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과 맘몬(mammon)
조규만
(가톨릭대학교 교의신학 교수․신부)
Ⅰ. 서 론
요즈음 우리 사회는 금융 실명제(實名制) 실시를 놓고 진통(陣痛)을 겪고 있다. 뇌물 수수(賂物授受), 부정 축재(不正蓄財), 그 밖의 경제 비리(經濟非理) 등, 돈의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우리 사회가 황금 만능주의 시대가 되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이러한 사회적 경향은 신앙(信仰)과 어떤 관계를 갖는 것일까? 그리스도교 신앙은 이러한 사회적 경향을 어떻게 수용(受容)하여야 하는가? 하느님과 재물(財物), 신앙(信仰)과 물질 만능주의(物質萬能主義) 그 관계를 성서를 비롯하여 교회의 문헌을 통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다시 말해서 신앙의 입장에서 돈과 부(富)의 문제를 다루고자 한다. 보다 명확하게 하기 위하여 가난의 문제도 아울러 보고자 한다. 우선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을 간략하게 언급하고, 이어서 그리스도교의 재물관(財物觀)을 살펴볼 것이다.
Ⅱ. 본 론
1. 하느님과 하느님 중심주의
1.1 성서의 하느님
인간은 사고(思考)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다시 말해서 철학(哲學)하기 시작하면서부터 하느님의 문제를 사색(思索)의 중요한 대상으로 삼아 왔다. 고대 인간은 어떤 신적 존재를 인정하고 받아들였다. 철학적 사색이 시작될 무렵에는 신의 문제가 신화(神話)라는 형태로 주어졌다.¹본격적인 신 표상(神表象)에 대한 철학적 사유(思惟)는 밀레토스 학파에게서 볼 수 있다. 이들은 시초(始初)에 무엇이 있었는가를 질문하면서, 사물의 다수성(多數性)의 원인을 원천적(源泉的)인 단수(單數)에 돌리고 있다. 신화의 입장으로부터 벗어난 형이상학적 신 개념(神槪念)은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최고선(最高善), 또는 제일 원동자(第一原動者)로서 만나게 된다.
한편 이스라엘 백성의 하느님 신앙(信仰)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한다. 물론 결정적인 하느님 체험(體驗)은 이스라엘의 출애급(出埃及) 사건이다. 그러므로 출애급은 하느님 체험의 중심(中心)이요, 아브라함은 하느님 신앙의 시작(始作)으로 소개된다. 시대마다 상이하게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 ‘엘’, ‘엘로힘’, ‘야훼’로 불리우는 하느님의 이름은 하느님을 체험하게 된 역사적인 사건과 상황을 반영한다.
이러한 역사적 체험을 통하여 이스라엘은 하느님이 당신 백성과 함께 하시며, 인간과 교류(交流)하고, 당신 백성을 구원(救援)하시는 분으로 이해하였다. 특히 예언자(預言者)들은 하느님이 자연과 역사의 유일(唯一)한 주권자(主權者)라는 주장을 전개하였다(아모 9,7; 예레 2,5.13; 이사 40,15.17,30; 43,13; 45,5; 48,12 참조).
신약에서 증언(證言)되는 하느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啓示)된 하느님이시다. 예수는 아무도 보지 못한 하느님을 친히 보여 주셨을 뿐만 아니라(요한 1,18; 14,7-9), 명백하게 말씀으로 알려 주었다(요한 16,25-28).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찬란한 빛이요, 하느님의 본질을 간직하신 분’(히브 1,3; 골로 1,27; 2,2)이시다. 그러므로 예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하느님께 이를 수가 없다고 고백되고 있다(에페 2,18; 3,12; 요한 14,6). 따라서 신약의 하느님은 누구든지 원하기만 한다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인격적으로 만날 수 있는 분이다. 그렇지만 구약의 하느님과 동일(同一)한 하느님이시다. 곧 조상(祖上)들의 하느님(사도 3,13; 5,30; 22,140,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마태 22,32; 마르 12,26; 루가 20,37; 사도 3,13; 7,32), 이스라엘의 하느님(마태 15,31; 루가 1,68; 사도 13,17; 히브 11,16)이시다.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2고린 1,3; 11,31; 로마 15,6; 에페 1,3.7; 1베드 1,3)이시다. 예수는 이스라엘이 섬겨온 야훼 하느님을 온 마음고 온 정성과 목숨을 다해서 섬기라고 명하였다(마르 12,29-30).²이와 같은 사실은 하느님은 오직 한 분이시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 준다. 하느님이 한 분이라는 유일성(唯一性)은 하느님의 절대성(絶對性)과 아울러 하느님 중심주의(中心主義)를 드러내고 있다. 한 분 하느님 이외에 다른 신이나 다른 무엇을 신앙의 중심에 둘 때 우상 숭배(偶像崇拜)가 된다.
1.2 하느님 나라와 하느님 중심주의
“때가 다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마르꼬는 그의 복음에서 예수의 공생활(公生活) 첫머리에 예수가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였음을 전하고 있다. ‘하느님 나라’는 예수가 자주 언급한 용어의 하나다. 그 횟수를 계산한다면 복음서에서 100여 번 정도 찾아 볼 수 있다.³
하느님 나라가 예수의 메시지의 핵심(核心)이라는 것이 학자들의 공통적 견해다.⁴사실 마르 1,15은 예수가 공생활 시초에만 ‘하느님 나라’를 외친 것이 아니라 예수가 공생활을 통해 외친 메시지 전체를 요약(要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하느님 나라’는 예수의 사명(使命)이었을 뿐 아니라(마태 4,23; 루가 8,1), 예수가 파견한 제자(弟子)들의 사명 역시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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¹G. 하센휫틀, 『하느님』, 심상태 옮김, 서울, 성바오로 출판사 1983년, 109-135쪽 참조.
² 이영헌, 「성서에 나타난 하느님」,『司牧』124(1989/4), 11-12쪽 참조.
³ J.dupont, Le beatitudini, Roma 1979, 657-658 참조: 마태오 복음에 의하면 예수는 하늘 나라에 대해서 50번 정도, 루가에 의하면 하느님 나라가 41번, 마르꼬에 의하면 15번 사용되고 있다. 같은 구절을 빼면 상이하게 77번 사용되고 있는 셈이다. 게다가 요한이 5번, 사도행전에서 8번, 바오로 서간이 12번 언급하고 있다.
⁴ R.Schnackenburg, Signoria e Regno 야 Dio, Bologna 1971; J.Jeremias, Teologia del Nuovo Testamento, Brescia 1976, 117 참조.
느님 나라‘였다(마태 10,7; 루가 10,9). 그뿐 아니라 예수는 그의 청중(聽衆)들에게도 의식주(衣食住)보다도 먼저 하느님 나라를 구하도록 촉구하였다(마태 6,25-34). 심지어 예수의 모든 활동, 말씀 선포(宣布)와 병자 치유(治癒), 악마 추방(惡魔追放) 등의 모든 활동도 그 중심은 하느님 나라였다고 할 수 있다. 예수가 악마를 하느님의 성령으로 악마를 추방할 때, 이미 거기에 하느님 나라가 존재한다(마태 12,28; 루가 11,20). 가난한 이에게 복음 선포, 병자 치유도 악(惡)의 세력으로부터의 해방(解放)을 뜻한다. 그리고 이처럼 사탄의 나라가 물러난다는 것은 하느님 나라의 도래(到來)를 의미한다.
이처럼 철저하게 선포된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 중심주의를 드러낸다. 예수가 선포한 하느님 나라는 절대적으로 하느님께 속한 것이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이 마치 왕(王)처럼 지배하고 다스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느님 나라’에서 중심 단어는 하느님이다. ‘나라’란 하느님의 활동, 하느님의 다스림을 수식하는 보충어요, 수식어다.꒟그러므로 하느님 나라는 전적으로 하느님의 일이다. 아무도 자신의 윤리적, 종교적 형식의 도움으로 그 성과(成果)를 이끌어 낼 수도 없고, 정치적 유형의 투쟁(鬪爭)으로 산출 해 낼 수도 없으며, 인간의 통찰적인 사고로 예견(豫見)해 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 인간으로서는 그것을 계획할 수도 없고, 조직할 수도 없고, 마련할 수도 없으며, 고안(考案)해 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야말로 하느님이 주시는 선물(膳物)이다. 유산(遺産)으로 물려받을 수 있을 뿐이다.꒠그러기에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 예수는 만사(萬事)를 하느님께 내 맡겼다. 아버지 하느님께서 만사를 좋게 이끌어 가시리라는 신앙 때문에 어떤 것도 계획하지 않았다. 그저 아버지의 뜻만을 찾았고, 그 뜻을 따라 살기를 작정했다. 하느님의 오늘의 뜻을 따라 하루를 살았다. 내일 걱정은 하느님께 맡겼다. 이처럼 철저하게 자신의 뜻을 포기(抛棄)하고 아버지 하느님의 뜻만을 찾은 삶 그 안에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졌고, 하느님의 뜻대로 다스려졌음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예수의 행동은 바로 하느님의 행동이었고, 예수의 뜻은 바로 하느님의 뜻이었으며, 예수의 말씀은 하느님의 행동이었고, 예수의 뜻은 바로 하느님의 뜻이었으며, 예수의 말씀은 하느님의 말씀이었고, 예수의 가르침은 바로 하느님의 가르침이었으며, 예수는 바로 하느님의 다스림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결국 예수의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 중심주의를 표방하고 있으며, 예수는 철두철미하게 하느님 중심주의를 살았다고 말할 수 있다.
