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담호, 한국관광공사 김지영
나르시시즘과 멜랑콜리아를 넘어 창조의 아침으로
연중32주,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를 중심으로
1. 박정대, 「어떤 저항의 멜랑콜리」
참 무모한 꿈을 꾸었구나 / 그러나 아름다웠던 꿈/꿈에서 깨어나 물 한 잔 마시고/고요히 담배를 피우는 새벽에는 홀로 생각한다/ 참 무섭도록 아름다운 꿈을 꾸었구나/꿈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으나/꿈의 바깥도 늘 스산한 바람이 불고/날씨는 엉망이었으나/가져가야 할, 내가 꾸려가야 할/생의 낱낱의 조각들 속에서/그래도 끝까지 챙길 것은 그대의 이름/ 참 무모해서 무섭도록 아름다운 꿈을 꾸었구나/꿈에서 깨어나 다시 먼 꿈을 바라보나니/생은 급류에 휩쓸려와/세월의 강변에 버려진 작은 돌멩이 하나/단단하고 외로웠던 것/너도 꿈을 꾸었겠지/고단하고 외로운 꿈/무섭도록 아름다웠던 꿈
박정대 시인의 「어떤 저항의 멜랑콜리」 는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건가? “나는 늘 등외에 있는 삶이었고 세상의 통계에 잡히지 않는 삶을 꿈꾸었소”라고 말하는 시인은 ‘어떤 저항의 멜랑콜리’를 생내적으로 그리워한다. “무섭도록 아름다웠던 꿈”과 근원적인 저항의 감각이 “한때 모든 노래는 사랑”이었고 “혁명”이었다는 인식이 시인의 시세계를 구축한다.
시인은 모두 자유로운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들이 꿈 역시 무한한 자유의 꿈이다. 그런데 현실에서 그 꿈은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다. 남들이 꾸지 못한 꿈을 꾼 것은 아름답지만 그것은 이룰 수 없다는 점에서 참으로 참혹하다. 참 무섭도록 아름다운 꿈을 꾸었구나!라는 반복적인 독백은 시인이 갖고 있는 멜랑콜리의 정체라고 할 수 있다. 멜랑콜리아를 갖지 못한 시인은 사실 시를 쓰지 못한다. 그런데 그 멜랑콜리아는 한 생활인으로써는 참으로 참혹한 일이다. 중심부 담론에 끌리지 않은 심장 때문에, 늘 주변인으로 살아야 하는 비현실감이다. 죽음체험이다.
결국 사랑과 죽음이라는 근원적 경험 속에서 멜랑콜리가 발원하기 때문에, 멜랑콜리는 시인의 존재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아름다운 꿈은 참혹한 혹은 무섭도록이라는 형용사가 붙는지도 모른다. 아름다운 꿈은 시인이 떠맡아야 하는 짐이자 내려놓지 못하는 존재 이유다. 창작의 자유를 확보하기 위해서 자신의 전부를 걸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시인은 멜랑꼴이아에 저항하지만 완벽하게 저항하지는 않는다. 멜랑콜리아에는 우울한 담즙만있는 것이 아니라 나르시시즘이라는 달콤한 자기 도취도 있기 때문이다.
“내가 꾸려가야 할/생의 낱낱의 조각들 속에서/그래도 끝까지 챙길 것은 그대의 이름 / 참 무모해서 무섭도록 아름다운 꿈을 꾸었구나”에서 그대의 이름은 연인일 수도 있고, 시인 자신일 수도 있고, 모든 시인들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자유로운 창작자는 모두 자기존재감이 실린 존재의 짐에 고통받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멜랑콜리라는 어둡고 무거운 기분에 젖어 있을 수밖에 없다. 역설적으로 나르시즘을 느끼며, 비오는 거리를 걸어가는 축축한 담즙, 멜랑콜리아는 바로 모든 예술가, 시인의 낙인이기 때문이다.
