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마리안나 수녀님께서 감사합니다.
1. 고통과 죽음의 완성, 무릎을 꿇은 상태에서 무릎을 결코 꿇지 않은 상태에서 벗어나기
2. 새하늘 새땅, 새예루살렘은 위로부터의 영성과 아래로부터의 영성의 통합
- 다해 대림제1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다>를 중심으로
1. 정호승, 「무릎」과 이육사, 「절정(絶頂)」
정호승, 「무릎」과 이육사, 「절정(絶頂)」을 다시 읽어본다,
너도 무릎을 꿇고 나서야 비로소/사랑이 되었느냐/너도 무릎을 꿇어야만/걸을 수 있다는 것을 아는 데에/평생이 걸렸느냐 차디찬 바닥에/스스로 무릎을 꿇었을 때가 일어설 때이다/무릎을 꿇고/먼 산을 바라볼 때가 길 떠날 때이다/ 낙타도 먼 길을 가기 위해서는/먼저 무릎을 꿇고 사막을 바라본다/낙타도 사막의 길을 가다가/밤이 깊으면 먼저 무릎을 꿇고/찬란한 별들을 바라본다(정호승, 「무릎」)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마침내 북방(北方)으로 휩쓸려 오다.//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高原)/서릿발 칼날진 그 위 에 서다.//어디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이육사, 「절정(絶頂)」)
‘무릎을 굻는다’는 것은 단순한 동작으로 무릎을 바닥에 대는 자세를 말한다. 그런데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관념의 구체화로 주로 쓰인다. 기도를 할 때 신 앞에 무릎을 꿇는다. 큰 죄를 짓고 용서를 구할 때, 역시 무릎을 꿇는다. 또한 존경하는 분 앞에 앉을 때도 무릎을 꿇는다. 존경이나 애원의 의미를 상대방에게 나타내기 위해서도 무릎을 꿇는다. 반면, 긍정적 의미로 무릎을 꿇는 동작과는 상관없이 흔히 ‘바닥을 쳤다’라고 말하는 상황 앞에서 ‘자신의 실패를 인정하고 굴복하다’, ‘항복하다’, ‘투항하다’ ‘백기를 던지다’등의 뜻으로도 쓰인다.
정호승 시인의 「무릎」과 이육사의 「절정(絶頂)」에는 이 ‘무릎을 꿇는’ 행위를 통해 상황 인식의 대 전환이 일어난다.
정호승의 시에서는 무릎을 꿇으면서 사랑의 의미를 터득하고 비로소 떠날 때를 바라본 화자의 습명(홀현 깨달음)이 나온다. 또 이육사의 시에서도 일제말기 열네번이나 옥고를 치른 시인이더는 나아갈 길이 없는 상황에서- 수평적 이동도 수직적 이동도 모두 길이 막힌 상황에서 어디다 무릎을 꿇어야하나를 탄식하면서 무릎을 꿇을 자리조차 없는 극한의 상황에서 관조적 극복이 일어난다.
그러기에 정호승 시인의 「무릎」과 이육사의 「절정(絶頂)」은 시대는 다르지만 ‘정침正寢’의 시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정침正寢’은 제사를 지내는 방이다. 말하자면 하늘과 땅이 연결된 공간이다.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한 인간에게 주어진 마지막 시간과 공간에 해당한다. 그 꿇음의 공간에서 하늘과 땅과 사람에게 자신을 제물삼아 제사를 지내는 것과 같다.
그렇기에 어떤 식으로든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죽음과 유사한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신 앞에 무릎을 꿇는 것도, 사람 앞에 무릎을 꿇는 것도, 상황 앞에 무릎을 꿇는 것도 그 어느 것도 결국은 자기 극한에 이르지 않으면 할 수 없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먼저 자신에게 무릎을 꿇어야 하늘에게도, 사람에게도, 상황에게도 무릎을 꿇을 수 있다는 것이다. 자기포기든 욕망의 내려놓음이든 먼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해야지만 무릎을 꿇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러기에 어떤 이들에게는 무릎을 꿇는 행위는 자기-죽음을 감행하는 행위라 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정호승 시인의 ‘너도 무릎을 꿇고 나서야 비로소/사랑이 되었느냐‘ 는 것은 ’습명-홀연 깨달음‘에 해당한다. 또 이육사 시인의 ’그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 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는 역설 역시 무릎을 꿇는다는 것이 상황의 소산을 바라보는 현실인식의 차원을 넘어 실존과 존재의 총체를 바라보았기에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상황은 바뀌지 않았는데, 그 상황을 넘어섰다는 것에서, 그 너머를 볼 수 있었기에 가능하다. 어딘가에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사유의 근본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할 수 없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2. 르네 지라드,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본다』
무릎을 꿇어야 하는 것은 무릎을 꿇지 않은 것과 어떤 차이가 있는가?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고통의 극한에 이르렀다는 의미다. 말하자면 고통의 완성이다. 그런데 이미 상황적으로 무릎을 꿇은 상태에서도 무릎을 결코 꿇지 않은 상태, 즉 고통이 완성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단적으로 고통을 희생과 거래하기 때문이다. 나는 희생제물을 원하지 않고 자비를 원한다는 의미를 모르기 때문이다.
