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자신에로의 완전한 귀환(Reditio completa in se ipsum, 토마스 아퀴나스)
-대림2주, “모든 사람들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를 중심으로
1. 서정주, 「꽃밭의 독백- 사소(娑蘇) 단장(斷章)」
노래가 낫기는 그 중 나아도/구름까지 갔다간 되돌아오고,/네 발굽을 쳐 달려간 말은/바닷가에 가 멎어 버렸다./활로 잡은 산돼지, 매로 잡은 산새들에도/이제는 벌써 입맛을 잃었다./꽃아, 아침마다 개벽하는 꽃아./네가 좋기는 제일 좋아도,/물낯바닥에 얼굴이나 비취는/헤엄도 모르는 아이와 같이/나는 네 닫힌 문에 기대섰을 뿐이다/ 문 열어라 꽃아, 문 열어라 꽃아./벼락과 해일만이 길일지라도/문 열어라 꽃아, 문 열어라 꽃아.
서정주의 「꽃밭의 독백- 사소(娑蘇) 단장(斷章)」은 꽃밭에서 독백하며 지은 짧은 노래로 고대설화를 모티브로 하여 지은 작품이다.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의 어머니 사소가 처녀의 몸으로 잉태하여 신선수행을 가기전의 불가항력적인 자신의 상태를 완전히 이해하고 싶어 부른 노래라고 할 수 있다.
화자인 사소는 노래, 말, 산돼지, 산새로 표현된 현실세계의 유한성에서 벗어나 ‘꽃’으로 상징되는 절대적인 세계 혹은 초월적인 세계에 도달하고 싶어 한다. ‘꽃’은 피고 지고 다시 피기에 천지개벽에 속하는 영속성을 지닌 영원한 세계를 상징한다. 구름, 바닷가, 물낯바닥은 현실과 영원의 경계가 된다.
사소의 열망은 문 열어라 꽃아! 에서 반복하여 드러난다. 여기서 ‘문’은 새로운 세계로 가는 통로이자 그 문을 열지 못하면 새로운 세계로 갈 수가 없다. 그 영원한 세계를 가기위해 벼락과 해일만이 길일지라도 화자는 문 열어라 꽃아! 라는 주술적인 반복을 통해 영원한 세계가 영원한 세계를 열어준다는 것을 확신하고 확신하기에 갈망한다. 영원이 은혜롭게 그 자신을 열어줄 때 인간을 그 길을 갈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서정주의 「꽃밭의 독백- 사소(娑蘇) 단장(斷章)」에는 사소가 추구한 영원하고 절대적인 세계에의 갈망은 결국 자기자신에로의 완전한 귀환을 갈망하는 노래라고 바라볼 수 있다.
2. 용서는 오직 불가능을 행하기 위해서만 가능할 수 있습니다(자크 데리다)
자기 자신에로의 완전한 귀환(Reditio completa in se ipsum)은 여러 측면에서 조명할 수도 있지만 상대적이고 그러나 절대적인 어떤 세계가 있음을 상정하는 것이고, 인간이 이를 수행하는 길은 <용서>가 아니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더 이상 용서할 것이 없는 상태까지 용서했을 때, 용서의 완성을 통해서만 우리는 상대적인 세계를 넘어섰음을 알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용서는 아우구수티누스 성인이 간파한 대로 상대적인 세계를 넘어서는 일로, 신적인 행위이기 때문이다.
용서의 완성은 화해에 있다고 바라본 이들과 용서의 완성은 오직 화해를 포기하는 것뿐이라고 바라보는 이들의 사유 속으로 걸어가 본다. 이미 여러 글에서 인용한 글들이다.
① 데나린, 쉴라린, 타애오린의 『너무 빨리 용서하지 마라』에서는 두 손으로 하는 '치유'와도 같은 화해까지를 다룬다.
너무 빠른 용서는 진정한 용서일 수 없다. 우리가 받은 상처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다섯 단계를 모두 존중하는 마음으로 경청한다면 우리는 자신의 본질적 ‘진실성’을 회복하게 되고 따라서 용서의 창의적인 해결책도 자연스럽게 찾게 될 것이다. 『너무 빨리 용서하지 마라』의 저자 '데니스 린, 쉴라 린, 마태오 린.S.J' 세 사람은 엘리자베스 퀴블로 로스'의 죽음을 맞이하는 5단계'상태를 인용하여 용서의 5단계를 제언한다.
