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 (Gaudete) , 실존적인 질문의 단초, 두 겹의 의지를 넘어 현존으로
금을 쌓아두는 것보다 자선을 베푸는 것이 더 낫다(토빗12,6)
-대림3주, “저희는 또 어떻게 해야 합니까?”를 중심으로
1. 서정주의 「동천」
내 마음 속 우리 님의 고운 눈썹을/ 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놨더니/동지 섣달 나는 매서운 새가/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서정주의 「동천」은 님의 고운 눈썹과 동지 섣달 초승달 주위를 날아가는 매서운 새와 화자의 관계를 고도의 유미주의로 표현한 시로 평가한다.
서정주의 「동천」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를 어떻게 바라보는가에 따라 그 해석이 사뭇 달라진다.
겨울 하늘에 떠 있는 초승달과 그 결을 지나가는 겨울새, 화자의 간절한 마음(즈문 밤-천년)을 겨울새까지 그걸 알고 비끼어 간다는 물아일체의 상태를 포착한 것으로 읽을 수도 있고,
혹은 <초승달-새-화자>는 <하늘-땅-사람>의 상징으로 이 트라이앵글은 모든 관계의 정석으로 본다면, 그 관계는 필연적으로 간격, 격절, 존재의 거리를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절대자에게 다가갈 수 없는 경외심으로 읽거나,
<비끼어가네>라는 서술어를 일부러 비끼어갈 수도 있고, 혹은 필연적으로 비끼어 갈 수도 있다는 점에서 실존적 질문의 단초로 읽을 수도 있다. 그것은 모든 충족이유율을 뛰어넘어 존재한다는 그 자체만으로 족하기에 정서와 느낌 감정, 욕구, 바램, 평가, 예단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진 상태만을 취한다.
2. 수용되는 모든 것은 수용자의 양식에 따라 수용된다(토마스 아퀴나스)
이 세계가 퍼뜨리는 모든 충족이유율을 뛰어넘어 존재한다는 그 자체만으로 족하기에 정서와 느낌 감정, 욕구에서 자유로워진 상태만을 취한다? 그 상태는 어떻게 가능한가? 그것은 두 겹의 의지를 넘어서는 것, <원천적으로 함께 더불어 존재>하는 일이라고 통찰한 이들이 있다.
사람은 누구나 그 사람의 삶의 방식에 의해, 함께 더불어 있음과 자기자신으로 있음으로서의 자기 자신에 대한 실존적인 질문의 단초를 제공한다. 그 질문은 자기 자신에 대해 묻는 존재라는 점에서, 신비의 영역에 해당한다. 하물며 내가 맺는 관계가 어떤 연유에서 <더불어 함께 있음인가>를 안다는 것은 인간의 파악능력의 범위를 넘어선다고 할 수 있다. 서로가 서로에게 속해 있다는 것은 각각 분리된 요소가 따로 존재한 후 결합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근원적으로 서로서로에게 속해 있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을 때만이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가를 규정할 수 있다고 본 이들이 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대답할 수 있는 현상에 대한 탐문은 현존재의 구조로 우리를 인도할 것이며 그 구조는 세계-내-존재와 동일하게 근원적인 것으로서 더불어 있음과 함께 거기에 있음이다.”
마르틴하이데거는 세기말의 허무주의와 세계대전을 거치며 인간이 인간으로서 존재한다는 그 존재양식이 무엇인가를 사유한 철학자다. 무엇이 인간을 나무나 돌이나 기계와는 다른 그 무엇으로 만들어주는가?
모든 시대에 격변기는 사유의 단절을 낳는다. 집단무의식에 가까운 존재망각의 역사 속에서 존재는 무엇인가를 묻는 것은 진부한 질문으로 치부된다. 그 시간, 그 에너지로 자본에 투자하라는 충고를 들을 지도 모른다.
