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서(帛書)

[5월은 성모 성월]마리아론(3)

나뭇잎숨결 2022. 4. 30. 11:10

마리아론(3)

 

 

 

 

-조규만 바실리오 주교 

 

 

 

2.교부들의 마리아론

 

교부들이란 초세기에 있어서 교회의 신앙을, 신앙의 유산을 교회에 전수시킨 분들이다. 신앙을 충실하게 지키고, 또 그 신앙을 해설한 진리의 스승이라고 말할 수 있다. 꼭 우리가 교부들이라고 일컫지 않는, 그리스도교 작가들도 있다. 이들 역시 교회의 신앙의 유산을 지키는데 공헌한 사람들이다. 사도시대에 뒤이어 사도적 교부들이 활약하였고, 특히 교부들의 황금시대라고 일컫는 4-5세기에 있어서 교부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교부시대는 8세기까지 이어진다. 초대교부와 그리스도교 작가들은 직접적이고 독자적인 방법으로 마리아에 대해서만 저술한 것은 상당히 드물고, 대체적으로 성서를 해설하면서, 또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건을 설명하거나 교회의 생활, 전례의 신비를 해설하면서 거기에 덧붙여 설명되었다. 다시말해서 성서, 특히 복음이 그리스도론적 설명을 위해 보조수단으로 마리아론이 거론되었던 것과 같은 문맥을 이룬다 하겠다. 하지만 이들의 마리아에 대한 증언, 마리아에 대한 신앙을 신학적으로 개척한, 선구자적 의미에서 가치가 있다.

 

 

2.1 초기 교부들

 

여기서는 예루살렘 함락에서부터 니체아 공의회 시기까지의 교부들을 말한다. 사도적 교부로, 1) 디다케, 2) 로마의 클레멘스, 3)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 4) 뽈리카르보, 5) 제라폴리의 파피아, 6) 바르나바의 편지, 7) 가 클레멘스, 8) 목자 헤르마, 9) 디오게네토에게 보내는 편지 등의 작품들이 있다. 또 교회를 옹호하던 호교론자들로서, 1) 아리스티데, 2) 타지아노, 3) 유스티노, 4) 이레네오, 5)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6) 아테나고라, 7) 테오필로등이 있다. 플라톤적 사상의 영향을 받은 그리스도교의 교부들로서, 1) 오리게네스, 2) 알렉산드리아의 디오니시우스, 3) 로마의 히뽈리또, 4) 떼르뚤리아노, 5) 카르타고의 치쁘리아노, 6) 노바지아노등의 교부들이 있다.

이 시기에 신앙고백문, 즉 신경이 정식화 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내.외적으로 여러가지 종교와 철학이 만연되어 있어서 정리해야 했고, 받아들여할 것들을 분명히 하여야만 했다.

이런 상황에서 그리스도교 문화가 형성된다. 그리이스어 뿐만 아니라, 라틴어, 시리아어, 아라메아어, 곱틱어로 된 작품들이 나오게 되었다. 특히 알렉산드리아와 안티오키아를 중심으로 학파가 생겨나고, 교리교육이 강조된다. 외적으로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이방인들의 문화, 종교, 철학과 충돌하게 되고, 또 내적으로 유다이즘과 대결하여야 했다. 그들은 그리스도교의 교리나 생활에 대해 어리석은 것으로 보고 경멸하기도 했다: “유대인들은 표징을 구하고, 그리이스인들은 지혜를 찿읍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처형되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유대인들에게는 걸림돌이요, 이방인들에게는 어리석음이지만‧‧‧”(1고린 1,18-25).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신성과 마리아의 예수 동정잉태에 관한 교리에 대해서 냉소적이었다.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의 선재론과 그리스도의 성부와의 동일성을 부정하고, 예수를 단순한 하나의 예언자로 보려고 하였다. 영지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의 신적 선재를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많은 신적 존재를 인정하였다. 그러한 신적존재들이 pleroma(신적 충만)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영지주의자들은 유일하신 한분이신 하느님을 부정하고, 구약에 나타나는 정의의 하느님과 신약에 나타나는 하느님을 구별한다.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말씀의 육화를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물질이란 하느님으로부터 유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육체란 암암리에 구원받을 수 없는 악한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 구원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데, 그것은 계시의 차원이다. 그리스도는 사라질 인간 육체에 사로잡힌 영적 존재에 대한 계시라는 것이다. 영적 인간에게는 신앙과 어떤 선행 업적이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인식”(또는 영지적인 것 자체 - 이것이 인간의 마지막 운명이요, 영원한 원천으로서 지식)만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진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계시되었다는 것이다. 즉,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의 발현으로 말미암아 시작되었고, 수난의 순간에 끝났다는 것이다. 성령은 세례의 순간에 인간 예수(혹자에게 참 인간으로서, 또 혹자에게는 단지 그렇게 보였을 뿐인 인간(가현설))에게 내려왔고, 예수가 죽음 맞이하기에 앞서 먼저 하늘로 되돌아 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육화, 잉태, 탄생, 인간적 체험, 죽음, 부활은 단지 그렇게 보였을 뿐이라는 것, 또는 구원사건이 될 수 없었다는 것을 주장한다. 이런 사고방식 안에서 아무도 마리아를 하느님의 아들의 진정한 모친, 또 처녀이면서 모친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가 없었다. 당시 주위는 매우 복잡하였고, 이런 처지에서 교부들은 교회를 적수들로부터, 그리스도로부터 사도를 통하여 전해진 신앙을 옹호하여야 했다.

 

2.1.1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

 

이냐시오(+ 110)는 안티오키아의 주교로서, 성서에 이어서 첫번째로 마리아에 대해 언급한 교부이다. 또 바오로 사도의 신학을 이어받아 발전 시킨 첫 교부이며, 그리스도의 역사적 사건을 인간적이고 우주론적 측면에서 심화시켰다.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는 여러 교회에 보낸 편지 속에서 마리아에 관해 단편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여기에 언급되고 있는 마리아에 관한 신앙은 당시 유대적 영지주의적 흐름 가운데서 마리아의 역사적 근거를 찿고자 하는 가운데 온 교회가 고백하였던 신앙이라는 것에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냐시오는 무엇보다도 한 교회의 주교로서 신자들에게 주님으로부터 사도들에 의해 전해 오는 하나의 신앙 속에서 하나의 교회안에 굳게 결속할 것을 촉구하였다. 여기서 동정녀 마리아의 위치가 드러나고 있다. 특히 마리아의 모성과 동정성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1) 마리아의 진정한 모성은 하느님 아들의 육화의 보증이요, 확고한 근거라는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의 보증이요 근거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가 고백하고 있는 구원은 육화되지 않은 천상 신비에 대한 계시가 아니라(영지주의자들의 주장), 마리아에 의해서 육화되신 하느님, 그리스도의 진정한 인간적 행위와 사실에서 이루어진 계시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만일 여러분들이 우리와 다른 방식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이야기한다면 장님이나 귀머거리일 것이다. 그분은 다윗의 자손이며, 마리아로부터 태어나신 분이며, 참으로 탄생하셨고, 먹고 마시고, 참으로 본시오 빌라도 치하에서 수난을 당하셨고, 십자가에 못박히셨고 죽으셨으며, 참으로 죽은이들 가운데로부터 살아나신 분이시다”(트릴리아인들에게 보낸 편지 9항).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실재가 구원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2) 동정잉태는 모든 교회가 신앙으로 고백했던 것이다. 또 이것은 신경에서 중요한 핵심 부분을 이루고 있다.

“여러분들은 분명하게 우리 주님께서 참으로 육을 따라서 다윗의 후손이시며, 하느님의 능력과 뜻을 따라서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동정녀로부터 태어나셨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읍니다”(스미르나 교회에 보내는 편지 1).

초기 그리스도교 교리교육에 있어서 마리아의 이름은 다윗의 후손인 ‘동정녀’로 불리었다.

 

3)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계시되었고, 교회에 의해서 해석된 하느님의 구원 경륜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만큼이나 마리아의 실제적인 모성(잉태하셨고, 출산하셨던)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우연히 발생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계획을 따라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우리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구원 경륜에 따라서 다윗의 후손으로서, 성령의 후손으로서, 마리아의 태중에 전해졌다. 그분은 수난과 더불어 물을 정화하기 위하여 태어나셨고 세례를 받으셨다”( 에페소인들에게 보낸 편지 18,2).

“이 세상의 우두머리는 마리아의 동정성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 그의 출산, 주님의 죽음과 같이 하느님의 침묵속에 완성된 세가지 신비중의 하나다”(에페소인들에게 보낸 편지 19,1).

이 편지는 후대에 영지주의자들이 고안해 낸 환상에 대해 답을 주는 신학의 기틀이 되었다. 영지주의자들을 거스려서 동정녀에게 잉태되었다는 것, 동정출산, 죽음, 부활이 따로 독립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원하신 사건이었고 이것이 실제로 역사적 사건이 되었다는 것을 강조한다.

 

4) 유일무이한 사건으로서 그리스도의 탄생을 강조한다. 이냐시오는 아름다운 전례적 찬가 안에서 주님의 역사적 구원 사건을 노래하고 있다. 주님의 선재, 육화, 죽음, 부활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오직 한 분이신 의사입니다. 그분은 하느님이시요, 또 인간이십니다. 태어나셨으며, 또 유래하셨읍니다. 육이 되신 하느님이시요, 죽음 안에서 참으로 생명이셨으며,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셨으며, 하느님께로부터 나셨읍니다. 처음엔 수난 받으실 수 없는 분이셨으나, 나중에 수난 받으시는 분이 되셨읍니다.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에페소인들에게 보낸 편지 7,2).

일부학자들은 이 귀절이 요한 1,13과 루가 1,35과 관계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

 

2.1.2 유스티노

 

유스티노(+ 165)의 작품으로 「호교론 1」( Apologia prima), 「호교론 2」( Apologia secunda), 「유대인 트리폰과의 대화」(Dialogo con Giudeo Trifono)가 있다.

철학적 입장에서 유대인들과 그리이스인들에게 그리스도교를 설명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왜 하느님은 육화하셨는가? 왜 동정녀로부터 태어나셨는가? 유스티노는 육화사건과 동정잉태가 인간에게 호의를 베푸시는 하느님의 적극적 계획에 속해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당시 신화에서 나타나는 동정잉태를 단호히 거부한다. 이방인들, 특히 그리이스인들에게 유스티노는, 그리스도는 모든 진정한 철학의 완성임을 제시한다. 동정녀로부터의 육화는 Logos의 씨앗(seme)를 지니고 있는 이성안에, 쉽게 진리에 도달하고 진리 안에 살게 될 수 있도록 그 가능성을 주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또한 유대인들에게 그리스도는 구약의 예언의 성취라는 것을 강조한다. 사실 구약의 예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신비를 예고하였고 구약은 그 예형이었다는 것이다. 그분의 동정잉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구약은 그 예형이나 또는 그것에 대한 예언이었다는 것이다. 구약의 예언 가운데서도 동정잉태에 관해서 창세기 49,10-11; 이사야 53,8; 다니엘 2,34; 그리고 7,13을 예로든다.

“왕의 지팡이가 유다를 떠나지 않으리라. 지휘봉이 다리 사이에서 떠나지 않으리라. 참으로 그 자리를 차지할 분이 와서 만 백성이 그에게 순종하게 되리라. 포도나무에 나귀를 예사로 매어놓고, 고급 포도 나무에 새끼 나귀를 예사로 매어두리라. 포도주로 옷을 빨고, 포도주의 즙으로 겉옷까지 빨리라”(창세기 49,10-11)

“그는 억울한 재판을 받고 처형당하는데 그 신세를 걱정해 주는자가 어디 있었느냐? 그렇다 그는 인간사회에서 끊기었다. 우리의 반역죄를 쓰고 사형당하였다”(이사야 53,8).

“임금님께서 그것을 보고 계시는데, 아무도 손을 대지 않은 돌 하나가 난데 없이 날아들어와 쇠와 흙으로 된 그 발을 쳐서 부수어 버렸읍니다”(다니 2,34).

“나는 밤에 또 이상한 광경을 보았는데 사람 모습을 한 이가 하늘에서 구름을 타고 와서 태고적부터 계신 이 앞에 인도되어 나갔다”(다니 17,3).

무엇보다도 이사야 7,14: “보라 하느님께서 손수 표징을 보여주리니 처녀가 아이를 잉태하고 아이를 낳으리라. 그 아이를 엠마누엘이라 부르리라”의 성취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유대인들을 거스려 그리스도교의 전형적인 해석을 펼친다. 유스티노는 이 예언이 예언한 것처럼 동정녀로부터 출생한 것이고, 만일 almah가 평범하게 아이를 출산한 것이라면 늙은 여인만이 아니라 석녀에게도 하느님이 선물로서 아이를 출산하게 하실 수 있는 하느님께 무엇이 문제가 되고, 그리고 무슨 이적이 되겠느냐는 것이다.

진정한 표징은 또 모든 인간들에게 믿을 수 있는 동기가 되어야 하는 표징은 모든 창조물의 첫번째 출생자(primogenito), 맏아들은 동정녀의 태중을 취하면서 실제로 출생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하느님은 이것을 성령을 통해서 미리 예언하셨다. 미리 알려주셨다는 것은 반드시 우주의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능력과 뜻에 의하여 성취됨을 깨닫도록 하시고자 하기 위함이다(Dialog. 84).

말씀이 동정녀에 의해 잉태되셨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가 않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그렇게 원하셨고, 그렇게 미리 말씀하셨고 또 그렇게 성취하셨기 때문이다. 여기에 하나의 내적 이유가 있다. 하느님은 그런 방법으로 이끄신 이유는 죄와 죽음의 깊은 심연으로 빠져들게한 동일한 길을 통해서 원초적인 역사를 회복하시고자 원하셨기 때문이다. 여기서 에와-마리아의 대조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신비스러운 연결이 루가 1,26-38(예수의 탄생예고)와 창세기 3,1-20(인류의 타락)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두가지 역사적 탄생의 순간은 인간과 하느님에게 속하는 것임을 보게된다. 인간은 파멸하게 하고, 하느님은 다시 세우신다. 인간은 죄를 짓고 하느님은 구원하신다. 인간은 죽음으로 이끌고 하느님은 생명을 다시 주신다. 아직 “처녀”인 에와 때문에 아담이 죄에 떨어지고, 동정녀이신 마리아를 통하여 하느님의 육화, 즉 그리스도의 탄생이 이루어진다. 에와는 처녀로서 뱀의 말을 받아들이고, 불순명과 죽음을 출산하였다. 그러나 동정녀 마리아는 가브리엘 천사가 기쁜 소식을 전할 때 그 기쁨과 신앙을 받아들이면서 대답하길: “당신의 말씀대로 이루어지소서”라고 하였다.

마리아에게서 성서가 그토록 말씀하시던 그분이 탄생하셨다. 탄생하신 그분을 통해서 하느님은 사기꾼인 뱀을 쳐부수고 그분을 믿고 회개하는 모든 사람을 죽음으로부터 자유롭게 하셨다(Dialogo 100).

이러한 유스티노의 대조에서 초대교회 공동체가 마리아의 동정성을 유지하면서 모성을 지니셨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더 나아가서 어머니가 되게 하셨던 신앙과 순종의 자유로운 응답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렇게 해서 에와-마리아 두 처녀는 아담과 그리스도, 인류의 두 우두머리와 관련하여 책임이 있음을 보여준다. 에와는 사탄과 더불어, 마리아는 하느님과 더불어, 에와는 죽음을 가져왔고, 마리아는 생명을 가져왔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여기엔 오직 한 가지 동정녀의 순종의 길만이 있다는 것이다. 만일 예수 탄생예고에 관한 장면에 촛점을 맞춘다면 이런 암시는 유스티노의 마리아에 대한 생각의 깊이를 보여주는 것이다. 마리아는 참 어머니이시다. 동정녀이면서 어머니, 신앙과 순종의 응답을 통해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육화하신 하느님의 말씀의 어머니시라는 것이다.