용담호 / 사진=게티이미지뱅크
2. 멜랑콜리를 떠받치는 최후의 바탕은 양가감정 혹은 동일화가 아니라 바로 나르시시즘이다(프로이드)
멜랑콜리하면 우리는 깊은 고독은 숭고하지만 두려운 방식으로 그러하다(칸트)는 명제를 던진 칸트를 지나칠 수 없다.
칸트는 모든 철학은 그가 신을 인정하든 안하든 결국 형이상학으로 수렴된다는 점에서 철학이 말하고자 하는 진리 역시 멜랑콜리아melancholia의 경험 속에서만 발견된다고 보았다. 칸트는 사유의 결절점이 바로 죽음에 비견되는 절대고독을 통과하는 과정에서 이 멜랑콜리아를 겪어내는데, 그것은 예술 일반과 달리 숭고미와 결합하거나 비장미와 결합하기에 인간은 사유를 통해 아주 <아폴로적인 밝은 진리, 숭고함으로 위대해지거나, 디오니소스적 비장미로 염세적으로 아주 위태로워지는>것을 경험한다고 보았다.
그런 맥락에서 칸트는 『판단력 비판』, 『고찰』, 「아름다움과 숭고함의 감정에 관한 고찰」에서 ‘숭고(τὸὕψος/sublime/Erhabene)’를 나르시즘, 멜랑콜리, 고독과 연결하고 있다. 그런데 모든 멜랑콜리아를 경험한 이들은 자신의 심연에서 허무를 넘어설 때에만 지혜, 혹은 숭고함 진리를 얻는다고 본 것이다.
칸트는 『고찰』에서 “깊은 고독은 숭고하지만 두려운 방식으로 그러하다.”라고 말한다. 두려우리만치 깊은 고독은 숭고한 대상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도리어 숭고한 ‘멜랑콜리melancholy’의 핵심에 고독이 자리 잡고 있다고 바라본 것이다. 이는 그 주체가 나르시시즘에 잠기지 않으면 이를 수 없다는 점에서 멜랑콜리는 불가피하게 나르시스트의 특징적 성격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나르시스트의 고독은 칸트적 멜랑콜리의 본질이라 할 수 있다. 칸트에게 ‘숭고함’은 ‘나르시스트-멜랑콜리-고독’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칸트의 글을 재인용하여 읽어본다.
①멜랑콜리한 우울한 기분을 가진 사람은 자기 자신에 관계하는 모든 것에 큰 의미를 부여하며, 모든 곳에서 우울의 원인을 발견하고, 다혈질인 사람이 성공의 희망으로부터 시작하는 데 반해서, 그는 무엇보다도 어려움에 주의를 기울인다. 그래서 다혈질인 사람이 단지 표면적인 것만을 생각하는 데 반해서, 감상적 우울질을 가진 사람은 자기 내면의 심연을 침잠한다. 그 심연에는 어떤 힘이 있다.
