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우두망찰
우리 없이 우리를 창조하신 분께서는 우리 없이 우리를 구원하시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S. Agostino)
-대림4주, “내 주님의 어머님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를 중심으로
1. 백석,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
가난한 내가 /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나타샤를 사랑은 하고/눈은 푹푹 날리고/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燒酒)를 마신다/소주(燒酒)를 마시며 생각한다/나타샤와 나는/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눈은 푹푹 나리고/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나타샤가 아니올 리 없다/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야기한다/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눈은 푹푹 나리고/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백석의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는 부재의 현존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시에 해당한다. 대부분의 시에서 부재의 현존은 형이상학적 역설로 나타나지만 백석의 시에서는 부재의 현존을 감응 혹은 조응으로 나타난다.
화자는 나타샤를 사랑하지만, 사랑을 이루기 힘든 가난한 처지 때문에 쓸쓸하게 혼자 소주를 마시고 있다. 여기서 '눈'. ‘소주’, ‘당나귀’는 나타샤에 대한 그리움을 심화시키는 소재이자, 화자가 처한 암울한 현실을 보여주는 환경이자, 나타샤의 부재를 현존으로 바꾸어주는 매개체가 된다.
시간이 흐를수록 나타샤는 '나'에게, 세상을 버리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고 세상 같은 것은 더러워서 버리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나타샤는 내 안에 고조곤히 들어와 나를 완전히 이해한 것이다. 그것은 화자 내면의 목소리로, 세상을 떠나 산골로 가는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 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라는 마지막 행에서 나타샤만 나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고 휜당나귀도 나와 같은 상태가 된다. 이는 네 번이나 반복되는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에서 오늘 밤 발이 푹푹 빠질 정도로 내리는 눈과 하나가 되어 부재하는 나타샤도 당나귀도 산골도 소환할 수 있는 시적 감응(感應)에 시인이 잠겨 있음을 알 수 있다.
백석의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가 독자들에게 사랑받는 이유는 시인의 감응능력이 독자들의 감응능력을 추동했다고 할 수 있다.
2. 즐거움을 많게 하시고, 기쁨을 크게 하시는 플라티테라!(Plati tera ton ouranon)
부재하는 대상을 소환해 현존케 하는 능력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존재이유를 통찰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을 종교적으로는 영적 감수성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S. Agostino은 사람에게 영적 감수성이 없다면, 인과적으로 설명될 수 없는 것들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과 통찰 속에서 다음과 같이 창조와 구원을 동시에 언급한다.
“우리 없이 우리를 창조하신 분께서는 우리 없이 우리를 구원하시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S. Agostino)
우리가 마리아를 그냥 마리아가 아니라 <천주의 성모>라는 화관을 씌울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천주의 성모 마리아!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라 부를 수 있는 근거는,
[1] 마리아론은 삼위일체 하느님의 세 위격을 전제로 하고 있다.
삼위일체론은 기독교의 정체성과 독특성을 담고 있다. 종교로서 기독교는 무신론이 아니며 유신론이다. 그래서 기독교는 불교와 구별된다. 유신론이지만 다신론이 아니고 단일신론이다. 그래서 기독교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신화와 구별된다. 단일신론이지만 삼위일체론 때문에 유대교나 이슬람교와도 구별된다. 이처럼 삼위일체론은 대외적으로 기독교의 독특성을 드러내고 대내적으로 자기 정체성을 밝히는 주춧돌이다.
기독교는 거기에 머무르지 않는다. 마리아의 존재를 단지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는 도구적 수단으로 볼 것인지? 예수의 인성과 신성에 동참한 인류의 표상으로 바라볼 것인지?에 의해 2세기에 영지주의가 주장한 가현설을 뒤집고, 4세기에 네스토리우스파가 주장하던 천주성모불가론을 뒤집는다.