1.3 그리스도교 신앙과 하느님 중심주의
그리스도교는 믿음의 종교다. 구약에서 믿음이란 하느님의 행위에 대한 인간의 응답(應答), 즉 하느님께 대한 인간의 내외적(內外的) 태도를 의미하였다. 신앙의 응답으로 드리는 ‘아멘’의 어원(語原)은 마치 아기가 어머니에게 보호를 내맡기듯(2사무 4,4; 룻 4,16; 민수 11,12) 하느님께 신뢰(信賴)하는 인간의 자세(姿勢)를 의미한다. 이 어원이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니지만, 하느님의 말씀에 관하여 ‘그것을 바탕으로 확고하게 서다’, ‘그것을 신뢰하다’, ‘그것을 믿다’, ‘그것을 받아들이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아멘’이란 단어는 실재와 그것을 바라는 청원, 또는 그 명령이 그대로 이루어지리라는 신뢰가 담겨 있다. 아울러 인간이 하느님의 뜻을 전폭적으로 받아들이는 순종으로 하느님과 관계를 맺음을 의미하고 있다.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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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H.DODD, Le parabole del Regno, Brescia 1976, 37 참조.
꒠ W. 카스퍼, 『예수 그리스도』, 박상래 옮김, 왜관, 분도출판사 ꒜1980, 135쪽.
ꊙ A.Weiser, "πιστευω", in Theologica Dictionaru of the New Testament(이하에서는 TDNT로 표기함), vol. VI< Michigan 1973, 182-196 참조.
성실성에 대한 맹세를 뜻하는 그리스어 πιστευω, 또는 πιστευειν은 신약성서 안에서 ‘누구를 신뢰하다’, ‘누구에게 복종하다’, ‘누구를 믿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역시 신약성서도 ‘신앙’이라는 단어를 성실성, 또는 신뢰를 통한 하느님께 대한 인간의 관계를 드러내는 용어로 사용하였다.ꊚ
이런 의미에서 신앙이란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성취 능력(成就能力)을 포기한다는 것, 자신의 인간적인 무력(無力)과 무능(無能)을 자백한다는 것이며, 인간이 제 힘으로는 자신을 어떻게 해 볼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따라서 자기의 존재와 그 구원에 어떤 근거(根據)를 자기 안에 세울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신앙은 제 자신으로부터 아무것도 기대(期待)하지 않기에 그것은 만사를 가능케 하는 하느님으로부터 일체를 기대함을 의미한다.ꊛ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말은, 예수 안에서 활약하는 하느님의 권능을 의지(依支)로 삼아 존재의 근본과 기반을 하느님 안에 세운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신앙은 ‘하느님으로 하여금 일하게 하는 것’이요, ‘하느님으로 하여금 행동에 나서게 하는 것', 결국 ’하느님으로 하여금 하느님이게 함으로써 그분께만 영광(榮光)을 돌려 드린다는 것‘, 그분의 다스림에 승복(承服)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신앙은 하느님의 다스림의 현존을 맞아들이기 위한 빈터이다.꒥꒚그러기에 신앙은 하느님 나라를 도래(到來)케 하는 지름길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기도(祈禱)는 대화(對話)하는 신앙이다. 그러므로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 즉 우리의 구원(救援)을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기도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그리스도교 신앙인이라고 말할 수 없다. 기도란 인간 자신을 하느님께 들어 올리는 일이다. 다시 말해서 무엇보다도 하느님이 참으로 하느님이심을 승복(承服)하고, 그분의 뜻이 나의 뜻보다 높고, 그분의 길이 나의 길보다 옳음을 인정하고, 전적으로 신뢰(信賴)하며, 내 뜻보다는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묻는 일이다. 마치 예수가 겟세마니 동산에서 기도한 것처럼(마르 14,36).
결국 신앙의 기도, 기도하는 신앙은 하느님을 모든 신뢰와 희망의 중심에 놓고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예수가 우리에게 가르쳐 준 유일한 기도인 ‘주의 기도’(마태 7,9-13; 루가 11,2-4)는 철저하게 하느님 중심주의를 드러내고 있다. 하느님이 중심에 자리잡지 않은 신앙과 기도, 그리고 신앙 생활은 우상 숭배(偶像崇拜)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2. 맘몬(재물)에 관한 성서적 고찰
맘몬(μαμωνα)이라는 단어는 루가 16,9.11.13에 3번 나타난다. 루가 16,13과 같은 내용의 마태 6,24에도 맘몬이라는 단어가 한 번 등장한다. 이 단어를 우리말 공동 번역은 재물로 번역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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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Bultmann, "πιστευω", in TDNT, vol VI, 203-208 참조.
꒣ W.카스퍼, 같은 책, 136쪽; WKasper, intorduzione alla fede, Brescia 1985, 61 참조
꒥꒚ W.카스퍼, 같은 책, 136-137쪽 참조
꒥꒛ 『공동번역 성서』, 루가 16,9. 11. 13: “세속의 재물로라도 친구를 사귀어라… 만약 너희가 재물을 다루는 데 도 충실하지 못하다면 누가 참된 재물을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다”; 마태 6,24: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아울러 섬길 수 없다.”
2.1. 어원적 고찰
라틴어 본(本)인 불가타 역을 비롯한 일부 후기 그리스 사본(寫本)에서는μαμμωναζ로 표기(表記)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 단어는 정확한 그리스어는 μαμωναζ다. μαμμωναζ는 본래 그리스어가 아니다. 그렇다고 히브리어 성서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그 유래(由來)가 불분명하지만 그리스어로 음역(音譯)된 아랍어로 보고 있다.꒥꒜ 아랍어 맘몬은 일차적으로 “돈”, “부”, “세속적 재물”의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차적으로 동사형“돈을 벌다”. “부정 축재하다”, “타인의 소유를 착취하다”라는 의미로, 또는 명사형 “뇌물(賂物)”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2.2 성서적 용법
무엇보다도 맘몬이라는 용어는 신약성서 안에서 예수가 친히 발설(發說)한 것으로만 나타날 뿐이다. 그 일차적 의미는 “재산”, “세속적 물질” 을 뜻하는 것으로 하느님을 거부하는 부정적이고 죄스러운 물질 만능주의를 겨냥하고 있는 느낌을 주고 있다.꒥꒞ 이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가끔 ‘부정한(αδικοζ)’, 또는 ‘부정의(τηζ αδικιαζ)’라는 형용사나 소유격 명사를 덧붙이고 있다(루가 16,9.11 참조).꒥꒟ 그러나 루가 16,11에 나타나는
αδικω μαμωνα는 γο αληθινον(진정한 재물)과 대조되고 있다.꒥꒠
2.2.1. 구약성서
구약성서에 의하면 부(富)나 재물은 선(善)이나 축복(祝福)으로 이해되었던 적이 있다. 모든 것이 하느님께 속해 있기 때문에 재물 역시 하느님께 속한 것으로, 어느 인간이 부유(富裕)하다는 것은 하느님의 축복과 보호(保護)를 드러내는 표징으로 이해되고 있다(창세13,2; 26,12 이하; 신명 8,7-10; 28,1-11).꒥꒡ 한 인간이 하느님에 대한 충실성으로 말미암아 그 보상(報償)으로 자손들의 번영과 재물의 풍요로움을 얻게 된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로 나타난다. 하지만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하느님에 대한 충실성과 재물의 풍요로움이 반드시 비례 관계(比例關係)를 지녔던 것은 아니다. 벼락부자가 되고 세력을 휘두르는 사람은 악한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다(예레 5,27). 재산을 쌓아 놓고 다투며 사는 것보다 가난해도 야훼를 경외(敬畏)하며 사는 것이 낫고(잠언 15,15), 금보다 지혜를 얻는 것이 좋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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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T.Marshall, "Mannon", in Encuclopaedia of Religion and Ethics, ed. by James Hastings, vol. 8, 1958, 374-374: 이 단어는 유래에 대해서 J.Drusius나 Dalman과 같은 학자들은 ‘아멘’과 같은 어원인 ‘아만’에서 유래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마아몬’이란 ‘인간이 신뢰하는 바의 것’, ‘인간에게 안전을 확보해 주는 바의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Jastrow는 ‘하마하’라는 단어에서 유래하기 때문에 ‘마헤몬’이란 ‘인간이 축적한 것’을 뜻한다고 주장한다. Levy는 ‘분배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마하나’에서 유래하기 때문에, ‘맘몬‘이란 ’분배된 것‘을 뜻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W.Gensenius는 만일 μαιωναζ가 정확한 단어라고 한다면, ’사람이 감춘 무엇, 또는 보물‘을 뜻하는 ’마만‘으로부터 유래하는 것임을 주장한다; Hauck, "μαιωναζ", in TDNT, vol. IV, 388 참조.
꒥꒝ Hauck, 같은 글, 389 참조.
꒥꒞ 같은 글 참조.
꒥꒟ Hauck, 같은 글, 390; J.T.Marshall, 같은 글, 375: 구약에서도 부정하게 얻은 재물, 또는 뇌물의 의미로 αδικω μαμωνα와 같은 아람어 ‘맘몬 디쉬카르’라는 단어가 나타나지는 않지만 탈무드나 미쉬나에서 자주 발견된다. 비슷한 내용을 1사무 8,3; 잠언 15,27; 이사 33,15 에서 찾아볼 수 있다.
꒥꒠J.T.Marshalll, 같은 글, 375 참조
꒥꒡M.G.Mara, "Ricchi-Ricchezza-Beni", in Dizionario Partristico e 야 Antichita Cristiane(이하에서는 DPAC로 표기함), vol. II, Casale Monferrato 1983, 2990 참조.
순은보다 슬기를 얻는 것이 낫다(잠언 16,16)고 보았다. 명예와 존경을 받는 것이 재물보다 소중한 것(잠언 22,1)으로 평가되었다. 가난과 부 사이에서 평형(平衡)을 찾은 저자는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마십시오. 먹고 살 만큼만 주십시오. 배부른 김에, ‘야훼가 다 뭐냐’고 하며, 배은 망덕하지 않게, 너무 가난한 탓에 도둑질하여 하느님의 이름에 욕을 돌리지 않게 해 주십시오”(잠언 30,8-9)라고 청하기에 이른다.
