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마리안나 수녀님께서 감사합니다!
운명처럼 반드시 '나'와 대면케 될지니, 하여 '나'란 나의 생명이란(유치환)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 “내가 임금이라고 네가 말하고 있다.”를 중심으로
1. 유치환의 「생명의 서」
나의 지식이 독한 회의(懷疑)를 구(救)하지 못하고 / 내 또한 삶의 애증(愛憎)을 다 짐지지 못하여/병든 나무처럼 생명이 부대낄 때/저 머나먼 아라비아의 사막으로 나는 가자.//거기는 한 번 뜬 백일(白日)이 불사신같이 작열(灼熱)하고/일체가 모래 속에 사멸한 영겁(永劫)의 허적(虛寂)에 / 오직 알라의 신(神)만이 / 밤마다 고민하고 방황하는 열사(熱沙)의 끝.//그 열렬한 고독(孤獨) 가운데/ 옷자락을 나부끼고 호올로 서면 / 운명처럼 반드시 '나'와 대면케 될지니/ 하여 '나'란 나의 생명이란/그 원시의 본연한 자태를 다시 배우지 못하거든 / 차라리 나는 어느 사구(沙丘)에 회한(悔恨) 없는 백골을 쪼이리라
유치환의 「생명의 서」에는 우리 안에 있는 두 사람의 ‘나’가 등장한다. '병든 나무'는 일상적 자아에 대한 회의와 절망을 상징한다면, 작은 따음표가 쳐져 있는 '나'는 본질적 자아를 의미한다. 화자는 본질적인 자아를 지닌 ‘나’에 도달하기 위해 신조차 고민하는 열사의 끝 '아라비아의 사막'으로 가고자 한다. 그곳은 고행, 극한상황, 죽음 등을 나타내는 시간이자 공간이다.
화자는 내가 누구인가라는 본질을 깨달으려는 갈망 때문에 열렬한 사막의 고독이라는 고통 속에서도 자신의 운명과 대결해 보려한다. 그 과정에서 비로소 내가 나의 운명이라는 것을 알 것이기 때문이다. 본질적 자아인 '나'를 배우겠다는 자세는 또한 아라비아 사막 속에서도 그 답을 얻지 못한다면 차라리 사구(沙丘), 즉 모래 언덕에 쓰러져 죽어 자신의 백골(白骨)을 쪼아 먹히겠다, 혹은 햇볕아래서 산화하겠다는 강인한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유치환의 「생명의 서」에는 ‘운명처럼 반드시 '나'와 대면케 될지니/ 하여 '나'란 나의 생명이란’으로 모아지면서 나의 운명이 곧 ‘나'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남마리안나 수녀님께서 감사합니다!
2. 생에의 의지는 곧 권력에의 의지(쇼펜하우어에서 니체로)
내가 곧 나의 운명이라는 명제는 모든 사람이 지닌 운명, 숙제일 것이다. 그것을 생에의 의지로, 생의 의지는 곧 권력에의 의지로 바라본 이들이 있다.
쇼펜하우어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생에의 의지를 나의 운명이라고 바라본다. 인간의 본능적 요소가 지성적 요소보다 우세하다는 주장을 상당히 정교한 이론으로 구축했다. 그는 생물학ㆍ생리학 등의 연구 성과를 반영해서 당시까지는 찾아볼 수 없던, 세계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방식의 설명을 시도했다. 쇼펜하우어는 인간에게 그렇게 행동하도록 만드는 힘을 ‘의지’라 칭했다. 의지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그것으로 존재하게 하는 힘이다. 쇼펜하우어에게 인간의 본질은 이성이 아니라 의지다. 쇼펜하우어는 세상 모든 것이 의지에 의한 것이라고 하면서 인간과 인생에 대한 독창적인 철학을 개진했다. 플라톤을 필두로 하는 이성 중심 철학의 전통에서는 몸은 감각적인 것, 가변적인 것, 부수적인 것으로, 그다지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몸은 인간에게 가장 생생한 현실이니 몸을 도외시하면 인간에 대한 이해를 절반만 하게 된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몸을 중시하는 철학의 중요한 원천이 된다. 쇼펜하우어에게 신체는 의지와 표상에 걸쳐 있으며 세계를 인식하는 출발점이고 자신에게 구현된 의지를 인식하는 조건이다.
