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시절의 달콤함, 크렘 브륄레Crème brûlée
총론總論은 알아도 각론各論은 알 수 없는 은둔隱遁과 개방開放의 동시성synchronicity同時性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부모는 율법교사들 가운데 있는 예수님을 찾아냈다‘를 중심으로
1. 이병률, 「스미다」
새벽이 되어 지도를 들추다가/울진이라는 지명에 울컥하여 차를 몬다/울진에 도착하니 밥냄새와 나란히 해가 뜨고/나무가 울창하여 울진이 됐다는 어부의 말에/참 이름도 잘 지었구나 싶어 또 울컥/해변 식당에서 아침밥을 시켜먹으며/찌개냄비에서 생선뼈를 건져내다 또 다시/왈칵 눈물이 솟는 것은 무슨 설움 때문일까?/ 탕이 매워서 그래요? 식당 주인이 묻지만/ 눈가에 휴지를 대고 후룩후룩 국물을 떠먹다/ 대답대신 소주를 한 병 시킨 건 다 설움이 매워서다/바닷가 여관에서 몇 시간을 자고/ 얼굴에 내려앉은 붉은 기운에 창을 여니/해지는 여관 뒤편 누군가 끌어다 놓은 배 위에 올라앉아/ 어깨를 들먹이며 울고 있는 한 사내/ 해바라기 숲을 등지고 서럽게 얼굴을 가리고 있는 한 사내/내 설움을 저만도 못해서/내 눈알은 저만한 솜씨도 못되어서 늘 찔끔거리고 마는데/그가 올라앉은 뱃전을 적시던 물기가/내가 올라앉은 /내가 올라와 있는 이층방까지 스며들고 있다./한 몇 달쯤 흠뻑 앉아 있지 않고/자전거를 끌고가는 사내의 집채만한 그림자가/찬물처럼 내 가슴에 스미고 있다.
이병률, 「스미다」는 “나(인간)은 슬프다”는 총론은 알아도 자신이 왜 슬퍼하고 얼마만큼 슬퍼해야 하는지, 그 각론을 모르는 상태를 울컥 혹은 왈칵이라는 단어로 표출한다.
화자에게 수시로 출몰하는 울컥한 심사를 울진이라는 지명이 촉발시킨다. 울진이라는 지명이 아마 울음이 다하다는 의미로 화자에게 다가왔을 것이다. 그런데 막상 울진에 와보니 화자의 해석과는 달리 “나무가 울창하여 울진이 됐다는 어부의 말에/ 참 이름도 잘 지었구나 싶어 또 울컥” 한다. 화자는 수시로 울컥하지만 그 울컥의 이유는 딱히 알 수 없다. 해변식당에서 아침밥을 먹다 생선뼈를 가르다 왈칵 또 눈물이 난다. 식당주인이 매서워 그러느냐고 묻지만 딱히 그 이유를 말할 수 없어 소주를 시킨다. 서러움이 매워서다라고 말하지만 그 서러움의 정체를 화자도 모른다. 나 또 왜 이러지?라고 독백이나 하고 있을 그럴 상황에서, 그러다 화자는. 여관 이층방에서 한 사내를 보게 된다. 뱃전에 앉아 어깨를 들먹이며 우는 사내를 본 것이다. 바로 슬픔은 저런 거다, 라고 온몸으로 슬픔을 표출하는 그 사내의 울음을 질투하는데 그 사내 역시 깊은 울음에 잠기지(집중) 못한 채 이내 자전거를 끌고 간다.
자전거를 끌고가는 사내의 집채만한 그림자가/찬물처럼 내 가슴에 스미고 있다. 는 마지막 행에서 화자는 슬픔조차 온전히 한 몇 달쯤 표출하지 못하게 하는 집채만한 생존이 슬픔이 아닐까 라는 짐작 속에서 왈칵의 정체를 어렴프시 추정하게 된다.
