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피캇(Magnificat)

오 너는 아직 고운 심장을 지녔거니,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라(로마서4,18)

나뭇잎숨결 2024. 11. 15. 07:00

남마리안나 수녀님께서, 감사합니다!

 

 

 

 

오 너는 아직 고운 심장을 지녔거니(신석정),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라(로마서4,18)

-연중33주, “사람의 아들은 자기가 선택한 이들을 사방에서 모을 것이다.”를 중심으로

 

 

 

 

1. 신석정, 「고운 심장」

 

 

별도 / 하늘도 / 밤도 치웁다.// 얼어붙은 심장 밑으로 흐르던/한 줄기 가는 어느 난류(暖流)가 멈추고./ 지치도록 고요한 하늘에 별도 얼어붙어 // 하늘이 무너지고/ 지구가 정지하고/푸른 별이 모조리 떨어질지라도/그래도 서러울 리 없다는 너는 / 오 너는 아직 고운 심장을 지녔거니 / 밤이 이대로 억만 년이야 갈리라구.....

 

신석정의 「고운 심장」 은 “하늘이 무너지고 지구가 정지하고 푸른 별이 모조리 떨어질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러울 게 없다고 말하는 너! 결국 승리하는 것은 밤이 아니라 빛이라는 것을 아는 너는 고운 심장을 지닌 사람이라는 이 통찰은 시인이 바라본 희망의 이름일 것이다.

 

죽음을 통과하지 않은 희망이 아니라, 죽음을 넘어선 희망을 시인은 본 것이다. 따라서 그래도 서러울 리 없다는 너는, 누구인가? 아마도 죽음 그 너머를 바라본 시인의 초상일 것이다.

 

우리는 흔히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는 데까지 내려갔을 때, 즉 바닥을 쳤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비로소 자신이 누군지 본 모습이 보인다고 말한다.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되는 그 순간,  사랑하라, 희망하라, 믿어라, 용서하라는 자기 심장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그는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는(로마서4,18) 사람일 것이다.

 

 

 

 

부모님 산소 옆에 피어 있는 구절초

 

 

 

2. 주체는 ‘아래로’ 던져진 것이 아니라 ‘위로’ 상승하는 자이다.(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

 

 

어떻게 한결같이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는”(로마서4,18)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에른스트 블로흐는 『희망의 원리』에서 희망은 <아직 아닌 존재(das Noch-Nicht-Sein)>로 표출되며, 타자가 아니라 시간을 어떻게 재배치 할 것인가와 연결하고 있다. 희망은 불가피하게 미래라는 시간개념이 개입된다고 보고 있다. 미래의 현재화, 본질은 언제나 ‘아직’의 상태로 우리에게 드러난다고 본 것이다.

 

 

“희망은 아직 아닌 존재하지 않은 것, 희망이 모든 아님을 아직 아님으로 바꿈으로써 부정성을 극복한다. ‘아직 의식되지 않은 것’과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인간의 모든 지적능력과 모든 존재의 지평을 가득 채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개념화되기는커녕 한 번도 언어로서 표현된 적이 없다. 테레키우스 파로는 라틴어 문법을 처음으로 연구하다가 미래라는 시제를 잊어버렸다고 한다. 이렇듯이 미래는 철학의 명제에도 철학의 영역에서 아직 제대로 이해된 바 없다. 따라서 미래를 바라보는 시각은 오로지 ‘아직 아니다’, 라는 어떤 존재론적인 토대에 바탕을 두어 이해되어야 한다.”