첫째, 내가 상처받았을 리가 없어라는 '부정'. 둘째, 내 상처는 그들 때문이라는 '화'. 셋째, 용서할 준비가 되기 전에 충족 조건을 제시하는 '거래'. 넷째, 내가 잘못해서 상처를 입었다고 여기는 '우울'. 다섯째, 이 상처를 통해서 성장할 수 있기를 기대하는 '수용'입니다. 하지만 죽음을 받아들이는 5단계처럼 꼭 순서대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화를 내다가 현실을 부정하기도 하고, 우울에 빠졌다가 거래를 하기도 한다. 어떤 단계를 생략하기도 하고 한 단계가 오랫동안 지속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나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을 예수님의 가르침은 물론 나 자신을 위해서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기도를 포함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는데도 여전히 상처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면 어떻게 용서를 할 수 있겠는가? 상처를 입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대방이 자신을 짓밟도록 내버려 두는 수동적인 피해자가 되거나 복수를 함으로써 폭력의 악순환에 참여하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 그러나 『너무 빨리 용서하지 마라』가 전하는 용서의 5단계 과정은 우리가 받은 상처에 대하여 『너무 빨리 용서하지 마라』는 좀 더 창의적으로 대응할 수 있을 것을 제안한다.
용서는 오랜 시간에 걸쳐 일어난다. ‘용서의 5단계는 우리가 두 손을 내밀 수 있도록 도와준다. 한 손은 상처를 준 사람이 더 이상 그런 행동을 못하도록, 다른 한 손은 그 사람을 진정시키고 그에게 새로운 삶을 제시하도록 사용한다.’ 용서의 각 단계에서 가해자는 점점 더 가해자의 특성을 잃게 되고, 피해자는 점점 더 피해자의 특성을 잃게 된다. 이러한 일이 일어날 때 우리는 오 복된 죄여! 라고 경이로움을 경험하게 된다. 『너무 빨리 용서하지 마라』는 필자들의 경험담을 통해 용서의 5단계에 대한 깊은 내적 움직임을 들려줌으로써 우리가 진정한 의미의 ‘용서’에 보다 더 잘 다가기를 청하고 있다.
②버지니아대 에버렛 워딩턴 교수는 개인적 체험을 바탕으로 『용서와 화해』의 다섯 단계인 ‘REACH’로 제언한다.
버지니아 대학의 에버렛 워딩턴 교수는 어머니가 강도에게 살해 당한 후, 그 살인자를 용서하는 문제를 놓고 오랜 시간 자신과 씨름해 왔다. 그 결과 자신의 고통스러운 경험을 연구과제로 삼아 용서를 연구하는 학자로 성장하여 누구나 용서의 본질을 체험할 수 있는 용서의 5단계를 발표했다. 과연, 어떻게 해야 용서의 문을 들어 갈 수 있을까? 용서의 다섯 단게를 이렇게 소개한다. 워딩턴 교수는 용서와 화해의 단계를 ‘REACH’로 전한다.
Ⓡ 상처를 다시 기억해낸다 (recall the hurt) 상처는 부인하지 말고 기억해내야 한다. 최대한 객관적으로 기억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 당신에게 상처를 입힌 사람에게 감정이입(empathize)을 하는 것이다. 감정이입이란 입장을 바꿔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것이다. 동정심을 느끼고, 연민이 생기고 심지어 사랑이 생기는 것까지 포함한다. 사랑하는 것은 말하기는 쉬워도 정말 힘든 일이다. 그래서 이 단계의 사람들은 자신이 용서해야 하는 사람의 관점으로 보기까지 적게는 4~5시간, 많게는 20시간 걸리기도 한다. Ⓐ 용서는 애타적(altruistic)선물이다. 애타심의 장점은 용서를 함으로써 자신을 자유롭게 하고, 정신을 건강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비록 상처를 입었지만 타인을 축복할 수도 있는 것이 용서가 주는 선물이다. Ⓒ 당신이 경험한 용서의 결정을 바꾸지 않을 것이다(commit) 사람들이 전념하는 것은 많다. 용서하려고 전념하고, 용서하려는 결정을 내리려고 전념한다. 그리고 감정적 용서를 경험하면 “이만큼의 감정적 용서를 했어요.” 라고 말하면서 결심을 바꾸지 않으려고 전념한다. Ⓗ 용서를 했는지 의심이 들 때마다 용서를 붙잡고 있는(hold on) 것이다.