예언자들은 군주제(君主制)의 발전과 더불어 경제적인 풍요로움이 우상숭배와 밀접한 관계를 지닌 것으로 보았다(호세 10,1; 이사 2,7-8; 7,20; 에제 7,19-20). 왕(王)은 나라의 대지주(大地主)가 되었다. 힘없고 보잘것없는 사람들은 유산으로 물려받은 조상의 땅까지도 강제로 팔아야 했고, 심지어 약탈당했다. 당은 하느님이 조상들에게 약속한 이스라엘 백성의 땅이었다. 여기서 왕의 사유지(私有地) 제도는 단순히 사회적 정의에 어긋나는 일만이 아니다. 이스라엘을 세속화(世俗化)하는 잘못을 범하는 것임을 예언자들은 지적하고 있다.
2.2.2. 신약성서
신약성서에서도 재물에 관하여 구약성서와 비슷한 사상을 발견한다. 물론 의인이 땅을 차지하게 된다는 관계는 찾아볼 수 없지만, 재물 자체가 악(惡)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지 않다. 다만 재물을 얻는 방법이 불의함과 연결되어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루가 16,9-11). 이야기의 초점은 점차로 재물에서 재물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에게로 옮겨가고 있다(루가 6,24-25); 야고5,1-5; 디모 6,17).
사람들이 마음에 두고 있는 지상의 재물(마태 6,19-21)은 그의 생명을 보장(報障)해 주지 못한다(루가 12,16). 예수는 이러한 지상적 재물을 하느님과 맞서는 것으로 소개하고 있다. 즉 예수는 맘몬을 하느님과 대조(對照)하면서 의인화(擬人化)시키고 있다. ‘섬기다’라는 단어가 그것을 더욱 분명히 한다. 다시 말해 맘몬이 하느님과 같은 섬김의 대상이 되고 있다. 동시에 하느님과 재물을 섬기는 일이 양립(兩立)할 수는 없다. 사람이 돈이나 재물에 몸과 마음이 사로잡혀 있는 한 하느님을 온 마음으로 , 온 정신으로, 온 힘으로 섬길수는 없다.꒥꒢
한 마디로 맘몬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데 방해물(妨害物)이 되고 있는 셈이다. 재물은 실제적으로 사람들을 노예화(奴隸化)하고 사로잡는 악마적 힘이 내재(內在)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예수의 이 말씀은 직접적으로 세리들이나 부자들을 겨냥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실제적으로 어떤 부정(不正)한 방법이나 수단 없이 거대한 재산을 축적(蓄積)할 수 없다는 것과 최고선(最高善)이신 하느님의 평가나 높은 수준의 윤리(倫理)는 세상 사람들의 관심거리인 재산 축적보다도 이웃 인간사랑에 더 가치(價値)를 두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이웃 사랑의 선행(善行)을 하도록 강조하고 있다.꒥꒣
2.2.2.1. 루가 16,9-13과 그 병행 구절 마태 6,24.
“예수께서 말씀을 계속하셨다. ‘그러니 잘 들어라. 세속의 재물로라도 친구를 사귀어라. 그러면 재물이 없어질 때에 너희는 영접을 받으며 영원한 집으로 들어 갈 것이다”(16,9).
불의(不義)한 청지기의 약삭빠름을 칭찬하는 8절과 더불어 이 구절만큼 해석이 구구한 구절도 없다. 이 구절만큼 당황스럽게 하는 구절도 없다. 그 만큼 이 구절에 대한 정통적이고 고전적(古典的)인 해석을 찾기가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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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같은 글 참조
꒥꒣Hauck, 같은 글, 389-390 참조.
꒦꒚R.C.H.Lenski, The interpretation of St. Luke's Gospel, Minneapolis, Minnesota, 830 참조.
이 구절은 앞서 서술되고 있는 ‘약삭빠르고,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16,1-8)에 관련되고 있다. 8절은 비유에 관한 예수의 해석이요, 결론이다. 9절은 아마도 비유에 관한 루가의 이해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이 구절은 예수의 어록 자료집에 속하는 바, 1-8의 비유와 관련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불의한”이라는 단어가 열쇠어(key word)가 되어 서로의 관련성을 보여 주고 있다.꒦꒜ 불의한 맘몬은 정확하게 불의한 청지기와 관련된다. 또 돈의 사용과 슬기로운 행동이 서로 공통 주제를 이루고 있다.
이 말씀의 대상, 즉 청중들을 고려하자면, 16,1에서 보듯이 이 말씀은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16,9에 εγω υμιν λεγω라는 구절은 단순히 ‘너희에게 말한다’라는 것이 아니다. ‘내가 친히 너희 제자들에게만 말한다’라는 강한 뉘앙스를 지니고 있다.꒦꒝ 아직 예수의 제자가 아닌 사람들에게는 예수가 의도하는 바가 적용될 수 없는 것일까? 여기서 제자들은 단순히 12제자들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보다는 예수를 따르는 일단의 무리를 지칭한다고 볼 수 있다(루가 6,3; 10,1 참조). 한편 제자들이라고 해서 세상과 동떨어진 사람들이 아니다. 오히려 세상 안에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다(마태 5,14 이하;루가 8,16 이하; 필립 2,15 이하 참조). ‘불의한 청지기’(16,1-8)의 비유 역시 많은 것을 대조하면서 바로 오늘의 우리를 가르치고자 한다. 그는 한 사람의 청지기다. 우리도 그렇다. 그는 재물에 가치를 두고 신뢰를 걸고 있다. 우리도 그렇다. 그 재물이란 불의한 맘몬(mammona)이다. 우리의 경우도 그렇다. 그는 그것을 통하여 친구를 사귀고 있다. 우리도 예외가 아니다. 이제 점점 끝장이 그에게 다가오고 있다. 우리에게도 그렇다.꒦꒞ 여기서 예수의 가르침은 분명하다.(그를 반겨 맞아 줄) 지상(地上)의 집(16,4)을 위하여 신경을 쓰는 이 세대의 자녀와 영원한 집을 위하여 신경을 쓸 빛의 자녀를 구별하고, 오늘의 우리에게 그 결단(決斷)을 촉구하고 있다.
맘몬(mammona)은 후기 유다이즘에서 오늘날의 “자본”과 동의어(同義語)로 사용되고 있고, 결코 소유 재산이 경시(輕視)되거나 맘몬(mammona)라는 이름이 어떤 악마로 나타나고 있지는 않다. 예수의 입으로 발설되고 있는 “불의한 맘몬”은 이 세상의 다른 재물과 마찬가지로 편의와 이익을 제공하고 있는 어떤 것을 지시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처럼 그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의존(依存)하게 하고, 또 인간을 소외(疏外)시키기도 한다.꒦꒟ 맘몬은 바로 불의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돈과 부(富)는 죄스러운 사람 가운데 에워 있고, 죄스러운 방법으로 사용되고 있고, 죄스러운 목적을 지니고 있다. 그것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 즉 그리스도인의 소유로 들어올 때 그 본래의 질(質)을 되찾을 수 있게 된다. 그러기 위해서 예수가 제시하는 바는 19,8에서 보듯이 그런 종류의 돈은 마땅히 되돌려져야 한다.꒦꒠ “재물이 없어질 때”라는 말은 청지기의 수입이 다른 사람에게 돌아간 것처럼, 자캐오의 불의한 재산이 가난한 사람에게 4배로 보상된 것처럼, 맘몬이 하느님의 뜻대로 제자리로 돌아간 때를 말한다.꒦꒡
맘몬(mammona)에게 부여되고 있는 ‘사기꾼’이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불의한’이라는 수식어는 가난한 자들로 하여금 가진 자들을 시기하지 않게 한다. 부(富)라는 것이 천국에 들어가는데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기보다 어려운 장애물(障碍物)이라는 것을 잊어버리지 않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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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Howard Marshall, The Gospel of Luke, Michigan 1978,616 참조
꒦꒜ K.H.Rengstorf, Il Vangelo secondo Luca, Brescia 1980, 322 참조.
꒦꒝ R.C.H.Lenski, 같은 책, 831 참조.
꒦꒞ 같은 책, 831.
꒦꒟ K.H.Rengstorf, 갇은 책, 323 참조.
꒦꒠ R.C.H.Lenski, 같은 책, 832.
꒦꒡ 같은 책, 833 참조
꒦꒢ K.H.Lengstorf, 같은 책, 322-323.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와 더불어 이 말씀은 재물이나 세상의 부가 바로 하느님의 것이고, 하느님으로부터 맡겨진 것이며, 맘몬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수단(手段)이라는 것이다. 청지기는 주인(主人)이 아니다. 그리고 불의한 방법으로 얻은 재물일지라도 선한 곳에 사용하면 좋다는 것이 아니라, 비록 돈 자체가 불의한 것일지라도 선(善)하게 사용될 때 칭송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청지기의 부정직(不正直), 주인의 재산을 남용(濫用)하는 일이 칭송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죄스러운 사람들의 태도 안에서도 배울 만한 점이 있다는 것이다. 그는 삶의 태도를 바꾸고 있다. 혹자는 주인의 재산을 남용한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돌아 올 몫을 채무자에게 분배하였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어떻든 친구를 사귀는 선을 위해 사용하는 지혜로움, 작은 일을 큰 일을 위해 사용하는 지혜로움이 칭송되고 있다. 불의한 청지기는 세상의 방법으로 슬기롭게 처리하였다. 이제 예수의 제자는 영적(靈的)인 방법으로 슬기롭게 처신(處身)해야 한다. 빛의 아들은 이 세대의 아들들과 구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16,8). 맘몬에 대해서 세 번이나 사용된 ’불의한‘, 또는 ’불의함의‘라는 수식어와 대조되어 세 번의 ’신뢰할 수 있는‘, ’충실한‘ 등의 수식어가 등장한다. 빛의 자녀들은 정직하게, 충실하게 처신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친다. 제자들에게 바리사이들처럼 아주 강렬하게 부(富)와 복지(福祉)를 갈망하는 것을 경각(警覺)케 하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다. 하느님 앞에 마주하고 서 있는 것은 소유물(所有物)이 아니라,l 전적으로 하느님께 속하고 있는 재물을 관리하는 것이 바로 제자들의 본연의 의무임을 가르치고 있다. 어떻든 돈을 좋아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루가 16,14)과 달리 제자들이 취해야 할 태도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이다. 재물이라는 것 자체가 제자들에게 별로 중요성을 상실하고 있지만, 영원한 집을 위하여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가르치고 있다.꒧꒚
“만약 너희가 세속의 재물을 다루는데도 충실하지 못하다면 누가 참된 재물을 너희에게 맡기겠느냐?”(16,11).