여기서 무릎을 꿇는 행위를 어떤 희생으로 미묘하게 우리 내면에서 치환하는지 묵상해야 하는 이유다. 무릎을 꿇는 마지막 순간에도 우리 마음에는 죽지 않는 에고의 소리 <나>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는 두 개의 품위가 있다. 이 세상이 권하는 품위와 그리스도인의 품위다. 그리스도인의 품위는 희생과 거래하지 않는 품위다. 무릎을 꿇어야 하는 상황은- 그래 나의 이상적인 계획은 실패했다. 그래 나는 무능하다. 그래 나는 약하다. 그래 나는 죽는다, 라는 상황앞에서 이 세상의 자본주의적이고 물질주의적 가치관을 넘어서는 것이다. 십자가는 사랑이지 고통이나 희생에 방점을 찍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길에서 예수를 보고 우는 예루살렘 여인들에게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와 너 자녀들을 위해서 울라고 하신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를 묵상해야 하는 이유다.
그렇기에, 무릎을 꿇어야 하는 상황에서조차도 아니 이미 무릎을 꿇어버린 상황에서조차도 어떤 인간의 품위를 선택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침묵의 소리를 듣고 있는가?를 성찰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마도 너는 지금 큰 희생을 치뤘다고 속삭이는 소리를 거절할 수 있는 용기...나는 그냥 할 바를 했다는 고백... 너는 사랑을 위해 큰 것을 희생했다는 소리는 아마도 자기안의 결핍, 분리의 두려움이 속삭이는 소리일 것이다. 세상의 소란과 소음에 휩쓸리는 불안의 정체라고 할 수 있다.
철학자 르네 지라르는 이를 집단무의식에 가까운 <희생양 메커니즘>에서 찾는다. 대림1주에 희생은 무엇인가?를 묵상해야할 이유는 어제가 무너진 것이 영원히 무너진 것을 아니기 때문에 새하늘 새땅, 새예루살렘은 무엇인가를 바라보기 위해서다.
르네 지라르의 『희생양』 표지에는 모로 누운 어린양이 그려져 있다. 양은 곧 죽을 것이다. 왜 죽어야 하는지조차 모른채 죽는다. 인간 문명사의 진정한 결정들에는 모두 희생양이 있었다. 라틴어 <결정하다>는 <희생양의 목을 자르다>에서 비롯되었다. 희생양은 동물만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힘센 자와, 힘센 가치와 힘센 논리가 한 사회를 점령할 때, 그 결정은 힘의 소리, 집단의 무의식을 결정하는 동인으로, 여기에 누워있는 어린 양은 언제나 사회적 약자를 상징한다. 울타리 안에선 살아남은 양들이 각자의 본분과 의무를 향해 풀밭으로 뛰쳐나가길 기다리고 있을 때, 울타리 밖에 선 죽은 양의 털과 껍질을 벗긴 뒤 알맞은 요리를 하는 사람들로 분주하다. 그것이 인간이 파스카라고 말하는 것들이다. 르네 지라르는 문학, 그 가운데 소설을 가장 정직한 목소리라고 칭한다.
지금부터 우리는 낭만적이라는 용어를 중재자의 존재를 결코 드러내지 않은 채, 그 존재를 반영시키는 작품들에 사용할 것이고, 중개자의 존재를 드러내는 작품들에 소설적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것이다(『낭만작 거짓과 소설적 진실』)
낭만적인 허영심이 많은 사람은 자신의 욕망이 사물의 본성 속에 이미 있다고 언제나 확신하고 싶어하거나 자신이 욕망이 평온한 주체성에서 우러나온 것, 즉 창조라고 확신하고 싶어한다. 새 대상을 보고서 욕망을 느끼게 된다는 것은 욕망이 자신에게서 나온 것과 같은 의미이며 따라서 타인들로부터 욕망을 취하게 되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이 욕망의 도그마는 현대인들이 열렬히 애착을 가지는 것으로 욕망의 자율성이라는 하나의 동일한 환상을 옹호하고 싶어 한다.
지라르는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에서 욕망의 삼각형 구조를 문회인류학적인 시선으로 분석하여, 폭력과 성스러움의 표층을 뚫고 들어가 그 토대와 기원과 뼈대가 어떻게 구성되었는지 삼각형의 욕망구조를 통해 해명한다. 그는 모든 성스러움은 그 기원에 원초적인 폭력을 내장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국가의 성립이든 종교의 기원이든 민족의 등장이든 필연적으로 그 이전의 질서와 응축된 모든 갈등이 폭발하는 계기는 집단적 폭력에 기인한다고 보고 있다. 거기에는 두려움과 분노를 담아내는 희생양이 존재한다. 그 희생양은 두 번의 죽음(사회적 인격 매장, 육체적 죽음이라는)과 한 번의 부활(사후 예찬)을 경험케 한다.