 

2.1.3 리용의 이레네오

 

순교자이며 리용의 주교였던 이레네오(+ 202)는 마리아론의 교부라고 불린다. 「이단을 거스려서」(cosntro l'eresie)라는 작품 안에서, 또 「사도적 설교에 관한 간단한 논증」이라는 작품에서 이단 영지주의를 성서적 근거를 통하여 반박하고 있다. 그의 신학의 주축은 “구원의 역사”였다. 또는 “하느님의 구원 경륜”이라고도 한다.

이 하느님의 계획이었던 구원은 모두를 일치시키기 위해 인간에게 그 근원을 가져다 주기 위해 오신 성자의 시대에 이루어졌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한분이신 하느님, 한분이신 그리스도(육화하신 말씀), 오직 하나의 신앙, 하난의 교회, 하나의 계시, 하나의 역사가 있기 때문이고, 모두가 구원되어 영원으로 진입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원 경륜의 실현에는 “동정녀 - 마리아”가 어느 것으로도 대치할 수 없는 유일한 자리를 지니고 있다. 구원을 위한 하느님다운 방법을 두 가지 단어, 즉 ricapitolazione(원천에로의 수렴), ricircolazione(재순환)로 설명하고 있다.

말씀 로고스는 육화하면서 모든 인간을 원천에로 수렴케(ricapitola)한다. 그리고 말씀은 인간본성의 공통적인 것을 수용하면서 고유한 신적 본성을 봉헌하신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인간에게 상실된 하느님의 모상, 하느님과의 유사성을 받아들이는 모두에게, 그것을 주기 위해 새로운 아담이 되었다. 아담은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예형(로마 5,14)이었다. 만일 아담이 지상 동정녀에 의해, 하느님의 능력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한다면(창세 2,4-7), 새로운 아담 역시 그분이 기원이 지상-동정녀에 의해 동일한 하느님의 능력에 의해서 갖게되기 마련이다. 마리아는 지상-동정녀였다. 그분을 통해 그리스도는 “첫째”가 된다.

“사실 한 사람의 불순종을 통하여 - 아직 가꾸어 지지 않은 땅으로부터 만들어진 첫번째 인간의 불순종을 통하여 - 모두가 죄인이 되고 생명을 잃었다. 그와같이 한 인간이 순종이 요구되었다. 동정녀에 의해 탄생한 첫 인간의 순종으로 의화되었고, 구원을 얻게 되었다”(contro le eresie III, 18, 7).

만일 아담이 하느님에 의해 물질과 하느님의 모상과 유사성을 지닌 이성적 영혼으로 구성된 하나의 본성을 지녔다면 구원자이신 분 역시 지닌 본성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닐 것이다. 이를 위하여 인간과 관계없이 하느님의 능력을 통하여 한 여인으로 머물면서 출산을 하신 마리아는 모든 아담의 후예들을 그리스도에게 전한다. 왜냐하면 그분을 “새로운 아담”, “인간의 아들”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아담이 사탄의 유혹으로 하느님께 불순종하고 죄에 떨어졌다면 그리스도는 여기에 대조적으로 하느님 아버지의 계명에 대해 충실성과 순명안에 머문다. 그러면서 충분히 아담의 불순종을 보상하였다. 왜냐하면 죄가 풍부한 곳에 은총이 풍부하기 때문이다.

이레네오는 아담-그리스도의 유비적 관계 안에서 에와-마리아의 대조적 관계를 발전시킨다. 이미 유스티노에게서 보았듯이 마리아는 순종적이다. “저는 당신의 여종입니다. 당신의 말씀대로 이루어지소서”(루가 1,).

“에와는 불순종한 여인이다. 그녀는 분명히 동정녀였다. 에와가 불순종하여 모든 인간에게 죽음의 원인이 되었다면 마리아는 순종하여 모든 인간의 구원의 원인이 된다. 그처럼 에와의 불순종의 매듭이 마리아의 순종으로 풀었다. 동정녀 에와가 불신앙으로 매듭을 얽었다면 동정녀 마리아는 그녀의 신앙으로 이 얽힌 매듭을 풀었다”(contro le eresie, III, 22, 4).

즉 옛 여인의 동정적 불순종을, 마리아가 그녀의 동정적 순종으로 대조를 이루면서 마리아는 결국 에와의 변호자가 되었다. 첫번째 동정녀는 죽음으로 모든 인간을 이끌어 들였지만, 새로운 동정녀는 생명을 되돌려 주는 원인이 되었다. 그리고 에와의 죄의 결과로 하느님께서 여인과 뱀 사이에 원수관계를 유지하도록 하였다면, 그리스도는 “여인의 씨앗(seme)”가 되면서 첫 아담에 이르기까지 모든 인간을 구속하셨다.

이와같이 이레네오에게는 육화가 창조의 ‘원천에로의 수렴’으로 이해되고 있다. 왜냐하면 인간 역사가 그 육화로 말미암아 새로운 방향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구원이신 하느님-인간으로서 그분의 활동을 통하여 구원하셨기 때문이다. 모든 구약의 예형과 예언들 가운데 이레네오 역시 이사야 7,14을 강조한다. 유스티노처럼 이 징표는 하느님으로부터 아하즈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고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것임을 강조하고 이 표징은 구원을 위해서 동정출산만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엠마누엘(하느님께서 함께 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그분은 하느님으로서 동정녀에게서 태어나셨고 또 인간으로서 어머님을 지니신다. 동정녀의 표징은 그러므로 구원의 표징이 된다. 가장 깨끗한 분, 그분의 깨끗한 태중안에 육화하시면서 하느님안에서 인간들의 재생의 항구한 원천이 되신다는 것이다.

“순수한 인간이 단지 요셉에게서 태어났다고, 동정녀로부터 태어나신 엠마누엘을 부인하는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이신 그분의 선물이 결핍되어 있는 것이다. 불사불멸을 아낌없이 베푸시는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써 그들은 죽을 육체안에 머물고 죽음에 경의를 표하는 자가 된다. 왜냐하면 생명의 해독제를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Contro le eresie, III, 19, 1).

그러므로 마리아의 동정적 모성을 고백하는 것은 구원에 참여하기 위해 필수불가결한 신앙의 조건이 된다는 것이다.

 

2.1.4 외경 「야고보 복음」

 

2세기경에 쓰여진 작품으로서 외경 가운데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고, 교육적인 측면에서 유명하다. 희랍어로 기록되었으며, “하느님의 거룩한 모친 마리아의 탄생과 영광스로운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부제 그대로 동정마리아를 주제로 쓰여진 작품이다. 이야기 형태로 마리아의 출산 이전, 출산시, 출산 이후의 동정성을 옹호하면서 구약과 신약을 총괄하여 요약하고 있다. 마리아의 부모 요아킴과 안나의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이 외경에 의하면, 본래 요아킴과 안나가 아이를 낳지 못하는 사람으로 그려지고 있다(2-3장). 그런데 이 착하고 열심한 두사람의 기도를 하느님께서 허락하여 은총의 선물로 마리아가 탄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4-5장). 요아킴과 안나는 마리아를 태어나면서부터 모든 더러움으로부터 보호하여 건강하게 키우고 하느님 앞에 축성하였다는 것이다(6장).

3세 때에 봉헌되어 12세까지 지성소에서 천사의 손에 양육되었고, 살아 있는 하느님의 성전이 되기 위해서 그녀 자신은 날마다 하느님 말씀을 들으며 거룩하게 살았다는 것이다(7-8장). 그렇게 “하느님의 아들”을 받아들이기에 합당한 준비를 하였다.

한편 요셉은 마리아를 여느 여인처럼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마리아의 동정서약을 보호하기 위해 사제로부터 약속을 하고 받아들인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9장). 다시말해 사제에 의해서 마리아의 동정이 지켜지기 위해 요셉에게 맡겨진 셈이다. 외경은 요셉이 이미 늙었고, 자신의 자녀들이 많이 있음을 고백한다(9,2). 마리아는 요셉의 약속 이후에도 계속 성전에 머물고, 그러는 가운데 천사가 출현하여 높으신 분의 아들을 낳게 되리라는 잉태예고를 듣는다(11장). 마리아는 사제로부터 이 세상의 모든 세대에서 가장 복된 여인이라는 말을 듣게된다. 잉태 예고를 받고 친척인 엘리사벳을 만나러 간다. 3달 머문후 돌아와서 집에 칩거한다. 그때 나이가 16이었다(12장). 마리아가 임신한지 6개월후 마리아를 만나게 되는데, 임신한 것을 알게 되자 마리아의 동정을 지킬 것을 약속한 자신이 약속을 이행하지 못한 것에 대해 하느님앞에서 애통해 한다. 그러면서 마리아에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자세히 묻는다. 마리아는 결백을 주장한다(13장). 사실을 들은 요셉은 두려워하며, 마리아를 떠나서 곰곰히 생각한다. 어떻게 하면 무죄한 마리아를 돌에 맞아 죽지 않도록 할까 고민한다. 그러던 어느 날밤 꿈속에서 천사가 나타나서 성령에 의한 잉태임을 알려준다. 요셉은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며 마리아를 보호한다(14장). 어느 날 사제가 요셉을 방문하고 마리아가 임신한 것을 알게되고 마리아와 요셉을 문책한다. 그리고 죄가 없다는 증명을 하기 위해 쓴물을 마시게 하고 산으로 올려 보낸다. 요셉이 살아서 돌아오자, 마리아에게 물을 마시게 하고 산으로 올려보낸다. 마리아 역시 살아 돌아온다. 그렇게 해서 그들이 무죄하다는 것이 증명된다(15-16). 이후의 장에서는 루가나 마태오의 예수의 유년기 설화에서처럼 인구조사 때문에 베틀레헴으로 떠나게 되었고, 베틀레헴 동굴에서 예수를 분만한 과정을 비롯해서 동박박사들의 방문, 어린 세자 요한의 피신, 즈가리아의 피살과 어린아이들의 피살을 기록하고 있다(17-25장).

요약하면, 1. 마리아가 미리 선택되었다는 것; 2. 마리아의 잉태는 은총의 선물이라는 것; 3. 마리아의 동정성은 하느님의 섭리에 의해서 요셉에게 의탁되었다는 것; 4. 마리아의 예수 동정잉태는 사람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 의한 것이라는 것; 5. 동정출산은 인간 본성의 차원을 넘어선 것, 자연의 법칙을 넘어선 경이로운 것이라는 것; 6. 마리아의 동정성은 완전하고 영원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 외경은 복음안에서 마리아에 대해 부족하게 언급하고 있는 그 여백을 채우고자 시도되었다고 보여진다.

 

2.1.5 2세기경의 그밖의 작가들

 

1) 아테네의 아리스티데

아드리아노 황제에게 쓴 그의 「호교론」에서 “하느님은 하늘로부터 내려 오셨고, 이스라엘 처녀에게서 육체를 취하였다. 사람의 아들은 인간의 딸안에 거주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호교론 2,6).

 

2) 사르디의 멜리톤(+ 180)

그의 「부활절 강론」에서 그리스도의 구원 업적의 유일 무이성을 모든 역사적 순간에서 볼 수 있다고 말한다. 아울러 마리아는 아름다운 양, 즉 희생을 위한 어린 양을 출산한 양이었다고 말한다. 아름다운 양이라 순진무구함을 표현한다. 이런 뜻으로 비잔틴 전례에서 자주 언급되고 있다. 또 이 양은 고통과 수난의 연관성 안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그리스도는 말없이 묵묵한 고양, 학살된 고양이시다. 그분은 순수한 고양이신 마리아로부터 태어나신 분이시다. 그분은 양떼들 가운데서 붙잡히셨고, 희생물로 끌려가셨고, 저녁에 살해되었으며, 밤에 묻혔고, 나무 위에서 꺾이지 않았고, 땅에서 부패되지 않았으며, 죽은 자들로부터 다시 일어나셨고 무덤 깊은 곳으로부터 인간을 일으키셨다”(부활절강론, 7).

이밖에도 이사야 예언자의 승천기, 살로몬의 시편, 시빌리니의 신탁 등에서, “마리아가 자기 태중에 아기가 있는 것을 보고 놀랐으며, 조산원의 도움없이 출산하였다”라든가, “처녀의 태중에 아기가 임신되고, 그 아이를 산고없이 출산하였으며, 그렇게 해서 처녀가 어머니가 되었다. 출산 중에 고통이 없었던 것은 부정한 잉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라는 기록들이 있다.

 

2.1.6 신앙 고백문의 형식들

 

2세기경부터 어떤 신앙 고백문의 형식이 형성되었다. 그 원천은 말할 것도 없이 마태 28,19이다. “너희는 가서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어라.”

이것은 세례예식에서 분명한 기능을 수행한다. 또 유대인들, 이방인들 그리고 박해자들 앞에서 신앙을 고백하는 데 중요성을 지닌다. 이러한 성서-전례적 모형에 2세기 교부들은 이단 영지주의자들을 대항하여 그리스도론적으로 신앙의 조항을 발전시켜야 할 필요성을 강요받았다. 또 신구약의 문맥 안에서 그리스도의 신비의 역사-구원적 역할을 강조해야하는 요구도 강요받았다. 사실 교부들은 그리스도 사건의 역사성을 강조하면서, 선재, 인간적 탄생, 수난, 죽음, 부활, 승천, 재림을 반영하였다. 그런데 이런 모든 것은 2세기말, 3세기 초까지 기다려야 했다. 이 때 비로소 「사도신경」이 나오게 되었다. 사도신경을 로마의 히뽈리또의 작품 「사도적 전승」에서 찿아 볼 수 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성령의 행위를 통하여 마리아로부터 태어나시고, 본시오 빌라도 치하에서 십자가에 못박히셨고, 죽으셨으며, 묻히셨고, 죽은 자들로부터 사흘만에 부활하셨다. 하늘로 오르셨으며, 성부의 오른쪽에 앉으셨고 산자와 죽은 자들을 심판하러 오시리라는 것을 믿습니까?”

여기서는 단지 마리아에 대한 신앙이 지니고 있는 두가지 특징, 진정한 모성과 동정성만이 아니라. 성령에 대한 언급을 보게된다. 니체아 신경은 동정잉태를 마리아와 성령에 돌리고 있지 않다. 마리아와 성령에 근거하는 동정잉태에 관한 언급은 381년 콘스탄티노플 신경에서 발견된다.

“우리를 위하여 또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오시어, 성령과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육화하셨고 사람이 되셨다”(DS 150).

 

2.1.7 떼르뚤리아노

 

떼르뚤리아노(160-240)는 카르타고 출신으로서 호교론자의 한 사람이다. 서방신학의 선구자였으며, 철학자이자 법률가였다. 그 역시 신앙의 핵심으로서 그리스도론적이고 마리아론적인 입장을 강조한다.

“만일 하느님의 성령이 어머니의 태중에 내려 오신 것이 어머니 태중으로부터 육신을 취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무슨 목적으로 내려온 것인가?”(그리스도의 육체에 대하여, 19,5).

그리스도의 육체는 진정한 육체요, 하느님의 아들의 육체는 완전한 인간의 것으로서 마리아를 통하여 받으셨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어떤 육신임을 알아 볼 수 있는가? 그것은 아브라함의 육신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아브라함의 씨앗(seme)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윗의 육신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다윗의 후손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리아의 육신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마리아의 태중으로부터 나셨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서 그것은 아담의 육신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제 2의 아담이기 때문이다.”(그리스도의 육체에 대해서, 22,6).

까탈을 부리고 사소한 것으로 시비를 거는 영지주의자들을 거스려 마리아의 동정출산을 옹호하면서, 그리스도의 정상적 육신의 구체성을 위해 정상적인 출산을 강조한다.

“진정으로 그분의 육체로부터 출산하였다. 잉태함에 있어서 동정이셨다면, 출산에 있어서는 동정이 아니셨다. 왜냐하면 출산에 있어서 그분의 자궁이 열렸기 때문이다. 비록 잉태의 순간 남자의 씨앗(seme)이 그녀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할지라도”(그리스도의 육체에 대해서, 23).

말하자면 떼르뚤리아노는 동정성을 생물학적인 것, 성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보게된다.

한편 마리아의 인격적 태도에 관해서 그는 전통을 따르고 있다. 즉 마리아는 새로운 에와요, 탄생예고에 있어서 충실하고 순종적이었음을 이야기한다.

“에와는 뱀을 믿었고, 마리아는 천사 가브리엘을 믿었다. 에와는 뱀을 믿음으로써 잘못하였고, 마리아는 천사 가브리엘을 믿음으로서 옳았다”.