쇼펜하우어는 그러한 삶의 맹목성을 인정하고, 자기 중심성을 탈피하면 남들도 나와 마찬가지로 그 맹목성 때문에 힘들어하는 인생의 동지, 이 고통의 바다를 같이 건너야 할 동료라는 것을 알게 된다고 생각했다. 나만 고통을 당하는 것이 아니고 저 사람도 이 고통의 바다를 건너느라 힘들다는 것을 알게 되면 자연스럽게 타인의 고통에 대한 연민이 생기고, 타인의 고통을 모른 체하게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생의 동지에게 한 번이라도 더 손을 내밀어주게 되고, 그럼으로써 남들과 다정하게 살게 된다는 것이다. 의지에 인식의 빛을 비춘다고 해도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지금 여기서 무엇을 소망하는가’다. 인간의 의욕이 전체적으로 무엇을 향하고 있는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는 말할 수 없다. 의지는 맹목적으로 움직이고, 인간에게는 성격으로 현상화될 뿐이다.
‘세계는 나의 표상이다.’ 이 말은 삶을 살면서 인식하는 모든 존재자에게 적용되는 진리다. 하지만 인간만이 이 진리를 반성적, 추상적으로 의식할 수 있고, 인간이 실제로 이것을 의식할 때 철학적인 사려 깊음이 생긴다. 이 경우 인간은 태양과 대지를 아는 것이 아니라 태양을 보는 눈과 대지를 느끼는 손을 지니고 있음에 불과하다는 것, 인간을 에워싸고 있는 세계는 표상으로서만 존재한다는 것, 즉 세계는 다른 존재인 인간이라는 표상하는 자와 관계함으로써 존재한다는 것이 그에게 분명하고 확실해진다.
현상은 표상을 의미할 뿐 그 이상의 무엇도 아니다. 어떤 종류든 모든 표상, 즉 모든 객관은 현상이다. 하지만 의지만이 사물 자체다. 의지 그 자체는 결코 표상이 아니고 표상과 전적으로 다르다. 모든 표상, 모든 객관은 의지가 현상으로 나타나 가시화된 것, 즉 의지의 객관성이다. 의지는 모든 개체 및 전체의 가장 심오한 부분이자 핵심이다. 의지는 맹목적으로 작용하는 모든 자연력 속에 현상하고 숙고를 거친 인간의 행동 속에서도 현상한다.
모든 의욕은 욕구에서, 즉 결핍이나 고뇌에서 생긴다. 이 욕구는 충족되면 끝난다. 하지만 하나의 소망이 성취되더라도 적어도 열 개의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고 남는다. 더구나 욕망은 오래 지속되고, 요구는 끝없이 계속된다. 즉, 충족은 짧은 시간 동안 불충분하게 이루어진다. 그런데 심지어 최종적인 충족 자체도 겉보기에만 그럴 뿐, 소망이 하나 성취되면 즉시 새로운 소망이 생긴다. 의욕한 대상을 얻지 못하면 확고하고 지속적인 충족을 얻을 수 없다.
모든 충족, 또는 흔히 행복이라 부르는 것은 원래 본질적으로 언제나 소극적인 것에 불과하며 결코 적극적인 것이라고 할 수 없다. 그것은 근원적으로 저절로 우리에게 와서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어떤 소망이 충족되는 것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소망, 즉 부족이란 모든 향유의 선행 조건이기 때문이다.
의지의 자유로운 부정이나 포기와 함께 이 모든 현상도 이제 없어진다. 목표도 휴식도 없는 계속된 소동과 혼잡이 없어지고, 단계적으로 이어지는 여러 형식의 다양성이 없어지며, 의지와 더불어 그 전체 현상이 없어지고, 최종적으로 이 현상의 일반적 형식인 시간과 공간도, 그 현상의 궁극적인 기본 형식인 주관과 객관도 없어진다. 의지가 없으면 표상도 세계도 없다.
우리는 자신의 내면적 핵심에서 나오는 소리에 충실하면서 자기 자신을 차분히 알아가야 한다. 다양한 경험을 해보면서 그 일들에 자신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잘 살펴야 한다. 자기 자신 안에 있는 외부자의 목소리도 느껴보고, 자신의 본래적 자기에게서 나오는 소리도 들어야 한다. 본래적인 자기 인식을 획득한다는 것이 바로 이러한 것이다. 이를 쇼펜하우어는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 계속 충실하면서 자신의 다이몬에 이끌려 자신의 인생행로를 걸어야 한다”는 표현으로 전달한다.
‘세계는 나의 표상이다.’ 이 말은 삶을 살면서 인식하는 모든 존재자에게 적용되는 진리다. 라는 명제에서 ‘의지가 없으면 표상도 세계도 없다’는 명제를 낳은 쇼펜하우어는 프로이트와 니체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그는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 카프카, 헤르만 헤세, 에밀 졸라 등 수많은 문호로부터 그는 존경을 받아 왔다. 또한 니체는 그의 저서를 읽고 감명을 받아 철학자가 되기로 결심했고, 비트겐슈타인은 그의 철학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독자적인 철학을 시작했으며, 아인슈타인은 그가 남긴 저술들을 접하고 상상력의 나래를 펼쳐 상대성이론을 정립했다고 말할 정도이다.