우리가 욕망 혹은 열정이라고 부르는 것은 우연히 혹은 가끔씩 모방적인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항상 모방적이다. 우리의 욕망은 언제나 타인의 욕망에서 나온다. 그런 점에서 욕망은 아주 사회적인 것이다. 한 모방자가 그의 모방들에게서 그들 공통의 욕망의 대상물을 뺏으려 할 때 그 모델은 당연히 저항하게 된다. 이리하여 욕망은 양측에서 모두 강해진다. 그 역도 마찬가지다. 이렇듯 적대자들은 점점 더 같은 것으로 만들면서 갈수록 완벽해져가는 이런 이중 모방속에서 모든 역할을 서로 바뀌고 서로 반사한다. (『그를 통해 스캔들이 온다』)
욕망하는 자가 동조자에서 결국 적으로 바뀌는 순간에 대해, 르네 지라르는 욕망의 주체와 대상에 초점을 맞췄던 기존의 욕망론이 아닌 욕망하는 나와 욕망하는 대상 그리고 그 욕망을 부채질 하는 욕망의 짝패로 이루어진 이 삼각구도에서 폭력의 기원을 찾는다. 이는 문학과 심리학을 거쳐 신화와 종교를 통해 문화인류학의 담론이 만들어지는 순간이다.
한 사회가 모방욕망의 확대 재생산으로 사회적 갈등이 고조되면 이를 없애기 위해 무고한 희생양에 대한 집단적 폭력을 가한 뒤 곧바로 엄습하는 집단죄의식을 털어내고 안정을 찾기 위한 사탄의 매커니즘을 반복해 왔다는 것을 간파한 것이다. 사탄을 밖에 있는 그 무엇으로 지적함으로써 스스로 자신의 영혼을 사탄에게 판 것을 간과한다는 것이다. 혹은 너의 오류와 나의 오류를 파장파장의 오류로 만든다는 것이다. 르네 지라르는 모방욕망과 희생문화의 이종결합을 통해, 폭력과 성스러움의 관계의 유착을 보았고, 그것을 거부한 사람을 인간 예수라고 보았다. 르네 지라르가 가톨릭으로 개종한 이유이기도 하다.
신화는 박해자에게는 죄가 없고 희생물한테 죄가 있다고 표현함으로써 자신을 완전히 뒤바꾸고 있다(...)우리는 또 신화의 주인공이나 신성한 존재들의 특징이자 이들이 희생양으로 선택되는 조건도 볼 수 있다. 또한 그리스도 ‘파르코스’의 선택되는 조건도 볼 수 있다. 이 조건으로는 불구자, 육체적 사회적 결합을 들 수 있다. 희생 제의에 나오는 모든 인간 희생양들의 특징과 이들은 일치한다. 복수를 피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인들은 거주자가 없는 사람, 불구자, 버려진 노인같이 사회적으로 가치가 없는 사람들을 주로 선택한다. 문화권이 달라도 이 특징은 같다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본다』중에서)
이런 집단 주술은 처음에는 공동체를 와해시키고, 그다음에는 만장일치의 희생양을 통해 그 공동체를 다시 재생시키는 폭력의 악순환과 스캔들 이론을 다른 말로 표현한 것이 사탄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 폭력의 주요 기원은 모방적 경쟁관계에서 비롯된다. 인간의 폭력은 우연한 결과도 아니고 공격본능이나 상극충동은 더더욱 아니다. 모방적 경쟁 관계는 심해지면 경쟁자들은 서로 상대방의 가치를 떨어뜨리는데 혈안이 된다. 경쟁자들이 서로의 소유물을 비하하고, 이어서 가치관을 공격하고, 서로의 배우자를 유혹하고, 심지어는 살인마저 마다하지 않는 지경에 이른다.
모방 욕망 때문에 공동체가 파멸의 위기에 빠지게 되면 보방경쟁으로 증폭된 폭력을 인류가 해결하는 방법은 지역과 문화의 차이를 넘어 공통된 폭력 해소방법에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폭력이 동원된다. 저 사람이 나쁜 사람이다. 모두 저 사람의 잘못이지. 라고 슬쩍 한마디만 유포하면 된다. (...) 이로써 희생제사는 공동체 전제를 대체하고 전체에게 봉헌되는 제물이 된다. 다시 말해 희생제의는 공동체 전체를 그들의 폭력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이다. 폭력의 방향을 공동체 전체로부터 돌려서 외부의 희생물에 향하게 한다. 희생제의는 도처에 퍼져 있는 분쟁의 씨앗을 희생물로 집약시킨다. 분쟁의 씨앗에서 부분적인 만족감을 주어서 방향을 딴 데로 돌려버린다.(『폭력과 성스러움』 중에서)
소수의 희생양을 만들어 그에게 사회적 분노와 폭력을 집중한다. 모든 잘못은 희생양에게 돌리고 그들을 처형함로써 사람들은 그간에 쌓인 폭력성과 스트레스를 소거한다. 희생양의 죽음을 통해 사회구성원의 파멸로부터 구원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 희생양은 보복의 힘마저 없는 사회적 약자여여 한다. 희생양은 죽어 마땅한 존재이거나 신성한 순교자로 만들어야 한다. 그렇게 그들은 죄책감마저 집단적으로 희석시킴으로써 언제나 스스로 의인이 된다.