하이데거의 철학적 물음은 『존재와 시간』, 『사유란 무엇인가』에서 존재란 무엇이며 그 존재란 어디서부터 오는가?를 사유한다. 그는 인간의 역사를 인간소외와 사유의 정교함을 가로막는 존재 망각의 공백으로 바라보고, 인간 현존Desein에 대해 묻는다.
인간 현존재는 그 어느 여타의 존재자들과는 분명히 다른 존재양식을 갖는다. 하이데거는 인간 현존재와 다른 존재자들을 구분하는 가장 근원적인 핵심을 ‘세계’라고 부른다. 오직 현존재만이 세계를 가지며, 의미의 총체인 이 세계 속에서 현존재는 자신이 일정한 가능성으로서 던져져 있다는 것, 소외된 사람으로부터 자신의 본래적 양식으로 답할 책임을 갖고 있다고 바라본 것이다.
그의 존재론은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명제에 대한 문제제기로부터 시작한다. 무엇보다 먼저 <존재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해명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존재한다는 것은 내가 숨쉬고 있다는 것일까? 아니면 다른 제3의 방식이 있는 것일까? 나는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존재한다는 것 자체는 우리에게 아무것도 설명해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존재물음의 핵심 키워드는 존재한다는 그 자체가 아니라 존재방식에 있다고 보았다.
하이데거는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 인간을 제외한 다른 존재하는 것들을 눈앞의 존재와 도구적 존재로 그 존재 방식을 나눈다. 눈 앞의 존재란 우리 앞에 존재하는 수많은 낱낱의 사물들과 실체들의 존재방식을 일컫는다. 거리의 나무들, 하늘 위의 구름들은 모두 낱낱의 존재들이다. 그것은 이 세계가 주어져 있는 것이지만 그 주어져 있는 것 외에 우리에게 더는 존재가 무엇인가를 설명하지 않는다. 또 다른 존재하는 것들, 예컨대 책상위의 볼펜, 거리의 자동차는 인간 현존재의 활동을 매개하는 도구가 된다. 인간은 언제나 이 두 존재와 일정한 관계망과 의미의 연쇄적 고리를 통해 존재한다.
나는 인간이라는 하나의 종임과 동시에 사회적 관계망의 어떤 위치에 의해 그 존재방식이 규정된다. 나는 무엇으로 존재한다. 그 각각의 존재방식은 다른 현존재의 존재방식을 규정한다. 인간은 그 존재방식 그 자체에서 자신들의 시대적 조건들과 그 의미를 표현하게 된다. 이러한 시대적 조건과 의미를 하이데거는 세계라고 불렀다.
인간은 언제나 세계 속에서 살며 따라서 존재자체에서 자신의 한계와 가능성을 발견하게 된다. 이렇듯 세계 속에 속에 존재하는 현존재는 일상에 있어서는 소외된 방식으로 존재하게 된다. 개별 존재자들이 자신이 단독자라는 사실을 망각한 채 집단 지성, 군중심리. 혹은 집단 무의식에 자신을 맡긴다. 단독자상을 잃은 인간은 그냥 세상에 존재하는 그들이 된다. 세인 혹은 그들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들은 자신의 존재 가능성을 망각한 채 현존재의 비본래적 존재방식을 모방한다. 비본래적 존재방식 속에서는 결코 “함께있음‘의 의미를 모른다. 그는 생물학적으로 살아있을 뿐 사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유란 단적으로 존재의 사유이다. 존재는 사유의 근본요소이며, 사유의 사태이다. 사유는 존재자의 존재에 응답함이다. 존재는 스스로 존재하기 위해 인간을 필요로 하고 인간은 현존재라는 자신의 극단적인 규정을 완수하고자 존재에 속해 있다. 사유의 어떠한 길도 인간 본질로부터 출발하여 존재에로 이행하지 못하며 혹은 거꾸로 존재로부터 출발하여 인간에게로 되돌아가지 못한다. 오히려 사유의 모든 길은 이미 존재와 인간의 본질의 완전한 관계 안에서 진행될 뿐이며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결코 시유가 아니다”
사유할 수 있는 인간만이 자신이 누구인지 말할 수 있다, 하이데거는 그런 삶의 방식을 본래적 존재방식이라 부른다. 그 본래적존재방식은 현존재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며 그 한계를 가능성으로 인식하고 그 가능성을 향해 스스로를 던지게 된다. 기재된 것들에 묶여 자신의 가능성을 잃은 현존재는 가능성을 향해 시간에 자신을 던질 때 기계적 시간이 아니라 실존의 시간을 선취하게 된다. 그의 존재 방식은 그가 어떤 시간을 사는가를 규정한다.
