터 볼 때에도 구별되며, 상위성 안에서도 서로 연관되어 있는 하느님 자기 전달의 소인들이다. 그리고 ‘발출들’과 관련해서도 동일한 것이 해당된다.”
라너는 하느님의 이중적 파견들과 동일시되는 두 발출들이 즉자적 하느님께 해당되는 이중적 자기 전달의 ‘가능성’으로서 구원경륜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고 규정한다. 이 발출들이 현실적으로 주어진 자유로운 세계 연관성을 지니기 때문에, 이들은 ‘즉자적’ 하느님께 해당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위해서’도 내재적 의미를 지녀야 한다고 보면서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두 발출들의 실제 구별성은 하느님 (성부)의 이중적 내재적 자기 전달을 통하여 구성되어 있다. 원천적 하느님 (성부), 진리 안에서 당신 자신을 위해서 진술된 분 (성자) 그리고 사랑 안에서 당신 자신을 위해서 수용하고 수락한 분 (성령)은 그래서 자유 안에서 당신 자신을 이 이중적-하나의 양식으로 ‘외부로’ 전달할 수 있는 그분이다.”
라너는 하느님 안에서의 구별이 성부의 이중적 자기 전달을 통하여 구성된다고 본다. 이 자기 전달을 통하여 성부가 한편으로는 당신 자신을 전달하고 다른 편으로는 바로 진술자와 수용자로서 진술된 분과 수용된 분과의 참된 구별을 정립한다는 것이다. “진술된 것이 한편으로는 하느님의 참된 자기 전달의 전달을 이룩하고 다른 편으로는 하느님 사이에 전달하는 분과 전달된 분 사이의 참된 구별을 지양하지 않는 한에서 신성으로, 즉 하느님의 ‘본질’을 언급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라너는 원천적 자기 전달자와 진술된 분과 수용된 분 사이의 구별을 뜻하는 관계가 ‘상대’(relationes)로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본다. 이것은 ‘본질’의 같음으로부터 야기된다는 것이다. 그는 이 상대성을 다른 규정들처럼 절대적으로 실제적인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대한다.
4. 라너의 하느님 상념 평가
라너의 초월신학적 하느님 상념의 실상을 파악하려 시도하였다.
1. 라너의 하느님 상념이 인간학적 전환을 이룩한 근세의 형이상학적 사상가들인 데카르트, 스피노자(B. Spinoza, 1632-1677), 칸트(I. Kant, 1724-1804)와 독일 관념론자들(J.G. Fichte, 1762-1814; G.W. Hegel, 1770-1831; F.W.J. Schelling, 1775-1854)의 신관과 표현의 차이, 강조점의 이동 등이 발견되기는 하지만, 원칙적으로는 동일한 원리를 드러낸다고 본다. 이들의 하느님에 대한 물음은 고대의 신화론적 및 중세의 우주론적 사고에서처럼 객관적 실재 세계의 존재에 대한 물음으로서가 아니라, 인간 존재에 대한 물음으로 집중된다. 여기서 하느님은 인간과 세계 위에 군림하는 절대지배자(고대 신화론적 신관: Deus super nos)나, 세계 피안자로서의 초월자(중세 우주론적 신관: Deus supra mundum)로 파악되어 있지 않다. 인간이 세계 안에서 인간으로서 현존하는 한, 하느님이 부인할 수 없는 주체의 현존 사실을 가능케 하는 조건으로 파악되고 아울러 세계 안에서 현존하는 인간존재의 심층적 소인이자 주체 성취의 지평으로 규정되어 있다(Deus in homine et in mundo). 이들 인간중심적 하느님 상념에서 특기할 점은 하느님의 무한성과 인간의 유한성이 인간 주체성 안에서 함께 사유된다는 사실이다. 하느님의 관념을 통해서 세계내 존재자들과 자신의 유한성을 인식하는 인간이, 하느님을 자신의 남[他者]으로서 자신 위에 정초하도록 요청한다는 것이다. 근세 이후에 서구 철학계 안에서 인간학적 전환이 활발히 이루어진 데 비해 중세 이래 그리스도교계 안에 깊이 정착되어 있던 우주론적 신학의 장벽을 넘어서 새로운 지평을 개척한 라너의 공헌은 기념비적이라는 평가를 내릴 수 있다고 여긴다.
라너의 초월신학 사상 일반과 그의 하느님 상념은 현대 세계 안에서 그리스도 신앙이 처한 상황의 극복을 위해 불가피하게 요청된다고 본다. 전근대적 실재관과 가치관에 대해 비판적인 계몽주의적 사고에 직면하여 그리스도 신앙의 진리를 둘러싸고 제기되는 기본 물음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보편성을 지니는 필연적 진리가 어떻게 우연적이고 구체적인 역사적 인물 내지 사건을 통하여 중재되는가 하는 문제이다. 라너는 역사적 신앙과 일반적 사고, 구체적 계시 내용과 현대 과학의 보편적 실재 인식의 관계가 인간 존재의 공통 물음의 기반 위에서 중재된다는 것을 제시하기 위해 필생의 노력을 경주하였고 그의 ‘초월신학’은 바로 이러한 문제 제기의 지평 안에서 형성되었다. 그는 역사 안에서 발생하는 하느님의 계시와 이를 수용하는 인간의 신앙 행위 자체를 중재의 교차점으로 대하면서 이를 하느님의 선행적 자기전달 제공을 통하여 드높여진 인간의 초월 체험 안으로 수렴하는 작업을 수행함으로써 현대 세계 안에서 그리스도교계와 신학이 직면한 난제를 해결하고자 시도한 것이다.