그 근거는 성서의 여러 부분에서 확인 할 수 있고, 무엇보다 이사야 7장과 8장에서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주님께서 몸소 여러분에게 표징을 주실 것입니다.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이사야7장, 14)
우리에게 한 아기가 태어났고 우리에게 한 아들이 주어졌습니다. 그의 이름은 놀라운 경륜가, 용맹한 하느님, 영원한 아버지, 평화의 군왕이라 불리우리라. 다윗의 왕자와 그의 왕국 위에 놓인 그 왕권은 강대하고 그 평화는 끝이 없으리이다. 그는 이제부터 영원까지 공정과 정의로 그 왕국을 굳게 세우고 지켜 가리이다. 만군의 주님의 열정이 이를 이루시리다.(이사야8장, 5-6)
[2] 천주의 성모, 즉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표현은 그리스도 안에 두 본성, 일치의 주체를 규명하는 것과 맥을 같이한다.
그리스도가 완전한 천주성과 완전한 인간성을 지닌다고 했을 때, 일치의 주체가 하느님의 말씀, 즉 성삼위의 제 2위라고 함으로써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표현은 하느님은 천주성을 지니신 말씀, 하느님의 아들을 의미한다. 하느님의 모친이란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니신 두 본성의 일치를 보장하는 동시에 일치의 주체를 동시에 드러낸다.
영원으로부터 천주성을 지니는 성삼의 제 2위격인 말씀이 마리아에게서 인간성을 취했다는 위격적 일치를 드러냄으로써 위격적 일치의 결과 중 속성 교환의 원칙도 적용되어 마리아우상론을 뒤집는다. 말씀이 마리아의 품 안에서 인간성을 취했다면 속성 교환의 원칙에 따라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라 부를 수 있는 근거로 이는 바로 예수그리스도라는 인성과 신성의 합성어에서 비롯된다.
프란치스코교황은 2023년 1월1일 천주의 성모마리아 대축일 메시지에서 S. Agostino의 설교를 인용하여 하느님이 인간 역사에 진입하는 방식에 왜 하필 마리아였을까에 주목한다.
“하느님이 택한 방법은 세상 진입과 역사 진입 방식이다. 이것이 방법입니다. 그리고 이 길은 필수적이며, 그분이 오셨다는 바로 그 사실만큼이나 필수적입니다. 마리아의 신성한 모성, 즉 동정녀의 모성, 결실을 맺는 동정은 우리의 자유에 대한 하느님의 최대한의 존중을 드러내는 길입니다. 우리 없이 우리를 창조하신 분께서는 우리 없이 우리를 구원하시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S. Agostino, 설교 CLXIX, 13항 참조).
하느님이 인간 역사에 개입하실 수 있는 방법은 수없이 많다. 그럼에도 굳이 마리아를 통해 인간 역사에 개입하신 이유가 무엇인가? 단적으로 “우리 없이 우리를 창조하신 분께서는 우리 없이 우리를 구원하시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에서 찾을 수 있다.
그것은 그분의 자유의지에 의해 창조된 인간이,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해 모두들 창조의 완성으로 이끌기 위함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시작에 마리아의 네!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때 마리아는 인류의 표상이 된다. 그리고 네!라는 수태고지의 수락은 인간이 지닌 자유의지의 위대함을 천명한다고 할 수 있다.
[3]마리아 신심은 교회의 의지보다 먼저 신자들의 의지에서 시작되었다.