칸트는 아름다움을 인간 본성과 연관되어 있고, 숭고는 멜랑콜리 기질을 가진 사람과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멜랑콜리는 고대 의학에 기초를 둔 해부학적 관점에서 본 것이다. 칸트는 우리가 단지 영혼에만 어떤 개별자의 기질은 종속시킬 수 없다는 점에 착안한다. 또한 인간의 신체적인 측면을 신비스럽게도 영혼과 공동 작용 원인으로서 가질 수도 있다는 점을 주목했다. 인간을 파악하는 하나의 방법인 기질은 영혼에만 귀속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영혼과 육체 어느 하나로 환원할 수 없는 미지의 영역으로 바라보기에 생명은 그 자체로 “신비스럽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칸트 철학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멜랑콜리는 ‘자기중심성’ 즉 ‘나르시즘’에 기반한다. 멜랑콜리는 자기중심적 인간에게서 주로 나타난다. 그에게 자신과 매개되지 않는 모든 것은 무의미하며 공허한 타자로 남는다. 물론 여기에서 ‘나’란 생각하는 주체, 이성적 주체를 뜻할 수도 있고, 한갓 주관적인 개체를 뜻할 수도 있다. 이 멜랑콜리는 미학적으로 예민한 감수성을 발현시키기도 하고 병리적인 우울증을 유발하기도 한다. 어떤 경우든 멜랑콜리는 ‘나’가 세계의 중심에 있으며, 모든 것을 ‘나’로 환원시키고 수렴시키는 나르시스트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②악덕과 도덕적 위반 자체도 종종 숭고함이나 아름다움의 몇몇 특징들을 이끌어낸다. 이것을 이성으로써 증명할 수는 없겠지만, 그런 것들이 적어도 우리의 감각적인(sinnlich) 감정에서 현상하는 것처럼 그렇다. 강건한 종류의 모든 정념은 ‘심미적-숭고’인데, 예를 들면 분노, 심지어 절망이 그것이다.
칸트는 나르시시즘의 멜랑콜리한 정념을 숭고와 연결짓는 데 그의 주저 『판단력 비판』에서 반복적으로 제시된다. 멜랑콜리의 핵심에는 고대 의학의 연장선에서 쓸개로 상징되는 분노(절망의 다른 표현)의 정념이 놓여 있으며, 그것은 심미적으로 볼 때, 멜랑콜리의 숭고성을 주조한다고 보았다.
③대담하게 높이 솟아올라 있는 위협적인 절벽, 번개와 우뢰를 몰고 다가오는 하늘 높이 피어있는 먹구름, 엄청난 파괴력을 지닌 화산, 폐허를 남기고 지나가는 태풍, 파도가 치솟는 끝없는 대양, 힘차게 쏟아져 내리는 폭포 같은 것들은 그것들이 지니는 위력과 비교할 때 우리의 저항력은 무의미하고 사소한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러나 우리가 안전한 곳에 있기만 하다면 그 광경은 두려우면 두려울수록 더욱 우리의 마음을 매혹한다.
자연의 절대적인 세계의 크기는 연약한 인간에게 가공할만한 두려움의 대상이다. 자기를 위협하는 압도적인 대상은 자기보존 본능을 두려움이란 형태로 드러낸다. 절대적이고 무한한 크기와 그런 힘에 압도당한 상태는 두렵지만 동시에 ‘매혹적’이다. “두려우면 두려울수록” 매혹의 강도가 더욱 커진다는 것에서 멜랑콜리는 심연에서 솟구치게 된다.
④우리가 이러한 대상들을 기꺼이 숭고하다고 부르는 것은 그 대상들이 정신력을 일상적인 범용 이상으로 고양시켜 주며 또 우리의 내면에 전혀 다른 종류의 저항능력이 있어서 그러한 저항능력이 우리에게 자연의 외관상의 절대적인 힘에 도전할 수 있는 용기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어떻게 ‘멜랑콜리melancholy’가 ‘숭고한 아름다움’과 결합할 수 있을까?
예컨대, 어마어마한 크기의 자연 앞에서 인간은 일단 그 스케일에 압도당한다. 그런 자연의 힘은 연약한 인간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나 ‘상대적인 크기에 유한한 위력’을 지닌 것에 불과하다는 점을 파악하게 되면서 이를 극복한다. 절대적인 크기의 무한한 힘은 자연에는 그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으며, 오로지 무한과 절대를 ‘사유’할 수 있는 인간의 ‘이성’은 자연을 넘어서는 초현상계에 접근할 수 있다. 여기서 사유할 수 있는 이성만이 멜랑콜리의 병리적 현상으로 우울에 침잠되지 않고 자신을 들어올리는 숭고미를 드러낼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런 숭고감정의 반전 메카니즘은 광적인 멜랑콜리의 메카니즘과 동일하다. 둘 모두 절망과 두려움에서 그것을 극복한 자기고양의 감정이기 때문이다.