이 구절은 예수의 모든 제자들, 부자거나 가난한 이거나 모두에게 해당된다. 맘몬이라는 것이 유일(唯一)하고 최고(最高)의 가치가 아니다. 세속의 재물인 맘몬이 참된 재물과 대조되고 있다. 맘몬은 왔다가 또 가고 만다. 맘몬은 일시적일 뿐만 아니라, 덧없고 미덥지 못한 것이다. 언젠가는 한푼도 없이 다 떠나고 만다(9절 참조).꒧꒛ 어리석은 자들이나 그것을 추구(追求)한다. 맘몬은 작은 것이다(16,10). 그것보다 더 크고 소중한 참된 재물이 있다. 그것은 먹고 마시며 살아가는 것보다 소중하다. 그것은 의식주보다도 먼저 구해야 하는 것이다(마태 6,25-34 참조). 그것은 왔다가 떠나가는 것이 아닌 남는 무엇이다. 그 크고 소중한 무엇을 위해서라도, 비록 작고, 덧없는 맘몬을 정당하게 다루어야 하는 것이 제자들의 의무이다. 자연적인 물질을 이기적(利己的)으로 사용할 때 죄를 짓는 것이 된다. 하물며 영적인 것을 부정하게 사용하는 남용(濫用)은 더욱 커다란 죄를 짓는 것이 된다. 작은 일을 정당하게 다루지 못하는 사람은 크고 소중한 일을 정당하게 다룰 수 없기 마련이다(16,10). 또 어떤 부나 재물도 하느님으로부터 맡겨진 것임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아울러 이제 제자들은 예수로 말미암아 맘몬보다도 더욱 소중한 것을 책임 맡고 있는 사람들임을 드러낸다.
“한 종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 편을 미워하고 다른 편을 사랑하거나 또는 한 편을 존중하고 다른 편을 업신여기게 마련이다.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다”(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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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철수, 『돈과 신앙』, 서울, 두레마을 1989,90쪽 참조.
꒧꒚ R.C.H.Lenski, 같은 책, 831 참조
꒧꒛ 같은 책, 834 참조.
불의한 맘몬은 그 사용에 있어서 불의를 유발(誘發)할 뿐만 아니라,l 우리를 잘못 판단하도록 이끈다. 맘몬은 우리를 종(從)이 되게 한다. 또 우리가 동시에 하느님의 종이면서 맘몬의 종일 수 있다고 생각하게 한다. 오늘날 우리는 시간제로 여러 회사(會社)에 고용(雇傭)될 수가 있다. 과거의 노예나 종살이 개념에는 한 종이 두 주인을 모실 수 없게 되어 이R다. 예수의 말씀은 그러한 배경을 두고 하느님을 섬기는 일을 맘몬을 섬기는 일과 어느 정도 타협(妥協)할 수 있다는 생각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있다. 한 사람의 종은 반드시 한 집안의 주인에 속해 있을 뿐이다. 루가 16,13과 일치하고 있는 마태 6,24은 ‘산상 설교’ 안에 포함되어 있다. 이 산상 수훈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은 예수의 제자는 바로 하느님의 종이요, 하느님의 소유라는 것이다. 사실 종에 대한 유대법은 한 종이 두 주인에 속할 수 있다는 것이 허락되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 주인이 하느님일 때, 왜냐하면 하느님은 주님이시기에, 그분이 인간을 전적으로 요구할 때(신명 6,4 이하; 루가 10,27; 야고 4,5) 두 번째 주인은 그 종에 대해 권한(權限)을 행사할 수가 없었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점은 어느 인간도 자신이 주인이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의 마음, 우리의 의지, 우리의 일이 다른 존재에 의하여 다스려지고 있다. 그것이 누구인가? 하느님인가? 아니면 맘몬인가? 하느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불충실한 사람들, 맘몬의 노예가 되어 있는 사람들을 경고(警告)하고 있다. 예수는 결단을 촉구하고 있다. 여기서 중립(中立)은 있을 수 없다. 양자 택일이다. 한 편을 미워하고 다를 한 편을 사랑하거나, 한편을 존중하고 다른 편을 업신여기게 마련이다. 하느님처럼 맘몬을 섬기는 사람은 하느님이 요구하고 있는 절대적 충실성(忠實性)으로 하느님을 섬기는 일에 실패(失敗)하고 있는 사람이다. 맘몬이 그 주인인 사람은 어리석은 부자처럼(12,20 이하), 어리석기 짝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예수가 그에게 이룬 모든 것을 파괴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이제 바야흐로 결단(決斷)의 시기가 도래했다는 것이다.
3. 가난에 관한 성서적 고찰
가난에 대한 성서적 고찰을 통해서 맘몬의 실체와 맘몬에 대한 이해를 더욱 깊게 할 수 있으리라 본다.
3.1 어원적 고찰
성서에서 가난의 의미는 여러 가지 히브리어 용어로 표현되고 있다: ras(궁핍한 자), dal(연약한자, 가련한 자), ebyon(불쌍한 거지), ani, 또는 anaw(억눌린 자, 핍박 받는 자: anawim은 복수형).꒧꒝ 그리스어는 일반적으로 πενηζ 또는πτωλοζ로 번역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πενηζ는 그가 필요로 하는 것을 얻기 위하여 힘든 노동(勞動)을 하도록 되어 있는 사람들로서 주로 노동을 하는 직공(職工)이나 영세 농민(農民)들을 지시하였으며 노동을 하지 않고도 살아가는 부유한 사람들과 대조되었다. 한편 πτωλοζ는 거지들처럼 그들에게 필수적(必需的)인 것마저 제대로 얻기가 어려운 사람들을 지시하였다. 말하자면, πενηζ는 생활에서 여분(餘分)이 없는 사람들이요, πτωλοζ는 필수품이 부족(不足)한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하루 하루를 살아가기 위하여 품팔이와 노동을 해야 하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70인 역에는 같은 히브리어가 특별한 구별 없이 가난한 사람을 지시하며, 한때는πενηζ로 번역되고, 또 한 때는 πτωλοζ로 번역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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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H.Rengstorf, 같은 책, 324.
꒧꒝ M.Stenzel, "Poverta", in Dizionario 야 TeologiaBiblica(이하에서는 DTB로 표기),Brescia 1969,1069 참조.
꒧꒞ J.Dupont, 같은 책, 524-528 참조.
3.1.1. 구약성서
구약에 있어서 가난한 자들에 대한 개념은 역사적 상황에 따라 변하였다. 가나안 정착 이전의 이스라엘은 부족 사회(部族社會)의 특성을 지닌다. 부족 사회의 특성은 개인보다 단체, 또는 부족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사막에서 유목 생활(遊牧生活)을 하던 이스라엘 부족에 있어서 개인의 생존(生存)은 불가능하였다. 따라서 한 개인의 생존을 가능케 하는 조건(條件)은 그가 소유(所有)하는 물질적인 사유 재산(私有財産)이 아니라 개인이 얼마만큼 자기가 속해 있는 부족과 강한 유대(紐帶)를 맺고 있느냐에 달려 있었다. 사유 재산(私有財産)으로 가축을 소유하였지만, 목초지와 우물은 어디까지나 씨족의 공동 소유였다. 농사를 지을 경우에 농경지(農耕地)는 모든 가족들이 골고루 나누어 가졌다. 하지만 농토의 마지막 소유권은 가족(家族)에 있지 않고 씨족(氏族)에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생활 양식과 사회 구조 안에서 빈부(貧富)의 격차는 실제로 불가능하였다. 씨족 전체가 가난하거나 아니면 부자였던 셈이다. 따라서 빈곤과 비참, 착취의 희생물이 되는 가난한 사람들은 개인의 안정을 전적으로 보장받지 못하는 사람들, 예컨대 과부, 고아, 나그네들이었다.꒧꒟
오늘날과 달리 여인이 남편을 잃는다는 것은 생존 수단의 상실을 의미하였다. 왜냐하면 여성에게 의식주의 안정을 제공하는 것은 그녀의 남편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과부가 살아 남을 수 있는 한 가지 보호 방법으로서 동생이 과부가 된 형수(兄嫂)와 결혼하는 법이 관습법으로 정해졌다. 고아들도 과부와 마찬가지로 빈곤(貧困)의 희생물이 되었다. 고아 역시 사막의 악조건 때문에 가족을 떠나서는 생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고아들은 일반적으로 씨족의 특수한 배려와 보호의 대상이 되었다: “과부와 고아를 괴롭히지 말아라. 너희가 그들을 괴롭혀 그들이 나에게 울부짖어 호소하면, 나는 반드시 그 호소를 들어 주리라. 나는 분노를 터트려 너희를 칼에 맞아 죽게 하리라. 그리하면 너희 아내는 과부가 되고, 너희 아들은 고아가 될 것이다”(출애 22,21-23). 나그네는 어떤 이유에서든 부족을 떠나온 자들이다. 이들은 추방(追放)되었거나, 망명(亡命)한 자들, 또는 천재 지변(天災地變)이나 전쟁 등으로 부족(部族)이 전멸한 가운데 생존하게 된 사람들이다. 그들은 이민자(移民者)로서 다른 부족에 가서 살게 되므로 착취와 압박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사막에 사는 부족들의 관습은 이런 자들을 보호하도록 되어 있다: “너희는 너희에게 몸 붙여 사는 사람을 구박하거나 학대하지 말아라. 너희도 에집트 땅에서 몸 붙여 살지 않았느냐?”(출애 22, 20). 잠시 지나가는 손님으로서의 나그네도 사막의 환대법(歡待法)에 의해 보호를 받았다(창세 18,3 참조).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가 가난한 자들의 부류에 속하고는 있었지만 그들이 사회에서 소외된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가나안 정착 이전의 이스라엘 사회상은 평등(平等)한 사회였고, 부족 구성원간의 연대 의식(連帶意識)과일체감에서 사실상 부자와 빈자의 출현은 불가능하였다고 할 수 있다.꒧꒠