인간들은 그가 속한 사회에 위험이 닥칠 때 특정 집단에 책임을 뒤집어 쒸우고 희생시킴으로써 갈등을 일시적으로 봉합하고 해소하고 질서를 구축하려는 욕망을 표출한다. 그 희생제물로 선택되는 집단은 늘 약자이다. 보복할 능력조차 없는 자를 희생시킴으로써 정치적 종교적 사회적 제물로 삼고 때론 신성한 제사로 둔갑시킨다. 공통적으로 가해자의 입장에서 희생양 만들기의 도그마가 작동된 것이다. 르네 지라드는 집단 무의식에 가까운 이 희생양 메커니즘을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본다”라고 말한다. 희생양 매커니즘은 예수의 죽음을 필두로, 개인이나 집단이 자신들의 문제, 실패, 고통, 불만들을 다루는 방식중의 하나로 부정적인 상황이나 책임을 다른 개인이나 집단에게 돌리는 방법이다. 역사적으로 유대인학살(20세기), 정치적 맥카시즘(20세기), 레이디경제(16세기), 마녀사냥(15~18세기)등에서 볼 수 있었다. 지금도 모든 정치, 종교, 국가 간의 전쟁은 이 집단무의식, 집단지성이라 이름 붙은 ‘거룩한 전쟁’이라는 띠를 두르고 있는 것이다.
처음으로 돌아가서, 무릎을 꿇어야 하는 것은 무릎을 꿇지 않은 것과 어떤 차이가 있는가?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고통의 극한에 이르렀다는 의미다. 말하자면 고통의 완성이다. 그런데 이미 상황적으로 무릎을 꿇은 상태에서도 무릎을 결코 꿇지 않은 상태, 즉 고통이 완성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단적으로 고통을 희생과 거래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을 희생제물로 삼아 평화가 아닌 일시적인 평정을 원하거나 혹은 내가 누군가를 위해 희생했다는 의인의 심장을 지니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나는 죄인을 부르러 왔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는 의미, 나는 희생제물을 원하지 않고 자비를 원한다는 의미를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3.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다> 루카21,25-28. 34-3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5“해와 달들에게는 표징들이 나타나고, 땅에서는 바다와 거센 파도 소리에 자지러진 민족들이 공포에 휩싸일 것이다. 26 사람들은 세상에 닥쳐오는 것들에 대한 두려운 예감으로 까무러칠 것이다. 하늘의 세력들이 흔들릴 것이기 때문이다. 27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28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34.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 그리고 그날이 너희를 덫처럼 갑자기기 닥치지 않게 하여라. 35그날은 온 땅위에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들이닥칠 것이다. 36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들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깨어 기도하여라.
대림1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다> 라고 전하는 루카21,25-28. 34-36은 공관복음에 동시에 실려 있는 말씀으로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마태오24,29-31/마르코13,24-27)과 ‘항상 깨어 있어라’는 두 주제를 연결하여 대신적이고, 교회론적이고, 종말론적이고, 구세사적이고, 예언적이며, 속죄적인 그리스도 강생(죽음과 부활)을 믿는 이들에게 인간실존의 총체적 성취가 무엇인가? 하는 메시지를 전한다고 할 수 있다.
루카 복음 21장 25절과 26절은 종말에 두려워 떨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묘사한 반면에, 21장 27절은 그리스도께서 권능과 큰 영광으로 오시는 모습을, 한 화면에 담겨있는 엄청난 낙차 - 대조적인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특히, 21장 27절은 다니엘서 7장 13절과 14절의 배경을 가지고 있는 구절로서 '사람의 아들'(인자,人子)의 재림에 대해 묵시문학적으로 그 대조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공관복음은 이 종말론적인 시대에 믿는 이들에 대한 상이한 시선을 초점화한다. 루카복음 사가는 믿는 사람들에게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로 권고한다. 이 표현은 공관 복음에서 루카 복음에만 나온다. 마태오와 마르코 복음에는 예수님께서 직접 천사를 보내어 선택하신 이들을 모으실 것이라는 예수님의 약속-위로부터의 영성이 나온다(마태24,31/ 마르13,27).
공관복음의 이러한 차이는 마태오와 마르코 복음사가가 마지막 날에 하실 예수님의 일을 중심으로 기록하였다면 루카 복음사가는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들을 중심으로 아래로부터의 영성을 기록했기 때문일 것이다. 마태오와 마르코 복음사가의 시선은 하늘에 있었고, 루카 복음사가의 시선은 땅에 있었다. 루카 복음사가는 예수님을 믿는 이들이 경험하는 시련과 죽음의 상황에서 용기와 격려를 주기 위한 서술방향을 끝까지 견지한다.