무엇보다 쇼펜하우어가 펼친 ‘의지 철학’은 현대 심리학에 큰 영향을 남겼다. 쇼펜하우어는 인간 존재가 이성과 합리적인 판단 능력을 갖고 질서정연한 삶을 살아간다는 헤겔의 순수이성의 전제를 정면으로 거부하고, 인간을 움직이는 실질적인 동력이 삶을 보존하려는 맹목적이고도 무의식적인 ‘의지’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견해는 무의식에 초점을 맞춘 근대 정신분석학의 기본으로, 프로이트는 정신분석학의 기초에 해당하는 ‘억압’을 쇼펜하우어가 먼저 제대로 설명했음을 인정했고, 집단무의식을 탐구한 카를 융, 개인심리학을 제창한 알프레드 아들러, 구조주의 정신분석학자인 자크 라캉도 그에게서 인간을 이해하는 큰 영향을 받았음을 고백했다. 이처럼 쇼펜하우어의 영향력이 여러 분야에 걸쳐 나타나는 이유는 쇼펜하우어가 인간이 처한 상황을 인간이 지닌 의지를 통해 해명하려 했고, 의지를 초월했을 때, 삶의 고통은 무無가 된다는 것에 이른다. 그는 헤겔 연구를 통해 세상의 모든 것이 정반합으로 움직이고, 그 발전 속에 이성의 힘과 원리가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쇼펜하우어는 순수 이성이 아닌 생의 의지로 세계를 파악하고자 했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이성은 두뇌 현상일 뿐이고 의지의 제약을 받는 부산물에 불과하다. 따라서 세계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이성이 아닌 의지를 통해 다가가야 한다. 인간의 인식 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능력, 즉 지성도 의지에서 생긴 제한적인 것이다. 의지란 사물들로 다양하게 객관화되는데, 이렇게 의지가 객관화된 세계가 바로 표상의 세계다. 지성으로 파악하는 세계는 표상의 세계에 불과하고, 표상의 세계가 지닌 여러 특성은 세계의 본래적 특성을 드러내지 않는다. 이러한 표상의 세계가 지닌 한계를 올바르게 인식할 때 본래의 세계, 즉 의지의 세계를 경험할 수 있는 토대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여기서 쇼펜하우어가 가장 중요시하는 의지의 세계는 살아 있는 자연의 세계다. 생물이 태어나고 자라며 번식하는 생명 현상의 본질을 그는 의지로 파악한다. 그에게 생식 행위란 삶에 대한 의지를 가장 단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인간은 이러한 자연의 의지를 자신의 자연이라 할 수 있는 ‘몸’으로 직접 경험하고, 여기서 온갖 충동, 본능, 욕망을 갖는다. 이러한 자연의 의지를 자각하는 인간은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욕구한다고 쇼펜하우어는 주장한다. 이기심이란 삶에 대한 의지를 긍정함으로써 생긴 심리 상태다. 결국 인간의 삶은 끊임없는 욕구로 관철되기 때문에 고통으로 가득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인간은 욕망을 일으키는 의지를 부정하고 그로부터 초연한 삶을 살아야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것이 쇼펜하우어가 의지를 통해 주장하는 ‘행복론’이다.
삶의 고통에 대한 문제와 형이상학적으로 대면하는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한동안 죽음을 찬양하고 삶을 무조건 체념하라는 염세주의로 알려졌다. 하지만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잘 드러나듯이, 쇼펜하우어의 사상에는 인간의 삶에 나타나는 고통에 대한 철학적인 문제 제기, 그리고 삶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치료적’ 처방이 그 근본 동인으로 작용한다. 세계가 고통으로 가득 차 있다는 그의 비관주의적 사상은 세계에 대한 진단에 있는 것이지, 그의 철학이 궁극적으로 목표하는 바는 아닌 셈이다. 서문에서 쇼펜하우어는 이 책을 이해하려면 무엇보다 칸트의 철학을 알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칸트의 주저를 읽고 깨달음을 얻는 것을 ‘장님이 녹내장 수술을 받는 것’에 비유할 정도로 그의 철학을 높이 평가했고, 칸트로부터 막대한 영향을 받았다고 고백한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 그의 철학이 가진 의미와 한계를 짚어 나간 「칸트 철학 비판」이 부록으로 실린 것도 그 때문이다.
헤겔과 칸트로부터 영향을 받은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니체의 『권력에의 의지』에서 다른 맥락으로 <의지>를 규정하기에 이른다.