웃음도 포즈, 울음도 포즈로 만들어 버리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밀란 쿤데라), 집채만한 그림자, 생존이라는 현실 앞에서 화자가 건진 것은 <스미다>라는 상태어휘다. 모든 서러움은 석달열흘 노아의 홍수처럼, 천지개벽하듯 퍼붓는 소낙비가 아니다. 나의 슬픔, 너의 슬픔, 제3자의 슬픔, 인간의 슬픔,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슬픔이 가랑비처럼 <스며서> 그것을 표출하는 것도 왈칵 혹은 울컥일 수밖에 없다. 찰라에 가까운 이런 정서의 경험은 한 개인의 오욕칠정이 아니라 이 우주에 떠도는 슬픔(혹은 기쁨)이 세세대대 만든 것으로 익명의 왈칵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스며든> 것이어서 내가 또 왜 이러지? 라고 독백할 수 있을 뿐, 아무에게도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실존의 <초기값>라고 할 수 있다.
![](https://blog.kakaocdn.net/dn/cUM85H/btsLAEbSfaZ/FTSzcQA7gsj8K39sWHfdo1/img.jpg)
2. 나비효과(Butterfly effect) 혹은 동시성(Synchronizität)
아무도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것들, 그러나 분명히 존재하는 것들에 대해 물리학과 심리학은 나비효과(Butterfly effect) 혹은 동시성(Synchronizität)이라는 것으로 그 초기값이나 매개체를 설명한다.
복합성의 원리중 하나인 카오스의 이론의 발판을 만든 기상학자 로렌츠는 「결정론적인 비주기적 운동」에서 “초기조건의 사소한 변화가 전체에 막대한 영향을 준다”는 복잡계의 이론을 발표한다.
로렌츠는 변화무쌍한 기상현상을 예측하는 이론의 단초는 지구상 어디선가 일어난 조그만 변화로 인해 예측할 수 없는 현상이 나타난다는 것에 주목한 것이다. 그는 나라의 국경은 있으나 기상 현상의 국경은 없다는 측면에서, “브라질에 있는 나비의 날개 짓이 미국텍사스에 토네이도를 발생할 수 있다”라고 말한다.
로렌츠 이론은 초기 조건에 대한 민감성, 의존성이 곧 작은 차이가 경이로운 결과를 부른 사례를 동반한다는 것으로, “북경의 나비 한 마리의 날개 짓이 뉴욕에 태풍을 일으킬 수 있다”는 비유를 낳기도 하였다. 일명 나비효과(Butterfly effect)라고 불리는 이 이론은 초기의 작은 오차가 큰 오차를 만들 가능성을 예측하는 것으로 기상 예측만 아니라 인간 역사의 모든 사건에 발단이 무엇인가를 추정하는 이론이 되기도 하였다. 예컨대, 방사능유출사건, 사라예보사건, 신탁통치 오보사건, 검은 목요일 사건, 테네리페 참사, 9,11테러, 코로나바이러스감영, 꿀벌 멸종 등의 사건 등은 인간이 무심하게 지나간 초기값이 엄청난 사건을 불러일으킨 그 예에 해당한다.
로렌츠와는 다른 맥락에서 동시성Synchronizität 同時性이란 이론으로 이 세계의 불가사의를 설명하기도 한다. 동시성Synchronizität은 어떤 두 사건이 비슷하거나 혹은 같은 의미를 가지고 동시에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즉 비인과적인 의미가 있는 어떤 두 개의 사건이 동시에 일어나는 것으로 혹자는 이것을 두고 '의미가 있는 우연의 일치'라고 말하기도 한다. 물론 이것은 단순히 두 개의 사건이 동시에 일어나는 공시성(共時性 synchronism)과는 다르다.
동시성의 원리를 처음으로 주장한 사람은 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 1875-1961)이다. 그는 『동시성Synchronizität 同時性』에서 고전 점성술을 단순히 샤머니즘으로 치부할 수 없다는 것에 주목한다. 과학만이 이 세상을 끌어가는 원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객관적 순간(objective time moment) 즉 인간의 정신과 외부의 사건 사이에 어떤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이 이론을 전제로 특정한 순간에 어떤 질적인 시간이 존재한다는 것에 주목한다. 해당 순간에 일어난 모든 일들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그 순간의 성질, 초기값을 가진다는 것이다. 그 초기값은 너무나 미세해서 과학적으로 진단할 수 없을 뿐이라는 것이다.