교회가 마리아신심을 권장한 것이 아니라 마리아신심은 모두 아래로부터의 영성, 신자들의 영적 끌림과 체험에서 비롯되었다. 우리는 그것을 2세기부터 그려진 성모 도상에서 찾을 수 있다. 도상 해석은 다음 두 부분의 글을 참고했다. 이것은 플라티테라(Plati tera ton ouranon)에 도상에 나타나는 센수스 피텔레움(Sensus fidelium 신앙감)이 무엇인가를 바라보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장긍선 예로니모 신부, 『영혼을 여는 문, ‘이콘’』 참조]
[리길재 기자, [『호기심으로 읽는 성미술』 참조]
<천주의 성모>라는 호칭이 붙은 것은 에페소공의회(413년)이후지만 에페소공의회 이전 2세기에 이미 ‘하늘보다 더 넓으신 분, 더 광할하신 분, 하늘을 품으신 분’이라는 의미의 도상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교회가 에페소공의회 이전 정식으로 <천주의 성모 교리>를 선포하기 전, 이미 일반인들 사이에 성모 신심이 신앙적 감수성(센수스 피피텔레움 Sensus fidelium)으로 정착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세기 이후, 313년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밀라노 칙령으로 신앙의 자유를 얻은 이후 그리스도교 미술은 급속히 발달한다. 이때부터 교회는 도상마다 적합한 이름을 지어 부르기 시작했다.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상을 ‘브레포크라투사’(Η βρεφοκρατουσα-성 소피아 대성당의 천장), 한 손에 두루마리를 들고 다른 손으로 강복하시는 아기 예수를 안고 주님을 가리키고 있는 성모님의 도상을 인도자이신 성모, ‘호데게트리아’(Η Οδηγητρια-루카사도가 그린 성모자상)라 불렀다. 또 아기 예수를 가운데 두시고 두 팔을 펼친 채 기도하는 모습을 한 성모님을 ‘하늘보다 더 넓으신 분’ ‘플라티테라’(Η Πλατυτερα των Ουρανων)라 불렀다.
브레포크라투사와 호데게트리아는 하느님의 어머니로서 성모님의 신원과 품위를 드러내지만 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원을 확연히 드러내는 도상이라고 할 수 있다. 플라티테라, 역시 주님과 성모님의 신원을 드러내지만, 무엇보다 하느님 뜻에 순명하는 마리아의 신앙 고백 네!-주님의 뜻이 그대로 이루어지소서!를 담고 있다. 마리아의 이 기도는 교회가 드리는 기도의 전형이다.
기도하시는 성모님의 도상은 초대 교회 때부터 이어온 전통적인 도상으로 ‘플라티테라’로 이후 ‘기도하는 동정녀’의 도상이 자주 등장한다. 이 도상은 성모님 혼자서만 두 팔을 위로 벌려 올리시고 기도하는 모습으로 ‘오란스’(Orans)라 불린다. 플라티테라와 오란스 도상의 공통점은 성모님께서 정면을 향해 기도하는 자세를 취하고 계시고, 그 차이는 아기 예수와 함께 있느냐의 여부다. 아기 예수가 그려진 도상을 ‘표상의 성모’라 부른다. 이는 성모님이 두 손을 모두 들고 있기에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가슴에 품고 있는 형상으로, 이사야서 7장 14절에 근거한다.
이사야서 7장 14절의 “주님께서 몸소 여러분에게 표징을 주실 것입니다.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라는 구절을 나타낸 것이다.
이 성경 구절에 나오는 표징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표징’, 또는 ‘표상의 성모’라고 부른다. 이는 때로는 ‘지극히 거룩하신 분 The Great Panagia’(All Holy) 또는 “당신의 자궁은 하늘도 다 담지 못할 분을 품었기에 당신은 하늘보다 광활합니다”라는 비잔틴 찬가를 근거로 “하늘보다 광활한(Platytera ton ouranon) 분” 이라고도 불리 운다. 이 형태의 이콘은 반신상으로도 그려지고, 성모님이 서 있는 형태의 전신상으로도 그려진다. 이는 동방교회에서 널리 불리던 성모찬가에서 연유한다.
"대천사 가브리엘은 찬미합니다. 기뻐하소서, 동정녀여! 이 세상의 만물의 창조자께서는 거룩한 궤이신 당신께 머무십니다. 성왕 다윗도 노래합니다. 당신은 하늘 보다 더 넓은 분(Plati tera ton ouranon)이시며, 창조주를 품으신 분이십니다."
<‘지극히 거룩하신 분 The Great Panagia’(All Holy) 또는 “당신의 자궁은 하늘도 다 담지 못할 분을 품었기에 당신은 하늘보다 광활합니다”라는 비잔틴 찬가는 “하늘보다 광활한(Platytera ton ouranon) 분” 마리아의 역설적 위치를 가리킨다. 이 신심의 전래는 신앙적 감수성(센수스 피피텔레움 Sensus fidelium)이고, 무엇보다 마리아 생애의 두 측면을 의미한다.