“인류는 하나의 전체가 아니다. 인류는 상승하는 생명체들과 하강하는 생명체들이 풀 수 없게 서로 단단히 얽혀 있는 하나의 다양성이다. 인류는 성숙기와 고령기가 따르는 그런 젊음의 상태 같은 것에 대해선 전혀 모른다. 그러나 이 상태의 층(層)들은 서로 중첩되고 뒤섞여 있으며, 몇 천 년이 지나면 지금 우리가 보는 인간들보다 훨씬 더 젊은 유형의 인간들이 존재하게 될 것이다. 한편, 쇠퇴는 인간 역사의 모든 시기에 일어나고 있다. 찌꺼기와 쇠퇴하는 물질이 있는 곳마다, 그런 것들은 그 자체로 생명에 필수적인 과정이다. 시들고 쇠퇴하는 요소들은 제거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용감하고 창의적인 사람들은 절대로 쾌락과 고통을 종국적인 문제로 여기지 않는다. 쾌락과 고통은 부수적인 조건일 뿐이다. 무엇인가를 이루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반드시 쾌락과 고통을 똑같이 예상해야 한다. 형이상학자들과 종교인들이 쾌락과 고통의 문제를 전면으로 부각시킨다는 사실은 그들 내면에 피로와 질병이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신호이다. 그들의 눈에는 도덕의 중요성까지도 오직 도덕이 고통을 없애는 데 근본적인 조건이라는 점에 있는 것으로 비친다.”
“나의 이론은 권력 의지가 제1의 원동력이고, 이 권력 의지에서 다른 모든 동기들이 나온다는 것이다. 개인의 “행복”(모든 살아 있는 유기체들이 이것을 추구하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을 권력으로 대체하면 많은 것이 아주 쉽게 이해된다. “개인은 권력을, 보다 큰 권력을 추구한다.” 행복은 권력이 획득되었다는 감정을 나타내는 하나의 징후이며, 차이에 대한 자각이다(개인이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아니지만, 개인이 추구하던 목표가 성취될 때 행복이 나타난다. 행복은 동기가 아니라 수반되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모든 원동력은 권력 의지이며, 그 외에 육체적이거나 기능적이거나 정신적인 다른 힘은 전혀 없다는 것이 나의 이론이다.”
“이타적인 행위도 단지 이기주의의 한 종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마침내 확인되고 있다. 또 사람이 자기 자신에게 사랑을 쏟는 정도가 그 사람의 개인적 능력과 인격의 크기를 보여주는 증거라는 사실이 확인되고 있다. 요약하면, 사람은 악해질수록 더 선해지며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이 없이는 자기 자신이 될 수 없다.”
“지금 주권자 노릇을 하고 있는 권력인 군집 본능은 귀족사회의 본능과 완전히 다른 그 무엇이다. 그리고 총합의 가치는 총합을 이루고 있는 단위들의 가치에 좌우된다. 우리 사회학은 제로(0)들의 총합인 군집 본능 외에 다른 본능에 대해선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군집에서는 모든 제로가 “평등권”을 누리며, 제로가 되는 것이 도덕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바람직성’이라는 관점에서 “이러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거나 “이러해야 했었는데.”라는 식으로 하는 말에 숨은 뜻을 제대로 파악할 줄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그런 식의 의견 표현은 사물들의 전체 흐름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왜냐하면 따로 완전히 고립된 상태에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터무니없을 만큼 작은 것까지도 등에 대단히 큰 것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당신의 사소한 불공정 행위에 미래의 본질 전체가 달려 있으며, 전체는 전체 중 어느 한 작은 부분을 표적으로 한 비판으로부터 절대로 자유로울 수 없다.”
“참으로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강한 자들은 언제나 약한 자들에, 체질적으로 훌륭한 자들은 언제나 체질적으로 약한 자들에, 건강한 자들은 언제나 병들고 생리적으로 실패한 자들에 맞서 자신을 지켜야 한다. 만약에 우리가 현실로부터 도덕을 끌어낸다면, 그 도덕은 이런 내용일 것이다. ‘평균적인 사람이 예외적인 사람보다 더 소중하고, 쇠퇴한 사람이 평범한 사람보다 더 소중하다. 따라서 비(非)존재를 추구하려는 의지가 생명을 추구하려는 의지보다 더 강하다.’”
니체는 『힘에의 의지』에서 힘과 의지를 분리해서 이해하는 것을 경고하고 있다. 근본적으로 의지는 오직 힘에의 의지이며, 그 힘은 전체로서 즉, 힘과 의지를 하나로 통일한 전체로서 이해되지 않으면 안된다고 본 것이다. 힘에의 의지에 있어서 의지는 결코 근원도 아니고 존재도 아니고, 휴지(休止)없는 흐름(Fluß)에 불과하다. 흐름으로서의 의지는 원인도 결과도 아니고 작용 즉, 의지 자신이 자기에 대하여 가지는 작용일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의지가 자기 아닌 다른 그 무엇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고 항상 자기 자신을 지향한다. 이 점에 있어서 의지는 자기심화, 자기생장, 그리고 자기강화의 형식으로 향상하고 발전한다.