가나안 정착 시대(定着時代)에는 가난한 사람들의 개념이 달라졌다. 뚜렷한 빈부의 차(差)를 보게 된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정착 이후에도 유목민 시절의 관습을 보존하고자 하였다. 예컨대 토지(토지)의 소유권은 씨족에게 속한 것이므로 토지를 관리하는 가족이 마음대로 처분할 권리가 없었다. 하지만 사회적 변화가 이들의 관습을 잠식(蠶食)하였다. 도시화 현상은 목축이나 농업에서 금석 세련공, 직조공, 도기공 등의 장인(匠人)들과 물물 교환(物物交換) 경제를 발전시켰다. 군주제는 궁중(宮中)의 재정부담으로 왕의 사유지(私有地)를 확보케 하였으며, 왕은 그 사유지를 확장하기 위하여 국민들의 토지를 수탈(收奪)하기에 이르렀다(1열왕 21장 참조). 가나안 족의 제도의 영향을 받아 왕들은 종교의 이름으로 처형된 사형수들의 사유지를 자기 몫으로 만들었다. 또 왕들은 화폐 경제와 더불어 과세(課稅)라는 제도로 국민을 괴롭히며, 노동력을 착취하였다(1열왕 12,4 참조). 이렇게 해서 왕과 그 관리(官吏)들은 대지주가 되어 백성과 농민들을 착취하여 거부(巨富) 등장하였다. 이 시대에 소작농을 비롯한 대다수의 국민은 물론,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의 상황은 비참하였다. 그들은 혈연 공동체적 유대 의식(紐帶意識)이 깨어진 사회에서 아무런 보호를 받을 길 없었던 소외된 사람들이 되었다. 비로소 개인적 무능력이나 천재 지변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간들의 사악(邪惡)한 마음의 소산(所産)인 사회의 부정 부패(不正腐敗)에 의해 비참한 빈자(貧者)들이 출현하게 되었다.꒧꒡
유배(流配)와 유배 시대 이후 다시 한 번 사회적 변화를 겪게 되었다. 유배지로 귀양을 가던 그들은 왕이건 부자이건 빈자이건 모두가 빈털터리가 된 셈이다. 유대 백성 안에서 사회 계층(階層)의 차별이 사라진 것이다. 바빌론 체류 후반기에 가서 비로소 소수의 유대인들이 사업에 성공하여 경제적으로 부유한 자들이 되었다. 짧은 기간의 유배 생활에서 그 빈부의 격차가 심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기원전 6세기 말 귀향(歸鄕)한 유대인들은 대부분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부유한 사람들은 그곳에 남아 있기를 선호(選好)했다. 이스라엘의 비옥한 영토는 유배 동안 정착하여 살게 된 사마리아 사람들과 지배민족의 이방인(이방인)들이 차지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이방인들 앞에서 작은 무리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스스로가 ‘소외(疏外)된 자’, ‘가난한 백성’으로 자처하였다. 부자들이었던 이방인들의 착취로, 부자들은 ‘불경(不敬)한 자’로 인식되었고, 가난한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 앞에 충실성을 지키는 ‘남은 자’와 동일시되었다. 이러한 사회적 배경에서 ‘가난한 사람’이란 윤리적(倫理的)이고 영성적(靈性的)인 의미를 띠게 되었다. 즉 가난한 사람은 모든 것을 하느님으로부터 기대(期待)하는 사람들이며, 하느님께만 신뢰(信賴)를 두는 사람을 의미하게 되었다.꒧꒢
3.1.2. 신약성서
부(富)에 대한 구약성서나 신약성서의 관점은 가난한 대립(對立)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재물을 좋아하는 일, 재물이나 부가 하느님을 섬기는 데 방해되고, 부자들이 비난받는 것을 자주 보게 되는데 비해서(불행한 부유한자: 루가 6,24/ 부자 청년: 마태 19,16-26; 마르 10,17-27; 루가 18,18-27/ 어리석은 부자: 루가 12,13-21/ 부자와 나자로: 루가 16,19-31), 가난이 칭송되고 있다(마니피캇: 루가 1,46-56/ 진복팔단:마태 5,3; 루가 6,20/ 과부의 헌금: 마르 12,41-44; 루가 21,1-4).
예수 시대에도 부자와 빈자의 구별은 명확하였다. 화려한 궁정 생활을 하는 통치자(統治者)들의 부요함과 그 사치(奢侈)는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아주 분명하게 인지(認知)되었다. 부자들은 왕실 계급과 궁정 관리들, 대상인, 토지 소유자, 세금 청부업자, 대금업자들이었다. 한편 가난한 사람들이란, 노예들과 날품팔이꾼들(마태 20,1-16 참조), 구호금(救護金)으로 생활하는 주민들(마태 10,1-8 참조)이다. 물론 수공업자, 여관업자나 또는 대부분의 사제들의 경우처럼 중간 계층도 있었다. ‘남은 자’와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가난’이 예루살렘에서는 자랑이었고, 따라서 예루살렘은 걸식(乞食)의 중심지가 되기도 했다.꒧꒣ 어떻든 가난한 사람들은 경제적으로 생활이 궁핍(窮乏)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무슨 이유로 칭송되고 있는지 진복 팔단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3.1.2.1. 진복 팔단(眞福八端)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 루가 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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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인석, 『성서의 가난한 사람들』, 왜관, 분도출판사 1989, 19-22쪽 참조.
꒧꒠ 같은 책, 22-24쪽 참조.
꒧꒡ 같은 책, 25-38쪽 참조.
꒧꒢ 같은 책, 38-41쪽 참조.
꒧꒣J.예레미아스,『예수 시대의 예루살렘』,한국신학연구소번역실 옮김, 서울, 한국신학연구소1988, 125-163쪽참조.
산상 수훈(루가에서는 평지 설교로 나타난다) 가운데서도 이 구절은 ‘진복 팔단’, 다시 말해 하느님 나라를 위한 8가지 계명(戒命)에 속해 있다. 이 8가지 하늘 나라를 위한 새로운 헌법 가운데 제 1조에 가난이 언급되고 있는 셈이다.
마태오와 루가가 전하는 바에 있어서 차이점이 있다. 루가는 아무런 수식어 없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고 기술하고 있는데 비해서 마태오는 ‘마음이(γω πνευματι)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고 기술하고 있다. 물론 마태오는 ‘하늘나라’(η βασιλεια ουρανων)‘로 표현하고 있고, 루가는 ’하느님 나라‘(η βασιλεια του θεου)’로 표현하고 있다. 그것은 마태오가 유대인으로서 하느님의 거룩한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을 피하고자 한 까닭이요, 결국 ‘하느님 나라’와 동일한 것이다. 우리의 관심사(關心事)는 왜 마태오는 ‘마음으로(γω πνευματι)’라는 구절을 덧붙이고 있느냐는 것이다. 아니면 왜 루까는 ‘마음으로’라는 구절을 삭제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소수의 의견으로서 확신(確信)할 수는 없지만, 루가가 다음 세 가지 이유로 ‘마음으로’라는 구절을 삭제(削除)했다는 것이다. 첫째로 루까는 실제적으로 부와 가난의 문제에 관심을 두었으며, 둘째로 루까는 성령(聖靈)에 관심을 지니고 있었으며, 영(靈)의 부족함, 내지 결핍(缺乏)을 찬양하는 것처럼 보이는 표현을 피함으로써 의아스러움을 주지 않으려 했다는 것이다. 셋째로 루가가 4가지 행복과 4가지 불행을 비교하는 가운데 가난한 자와 대비되는 부자를 ‘마음으로 부자인 사람은 불행하다’고 말하기는 어려웠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실 루가 복음서는 가난한 사람들과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상당히 자상하다. 그렇다고 해서 작가가 스승이 호소하고 있는 ‘마음의 가난’을 사회를 개혁하려는 뜻에서 변조(變造)시킬 수 있었을까? 확실히 루가는 진복(眞福)의 첫째 조항에 그들이 처하고 있는 사회적 불안정의 조건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한마디로 루가가 이러한 말마디를 삭제했다는 것을 이해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마태오가 가난한 사람들의 사회적 상황을 종교적 상황으로 변조한 것일까? 마태오 역시 유대 독자들이 ‘가난한 사람’이란 단어에서 느끼는 신심(信心)과 정확성(正確性)을 간과(看過)하지 않기를 바랬던 것은 사실이다. 사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라는 표현은 유대아적 사고 방식에 상응(相應)하는 표현이다. 꿈란의 문헌이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 해준다. J.Schmitt에 의하면 γω πνευματι라는 첨가(添加)는 번역자가 마태오의 복음에 첨가한 전형적인 예라는 것이다. 꿈란의 문헌에는 자주 정확하게 번역해서 ‘가난의 마음’이 발견된다(1QS IV, 2-3.5.7-9. 17-19). 이러한 표현이 어떤 보충어 없이 가난한 자들(anawim)과 연결되고 있다. 이것을 이사야 61장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당신의 크신 애련하심은 가난한 자들(anawim)에게 복음을 선포한다”.꒨꒛ 꿈란의 시인(詩人)들처럼 예수도 이사야의 문헌을 다시 반복하기를 원하셨다면 아무런 수식어나 첨가어 없이 ‘가난한 자’들이라는 표현으로 기쁜 소식을 받는 자들, 즉 윤리적이고 종교적 가난의 의미를 포함하는 anawim을 지적(指摘)하였으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Schmitt와 더불어 마태오의 πτωχοι τω πνευματι라는 표현의 일차적 진의(眞意)는 팔레스티나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예수가 발설한 것이 아니라 팔레스티나적 용법을 반영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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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Dupont, 같은 책, 304 참조.