따라서 공관복음에서 하늘과 땅이라는 시선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대림1주에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다> 라고 전하는 루카21,25-28. 34-36은 아래로부터의 영성과 위로부터의 영성을 온전히 통합하라는 은총의 초대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루카21,25-28. 34-36은 네 개의 의미단락으로 나누고 Ⓐ와 Ⓒ는 아래로부터의 영성을 Ⓑ와Ⓓ는 위로부터의 영성으로 바라보고 이를 통합하는 능력을 우리에게 요구한다고 할 수 있다. 죽음과 부활을 통합하는 능력을 우리에게 요구한다는 것은 이 세상에 사람으로 온 우리의 순례 자체가 죽음과 부활의 이중주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수용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의 재림을 거시적인 관점인 우주의 종말론적 징표로 바라보아야 하겠지만 무엇보다 미시적인 관점에서 나 개인의 삶에서 십자가와 죽음의 길과 새하늘 새땅, 새예루살렘을(묵시록21장)을 동시에 체험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울며 웃을 수 있는 우리의 순례가 얼마나 반석처럼 단단해 져야하는지를 요구한다고 할 수 있다.
바오로 사도는 두 번째 투옥에서 삶과 죽음에 끼어있는 상태를 “나에게 개인적으로 죽는 게 휠씬 낫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는 여러분 곁에 살아있는 것이 더 필요합니다”(필립비서1, 21-26)라고 전한다. 그리스도를 믿으며 사는 것이 얼마나 지독했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를 믿는 기쁨이 또 얼마나 컸으면 바오로 사도는 그런 역설적인 고백을 편지로 남겼을까?
먼저 아래로부터의 영성이라고 할 수 있는 26절, 26절, 34절에서,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5“해와 달들에게는 표징들이 나타나고, 땅에서는 바다와 거센 파도 소리에 자지러진 민족들이 공포에 휩싸일 것이다. 26 사람들은 세상에 닥쳐오는 것들에 대한 두려운 예감으로 까무러칠 것이다. 하늘의 세력들이 흔들릴 것이기 때문이다. Ⓒ34.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 그리고 그날이 너희를 덫처럼 갑자기기 닥치지 않게 하여라.
'나'라는 미시적 관점에서, 아래로부터의 영성은 무능과 실패의 체험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와 완전히 단절된 상태로써의 비신자의 삶이기도 하겠지만 그분을 따르는 삶에서의 체험되는 무능과 실패의 체험에 더 초점이 놓인 것이다.
해와 달, 거센 파도, 땅에서의 질서의 무너짐으로 인한 두려운 예감, 하늘의 세력의 흔들림 등은 세상 가치관으로 살았던 삶이 산산히 무너짐을 의미한다. 세상 가치관으로 살면서 겪게 되는 자기 죽음의 현상은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마음이 물러진 결과라고 복음사가는 전한다. 그래서 삶의 고통과 육체의 죽음 앞에서 덫에 걸림 짐승의 상태를 경험하는 것이다.
이를 안셀름 그륀 신부는 『아래로부터의 영성』에서
“이제 내가 더 이상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을 때, 모든 것이 나의 작용 범위를 벗어나 떠나가버렸을 때, 이제 내가 나의 실패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직면했을 때,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유일하게 나 자신이 되어가는 대로 놔두는 것, 나를 하느님께 내어드리는 것, 나의 빈손을 열어 하느님을 붙잡는 것뿐이다”
아래로부터의 영성은 죽음의 위기에 짓눌려 40일동안 호렙산으로 걸어가던 엘리야의 고백 “주님, 이것으로 충분하니 저의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1열왕기19,1-8)와 닮아 있다. 사는 것과 죽는 것이 다르지 않다는 체험이 바로 아래로부터의 영성의 뿌리다. 빛이 비추기 직전의 심연의 목격이다. 단테의 『신곡』처럼 살아서 자기 지옥을 경험하는 것이다. 모든 믿는 이들이 경험하는 무능과 나약함의 체험이고 믿지 않은 이들이 겪는 죄악과 파산과 죽음의 체험이다. 믿거나 믿지 않거나 어떤 누구도 이 죽음의 과정을 피해가지 못한다. 받아들일 수 없는 자기의 죽음은 우주의 종말과 무엇이 다르랴? 무능과 실패와 고통과 죽음 앞에서 그분을 만나지 못한다면 <까무러치는> 일이고, <덫에> 걸린 짐승처럼 신음하다 공포에 눈을 부릅뜨고 영원한 죽음에 자신을 넘겨주는 일이다.