또 영지주의자들의 잘못된 해석, 즉 마르코 3,33과 마태오 12,48에 나타나는 “누가 나의 어머니요, 누가 나의 형제들인가?”라는 귀절을 루가 1,27-28: “복되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들이여”라는 말을 인용하면서, 예수는 지상의 어머님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고, 새로운 방법으로 마리아가 그분과 종말론적 가족관계를 이루고 있음을 강조한다.

 

2.1.8 로마의 히뽈리또

 

히뽈리또(+ 235)는 성서해석가요, 사제였으며, 역사가였다. 히뽈리또의 작품으로 「사도전승」이 있다. 로마교회의 준수 사항으로서 그리스도교적 실천사항, 전례, 성사를 위하여 만든 규범이다. 핵심은 성체성사였다. 교회는 성체성사중에 동정적 육화의 구원적 사건을 기념한다.

“그분은 분리할 수 없는 당신의 말씀입니다. 그분을 통해서 모든 것이 창조 되었읍니다. 그분은 항상 당신을 기쁘게 하셨읍니다. 당신을 그를 하늘로부터 한 동정녀의 태중으로 보내셨읍니다. 그 태중에 사시면서, 육체를 취하시고, 당신 앞에 아들로 모습을 보이셨으며, 성령과 마리아에게서 탄생하셨읍니다. 당신의 뜻을 성취하기 위하여, 거룩한 백성을 얻기 위하여, 그의 수난안에 팔을 벌리셨읍니다”(사도전승, 4).

동정적 탄생은 성령의 활동을 통하여, 영원으로부터 성부에 의해 원해졌던 것이었으며, 우리의 구원을 성취하신, 순종적인 종, 사랑하시는 아들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음을 강조한다. 히뽈리또의 많은 작품이 마리아가 그의 태중에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첫 아들, 독생성자를 모심으로써 그분이 모든 인간의 첫번째가 되셨음을 이야기 한다.

히뽈리또는 마리아의 칭호로서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칭호를 사용한다.

“그분은 하느님의 어머니셨다. 만일 이 칭호가 사용되지 않는다면, 말해보시요, 복되신 마리아여, 당신 태중에 잉태하신 분이 누구이셨던가. 당신의 동정 태중에 지니셨던 분이 누구셨던가. 그분은 하늘로부터 내려와 당신의 태중에서 형체를 이루신 하느님의 독생성자, 말씀이셨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말씀, 독생성자는 첫번째 아들로서 인간과 일치함을 모여주시고자 했기 때문이다”(엘카나와 안나에 대하여, 단편 집 2).

히뽈리또는 예수의 두 가지 탄생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첫 아들, 독생성자로서 영원한 탄생과 시간안에서의 탄생을 이야기 한다. 한편 마리아는 말씀의 어머니로서만이 아니라 말씀을 사람하시는 분, 아가에 나타나는 신부로 소개하고 있다(아가서에 대하여 2).

히뽈리또는 그의 저서에서 마리아에 대한 공경을 드러내고 있다. 그는 자주 “복된 마리아”, “거룩하신 마리아”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이러한 수식어로써 동정녀 마리아가 그의 사랑의 힘을 통하여 말씀을 잉태하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기서 훗날 아우구스티누스는 “마리아는 그의 태중에 말씀을 잉태하기 이전에 마음안에 말씀을 잉태하셨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를 찿았다.

 

2.1.9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클레멘스(+ 215)는 동정녀-어머니의 모습에 동정녀-교회라는 모습을 첨가한다.

“임신한 모든 여인을 젖을 주면서 어머니가 된다. 그러나 젖을 주어서 복된 것이 아닌 동정녀의 fructus(열매)이신 주님 그리스도는 영양 공급의 능력에 대해서 평가하신 것이 아니다. 하늘로부터 그의 말씀을 내려주신 친절한 아버지, 그 분 자신이 모든 지혜로운 인간에게 영신적 음식이 되셨다 ‧‧‧ 그리고 한분이신 어머니-동정녀가 계시다. 나는 그것을 ‘교회’라고 부르는 것을 좋아한다. 이 어머니는 젖을 지닌 것만이 아니다. 왜냐하면 단지 ‘여인’이 아니였고 동정녀였으며 어머니 이셨기 때문이다. 그 여인은 자신에게로 자녀들을 부르고, 젖으로 영양을 공급한다”(Pedagogo 1,6,21).

한편 “교회는 신적 음식을 그의 자녀들에게 단지 성사들로서만이 아니라 하느님의 성서와 더불어 공급한다. 교회 역시 마리아처럼 동정녀다. 그러므로 다른 이단과 열교로부터 변질될 수 없다. 또 교회는 마리아처럼 어머니다. 왜냐하면 풍요성을 동정으로서 베풀고 있기 때문이다. 즉 하느님의 말씀과 진리를 선사하기 때문이다”(stormati, 7, 16).

이러한 클레멘스의 언급은 우리로 하여금 동정녀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긴밀한 관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이런 착안은 라틴계 전통에서 폭넓게 발전한다.

 

2.1.10 오리게네스

 

오리게네스(185-253/4)의 이론의 중심축은 로고스다. 즉 생명의 수여자이신 Verbum이다. 이 말씀은 인간을 성부께로 인도하기 위해서 인간과 교류하고 인간을 변형시킨다. 오리게네스 역시 마리아에 대한 특별한 공경을 드렸던 교부다. 마리아는 말씀의 신비안에 영예스러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1) 마리아의 신학적 소묘

오리게네스에게 있어서 적어도 세 가지 마리아론의 신학적 특장을 본다. ① 동정잉태, ② 신적모성, ③ 영원한 동정성.

동정잉태에 관해서 그는 하나의 케뤼그마로 본다. 그는 첼소(Celso)라는 철학가와 맞서서 마리아의 동정잉태가 하나의 신화가 아니라 하나의 역사적 사실임을 주장한다.

이러한 사실을 세상이 잘모르고 있는 이유는 마리아가 이스라엘 여인이었고, 사회적으로 가난한 조건을 지녔으며, 잊혀진 지방에서 태어났고 살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사야 7,14에서 예언된 것임을 강조한다. 다시말해서 자연안에서, 또 인간 역사안에서 하느님의 업적으로서 동정잉태를 받아들이는 길은 전혀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한다.

여인으로부터의 탄생이, 전혀 하느님께 부당하지 않다. 그만큼 그것을 받아들인 사람은 온전한 동정녀였고, 그 사건은 성령에 의해 이루어졌다.

신적 모성에 대해서 ‘천주의 모친’(Theotokos)라는 칭호로서 변호한다. 이 용어는 당시 에집트에서 이미 사용되고 있었다. 보다 중요한 문제는 마리아의 영원한 동정성이었다. 오리게네스 역시 마리아의 영원한 동정성에 관해서 많은 그리스도교 신자들 사이에서 유포되었던 외경을 통해서 익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신심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한 부분이라고 느끼고 있었다.

“건전하게 믿는 사람들에 의하면, 아무도 예수가 마리아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는다”(요한 복음해설 1,4; 루가 7,4에 관한 강론, 마태오 복음 해설 10, 17).

또 이것을 부정하는 이단들의 비난이 되고 있는 “예수의 형제들”에 대해서 오리게네스는 예수의 형제들은 요셉이 마리아 이전에 결혼했던 데에서 비롯된 요셉의 자녀들이라는 외경의 입장을 받아들이고 있다.

오리게네스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나는 예수가 모든 순결한 인간, 마리아가 모든 순결한 여인의 으뜸이라는 것이 합당하다고 믿는다”고 말한다.

 

2) 마리아의 성서적 소묘

그리스도론적 관점에서 마리아는 하느님께 속하고 또 복음 선포적 관점에서 마리아는 교회에 속하며, 신앙의 길을 걷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마리아는 우리와 같다고 말한다. 이 신앙의 여정은 말씀과 만나고, 그 말씀을 알기 위해서, 그 말씀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또 그분을 우리안에 육화가기 위해 계속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위해 말씀은 당신이 계시던 곳에서 우리에게 오셨다.

“마리아만이 체험한(성령이 그분에게 내려 오시고, 말씀을 신비롭게 잉태하신) 은총의 사건은 우리들과 전연 무관한 것이 아니다. 말씀을 찿고, 말씀을 발견하는 과정에서 그분은 모든 사람들의 맨 첫번째 대열에 게신 분으로서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마리아는 율법을 잘 알고 있었으며, 성녀였으며, 예언자들의 신학을 날마다 묵상하고 있었다”(루가 복음 강론 6,7).

우선 마리아에게서 두가지 여정을 발견하는데 하나는 신앙의 길이요, 또 하나는 사랑의 길이라는 것이다. 신앙의 길에서 동정녀 마리아는 처음에 구약의 하느님의 말씀을 대면하고 있는 분으로 찿아 볼 수 있고, 다음으로 성자의 사건과 말씀을 대면하고 있는 분을 찿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육화는 마리아를 새로운 신적 영역에로 이끈다. 즉 아들에게로. 마리아에게도 예수의 말씀과 예수의 태도를 이해하는 것이 어려웠다. 그것을 성전에서 소년 에수를 되찿았을 때의 장면에서 찿아 볼 수 있다. 잃어버린 예수를 찿아 헤메면서 말씀을 찿는다는 것이 대단히 고통스럽고 힘든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 신비스러운 대답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은 아직 완벽한 신앙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하고 완벽한 신앙은 완벽한 이해를 전제한다고 주장한다 (루가 복음 해설 19-20).

또 시메온이 예언한 “십자가의 스캔들과 가슴을 꿰둟는 칼”에 대해서도, 오리게네스는 인간의 중재없이 동정상태로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성령의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내려와서 당신을 감싸줌으로써 잉태하게 된 당신도 불신앙의 칼에 의해서 가슴이 아플 것이라고 해설한다. 또 반대자들의 생각이 당신을 갈기갈기 찢을 것이라는 것을 인간의 중재없이 낳은 것을 잘 알고 있는, 그리고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불리고 있는 당신 아들이 십자가에 매달려 다른 인간들의 형벌의 댓가로 고통을 당혀 죽을 때 보게 될 것이라고 해설한다(루가 복음 해설 17, 6-7).

이러한 오리게네스의 해설은 동방교회에 상당히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이밖에도 오리게네스는 “만일 주님의 수난 동안 동정녀가 스캔들을 겪지 않았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그분의 죄를 위해서 죽은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이 말은 죄의 우주적 차원을 말한다. 마리아에게도 예수 그리스도는 구세주이심을 말해준다.

한편 오리게네스는 사도들을 마리아보다 성성에 있어서 상위에 놓는다. 따라서 “도대체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사도들마저 스캔들을 느끼고 있었다면, 주님의 어머니라고 해서 스캔들로부터 어떻게 벗어날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고 있다.

성성에 있어서 사도들이 마리아보다 상위이지만 사랑의 길에 있어서 동정녀는 영적인간과 사도들의 모범이 되었다고 말한다. 특히 엘리사벳 방문과 마니피캇에서 마리아가 사랑의 차원에 있었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하나의 보잘 것없는 피조물임을 자처하고 하느님의 성령에 자신을 내맡기고 자유로윤 의지로 응답하며 하느님의 모상으로 자신이 위대하게 변모되어 있음을 찬미하고 있다는 것이다. 산을 향하여, 유다 고을을 향하여 올라가고 있다는 루가 1,39의 묘사는 그녀의 내적 상태, 즉 사랑과 신앙이 그 정점을 향해 올라가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해설한다. 바로 이들 통하여 그분의 사랑의 차원이 다른 사람들과도 주님의 친교를 위하여 확대되어 그분의 목소리는 성령의 진입인 말씀의 소리가 되었다는 것이다(루가 복음 해설 7.9).

 

2.1.11 3세기 교부들과 그리스도교 작가들

 

이 시기의 교부들은 라틴교부와 희랍권의 동방교부들로 구분된다.

라틴교부들로서 카르타고의 치쁘리아노(258), 로마의 노바지아노(258), 비토리노(304), 라탄지오(317)등이 있다.

이들은 경우에 따라서 동정녀 마리아의 중재로 이루어진 하느님 말씀의 육화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성자는 두번째 태어나셨다는 것이다. 한번은 어머니 없이, 또 한번은 아버지 없이. 어머니 없이 태어났다는 것은 성부로부터 나신 영원한 성자로서의 탄생을 의미하고, 아버지 없이 태어났다는 것은 동정녀 마리아로부터의 탄생을 의미하고 있다(Lattanzio).

한편 희랍 문화권에서는 Abercio의 묘비명에,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와 그 전의 작가들처럼, 동정녀-어머니와 동정녀-교회의 도식이 자연스럽게 겹쳐지고 있다.

“어디에서든지 신앙이 나를 안내하였다. 어디에서든지 신앙은 샘의 물고기를 양식으로 나에게 공급하였다. 위대하며, 순결하고, 정결하신 동정녀는 그 물고기를 낚아 그 동료에게 영원한 음식으로 나누어 주었다. 그 동정녀는 맛 좋은 포도주를 지니고 있었고, 그것을 빵과 함께 나누어주었다. ‧‧‧”

여기서 물고기는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아들 구세주를 의미하고 표도주와 빵을 성혈과 성체를 의미하며, 따라서 동정녀는 마리아이며 동시에 교회를 상징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올림포의 메토디오(311)

10명의 처녀들의 혼인잔치(마태 25,1 이하)에서 동정성에 대해 찬가를 쓰면서 마리아를 구약의 동정녀들의 결혼행렬(아벨로부터 시작해서 요한 세례자에 이르기까지 피를 흘리며 지킨 말씀에 대한 충실성을 의미)과 동정녀-교회(신랑이신 그리스도를 위한 충실성)를 연결시키는 고리로 소개한다.

“생명의 출산자, 무죄한 씨가 당신 자궁에 심어졌을때 은총이 손상되지 않은채, 외관상 신방을 거부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동정녀는 임신하였고, 그 복된 여인이 말하기를 ”당신을 위하여 정결을 보존하였읍니다. 나의 신랑이시여 당신을 만나기 위해 등불을 켭니다”(GCS 27, 135).

Amandazio는 “하느님께 대한 신앙에 관한 대화”에서 가현설주의자들을 거스려 동정잉태를 암시하고 있다.

Alexsandro di Alexsandria 그의 단편 속에 처음으로 Theotokos라는 칭호가 등장한다. 그리고 마리아는 동정녀의 모델로서 제시된다.

“여러분이 눈으로 보듯이 천상의 삶의 모상이요, 전형인 마리아의 품행이 있읍니다”(CSCO 151, 76).

3세기경 Sub tuum presidium이라는 마리아께 드리는 기도문이 시작되었다. 하느님의 모친이신 마리아에 대해서 위험중에 있는 공동체로부터 마리아에 대한 신심을 엿볼 수 있다.

“Sub tuum praesidium confusimus Sancta Dei Genitrix, nostra depracationes ne despicias in necessitatibus, sed a preiculus cunctis libera nos se;pre Virgo gloriosa et benedicta”(당신의 자비로 우리가 피신하나이다. 우리의 필요한 요구를 물리치지 마십시요. 항상 위험에서 우리를 구하십시요. 홀로 정결하시고 홀로 축복받으신 분이여).

 

 

2.2 니체아 공의회에서 칼체돈 공의회까지의 교부들 (325-451)

 

이 시기는 매우 중요하다. 오늘날까지 그 자취를 남기고 있다. 거기엔 여러가지 요소들이 있다. 정치적, 종교적, 문화적, 신심적 요인들이 있다. 성서에 대한 관심이 높았고, 이론 정립에 노력하였으며 새로운 이단에대한 대답을 마련해야 했다. 이때 중요한 4대 세계 공의회가 개최되었다. 니체아(325), 콘스탄티노플(381), 에페소(431), 칼체돈(451). 이 공의회에서 마리아 문제가 다루어졌다.

1) 4세기 중엽에 발생하여 에페소, 칼체돈 공의회에 이르기까지 다루어진 그리스도론 논쟁으로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가 분열되었다. 육화하신 말씀의 두가지 본성(신성과 인성)이 하나의 persona안에 일치되어 있다는 “위로부터의 그리스도론”이 강조되는 가운데 마리아에 관한 중심 논쟁테마는 Theotokos(천주의 모친)였다.