“현대 물리학의 발견들은 과학이 그린 세상의 그림에 의미 있는 변화를 초래했다. 그 발견들이 자연의 법칙의 절대적 유효성을 깨뜨리고, 자연의 법칙을 상대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초감각적 지각에 대한 과도한 의심은 정말 정당하지 않다. 그 의심의 주요 원인은 단지 오늘날 불행하게도 전문 분야만을 파고드는 현상에 수반되는 무지일 뿐이다.”
“모든 예상과 반대로, 심각한 머리 부상이 언제나 그것에 상응하는 의식의 상실을 낳지는 않는다. 관찰자에게, 부상당한 사람은 무표정하고 인사불성이고 아무것도 의식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주관적으로 의식은 결코 꺼지지 않는다. 외부 세계와의 감각적 소통은 크게 제한을 받지만 언제나 완전히 차단되는 것은 아니다.”
“살아 있는 육체 안에서 다양한 부분들이 조화롭게 작용하며 서로 의미 있게 적응하듯이, 세상의 사건들은 내재적인 인과 관계에서는 끌어낼 수 없는, 의미 있는 관계를 맺고 있다. 이유는 어느 경우든 부분들의 행동은 그것들보다 상위인 어떤 중앙의 통제에 좌우되기 때문이다.”
“실험실에서 자연은 자연이 가진 모든 가능성들을 바탕으로 대답할 기회를 차단당하고 있다. 이유는 그 가능성들이 실행 가능한 것들로 제한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실험실에서는 그 질문에 한정된 상황이 인위적으로 창조되며, 이 상황이 자연으로 하여금 명백한 대답을 내놓도록 강요한다.”
우연의 일치로 같은 키워드가 담긴 사건이 동시 발생하였을 때 사람들은 이 둘 사이에서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의미와 법칙을 찾아내기 위해 노력하며, 이 과정에서 칼 융은 동시성으로 이를 설명하려 노력하였다.
칼 융의 「'동시성: 비인과적 연결 원리'(Synchronicity: An Acasual Connecting Principle)」라는 논문은 「파울리 배타 원리」를 제창한 물리학자 파울리가 연구에 참여하였다. 칼 융의 논문은 생물학자 파울 카메러(Paul Kammerer)의 「연속성의 원리」라는 논문에도 일부 근거하고 있다. 파울 카메러의 논문은 공간으로 연결된 사건들의 동시성에 대하여 주목한 논문이고, 칼 융의 논문은 시간으로 연결된 사건들의 동시성에 주목한 논문이다. 융은 객관과 주관의 관계를 인과 관계와 동시성으로 바라본 것이다. 이는 과학이 그리는 객관적인 세상과 개인의 주관적인 정신의 세계를 통합시키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
동시성이란, 인과성이 배제된 사건의 일치를 나타낸다. 그렇기에 '인과성이 없다'는 말이 '의미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공시성은 두 사건 사이에 의미적 관련성이 없지만, 동시성은 두 사건 사이에 의미적 관련성을 전제한다. 동시성은 두 사건이 인과적 관계없이 의미있는 사건이 동시에 나타나는 것을 말하는데, 이것은 관찰자의 의식과 외부 사건이 어떤 한정된 공간 속에서 의미적 관련성을 가지고 동시에 일어나기 때문이다. 때로는 관찰자가 존재하는 공간과 외부사건이 일어나는 공간이 다른 경우도 있다. 이러한 동시성의 이론은 비과학적이라고 비토되지만, 실체적 실재관에서 '관계적 실재관', '유기적 실재관', '상대적 실재관' 등으로 바라볼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동시성Synchronizität이란 일종의 의미가 있는 '우연의 일치'가 발생하였을 때, 이를 개별적인 인과관계를 가지는 두 가지 사건이 동시에 연속적으로 발생했을 때, 이 둘 사이에 어떠한 연관관계도 없지만 실제로는 우연이 아닌 비(非)인과적 법칙이 있으며, 이는 인간의 마음과 현실세계 사이 즉 의식의 틈을 비집고 무의식에서 보내는 메시지라고 본 것이다.