칸트의 해석에 따르면 멜랑콜리는 자기의식이 과도하게 작동해서 생겨나지만,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이성을 통해 그 두려움을 극복한다. 그는 자신보다 크고 뛰어나고 강한 타자를 만나 어떤 방식으로든 그것을 동화시키는 자기고양(自己高揚)을 시도한다. 그리고 이런 자기고양․자기상승의 희열이 드높이 치솟는 숭고(崇高)한 감정을 일으킨다. 칸트의 멜랑콜리는 숭고한 멜랑콜리이고 그것의 정체는 이성을 통한 자기고양의 감정이다. 이런 멜랑콜리는 숭고하지만 그러나 고독하다. 왜냐하면 숭고한 멜랑콜리는 결국 자기중심적, 자기 심연으로 침잠하는 나르시스트의 고유한 감정으로 귀착되기 때문이다. 칸트는 『고찰』에서 “깊은 고독은 숭고하지만 두려운 방식으로 그러하다.” 라고 말한다. 두려우리만치 깊은 고독은 숭고한 대상 가운데 하나만이 아니다. 도리어 숭고한 멜랑콜리의 핵심부에 고독이 자리 잡고 있다.
나르시스트의 고독은 칸트적 멜랑콜리의 본질이다. 칸트의 해석에 따르면 멜랑콜리는 자기의식이 과도하게 작동해서 생겨나지만,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이성을 통해 그 두려움을 극복한다. 그는 자신보다 크고 뛰어나고 강한 타자를 만나 어떤 방식으로든 그것을 동화시키는 자기고양(自己高揚)을 시도한다. 그리고 이런 자기고양․자기상승의 희열이 드높이 치솟는 숭고(崇高)한 감정을 일으킨다. 칸트의 멜랑콜리는 숭고한 멜랑콜리이고 그것의 정체는 이성을 통한 자기고양의 감정이다. 이런 멜랑콜리는 숭고하지만 그러나 고독하다. 왜냐하면 숭고한 멜랑콜리는 결국 자기중심적, 자기 심연으로 침잠하는 나르시스트의 고유한 감정으로 귀착되기 때문이다. 칸트는 『고찰』에서 “깊은 고독은 숭고하지만 두려운 방식으로 그러하다.” 라고 말한다. 두려우리만치 깊은 고독은 숭고한 대상 가운데 하나만이 아니다. 도리어 숭고한 멜랑콜리의 핵심부에 고독이 자리 잡고 있다. 나르시스트의 고독은 칸트적 멜랑콜리의 본질이다.
'미학 이전의 미학'이라고 일컬어지는 칸트의 『고찰 』 은 임마누엘 칸트로 하여금 근대 철학의 완성자로 자리매김하는데 일조했다. 이러한 그의 업적은 미학 영역에서도 적지 않아서 칸트 미학이 집대성되어 있다고 평가받는 『판단력 비판』(1790)은 미학사에 일대 전환점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예술을 학문이나 도덕의 범주 내에서 파악하려는 기존의 시각에서 벗어나 학문과 도덕, 예술 각 영역의 근대적 분화와 독자성을 강조하고 나아가 예술의 자율성을 정립했다. 칸트는 이를 아름다움과 숭고함의 감정에 관한 『고찰』로 『판단력 비판』보다 26년 앞선 1765년에 것으로 칸트 미학의 단초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기존의 칸트의 사상이 세 비판서를 저술한 시점 이전인 ‘비판 이전’과 그 이후인 ‘비판 이후’로 단절하여 파악됨으로써 『고찰』의 중요성은 상대적으로 간과되어왔다. 그러나 이 책에서 드러난 숭고함과 아름다움, 이에 상응하는 느낌으로서의 감정이라는 단초가 이후 비판시리즈에서 발전적으로 계승되어 보다 엄밀한 개념들을 통해 개진된다는 점에서 젊은 시절, 칸트가 평생에 걸친 미학적 고민들을 숙고한 흔적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미학 이전의 미학’으로 규정할 수 있다. 이성과 감정의 종합은 미학은 어떠한 지형도는 주관적인 감정을 아름다움의 주요한 계기로 인식하는 정감론 미학과 대상에 내재된 객관적 속성을 파악하고자 하는 이성론 미학으로 대별된다. 억압된 감각과 감정을 구제될 뿐만 아니라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는 두 가지 근원, 즉 이성과 감정의 종합이 시도된다. 다시 말해 칸트는 아름다움을 개념이 아닌 감정으로 전환시키면서도 감정이라는 주관적 판단을 객관적으로 정당화하고자 한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개별성과 보편성을 조화롭게 양립시키고자 했던 계몽주의의 적자(嫡子)로서의 칸트의 사상사적 입지점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칸트의 미학적 고민은 만약 칸트의 말대로 감정이 아름다움의 한 계기라면 어떤 이에게는 아름답게 보이는 대상이 다른 이에게는 아름답게 보이지 않을 수 있다. 