용서란 말은 그리스어로 ‘놓아버리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상대방에 대한 분노로 자신을 어찌하지 못하고 과거에만 머물러 앞으로 나가지 못하는 건 자신을 위한 일이 아니기에. 용서는 이타적인 행위 속에 자기애를 실현하는 길이라고 전한다. 여러분 놓아버리세요. 그리고 용서하세요. 나 자신을 위해….에버렛 워딩턴 교수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피해를 준 가해자를 용서할 수 있도록 용서의 다섯 단계를 가르친다. 그는 사람들이 이 단계들을 기억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각 단계의 첫 글자를 이어서 만든 REACH를 사용하여 가르치는데, 용서에 성공할 수 있는 정도는 각자의 노력 여하에 달려있다. 용서는 가해자의 사과 또는 피해보상과 상관없이 피해자의 심중에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가해자의 사과를 받았다고 용서가 쉬워지는 것도 아니다. 모든 용서는 타인에 대한 것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가해자에게 그런 큰 피해를 입도록 방치한 스스로까지 용서할 수 있어야만 진정한 용서가 일어날 수 있다는 데 초점이 놓여 있다.
③ 자크 데리다는 『용서하다』에서 만일 용서라는 게 있다면 오직 용서할 수 없는 것이 존재하는 곳에만 용서는 있을 것이므로 . 용서는 불가능성으로 자신을 알려야만 한다
생전에 데리다는 자신을 무신론자라고 소개했다. 그런데 용서라는 주제를 말할 때, 그는 신을 끌어들인다. ‘용서’라는 주제에서 신을 끌어들인 이유는 데리다는 ‘용서는 선물’로 규정할 수밖에 없다는 것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는 것이 용서라는 아포리아에서 출발해 ‘용서’라는 행위가 내포한 다른 여러 아포리아를 하나하나 짚어나간다.
여러 아포리아 중 하나만 예를 들어봅시다. 충분히 줄 수 없게, 충분히 환대할 수 없게, 제가 주는 현재와 제가 베푸는 이 대접에 제가 충분히 현존할 수 없게 하는 아포리아 때문에, 저는 주지 않아서, 결코 충분히 주지 않아서, 충분히 베풀거나 대접하지 않아서 항상 용서받을 일이 있을 것 같습니다. 아니, 저는 이것을 확신합니다. 기증에 관한 한 우리는 무언가 늘 잘못했고, 늘 용서받을 일이 있습니다. 주지 않아서, 충분히 주지 않아서 용서받을 일이 있다면, 우리는 또한 이 일로 자신이 유죄라고 느낄 수 있고 그래서 오히려 우리는 뭔가를 줘서 용서를 구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겁니다. 우리가 준 것 때문에 구하는 용서, 그리고 이것은 어쩌면 내가 준 것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라고 상대에게 호소하는 일, 다시 말해 일종의 독, 무기, 주권의 확인, 더 나아가 강력한 힘의 실력 행사 같은 일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순간, 아포리아는 더 심각해집니다.
유일한 잘못이나 범죄에 그 피해 당사자가 아니라 타인에게 사죄하거나 피해자가 아닌 다른 사람이 그 가해자를 용서할 수 있을까? 바로 여기에 우리를 쉴 틈 없이 둘러쌀 수많은 아포리아 중 첫 번째 아포리아가 있다. 어찌 보면 바로잡아 회복할 수도 없고 되돌릴 수도 없는 악행을 저지른 자와 그 악행의 피해자가 된 여성이나 남성이 중재 없이 ‘일대일’로 대면한다는 조건에서만 용서를 빌거나 용서해줄 수 있고, 피해 당사자만이 용서의 요청을 들어주거나 거절할 수 있을 듯하다. 용서의 장에서 오로지 두 당사자만이 마주해야 한다는 여건은 이름 없는 피해자 전체, 때로는 이미 죽은 익명의 피해자들이나 그들의 대표, 자손 혹은 생존자들에게 어떤 공동체, 교회, 기관, 조합의 이름으로 집단적으로 구하는 용서의 의미와 진정성을 박탈하는 뜻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용서의 두 당사자 간 절대적 고립성, 더 나아가 거의 용서의 비밀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법적 권리, 징벌과 형벌, 공공기관, 사법적 전략의 지배에서 용서의 경험을 기이한 경험으로 만든다.