 

희망의 원리, 아직 아닌 존재(das Noch-Nicht-Sein) 라는 것은 아직은 없음(무)이 아니라는 사실에서 시작된다. 아님은 어떤 특정한 무엇을 구성하는 본질적인 것, 아직 나타나지 않은 상태, 어떤 것이 드러나 있지 않음, 아직 접하지 못한 경험, 첫 질문에 대한 보류된 답이라 할 수 있다. 유토피아적 질료가 자기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바로 Vor-Schein미리 드러남, 선현인데, 예측된 상은 주관적인 느낌과는 거리가 멀다고 그는 말한다. 희망의 내용은 예견적으로 파악되는 것으로 모든 창작활동이나 사유활동에 중요한 개념으로 이것은 주관적 정서나 인지작용에 국한하지 않고 구체적인 희망을 구성하는 자연질료의 창조적인 과정에서 스스로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사용된다고 보고 있다. 그는 희망이 관념의 영역에서 어떻게 구체화되는가에 주목한다.

 

이는 시간적 공간적으로 앞서는 개념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가 변증법적으로 엉켜있는 시간 개념으로, 이는 존재론적 시간개념이기도 하고 이 시간 개념 속에서 선취 혹은 선 파악, 선취하는 것, 예견하는 것으로서 ‘자기와의 만남(selbstbegegnung)’이 비로서 가능하다는 것이다. 예컨대 빈센트 반고흐의 그림을 감상하면서 우리는 갑자기 그림 속에 있고, 바로 그 모습이 순식간에 그려지면서 충만된 삶의 순간을 경험하는 것과 같다고 보았다.

 

희망 앞에서 구성되지 못한 마지막 질문은 고통(죽음)이라는 바깥 영역에 대한 것으로 블로흐가 의도하는 것은 가장 반유토피아로써의 죽음 역시 희망을 근본적으로 좌절시킬 수 없다고 말한다. 실존은 죽음에 대하여 불가역적이기 때문이라고 그는 말한다. 블로흐는 여기서 ‘복음’에서 그 실증적 인물을 찾고 ‘예수를 좌절을 모르는 현실’로 바라보게 된다.

 

예견되는 것은 그런 방식으로 희망의 영역에서 작용한다. 희망은 공포와 반대되는 정서일 뿐만 아니라(공포역시 예견될 수 있기 때문) 보다 근본적으로 인지적 유형의 ‘방향설정’에 해당한다. 그렇게 규정된 미래지향적인의 표상과 생각은 사려깊지 못한 충동적인 그림이나 추상적인 유형의 좁은 의미에서가 아니라 ‘앞을 향하여 나아가는’ 예견 그 자체로 이해되어야 한다. 따라서 희망의 반대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만드는 ‘미망’이라 할 수 있다. ‘미망’은 길을 잃어버린 상태를 의미한다.

 

 

희망을 다른 측면에서 바라본 철학자가 있다. 그는 그것을 희망이라 말하지 않고 과정이라고 부른다. 화이트헤드는 과정 형이상학 혹은 과정철학으로 불리는 형이상학 체계를 제시하면서, 형이상학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가 지배하던 20세기 초, 다시금 형이상학의 중요성을 부각시키는 동시에 플라톤 이래 부동의 존재자로서의 실체 중심적 존재론을 생성과 변화의 과정 존재론으로 변화시켰다. 그러나 그의 과정철학 체계는 자연과학과 수학 및 기존 형이상학을 아우르는 방대한 체계에 기인하는 난해함 때문에 접근하기 힘들다.

 

화이트 헤드는 『과정과 실재』에서 ‘인간은 점이 아니라 선’이라는 것에서 출발한다. '점이 아니라 선'이라는 것은 시간과 공간이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통찰이 그가 바라본 인류의 미래다. 태초와 오늘이 연결되어 있다고 바라보는 그에게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을 같은 선상에서 바라보는 것을 금기로 삼았던 철학적 전통에서 화이트 헤드 앞에 '실재론자'라는 이름이 붙는 이유이기도 하다.

 

A. N.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 1861년~1947년)는 경험론과 합리론을 종합하는 유기체(有機體) 철학을 전개하여, 데카르트 이래의 물심이원론(物心二元論)을 극복하고, 근대 이후의 자연과 인간과의 대립을 융화하였을 뿐만 아니라 신과 인간의 관계에 내적 필연성을 제시하였다.