하늘보다 더 넓다는 플라티테라(Plati tera ton ouranon) 도상의 성모는 현세적으로는 <텅빈 충만>을 상징하는 도상에 해당한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이 바라본 대로 <가득차 있으면서 동시에 텅 비어 있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바오로 사도의 통찰처럼 마리아론은 그리스론과 일치한다. 이는 다른 말로 사랑의 역설과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그분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여러분이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셨습니다(코린토2서, 8.9)
성모님의 사랑뿐 아니라 모든 이의 사랑은 고귀한 기쁨과 가장 쓰라린 고통 두 의미가 동시에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사랑이 기쁨만 있다면, 혹은 사랑이 고통만 있다면 사랑이 어떠하다고 세상에 대고 할 말이 참 많을 것이다. 그러나 사랑은 동시에 기쁨이면서 고통임을 알기에, 사랑의 역설 앞에서 마리아처럼 모든 일을 마음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길 수밖에 없다고 할 수 있다.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19절)
그런 맥락에서 교회가 성모께 ‘상경지례’를 바치는 이유는 성모의 칠고칠락에서 찾을 수 있다.
[4] 천주의 성모 마리아에 대한 신심의 기초는 무엇보다 성모님의 삶, 칠고, 칠락에서 찾을 수 있다.
이는 일찍이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이 바라본 대로 당신은 <가득차 있으면서 동시에 텅 비어 있다>는 표현에서 압축적으로 제시된다. 시메온이 예언처럼 당신은 예리한 칼날에 찔리듯 아플 것이지만 엘리사벳의 찬송처럼 당신은 이 세상 여인 중에 가장 복되시기도 하다는 것이다.
성모 마리아가 겪으신 7가지 고통은 ① 시므온의 예언(루가2,35) ② 이집트로의 피난(마태2,13-18)③ 예수를 성전에서 잃음(루가2,41-50) ④ 예수 십자가를 짊(루가23,26-32) ⑤ 예수 십자가에서 죽으심(루가23,44-46) ⑥ 예수를 십자가에서 내림(루가23,53) ⑦ 예수 무덤에 묻힘(루가23,53)
성모 마리아의 칠락(七樂)은 ’ ①천주의 모친으로 간선된 것을 대천사 가브리엘이 전해줄 때 받으신 기쁨 ②엘리사벳을 방문하여 천주의 모친으로 인정받았을 때 느끼신 기쁨. ③동정을 잃지 않고, 또 조금의 아픔도 겪지 않고 아들 예수를 낳아 모실 때 맛 본 무상의 행복. ④구세주탄생을 찬미한 목동들의 방문과 아기예수를 예배하기 위해서 세 동방박사가 찾아 왔을 때 느끼신 기쁨. ⑤ 삼일간을 애통하게 찾아다니던 사랑하는 아들을 성전에서 찾아 만났을 때 성모님의 기쁨. ⑥죽음에서 부활한 아들을 보았을 때의 기쁨과 성령강림을 제자들과 함께 누린 교회의 시작을 문을 연 기쁨, ⑦성모님이 충만한 영광중에 하늘에 올림을 받고 하느님의 어머니로서 면류관을 받으셨을 때의 기쁨.
성모칠고와 칠락을 묵상해보면 아름다움이 아름다움만큼의 아름다움을 요구하듯, 사랑은 사랑만큼의 사랑을 요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사랑은 한없는 기쁨과 비할 데 없는 고통이라는 무늬로 짠 옷을 입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하는 이들에게 <어제도 사랑했고, 오늘도 사랑하고, 내일도 사랑합니다!>라는 말을 발설하지 못하고 삼키게 된다고 할 수 있다.
천주의 어머니 마리아에 대한 상경지례의 이유를 조규만 바실리오 주교는 『마리아론』에서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첫째, 많은 사람들이 성모님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둘째, 예수님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셋째, 마리아는 성지 중에 성지이기 때문이다. 넷째, 모범적인 신앙인의 표상이기 때문이다. 다섯째,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요한사도를 통해 원하셨기 때문이다. 여섯째, 교회가 시작되는 성림강림의 다락방에 제자들과 함께 하셨기 때문이다.