그렇다면, 하느님이 자신의 창조물이 빠져나갈 수 없는 죽음의 덫에 걸린 짐승처럼 영원한 죽음에 넘겨지기를 바라겠는가? 그 상태에서 하느님을 체험하는 것은 나 자신의 노력으로 얻는 하나의 보상이 결코 아니고, 나 자신의 무능에 대한 하느님의 응답이라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다. 우리 자신이 완벽하게 계획한 이상적인 계획들이 무너지는 이 체험이야말로, 완전히 부서진 상태, 완전한 무력감에 놓여진 상태에서, 주님의 십자가의 의미를 바라보는 일일 것이다. 왜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수많은 방법이 있었을 것임에도 왜 하필이면 완전히 벗은 알몸으로 온갖 추문을 감수한 채 만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십자가형을 감수해야 하셨는가? 에 대한 답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무한한 하느님 앞에 자신을 체험하는 일로 무한은 무상을 경험하는 일이기도 함을 의미한다. 무를 경험하지 않고 유(있음)을 경험하지 못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완벽한 없음의 시간, 그때가 바로 주님의 ‘있음, 전능, 권능, 기적’을 체험하는 순간이기에 그렇다. 사실 아래로부터의 영성을 체험하지 않았다면 십자가 수난의 의미를 알 수 없고, 죽음도 알 수 없다. 따라서 부활도 알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바오로 사도는 가시의 고백에서 (2코린토12,9) “너는 내 은총을 넉넉히 받았다.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라는 것을 체험한다. 바오로의 가시의 체험은 한 개인의 아래로부터의 영성이 아니라 모든 믿는 이들의 보편적인 체험이다.
27절~36절까지는 위로부터의 영성에 관한 메시지다. 우리가 우리의 약함과 무능함과 고통과 시련과 죽음 앞에서 구름을 타고 오는 그분의 권능을 어떻게 체험할 수 있나? 가난하고 약한 자의 편에서 치유의 펜을 들었던 루카복음사가는 이 땅에서 고통과 죽음 앞에 신음하는 이들에게 아래로부터의 영성에 이어 위로부의 영성-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다. ①고개를 들고 ②허리를 펴라, ③방탕, 만취, 근심에서 마음이 물러지게 하지 말고 ④깨어 기도하라고 전한다.
Ⓑ27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28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35그날은 온 땅위에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들이닥칠 것이다. 36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들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깨어 기도하여라.
여기서 ‘허리를 펴고'라는 뜻으로 번역된 '아나큅사테'('anakypsate; stand up)의 원형 '아나큅토'(anakypto)는 '스스로 일으키다','치켜 올리다'는 사람의 정신이나 원기를 '돋우어주다', '고무시키다'는 의미로 쓰인다. 그리고 '머리를 들어라'로 번역된 '에파라테'(eparate; lift up)의 원형 '에파이로' (epairo)는 자신의 신체의 일부, 즉 '손'(1티모2,8)이나 '머리'등을 '높이 들어올리다'는 뜻이다.
‘높이 들어올리다’는 것은 찬미와 찬양의 의미와 사람의 아들이 십자가에 들어올려져야 한다는 의미와 연결된다. 여기서 왜 하필이면 인간을 구원하는 그 사랑이 십자가였는지 바라보게 된다. 십자가는 인간기 겪어내는 모든 고통의 집합체이다. 인간이 겪는 모든 고통을 그분이 겪지 않고는 인간을 구원할 수 는 없었을 것이다. 사랑만이 사람을 구할 수 있다. 이것인 인간을 창조하고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사랑의 자기구속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너의 고통과 죽음에서 고개를 들어 ‘십자가를 바라보라’(요한3,114-18)는 것은,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의 의미로 수렴된다. 십자가 사랑의 궁극적인 목적이 인간 구원에 있음이 천명된다. 그것은 우리의 약함에 방점을 찍지 말고, 그분의 권능을 바라보라는 언명이다. 십자가를 제대로 바라볼 수 있다면 우리는 우리는 우리 자신의 고통의 이름들, 십자가의 의미를 그분에게 온전히 맡길 수 있다. 고통의 환지통을 겪지 않을 수 있다.
따라서 세상의 마지막 때에 예수님께서 재림하시기 전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징조를 볼 때, 신앙인들은 머리를 들고 그 징조들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주님의 재림의 때를 기다리라는 것이다. 믿지 않는 이들은 세상의 마지막 때에 두려움으로 숨을 곳을 찾게 될 것이지만, 신앙인들은 그 때에 세상의 모든 것에 미련을 두지 말며 세상적인 관심을 내려놓고, 오로지 도래할 하느님 나라의 영광을 바라보며, 새롭게 펼쳐질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대하고 희망을 가지라는 말씀이다.(익명의 신부님 글에서)
이제 아래로부터의 영성과 위로부터의 영성을 통합하는 문제가 남아 있다. 아래로부터의 영성은 내가 주님의 종임을 받아들이는 것이라면 위로부터의 영성은 내가 주님의 친구로 사는 일이다. 주님의 종과 친구로 동시에 사는 것이 신앙이고 하늘과 땅을 통합하는 능력일 것이다.
종과 친구의 낙차 그것을 통합하는 고리는 공관복음에 동시에 전하는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오지 않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오9,1-8/마르코2,1-12/루카5,17-32)라는 의미를 받아들이는 것이고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다”(호세6,6/마테오9,13)를 실천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아래로부터의 영성에서 위로부터의 영성을 통합하는 것은 인식의 대전환이 필요하다. 이 인식의 대전환에서 종이자 친구로서 자유와 해방을 살 수 있다.