칸트는 감정이 주관적인 근거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논증은 할 수 없지만 논쟁을 할 수 있는” 것이라는 말로 감정의 절대적 보편성을 주장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관적인 감각이나 느낌에 사회적 보편성이 작용한다고 보아 이를 취미라는 개념으로 규정한 경험론 미학을 수용함으로써 개별과 보편 각각의 독립적인 상황을 인정한다. 아름다움을 느끼는 우리의 감정이 일상의 구체적인 내용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한, 더욱이 아름다움의 감정을 자아내는 대상들이 범람하고 물신화되어 어떤 것이 진정한 아름다움의 감정인지 알 수 없는 이 시대에 우리는 여전히 칸트의 이러한 미학적 고민을 동시에 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3.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마르코 12,38-44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38 가르치시면서 이렇게 이르셨다. “율법 학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긴 겉옷을 입고 나다니며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즐기고, 39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잔치 때에는 윗자리를 즐긴다. 40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 이러한 자들은 더 엄중히 단죄를 받을 것이다.” 41Ⓑ 예수님께서 헌금함 맞은쪽에 앉으시어, 사람들이 헌금함에 돈을 넣는 모습을 보고 계셨다. 많은 부자들이 큰돈을 넣었다. 42 그런데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와서 렙톤 두 닢을 넣었다. 그것은 콰드란스 한 닢인 셈이다. 43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44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라고 전하는 마르코 12,38-44은 율법학자들을 조심하여라(마태오23,1-12/루카20,45-47)와 가난한 과부의 헌금(루카21,1-4)을 연결하여 율사들은 위선과 거짓 신앙의 표본으로 그리고 가난한 괴부는 참 신앙의 귀감으로 전한다. 또한 돈 많은 부자와 과부의 헌금을 대비하여 봉헌의 진정성이 무엇인가를 전하고 있다. 이 두 주제는 행위가 아니라 마음에 초점을 두었다는 점에서 우리 마음은 은총의 보고라는 마르코 복음사가의 빈자의 영성이 초점화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마르코 11,27~12,34까지 있었던 유대 종교지도들과 다섯 번의 논쟁의 끝에 율법학자들의 종교적 위선과 부자들의 포만감과 가난한 과부를 대비해 제자됨의 본보기를 가르치신다. 유대 종교인들이 갖고 있는 주의주장이 아니라 그들의 행위를 문제 삼은 것이다. 모든 악의 근원이 마음의 행로라는 것을 강조했던 7장, 1-23을 다시 한 번 강조한 것이다. 이는 겉으로 드러난 행위보다 그 사람의 마음에 주목하신 예수님의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
35절, 38절, 41절에 걸친 세 번의 가르치심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가에 대한 마르코복음사가의 답이 담겨있다. 이 부분은 예수께서 행하신 공적인 가르침의 마지막 부분이다. 이 가르침은 교회에 주어진 마지막 가르침이라는 점에서 이 가르침의 근간이 흔들리면 교회의 존재이유가 흔들린다고 할 수 있다. 교회밖에서도 돈, 교회 안에서도 돈이라면 삶의 피로감을 어디서 위로받을 수 있겠는가?