2) 박해가 막 끝나면서 “완벽학 생활”이 “피의 순교”를 대치하고, 또 한편 남성과 여성의 구별없이 유일신론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다. 리아는 봉헌된 동정녀의 가장 완성된 모델이 되었다. 그 이전 부터 전해오던 전통들이 있었다 할지라도 그 모두를 다 받아들인 것도 아니고, 일부 교부들만이 마리아를 모든 분야에 있어서 세계적 모델로 보고자 했다. 음엔 주님의 탄생까지 처녀들 가운데 으뜸이고, 그 다음에는 요셉의 부인으로서 살았던 것을 받아들이면서 부부들 가운데 으뜸 모델이었음을 이야기 하고자 하였다. 이런 근거를 성서에서 찿고 있다. 사실상 복음과 사도행전은 예수의 형제들(마르 3,31; 마태오 12,46; 루가 8,19; 사도 1,14)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마리아는 “여인” 즉 요셉의 아내였다(마태 1,20.24). 그리고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않았다(남자를 알지 못했다)”(마태 1,25). 또 베틀레헴에서 “첫 아들”(루가 2,7)을 낳았다는 귀절들을 그 근거로 삼고자 한다.

여기에 반대해서 예루살렘의 치릴로, 살라미나의 에피파니오, 바실리오, 예로니모, 암브로시오, 아우구스티노등 대저자들이 속출하였다. 이들은 성서 해석학의 난제를 풀기 시작하였다. 마리아의 동정성을 선택하였다. 이와같이 마리아의 사생활안에서 동정성과 결혼 사이에 팽팽한 논쟁이 중심 문제로 부각되었다.

3) 4세기에는 로마 전례, 밀라노 전례, 알렉산드리아 전례, 예루살렘 전례 등이 정립되기 시작하던 때였다. 4세기 말엽부터 전례 안에서 축일을 설정하는 가운데 마리아의 축일이 등장하게 되었다. 마리아의 축일 설정과 더불어 “천주의 어머니”라는 칭호가 강론의 중심이 되고 있다.

4) 325년 단죄된 아리우스파는 이단설 자체안에 동정잉태나 동정의 가치에 대해서 취급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말씀이 성부와 같은 하느님이었다는 사실을 부인하고 있다. 따라서 마리아가 진정으로 하느님의 아들을 출산하였다는 사실을 부인하게 된다. 그러므로 그들의 이단설에서는 Theotokos라는 칭호가 결여되어 있다. 그들은 마리아를 결코 “천주의 모친”이라는 부르지 않고 있다.

4세기에 계속되는 신학 논쟁안에서 말씀은 육화 이후 오직 하나의 본성(natura)을 지닌다는 주장도 나오게 되었다. 이 본성은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의 혼합이라는 주장이다. 이것이 Apollinarius의 이단설이다. 그에 의하면 말씀의 인간적 정식인 신적인 정신 Logos에 의해서 대치 되었다는 것이다.

안티오키아 학파는 그리스도안의 본성에 대해서 이중성을 강조하면서 두 아들, 두 인격을 주장함으로써 오류를 범하고 있다. 서로 구별되는 두 인격, 두 아들이 역사의 그리스도 안에서 즉 가시적인 persona에서 결합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와같이 마리아는 진정한 ‘하느님의 모친’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인간성을 거부하는 Apollinarius도, 마리아를 인간 예수의 모친으로 주장하는 안티오키아 학파도 마리아의 Theotokos를 거부하였다.

여기에 대해서 에페소 공의회와 칼체돈 공의회는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거룩한 교부들에 대해 충실성을 지니고 있는 우리 모두는 한마음으로 일치하여 ‘우리 주 에수 그리스도, 성자는 한분이시며, 동일하신 분이요, 신성으로서나 인성으로서나 완전하신 분이시며, 진정한 하느님이시요, 진정한 인간으로서 이성적 영혼과 육체를 지니셨다 ‧‧‧ 때가 이르기 전에 그분은 신성을 따라서 성부로부터 나셨으며, 마지막 때가 이르러, 그분은 동일하신 분으로서 우리를 위하여,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인성을 따라서 천주의 모친이신 동정 마리아로부터 태어 나셨다. 우리는 동일하신 한분이신 그리스도, 성자. 주님, 독생성자를 고백한다. 그분에게는 두가지 본성이 있으며, 그렇다고 혼동이나, 변화나, 분리나, 구별이 없으시다”(DS 301-302).

라틴권에서는 5세기 초에 마리아의 무염시태로 말미암아 어떤 문제들이 발생하였다. Pelagio의 이론이 그것이다. 그는 인간 본성이 근원적으로 선하다는 것과 하느님의 은총의 도움 없이도 인간이 하느님께 합당한 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만큼 인간의 인격적 능력을 절대화 하고 있다. Pelagio는 세대에서 세대로 전해지는 원죄를 거부하였다. 이런 이론을 전개하는데 마리아의 무염시태, 마리아의 완벽한 인격적 능력이 한 사례로 거론되었다.

 

2.2.1 동방교부들

 

이 시기의 동방 교부들은 이제껏 교회 전통에 있어서 가장 풍부한 저술활동을 전개하였다. 여기에 부응해서 시리아 교부들의 활동도 그에 못지 않다.

 

2.2.1.1 체사레아의 에우세비오

 

에우세비오(+ 340)는 오리게네스를 존경하고 추종하던 그는 3-4세기를 잇는 교량역할을 한 인물이다. 마리아에 대해서 구약과 신약의 몇몇 귀절들을 해석하고 있다. 유대인들과 논쟁하는 가운데, 유대인들이 동일하게 사용하고 있는 구약의 귀절들을 찿아 내어 그리스도론적-마리아론적 해석을 조직적으로 시도하였다. 이사야 7,14을 열거하면서, 특히 “동정녀”, “처녀”라는 단어로부터 “나의 하느님”이라는 단어에까지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너희가 사람들을 성가시게 하다가 그것이 모자라 이제 하느님에게까지도‧‧‧”(이사 7,13)라는 귀절이 보여주는 이 예언자의 하느님은 구약의 역사 안에서 당신 자신을 보여주시는 시나이의 예언자의 하느님이시다. 그분은 말씀이시다. 그분은 이제 당신이 주도권을 갖고 먼저 그 표징, 다시 말해서 인간이 감히 생각하지도 못했고, 자신들의 공로의 댓가로 버리지도 못했던 구원의 표징을 제공하신다. 그 표징은 어느날 우리 가운데 나타난다. 그분은 육을 입고 빛을 보게하실 분은 동정녀다. 그러므로 이제 다윗의 온 가문이 “Emmanuel”이라고 불리게 된다. 아직 그분이 육화를 보여주기 이전부터도. 그분을 그들을 구원하실 것이다.

이와같이 에우세비오는 이사야의 예언을 통해서 시나에서부터 미래에까지 모든 구원의 역사를 연결하고 있다. “동정녀의 표징”은 “구원의 역사”라는 것이다(이사야 7, 14에 관하여, PG 24,133-136참조).

구약에 대해서 에우세비오는 이미 이레네오와 오리게네스가 다루었던 많은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즉 예수의 다윗의 후손성에 관한 문제다. 그는 요셉만이 아니라 마리아 역시 다윗의 후손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는 법적으로만 아니라 육을 따라서도 다윗의 후손이라는 것이다.

 

2.2.1.2 예루살렘의 치릴로

 

치릴로(+ 387)는 젊은 시절 쓴 “교리서”에서 자주 마리아를 주제로 삼고 있다. “성령에 의해서, 그리고 마리아에 의해서 잉태되심”을 언급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육화에 관한 분명한 신앙고백은 인간의 역사에 있어서 하느님의 신비적 계획의 중심으로 부여주고 있다. 두 가지 탄생이 있다. 하나는 영원한 탄생이요, 또 다른 하나는 시간안에 탄생이다. 두가지 도래가 있다. 하나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역사안으로의 도래요, 또 하나는 우리를 영광으로 이끌어 올리기 위해서 마직막에 오시는 재림이다.

치릴로는 동정잉태의 타당성을 설명하기 위하여 이방인들에게는 신화를 다루고, 유대인에게는 성서를 상키시키고 있다. 육화에 대해 다루면서 마니케이즘과도 대결하고 있다. 이들은 하느님께서 육화사시면서 오점을 남기는 수치 때문에 여인의 태중에서 인간이 되셨다는 것을 거부한다. 치릴로는 여기에 대해서 인간의 지체를 만드신 그분이 여인으로부터 지체의 육신을 취하신 것을 부끄러운일 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치릴로의 이런한 지적은 비잔틴 신학에서 오늘날까지 그 중요성을 간직하고 있다. 이미 이레네오에 의해 암시되었고, 3세기경 영지주의적 외경안에서도 암시된 바가 있다. 나중에 힐라리오, 나지안즈의 그레고리오가 이 주제를 다루었다. 탄생예고에 있어서 성화하시는 성신의 임하심으로 동정녀의 성화가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성령께서 네 위에 임할 것이다. ‧‧‧ 그 출산은 어떤 오점도 없이, 티없이 깨끗한 것이다. 성령을 입는 곳에는 어떤 오염도 제거된다. ‧‧‧ 높으신 분의 능력이 동정녀를 감싸고 성령이 그녀 위에 임하심으로써 그녀를 성화하셨다”(교리서 12,33; 17,6).

성령이 주님의 육체를 만드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마리아의 육체를 성화시키기 위해서 동정녀에게 내리셨다. 그래서 그분을 하느님의 어머니가 될 수 있게 하셨다. 순결한 동정녀와 그녀 안에서 육을 이루신 하느님과의 결혼은 포옹으로써가 아니라 천진난만한 신앙의 응답으로써 이루어진 것임을 강조한다. 성령으로부터 투명함을 지닌 그 동정녀는 말씀의 참 어머니가 되시며, 티없이 죄의 물듦이 없는 육신, 하느님의 거룩한 성전이 된다는 것이다.

 

2.2.1.3 아타나시오

 

니체아 공의회에 부제로서 참석했던 아타나시오(+ 373)는 328년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알렉산드로를 계승한다. 그는 교회의 기둥, 정통교부라고 불리우고 있다. 그는 많은 호교론적 저술을 비롯하여 성서 해석학적, 신학적 저술을 펴냈다. 그의 마리아에 관한 사상은 교의사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1) 이론적 측면

아리우스파를 거슬러 말씀이 성부와 더불어 동일본질성을 지니고 있음을 옹호하였다. 그러므로 마리아의 신적모성도 아울러 강조되고 있다. 이외에도 그리스도론적 이단이 싹트고 있는 것을 거스려 그리스도의 육체는 말슴과 함께 영원한 것이며, 그분의 영혼은 육화 이전에 선재하셨다는 것이다. 육화 안에서 신성이 그 육체안에 들어 오셧고 마치 성전안에서처럼 거주하셨으며, 인간본성을 조금도 손상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가르친다.

아타나시오는 전통적 이론으로써, 성서와 이성의 논증으로써 하느님의 아들 말씀께서 수용하신 우리의 육체, 그분의 위격과의 일치, 그분 신성의 불변성을 옹호하였다.

“마리아로부터 유래하는 것은 인간성에 속하는 것이고, 그것이 주님의 참 육체를 이루었다. ‧‧‧ 마리아는 우리의 자매이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아담으로 부터 유래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혹자는 혼동하고 있다. ‘말씀은 마리아의 아들인 어떤 인간안에 들어오셨다’고 말한다. 만일 그가 그렇게 다른 인간 안에 오신 것이라면 어떻게 그 분만을 두고 ‘엠마누엘’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한편 모든 인간들은 태어났다고 말하고 오직 마리아의 아들만을 두고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예수의 독특성을 강조하고 있다.

 

2) 전례적 측면

마리아에 관한 강론, 탄생예고, 엘리사벳 방문, 성탄에 관한 해설이 곱틱어로 전해지고 있다. 마니피캇의 영향을 받은 “천주의 모친”이라는 찬가가 있다.

“참으로 당신의 영혼을 주님을 찬미하였읍니다. 당신의 영은 당신의 구세주이신 하느님을 향해 기뻐 뛰었읍니다. 훗날 모든 세대가 당신을 찬미할 것입니다. 아담이 당신을 ‘모든 산 이의 어머니’라고 부르고, 모세가 당신을 모든 부분을 금으로 입힌, 새로운 계약의 궤로써 묵상하며, 당신이 당신께 복된이라고 선포합니다. ‘위대하신 왕의 도성’, ‘군대의 하느님의 도성’임을 선언하고, 또 훗날 모든 세대의 사람들이 당신께 찬미를 드릴 것입니다”(‘하느님의 모친 동정녀 마리아에 대한 강론’에서).

 

3) 극기적 생활의 측면에서

무엇보다도 아타나시오는 동정녀에게 마리아의 삶을 봉헌된 삶의 모델로 제시한다. 밀라노의 암브로시오에 의해서 이것은 즉시 모방되었다.

“마리아는 순결한 처녀였으며, 균형잡힌 마음을 지니셨고, ‧‧‧ 하느님만을 바라보며 기도하셨으며 ‧‧‧ 다른 사람을 험담하는 것을 듣지 않았고 ‧‧‧ 구세주의 가르침을 받고, 그 안에서 기쁨을 누리셨다. 이분이 바로 동정녀다”(동정녀에 관하여 CSCO 151,58-62).

 

2.2.1.4 에프렘

 

에프렘(+ 373)은 오늘날까지 시리아-안티오키아, 칼데아 교회에서 박사로 존경받고 있다. 마리아에 대한 그의 이론은 고전적이면서도 새로운 면을 지니고 있다. 신앙의 전통적 내용을 노래가사 형식을 취하면서 전하고 있다. 에와-마리아를 비교하는 형식을 취하면서 인간역사의 두 주인공으로 제시하고 있다.

“세상을 바라보라. 세상은 두 눈을 지니고 있다. 왼쪽 눈 에와. 장님의 눈이다. 오른 쪽 빛나는 눈, 그 눈은 마리아다. 왼쪽 눈의 잘못으로 세상은 어두어졌다 ‧‧‧ 그러나 오른 쪽 눈인 마리아는 세상을 천상의 빛으로 비추고 있다. 그녀안에 머무는 모든 인간은 일치를 다시 찿을 것이다”(교회에 대한 찬가 37, CSCO 199,90).

마리아를 에와와 반비례하는 역할로 묘사하는 그는 천사 앞에 자유롭게 응답하고 있는 자세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마리아는 높으신 천사의 설명을 요구하며 겁내지 않았다. 에와는 뱀에게 질문하지 않았다. 가브리엘 천사는 마리아와 대화를 나누었다. 살아계신 분의 성자를 의심해서가 아니라 진리에 대한 설명을 원한 까닭이다. 에와는 뱀의 거짓말을 받아들이는 어리석음을 저질렀고, 그 어리석은 ‘어머니’는 우리들의 모든 불운의 원천이 되었다. 그러나 현명한 누이는 우리들의 모든 기쁨의 보석이 되었다”(‘교회에 대한 찬가’, 46).

마리아가 하느님과 긴밀한 관계를 지니고 있는 동정적 모성의 깊은 신비를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시나이에서처럼 나는 당신을 모셔왔읍니다. 나는 당신의 맹렬한 불에 타버리지 않았읍니다. 당신의 불꽃은 나를 태우지 않았읍니다”(COSC 187, 179).

마리아의 영원한 동정성에 대하여 분명한 실제적 예를 사용한다.

“마리아는 자신의 머리인 남자에게 봉사한다. 그러나 요셉은 마리안에 계신 주님께 봉사하기를 선호했다. 마치 사제가 거룩하신 분 당신으로 해서 계약의 궤 앞에 봉사하듯이 요셉은 그렇게 봉사하였다”(‘성탄에 관한 찬가’ 16,16).

한편 마리아의 성성에 대해서, 안티오키아 학파의 입장을 따르면서 에프렘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예수님, 당신 홀로, 그리고 당신의 어머님만이 모든 것 위에 아름다움을 지니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당신 안에는 어떤 오점도 없고, 당신 어머님 안에는 어떤 그늘도 없기 때문입니다”(CSCO 219, 76).