의지는 일종의 흐름이다라는 것으로서 언표될 때 이 흐름은 생장과 강화를 상징한다. 따라서 이러한 흐름은 더욱 강한 “많은 힘”을 뜻하기도 한다. 다시 말해서 생장과 강화로서의 흐름은 자기를 더욱 강화시키고자 하는 힘을 의미한다. 힘에의 의지에 있어서 힘은 의지의 목적이다. 의지가 목적하는 것은 바로 힘이다. 의지는 의지하되 자기를 의지하고 의지되는 자기는 이전의 자기가 아니고, 생장되고 강화되고 심화된 자기이다. 의지가 의지하는 바, 목적으로서 힘은 “더욱 강하게 함”이라는 의미를 가리킨다.
따라서 힘은 그것이 힘의 향상의 도상에 있고 그리고 “보다 더 많은 힘”을 요구하는 경우에만 힘이다. 그러나 힘이란 그것이 단순히 힘의 향상에 머물러 있을 경우 즉, 힘의 한 단계에 단순히 머물러 있을 경우 그것은 이미 힘이 아니다. 만일 힘이 힘 자신의 한 단계에 머물러 있다면 힘은 오히려 몰락하기 시작한다. 힘은 자기가 자기를 압도하고 자기를 극복하며 자기를 향상시켜 나갈 경우에 있어서만 힘으로서 작용할 뿐이다.
그 과정에서 니체는 도덕의 폐해를 강조하면서 도덕이나 진리, 정의 같은 것은 절대로 없으며 그 같은 개념의 뒤를 보면 어디나 어느 집단 또는 계급의 권력 의지가 작동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니체가 말하는 권력 의지는 생명체가 스스로를 보존하고 유지하고 발달시키려는 의지이다. 다윈의 ‘생존 본능’보다, 쇼펜하우어의 ‘생의 의지’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다. 생존 본능은 권력 의지가 힘을 발휘한 결과이지 목적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니체에겐 행복은 절대로 목표가 될 수 없는 그 무엇이기 때문이다. 확장이나 성장을 꾀하거나 저항에 맞서 성공할 때 느끼게 되는 권력 감정의 한 징후로 나타나는 것이 행복이라는 것이다. 니체가 볼 때, 쾌락과 고통은 행동 결정에 별다른 역할을 하지 않는다. 쾌락과 고통은 동기가 아니라 수반되는 요소일 뿐이다. 니체가 제시하는 권력 의지라는 개념에는 타고난 잠재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않으려 드는 인간에 대한 안타까움이 담겨 있다. 우리가 누군가의 사유를 재사유하는 이유는 어떤 사유나 주의에도 갇히지 않으려는 우리가 지닌 자유의지의 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지닌 자유의지가 곧 나의 운명이가 때문이다.
3. <내가 임금이라고 네가 말하고 있다.> 요한 18,33ㄴ-19,10
Ⓐ그때에 빌라도가 예수님께 “당신이 유다인들의 임금이오?”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은 네 생각으로 하는 말이냐?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나에 관하여 너에게 말해 준 것이냐?” 하고 되물으셨다. Ⓑ“나야 유다인이 아니잖소? 당신의 동족과 수석 사제들이 당신을 나에게 넘긴 것이오. 당신은 무슨 일을 저질렀소?” 하고 빌라도가 다시 물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다면, 내 신하들이 싸워 내가 유다인들에게 넘어가지 않게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하지 않는다.” Ⓒ빌라도가 “아무튼 당신이 임금이라는 말 아니오?”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임금이라고 네가 말하고 있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듣는다.” 38Ⓓ 빌라도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진리가 무엇이오?”(...)19,10Ⓔ 나에게 말을 하지 않을 작정이오? 나는 당신을 풀어줄 권한도 있고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다는 것을 모르시오?
<내가 임금이라고 네가 말하고 있다.>라고 전하는 요한 요한 18,33ㄴ-19,10은 공관복음(마태오27,1-2 1-14/마르코15,1-5/루카23,1-5) 공통적으로 전하는 복음으로 종교인들에게 고발당하고 세상의 권력인 빌라도에게 신문을 받으시는 예수님의 수난사를 통해 우리 삶을 끌어가는 컨트롤타워가 무엇인가를 성찰하게 한다.