 

①주체는 ‘아래로 던져진 것이 아니라 위로 상승하는 자이다. 변동과 시간의 점 사이에는 필연적인 관계가 있다. 주체에 따른 진리의 변동이 아니라 변동의 진리가 주체에 나타나는 조건이다.

 

 

 

②현실적 존재는 이미 다수의 존재로부터 생겨나며 이 통일된 일자는 또 다시 다른 모습의 다수로 형성되어 간다. 그렇다면 현실적 존재는 그에 앞선 선행존재의 합성의 결과이며 그것은 또 후속존재로 이어져 합성되는 것이다.

 

 

 

③과정에는 리듬이 있다. 이것은 창조로 하여금, 역사적 사실의 자연적 단위를 형성하고 있는 자연의 박동을 산출토록 한다. 그렇게 때문에 우리는 관계를 본질로 하고 있는 무한한 우주 가운데 유한한 단위 사실들을 어렴프시 식별할 수 있는 것이다.

 

 

 

④현실적인 존재는 끊임없이 소멸하지만 객체적으로는 불멸한다. 현실태는 소멸할 때 주체적 직접성을 상실하는 반면 객체성을 획득한다.

 

 

화이트 헤드의 유기체적 세계관을 바라볼 때, 희망은 이 세계를 흩어진 낱개의 '점'으로 볼 것인가? 아님 끊어지지 않고 이어진 '선'으로 볼 것인가?에 그 답이 있다고 하겠다.

 

화이트헤드는 유기체철학에서 인간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끌어낸다. 인간은 존재하는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는 유기체적 존재이기에 인간은 점이 아니라 선이라고 본 것이다. 그러기에 인간은 어둠으로 몽땅 덮혀 있는 그 죽음의 순간조차도 위로(빛, 신 혹은 진리로) 향하고 있을 수밖에 없다. 인간과 신의 필연적이고 내적인 관계를 무의식으로도 알기 때문에, 괴로워한다는 것, 두려워 한다는 것, 고통스러워 한다는 것, 분노한다는 것, 숨어버린다는 것, 절규한다는 것...그 부정의 실존 속에서도 이미 그 반대의 세계를 지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인간은 과정중의 실재이기에 완전한 빛일 수도 완전한 어둠일 수도 없다는 통찰이다. 그것이 화이트 헤드가 규정하는 인간의 실재이다.

 

 

화이트 헤드에게 (유기체란) 모든 존재하는 실재들은 연장적 연속성을 갖는다고 보았다. 빛깔, 소리, 신체적 느낌, 맛, 냄새와 같은 성질들은 관계적인 영원한 객체들이며, 이러한 영원한 객체로 말미암아 동시적인 현실적 존재들은 실재의 구성요소가 된다.

 

동시적 독립성의 원리에 의해, 동시적 세계는 수동적인 기능태의 양상 밑에서 우리에게 객체화 된다. 이러한 분할의 가능성에 근거하여 외적 세계는 유기체적인 연속성을 지니게 된다. 왜냐하면 연속체는 가분적이기 때문이다. 동시적 세계는 연장적 분할을 위한 연속성을 지닌 것으로 지각되는 것이지, 현실적인 원자적 분할로 지각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연장적 연속체는, 모든 가능적인 객체화가 그 속에서 자신들의 적합한 장소를 찾아내는 그런 하나의 관계적인 복합체를 말한다.

 

 

 

또한 전체와 부분과의 관계, 공통부분을 갖게 되는 중복의 관계, 접촉의 관계, 그리고 이러한 원초적 관계에서 파생된 다른 여러 관계들과 같은 다양한 관계들의 제휴에 의해 통일체가 된 존재들의 복합체이기도 하다.