이 여섯 가지 성모신심의 신학적 근거의 핵심은 신자들의 신앙감수성인, 센수스 피텔레움(Sensus fidelium)에서 찾는다. 신앙감수성은 다른 말로 현상을 재맥락화 혹은 재해석 할 수 있는 능력, 영안을 의미한다. 신앙감수성은 신학적 근거가 충분하다. 아무리 믿으라고 해도 믿을 수 없고, 아무리 믿지 말라고 해도 믿지 않을 수 없는 근거는 바로 성령의 임재, 신앙감수성에 바탕하기 때문이다.
마리아의 생 자체는 칠고칠락에서 보듯, 현실적, 육체의 시선, 지각으로 바라본다면 결코 기쁨과 즐거움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영안으로 본다면 “하늘보다 광활한(Platytera ton ouranon) 분”이자 "모든 축복의 전구자, 매개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느님만큼 커지지 않고는 하느님의 축복을 온전히 담아 전할 수 없기 때문에 그런 찬가들이 불려졌을 것이다. 하느님의 축복은 그 축복을 담는 그릇에 죄우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마리아를 "성지 중에 성지"라고 일컫는 것이자, "천주의 성모"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마리아를 천주의 성모라 부를 수 있는 궁극적인 이유는 “우리 없이 우리를 창조하신 분께서는 우리 없이 우리를 구원하시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S. Agostino)라는 창조론과 구원론의 일치 속에서 찾을 수 있다.
3. <내 주님의 어머님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루카1, 39-45
Ⓐ39 그 무렵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지대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 40 그리고 즈카리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하였다. Ⓑ41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차 42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 43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 Ⓔ 44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인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 45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분!”
대림 4주 <내 주님의 어머님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라고 전하는 루카1, 39-45은 예수 강생의 사건사와 의미사를 연결하여 당신 자신을 비천한 이로 인식했던 두 여인의 만남을 통해 그리스도인의 복됨이 무엇인가 를 전한다.
루카1, 39-45은 엘리사벳을 통해 “우리 없이 우리를 창조하신 분께서는 우리 없이 우리를 구원하시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S. Agostino)를 바라보는 것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의 복됨의 원천이 이미 하느님 창조 속에는 인간의 구원이 함께 했음에서 연역할 수 있다.
Ⓐ39 그 무렵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지대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 40 그리고 즈카리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하였다.
39절과 30절을 이끄는 부사는 <서둘러>이다. <서둘러>라는 부사는 <거울반사치유mirror reflex healing>라는 현대의학의 뿌리이기도 하다. 자신이 겪고 있는 가장 큰 아픔을 같은 아픔을 겪는 타자를 도움으로써 그 아픔의 상태를 치유하는 물의 자정능력과 같은 동병상련 혹은 역지사지의 원리다. 마리아가 <서둘러> 유다의 산악지대에 살고 있는 엘리사벳을 찾아간 이유는 신학적으로 수없이 많이 규명했지만, 불가사의한 수태로 인한 두 여인의 기쁨과 그에 상응하는 두려움은 <서둘러>라는 부사가 함축하고 있다.
유다 산악지대는 엘리사벳의 남편 즈카리야가 제관이었기 때문에 그는 예루살렘 주변마을에 살았으며 그곳은 예루살렘 서쪽 에인카림일 것으로 추정한다. 나자렛에서 엘리사벳이 있는 곳은 약 150킬로미터 이상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 먼 길을 임신중이던 마리아가 서둘러 찾아 갔다는 것이 루카1, 39-45이 전하는 축복의 메시지의 발단이다.
그것을 프란치스코 교황은 아래로의 영성에서 위로의 영성으로 전이되는 결절점이라고 전한다. 우리가 어떤 문제 상황 속에 놓여 있을 때, 그 문제 상황에 매몰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바라보는 것으로 그 문제상황에 대한 답을 얻는 것과 같다.