요한 요한 18,33ㄴ-19,10은 여섯 개의 질문으로 구성된 빌라도의 신문은 예수의 공생활 3년을 집약하는 ‘통사’에 해당하는 것이자, 인류가 존재하는 한, 패러다임의 전환 속에서 재맥락화하여 순환-증식하여 만들어지는 중심부 담론의 전형성을 보여준다. 빌라도로 대표되는 <중심부 담론>과 예수로 상징하는 <사랑의 담론>과의 충돌이라는 측면에서 이를 바라볼 수 있다. 이는 의지의 충돌이라고 할 수 있다.
요한복음18 28~19장,16절 까지는 “그리하여 빌라도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그들에게 넘겨주었다.”에서 알 수 있듯, 표면적으로 공시적 역사 속에서 예수의 <사랑의 담론>은 패배로 결정된 듯 보인다. 그러나 통시적 역사로 본다면 예수의 승리로 끝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승리란 중심부 담론이 사라진 완전한 승리는 물론 아니라는 점에서 담론의 시작과 끝은 단절과 영속성 속에 메두사의 머리처럼 남아 있음을 알 수 있다.
두초(Duccio di Buoninsegna, 1255-1319), 손을 씻는 빌라도
빌라도로 대변되는 빌라도의 여섯 개의 질문에서 중심부 담론 구조를 추정할 수 있다. 이 담론의 구조는 이천년전에 있었던 역사적 사건의 재구성이 아니라 오늘 우리 시대의 중심부 담론이 어떻게 정신적으로 인류를 지배하고 끌어가고 있는가를 바라볼 수 있다는 점에 그 초점이 놓여있다. 인간이 자유의지라고 말하는 것이 과연 자신의 고유한 자유의지인가? 하는 질문이다.
Q1. 당신이 유다인들의 임금이오?
Q2. 당신은 무슨 일을 저질렀소?
Q3. 아무튼 당신이 임금이라는 말 아니오?
Q4. 진리가 무엇이오?
Q5. 당신은 어디서 왔소?
Q6. 나에게 말을 하지 않을 작정이오? 나는 당신을 풀어줄 권한도 있고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다는 것을 모르시오?
Q1~Q6은 1,3,6과 2,4,5의 두 질문으로 나누어진다. 1,3.6의 질문은 집단무의식이자 중심부 담론에 해당한다. 2,4,5는 빌라도의 개별적 본성에서 나온 인격의 표출이다. 아무리 악인이라도 개별적 본성이라는 것이 있다. 그 개별적 본성에서 우러나온 두려움, 질문에도 불구하고 “그리하여 빌라도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그들에게 넘겨주었다.”는 것에서 그는 결국 중심부담론에 편승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중심부 담론에서 벗어나는 두려움을 넘어설 수가 없었다.
빌라도로 대표되는 십자가사건은 ⒜주체, ⒝수혜(이익), ⒞단절과 연속성이라는 측면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담론의 주체는 <수석사제들과 원로들-군중들-빌라도> 세 그룹이다. 이 세 그룹이 만들어내는 담론의 구조를 관통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십자가 사건은 이 세 주체가 지배력을 나눠 행사된 사건이라는 점에서 푸코가 바라본 대로 담론이 지닌 어떤 ‘힘’을 추정할 수 있다. 또 쇼펜하우어와 니체의 관점에서 의지로 바라볼 수가 있다.
십자가사건의 최초의 진원지인 수석사제들과 원로들이 예수를 제거해야지만 그들이 지닌 종교적 전통을 유지할 수 있었다. 종교적 전통은 종교적 힘을 행사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그들의 종교적인 힘에 강력한 안티테제인 예수를 제거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의 죽음을 책임지고 싶지는 않았다. 그들의 욕망과 의지는 (십자가사건을 완결하기 위해서는) 두 개의 힘을 필요로 했다. 동조할 민심과 그것을 집행할 권력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수석사제들과 원로들과 빌라도는 그들의 입지를 유지하기 위한 위협적인 힘을 제거하려던 것이었지만, 정작 군중들이 얻을 수 있는 보상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호산나- 죽여라', 이 광적인 낙차에서 군중들이 얻은 이익은 무엇인가?
<고발자-군중-집행자>이 담론이 만들어지는 구조는 담론이 만들어지는 전형적인 메커니즘에 해당한다. 고발자는 자신의 의도를 정의(혹은 거룩함)로 포장한다. 그 정의는 군중들의 욕망을 선동할 수 있는 정의여야 한다. 군중들을 선동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결핍을 외부의 탓으로 전가시켜야 한다. 집행자는 군중들의 결집여부에 따라 고발자의 의도를 승인한다. 그들은 그렇게 일사분란하게 그들의 담론을 관철시켰다. 여기서 고발자와 집행자가 담론을 관철시키기 위해 필요한 여론형성에 동원되는 것이 선동에 잘 넘어가는 군중심리다. 고발자와 집행자는 실제적인 혜택의 수혜자들이지만, 군중들은 ‘심리적’인 혜택의 수혜자들이다. 군중들은 군중심리에 휩쓸려 신을 지킨 거룩함에 편승한다. 이렇게 암묵적으로 그들은 각자의 몫을 챙긴 것이다.