이런 단독자성을 회복하는 기재가 역설적이게도 죽음과 불안이다. 여기서 죽음은 생물학적인 죽음이 아니라 기재의 삶을 살던 것에서의 종언을 의미한다. 현존재가 기존의 삶을 종언할 때 그 경계지점이 바로 죽음이다.
그 존재방식에서 현존재가 만나는 것은 불안이다. 세계 속에 던져져서 그 세계의 물음을 자신의 물음으로 받아들인 현존재가 기존의 익숙한 것들과의 결별은 불안으로 엄습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그 불안이 바로 현존재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문이 된다. 익숙한 것들과의 결별, 세계와 단독자로서의 만남은 현존재에게 불안이라는 가능성으로 다가온다.
“존재, 그것에 의해서 모든 존재자가 존재자로서 소묘되는 그런 존재는 곧 현존(Anwesen)을 뜻한다”
죽음과 불안을 넘어선 존재, 현존재(dasein)의 현dsms은 ‘거기에’ 뜻과 동시에 ‘나타나다’는 점에 주목한 것이다. 현존재는 거기에 던져져 있음과 동시에 이 세계의 가능성으로 열린 존재가 된다. 하이데거는 현존이 아닌 현전 중심의 사유를 존재망각이라고 불렀다. 그는 사유의 중심에 현존을 배치하면서 부재나 차이를 주변화시켰다는 비난을 감수하면서,
모든 존재는 근원적으로 서로에게 속해있으며, 그것을 사유할 수 있는 것이 존재가 할 수 있는 실천이라고 보았다. 실천은 행위를 촉발하는 사유이기에 무엇을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사유는 곧 감사일뿐이라고 본 것이다.
글의 서두로 돌아가서 이 세계가 퍼뜨리는 모든 충족이유율을 뛰어넘어 존재한다는 그 자체만으로 족하기에 정서와 느낌 감정, 욕구에서 자유로워진 상태만을 취한다? 그 상태는 어떻게 가능한가? 그것은 두 겹의 의지를 넘어서는 것, <원천적으로 함께 더불어 존재>하는 일이라고 통찰한 이들이 있다. 아마도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길일지도 모른다. 아무 것도 지니지 말라, 오직 그리스도만으로 만족하라!는 것에 투신한 삶일지도 모른다.
3. “저희는 또 어떻게 해야 합니까?”(루카3,10-18)
Ⓐ그때에 군중이 10 요한에게 물었다. “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합니까?”11 11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어라.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 12 세리들도 세례를 받으러 와서 그에게, “스승님,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자, 요한은 그들에게 13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마라.”하고 일렀다. 군사들도 그에게 “저희는 또 어떻게 해야 합니까?”하고 묻자, 요한은 그들에게 “아무도 강탈하거나 갈취하지 말고 너희 봉급으로 만족하여라.”하고 일렀다. Ⓑ 15 백성은 기대에 차 있었으므로, 모두 마음속으로 요한이 메시야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였다. 16 7요한은 모든 사람에게 말하였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오신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17또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치우시어, 알곡은 당신의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릴 것이다.” 18 요한은 그밖에도 여러 가지로 권고하면서 백성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였다.