실제로 속죄 불가능으로 용서할 수 없는 것이 있는 지점, 용서는 불가능해지고 용서의 역사도 끝났다고 결론짓는 지점, 여기서 우리는 매우 역설적으로 용서의 가능성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런 지점이 그 기원이 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용서가 끝난 것으로 보이는 곳, 불가능해 보이는 곳, 바로 용서의 역사와 용서의 역사로서의 역사가 마지막에 다다른 바로 그 지점에서 오히려 용서가 시작되는 것은 아닐까? 용서라는 것이 있다면, 용서할 수 없는 것, 속죄할 수 없는 것만을 용서해야 하고, 따라서 할 수 없는 일만을 할 수 있다는 아포리아, 형식적으로 비어 있고 말라 있지만 집요하게 까다로워서 빠져나올 수 없는 아포리아를 ‘한 번 이상’ 검토해야 한다. 용서할 수 있는 것, 사소한 것, 해명할 수 있는 것, 누구나 쉽게 용서할 수 있는 것을 용서하는 것은 용서가 아니다. 이것이 데리다가 용서를 선물로 규정하는 이유다.
자크 데리다는 자신을 무신론자라고 생각한 사람이다. 그럼에도 ‘용서’라는 아포리아는 신이 없으면 성립될 수 없는 차원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데리다는 ‘용서(pardon)'라는 단어의 음절(par-don)에 포함된 의미를 성찰하면서 용서 행위에 포함된 논리적 난점들에 주목한다. 예를 들어 ’용서를 빌지 않는 자를 용서해야 하느냐‘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에서부터 ’피해자 각자가 아니라 집단을 상대로 용서를 구할 수 있느냐, 그럴 권리가 있느냐, 그것이 과연 용서의 의미에 부합하느냐‘는 문제, 피해 당사자가 아니라 피해자를 대신해서 제삼자나 국가가 가해자를 용서할 권리가 있느냐’는 문제, 유대인 학살처럼 ‘저지른 죄가 너무 커서 ‘인간의 한계’를 넘었을 때에도 용서가 가능하냐‘는 문제에 이르기까지 철학적·윤리적으로 대답하기 까다로운 주제로 확대해 성찰을 전개한다.
용서 문제로 칸트의 사유를 확장하면, 이 중대한 논의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최소한의 가르침은 일반적으로 용서는 피해자만이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용서의 문제는 제삼자에 ‘의해’, 제삼자를 ‘위해’가 아니라, 반드시 가해자와 피해자 두 당사자 간에 혹은 둘의 대면에서 이뤄져야 합니다. 이것이 가능할까요? 둘만이 대면하는 일, 이런 단독 대면이 가능할까요? (...) 어떤 피해자가 근본적으로 용서의 장에 부재하는 경우, 예를 들어 그가 죽었다면, 우리는 이 피해자의 이름으로 절대 용서해서는 안 됩니다. 피해자들이 죽은 범죄를 두고 살아 있는 자들, 생존자들에게 용서를 구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그 가해자들도 죽었습니다. 얼마 전부터 공적인 분야에서 늘어나는 모든 광경, 공식적 참회나 사죄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그에 대한 하나의 접근이 바로 여기에 있을 겁니다.(...)용서는 오직 용서할 수 없는 것만을 용서합니다. 우리는 용서할 수도 없고, 용서해서도 안 되겠지만, 만일 용서라는 게 있다면 오직 용서할 수 없는 것이 존재하는 곳에만 있을 것입니다. 용서는 불가능성으로 자신을 알려야만 한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용서는 오직 불가능을 행하기 위해서만 가능할 수 있습니다.