⒞이제, 빌라도로 대변되는 중심부담론의 단절과 연속성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빌라도의 담론은 빌라도 그 시대의 담론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21세기에 빌라도식 담론은 사라졌는가? 아니다 21세기식으로 재맥락화 했다고 할 수 있다. 21세기에 예수를 믿는 것은 박해의 대상이 아니다. 이것은 빌라도시대의 담론의 단절을 의미한다.
예수는 누구에게나 열린 세계가 되었다. 그런데 그 열린 세계가 내장하고 있는 담론은 이 세상과 진리를 동시에 취할 수 있다는 '혼혈담론'이라는 점에서 <사랑의 담론>은 여전히 착지하지 못한 부동의 담론에 해당한다. 그것이 빌라도식 담론아 낳은 혼혈담론의 연속성이다. 왜 그런가? 이 세상에도 속하고 진리에도 속한 사람이라는 경계가 무너진 담론의 유포다. 여전히 이 시대에도 세상을 끌어가는 '힘'을 누구나 원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팔아 이용하는 혼혈담론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요한 18,33ㄴ-38/19,10은 교회력으로 한 해를 마감하면서 우리가 어떤 세계에 속한 사람인가에 대해 깊은 성찰을 요구한다. 우리가 어떤 세계에 속한 사람인가를 안다는 것은 어떤 희망을 가진 사람인지, 어떤 사랑을 하려는 사람인지, 어떤 행복을 살려고 하는 사람인지, 어떤 기쁨을 기쁨이라고 하는 사람인지? 어떤 진리 때문에 자유로운지? 그러나 그 모든 질문드이 수렴되는 곳, 본직적인 질문은 나의 누구인가? 라는 질문일 것이다.
『완성해 가는 주일 강론』(오승원 이냐시오 신부님, 2022)에서 “그렇다면 가시관을 쓰고, 십자가를 짊어지신 분, 그리고 마침내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분을 우리가 왕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통해 우리가 어떤 담론에 복무해야 하는가를 묻고 있다.
Ⓕ그분은 십자가의 의미를 바꾸어 놓으신 분이셨고, 그러면서 십자가의 힘으로, 우리에게 새로운 희망을 보여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그리스도인의 희망인 그 부활은, 십자가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희망을 만나려면, 거쳐야 할 과정이 있습니다. 그 새로운 희망은 ‘모든 희망을 거스린 희망(Esperant contre toute esperance)’이었습니다.(...)‘희망을 거스린 희망’을 가질 수 있어야, 우리는 십자가가 패배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게 됩니다. Ⓗ‘그리스도 왕!’ 예수님께 붙여진 이 왕이라는 칭호는, 사실 십자가에서의 패배가 실제로 승리로 바뀌게 됩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에서의 패배는 사랑 때문이었고, 사랑은 결코 패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십자가를 사랑’이라고 기억하는 사람, 예수님을 진정한 왕으로 알아보는 사람이란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듯이, 자신이 사랑을 지녔다는 것을 증명하고, 또 증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 진정한 왕이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사랑할 줄은 아셨지만, 십자가를 이용할 줄은 모르셨던 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세상의 왕과 진정한 왕의 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의 담론에 우리 인생여정을 같이하려면 우리에게 ‘희망’ 이라는 개념이 달라져야 한다. ‘모든 희망을 거스린 희망(Esperant contre toute esperance)’이 무엇인지 바라볼 수 있을 때, 그 때 십자가는 패배의 상징이 아니라 희망의 상징이 된다. “그렇다면 ‘십자가를 사랑’이라고 기억하는 사람, 예수님을 진정한 왕으로 알아보는 사람이란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듯이, 자신이 사랑을 지녔다는 것을 증명하고, 또 증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모든 희망을 거스린 희망’이 무엇이며, 이것이 이 시대에 어떻게 가능한가? 이 답은 제자들의 여정에서 찾을 수 있다. 오직, 사랑하는 데만 초점을 맞추었을 때 가능한 그 희망이 ‘모든 희망을 거스린 희망’이라는 사실을...
강론에서 인용한 ‘고통받는 교회돕기’ 창시자인 베렌프리트 판 슈트라덴 신부님은 믿음과 사랑을 시험에 통과한 사람, 믿음과 사랑을 증거하는 이들이 바로 실패의 상징인 십자가를 통해 부활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영원한 생명의 왕을 모시는 삶이라고 역설한다.