라너는 일반 대중적 유신론과는 달리 하느님은 세계 안에서 다른 원인들과 나란히 병존하는 하나의 원인이 아니라는 통찰을 기본적으로 제시하였다. 라너는 토마스 아퀴나스처럼 제2원인론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입장을 정립하였다. 그는 우선 모든 실재의 초월적 근거와 세계내적 원인들을 구별한다. 하느님은 세계내적 원인으로 생각되지 않는다. 원인은 앞서 소여된 물질을 전제하는데 비해 근거는 자기 이외에 다른 아무 것도 전제하지 않는다. 그것은 도시 왜 무엇인가가 존재하고 무가 아닌가의 유일한 근거이다. 그래서 라너는 하느님을 결코 객관적 인식의 질료적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객관적 인식의 가능성의 조건으로서 형상 대상인 지평으로 현존하는 분으로 제시하면서 하느님의 자기전달의 수취자로서의 인간의 존엄성과 역할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2. 논자는 라너의 하느님 상념이 시대 상황과 요청에 부합하려는 취지에서 형성된 초월신학의 지평 안에서 형성된 한에서 적합성을 지닌다고 보면서도, 그의 사상 전체에서 현실적 사회와 세계 역사의 실상이 얼마나 진지하게 고려되어 있는지에 대해 극히 회의적이다. 형언할 수 없는 사회적 불의와 역사적 질곡으로 말미암아 무고하게 희생되고 인간 이하의 삶을 영위했고 여전히 영위해야 하는 무수한 인간들에게 라너의 하느님 상념이 실제로 구원의 진리로서 통용될 수 있는지는 의문으로 남는다.
그러므로 라너 신학의 신앙진리의 사사화(私事化)와 비사회화(非社會化) 및 비역사화(非 歷史化) 경향을 비판하면서 인류 역사 안에서 실제로 발생한 사건들과 연계하여 하느님의 신성을 제시하려는 희망의 신학, 정치 신학, 해방 신학, 민중 신학 등 제현대 신학 사조의 지적에 공감하면서 라너의 하느님 상념은 역사 안에서 발생한 불의와 부조리로 말미암아 희생되는 무고한 생명의 고통 문제를 진지하게 수렴하는 보완 작업을 필요로 한다고 본다.
IV. 맺는 말
라너가 지난 세기의 시대 상황 안에서 대내외적으로 도전받고 영향력 감소에 직면한 그리스도교와 신학의 신뢰 회복과 활력 도모를 위해 인간학적 전환을 이룩한 근세 이래의 서구 철학 사조의 정당한 소인을 신학 안으로 수렴하여 초월신학 정립을 위해 기울인 노고에 대해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초월신학 사상은 미증유의 역사적 격변기에 발해진 시대 요청과 외부 도전에 탄력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돌파구를 마련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그의 하느님 상념은 생을 마치기 직전까지 지속했던 교회의 쇄신과 대외 관계 개선을 위한 노력의 정수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라너가 객관적 구원실재를 하느님의 자기전달로 규정하면서 인간의 자기성취의 지평이면서 내적 심층임을 심도 깊고 치밀하게 제시하는 한편, 구원 실재의 수취자인 인간의 존재 구조에 상응하여 하느님의 자기전달 양식을 초월적이고 범주-역사적 양식으로 발생하는 것으로 파악하여 하느님의 내재적이고 구원경륜적 신비와 계시 수용자로서의 인간의 신비와의 상관성을 명료하게 제시한 작업은 경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이로 정연하게 제시된 라너의 신학적 작업은 현대 사조 일반과 이웃 종교들과 대화하는 데 있어 현대 신학계가 미래에도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정당한 통찰을 간직하고 있다.
라너의 하느님 상념을 포함한 신학 사상은 세계 신학계에서 광범한 호응과 찬탄을 받는 가운데에도 격렬한 비판도 상당히 받고 있다. 신학계 일각에서는 그의 인간학적 신학사상이 너무 추상적이고 관념적이어서 각박한 사회와 냉혹한 역사 현실의 구체성을 결여하고 있어 비현실적이라고 비판을 받고 있기도 한다. 그리고 라너의 초월신학 사상이 지니는 문제점은 오늘날까지도 그리스도교계 안에서 주변세력에 지나지 않는 아시아와 아프리카, 그리고 라틴 아메리카 지역인 소위 ‘제3세계’에 속한 교회가 중심 역할을 수행하게 될 ‘제3교회’의 시대에 달리 해결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기본 취지의 타당성과 핵심 통찰의 정당성을 담지하고 있는 라너의 신학 사상 일반과 하느님 상념은 앞으로도 종파를 초월하여 전 그리스도교 신학계에 강력한 영향력을 부단히 미칠 것으로 전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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