 

 

 

이러한 연장은 다수의 객체들이 하나의 경험이라는 실재적 통일 속으로 결합해 들어갈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하는, 관계들의 일반적 도식에 해당한다. 연장적 연속성은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시대를 구성하고 있는 피조물의 사회에서도 생겨나고 있는 특수한 조건들이다. 다만 인간이 그것을 바라볼 수 없기 때문에 실재를 부재로 본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유기체적인 주체의 개념이 만들어진다.

 

⑤“주체는 '아래로' 던져진 것이 아니라 '위로' 상승하는 자이다. 변동과 시간의 점 사이에는 '필연적인 관계'가 있다. 주체에 따른 진리의 변동이 아니라 '변동의 진리'가 주체에 나타나는 조건이다”(화이트 헤드, 『과정과 실재』)

 

 

화이트헤드의 인간에 대한 무한한 신뢰는 신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If, 만약, 신이 '사랑'이라면 인간이 끊었다고, 혹은 끊는다고, 혹은 끊겠다고 그 관계가 끊어질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끊어질 수 있는 사랑이라면 이미 끊어진 사랑이라고 본 것이다. 이것은 바오로의 통찰처럼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로마서8,35-39)와 그 맥을 같이한다. 그것이 과정과 실재 속에 있는 희망의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

 

 

 

 

 

 

 

《묵시록의 네 기사》, 알브레히트 뒤러 

 

 

 

 

3. <사람의 아들은 자기가 선택한 이들을 사방에서 모을 것이다.> 마르코 13, 24-32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4 “그 무렵 큰 환난에 뒤이어 해는 어두워지고 달은 빛을 내지 않으며 25 별들은 하늘에서 떨어지고 하늘의 세력들은 흔들릴 것이다. 26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큰 권능과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27 그때에 사람의 아들은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가 선택한 이들을 땅끝에서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을 것이다. Ⓑ28 너희는 무화과나무를 보고 그 비유를 깨달아라. 어느덧 가지가 부드러워지고 잎이 돋으면 여름이 가까이 온 줄 알게 된다. 29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사람의 아들이 문 가까이 온 줄 알아라. 30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이 모든 일이 일어날 것이다. 31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32 그러나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신다.

 

<사람의 아들은 자기가 선택한 이들을 사방에서 모을 것이다.>라고 전하는 마르코 13,24-32은 사람이 아들이 오시는 날(마태오24,29-31/루카21,25-28)과 무화나무의 교훈(마태오24,32-35/루카21,29-33)과 깨어 있어라(마태오24,36-44)를 연결하여 그리스도인은 그 어떤 상황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예수님의 공생활에 초점을 맞춰 서술하던 마르코 복음사가의 서술방향이 돌연 종말과 재림의 전조증상이 왜 재난의 상징들로 가득차 있는지부터 우리의 이해를 요구한다.

 

복음의 첫 부분에서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표징들은 우리를 당혹스럽게 한다. 해는 어두워지고, 달은 빛을 내지 않으며, 별들은 하늘에서 떨어지고, 하늘의 세력들은 흔들릴 것이라는(13,24-25) 이 재난과 고통을 개별적인 것으로 바라볼 것인가, 아님 인류종말로 바라볼 것인가? 하는 의문이 그것이다.

 

하지만 곧이어 주님께서는 바로 그 완전한 어둠의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오실 것이라는 (13,26)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다. 무화과나무의 잎이 돋으면 여름이 가까이 온 줄 알게 되는 것처럼(13,28), 우리와 함께 계신 사람의 아들의 표징을 관상할 수 있다는 점이다. 31절까지는 깨어있는 자는 누구나 세말의 이 징표를 알 수 있다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그런데, 그러나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13,32)는 것에 이르러 <알다>와 <모른다>의 구조를 통해, 종말, 재림, 세말 그 어떤 말로 불리든 그 시간은 인간의 인지 영역이 아니라는 전언이 이어진다. 그것은 오직 하느님의 시간이라는 이 전언은 32절 이하 항상 깨어 있어야할 필연성을 각성시킨다. 그것이 전부인가?