그런 맥락에서 과부는 궁핍함에도 불구하고 가진 모든 것을 남김없이 바쳤다는 것을, 교회에 전재산을 바치라는 아전인수로 오독하면 안 된다고 할 수 있다.
오히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장차 하실 십자가 수난의 예형으로 바라보아야 할 주제이다. 모든 것을 스스로 바친다는 것은 그 자신이 누구의 창조물인지를 모르면 할 수 없는 행위다. <넣었다>의 원형 <바치다>는 동사는 언제나 그 가운데 그 무엇도 개입될 수 없는 애주애인의 사랑이 담겨있다.
Ⓒ그분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여러분이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셨습니다.(2코린토8,9)
연중32주에 그 누구보다도 많이 가졌음에도 한없이 결핍되어 시선의 노예가 되었던 율법학자와 부자들의 면면은 그 누구의 초상인가를 성찰해야 할 이유다.
Ⓐ는 율법학자들의 위선과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38 가르치시면서 이렇게 이르셨다. “율법 학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긴 겉옷을 입고 나다니며,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즐기고, 39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잔치 때에는 윗자리를 즐긴다. 40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 이러한 자들은 더 엄중히 단죄를 받을 것이다.”
여기서 율법학자들의 위선과 모순에 대한 비판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으뜸 계명이-애주애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던 이들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이 타자의 시선에 연연한 행위중심적인 신앙으로 성전이 무엇을 하는 곳이며 첫째가 꼴찌되고 꼴찌가 첫째된다는 신앙의 길을 망각했다는 점에서 그들은 스스로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음을 토로한 가장 불쌍한 이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 중심엔 하느님도 없고 이웃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타인의 시선에 포로가 된 가난한 자기 자신을 간신히 버티고 있었던 이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밖에서 찾을 수 없는 것을 밖에서 찾으려고 하였던 이들이다. 존재의 포만감을 타인의 인정에서 찾으려 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613개의 계명을 지키면서도 그들은 거룩한 하느님의 사람이 되지 못했다. 성전에서 하느님을 만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성전에서 가장 오래 머물렀음에도 하느님을 만나지 못했다. 하느님을 만났지 못했기에 이웃을 알지 못했다.
하느님을 믿는 것은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다. 그것은 실은 자신을 만나지 못했고 자신을 믿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들이 알 수 없었던 마음의 길, 자기 마음의 통로를 몰랐기 때문에 자신이 누군지 몰랐다고 할 수 있다.
어떤 영성가들은 이렇게 전한다. <하느님 앞에서 겸손해지고, 하느님 안에서 위대해져라>
그렇다면 41절 이후에 나오는 제자의 귀감으로 삼는 가난한 과부, 한없이 겸손하고 한없이 위대한 이 여인! 그녀는 누구에게 본질적인 존재 이유를 배운 것일까? 그녀는 봉헌의 의미를 통해 이름도 없는 그러나 누구에게도, 무엇에도 위축되지 않은 제자의 길을 갈 수 있었던 것일까? 과부는 무엇으로 생존을 유지하려 한 것일까? 우리는 여러가지 질문을 그녀에게 던질 수 있다.