꒨꒛ 같은 책, 305-306 참조.
꒨꒜ 같은 책, 306-307 참조.
꒨꒝ 같은 책, 308 참조.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만일 루까가 원천적 자료에서 ‘마음으로’라는 것을 정확하게 읽어 내지 못했다면, 스승 예수의 말씀 속에 담긴 사회에 대한 매력적 관심에 끌리고 있었기 때문이며, 또 그리스적 배경에서 πτωχοζ라는 단어를 해설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실 마태오가 유대아적 배경에서 더 정확하게 그 단어의 뜻을 밝히기 위해서 설명을 보충(補充)하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유대아인들이 마주하는 ‘가난’이라는 단어를 통하여 드러나는 스승의 사상을 그대로의 의미로 전하고자 하였다고 할 수 있다.꒨꒞ 결국 ‘가난한 사람’과 ‘마음이 가난한 사람’의 뜻이 예수가 의도(意圖)한 바에 의하면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예수가 만일 ‘마음이 가난한 사람’을 이야기했다면, 실제적으로 부자인데 마음만이 가난한 사람을 지시하면서 행복하다고 말한 것은 아닐 것이다. 또 루가 복음이 전하는 대로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다’는 말이 ‘돈이 없는 불의한 어떤 자’를 두고 행복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마태오에게 있어서, 가난한 사람이 구약의 anawim과 연결되고 있음을 보았다. 가난한 사람이란 전적으로 하느님께 신뢰하는 사람, 하느님 밖에 기대(期待)할 것이 없는 사람을 뜻한다. 물론 여기엔 물질적 재물의 결핍을 포함하고 있다. 재물이라는 것이 항상 하느님과 신심 깊은 사람 사이에 있어서 하나의 장애로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늘의 현실에서도 마찬가지다. 일단 재물이 있는 사람은 자신의 곤경(困境)을 재물로 해결하려 한다. 권력이 있는 사람은 그 난관(難關)을 자신의 권력에 의지하여 해결하고자 한다. 가난의 내용에 대해서는 최후심판(마태 25,35-36)이나 부자와 나자로의 비유(루가 16,20 이하)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가난한 사람이란 재물도, 권력도 없는 사람이다. 이 가난한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의지(依支)할 곳이 하느님 밖에 없다. 예수에 의하면 결국 가난한 사람이란 하느님께서 구원하시기를, 하느님께서 그들의 어려움을 도와주시기를 기대하는 사람들이다.꒨꒠ 이런 점에서 후기 유다이즘에서 재물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은 anawim이요, anawim은 하느님을 향해 헌신하는 겸손한사람들, 바로 종교심 깊은 사람들로 통하였다.꒨꒡
결국 이런 의미에서 가난한 사람이란 억눌린 사람, 비천한 사람, 종이 된 사람들, 불의한 권력의 소유자, 부의 소유자 앞에 마주 선 사람들로서 하느님께 의지하기 때문에, 하느님이 그들의 희망이기 때문에, 행복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즉 그들의 행복은 하느님 중심주의에서 비롯된다.
4. 교부(敎父)들의 부(富)와 가난에 대한 견해
교부들의 부(富)에 대한 신학적 성찰은 성서(聖書)로부터 출발한다. 첫 번째로 간주되는 텍스트는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의 작품「어떤 부자가 구원되는가?(Quis dives salvetur?)」이다. 이 작품은 부와 그리스도교적 삶을 폭넓게 다루고 있다. 여기서 마르 10,17-31(부자 청년과 낙타와 바늘구멍)에 대해 다루고 있다. 이 구절을 비유적으로 해설하면서 영적차원에서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가르치고자 한다. 모든 것을 악용(惡用)하지 않기 위하여 재물의 풍요로움으로부터 마음을 격리할 것을 강조한다(Quis div. 11; 14; 18). 클레멘스는 논점(論点)을 소유(所有)에서 사용(使用)에로 돌리고 있다(Quis div. 14; 26). 그는 당시 물질을 악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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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같은 책, 309-311 참조.
꒨꒟ M.Stenzel, 같은 글, 1071-1072.
꒨꒠ J.Dupont, 같은 책, 557-570 참조.
꒨꒡ M.Stenzel, 같은 글 참조.
것으로 보았던 영지주의자와 이원론자들을 대항하여 창조된 모든 것을 좋은 것으로 주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생존하기 위한 필수품이 요구되는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으로서 좋은 것으로 보았다(Quis div. 13). 그러나 움켜쥐고 있는 그 자체로 부정한 것이며(Quis div. 31), 나누지 않는 부자(富者)는 살인자(殺人者)(Quis div. 7)라고 말하고 있다. 또 『교육론(Paedagogia)』라는 저서에서 부(富)를 뱀에 비유하면서, 뱀을 제대로 잡을 줄 모르면 물리고 독(毒)이 스며들게 된다(Paedag. III,6,37)고 한다. 탐욕에 대한 개선(改善)은 바로 자선(慈善)이며, 참된 부자는 불멸의 로고스(Logos)를 소유한 사람(Paedag. I,3,35)이라고 강조한다. 이처럼 클레멘스에게는 재물은 선(善)이요, 하느님의 축복(祝福)의 표지라는 히브리적 전통과 부를 위험한 것으로 보는 스토아적 사상과 재물의 순환은 형제적 사랑의 징표라는 복음정신이 혼합되어 나타난다.꒨꒢
오리게네스에 의하면 물질적 부는 그리스도를 추종(追從)하는 일을 표기(抛棄)하게 하는 것이다(마태 복음 해설 XV,25). 치뿌리아노는 『배교자에 관하여(De lapsis)』라는 저서에서 데치오 황제의 박해시절 그리스도교 신자가 재물에 집착하는 일이 바로 신앙을 거부하는 표지의 하나였음을 지적하고 있다(De lapsis 11). 하지만 부와 재물이 어떤 긍정적(肯定的)인 측면을 지니고 있음을 언급하기도 하였다. 재물이 분배(分配)될 수 있고, 자선(慈善)에 사용될 수 있으며, 선물로 나누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다. 바실리오는 루가 복음의 어리석은 부자(루가 12,13-21)에 대한 강론에서 부자의 정당한 위치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신적 재물을 다루는 책임자라는 것이다. 특히 마태 19,16-26을 해설하면서 부자들의 재산 소유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 모든 것을 주는 가운데 정의(正義)를 회복(回復)하기 위한 것이요, 가난한 자들의 사회적 조건이 변화된 환경을 만들기 위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암브로시오에게서 개인 재산권과 소유권의 구별은 학자들간의 상이한 견해로 논란이 되고 있다. 그러나 암브로시오 역시 개인 재산권을 인정하였다. 그에 의하면 지상의 재물이란 인간이 그것을 향유(享有)하도록 하느님으로부터 선사된 것이다. 하지만 부자는 그 재물에 대해 주인(主人)은 아니다. 다만 관리자(管理者)다. 또 조금 가진 자로부터 재물의 독점(獨占)은 정당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재물을 나누기를 거부(拒否)하는 것은 곧 영원한 생명을 거절하는 것이 된다.꒩꒚
요한 금구는 그의 강론집에서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부(富)를 포기(抛棄)해야 할 필요성을 밝히고 있다. 교회의 지도자들도 교회의 부유함마저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나누어주어야 한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다.꒩꒛
아우그스티누스는 그의 윤리적 판단을 재물 자체에서 그 사용(使用)에로 전환하고 있다. 부자들은 그 스스로가 모순(矛盾)에 빠져 있다고 말하고 있다. 좋은 것을 소유하기를 원하면서, 동시에 자신만이 향유(享有)함으로써 좋은 것이기를 원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부나 재산에 대한 교부들의 사상은 몇 가지 점에서 일치를 이루고 있다. 재물이란 선(善)이다. 인간은 평등(平等)하다. 부자들은 가난한 자들의 조건이 변화할 때까지 재물을 나누어야 할 의무(義務)가 있다. 부자들의 역할(役割)이란 재물의 관리자이지 소유자, 주인이 아니다. 윤리적으로 비판받아야 하는 것은 재물의 소유(所有)에 관한 것이 아니라, 재물의 사용(使用)에 관한 것이다. 사용되지 않고 축적(蓄積)되는 재물은 당연히 저주받아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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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G.Mara, 같은 글, 2992 참조.
꒨꒣ 같은 곳 참조.
꒩꒚ 같은 글, 2991-2992 참조.
꒩꒛ 같은 글, 2992 참조.
꒩꒜ 같은 곳 참조.