데리다는 용서를 “교환도 조건도 없는 은혜로운 선물”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신에 의해 주어진, 또는 신적인 규정에 의해 계시된 선물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순수한 용서, 은혜로운 선물이 인간의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조건 속에 들어 올 때 혁명을 일어난다. 그 순간 사태가 변화되고 효과가 발휘된다. 데리다에게 용서는 항상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제공하는 순간적이고, 기적적인 ‘선물’과도 같은 사건이다. 이러한 새로움 때문에 용서는 화해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데, 화해는 용서를 새롭게 계속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종결시키는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정한 용서는 무조건적이다. 그에 따르면 용서는 변명할 수도 없고 용서할 수도 없는 자를 용서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용서는 용서를 위한 어떤 이유를 찾아서도 안 된다. 이런 용서는 적용에 있어서 보편성을 원칙으로 하고, 그러므로 어떤 불가능성이나 한계를 알지 못한다.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용서는 ‘광기어린’ 용서에 가깝다. 데리다에게 용서는 불가능한 것이다. 논리와 상식이 들어맞지 않는 역설을 발생시킨다. 일단 우리들에게는 용서 불가능한 것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역설적으로 그렇기 때문에 용서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무슨 말인가? 만일 용서할 만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진정한 용서의 개념이 작용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들이 흔히 정말 용서해야 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도무지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용서는 자기자신에로의 완전한 귀환의 문이라고 할 수 있다.
광야에서 외치는 세례자 요한
3. <모든 사람들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루카3,1-6
1 티베리우스 황제의 치세 제십오년, 본시오 빌라도가 유다 총독으로, 헤로데가 갈릴래아 영주로, 그의 동생 필리포스가 이투래아와 트라코니티스 지방의 영주로, 리사니아스가 아벨레네의 영주로 있을 때, 또 한나스와 카야파가 대사제로 있을 때, 하느님의 말씀이 광야에 있는 즈카리야의 아들 요한에게 내렸다. 3 그리하여 요한은 요르단 부근의 모든 지방을 다니며,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다. 이는 이사야 예언자가 선포한 말씀의 책에 기록된 그대로이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5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 굽은 데는 곧아지고, 거친 길을 평탄하게 되어라. 6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대림 2주, <모든 사람들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라고 전하는 루카3,1-6은 네 복음서에 공통으로 전해지는 말씀으로 마태오3, 1-6/마르코1,2-6/ 요한 1, 19-23은 이사야40장 4-5의 확장으로 구체적인 소명연대-요한의 소명-위로와 구원의 선포를 3단구성으로 전하고 있다.
루카3,1-6은 그리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통해',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는 것으로 모아진다.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는 예수님 시대 뿐 아니라 지금 우리 시대에도 신앙인이 정립해야할 신앙의 제1모토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토마스 아퀴나스가 『신학대전』에서 규정한 대로, <자기 자신에로의 완전한 귀환(Reditio completa in se ipsum)>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께로 완전히 우리 삶이 정향되어 있다면 창조의 원초적인 모습으로 우리 자신이 이미 돌아갔음을 긍정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에, 루카3,1-6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 자기 자신에로 완전한 귀환이 무엇인가를 성찰해 보기로 한다.
Ⓐ1 티베리우스 황제의 치세 제십오년, 본시오 빌라도가 유다 총독으로, 헤로데가 갈릴래아 영주로, 그의 동생 필리포스가 이투래아와 트라코니티스 지방의 영주로, 리사니아스가 아벨레네의 영주로 있을 때, 또 한나스와 카야파가 대사제로 있을 때, 하느님의 말씀이 광야에 있는 즈카리야의 아들 요한에게 내렸다.
루카 복음사가는 1-2절에서 예수님을 통한 구세사를 세계사와 연결하여 서술하고 있다. 세례자 요한의 출현을 당시 로마의 정치인들과 유다 종교인들과 연결시켜 여섯번에 걸쳐 그것을 반복하여 전한다. 태중에서부터 예언자로 간택되어 광야에서 생활한 요한에게 하느님 말씀이 내렸다는 것. 이것이 대림 2주에 묵상의 첫 번째 포인트가 아닌가 싶다. 루카복음사가는 여섯번에 걸쳐 세례자 요한이 마주한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세계를 열거한다.
신약성서 가운데 구원의 역사를 가장 분명히 구분한 복음사가가가 루카복음사가일 것이다. 그는 구원사를 이스라엘 시대와 구원의 시대로 양분했다. 그리고 구원 시대를 예수시대와 교회시대로 다시 세분하였다. 종말은 시대의 구분에 속하지 않는다. 종말은 시간의 종말이기 때문이다.