그러나 동정녀 마리아가 신앙의 길을 걸어야 했고, 신앙의 어두움을 이겨 나가야 했음을 이야기 한다. 에프렘은 두가지 점, 성탄과 부활에서 마리아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 선구자다. 우선 에프렘은 마리아가 성자의 요람에 있어서 누구보다도 가장 가까웠고, 마음으로도 신체적으로도 가장 친밀하였다는 사실을 지적한 첫번째 교부다. 두번째로 에프렘은 나름대로 복음의 ‘마리아라고 불리는 여인들’에 대해서 해설하면서 예수가 어머니 마리아에게 발현하신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 마리아가 부활의 영광의 기쁨을 누리기 이전에 십자가 고통에 깊이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에프렘으로 말미암아 동정녀-어머니의 마리아의 모습에 신앙인인 마리아의 모습이 첨가되고 있다.

 

2.2.1.5 까빠도치아의 교부들

 

1) 바실리오

바실리오는 마리아의 영원한 동정성에 대해서 ‘성탄강론’에서 오리게네스를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은 난해한 문제들을 해결한다. “여인”, “‧‧‧낳기까지 남자를 모르다”, “첫아들 ” 등.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신자들의 내밀한 인식(sensus fidelium)을 주장한다.

“마태오 1,25에서 마리아가 ’첫아들을 낳기까지 남자를 몰랐다’고 기록하고 있다. 성령의 도움으로 주님을 출산하는데 순결한 봉사를 하신후 마리아는 일반적이고 정상적인 결혼 생활을 거절하지 않으셨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신앙의 이론을 거스리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신자들은 하느님의 모친이 지상의 생활 중 어느 한 순간 동정임을 중지하였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우리는 이러한 증언들로 충분하다고 믿는다”(성탄 강론, 5).

이와 같이 바실리오는 마리아의 영원한 동정성이 하느님의 구원계획 안에 필수 불가결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단지 신자들의 감지하는 바를 따라서, 성령이 이들을 통해 진리를 표현하고 있다고 간주하는 바, 마리아의 영원한 동정성이 옹호되고 있다.

 

2) 나지안즈의 그레고리오

그레고리오는 세가지 점, 즉 1. 그리스도 안에는 본성들의 위격적 결합과 이로 말미암아 결과하는 마리아의 신적 모성 2. 말씀이 수용한 인간 본성의 온전성과 여기에 결과하는 마리아의 진정하고 충만한 모성 3. 탄생 예고에 있어서 동정녀의 “prepurificazione”(先-淨化)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첫번쩨 문제에 있어서 칼체돈 공의회의 정식에 앞서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는 예수의 인성을 신성으로부터 분리하지 않는다. 오히려 한분이시요, 동일하신 분임을 고백한다. 처음엔 인간이 아니셨고 하느님이셨으며, 독생성자이셨다‧‧‧ 그러나 마침내 역시 인간이 되셨다.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인간을 수용하셨다. 신성안에서는 수난 받으실 수 없는 분이시지만 육을 따라서 수난 받을 수 있는 분이 되셨다. 그분은 지상의 존재이시지만 역시 천상적 존재이시다”(PG 37.177).

간략하지만 모든 그리스도론적 내용을 함축하고 있다. 그리고 두 본성의 “속성(관용구)의 교환”(communicatio idiomatum)을 보여주고 있다. 두 가지 본성이며 두 가지 위격이 아니다. 한 분이신 성자. 그러나 두 가지 탄생이 있다. 한 번은 성부로부터의 영원한 탄생, 또 한 번은 시간 안에서 어머니로부터의 탄생. 그러므로 그 어머니는 진정으로 Theotokos임을 주장한다. “만일 거룩하신 마리아가 천주의 모친이라는 것을 믿지 않는 다면 그는 신성으로부터 제외된다”고 교의적 단언을 하고 있다. 그레고리오에 의하면 신적 모성이란 신성에 참여하기 위해 필수 불가결한 수단이라는 것을 제시한다.

두번째로 그레고리오는 Apollinarius를 거슬러 말씀이 수용한 인간 본성의 온전성을 우리의 구원과 연결시키고 있다.

“하느님이시며 또한 동시에 인간이신 그분이 바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정결한 동정녀로부터 잉태되셨고 태어나셨다”(PG 37,467).

세번째로 탄생예고 있어서 마리아의 선-정화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마리아를 감싸는 성령의 내리심은 말씀에게 절대적으로 무죄한 육신을 선사할 수 있기 위한 것이라는 점이다.

“그분은 온전히 사람이 되셨다. 죄를 제외하고는 성령으로부터 영혼과 육신을 정화하게 된 동정녀로부터 잉태되셨다”(PG 36, 325).

“그분은 인간적인 씨에 의해서 사람이 되신 것이 아니다. 물론 한 인간 육체로부터 사람이 되셨다. 그 인간 육체는 먼저 성령에 의해서 거룩하게 된, 존경하올 동정녀-어머니의 것이다”(PG 37,462).

그레고리오에 의해서 마리아는 인간의 성성의 절정에 이르고 있음을 보게된다.

 

3) 니싸의 그레고리오

‘신비가’로 불리는 니싸의 그레고리오는 Apollinarius의 가장 강한 상대자였다. Apollinarius는 말씀이 육체와 더불어 공존함을 강조하였다. 이 이단에 따르면 육화란 말씀이 인간과 결합한 것이 아니라, 말씀이 인간의 육체와 결합했다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두가지 본성을 지닌 것이 아니라 한가지 하느님이시요 말씀이신 본성만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니싸의 그레고리오는 아리우스를 반대하여 그리스도의 동정적 탄생과 말씀의 영원한 탄생을 유비적으로 대조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마리아로부터 태어나시면서 마리아의 육체적 동정성을 다치게 하지 않았다. 마리아는 출산의 고통없이 예수를 낳으셨다. 영원으로부터 성부께로부터 말씀이 탄생하시면서 출산자가 어떤 수난도 겪지 않으셨다. 출산자의 어떤 상황도 그 출산으로 말미암아 변화하지 않았다”(PG 45, 628).

동정출산에 대한 이런 이론은 정통파나 아리우스파나 모두 받아들였음을 보여준다.

니싸의 그레고리오는 외경, 특히 야고보 복음을 자주 인용하고 있다. 그의 영향으로 천주의 어머니를 찬양하는 증명서로 외경을 남용하게 되었다.

 

2.2.1.6 살라미나의 에페파니오

 

에페파니오는 마리아의 영원한 동정성, 마리아 공경, 하느님의 모친의 죽음(dormizione)에 관한 귀중한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반-마리아주의자들을 거스려 마리아의 영원한 동정성을 증명하고자 성서와 전통과 논리적 방법을 동원하고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sensus fidelium”이다. 신자들은 영적 본능을 따라서 내밀한 감수성을 표현한다는 것이다. 신자들은 마리아의 고유한 이름으로 거의 본능적으로 ‘동정녀’라는 칭호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칭호가 그분의 인격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고 본다.

“그 누가 거룩하신 마리아를 칭할 때 그분의 고유한 이름인 ‘동정녀’라는 칭호없이 감히 부르고 있는가? 모든 의로운 사람들에게 적합한 이름이 부여되고 있다. 아브라함에게는 ‘하느님의 친구’, 야곱에게는 ‘이스라엘’(하느님과 겨룬 자)이라는 별칭이 주어졌다. 그처럼 거룩하신 마리아에게는 ‘동정녀’라는 칭호가 주여졌으며 이 칭호는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이다”(PG 42,705).

그러면서 에페파니오는 한편으로 당시에 마리아를 하느님 흠숭와 혼동하고 있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하느님께 드리는 예배와 마리아를 비롯한 성인들에게 드리는 공경을 구별하도록 촉구하고 있다.

“마리아의 육체는 분명히 거룩한 것이다. 그러나 그분은 하느님이 아니다. ‧‧‧ 마리아에게는 영광을 드린다. 그러나 성부와 성자, 성신 하느님에게는 흠숭을 드린다. 아무도 마리아를 흠숭하지는 않는다”(PG 42,745).

마리아의 지상 생활의 마지막에 대해서 아무도 동정녀가 지상에서 천상으로 옮겨 가셨는지, 돌아가셨는지 또 자연적인 죽음을 맞이하셨는지 변사하셨는지에 대해서 모른다는 것을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다.

“만일 거룩하신 동정녀께서 자연적인 죽음을 맞이하셨고 또 묻히셨다면 그분의 잠드심은 그분의 마지막 정결하심, 그분의 동정성의 화관과 더불어 공경받을 만한 것이다. 만일 그분이 살해되셨다면, ‘당신의 마음이 칼에 의해 꿰둟릴 것이다’(루가 2,32)라고 쓰여진 것처럼 그분의 영광은 순교자들의 영광안에서 찿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분의 복되신 육체는 세상의 빛으로 현양되었다. 그러나 죽지 않고 생명을 보존할 가능성도 있다. 하느님은 그분이 원하시는 바를 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떻든 아무도 그분의 마지막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있다” (PG 42, 716).

에피파니오로부터 처음으로 마리아 공경문제가 생겨났다. 그는 동정녀의 유아시절에 관한 외경을 받아들이고 있다. 마리아의 승천 역시 외경에 의존하고 있다.

 

2.2.1.7 요한 금구

 

요한 금구(+ 407)는 안티오키아 학파에 속하며 콘스탄티노플 주교였으며 최고의 그리이스 강론가로 꼽히고 있다. 그는 마리아의 동정성과 그분의 모성에 대해서 교회의 신앙을 옹호하였다. 그는 한번도 Theotokos라는 칭호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는 색다른 방법으로 마리아의 윤리적-영성적 모습을, 그분의 성성를 설교하고 있다. 안티오키아 학파의 방법에 성실성을 보이면서 성서에 근거해서 해석하고 있다. 그는 특별히 예수의 공생활과 연관된 부분을 다루고 있다. 가나의 혼인잔치, 예수의 모친과 형제들의 참여, 가파르나움, 무명 여인의 외침 등. 여기서 마리아는 지나치게 인간적인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 영성적 측면이 약하게 나타난다. 한낱 어머니의 모습을 보이고 있고, 이것이 당신의 아들에 대하여 어머니로서의 강한 권리를 드러내기도 한다. 하지만 아들에 대해 분명하고 완벽한 이해를 하지 못한 것을 드러낸다. 예수는 이런 결점으로부터 면제되는 특권을 원하지 않으면서 차츰 차츰 당신의 제자, 당신을 따르는 사람이 되도록 인도하고 있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요한 금구의 이러한 마리아에 대한 강론은 마리아를 우리와 다르지 않게 신앙의 길을 걸었던 분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당시에는 동정녀가 불완전함으로부터 어떤 특헤를 지니고 있었다는 사상을 지니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요한 금구는 마리아가 피조물로써, 그리스도의 제자로써, 자신의 육체적 충동을 일상 생활에서 극복해나가는 노력 속에서 마리아의 내적 위대성을 더욱 돋보이게 하고 있다.

 

2.2.1.8 가발라의 세베리아노

 

안티오키아 학파의 일원으로 요한 금구의 친구이며 동시에 경쟁자였다. 그는 세가지 측면에서 마리아론을 전개한다.

 

1) 마리아와 여인

세베리아노는 마리아를 여성의 관점에서 ‘고통 속에서 출산하게 되는 여인’(창세 3,16) 에와와 관련해서 마리아로부터 여인들이 자유롭게 되었음을 이야기 한다.

“여성이 단죄된 상태로 계속 머물 것인가? 그리스도가 오심으로써 그 매듭이 풀렸다. 여성을 보호하기 위해 그분은 당신의 출산자와 만나게 되었고, 그 거룩한 동정녀는 동정녀들 가운데 첫 자리를 차지한다. 그리고 고통과 신음을 해소하였다”(PG 56,497).

천사가 마리아에게 예고한 기쁨은 첫번째 여인과 그 뒤를 따르는 모든 여인이 하느님께 진 빚과 그로 말미암아 겪는 고통에서 해방시키는 보상이었다고 말한다.

 

2) 천상에 계시는 마리아에 대해서 세베리아노는 그 첫번째 증인인 셈이다. 마니핏캇을 해설하면서, ‘모두가 나를 복되다 일컬으리라’는 귀절에서의 행복은 마리아가 기쁜 마음으로 날마다의 생활에서 성취하였다고 본다.

 

3) 신자들에게 호의를 베푸시는 천상에 계신 마리아의 중재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중재자는 마리아만이 아니라 사도들과 치명자들도 포함된다. 그러나 그 누구보다도 마리아가 중재자들 가운데 첫번째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분은 하느님의 보호의 도구라고 주장한다.

“하느님의 보호의 도구로서 데보라도 있고, 야엘도 있다. 우리에게는 거룩한 동정녀이며 천주의 모친이신 마리아가 우리의 중재자로 계신다. 만일 우리에게 승리를 가져다 주는 한 여인이 있다고 한다면 그분은 진리의 원수를 부끄럽게 할 그리스도의 모친이다”( PG 56,409-410).

세베리아노는 마리아와 사도들과 순교자들에게 신뢰할 것을 촉구한다. 먼저 그 덕행을 본받기를 권고하고 다음엔 그들에게 중재를 간청하도록 권한다. 이것이 천상을 순조롭게 얻기 위한 전제조건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마리아에 대한 첫번째 자세는 바로 자녀로서의 신심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2.2.1.9 알렉산드리아의 치릴로

 

치릴로(+ 444)는 에페소 공의회와 긴밀한 관련을 지니고 있다. 특히 네스토리오(451)의 그리스도론적 입장과 충돌하는 가운데 마리아의 신적모성을 주장한다.

네스토리오는 안티오키아의 수도자였으나 콘스탄티노플 주교로 선출되자 그리스도에게는 두가지 본성과 두가지 위격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마리아를 Theotokos로 부를 수없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하였다. 마리아는 단지 anthrotokos, 즉 하느님의 말씀과 일치한 인간 예수의 어머니일 뿐이라는 것이다.

“마리아은 하느님의 어머니인가? 아니면 한 인간의 어머니인가? 하느님은 어머니를 지닐 수 없다. 마리아는 하느님을 낳지 않았다. 사실상 육으로부터 낳음을 받은 것은 육이다. 창조물은 창조자를 낳지 못한다. 단지 신성의 도구인 한 인간일 뿐이다”(ACO I, V,30).

“거룩한 성서는 주님의 구원 경륜에 대해서 말할 때, 탄생과 수난을 그리스도의 신성에서가 아니라 인성에 관한 것으로 본다. 따라서 정확한 용어는 천주의 모친(Theotokos)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모친(Christotokos)이다”.

콘스탄티노플의 네스토리오의 설교는 알렉산드리아에서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알렉산드리아의 주교였던 치릴로는 즉시 네스토리오를 반대하여 논쟁을 벌였다. 치릴로의 논쟁은 에페소 공의회의 기초가 되었다. 치릴로는 니체아 신경을 그 교의적 근거로 네세운다.

네스토리오는 두가지 구별되는 그리고 혼동되지 않는 본성을 주장한다. 그것은 말씀이 인간적 본성과 인격적 일치를 이루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육화한 말씀은 역사의 그리스도안의 신비한 결합에 의해 태어나고, 죽고, 부활한다. 말씀과 인간은 서로 결합되어 있으면서도 구별되어 있다. 즉 신성과 인간성 두가지 본성이 구별된 채로 결합되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속성의 교환을 부인한다.

이에 대한 치릴로의 편지는 다음과 같다.

“거룩하고 위대한 니체아 공의회는 독생성자께서 성부로부터 그 본성을 따라서 태어나셨고, 참 하느님으로부터 태어나신 참 하느님이심을 ‧‧‧ 그리고 강림하셔서 육화하시고, 인간이 되시고, 수난을 받으시고, 사흘 후에 다시 일어나시어 하늘로 되돌아 가셨다고 선언하였다. 그와같이 그분은 시간 이전에 계셨고, 성부로부터 낳음을 받으셨으며, 우리는 또 그분이 육을 따라서 여인으로부터 태어나셨다는 것을 고백한다. 우리가 어디서나 증언하는 이 신앙의 거룩한 이론은 거룩한 교부들이 생각하셨던 바다. 그분들은 거룩한 동정녀를 ‘Theotokos’라고 부르는 것에 조금도 의혹이 없으셨다. 그것은 거룩한 동정녀로부터 말씀의 본성 또는 그분의 신성이 시작되었다는 것이 아니고 그분으로부터 거룩한 육체를 받고 태어나셨다는 것이며, 이성적 영혼을 취하셨으며, 이 육체에 위격을 따라서 말씀이 일치하셨다는 것을 말한다“(ACO I, 1, 25-28).