(예컨데, 사람이 사람인데, 인간인데, 우리는 가끔 이만큼 했으면 더 무엇을 하랴? 하고 말하고 싶을 때가 있다. 사람이니까 그렇지는 다른 사람에게 연민으로 할 수 있는 말이지 내 행위를 내 입으로 변호할 수 있는 말은 아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을 끌어들여 나의 행위를 정당화 시키는 물귀신 작전이다. 84억 인구가 다 그런 길을 갔기 때문에 나도 그 길을 갔다는 것이 합리화되지는 않는다. 내가 간 길은 내가 선택해서 간 길이기 때문이다. - 신앙은 올 아니면 낫씽이다. 예수님도 제자들을 데리고 베드로가 추천한 곳으로 가서 종교 하나 만들면 된다. 순교자들도 다른 곳으로 가서 살면 된다. 나는 최선을 다했다고 말하고 싶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용서의 기도와 자비의 기도 밖에는 사실 없다. 무한한 사랑을 받고 유한한 사랑밖에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믿는 삼위일체 하느님은 이만큼 했으면의 패러다임에 갇혀있는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이 예수님이 말하는 친구다. 나는 너희를 종으로 부르지 않고 친구로 불렀다는 말은 이 세상의 가치관으로 사실 무서운 말이다. 내가 그분의 사랑를 받고 있는 것을 성찰해 보면 그렇다. 이 세상에 아직도 무한한 자비의 기다림이 있다는 것이 그것을 증명한다. 무한한 하느님을 안다는 것은 이만큼 했으면 이라는 한계적 시선으로는 알 수 없다는 것에 이르러. 여기서 자유와 해방의 메시지가 있음을 읽게 된다. 인간은 흙일 수도 없는 그냥 무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때 있음의 유를 받아들이게 된다. 그때, 우리가 그리스도의 비전으로 보지 않은 한 알 수 없는 은총상태가 있음을 어렴프시 감지할 수 있다. 영원, 무한, 사랑, 용서, 희망, 믿음...겸손, 자비, 의탁... 등등의 은총지위를 얻는다는 것이 이만큼 했으면의 한계를 넘어서야 만날 수 있다는 것을 바라볼 수 있다. 은충지위는 행위로 거래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그냥 선물이다.
하느님의 은총은 내 행위로 거래할 수 없다. 단적으로 용서의 한계를 정하지 말라,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만 생각해 봐도 알 수 있다. 한계를 정할 수 없다는 것은 이 세계의 가치관으로는 참 무서운 일이자,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렇기에 차라리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니 내가 전할 수 있는 사랑의 메시지는 여기까지다고 어떤 선을 정하고 싶어하는 유혹을 뿌리치고 내가 부족하다고 내탓이오를 하는 것이 더 솔직한 고백일 것이다.
삶의 무게로 인해 허리가 뿌러지는 것 같고 삶의 애증을 다 짐지지 못하여 머리를 들 수 없을 지라도 나의 약함에 방점을 찍지 않고(수용하고) 나의 유한에 자책하지 않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야 한다. 그런데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든다는 것은 나는 사라지고 완벽하게 하느님의 뜻이 나의 삶을 끌어가야 한다는 의미로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내게 이루어지소서!” 라는 성모님의 마니피캇(루카1,56)을 철저하게 사는 길이다. 즉 아래로부터의 영성을 살아내는 일이다. 거기에 멈추지 않고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요한15,15/ 16장,17장)는 것을, 은유로 해석하지 않고 애주애인의 아가페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우리는 철저하게 주님의 종(십자가)이자 주님의 친구(부활)이기 때문이다.
이 땅에서 우리의 순례는 '주님의 종이자 철저하게 주님의 친구'로 사는 일이다.
이를, "눈물로 씨뿌리던 이들 환호하며 거두리라"(시편126, 1-6)라고 시편저자는 전한다. 이를 루카복음 사가는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들에서 벗어나 /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깨어 기도하여라.”라고 전한다.
우리 앞에 닥칠 재난의 공포앞에서 끝까지 주님을 부를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 우리가 딛고 추구했던 그 하늘이 무너지고, 우리가 종교적 이상으로 추구하던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고, 그런 다음에 우리가 만나게 될 새하늘 새땅, 새예루살렘은 무엇인가? 그분이 보여줄 새하늘은 무엇인가? 앞으로 우리에게 일어날 재난, 이미 일어난 모든 재난과 고통의 이름 앞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것은 어떤 신앙의 힘인가. 우리 시대의 빈자의 어머니, 마더 데레사가 통과한 마지막 유혹의 소리, <하느님은 없다>는 그 소리를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 영혼의 어둔 밤을 뚫고 하느님마저 사라진 상태,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라는 게세마니동산의 탄식과 동시에 내가 알 수 없는 방식, 시간 앞에 서 있음을 받아들이고 영원한 생명을 바랄 수 있는, 죽음의 순간에 내가 추구했던 사랑을 쥐고 있을 수 있는 힘-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는 믿음의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이는 오로지 성령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끝이 아니라 시작임을 알 수 있는 표지는 나의 시선으로는 알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안다는 것이 인지능력이 아니라 초인적인 의지라는 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것은 오직 성령의 역사다. 가난한 자의 주님이신 성령이시여! 우리를 도우소서!라는 기도가 절로 나온다.