대림3주 “저희는 또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묻는 루카3,10-18은 Ⓐ신분에 따른 회개의 구체화(10-15/에제키엘18,7/이사야58,7/사도4,32-35/로마12,8/에페소4,28)와 Ⓑ요한이 그리스도를 예고하다(16-18/마태오3,11-12/마르코1,7-8/요한1,24-28) 두 부분을 연결하여 그리스도인의 기쁨의 실체가 어떤 실존적인 결단에서 나오는지의 메시지를 전한다. 왜 나눔, 정직, 절제라는 타자윤리학은 그리스도인들의 기쁨의 실체가 되는지를 우리에게 전한 것이다. 또한 타자윤리학이 하느님 나라를 다지는 초석이라는 점에서 그리스도를 통한 성령과 불의 세례는 교회의 존재이유를 말해준다고 할 수 있다.
Ⓐ그때에 군중이 10 요한에게 물었다. “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합니까?”11 11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어라.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 12 세리들도 세례를 받으러 와서 그에게, “스승님,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자, 요한은 그들에게 13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마라.”하고 일렀다. 군사들도 그에게 “저희는 또 어떻게 해야 합니까?”하고 묻자, 요한은 그들에게 “아무도 강탈하거나 갈취하지 말고 너희 봉급으로 만족하여라.”하고 일렀다.
루카3,10-18은 루카 복음사가의 소외된 자들에 대한 관심과 재물관을 연결하여 ~하라는 당위명제를 통해 그리스도인의 기쁨의 본질을 전한다. 그런데 Ⓐ에서는 그 당위명제의 실천을 일상의 범주에서 제시하여 깨어있으라는 것이 우리도 다 알고 있는 거잖아, 뭐 특별한 것은 없네, 라고 말할 수 있는 실천행위들이며, Ⓑ는 물과 불과 성령을 통한 세례라는 교회론의 근간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요한 앞에 있는 군중들의 실체, 군중, 세리, 군사들과 백성들이 이해하기에는 커다란 낙차가 있는 그리스도의 영성을 제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낙차는 ~하라는 것이 단지 행위만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어떤 상황에도 은총을 거래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요한이 언급한 ~하라는 실천 강령은 보다 깊은 성찰을 우리에게 요구한다고 할 수 있다.
Ⓐ에서 군중, 세리, 군사들에게 준 그들의 생활 반경 안에서의 실천 명령은 물질이나 이 세계의 가치관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기쁨의 충족이유율이 분명히 있음을 제시한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에서 세례자 요한 자신과 예수를 비교하여, 자신이 베푸는 물의 세례와 그리스도가 베푸는 불과 성령의 세례와의 차이점을 세례자 요한 만큼 우리도 바라보았을 때 나오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요한시대에 요한교화라고 불리울 정도로 그를 따르는 실세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숫자로 구원을 재단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안 것이다. 자신은 결코 길이 아니라 다만 길을 닦는 예언자라는 인식은, 결코 자신은 모든 이들의 근본적인 배고픔의 근원을 채워줄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한 것이나 다름없다. 나는 그분의 신발끈을 풀어줄 수조차 없는 존재라는 고백은 단지 겸손으로 치환될 수 없는 메시야론의 본질을 그가 통찰했고 피력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세례자 요한은 모든 죽음을 이기고 영원한 생명을 주는 메시야의 본질을 보았다고 할 수 있다. 이는 광야에서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금욕적인 생활을 한 것으로는 결코 받을 수 없는 은총의 크기가 분명히 있다는 고백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루카 복음사가가 루카3,10-18에서 보여주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인류와의 관계를 바오로의 다마스쿠스 회심사건에서도 연역해 낼 수 있을 때, 가능하다. 사도행전9, 1-19/22,6-16/26,12-18에서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4절) -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5절)-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6절)” 라는 바오로 회심 사건의 3단 구성은 애주애인이 분리될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을 분명하게 우리에게 보여준 사건이다. 