“마리아께서 ‘일어나셨습니다.’ 시선을 아래로 문제가 있는 쪽으로 향하신 게 아니라, 위로, 하느님께서 계신 쪽으로 향하십니다. 그리고 누구에게 도움을 청해야 할지 생각하신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 도움을 주어야 할지 생각하십니다”(프란치스코 교황, 대림4주 강론)
여기서 <서둘러> 라는 부사를 통해 은총을 받은 자는 누구나 은총을 전할 수밖에 없다는 은총의 확장성을 알 수 있다. 이미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 마리아는 자신이 은총을 가득히 받았다는 것을 알았지만 들은 것과 안 것을 확증하는 것은 같은 처지에 있는 타자의 말을 통해 확증되는 믿음의 구체적인 법칙이기도 하다. 로고스는 바로 믿음의 근거이기 때문이다.
Ⓑ41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차 42 큰 소리로 외쳤다.
가톨릭교회가 마리아를 흠승지례(삼위일체 하느님)-상경지례(성모님)-공경지례(성인성녀) 가운데 상경지례 하는 것은 성령의 은사에 해당한다. 그리고 이 상경지례는 교회가 강제한 것이 아니라 초기교회 때부터 신자들의 신앙감수성으로 인해 자생적으로 형성된 것이었다. 어머니께서 우리의 기도를 전구해주신다는 이 믿음은 성령의 인도가 없으면 불가능다.
구세사의 두루마리는 하느님의 뜻, 성자의 강생, 그리고 성령의 임재라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역사하심에 해당한다. 세례자 요한의 잉태 또한 삼위일체 하느님의 역사가 함께 하셨다는 점에서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 <성령으로 가득차서> 등에서 엘리사벳의 환성은 모든 믿는 이들의 기쁨의 원천이기도 하다.
엘리사벳의 환성은 신앙감수성인, 센수스 피텔레움(Sensus fidelium)에서 찾을 수 있다. 신앙감수성은 다른 말로 현상을 재맥락화 혹은 재해석 할 수 있는 능력, 그리스도인의 비전, 영안을 의미한다. 신앙감수성은 성령의 임재라는 것으로만 설명될 수 있다. 아무리 믿으라고 해도 믿을 수 없고, 아무리 믿지 말라고 해도 믿지 않을 수 없는 근거는 바로 성령의 임재로 인한 신앙감수성에 바탕한다. 신앙감수성은 인간의 성정인 오욕칠정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임재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42절)
마리아의 복됨과 예수님의 복됨은 분리되지 않는다. 여기서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의 복됨도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엘리사벳의 인삿말은 그것을 통찰한 엘리사벳의 복됨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엘리사벳의 이 복된 인사후에 마리아의 노래 마니피캇이 불려진다는 것에서 복됨의 연속성을 바라볼 수 있다.
그로인해, 엘리사벳의 인사는 그대로 믿는 이들의 기도문이 된다.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기뻐하소서 주님께서 함께 계십니다(루카1,28;가브리엘천사의 인사)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 중에 복되시며 태중의 아들 예수님 또한 복되십니다(1,42; 엘리사벳의 인사) 천주의 성모 마리아님, 이제와 저희 죽을 때에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어주소서(중세교회가 붙인 기도문)
엘리사벳의 인사에서 마리아의 복됨의 근거는 바로 주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통찰에 있다. 믿는 이들의 복됨은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오28,20)에 근거한다. 이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심에 기인하고 근거한다. 그것은 신과 인간은 언제나 함께있음을 존재의 근거로 삼기 때문이다.