칼 융의 동시성의 원리를 아이러니 하게도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의 실재」에서 발표한 ‘국소성의 원리(pinciple of locality)’에서 증명한다.
“앞으로 이야기할 논의는 공간상으로 떨어져 있는 A와 B의 상대적 독립성에 대한 것이다. A에게 어떤 외부의 영향이 주어진다고 해도 그것은 B에게 직접 영향을 주지 않는다. 그것은 국소작용의 원리로 알려져 있고, 아직까지 장 이론에서만 의미있게 사용되고 있다. 만약 이 주장이 완전히 틀린 것이라면 닫힌 계는 존재할 수 없을 것이고 따라서 물리법칙들의 공리들 역시 실험적으로 타당하게 증명 할 수 없을 것이다”
‘국소성의 원리(pinciple of locality)’는 두 개의 물체가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다면 그 두 물체는 직접적으로 서로 영향을 줄 수 없다는 이론이다. 이것은 두 물체 간에 어떤 영향을 주고받으려면 중간에 어떤 매개자가 있어야 함을 전제로 한다. 그런데 아인슈타인은 포돌스키 그리고 로젠과 함께 실험을 했는데, 결과가 다르게 나왔다. 사람들은 이 실험을 세 사람의 이름 첫 글자를 딴 'EPR사고실험'이라고 불렀다.
그 실험은 멀리 떨어져 있는 두 공간에 있는 두 물체 간에 매개자가 없다면 상호 직접적인 영향이 없어야 하는데, 멀리 떨어져 있는 두 물체 간에 매개자 없이 상호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 결과가 도출된 것이다. 즉 국소성의 원리를 증명하기 위하여 실험을 시작하였지만 비국소성의 원리가 진실임을 보여주는 연구 결과가 나타난 것이다. 이 결과는 당시로써는 사고실험이라 불렸지만, 1982년 아스펙(Aspect)의 세 번의 실험을 통하여 이것이 사실임을 다시 증명하였다.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서 나뉘어져 있는데 각 공간에 있는 물체들 간에 상호작용이 있으며 상관성이 있다는 것을 증명한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인과율로만 설명되지 않는 우주의 일체성 혹은 전체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세계는 유기적 관계를 가진 유기체라는 것! 즉 세계는 인간의 이성, 논리,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알 수 없는 관계로 직조된 유기체이며 우주 또는 세계가 유기체적이며 상관적이라는 사실을 증명해 준 것이 다.
그런 맥락에서, 로렌츠의 나비효과(Butterfly effect)나 칼 융의 동시성(Synchronizität)은 존재하는 것들, 현상들 이면에 우리가 과학적, 가시적으로 예측할 수 없는 <초기값>, 혹은 <매개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려준다.
3. <부모는 율법교사들 가운데 있는 예수님을 찾아냈다>루카 2,41-52
Ⓐ41 예수님의 부모는 해마다 파스카 축제 때면 예루살렘으로 가곤하였다. 42 예스님이 열두살 되던 해에도 이 축제 관습에 따라 그리로 올라갔다. 43 그런데 축제 기간이 끝나고 돌아갈 때에 소년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남았다. 그의 부모는 그것도 모르고 44 일행 가운데 있으려니 여기며 하룻길을 갔다. 그런 다음에야 친척들과 친지들 사이에서 찾아보았지만 45 찾아내지 못하였다. Ⓑ그래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그를 찾아다녔다. 46 사흘 뒤에야 성전에서 그를 찾아냈는데, 그는 율법교사 가운데에 앉아 그들의 말을 듣기도 하고 그들에게 묻기도 하고 있었다. 47 그의 말을 듣는 이들은 모두 그의 슬기로운 답변에 경탄하였다. Ⓒ48 예수님의 부모는 그를 보고 무척 놀랐다. 예수님의 어머니가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하자, 49 그가 부모에게 말하였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50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한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51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사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52 예수님은 지혜와 키가 자랐고 하느님과 사람들의 총애도 더하여 갔다.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복음인 <부모는 율법교사들 가운데 있는 예수님을 찾아냈다>라고 전하는 루카 2,41-52은 루카복음에만 나오는 단독문형이다. 예수님 어머님의 질문과 소년 예수의 역질문을 통해 성가정 축일이 전하는 은총의 선물로 성가정의 중심에 <하느님의 뜻이 계시다>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성찰의 주제를 준다.