모든 경제적 가치(經濟的 價値)들은 인간에게 봉사되어야 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한편 가난에 대해서도 교부(敎父)들의 견해는 그 뿌리를 성서(聖書)에 두고 있다. 이미 보았듯이, 구약성서에 의하면, 가난 자체가 찬양되고 있지는 않다. 또 사막을 방랑할 때, 부자와 빈자의 계급 형성은 불가능하였다. 모두가 가난하였고, 모두가 동등하였다. 가난한 자들에 대한 모세 율법은 노예 해방이라는 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출애 21,1-11; 23,11; 레위 25,3-9; 신명 15,1-18). 초기 이스라엘 사회를 반영하는 레위 19,9; 25,3-6; 출애 22,24-26; 룻기 2,1-3 등의 규범(規範)들은 실제적 동등성에 대한 이상이었을 뿐이다. 만일 하느님에 대한 이스라엘의 충실성에 대한 구체적 징표가 일시적이고 물질적인 축복으로 이해된다면, 가난은 불충실과 게으름을 드러내는 저주의 표징이 되고 있다. 그러나 오랜 역사적 경험으로 보아서 가난이 항상 형벌로 간주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덕(德)을 동반하는 것으로 보이고 있다. 예컨데 시편에서 자주 가난한 사람들이 의인으로 간주되고 있다. 또 가난한 사람들이 자주 인간들의 불의(不義)의 희생자(犧牲者)가 되고 있다. 이처럼 유목 생활에서 가나안 정착사이에 상황이 변화되어 나타난다. 땅의 분할과 군주 시대를 맞이한 사회의 계급 형성이 그러한 변화를 가져왔다. 이 시기에 예언자(預言者)들은 가난한 자들을 변호(辯護)하는 것을 그들의 주오 활동으로 삼았다(아모 4,1; 5,11-12; 이사 3,14-15; 10, 1-2; 예레 21,11-12). 하느님이 손수 가난한 자들을 변호하기 위해 심판(審判)하시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가난은 단순히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측면에서만 취급되는 것이 아니다. 영적인 차원에서도 다루어지고 있다(스바 2,3). 구원의 중재자(仲裁者)는 더 이상 군주가 아니다. 메시아적 인물로 떠오르는 “야훼의 종”, “야훼의 가난한 자”가 중재자가 되고 있다.꒩꒟
유배 이후 지혜 문학에서 자주 언급되는 기술적 표현으로서 ‘야훼의 가난한 자’란 주제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주요 골격을 이루고 있는 가난, 정치적 능력, 땅, 불경건, 정의 등을 총체적으로 다루는 것이 되고 있다. 이러한 역사가 초세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위해서도 모델이 되고 있다.꒩꒠
신약성서와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야훼의 종"이라는 신비의 인물을 고통받는 그리스도, 구원자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가운데서 발견한다. 가난한 자들을 다루면서 신약의 텍스트들은 이중적 가치를 드러내고 있다. 가난이 단순히 하나의 순수한 악(惡)이 아닐 뿐만 아니라, 종말론적 충만함의 징표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마태오 복음(25,31-46)은 마지막 심판을 다루면서 하느님 나라에 직면해서 가난한 자들이 지니는 특권을 이야기하고 있다. 가난한 자는 인간들 한가운데 계시는 그리스도의 현존(現存)을 드러내는 징표이기도 하다. 예루살렘의 유대아적 그리스도교 공동체(사도 2,44-46; 4,32-37)는 구약에서 이상적(이상적)인 목표로 세웠던 그 평등(平等)을 실현하고 있다. 초기 교회 공동체의 재산의 공동 소유는 에세느 파와도 달랐다. 가난의 선택은 자유로웠다. 재산의 공유(共有)는 단순히 신자들 상호간의 받아들임의 표지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아울러 가난의 표현으로서 모든 그리스도교인들이 마치 그리스도처럼 ‘야훼의 종’이라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신약성서 안에서 가난에 관한 설명과 기준은 그리스도의 가난으로부터(마태 8,20; 루가 2,7.12.24; 요한 7,15; 19,25-27; 2고린 8,9), 가난한 이들을 향한 그의 우정으로부터 비롯한다(루가 4,16; 7,22). 돈이란 서로 돕고,
생존하기 위해 노동이 필요하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2데살3,10). 그러면서도 돈에 관한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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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같은 글, 2992-2993 참조.
꒩꒞ G.Mara, "Poveri-Poverta", in DPAC, 2882.
꒩꒟ 같은 글, 2882-2883 참조.
꒩꒠ 같은 글, 2883.
자유롭기를 가르치고 있다. 그렇다고 모두에게 똑같이 재산의 포기를 부과(賦課)하지는 않는다. 그리스도를 따르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가난이 요구되고 있다(마태 19,16 이하; 마르 1,16; 루가 9,3; 10,4).꒩꒡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지리적, 문화적 상황에 따라 가난한 사람, 가난이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다. 플라토니즘과 마니케이즘에서 비롯되는 이원론적이고 영지주의적인 경향은 물질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뚜렷이 구분하고 지상적인 재물, 심지어 노동까지도 나쁜 것으로 보려는 경향을 띠고 있었다. 이러한 경향에 대항하여 그리스도교는 물질적, 영적 두 세계가 한 분이신 창조자 하느님에 의해 비롯된 것임을 바탕으로 서로간의 연속성을 지니고 있음을 강조하였다. 디다케 4,8은 노동의 결실인 지상의 재물은 서로 나누어져야 하는 것이 의무적임을 강조하고 있다. 테르툴리아노 역시 그러한 분배(分配)는 그리스도교인의 특성임을 재차 강조하고 있다(호교론 39,10). 알렛산드리아의 클레멘스는 서로간의 재산을 나누는 일이 일종이 계명(戒命)이라고 보았다(Quis div. 13). 클레멘스에 의하면, 복음이 말하는 가난한 자란 재산은 물론 마지막에 자기 자신까지 포기하는 사람이라기 보다 하느님 나라를 향하여 있는 사람이다. 이러한 전망(展望)에서 어떤 사람이 가난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판단하기 쉽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에 그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노동과 작업량에 관계하지 않고 필요로 하는 자들에게 나누어주는 일이 필요하다는 것을 역설(力說)하였다(Quis div. 33). 테르뚤리아노는 가난한 자, 생존을 위해 기본적인 것을 필요로 하는 자들 안에 그리스도가 현존하고 계심을 강조한다(마르치온을 거스려서, 4,14). 사목적으로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 가난한 사람들이 실재하고 있음을 감안하여, 부자와 빈자 사이의 균등적 상황을 조성하기 위하여, 치뿌리아노는 자선(慈善)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바실리오에 의하면 가난한 자들의 사회적 상황은 하느님이 원하시는 바가 아니라 죄의 결과라고 주장하였다(강론집 6,7). 그렇기 때문에 가난한 자들을 돕는 일에서 원죄가 사해진다고까지 말하고 있다(강론집 8,7). 클레멘스는 가난한 자라고 해서 모두가 진복자(眞福者)는 아니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가난은 그 자체로 긍적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유 없는 가난이란 생명을 주지 못한다(Quis dives salv. 11). 단지 그리스도를 닮은 가난한 자들만이 진복자가 될 수 있다는 입장은 암브로시오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가난한 이유가 죄를 짓지 않았기 때문이다. 니싸의 그레고리오는 단지 영적인 차원 안에서만 가난을 고려하는 것을 반대하였다. 실제적 가난과 영적 가난 사이에 구별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는 하나의 진정한 가난이 있을 뿐이다. 그것은 성령의 결실이며 지상적 부를 탐(貪)하지 않는 것이다(PG 44, 1208). 요한 금구에 의하면, 가난한 자들은 고통(苦痛)을 견디어 나가는 점에서 생활의 스승으로 간주되었다.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데에 있어서도 자유롭다. 이런 이유로 그리스도에 의해 파견된 제자들은 가난한 사람이었다는 것이다(히브리서에 대한 강론 18,2). 아우구스티노는 가난한 자들이 쉽게 탐욕(貪慾)에 빠질 수 있는 위험을 내다보았다(강론 85). 진정으로 가난한 사람들이란 가진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가지기를 원(願)하지도 않는 사람이라는 것이다(강론 3,16). 치로의 데오도레투스나 요한 금구에 의하면 가난은 모든 덕(德)의 어머니로 간주되고 있다. 하지만 그 가난이 낭비(浪費)와 게으름에 기인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고린토 전서에 대한 강론 34.6).꒩꒢
교부들의 저서에서 궁핍(窮乏)과 불의(不義)에 의해 겪는 가난은 부정적(否定的)인 가치를 지닌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자유롭게 선택한 것이 아니다. 한편 교부들은 끊임없이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서로 나눌 것을 권장하였다. 기본적인 생활 필수품을 필요로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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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같은 글, 2883-2884 참조.
꒩꒢ 같은 글, 2884-2885 참조.
는 가난한 자들의 상황을 개선(改善)하기 위하여 실제적으로 관대한 마음으로 재물을 베풀기를 촉구하였다. 초기 교회에서 사회적 문제는 가르침이 일차적 대상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사람들에게, 즉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가난한 자들의 상황이 변화될 때까지 부자들에게 재산을 나누는 일이 의무(義務)로 간주되었다.꒩꒣ 이처럼 교부들에게서 재물이나 부가 무조건적으로 부정되거나 죄악시되지 않았다. 또 가난 자체가 칭송되거나, 어쩔 수 없이 지니게 된 가난이나, 게으름으로 인한 가난이 긍정적인 가치를 지니는 것도 아니었다. 따라서 부 자체보다는 부의 분배(分配), 자선(慈善)에 강조점을 두었으며, 가난 역시 그리스도를 추종하기 위한 가난, 다시 말해서 하느님 중심주의를 위한 가난이 강조되고 있다는 것이다.
5. 교회 문헌
초세기부터 플라톤의 철학의 경향을 지니고 있는 영지주의(靈知主義)는 상당히 오랫동안 우리 교회 안에 영향을 주었다. 선(善)과 악(惡), 정신(精神)과 물질(物質), 영혼(靈魂)과 육신(肉身)을 철저하게 구분하는 이원론적 체계를 강조하고, 물질이나 육신을 죄악시하는 경향을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경향은 교회에 금욕주의적 경향을 가져다 주었다.
금욕주의적 경향은 부익부(富益富 빈익빈(貧益貧)의 상황 하에서 고통 당하는 가난한 자들에게 인내(忍耐)를 요구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교회의 경향을 보고 계몽주의자들은 교회를 빈부의 격차를 그대로 유지 보존시키는 유산자(有産者)의 앞잡이로 공박하였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일부에서는 이제 교회는 가난한 자들을 편들어야 한다는 해방신학이 발생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현대적 배경에서 교회는 새로운 사회 교리를 제시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이러한 필요성에 의해 개최된 것이 제2차 바티칸 공이회였다.