치릴로와 에페소 공의회는 육화하신 말씀 안에 두가지 본성의 상이성, 두가지 본성의 말씀의 위격 안에서의 위격적 결합, 상용귀의 교화, 마리아의 진정한 신적 모성을 언급하고 있다. 물론 마리아의 모성의 기능이 성자의 신성의 기원이라는 것이 아니다. 예수가 참으로 마리아의 아들이며, 육을 따라서 마리아로부터 태어났으며, 태초에 성부로부터 태어나셨으며, 성부의 유일한 성자 그분이라는 것이다.

치릴로의 것으로 보이는 설교 안에서 마리아의 신적 모성이 강조되고 동정녀 마리아는 신비로운 구원 계획에서 중심에 자리잡고 있다.

“천주의 모친 마리아여, 당신 때문에 삼위가 거룩하게 되셨으며, 당신 때문에 온 땅 위에서 십자가가 영예롭게 되고, 찬미받게 되었으며, 당신 때문에 하늘이 찬미받고, 당신 때문에 천사들과 대천사들이 기뻐하며, 당신 때문에 악마들이 추방되었고, 당신 때문에 유혹하는 마귀들이 하늘로부터 떨어졌으며, 당신 때문에 타락했던 인간이 하늘로 들어 올려졌고, 당신 때문에 거룩한 세례가 있고, 당신 때문에 이 땅위에 교회가 세워졌고, 당신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회개하게 되었으며, 당신 때문에 예언자들이 예언을 하고, 당신 때문에 사도들이 백성들에게 구원을 선포하고 당신 때문에 죽은 자들이 다시 일어나나이다”(ACO I, 1,2 102-104).

신적 모성을 지녔음을 찬양하면서도 마리아에게 의혹의 그늘이 있음을 보았다. 시메온에 의해 예언된 칼은 치릴로에게 있어서 신앙의 의혹, 즉 의혹의 칼로 이해되었다. 또 치릴로는 여인이 남성보다 약한 것으로 이해하면서 주님이 수난을 받을 때 마리아가 사도들보다 더 강한 상태였다고 보지 않고 있다.

 

2.2.1.10 5세기경의 동방작가들의 강론

 

에페소와 칼체돈 공의회를 중심으로 성행했던 5세기경의 희랍교회의 강론들은 마리아 신심과 이론에 있어서 중요한 장을 이룬다. 일련의 무명의 강론들이 당시에 서로 엇갈리는 주제들을 드러내 준다. 네스토리오를 반대하는 입장에는 알렉산드리아의 치릴로 이외에도, Theodoto di Ancira(+ 446), Eschio di Gerusalemme(+ 450), Crisippo di Gerusalemme(+ 479), Basilio di Selucia (+ 458), Antipatro di Bostra (+ 457), Proclo di Constantinopoli(+ 446)등이 있다.

이 중에서도 마리아의 강론가로서 Proclo를 꼽는다. 이러한 강론들은 그리스도의 성탄이나 성탄시기중 천주의 모친 대축일, 또는 예수의 성전 봉헌 축일에 행해졌던 강론들이다.

이 강론들은 교의적이거나 또는 구원론적 구성을 따르기도 하고, 예수의 유아시절의 복음에 관한 성서적 구성을 따르기도 한다. 이런 자료들로부터 새로운 점이 있다면 세가지 점을 들 수 있다.

① 우선 칭호나 이미지등을 통해서 마리아를 그리고 있다.

“모든 지각 있는 정신은 천사들의 으뜸이었던 가브리엘 천사를 모방하여 천주의 모친이신 동정녀에게 올바른 이성으로써 인사를 하고 있다. ‘기뻐하십시요’라든가, 또는 ‘주님께서 당신과 함께 계십니다’라든가 하며 인사를 한다. 그들은 ‘빛의 어머니’라고 부르기도 하고, ‘생명의 별’, ‘하느님의 옥좌’, ‘천상의 대성전’, ‘씨뿌려진 비옥한 정원’, ‘포도가 잘 맺어있는 포도넝쿨’, ‘순결한 비들기’, ‘보석상자’, ‘귀한 진주가 가득한 보물선’, ‘보석’, ‘심지 없이 홀로 타는 등불’, ‘노아의 것 보다 크고 멋진 방주’라고도 부른다 ‧‧‧”(Eschio의 강론에서. PG 93, 1461).

성서로부터 빌려온 이미지 가운데 ‘불타는 가심덤불’ 역시 마리아에게 적용된다. 모성으로 말미암아 그 때문에도 손상되지 않은 동정성을 상징하기 위한 이미지였다. 그와 비슷하게 ‘닫혀진 정원’, ‘봉해둔 샘’, ‘성전’, ‘방주’, ‘금촛대’등이 사용되었다. 이러한 비잔틴식 전례에서부터 시작된 칭호와 이미지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성모호칭기도 참조).

② 마리아의 동정 출산에 관해서 당시의 강론안에서 묘사가 풍부하였다. 거의 모든 텍스트가 주장하는 것은 아기가 태어났는데도 불구하고 모태에 어떤 손상을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특히 에제키엘 44,1-2을 인용하고 있다. “이 문은 잠가 두어야 한다. 이 문은 열 수 없다. 이 문으로 이스라엘의 하느님 나 야훼가 들어왔기 때문에, 아무도 이 문으로 들어오지 못한다. 그러므로 잠가 두어야 한다.” 또 주님이 만찬의 다락방문을 잠겨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통과하신 것을 비유로 들기도 한다. 성자 그리스도는 어머니의 동정성을 강탈하지 않으신채 잉태되시고 탄생하셨다는 것이다.

“인간으로서 출산하셨다. 그러나 말씀으로서 어머니의 동정성을 보존하셨다. 우리들의 말씀으로서 정신을 파괴하지 않고 출산되었다. 그처럼 하느님의 말씀의 실체는 동정성을 파괴하지 않고 받아들여졌다. 만일 우리처럼 태어나셨더라면 우리와 같은 단순한 인간이셨을 것이다. 그런데 어머니의 동정성을 보존하셨다. 그래서 그분이 하느님이심이 모두에게 분명해진다”(PG 77,1349).

③ 순교자들이나 사도들보다 우선하는 천주의 모친 마리아의 교회안에서의 위치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천상적 중재의 능력과 영예를 강조한다. 이때까지 교회안에서 첫번째 서열은 사도들과 순교자들이었다. 그러나 마리아가 첫자리에 들어선다. 왜냐하면 천주의 모친이기 때문이다.

아리아니즘에서 모든 피조물에게 ‘종’, 또는 ‘여종’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창조된 것과 구별하려는 의도였다. 이런 방식에서 사도들, 순교자들, 수도자들, 심지어 천사들 역시도 ‘종’이었다. 마리아도 창조된 인간으로서 ‘여종’이다. 그러나 특별하게 ‘천주이 모친’이 되신다. 다른 창조물과 다르게 친밀한 일치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이 세상 어느 것도 천주의 모친과 같은 존재는 없다”(PG 65, 717). 셀류치아의 바실리오 역시 마리아의 탁월한 중재 능력을 강조한다. 마리아는 마치 태양이 별들보다 더 광채를 띠는 것처럼 모든 순교자들보다 더욱 빛나는 존재라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해서 마리아에 대한 신심이 더욱 발전하게 되었다.

이밖에도 4-5세기에 많은 그리스도교 작가들이 마리아의 지속적 동정성에 대해서, 신적 모성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2.2.2 서방교부들

 

4-5세기 서방교회는 동방교회처럼 마리아에 관한 이론 전개가 활발하지 못했다. 서방교회는 나름대로 라틴 문화권적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예컨대 인권, 윤리 등의 인간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서방교부들은 동방교부들의 전통 속에서 마리아의 인격에 관해 윤리적 모습을 교정하는데 주의를 기울였다. 예를들면 동방교부들은 마리아의 결점, 신앙의 어두움, 불완전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어렵게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서방교회는 적어도 암브로시오 성인으로부터 시작하여 그 이후 교부들에게서 그런 생각을 찿아 보기가 어렵다. 서방교부들은 동방교회에서 오늘날까지 받아들이고 있지 않는 새로운 주제들을 다루기 시작하였다.

아담으로부터 시작해서 모든 인간들에게 전해져 오는 원죄에 대한 이론이다. 마리아가 죄에 물들지 않았다는 주장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2.2.2.1 마리오 비토리노와 힐라리오

 

1) 마리오 비토리노(+ 362)는 성자의 육화의 역사성, 실재성을 강조하면서 아리우스와의 논쟁점을 다시 거론하고 있다. 성자는 실제로, 역사적으로 마리아에게 수용되었다는 것이다.

“누가 첫아들인가? 성자다. 어떤 성자인가? 마리아로부터 탄생한 성자다. 어떤 성자가 마리아로부터 탄생되었는가? 모든 창조물의 첫번째이신 분(골로 1,15)이다. 누가 모든 만물의 첫번째이신 아들인가? 하느님의 모상을 지니신 그분(골로 1,15)이다. 사실상 모든 만물의 첫번째이신 그분이 하느님의 모상을 지닌다는 것을 필수적이다. 이러한 모상은 Logos이다. 로고스는 성자요, 바로 마리아로부터 태어나신 그 분이다”(PL 8,1067).

여기서 성자, 창조물의 첫번째 아들, 하느님의 모상, 로고스가 바로 마리아의 아들 예수와 동일한 인물이라는 도식을 본다.

 

2) 힐라리오(+ 367)는 한 분이신 성자의 위격적 동일성을 강조하는 한편 두 가지 본성, 즉 신성과 인성의 극단적 상이성을 강조한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골로 1,15)이 인간의 비천함을 거부하지 않으셨으며, 잉태, 출산, 갓난아이의 울음, 요람등의 인간 본성의 모든 비천함을 받아들이셨음을 이야기 하고 이것은 하느님의 사랑으로 수락하신 신비라는 것을 강조한다.

“이러한 하느님의 처신을 두고 아무도 합당하다, 합당하지 못하다라고 시비를 걸 수 없다. 독생성자께서 거룩한 동정녀의 태중을 통해서 보잘 것 없는 인간의 육체를 형상으로 취하셨으며 또 한편 형언할 수 없는 기원을 지니고, 하느님으로부터 태어나셨다. 모든 것이 그분을 위하여, 그분 안에 있는데, 그 모든 것을 지니신 분이 인간의 출생의 법칙을 따라 이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으며, 그분의 목소리에 대천사들, 천사들도 두려워 떨고, 그분이 세상의 모든 것을 장악하고 계시는 분으로서 아기가 되어 울음을 터뜨리셨으며, 보이지도 않고 이해될 수도 없으며, 눈으로도, 귀로도 감지될 수도 없는 분이 강보에 싸여 계셨다”(PL 10, 66-67 참조).

무엇보다도 말씀의 이러한 실제적인 비천함은 우리들 가운데 드러나는 신적인 방법과는 반대되는 것이다. 인간과 하느님 그 사이에 마리아가 자리를 차지 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힐라리오는 마리아가 탄생예고 때 성화, 또는 정화되었다는 동방교회의 사상에 의존하고 있다.

“성령께서 높은 곳으로부터 오시어 동정녀의 자궁을 거룩하게 하셨으며 성령께서 원하시는 곳에 임하시는 까닭에 원하시는 인간의 육의 본성과 결합하셨다. 전혀 달랐던 인간적인 것을 고유한 능력과 더불어 수용하셨다. 아무 것도 마리아의 인간 육체의 연약성으로 해서 조화되는 것이 방해가 되지 않도록 높으신 분의 권능이 동정녀를 감싸고 그의 약함을 강하게 하시면서 신적 권능의 그 감싸심은 성령으로 하여금 잉태하도록 동정녀의 육체를 신선하게 거룩하게 원기를 주었던 것이다”(PL 10, 67-68).

이처럼 힐라리오는 한 출산자와 그로부터 태어날 아기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한 동정녀의 아름다움과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위대함을 서로 연결시키고 있다.

 

2.2.2.2 밀라노의 암브로시오

 

암브로시오(+ 397)를 일컬어 ‘마리아론의 라틴교부’라고 한다. 그는 많은 저서를 썼지만 마리아에 대한 저서를 따로 쓰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의 저술 여기 저기서 마리아에 대한 언급을 자주 찿아 볼 수 있다. 그는 구세사적 신비안에서 마리아가 모든 동정녀, 모든 어머니, 모든 과부, 그리고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첫번재 자리를 차지하는 모델로 소개한다.

 

1) 교의신학적 측면

암브로시오는 이제 거의 기념비적 개념이 되고 있는 동정잉태, 신적 모성이라는 주제를 에와-마리아라는 대비적 관게에서 폭넓게 다룬다. 동정잉태를 논할 때, 암브로시오는 그 이후의 라틴 전통이 뒤따르는 새로운 차원이 되고 있는 바, 그리스도가 원죄로부터 물들 수 없다는 사실을 근거로 고려하고 있다는 점에서 독특성을 보인다.

“성령에 의해서 잉태되셨다. 그리고 동정녀로부터 태어 나셨다”. “혈육으로나 인간의 욕망으로가 아니라 성령으로부터 동정녀로부터 그분은 태어 나셨다”. 이런 언급은 신앙조항으로서만이 아니라, 여기서 오직 그리스도만이 세대를 통해 전해오는 원죄에 대해 예외적이라는 것, 다시 말해서 그분은 인간으로서의 시작은 하느님으로부터라는 것, 따라서 새로운 탄생이요, 새로운 아담으로서 새로운 질서의 원리라는 것이다. 이것은 그분이 인간이 되시면서도 죄를 제외하고 우리와 동일한 인간이셨다는 것을 위해서도, 또 홀로 거룩한 분이시여, 모든 이를 거룩하게 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위해서도 필요한 공리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주장한다.

 

2) 윤리적 - 영성적 측면

암브로시오는 마리아의 영원한 동정성을 옹호할 뿐만 아니라 마리아의 지속적 동정성을 그분의 영성적 위대함을 중심으로 해서 이해하고 있다. 암브로시오는 아타나시오를 비롯한 그리이스 교부들과 성서, 그리고 교도권의 가르침과 신자들의 감각을 통해서 하느님 친히 활동하심을 느끼고, 하느님 손수 활동하심에 영원한 동정성의 근거를 세운다.

“만일 영원하신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동정성을 주시고자 당신 스스로 동정녀로부터 태어나시길 원하셨다면 어떤 처녀가 어머니로서 선택되어야 할 것인가? 아마도 가장 완벽한 처녀가 아니었을까? 그 누가 하느님의 어머니보다 고귀한 자가 있겠는가? 그 누가 광채 그 자체이신 분으로부터 선택된 사람보다 찬란하겠는가?”(PL 16,208).

루가 복음에서 탄생 예고 때 소개되고 있는 그 ‘처녀’는 여느 ‘처녀’중의 하나인 어떤 ‘처녀’가 아니다. 그 ‘처녀’는 이사야 예언자에 의해서 예언된 ‘처녀’임을 강조한다.

“처녀들 가운데 처녀, 그녀의 내적 아름다움으로 해서 모든 처녀들 가운데 선택된 처녀다. 왜냐하면 그 처녀는 단지 육체적으로만 아니라 마음으로도 역시 처녀였기 때문이다”(PL 16,208).

이렇게 암브로시오는 마리아가 선택된 사실 자체에서 마리아의 내적 동정성, 아름다움을 이끌어내고 있다. 암브로시오는 마리아의 동정에 있어서 4가지 순간을 묘사하고 있다. ① 탄생 예고 이전에 ② 어머니 이면서 동시에 처녀였던 순간에 ③ 영원한 동정녀 ④ 십자가 아래 서 계시는 마리아.