 

13장은 예수의 공생활 중심의 서술에 초점을 맞추었던 복음사가의 서술 방향이 당대 묵시문학의 표현을 통해 희망의 메시지를 전했다는 점에서 특이한 장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의 시간의 끝나고 하느님의 시간이 온다는 재림의 묵시사상은 특히 다니엘 예언서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는 것이 신학자들의 중론이다.

 

<그 때에 네 백성은 구원을 받으리라.> (다니엘서 12,1-3)

 

1 그때에 네 백성의 보호자 미카엘 대제후 천사가 나서리라. 또한 나라가 생긴 이래 일찍이 없었던 재앙의 때가 오리라. 그때에 네 백성은, 책에 쓰인 이들은 모두 구원을 받으리라. 2 또 땅 먼지 속에 잠든 사람들 가운데에서 많은 이가 깨어나 어떤 이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어떤 이들은 수치를, 영원한 치욕을 받으리라. 3 그러나 현명한 이들은 창공의 광채처럼 많은 사람을 정의로 이끈 이들은 별처럼 영원무궁히 빛나리라.

 

이런 묵시사상의 영향이 마르코 4장과 13장에서 나타나는데, 두 장의 성격은 다르지만 기본 메시지와 구조 및 소재는 상통하다. 두 군데 모두 씨앗과 무화과나무라는 식물 비유가 등장하고 (4,1-9/13,33-37), 믿는 이들의 공동체에 대한 약속이 제시되고(4,10-12/13,30-32), 제자직에 대한 우화가 등장한다(4,13-20/13,33-37) 두 장의 기본 메시지는 고통의 시기를 겪고 있는 이들에게 “그때에 사람의 아들은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가 선택한 이들을 땅끝에서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을 것이다.”(27절)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스도인의 희망은 단순이 이 땅의 희망도 아니고 저 곳의 희망도 아니다. 이미 이곳에서 희망의 메시지는 차안과 피안을 아우르는 희망이기에 <사람의 아들은 자기가 선택한 이들을 사방에서 모을 것이다.>라고 전하는 마르코 13,24-32은 무엇보다 재난으로 불리는 고통과 희망의 관계에 대한 성찰을 요구한다고 할 수 있다.

 

 

 

 

 

 

 

 