Ⓑ 예수님께서 헌금함 맞은쪽에 앉으시어, 사람들이 헌금함에 돈을 넣는 모습을 보고 계셨다. 많은 부자들이 큰돈을 넣었다. 42 그런데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와서 렙톤 두 닢을 넣었다. 그것은 콰드란스 한 닢인 셈이다. 43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44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
과부가 헌금한 렙돈(λεπτόν, Lepton)은 당대에 가장 작은 화폐 단위로 성경에서 함께 언급되는 데나리온/데나리우스와 비교한다면 1 데나리온은 대략 128 렙돈에 해당한다. 이 가치를 현대 대한민국 원 단위로 환산해본다면 1 데나리온은 성경 등에서 당대 일용직 노동자의 하루 품삯으로 언급되기 때문에 이를 현대 한국의 최저시급 9,620원 그리고 8시간 근로(76,960원)를 기준으로 계산한다면 2 렙톤은 약 1200원 정도에 해당한다. 요즘으로 치면 컵라면 한개 정도 살 수 있는 금액이다. 삼립빵이나 바나나 우유도 살 수 없는 돈이다.
신구약 전체에서 과부 고아 이방인은 생존 위기에 내몰린 이들로 자주 거론된다. 그럼에도 그들은 하느님의 심장과 직접 연결된 끈을 갖고 있는 이들로 불린다. 성경 전체에 의하면 과부들은 가진 게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눈여겨보신다. 그리고 그녀들이 울부짖으며 바치는 기도의 응답을 즉시 받는다. 바로 그러한 이유로 초기 공동체는 그녀들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도록 권하기조차 하였다.
Ⓓ“너희는 어떤 과부나 고아도 억눌러서는 안 된다. 너희가 그들을 억눌러 그들이 나에게 부르짖으면, 나는 그 부르짖음을 들어줄 것이다. 그러면 나는 분노를 터뜨려 칼로 너희를 죽이겠다. 그러면 너희 아내들은 과부가 되고, 너희 아들들은 고아가 될 것이다.”(탈출 22 ,21-22).
Ⓔ“무의탁 과부 곧 의지할 데 없이 홀로 된 여자는 하느님께 희망을 걸고 밤낮으로 끊임없이 간구와 기도를 드립니다.”(1티모테오 5:5).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분의 어머니와 이모, 클로파스의 아내 마리아와 마리아 막달레나가 서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선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어서 그 제자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때부터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다.”(요한19,25-27)
Ⓖ‘하느님 아버지 앞에서 깨끗하고 흠 없는 신심은, 어려움을 겪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아 주고, 세상에 물들지 않도록 자신을 지키는 것입니다'(야고보 1, 27)
41절에서 44절의 가난한 과부의 헌금과 부자의 헌금 대조는 표출된 행위가 아니라 그 마음에 초점을 두고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시선을 볼 수 있다. 과부가 헌금한 두 렙톤이 그녀가 가진 전부라는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넣었다는 것을, 그녀의 마음을 그분은 알고 계시다는 것이다. 우물가에서 만난 사마리아여인과의 대화에서 그녀가 말하지 않은 그녀의 이력을 모두 간파하신 그분의 시선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이 나를 보고 계시고 나를 알고 계신다는 것!
반면, 많은 것을 가졌음에도 타인의 시선이나 평가에 연연했던 그래서 타인을 율법으로 억압했던, 율법학자들과 돈많은 부자가 간과했던 것은 바로 하느님의 시선이었다. 사람의 마음을 보는 하느님의 시선이었다. 타인의 시선, 그리고 비교우위에서 나오는 나르시즘의 초기 형태, 자아만족 때문에 하느님이 나를 보고 계시다는 것을 망각했다는 것이다. 그와 반면 가난한 과부는 하느님 앞에 서 있는 자신을 분명히 인식했다고 할 수 있다. 나의 머리카락숫자까지 알고 계신 나의 하느님! 그것은 마음이 있다는 자기증명이라고 할 수 있다. 마음이 있다는 것은 마음의 길을 알고 있다는 것이리라.