 

① 탄생 예고 이전에 마리아의 동정

암브로시오는 마리아 안에서 모든 동정녀들이 원하는 것을 발견하고 있다. 1)처녀로서의 정숙함, 2)하느님 말씀에 대한 열정, 3)하느님 말씀에 대한 진지한 경청 자세, 4)마음의 겸손함, 5) 심사숙고하는 신중한 자세, 6)소박함, 복종, 지혜로운 처신, 금욕생활, 육체적으로 죽음, 가난한 이들을 향한 사랑, 무엇보다도 신적 배우자를 향한 불타는 열정을 마리아에게서 본다. 신적 배우자를 사랑하고, 그를 찿기 위해 노심초사 찿아다니고, 기쁘게 받아들이고, 그를 찿아 주는 방문객들을 기억하는 등의 모범을 마리아에게서 찿을 수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마리아의 동정적 모습에서 복음적 삼덕, 청빈, 정결, 순명의 형태가 분명하게 드러난다는 것이다.

② ‘어머니-처녀’라는 마리아의 이중적 역할은 그리스도교인들의 윤리적 영성적 생활에서 모범적인 덕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모든 덕 가운데 첫번째는 바로 신앙의 모범이라는 것이다. 마리아는 천사의 말씀에 어떤 의심도 없었다. 오히려 ‘그런 일이 어떻게 일어날 것인지’ 현명하게 물었다. 그 신비로운 잉태에 대해서 성서는 그 방법에 대해 말해주고 있지 않다. 이점에서 암브로시오는 오리게네스와 그밖의 동방교부들의 의견을 수정하고 있다. 즉 자카리아와 마리아에게 나타난 두 번의 천사 출현과 탄생예고를 비교하여 다루면서, “하느님의 독생성자를 출생하기 위해 믿지 못하는 자를 선택한다는 것은 옳은 일이 되지 못한다. ‧‧‧ 자카리아에게서 발생한 것처럼,믿지 못하였기 때문에 벙어리가 되는 벌을 받은 그처럼, 마리아는 그랬다면 성령의 내리심으로 마리아가 영광스럽게 되지 않았을 것이다”(PL 15, 1558).

신앙과 더불어 또 한가지 본받아야 할 모범은 그분의 겸손한 자세다. 하느님께 대한 겸양과 엘리사벳 방문에서 드러난 겸양이다. 주님의 잉태에 앞서서 보여주었던 이 겸손한 자세는 ‘마리아가 어머니로 선택’된 한가지 조건이라는 것이다. 어머니로 선택되었으면서도 그분은 전혀 오만함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한 겸손은 당신의 아들과 다르지 않았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이처럼 신적 모성은 온 생애를 당신의 성자를 완벽하게 따르는 마리아였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③ 암브로시오에게 더욱 매력적이었던 마리아론은 영원한 동정성이다. 영원한 동정성을 반대하는 자들을 거스려 성서로부터 모든 귀절들을 이끌어 내며 이론을 제시하고 있다. 요셉을 두고 “그렇게 의로운 사람이 주님의 어머니와 육체적인 관계를 맺으려는 행위를 어떻게 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한다. 또 마리아 편에서도 그럴 수는 없다는 것이다. “어떻게 동정녀들의 스승으로서 그녀가, 당신 태중에 하느님을 모셨던 그녀가, 그 이후에 한 인간과 육체적 관계를 맺을 있겠느냐?”고 반문한다. 무엇보다도 하느님 편에서 “주 예수께서 한 인간과 관계를 맺은, 오염된 사람을 어머니로 선택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렇게 오염된 사람을 어머니로 선택하셨더라면 그분의 천상적 궁전은 순진무구한 동정적 온전성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풍부한 은총을 주고 보다 광채가 빛나는 상급을 주려고 했다면 그분의 모친이 아니고서 누가 있겠느냐?”고 묻고 있다.

④ 특히 심리적 측면에서 내면 세계를 비추어 십자가 아래 서 계시는 마리아에 대해서 해설한다.

“모친 마리아는 십자가 아래 서 계셨다. 남자(제자)들은 모두 도주하였는데, 마리아는 대담하게 거기에 서 계셨다”(PL 16,318).

약한 여인으로서 남자들과 겨루어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잇다. 이것은 십자가에 못박히신 아들과 분리되지 않는 사랑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모친은 아드님의 상처를 가여운 눈으로 바라보셨다. 그로부터 세상의 구원이 올 것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다. 똑바로 서 계시는 모습은 예수의 고통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당신도 처형될 것에 대해 조금도 두려워 하지 않으셨다. 아들은 십자가에 달리셨고, 어머니는 박해자에게 내 맡겨져 있었다. 만일 아들과 함께 죽고자 하셨다면 그것은 그와 함께 다시 부활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이었다. 다시 살아나실 그분의 출생의 신비를 모르지 않았다. 모든 이들의 선을 위하여 아들의 죽음이 발생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그분의 죽음으로써 무언가 좋은 것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러한 심리적 묘사와 더불어 암브로시오는 그리이스 교부들이 말하고 있던 어둠의 칼, 신앙의 어두움을 제거하고 있다.

 

3) 교회론적 측면

암브로시오는 신앙의 동정성을 주시하면서 마리아와 교회, 또 마리아와 신자들의 사이의 관계를 정립하고자 시도하였다.

“우리의 모친(교회)은 남편이 없다. 그러나 한 배우자를 모시고 있다. 왜냐하면 신자들의 교회나 또 각 신자들의 영혼은 영원한 배우자로서 하느님의 말씀과 결합하고 있기 때문이다”(PL 16,208).

마리아와 교회의 두 표상을 처녀인 동시에 어머니로 묘사하고 있다.

“그의 결혼에 있어서 죄에 물듦이 없으며, 또 한편 풍성한 결실을 맺고 있는 가운데 ‧‧‧ 인간으로 말미암아서가 아니라 성령의 권능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생명을 준다. 고통속에서가 아니라 천사의 기쁨과 더불어 우리에게 생명을 준다.” “모든 영혼들 역시 하느님의 말씀을 잉태하고 또 낳는다. 육체적으로 오직 한분이신 그리스도의 모친이 있다면, 신앙에 의해 그리스도는 모두로부터 출산된다. 사실상 모든 영혼은 그 자신 안에 하느님의 말씀을 받는다”(PL 15, 1561-1562).

“만일 불행하게도 모든 영혼들이 마리아가 아니라면 성령으로부터 그리스도를 받고, 말씀을 출산하지 않는다면, 많은 영혼들이 그리스도를 잉태하기는 하지만 그리스도를 출산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PL 15, 1810).

결국 마리아는 교회를 위해서, 또 모든 신자들을 위해서 전형적인 모범이 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즉 그리스도를 잉태하고 마음안에 간직하고 출산하고 세상에 드러내야 하는 그들의 생활에 있어서 마리아가 모범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위하여 암브로시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들의 생활안에서 마리아의 삶이 연장되도록 초대하고 있다(참조: 훠꼴라레 운동의 정신).

“각자 안에 마리아의 영혼을 지니기를 원한다. 주님을 찬양하기 위해서, 각자 안에 마리아의 정신을 지니기를 원한다. 하느님을 찬미하기 위해서”(PL 15, 1561).

 

2.2.2.3 예로니모

 

예로니모(+ 419/420)는 <Elvidio를 거스려서 복되신 마리아의 지속적 동정성에 관하여>라는 저서를 썼다. 여기서 그는 구약과 신약을 병행 대조하면서 Elvidio의 이론을 반박한다.

“여인”, “배우자”, “동거하기 전에”, “‧‧‧때까지 남자를 몰랐다”, “첫아들”이라는 성서적 표현들이 논쟁의 문제점이 되었다. 더 오래된 이론의 쟁점은 “예수의 형제들”이라는 표현이었다. 히브리어와 성서를 잘 알았던 예로니모는 “형제들”이 “사촌”들임을 주장하고, 클로파의 아내 마리아가 예수의 어머니의 누이였을 것이라고 해석한다(요한 19,25).

요셉이 마리아를 아내로 맞이하려 했던 처음의 계획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예로니모에 의하면, 외경에 나타나는 것처럼 요셉이 늙은 홀아비는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요셉은 젊은이였으며, 그리스도의 잉태와 탄생에 있어서 육체적적 결합의 욕망으로부터 보호하고자 하느님의 능력이 작용하는 데 있어서 합당한 자였다. 마리아 때문에 자신도 동정을 선택하였던 사람이라고 말한다.

Elvidio를 거스려서 예로니모는, “당신은 마리아가 처녀로 남아 있지 않았다고 말한다. 나는 당신의 그 말에 대하여 요셉 역시도 마리아 때문에 동정을 지켰으며, 그러한 동정적 혼인이 동정으로서의 성자를 탄생케 했다고 확언한다”(PL 23, 214).

예로니모의 사상은 성서적이었다. 동정출산에 관해서도 에제키엘 44,2의 해석을 받아들이고 있다. 잠겨진 성전의 문을 부활 이후 예수가 만찬의 다락방으로 들어갈 수 있었던 잠겨진 문에 비유하면서 마리아의 동정성이 예수의 잉태와 탄생으로 손상되지 않았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특히 예로니모는 “마리아는 이 말씀을 간직하였다”는 루가 2,19을 인용하면서 마리아가 하느님의 말씀에 의해서 양육되었고, 그 말씀을 꾸준히 되새기면서 완벽한 그리스도의 제자였음을 강조한다. 마리아가 성자의 신비에 속하는 모든 것을 받아들일 내적 수용력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역사의 정점이요, 완성인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는 것이다. 마리아는 바로 살아 있는 히브리적 지혜의 표현이였으며, 이 지혜가 바로 그리스도교의 지혜가 되었다는 것이다.

 

2.2.2.4 아우구스티누스

 

아우구스티누스(+ 430)는 라틴교부 가운데 최고의 교부로 꼽힌다. 서방교회에 있어서 그는 마리아론에 관해서도 그 정점에 이르고 있다. 그의 마리아론을 요약하면, 그리스도의 신비 안의 마리아, 마리아의 신학적 모상과 복음적 모상, 마리아와 교회의 관계가 주제를 이루고 있다.

 

1) 그리스도의 신비안의 마리아

아우구스티누스 역시 구원역사 안에서 마리아가 그 중심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다. 이 신앙은 신자들에게 신경 안에서, 비신자들, 특히 그리스도교를 인정하는 자들에게는 이 신앙이 어리석은 것이 아니라라는 점에서, 또 마니케이즘안에서는 동정녀로부터 말씀의 진정한 육체가 출산되었다는 것을 옹호하는데서 찿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동정잉태에 관해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암브로시오보다도 더욱 더 마리아가 신앙의 모범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은총의 박사’로 불리는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모든 인간은 원죄를 물려 받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이 이세상에 태어나게 된 것은 욕망의 지배된 남‧녀의 성적관계를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오직 예외적인 한분이 있는데 그분은 바로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의 탄생에는 어떤 욕정도 없었고, 바로 성령의 중재로 성화되었기 때문이다. 또 한편 그분의 잉태는 사랑의 열정과 신앙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 처녀의 태중안에 발생한 그분의 거룩한 잉태는 육의 욕정으로서가 아니라, 사랑의 열정과 신앙의 분발로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 때문에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셨다’고 고백되고 있는 것이다”(PL 38, 1069).

‘위로부터의 그리스도론’과 ‘마리아의 신적 모성’에 대해서 동방은 열띤 논쟁을 벌였다. 이에 대해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여러 페이지에 걸쳐 유일한 ‘말씀의 위격’의 원리를 따라서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다. 이 원리는 더욱 인간학적인 당시의 사상과 함께 교의신학을 심화시켰다. 창조하시는 말씀이 창조된 마리아로부터, 동정녀로부터 인간이 지니는 모든 가련함을 받아들이고 있는 겸손을 강조한다.

“본성의 혼동을 통해서가 아니라, 위격안의 결합으로써 인간이셨던 그분은 바로 하느님이시다. 사실상, ‘신앙의 규범’에서 말하고 있듯이 우리는 ‘동정녀 마리아로부터 태어나셨다는 하느님의 아들’을 믿는다. 하느님의 아들이 아니고 인간의 아들이 동정녀 마리아로부터 태어나셨는가? 그리스도 신자들 가운데 누가 그 여인으로부터 인간의 아들이 태어나셨다고 믿고 있는가? 무엇보다도 하느님이 인간이 되셨고, 그처럼 인간이 하느님이 되셨던 것이다”(PL 38,999).

또 Elvidio를 거스려 마리아의 출산이전, 출산시, 출산 이후의 동정성을 정식화 하고 있다.

“그 누가 이 세상에서 전혀 새롭고 유일회적인 이 일을 이해할 수 있을까? 그처럼 믿지 못할 일이 믿을 수 있는 것이 되었다. 온 세상이 한 처녀가 아이를 잉태하고 출산하면서도 여전히 처녀로 남아 있다는 믿을 수 없는 사실이 믿을 수 있는 사실이 되었다”(Pl 38,1008).

“잉태함에 있어서 동정이었으며, 출산 함에 있어서 동정이었으며, 영원한 동정이었다”(PL 38, 999).

역시 에와-마리아의 대조가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해서 반복되고 있다.

“한 여인을 통하여 죽음, 또 한 여인을 통하여 생명이 들어왔다”(PL 38,1108).

 

2) 마리아에 대한 신학적, 복음적 소묘 역시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독창적이다.

 

① 주님의 모친에 관한 신학적 소묘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마리아는 ‘온전하게 거룩하신 분’으로 그려지고 있다. 마리아가 모든 죄로부터 면제되고 있다는 소극적인 성성은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되었다는 그분의 신적 모성에 기인한다.

“거룩한 동정녀 마리아는, 주님의 영예를 위하여, 죄에 있어서 원죄로부터 면제되었다는 것에 의문을 제기하고 싶지 않다. 왜냐하면 그만큼 은총의 풍성함이 모든 면에 있어서 죄를 이겨낼 수 있기 때문이다”(PL 44, 267).

보다 적극적인 성성은 그리스도교의 본질적인 덕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 즉 신앙, 순명, 사랑, 겸손이 그것이다. 이러한 마리아의 온전한 성성에 대해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내적으로 확신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pelagio와의 논쟁에서 마리아가 원죄의 세력안에, 악마의 세력안에 내맡겨져 있다는 것을 거부하고 있다. 물론 원죄가 세세대대로 전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또 마리아의 영적 아름다움이 부식될 수 있다는 것도 부정하지 않는다.

“만일 새롭게 태어나는 은총의 탄생으로부터 해소된 출산과 같은 것이 아니라면, 마리아를 그녀의 출산으로 해서 악마의 세력안에 맡길 수 없다”(Pl 45, 1417-1418).

과연 아우구스티누스가 마리아를 원죄로부터 물들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하고 있었는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그의 자료들 안에서 그 사실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고 있다.

② 마리아에 관한 복음적 소묘

아우구스티누스는 마리아안에서 허원되고 있는 동정성을 발견한다. 그 허원은 자유롭고 기쁨에 찬 자의적인 것으로 하느님께 근거를 두고 있다.

“거룩한 허원을 의식적으로 발하고 있는 것을 ‘그것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는 질문에서 찿아 볼 수 있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전능하심에 조금도 의심없이 그 방법에 대해 안내를 받고자 질문하고 있다. 천사가 알고 있고 있었으며, 그것을 알려주는 것을 거부하지 않았다. 그는 그 방법을 경청하였다. ‘너의 동정성은 보존 될 것이다. 너는 오직 진실만을 믿었다. 너는 동정을 간직하였고 그 완성을 이룰 것이다. 너희 신앙이 완성되었기 때문에 너의 동정성 역시 온전함을 지닐 것이다’”(PL 38, 1318-1319).

이스라엘과 세상은 아직 동정 생활에 대해서 모르고 있을 때, 마리아는 자유로은 허원의 능력으로 동정허원을 발함으로써 교회 안에서 동정의 시조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PL 40, 398).

처녀-어머니라는 도식으로서의 마리아의 모습은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서 마리아가 어머니인 동시에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특권적 도식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리스도의 어머니 마리아은 더욱더 그리스도의 제자임이 드러난다. 이 때문에 마리아는 복되다. 하느님의 말씀을 경청하였고, 그것을 보존하였으며, 태중에 육으로 보존한 것보다도 정신안에 진리를 보존하였다. 마리아의 마음 안에 그리스도-진리, 마리아의 육신안에 그리스도-육이 보존되었다. 태중에 모신 것보다도 정신안에 보존하고 있는 것이 더욱 고귀하다”(PL 46, 937-938).