G. 그라사케는 『종말신앙-죽음 보다 강한 희망』에서 그리스도인들은 희망하는 사람이라고 규정한다. 희망하는 자로서의 그리스도인은 역사 내적 존재로써 하느님에게서의 최종 미래에 대한 희망이 이미 이곳에서의 희망이라는 것을 믿는 이들임을 역설한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 안에 있는 충만한 최종미래를 희망하고, 이 미래를 하느님으로부터 희원하기 때문에 그는 전체주의적 모든 요구에 저항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에게서 누리는 완성된 정의와 평화와 행복을 희망하기 때문에 그는 벌써 이 선물을 향해 행동하면서 마중나가고 개괄적으로나마 구현하려고 시도한다. 그리스도인의 희망은 이 세계 속에서 희망의 표징을 드러냄으로써 인간행동으로 나타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의 자기가 사랑으로써 행하는 것은 소멸되지 않을 뿐 아니라 만사를 충만케 하는 하느님에게서의 미래에 첨부되리라는 기대 속에 자기의 작은 세계와 거대한 세계의 역사를 위하여 희망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G. 그라사케는 그리스도인이 지니는 희망은 이 현실 세계에서의 희망만이 아니라 죽음을 넘어서는 그 이상의 삶에 대한 희망이 자리하고 있다고 말한다. 희망하는 사람은 지금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는 양식에 절대 만족하지 않는다. 그는 어떤 상황속에서도 가장 좋은 것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에너지를 지닌 사람이기에 그렇다. 그는 그가 희망하는 것에 대해 정지되어 있는 상태가 아니라 기다리고 있는 것을 향하여 마중나가는 사람이다. 희망을 갖는다는 것은 정신승리이 차원이 아니라 역동적인 삶을 살겠다는 전인격의 선택이기 때문이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연중 제33주일을 ‘세계 가난한 이의 날’로 지내도록 선포하시면서, 마르코 13,24-32을 두 가지 측면을 고려하며 역사를 읽도록 하자는 제언을 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오늘의 고통’과 ‘내일의 희망’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세상의 고통 앞에서 두려움과 근심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시려고 우리의 마음을 희망으로 열어주려 하십니다. 이런 까닭에 주님께서는 해가 어두워지고 모든 것이 떨어지는 것처럼 보이는 바로 이 순간, 그분께서 가까이 다가오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고통스러운 역사의 신음 속에 구원의 미래가 싹트기 시작합니다. 내일의 희망은 오늘의 고통 속에서 꽃을 피웁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구원은 저세상의 약속일 뿐 아니라, 이미 우리의 상처입은 역사 안에서  우리 모두는 병든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라고 있으며, 세상의 불의와 압제 가운데에서도 나아가고 있습니다. 가난한 이들의 부르짖음 한가운데에서 하느님 나라는 나무의 여린 잎처럼 돋아나 역사를 그 목표로 인도합니다. 우리를 결정적으로 해방시켜주실 우주의 임금, 주님과의 최후의 만남 말입니다.

 

 

연중33주, “사람의 아들은 자기가 선택한 이들을 사방에서 모을 것이다.”라고 전하는 마르코 13,24-32에서 우리가 던져야 하는 그 다음 질문은 예수께서 선택한 이들은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선택받은 백성인 영원한 생명의 책에 적혀 있는 이들에 대해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원히 거룩해진 이들이라고 전한다.

 

<그리스도께서는 한 번의 예물로 거룩해지는 이들을 영구히 완전하게 해 주셨습니다.>(히브리서 10,11-14.18)

 

11 모든 사제는 날마다 서서 같은 제물을 거듭 바치며 직무를 수행하지만, 그러한 것들은 결코 죄를 없애지 못합니다. 12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없애시려고 한 번 제물을 바치시고 나서, 영구히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13 이제 그분께서는 당신의 원수들이 당신의 발판이 될 때까지 기다리고 계십니다. 14 한 번의 예물로, 거룩해지는 이들을 영구히 완전하게 해 주신 것입니다. 18 이러한 것들이 용서된 곳에는 더 이상 죄 때문에 바치는 예물이 필요 없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자기가 선택한 이들을 사방에서 모을 것이다.” 에서 사람의 아들의 선택은 실은 우리의 선택임을 알 수 있다. 우리가 그분을 따르고자, 애주애인의 길이 우리의 길이라는 사실을 알고 우리 각자에게 삶의 숙제로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그분이 가신 길을 가고자 하는 우리의 결정이 바로 그분의 선택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단한번의 제헌으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신 그분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가 미사 중에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라고 드리는 찬송은 인간의 약함이나 고통에 방점을 찍지 않겠다는 장엄한 선언이나 다름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다시 <모른다>의 신비의 영역에 봉착하게 된다. 고통과 희망의 표징들은 알 수 있지만, 나아가 그리스도의 현존까지도 알 수 있지만(24-31절) 그러나 그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32 절)는 점이다. 이것이 거룩함의 또 다른 측면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영원한 생명이다. 그 영원은 <그 날과 그 시간의 개념>이 아니다. 그런데 그 종말, 세말, 재림의 시간을 예수님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는 시간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는 크로노스(Chronos)와 카이로스(Kairos)의 시간을 모두 산다. 크로노스의 시간은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정량적 시간이다. 개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존재하는 객관적인 시간이다. 반면 카이로스의 시간은 오늘의 중요성과 인간의 자유의지를 중시하는 정성적 시간으로 개인의 결정과 선택이 반영된 자의적 시간이다. 시작과 끝이 맞물린 시간이자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시간이다. 너는 내 아들,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시편2,7)은 바로 그 오늘의 시간은 후자의 카이로스의 시간이다. 이것은 영원으로 불리는 하느님의 시간, 절대 미래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의 절대미래 속에서 희망을 사는 것이 거룩함의 한 측면, 봉인된, 신비한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예컨데, 이 세상의 모든 관계는 1%의 진실-빛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나머지 99%는 어쩌면 인연의 재앙이라고도 할 수 있다. 재앙에 방점을 찍는 한 그 어떤 관계도 유지할 수 없다. 운둔자가 되어야 한다. 사실 말과 행위로 표출된 어떤 관계의 낙차, 혹은 진정성은 그것을 표출한 그 자신도 잘 모르는 일이다. 저 사람은 자신들이 무슨 일을 하는 지 모르고 있으니 용서해 달라는 십자가상의 주님의 기도는 그래서 종말, 세말, 재림 앞에서 우리가 바쳐야할 유일한 기도인지도 모른다. 그것만이 희망을 지닌 그리스도인의 길이기 때문이다. 용서할 것이 하나도 없는 상태가 희망지수라고 보면 된다. 그렇기에 우리가 갖는 희망은 정량적으로 1%의 진실만으로도 충분하다. 아니 0.0001%만으로도 충분하다. 내가 그분을 믿겠다는 1%의 진실이 아니 0.0001%의 갈망이 그분의 현존을 체험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존재하는 그 누구의 삶도 보리빵 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를 넘지 않는다.)