그런 맥락에서, 신구약성서에서 자주 언급되는 가장 가난한 이의 표본인 과부 고아 이방인은 흔히 하느님의 직접 연결된 자로 불린다는 것! 하느님과 직통전화를 갖고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더할나위없는 위로와 격려의 메시지라고 할 수 있다. 교회의 주보인 성모님 역시 과부였다. 십자가의 예수님이 사도요한으로 상징되는 교회에 마지막으로 부탁한 이가 바로 홀로된 어머님이었다.
남편없이 홀로 사는 여인은 혹은 아내 없이 홀로사는 남자는 멜랑콜리에 쉽게 빠질 수 있다. 생체적으로 우울한 답즙이 더 많이 나올 수 있다. 그것이 연민의 도를 넘으면 분리의 나르시시즘으로 넘어간다. 인간이 포기할 수 없는 감정 두 가지 감정은 자신을 불쌍하게 여기는 자기연민과 자신이 남다르다고 생각하는 자기도취이다.
사도행전에서는 교회의 부제제도가 만들어진 이유가 바로 과부 고아 이방인들에 대한 나눔의 효율성 때문이었다고 전한다. 첫 순교자 스테파노 성인, 라우렌시오 성인은 모두 이 나눔의 봉사를 위임받은 부제들이었다. 그런데 연중 32주에 거론되는 홀로된 여인은 오히려 교회에 자신의 전 재산을 바쳤다는 것이다. 수혜의 대상이 아니라 시혜의 주체가 되었다는 것이다. 받아야 하는 사람이 주었다는 것이다. 그녀는 분명 나르시시즘과 멜랑콜리아라는 용어를 모르지만 인간의 어떤 우울한 상태를 극복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 그녀의 종교적 감수성이 자신이 하느님의 창조물이라는 것을 알아보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자신이 하느님의 창조물이라는 것을 알아본다는 것은 이 세상의 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자리를 알아본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때 자기 연민의 멜랑콜리도 없고, 자기도취의 나르시시즘도 없어진다. 자기 연민과 자기도치는 같은 이름이다. 분리의 이름이다. 그것을 넘을 수 있었던 여인은 많이 봉헌하면 부자된다는 사후보상의 원칙에도 묶이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녀의 행위를 희생으로 바라보면 안되는 이유다.
자신이 하느님의 창조물이라는 것을 안다는 것은 홀로된 여인에게 주어진 직접 계시에 해당한다. 그녀는 시선에 얶매인 이들이 알 수 없는 기쁨을 알고 있었다. 유배중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기뻐하라고 외친 이사야의 목소리, 매사에 기뻐하라고 전한 바오로 사도의 목소리가 오버랩되는 부분이다. 가난한 자의 아버지인 성령이 함께하지 않으면 그런 영적 기쁨의 상태를 맛보지 못할 것이다.
삶의 매 순간은 우리에게 기회다. 성전에서의 봉헌은 그 누구에게 봉헌하는 것인가? 우리 마음의 예표로 지난주에 묵상한 애주애인의 구체화라 할 수 있다. 얼마나가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봉헌했는지가 중요한 이유다. <나>라는 나르시시즘과 <나>라는 멜랑콜리아를 넘으면 우리는 애주애인의 마음으로 언제나 기쁘게, 감사하게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봉헌할 수 있다. 나눌 수 있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보시니 참 좋았다>는 그 창조의 아침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글을 마치며,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38 가르치시면서 이렇게 이르셨다. “율법 학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긴 겉옷을 입고 나다니며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즐기고, 39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잔치 때에는 윗자리를 즐긴다. 40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 이러한 자들은 더 엄중히 단죄를 받을 것이다.” 41Ⓑ 예수님께서 헌금함 맞은쪽에 앉으시어, 사람들이 헌금함에 돈을 넣는 모습을 보고 계셨다. 많은 부자들이 큰돈을 넣었다. 42 그런데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와서 렙톤 두 닢을 넣었다. 그것은 콰드란스 한 닢인 셈이다. 43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44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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