Ⓓ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43절)
엘리사벳의 내 주님의 어머니라는 호칭은 루카 복음서에 처음 나오는 호칭으로 메시야로서의 주님이라는 의미로 마리아를 천주의 성모라고 부를 수 있는 그 단초를 제공한다. 엘리사벳이 마리아를 부른 것이 아니라 마리아가 먼저 엘리사벳에게 가셨다는 것에서 주님의 어머니로서의 성모공경의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천주의 성모>라는 호칭이 붙은 것은 에페소공의회(413년)이후지만 에페소공의회 이전 2세기에 이미 ‘하늘보다 더 넓으신 분, 더 광할하신 분, 하늘을 품으신 분’이라는 의미의 성모 도상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교회가 에페소공의회 이전 정식으로 <천주의 성모 교리>를 선포하기 전, 이미 일반인들 사이에 성모 신심이 신앙적 감수성(센수스 피피텔레움 Sensus fidelium)으로 정착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장긍선 예로니모 신부, 『영혼을 여는 문, ‘이콘’』)
내 주님의 어머님은 나보다 먼저 나에게 오신 분이다. 여기서 <내>라는 이 강조어법은 신앙의 체험은 집단전수가 아니란 사실을 우리에게 말한다. <내> 신앙이 무르익어 <우리>의 신앙으로 물이 넘치듯 흘러 넘어간다. 신앙은 <내>가 사라지는 몰아의 사랑만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네 이웃을 네 몸처럼>(마태오22,39)-<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요한15, 9-15) 이라는 진정한 <나>를 체험하는 자기애를 바탕으로 하기 때문이다.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인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44절)
엘리사벳의 태중의 아기는 우리가 모두 알다시피 세례자 요한이다. 여기서 은총의 초자연성이 나온다. 엘리사벳은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처럼 인간의 능력을 초월한 수태의 주인공들이다. <즐거워 뛰놀았다>에서 마리아의 인사를 듣는 것은 마리아라는 한 개별자의 인사가 아니라 창조와 구원이 함께하기에 가능한 인사말이다. 그것은 주님을 체험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느끼는 즐거움의 원천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그리고 하느님의 소명을 받은 모든 이들은 마리아의 음성을 듣는다. 이것이 분명히 가톨릭에서 흠승지례, 상경지례, 공경지례의 예를 구분하여 바치지만 인간과 신의 경계가 사라진 경지, 하늘과 땅이 같아진 상태가 바로 그리스도인의 즐거움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의 구원계획은 인간사의ㅡ가변성 여하에 의하여 임시적이고 우연하게 즉흥적으로 작동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태초에 창조와 함께 구원도 함께 계획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은총은 인간의 행위를 뛰어넘는 사건이고 그것이 즐거움의 단초라고 할 수 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분!”(45절)
엘리사벳의 마리아 칭송의 정점은 마리아가 단순히 예수님의 어머님이기 때문에 복되신 것뿐 아니라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마리아는 신자들의 모범이 된다. 그것이 두 여인의 만남이 가진 가장 큰 복됨의 포인트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마리아는 모든 믿는 이들의 표상이 된다.
카인족 헤베르의 아내 야엘은 여자들 가운데 가장 복되어라. 천막에 사는 여인들 가운데 가장 복되어라(판관기5, 24)
딸이여 그대는 이 세상 모든 여인 가운데에서 지극히 높으신 분에게 가장 큰 복을 받은 이요(유딧13, 18)
구약의 여인들처럼 엘리사벳의 인사의 정점은 바로 믿음이 행복의 근원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전한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분!”(45절) 믿음이 행복의 근원이라는 것!
45절에 이르러 엘리사벳의 인사가 2인칭의 당신에서 3인칭으로 ~하신 분으로 넘어간다. 우리가 누군가를 2인칭으로 부를 때 그 부르는 주체는 1인칭 나다. 그런데 누군가를 3인칭으로 부를 때 그 주체는 우리가 된다. 엘리사벳의 인사는 자기 안에서 무르익은 사랑이 어떻게 우리라는 보편적 사랑으로 넘어가는지를 보여준 것이기도 하다.
대림4주, “내 주님의 어머님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라고 전하는 루카1, 39-45은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1,37-38)는 것을 경험한 두 여인을 통해 구세사의 두루마리가 “우리 없이 우리를 창조하신 분께서는 우리 없이 우리를 구원하시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S. Agostino)를 필친 사건이며, 이는 “하늘과 땅의 불가분의 관계론”과 “창조 속에는 이미 구원이 있다”는 은총의 메시지를 동시에 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글을 마치며,
39 그 무렵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지대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 40 그리고 즈카리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하였다. 41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차 42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43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 44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인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45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 루어지리라 믿으신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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