루카 복음사가의 구원사관에서 세례자 요한은 이스라엘 시대를 끝맺는 인물이자 예수시대를 준비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이스라엘의 시대는 율법과 예언자들의 시대, 구원을 예고하는 시대로써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가 말라기 예언자가 아니라 세례자 요한이라고 본 것이다.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라는 (3,20/16,16/사도13,25)의미는 그는 세계에 개방되어 있는 존재이자 하느님의 말씀을 직접계시로 들을 수 있는 존재, 세계를 초월한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구원은 세계내적 사건이자 세계 초월적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단순히 현전(vorhandensein)하는 존재가 아니라 현존(de sein)하는 존재”(칼라너는 『익명의 그리스도인』)라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은 세계(타자에게)에 무한히 무차별적으로 열린 존재로 세계에 단순히 던져진 존재가 아니라 인간 자체가 하나의 세계인 것이다.
인간이 최초로 관계를 맺게 되는 세계는 타자라는 사물이 아니라, 자신과 똑같은 타인이다. 인간은 누구나 질료적 타자, 실재로서의 타자와의 관련 속에서만 즉 타자에게로 나아가 자신 안에서 타자를 수용하는 가운데 자신이 비로소 누구인가를 알게 된다고 할 수 있다. 자기 자신에로의 완전한 귀환(Reditio completa in se ipsum)의 여정은 “인간은 생득적 인식을 갖고 이 세상에 오지 않고 취득적 인식에 의해” 그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게 된다.(심상태, 『신학적 인간학』) 그 여정에서 용서는 상대적인 세계와 초월적인 세계를 여는 열쇠라고 할 수 있다. 애주애인의 열쇠라고 할 수 있다.
Ⓑ 3 그리하여 요한은 요르단 부근의 모든 지방을 다니며,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다. 이는 이사야 예언자가 선포한 말씀의 책에 기록된 그대로이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용서가 세계의 문을 여는 두 번째 성찰의 주제라는 것은 광야라는 공간에 대한 이해로부터 시작된다. 이 광야를 이해하는 것이, 용서의 문을 여는 것이라는 비약에 가까운 연결은 우리 자신이 하느님만으로 살 수 있다는 체험을 요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는 지끔까지 하느님의 사랑에 의지하여 살아왔다는 것을 체험하는 원공간이 광야체험일 것이다.
이스라엘 시대와 구원의 시대를 종언하고 시작하는 그 중심에 왜 광야에서 외치는 세례자 요한인가?하는 것을 이해하는 코드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세례자 요한이 선포한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baptisma metanoias eis aphesin hamartion)’는 무엇인가?를 알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김재덕 베드로 신부는 「오늘의 묵상」에서 구원은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사건이 아니라 믿음 없이는 절대로 알아볼 수 없는 방법들을 하느님께서 선택하셨다고 전한다. 그 단적인 예가 아무런 세속의 힘을 가지지 못한 세례자 요한에게 하느님의 말씀이 내렸다는 것이고, 이스라엘이라는 중심부 담론이 형성되는 공간이나 도시가 아니라 광야라는 주변부 공간, 원초적인 공간에서부터 구원의 메지시가 전해졌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구원을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불가능해 보이고 아주 비효율적인 방법, 비합리적이고 너무나 미약해 보이는 방법으로 당신께서 계획하신 일을 이루셨습니다.”
하느님이 선택한 미약한 방법이란 마르코복음과 같은 선상에서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는 일이고, 용서의 완성을 통해, 우리 마음 안의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지며, 굽은 데는 곧아지고, 거친 길을 평탄하게 되어,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게되는 것이며 그것이 예수님을 만나는 길이라는 것이다.
루카 복음사가는 예수를 하느님의 구원으로 보았고, 그 구원은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라는 보편적 구원사관을 펼치면서 구원의 시작은 바로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라는 것을 역설한다.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 어디로 정향되어 있는 존재인가를 바라보는 것이다. 그것은 내가 있는 바로 그곳이 광야임을 바라보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요한은 당시 유대의 중심지인 예루살렘에 나타나지 않고 왜 광야에서 외쳤는가? 를 성찰해야 할 이유이다. 요한이 머물렀던 요르단 부근은 흔히 성서학자들은 엘리야가 승천한 장소라고 추론하기로 한다. 광야는 자연상태 그대로의 황량한 터로 인간이 살기 힘든 공간이다. 그러기에 하느님의 현존과 은총이 없이는 살 수 없는 공간이다. 광야는 하느님만으로 사는 공간이라고 봄이 마땅하다. 현실에서 그런 광야 체험을 했는가?