교회는 더 이상 경제와 종교를 카이사르의 것과 하느님의 것으로 구분하지 않는다. 현대 세계에 발맞추려는 교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사목 헌장」꒪꒚ 을 통하여 오히려 올바른 경제 발전(經濟發展), 재화(財貨)의 올바른 사용은 하느님의 계획(計劃)이요, 인간의 신적 소명(召命)으로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경제발전은 하느님과 함께 하는 창조(創造)일 때 올바르게 실행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사목 헌장 64항). 현실은 제거(除去)되어야 할 엄청난 경제적 불평등(經濟的 不平等)이 실재하고 있다는 사실도 인식하고 있다(66항). 재물은 정의에 입각하여 공정(公正)하게 풍부히 나누어져야 할 만인의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69항). 이것은 재물이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물론 인간의 사유 재산권(私有財産權)을 무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유 재산이란 시민적 자유의 한 가지 조건(條件)으로 이해되고 있다. 하지만 사유재산이 공동선(共同善)을 거슬러서 남용되는 일을 경고하고 있다(71항). 복음이 언급하고 있는 가난의 정신을 강조하며, 그 가난이 하느님 나라를 위한 가난, 그리스도께 순종(順從)하기 위한 가난이어야 함을 아울러 지적하고 있다(72항).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가 가르친 가난의 본질은 하느님의 선물을 경시하고 이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또 부라는 것이 수단(手段)에 불과하며, 수단에 불과한 재물을 추구하는 것은 말단(末端)을 추구하여 근본(根本)을 소홀히 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가 경고한 부의 위험(危險)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사목 헌장」은 복음과 마찬가지로 하느님 나라를 먼저 찾아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있다(72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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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같은 글, 2885 참조.
꒪꒚ 「현대 세계의 사목 헌장(Gaudium et spes)」, 『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김남수 옮김, 서울,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75, 171-277쪽(이하에서는 사목 헌장으로 표기). 본 헌장은 1965년 12월 7일 선포되었다.
최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회칙「민족들의 발전」반포 20 주년을 맞이하여 회칙 「사회적 관심(Sollicicitudo rei socialis)」를 발표하면서, 다시 한 번 재물에 관한 입장을 표명하였다.꒪꒛ 물론 회칙은 부강국과 저개발국이라는 세계적 차원에서 부유와 빈곤을 언급하고 있지만, 개인에게도 역시 적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다.
우선 회칙은 재화(財貨)가 만인(萬人)에게 돌아가도록 되어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상기시키면서(10항; 42항), 세계 도처에 빈곤을 겪는 현실을 지적하고 있다(13항). 이러한 사회적 불평등이 당혹할 정도로 노골적인 스캔들이 되고 있다는 점도 인식하고 있다(14항). 현대 세계에서 가장 큰 불행(不幸)중의 하나가 바로 만인에게 돌아가도록 되어 있는 재화와 서비스의 분배가 잘못되어 있다는 점이다. 즉 많이 소유한 자들이 상대적으로 소수(小數)이고, 거의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한 이들이 다수(多數)라는 사실이다(28항). 이러한 ‘죄악의 구조’속에 이데올로기, 계급, 기술공학과 더불어 돈에 대한 우상숭배(偶像崇拜)를 발견하고 있다(37항). 더욱이 오늘날 가난의 형태는 다양(多樣)하다는 것을 파악하고 있다. 단순한 물질적 재화의 결핍만이 아니라, 인간 권리, 종교 자유, 사회건설에 참여할 권리, 단체를 조직할 자유, 경제적 문제에 창의성을 발휘할 자유의 박탈 등, 인간 자체가 빈곤한 현실이라는 것이다(15항). 이러한 불평등의 원인은 여러 가지다(16항). 태만(怠慢), 부자 또는 부유국들의 책임 회피, 경제적․재정적․사회적 메카니즘(16-17항), 실업 또는 불완전한 취업(18항), 부채(19항) 등으로 나타난다.
물론 재화와 산업의 생산품은 인간에게 필요한 것이고, 단순한 필요 충족(必要充足) 이상으로 인간에게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는 하느님의 선물임을 인식하고 있다(29항). 하지만 무엇보다도 단순한 재화나 서비스의 축적이 진정한 인간 발전, 즉 행복을 실현하기 위해 충분하지 못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무엇을 갖는 것’과 ‘어떤 인간이 되는 것' 사이의 차이를 구별하고, 재물을 ’갖는 것‘이 반드시 ’사람됨‘을 성숙(成熟)시키고 풍부하게 만드는 데 이바지하는 것이 아님을 지적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오히려 많이 ’가짐‘으로써 ’사람됨‘에 성공하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갖는 것‘을 숭배하는 가치 전도(價値顚倒)에 있다는 것이다. 악은 ’갖는 것‘ 그 자체가 아니라, 가지고 있는 재화가 ’사람됨‘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은 소유에 있다는 것이다(28항). ’선용하든 남용하든 자유다“라는 말은 성립될 수 없다(34항). 재화의 사용은 민족이든 개인이든 기본적인 평등을 향유하여야 한다는 점에서 뿐 만 아니라(33항), 연대성(連帶性)과 공동선(共同善)이란 차원에서 다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39항). 오늘날의 ‘죄의 구조’를 극복하는 일은, 물론 하느님의 도우심을 전제(前提)로 하지만, 타인을 착취(搾取)하는 대신에 이웃의 선익(善益)에 투신(投身)하는 복음적 자세(38항), 자신의 특정한 이익만을 이기적으로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이익을 존중하는 자세(39항)에서 가능하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공동선과 연대 의식은 가난한 사람에게 관심과 애정을 갖게 한다.(39항). 신앙의 관점에서 연대성은 하느님이 만인의 아버지이시고, 만인은 하느님의 자녀로서 서로 형제자매가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다. 이러한 그리스도교적 연대성은 형제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치는 희생까지도 각오하게 한다(40항).
공동선과 연대 의식, 그리고 이 세상의 재화는 본래 만인을 위한 것이라는 그리스도교 사회 교리의 특수한 원칙(原則)응 다시 한 번 내세우면서,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사랑’ 내지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선택(選擇)을 강조하고 있다(42항). 가난한 이들이란 ’주님의 가난한 이들‘이다. 왜냐하면 주님이 그들을 당신과 동일시(同一視) 하셨기 때문이다(마태25, 3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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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사회적 관심」, 성염 옮김, 서울,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88. 본 회칙은 1987년 12월 30일 반포되었다.
결론적으로 인간 발전이나, 민족들의 발전, 또 세계 평화는 그 성취(成就)가 무엇보다도 하느님께 달려 있다는 신앙을 표명하면서(47항), 하느님 나라를 어떠한 현세적 성취와도 구별한다. 하지만 이 세상의 재화가 결정적인 하느님 나라의 도래에 이바지하는 것임을 빠뜨리지 않고 있다(48항).
III. 결 론
창세기에 하느님은 창조(創造)하신 모든 것이 보시기에 좋았다고 표현하고 있다. 재물은 초기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느님의 축복(祝福)으로 간주되었다. 예수도 하느님이 창조하신 세상과 인간을 좋은 것으로 이해하였기 때문에 인간과 더불어 세상 안에 살기를 원하셨다. 가난은 그 자체로 찬양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가 투쟁한 것은 악(惡)을 거슬러서였다. 예수의 투쟁은 사람들을 가난으로부터, 배고픔으로부터, 억눌림으로부터 해방(解放)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렇다고 예수가 계급 투쟁(階級鬪爭)에 나선 것은 결코 아니다.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의 편싸움을 조장(助長)하고자 한 것도 아니다. 인간은 모두 하느님의 모상(模相)으로 창조된 만큼 모두가 행복을 누리기를 원하셨기에 ‘가난한 자’들에 대한 우선적(優先的) 사랑을 보이셨던 것이다. 아울러 철저하게 하느님 중심주의를 삶의 지표로 삼았던 만큼 부가 하느님 자리를 대신(代身)하는 우상 숭배(偶像崇拜)의 위험(危險)을 보고 경고하셨던 것이다.
교부들이나 교회 문헌을 통하여 가르치는 교회의 사회 교리 역시 이러한 예수의 입장을 그대로 고수(固守)하고 있다. 재물은 하나의 수단(手段)이다. 이 수단이 목적으로 둔갑해서는 우상 숭배를 면하지 못한다. 우리 신앙에 중심에 두어야 할 것은 하느님이시다. 하느님을 추종하기 위해 재물을 포기(抛棄)하는 가난은 하느님의 절대성(絶對性)과 하느님의 전능(全能)을 드러내는 자리다. 이런 의미에서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느님이 그의 참된 재산이요 의지(依支)이기 때문이다. 게으름과 낭비로 인한 가난은 결코 찬양 받을 수 있는 가난이 될 수 없다. ‘갖지 못한 것’ 때문에 ‘가진 자’를 시기하고 미워하는 마음으로 가득하고, 늘 ‘갖는 것’에 마음을 쓰는 일 역시 칭송될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마태오는 ‘마음이 가난한 자’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고 본다. 가난한 자들이 하느님께 절대적 의지를 보이는 유익성(有益性)과 달리 부자들이 하느님을 재물과 대치(代置)시킬 위험성(危險性)을 이미 보았다. 그와 더불어 또 한 가지 위험스러운 것은 인간은 하느님이 주신 선물의 주인(主人)이 아니라 관리자(管理者)라는 사실을 자주 잊어버린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교회는 만인(萬人)을 위한 재물로써 공정(公正)하게 사용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연대 의식(連帶意識)과 공동선(共同善)을 바탕으로 공정하게 분배되는 재물은 바로 하느님의 하느님이심을 드러내는 자리가 될 수 있다. 한 분이신 하느님의 동일한 자녀들로서 서로를 위한 재화의 분배(分配)나 자선(慈善)은 이웃이 바로 형제(兄弟)라는 연대성과 더불어 하느님 중심주의를 드러내는 일이다. 거듭 강조하고 있다. 재물이 인간을 성숙케 하거나 행복을 가져다 주는 것이거나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하느님 나라는 어떠한 현세적 성취와도 동일시 될 수 없다. 하지만 재물의 선용은 하느님 나라의 영광을 반영하고 어느 면에서 선참(先參)케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하나의 수단이 될 수 있다. 이제 우리는 다시 한 번 결단해야 한다. 하느님이냐 맘몬이냐?, 존재(存在)냐 소유(所有)냐?, ‘사람됨’이냐 ‘갖는 것’이냐? 그리스도교 신앙은 물질 만능 시대에 직면해서 우리에게 지혜로운 결단(決斷)을 촉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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