누군가 마지막 순간에 하느님을 받아들이고 하늘로 떠나갈 때, 그가 자신의 몸에 남긴 마지막 표지들이 있다. 잠자듯 갔으면 하는 것이 우리가 원하는 귀천의 바람이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고 신앙조차 없는 이들이 마지막 피안을 건너갈 때, 그의 고통을 그가 온몸과 온 마음으로 완성했구나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가 그 고통 속에서 하느님을 믿는다. 사랑을 믿는다. 영원한 생명을 믿는다고 우도처럼 고백할 때, 고백의 의미조차 모른 채 고백할 때, 혹은 고백조차 하지 못함에도 그 고백이 그의 몸에서 나온 것도 아니고 그의 마음에서 나온 것도 아님을 알 때, 그의 영혼과 내 영혼 마주했다는 것을 경험한다. 그때, 나는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신 그분의 현존을 경험한다. 그리고 그가 편안하게 하늘로 돌아갔다는 인기척을 가장 친한 혈연이 아니라 가장 고통받는 사람에게 전하고 떠날 때, 그의 인기척을 감지한 누군가에게 기적같은 깨달음이 일어날 때, 성인의 통공을 믿게 된다. 욥이 욥을 알아봤구나! 하는....그때, 시간이 사라진 영원이라는 <오늘>을 믿지 않을 수 없다. 그의 과거의 행적이나 공과로 그분과 영생을 거래할 수 없는 선물로 주어졌다는 것을 보기 때문이다. 현세에서 그와 사랑을 나누었던 가족도 볼 수 없는 그 영생의 선물을 믿는 이들은 보게 된다. "누가 내 형제며 내 어머니냐?"(마르코5,33-35/마태오12,46-50/루카8,19-21)는 가르침이 바로 그것이 아닌가 싶다.
그런 맥락에서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믿는 이들의 순례여정은 철저하게 우리는 ‘주님의 종이자 주님의 친구’로 사는 삶을 살겠다는 천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로 인해 종과 친구의 역설적인 길을 가려고 할 때, 영원과 무한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영원과 무한의 축복은 인간사로 비정한 약속일 수 있다.
대림 1주 복음은 우리에게 영원과 무한이 무엇인지 전한다. 머리를 들고 허리를 편다는 것이, 이미 지금 여기서 하느님 나라가 이루어졌음을 고백하는 것으로 인간사로 재단하면 큰 재앙일 수도 있다. 우리가 원하지 않는 시나리오가 바로 순교이기 때문이다.
공관복음이 대림1주에 전하는 축복은 모든 이에게 동시에 전하는 역설적인 희망에 관한 것이다. 종말은 세상의 끝일 수도 있고 우리 개개인의 유일하고도 구체적인 죽음, 귀천일 수도 있다. 신앙은 고통마저도 감사하는 여정이고 원수마저도 복을 빌어준 존재임을 바라보는 것이다. 내가 사랑받았고 은총 속에 산 것을 바라보는 것은 분명 감사의 축제이지만 그것은 눈물과 죽음 없이는 알 수 없는 역설적인 축제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분의 길을 가는 것은 눈물에 젖은 빵을 웃으며 삼키는 축제라고 할 수 있다. 너는 너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라고 물을 때 나는 육체가 아니라 영혼입니다, 라고 대답하는 것이기에 그렇다. 그렇기에 한편으로는 울고 한편으로는 웃는 축제다. 죽음과 부활의 축제다. 그것이 자기 아들의 죽음을 속수무책으로 안고 있는 피에타상일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다해의 시작 대림제1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다>는 은총의 메시지는 ‘허리를 펴고’(anakypsate, stand up)의 '머리를 들어‘(eparate; lift up) 즉 새하늘, 새땅, 새예루살렘을 살아라. 즉 아래로부터의 영성과 위로부터의 영성을 통합하여 고통과 죽음의 상황을 넘어서라고 권고하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 삶의 여정에서 눈물과 웃음의 역설적인 시그널을 읽기 위해 우리는 골방으로 들어가 그분의 뜻(기도)이 무엇인지 수용해야 한다. 내가 기획했던 행복이 아니라 그분이 주시고자 하는 행복을 바라보아야 한다. 기도한다는 것은 철저하게 주님의 '종과 친구'로 살라는 초대를 그리스도의 시선으로 읽겠다는 결정이기에 그렇다. 어떤 시나리오로 우리 각자의 고통과 죽음이 끝날지 모르겠지만, 그리스도로 인해 <해피엔딩>이라는 것을 믿는 것이다.
글을 마치며,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5“해와 달들에게는 표징들이 나타나고, 땅에서는 바다와 거센 파도 소리에 자지러진 민족들이 공포에 휩싸일 것이다. 26 사람들은 세상에 닥쳐오는 것들에 대한 두려운 예감으로 까무러칠 것이다. 하늘의 세력들이 흔들릴 것이기 때문이다. 27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28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34.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 그리고 그날이 너희를 덫처럼 갑자기기 닥치지 않게 하여라. 35그날은 온 땅위에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들이닥칠 것이다. 36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들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깨어 기도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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