거기에 멈추지 않고 광야는 하느님과 함께 약속된 땅으로 가는 과정에서 거치는 통과의례의 공간(탈출기15장-19장) 정화의 공간이고, 하느님의 보호를 체험하는 공간, 세상 끝날까지 함께하는 공간(1열왕기 19장)이기에, 광야는 모든 신앙인들의 신앙사에서 거치지 않을 수 없는 필수적인 공간이다. 광야체험없이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은 사람은 없다. 그것은 광야는 오로지 하느님께로 정향되어 있는 것이 인간의 궁극적인 행복이라는 것을 알게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광야는 묻는다, 하느님만으로 살 수 있는가?
이사야 예언자
이는 이사야 예언자가 선포한 말씀의 책에 기록된 그대로이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광야라는 공간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바로 하느님을 향한 길이다. 그렇기에 광야에서 이사야와 세례자 요한의 목소리가 하나가 된다. 이사야나 세례자 요한이나 하느님의 길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알아 들었던 이들이고 그것은 그들 자신이 하느님께 온전히 정향되어 있는 존재임을 바라보았기 때문이고, 그 자신으로 완전히 자신에게로 귀환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창조의 체험이라고 할 수 있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5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 굽은 데는 곧아지고, 거친 길을 평탄하게 되어라. 6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그렇다면, 우리 생명 자체가 이미 하느님께로 정향되어 있다는 것을 무엇으로 알 수 있나? 그것이 바로 애주애인의 구체적 실천, 용서의 완성을 통해서라고 할 수 있다. <5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 굽은 데는 곧아지고, 거친 길을 평탄하게 되어라.>는 것은 모든 관계를 바라보는 우리 마음의 상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직도 용서할 것이 남아 있다면 그것은 아직 그분의 길이 평탄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미 우리와 함께 계신 그분을 알아 보지 못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 상태는 우리가 어떤 상태일 때 체험하는 것인가. 그것은 하늘과 땅과의 완전한 소통이 이루어진 은총의 시간 속에서 체험되는 평화의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 과정을 거친 후에야 우리는 모든 사람이 나와 무슨 연관이 있는가를 바라볼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내가 변회되었는데 어떻게 모든 사람이 구원받았음을 알 수 있는가? 라는 세 번쩨 질문으로 넘어간다.
여기서, 요한복음 1장에 나오는 ‘외아들’과 1코린토12, 27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지체-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들이 있고' 에서 전하는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지체를 연결하여 묵상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라고 전하는 루카3,1-6 용서의 완성(루카23,34)에 이른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용서의 완성에서 우리 자신은 세계 내적 존재이자 세계 초월적 존재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
그것은 토마스 아퀴나스가 통찰한 바로 그 상태, 자기 자신에로의 완전한 귀환(Reditio completa in se ipsum)에 이른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완전히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간 상태는 바로 하느님께로 정향되어 있는 삶이고, 용서의 완성이 이루어진 상태이고, 그리스도의 지체로서의 삶이 진정한 자유와 행복임을 바라보는 일일 것이다. 모든 관계가 나의 구원을 위해 필요했음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렇기에 대림2주, “모든 사람들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라는 은총의 상태는 <자기 자신에로의 완전한 귀환(Reditio completa in se ipsum)>을 하지 않는다면 알 수 없는 메시지라고 할 수 있다. 자기 자신에로의 완전한 귀환은 우리 혼자서 해 낼 수 있는 은총 상태가 아니다. 그것은 성령에게 우리의 모든 시간, 우리의 모든 관계, 우리의 모든 문제를 맡겼을 때 무상으로 받을 수 있는 선물이기 때문이다.
글을 마치며,
1 티베리우스 황제의 치세 제십오년, 본시오 빌라도가 유다 총독으로, 헤로데가 갈릴래아 영주로, 그의 동생 필리포스가 이투래아와 트라코니티스 지방의 영주로, 리사니아스가 아벨레네의 영주로 있을 때, 또 한나스와 카야파가 대사제로 있을 때, 하느님의 말씀이 광야에 있는 즈카리야의 아들 요한에게 내렸다. 3 그리하여 요한은 요르단 부근의 모든 지방을 다니며,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다. 이는 이사야 예언자가 선포한 말씀의 책에 기록된 그대로이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5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 굽은 데는 곧아지고, 거친 길을 평탄하게 되어라. 6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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