행위의 법칙인 나눔-정직-절제의 행위를 촉발한 근본적인 그리스도론-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파악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외적으로 드러난 나눔-정직-절제일지라도 그릇된 자기양도의 오류에 빠질 수 있음을 경계하라는 언명이 함축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저희는 또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는 군중, 세리, 군인들의 질문에 대한 답이 나눔, 정직, 절제라는 행위의 법칙이 그리스도인의 충족이유율이 어디에 기반하고 있는가를 말해준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학대전』에서 수용되는 모든 것은 수용자의 양식에 따라 수용 된다라고 전한다. 이에 대해 현전에서 현존으로(베른하르트 벨터)을 주장한 벨터는 그런데 무엇을 수용한다는 것, 실재의 주관적이고 객관적인 체험사이를 매개하는 전이해는 실천적으로 일어난다고 본다. 우리가 안만큼 우리는 살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전이해는 비교우위의 나눔이 아니라 타자와 나는 근원적으로 <함께>라는 존재 의미를 알 때 너라는 타자는 곧 그리스도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루카복음사가의 타자윤리학의 근본은 바오로의 다마스커스 체험의 본질, 네가 박해하는 그들은, 내가 외면하는 그들은 바로 나를 박해하고 나를 외면하는 것이다, 라는 연장선이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어라.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마라.”“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마라.”는 ~하라는 당위명제는 세례자 요한이 보기에 그리스도인이 맛보는 기쁨의 실체라고 할 수 있다. 그 실체는 행위를 있게 한 그 근본적인 가르침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바라봄에서 시작된다. 나눔-절제-정직은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의 기쁨의 외적 표출이기 때문이다. 비교우위의 시혜적인 나눔-절제-정직이 아니라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감사에서 나온 행위이기 때문이다. 기쁨은 곧 감사라고 할 수 있다.
대림3주 미사전례에 나오는 모든 기도문들과 독서는 그리스도인의 기쁨의 실체에 대해 전한다.
Ⓒ이는 금을 쌓아두는 것보다 자선을 베푸는 것이 더 낫다(토빗12,8)Ⓓ주님께서 너 때문에 즐거워하며 환성을 올리며 기뻐하시리라.(스바니야3,14-18) Ⓔ기뻐하며 외쳐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너희 가운데 계신 분은 위대하시다(이사12,2-6)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습니다.(필리비4,4-7) Ⓖ마음이 불안한 이들에게 말하여라. 힘을 내어라,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우리 하느님이 오시어 우리를 구원하시리라(이사야35,4)
그리스도인의 기쁨(Gaudete)은 상황에 의해 좌우되는 기쁨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그 자체가 이미 기쁨이다. 예수님을 일컬어 “좌절을 모르는 현실”이라고 적시하듯, 그리스도인 역시 “좌절을 모르는 현실”을 사는 이들이라고 할 수 있다.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과 함께 산다면 그분이 좌절을 모르는 현실이듯 우리 역시 좌절을 모르는 현실을 산다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현존이, 기쁨이, 피부가 되고 심장이 되고, 옷이 되기 위해서 세례자 요한의 물의 세례뿐 아니라 예수를 통한 불과 성령의 세례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을 역설한 이유라고 할 수 있다. 불로 정화되고 성령으로 인도되어 가는 삶이 바로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충만 충족 기쁨의 실체이기 때문이다. 이를 바라본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메시야가 아니라고 단호히 말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 15 백성은 기대에 차 있었으므로, 모두 마음속으로 요한이 메시야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였다. 16 7요한은 모든 사람에게 말하였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오신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17또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치우시어, 알곡은 당신의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릴 것이다.” 18 요한은 그밖에도 여러 가지로 권고하면서 백성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였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16절)라는 세례자 요한의 고백은, 자기 소명을 아는 자만 그리스도의 기쁨의 실체를 안다고 할 수 있다. 누군가의 신발끈을 풀어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은 주인이 아니라 종이다. 종의 역할까지 할 자격이 없다는 이 극단적인 자기낮춤의 표현은 자신이 가진 신원에 대한 통찰에서 우러난 겸허한 고백이자 메시야가 어떤 분인지에 대한 통찰이라고 할 수 있다.