“그리스도 신자들은 시험받고 있습니다. 박해받는 신자들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시험받습니다. 하지만 박해받지 않는 신자들은 예수님에 대한 사랑을 시험받고 있습니다. 주님께 믿음을 간직한 우리들은 우리가 믿음뿐 아니라, 사랑을 지녔다는 것도 증명해야 합니다”
21세기에도 여전히 그리스도 신자들은 어떤 시험을 받고 있다. 박해받는 신자들은 믿음을 시험받고 박해받지 않은 신자들은 사랑을 시험받는다. 또 이 두시험이 통과한 이들은 믿음과 사랑을 증거해야 한다. 이는 다른 말로 나는 항상 나에게 시험받는다는 말로 바꾸어 바라볼 수 있다. 현실적 자아인 에고의 목소리를 듣는 나인가? 그분의 목소리를 듣는 본질적인 나인가? 하는 질문이기도 하다. 본질적인 나를 만난 사람만이 그리스도를 자기 삶의 중심으로 왕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우리가 사랑을 지닌 사람이라는 것을 삶으로 증명할 때, 그때 ‘희망을 거스린 희망’이 무엇인지 어렴프시 바라볼 수 있으며, 그 희망은 '나'라는 개별자의 희망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완성에 대한 희망임을 알 수 있다.
그때 “진정한 왕이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사랑할 줄은 아셨지만, 십자가를 이용할 줄은 모르셨던 분”이라는 데서, 우리는 십자가를 이용하는 믿음이 아니라, 십자가를 사랑하는 믿음이 무엇인가를 더불어 생각해 볼 수 있다. '희망-사랑-십자가'의 의미가 하나로 우리 삶에서 연속성을 지닐때 우리는 <사랑의 담론>과 함께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세상 끝날까지 그분이 우리와 함께 하는 것이란, 실은 우리가 사랑의 담론과 함께 하는 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시대, <빌라도의 담론이 지닌 순환증식의 원리와 그 종언(終焉)>은 누구의 의지인가? -The Principle of Circulation Proliferation and its End of the Pilate's Discourse
우리는 세상이 유포하고 있는 물질중심주의 담론의 한 가운데를 <사랑을 담론>을 지닌 채 통과하고 있는 순례의 여정 중에 있다. 빌라도로 상징되는 권력의 담론이 순환증식되는 것도, 또 그 담론이 종언되는 것도 실은 우리의 '자유의지'에 달려 있다.
물질은 그 자체로 우리 생을 존속케하는 중립적인 도구지만, 그것이 ‘주의’라는 이름으로 우리 삶을 끌어갈 때, 우리는 여전히 빌라도의 담론을 순환-증식하는데 일조를 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여전히 <사랑의 담론>은 현재진행형으로 십자가형에 처해지고 있다고 할 것이다.
우리의 믿음을 고백하는 <사도신경>에 빌라도의 이름이 들어온 이유를 역사상의 실존인물이었던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을 기억하기 위함이기도 하겠지만, 빌라도로 상징되는 세상의 담론이 어떻게 <사랑의 담론>과 여전히 겨루고, 얽혀있는가를 계시적으로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중심부 담론 앞에 당당했던 그분을 따라 ‘십자가’를 통해 완성되는 <사랑의 담론>에 우리 생을 맡길 수 있을 때, 그분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선택은 자생적인 '의지'라기 보다는 '맡김'이라고 할 수 있다. '맡김의 의지'라고 할 수 있다. 능동적 수동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분에게 우리의 생을 맡긴다는 것이 무엇인가? 어떤 순간, 어떤 상황, 어떤 사건, 어떤 사람에게서도 그분의 현준을 보겠다는 자유의지의 실현이다. 그분의 목소리를 모든 것에서 듣겠다는 자유의지를 실행하는 일일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이의 모든 것이 되겠다는 사랑의 의지를 선택하는 일일 것이다. 그것은 내가 결정하고 선택한 것이 나의 운명이듯, 그리스도가 나의 운명이라는 것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일일 것이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듣는다.”
글을 마치며,
그때에 빌라도가 예수님께 33 “당신이 유다인들의 임금이오?” 하고 물었다. 34 예수님께서는 “그것은 네 생각으로 하는 말이냐?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나에 관하여 너에게 말해 준 것이냐?” 하고 되물으셨다. 35 “나야 유다인이 아니잖소? 당신의 동족과 수석 사제들이 당신을 나에게 넘긴 것이오. 당신은 무 슨 일을 저질렀소?” 하고 빌라도가 다시 물었다. 36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다면, 내 신하들이 싸워 내가 유다인들에게 넘어가지 않게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하지 않는다.” 37 빌라도가 “아무튼 당신이 임금이라는 말 아니오?”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임금이라고 네가 말하고 있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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