“만일 육신 안에서보다도 마음안에 그리스도를 더욱 복된 방법으로 보존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마리아에게서 어머니로서의 혈족관계는 별 가치가 없다”(PL 40, 398).

이런 의미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성서 해석상의 어려움을 알고 있으면서도, 가파르나움에서 예수가 어머니와 그 형제들에게 대답한 장면으로부터 야기되는 문제를 극복하고 있다.

“누가 나의 어머니요, 나의 형제입니까?”(마태 12,46-50). 아우구스티누스는 성서 귀절로써가 아니라 하느님의 영원한 계획으로부터 이것을 설명한다.

“만일 그분을 두고 ’그리스도의 어머니‘라고 말할 수 있다면 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택된 마리아가 하느님의 뜻을 완성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신앙을 통하여 믿었고, 신앙을 통하여 잉태했고, 인간 가운데 구원이 그녀로부터 태어나도록 선택된 마리아가, 그리스도가 태어나기 이전에 그리스도에 의해 창조된 마리아가 하느님의 뜻을 이루지 않을 수 있었을까?”(PL 46, 937).

③ 마리아와 교회의 관계

교회와 관련해서 교회가 마리아보다 월등한 자리에 있음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마리아 역시 교회의 한 구성원이기 때문이다. 탁월한 구성원, 거룩한 구성원이지만 한 구성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회는 마리아를 포함한 모든 지체를 부분으로 하고 있는 하나의 신비체이기 때문이다.

또 마리아와 교회의 유사성을 다루고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또 그리스도의 배우자이다. 그리스도의 모든 처녀들은 정신안에서나 신앙과 희망과 사랑의 전체성을 통하여 그 지체가 된다. 또 교회는 그리스도의 모친이다. 육신에서가 아니라 영적 차원에 있어서. 왜냐하면 교회는 동정으로 존재하면서 그리스도의 지체들을 출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의 마음으로 백성들을 낳았기 때문이다.

이와같은 교회의 이미지는 육체 안에서 영신 안에서 마리아의 이미지에서 받고 있다. 마리아는 역시 육체 안에서 그리스도의 어머니요, 영신적인 의미에서 그 지체들의 어머니시다. 이처럼 마리아와 교회 사이의 관계를 깊이 명상하고 있다.

“그분의 어머니는 교회의 어머니시다. 왜냐하면 그분의 지체들을 낳으셨기 때문이다. 그분의 어머니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신심깊은 신자들의 어머니이시기도 하다. 마리아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셨다. 육체적으로 그리스도의 어머니시요, 영성적으로 자매요, 어머니이시다. ‧‧‧ 육체적인 면에서도 지체의 같은 머리의 어머니시다. 지체들인 우리들의 어머니이시다. 왜냐하면 신자들이 교회 안에서 탄생하는 데 있어서 당신의 사랑을 통하여 협력하셨기 때문이다”(PL 40, 399).

마리아 안에서 신앙으로부터 분출된 사랑은 지체들인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탄생에 있어서 성령을 작용케한다. 그리스도를 향한, 그리고 우리를 향한 마리아의 신앙과 사랑이 머리의 어머니, 그리고 지체인 우리들의 어머니가 되게 하신다는 것이다. 이처럼 마리아의 영적 모성이 교회안에까지 확장되고 적용되고 있는 것을 보게된다.

 

2.2.2.5 4-5세기의 서방 그리스도교 작가들

 

1) 베로나의 Zenone(+372)는 외경의 영향을 받아 마리아가 고통 없이 오히려 기쁨 가운데 출산하였다고 주장한다. “마리아는 세상의 창조주를 잉태하면서 임신의 수고로움을 알지 못했다. 출산함에 있어서도 고통없이, 오히려 기쁨중에 낳았다. 동정에 손상됨 없이 잉태하였고, 동정으로 출산하였으며, 출산 후에도 동정으로 남았다”(PL 11, 413-415).

 

2) Ambrosiaster(4세기 말)은 로마서 8,3을 해설하면서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잉태됨으로써 원죄로부터 깨끗하여졌다는 것을 강조한다. “성령으로부터 그리스도의 육체는 깨끗하여졌다. 왜냐하면 그는 죄를 짓기 이전의 아담의 육체 그안에서 태어나셨기 때문이다”(CSEL 81,1).

 

3) 토리노의 Massimo(+ 400)는 마리아의 동정적 풍요로움을 세례의 샘과 비유하고 있다. 또 마리아의 태중을 주님을 모신 ‘무덤’과 비유하기도 한다.

 

4) 아뀔레이아의 Cromazio(+ 407)는 성서 귀절로부터 마리아와 교회의 깊은 관계를 설명한다. “교회는 감실에 있어서 예수의 어머니셨던 마리아와 그의 형제들과 일치되어 있다. 만일 주님의 어머니, 그분의 형제들이 없다면 그곳에서 교회에 대해 말할 수 없게 된다”(SC 164, 134).

 

5) Gaudenzio di Brescia(+ 406)는 가나의 혼인잔치(요한 2,1-11)에서 마리아가 아들 예수에게 요구했던 포도주를 예수에게 수난과 영광의 순간으로 기다려졌던 “예수의 때”에 믿는 이들에게 주어질 성령으로 해석한다. 즉 마리아는 예수에게 성령을 청했다는 것이다(PL 20, 898-906 참조).

 

6) 교황 Leo Magnus(+461)는 Flavius에게 보내는 서간에서 칼체돈 공의회에 앞서서 그리스도론적-마리아론의 정식을 확립한다. “주님은 어머니로부터 수용한 것은 본성이지 결점이 아니다. 동정녀의 태중으로부터 출산된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우리가 본성안에 지니고 있는 것과 다른 어떤 것을 취한 것이어서 경이로운 것이 아니다. 그 분은 참으로 하느님이요, 동시에 참으로 인간이시다. 이 두 가지 본성은 결합에 어떤 거짓이 없다. 그 안에는 인간적인 것과 동시에 신적 고귀성이 결합되어있다. 각 본성은 결합되어 있으면서도 두 본성간의 친교안에서 본성 고유의 작용을 하고 있다. ‧‧‧ 육안에 탄생하셨다는 것은 인간 본성을 드러내며, 동정 출산은 신적 능력을 지시한다”(PL 54, 767).

Leo Magnus는 이미 암브로시오와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해 폭넓게 발전된 마리아와 교회의 관계를 표명하고 있다. 한 분의 어머니로부터의 머리와 지체의 출산을 언급하면서 그리스도와 교회의 신비한 일치를 보고 있다. “그리스도의 출생은 그리스도교 백성의 기원이다. 머리의 출생일은 지체의 출생일이다”(PL 54, 213).

온전한 그리스도를 출생하는 은총의 유일한 선물의 지속성을 언급하면서, “동정녀의 태중에 수용된 그 기원이신 그리스도를 세례의 샘에 둔다. 그 은총의 선물은 어머니에게 내렸던 것처럼 세례의 물에도 내리고 있다”(PL 54, 211).

 

2.2.3 마지막 시기의 교부들

 

이 시기는 칼체돈 공의회 이후로부터 8세기 마지막 교부들의 시대까지를 말한다. 이 시기에는 교부들이 다루었던 점들에 대해서 그간 강론안에서 행해진 자료들을 풍부하게 재인용하고 있다. 마리아의 신적 모성에 대해서는 제2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는 Canon으로 공식화하고 있다. 마리아의 영원한 동정성에 관해서는 649년 제1차 라테란 공의회에서 공식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거룩한 교부들에 의하면, 하느님의 거룩한 모친, 항상 동정이시고 무죄하신 마리아는 어떤 씨앗도 없이 잉태하셨으며, 아무런 손상됨이 없이 출산하셨으며 출산 이후에도 그 동정성을 보존하셨다고 한다. 이를 고백하지 않는 사람은 단죄될 지어다”(DS 422-432).

잉태 예고 이전의 마리아의 내적 아름다움과 거룩함에 대해서는 특히 동방교회에서 서서히 발전을 보였다. 마리아의 성화는 서서히 마리아가 그의 모친, 아이를 낳지 못하던 여인, 안나의 태중에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루어 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왜 마리아가 아이를 낳지 못하던 여인 안나로부터 태어났는가고 질문하면서 그것은 바로 보다 높은 수준, 신적인 수준에서 태어남을 드러내기 위함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본성이 은총에게 그 자리를 양보하였음을 드러낸다는 것이다(요한 금구의 마리아의 탄생에 관한 강론 참조: PG, 96, 663).

이러한 일련의 결과로 마리아의 인격에 주의를 기울이게 되었음을 보게 된다. 점차적으로 마리아의 인격으로부터 마리아의 동정적 신적 모성을 이끌어 내기도 하였다. 한편 전례적으로 마리아의 축일들이 정해지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마리아의 축일들은 외경에 근거하기도 하였다. 마리아의 탄생 축일, 성전 봉헌축일, 안나의 잉태축일, 축일중의 축일로 간주되는 마리아의 몽소승천축일등이다.

마리아의 어린 시절에 관하여 전해주는 외경이 각국어로 번역되었으며, 마리아에 대한 찬가등이 발전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마리아의 승천에 관한 이야기들은 적어도 4세기부터 거론되었다. 예루살렘과 그 주변의 성전의 벽화에 그런 그림들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외경의 영향을 받으면서 마리아를 예수의 생애, 즉 신앙의 여정을 유사한 것으로 묘사하면서, 마리아의 죽음과 영광스러운 승천 역시 예수의 죽음과 승천의 방식을 취하도록 하고 있다.

마리아의 지상 생애의 마지막에 대해서 승천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은 그의 동정적 육체가 잠시 지상에 맡겨졌다가 영광스럽게 하늘로 받아들여졌다는 주장과 어떤 지상 낙원에 받아 들여져 있으면서 미래에 있을 모든 이들의 부활을 기다리고 있다는 두 가지 주장으로 나타나고 있다.

동방교회에서는 마리아가 성자 그리스도와 모든 다른 지상의 자녀들 사이의 중재자의 모습으로 그려지기도 하였다. 이 당시 마리아의 중재기도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에게 기도하는 경향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이어서 라틴 교회도 동방교회와 같은 경향을 지니게 되었다.

Ildelfonso di Toledo의 경우 영적 은총을 구하기 위하여 마리아에게 더욱 기도를 드리고 있으며 심지어 자신을 마리아를 ‘여주인’으로 모시는 ‘종’으로 헌신하기도 한다. 이런 헌신이 비잔틴 전례에서 공식적으로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 콘스탄티노플에는 마리아를 위한 경당이 세워졌다. 아울러 마리아의 유품인 옷가지 등을 보존하면서 마리아의 품안에서의 안도감을 느끼기도 하였다. 아랍으로부터의 예기치 않은 해방안에서 그러한 신심은 더욱 고조되었다. 모두가 천상에 계신 마리아의 중재로 생각하였다. 천상에 계신 동정녀에 관한 명상들은 8세기 강론가들의 글에서 아주 폭넓게 발견된다.

콘스탄티노플의 Germano는 마리아에 대한 신심과 마리아에 대한 성화등을 확장시키는데 공헌한 사람이다. 마리아의 중재기도는 필수 불가결한 것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아무도 직접 하느님으로부터 은총을 받지 못한다. 육적인 것이나 영적인 것이나, 이 세상의 삶이나 미래의 삶, 즉 심판에 있어서도 마리아의 도움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요한 금구는 마리아를 모든 인류을 위한 항구한 축복으로 간주하였고, 마리아의 경당은 은총과 영적이거나 육적 치유의 샘이며, 그의 중재 기도는 여전히 모든 이에게 희망의 보장으로 간주되었다. 이렇게 해서 교부시대가 막을 내린다.

이처럼 마지막 교부시대에 동정 마리아에 대한 신심이 발전을 보이고 있다. 마리아는 모든 성인들 가운데 성인으로서, “영예스러운 여주인”으로서, “능력을 지닌 변호자”로서 그려지고 있다. 특히 동방 교회에서는 이 때부터 마리아에 대한 찬가, 기도등이 만들어져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2.2.4 교부들의 마리아론 요약

 

1) 교회 역사의 첫 8세기 동안 예수의 모친 마리아의 모습이 계발되었다. 초대 그리스도교가 유대인들이나 또는 이방인들과 벌였던 논쟁 중심에는 항상 그리스도론이 자리잡고 있다. 예수의 참 인간이심, 참 하느님이심이 강조되면서, 특히 참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간성을 위해 마리아로부터의 출생이 강조되고 있다. ‘천주의 모친’이란 칭호 역시 마리아론적 관점에서라기보다 그리스도론적 관점에 주장되었다. 마리아가 참 어머니라면 아들과 인격적인 관계가 성립되기 마련인데, 어떤 어머니이든 어머니라면 전인으로서의 어머니라는 점에서 ‘천주의 모친’의 칭호가 주어지는 배경을 볼 수 있다. 마리아의 무염시태, 원죄 없으심이 주장되는 배경 역시 ‘죄를 제외하고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되신’ 그리스도이심을 보존하자는 의도가 있음을 보게 된다.

 

2) 교부들의 마리아론은 성서적이다. 성서를 관찰하면서 에와-마리아를 대비관계로 설정하면서 마리아가 그리스도 사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성서로부터 논증하고 있다. 에와는 불순명과 그로 인하여 죽음을 가져온 자로, 마리아는 순명과 그로 인하여 생명을 가져 온자로 묘사되고 있다.

 

3) 교부들은 마리아의 신비에 관한한 외경에도 상당히 의존하고 있다. 마리아의 부모의 이름이나, 마리아의 동정 허원, 요셉과 마리아의 관계, 마리아의 승천 등의 신비를 외경에서 찿아내기도 한다.

 

4) 교부들은 논리적인 차원에서보다 신앙적 차원에서 마리아론을 전개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합리적인 사고방식에 익숙한 우리가 교부들의 저서를 이해하는 데 쉽지 않은 점들을 발견할 수 있다. 더우기 마리아에 관련된 신비적 사실은 논리로써 풀이 될 수 없는 부분도 없지 않다. 이들은 신앙의 차원에서 마리아의 동정성, 지속적 동정성, 마리아의 신적 모성을 받아들인 다음 이것을 논리적으로 설명하고자 성서나 이성적 방법을 시도하고 있다.

 

5) 마리아의 지속적인 동정성에 관해서 불분명한 태도를 보이는 교부들을 만나게 된다. 지나친 마리아의 동정성의 강조로 말미암아 예수의 비정상적인 출생과 불완전한 인간성을 초래할 위험 때문에 오리게네스, 떼르뚤리아노, 예로니모 등의 교부들에게서 출산시 동정성에 대해 주저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마리아의 원죄 없으심, 마지막 생애의 부분에 대해서도 미진한 점을 드러내고 있다. 이 시기에 가장 발전을 보인 것은 마리아의 신적 모성에 관한 부분이다(에페소 공의회의 Theotokos).

 

6) 동방교부들은 마리아가 여느 인간과 마찬가지로 인간으로서 불완전성을 지니는 것으로 이해했다. 신앙의 어두움, 출산의 고통을 겪어야 했다는 사실을 진술하고 있다. 이에 비해 서방교부들은 마리아를 모든 신앙과 사랑, 더 나아가 한 인간의 이상형으로 모델로 설정하면서 이러한 불완전함을 제거하고 있다.

 

7) 마리아와 교회의 긴밀한 관계가 인식되고 있다. 마리아가 교회와 밀접한 관련을 지니게 되는 연결점은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요, 교회가 그리스도의 신비체라는 사실에서, 마리아는 그리스도의 모친으로서 교회의 모친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한편 그리스도를 하느님의 말씀으로부터 잉태하고 출산하게 된 마리아는 교회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리스도를 잉태하고 출산하여야 하는 교회의 과제를 구체적으로 유비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데서 마리아와 교회의 관계가 밀접하게 연결되고 있다. 이 점을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 중세기, 종교개혁가들의 마리아론, 근세의 마리아론에 대해서는 볼프강 바이너르트의 <마리아론>을 참조하는 것으로 대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