베른하르트 벨터는 『종교철학』에서 인간은 누구나 그의 삶의 방식으로 자신이 누군가를 규정하고 있으며, 삶의 형태로 드러난 자신이 누군가에 대한 규정은 경험이전의 <전이해>를 표출한 것이라고 바라본다.
“인간이 소여된 일차적인 자연 세계 안에서 다분히 현전하는 것만이 아니라 문화로 드높여진 이차적이고 삼차적인 세계 안에서 현존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심상태 신부는 『R, 볼트만의 해석학적 고찰』과 『익명의 그리스도인』에서
“인간이 본질에 대한 물음은 그 물음을 가능하게 해주는 전제를 규명하고 자기 자신에 대한 원천적인 인간적 지식을 주제화하고 주석할 것을 요청한다. 물음 안에 이미 함께 하고 있는 이 말은 ‘전지식’이며, 이것에 대한 이해는 ‘전이해’이다. 인간은 단지 현전하는 사물들과는 달리 자신의 육신성을 초월하는 탈존의 힘으로 현존한다”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행위 이전에 이미 그가 무엇인가를 바라보았음을 의미한다. 단지 이 세상의 가치관으로 현전하는 상태에서는 알 수 없는 상태라는 전언이다. 자신이 자신의 육신성을 초월해 무한히 개방된 존재- 아래로든 위로든, 땅으로든 하늘으로든 무한히 열린 존재라는 것을 통찰할 때, 즉 현전이 아니라 현존할 때 <늘 기뻐하십시오> 라는 바오로의 전언을 수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상황논리가 아니라 존재이유이기 때문이다. 기쁨은 감사라고 할 수 있는 이유다.
그런 맥락에서 대림 3주 “저희는 또 어떻게 해야 합니까?”(루카3,10-18)라는 실존적인 질문의 단초는 그리스도를 믿는 나의 기쁨의 실체는 무엇입니까?를 묻는 것이고, 그것은 타자와의 관계를 낳게 한 창조의 사랑-하늘과 땅과 사람이, 존재하는 모든 이들이 ‘근원적으로 함께 있음’을, ‘현전이 아니라 현존’을 이해하고, 살고 있는가를 답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기쁨 (Gaudete)이란 , 실존적인 질문의 단초, 두 겹의 의지를 넘어 현존으로 가는 길이라고 할 수 있다. 두 겹의 의지는 기분과 감정과 느낌을 뛰어넘는 일이다. 한 겹은 그분안에서 느끼는 골방의 포만감이다. 그 나만의 포만감을 넘어 세상으로 걸어가야 하는 실천의 의지다. 무차별적으로 타자에게 나를 개방하는 일이다. 타자와 함께 한다는 개방 이후에 내가 혹시 의인일지도 모른다는 두번째의 은밀한 시혜적 포만감-은총의 거래를 넘어서야 한다. 그분이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있겠다는 그 현존만을 믿고, 그 길을 선택하는 것이다.
Ama Dablam peak, Nepal
글을 마치며,
Ⓐ그때에 군중이 10 요한에게 물었다. “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합니까?”11 11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옷을 두 번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어라.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 12 세리들도 세례를 받으러 와서 그에게, “스승님,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자, 요한은 그들에게 13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마라.”하고 일렀다. 군사들도 그에게 “저희는 또 어떻게 해야 합니까?”하고 묻자, 요한은 그들에게 “아무도 강탈하거나 갈취하지 말고 너희 봉급으로 만족하여라.”하고 일렀다. Ⓑ 15 백성은 기대에 차 있었으므로, 모두 마음속으로 요한이 메시야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였다. 16 7요한은 모든 사람에게 말하였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오신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17또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치우시어, 알곡은 당신의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릴 것이다.” 18 요한은 그밖에도 여러 가지로 권고하면서 백성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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