 

그런 맥락에서, 하느님의 절대시간은 <안다>와 <모른다>의 이 교호작용이 무엇인가를 성령께 맡겨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시사한다. 시간을 성령께 맡긴다는 것, 모든 관계를 성령께 맡긴다는 것이 <모른다>의 영역인 것이다. 우리가 습관처럼 말하는 하느님의 뜻에 맡긴다는 것은 <모른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이다. 그것은 완전한 판단중지를 하는 것이다. 우리는 과거의 사건을, 혹은 시간을 바탕으로 그 무엇을 판단하거나 재단한다면 애주애인의 집은 늘 사상누각이 된다.

 

과거가 없다면 사실 아무 것도 우리는 판단할 수 없고, 판단할 수 없기에 이해할 수 없다. 그런 맥락에서 <모른다>는 것,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은 사실 자비이자, 용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과거가 없다면 사실 미래도 없다. 미래는 언제나 과거를 바탕으로 규정한 오지 않은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아무도 모른다는 것은 오늘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는 언명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관계의 선택적 과거의 기억을 잊어주는 것이다.

 

그날과 그 시간은 시간 개념이 아니다. 새로운 시간개념 앞에 설 때, 우리는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지닌 존재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그 무엇도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모든 신앙의 선조들은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채 아버지의 집을 떠나 아버지의 집으로 갔다. 우리는 그들과 다르다. 우리는 그리스도라는 빛을 보고 아버지의 집을 찾았기 때문이다. 

 

 

글을 마치며,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4 “그 무렵 큰 환난에 뒤이어 해는 어두워지고 달은 빛을 내지 않으며 25 별들은 하늘에서 떨어지고 하늘의 세력들은 흔들릴 것이다. 26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큰 권능과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27 그때에 사람의 아들은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가 선택한 이들을 땅끝에서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을 것이다. Ⓑ28 너희는 무화과나무를 보고 그 비유를 깨달아라. 어느덧 가지가 부드러워지고 잎이 돋으면 여름이 가까이 온 줄 알게 된다. 29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사람의 아들이 문 가까이 온 줄 알아라. 30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이 모든 일이 일어날 것이다. 31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32 그러나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