김재덕 베드로 신부는 매일미사 묵상에서 “표면적으로 예수, 마리아 요셉이 이끄는 성가정은 우리가 선망하는 그런 가정공동체가 아니었다”라고 전한다.
그런데 우리는 이 가정을 성가정의 표본으로 삼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하느님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리아의 마음(루카 1,38), 이해할 수 없는 사건 앞에서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는 마리아의 신앙(루카2,51), 갈등과 위기 상황에서 모든 것을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는 요셉의 믿음(마태오 1,24/2,13-15/19-23), 그리고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신 예수님(필립비2,8)에게서 성가정의 중심에 하느님의 뜻”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느님의 뜻을 알 수 있나?
아마 이는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1장)는 것을, 역사적 사건과 비역사적 사건을 동시성으로 이해하는 여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느님의 뜻은 이미 태초에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말씀은 완성된 것이지만 그 말씀이 우리 삶에서 완성되었음을 바라보는 것은 우리 인생 전체를 통해서임을 예수마리아요셉의 성가정은 우리에게 전한다. 하느님의 뜻이 우리들의 생을 끌어간다는 총론은 알지만 그 총론이 우리의 삶에서 어떤 모습으로 구체적으로 펼쳐질지 그 각론을 우리는 모른다. 우리가 괴로워하는 것은, 가끔 우리의 믿음이 흔들리는 것은 총론이 아니라 각론 때문이다. 아는 것 때문에 괴로운 것이 아니라 모르는 것 때문에 괴롭다.
바오로 사도는 1고린토 13,12에서 총론과 각론의 간극에 놓인 우리를 이렇게 위로한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어렴프시 보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입니다. 내가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때에는 하느님께서 나를 온전히 아시듯 나도 온전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
<지금은 어렴프시 알지만 그때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듯이 볼 것이다>는 것을, 루카 2,41-52은 이미 완성된 것과 완성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동시에 우리에게 전한다. 이것은 시간과 공간의 동시성에서, 그 개방과 은폐, 그 간극의 메시지를 믿는 것이다.
47절과 52절에서는 시간의 동시성이 49절과 51절에는 공간의 동시성이 나타난다.
47 그의 말을 듣는 이들은 모두 그의 슬기로운 답변에 경탄하였다. 52 예수님은 지혜와 키가 자랐고 하느님과 사람들의 총애도 더하여 갔다.
47절에는 당시 하느님 말씀의 해석자로 자처하는 율법학자들과의 대화 장면이 12살 소년 예수의 슬기로움으로 요약 제시된다. 그리고 52절에는 예수님의 지혜가 키가 자라는 시간의 흐름으로 점진적으로 완성되어 감을 전한다. 47절에는 예수님의 신성이 52절에는 예수님의 인성이 초점화된 것이다.
49절과 51절에는 예수님의 생애의 결정적 공간인 나사렛 가정과 예루살렘 성전이 나온다. 이는 <성전을 정화하시다>라고 전하는 마태오21,12-13/마르코11,15-17/루카19,45-48과 요한2,13-22에서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안에 다시 세우겠다”는 것의 예표에 해당한다.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49절)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사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51절)
49절에서 나는 언제나 아버지의 집에 있다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51절에서 그럼에도 나사렛으로 내려갔다는 것은 그 곳 역시 아버지의 집이기에 그렇게 할 수 있다. 예수가 계신 곳이 언제나, 바로 성전이기 때문이다. 가정을 작은 성전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다.
이 시간과 공간의 동시성은 나사렛에서 시작하여 예루살렘에서 완성된다. 30년의 은둔과 3년이라는 개방에서 시간과 공간의 동시성synchronicity 同時性이 나타난다.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복음인 <부모는 율법교사들 가운데 있는 예수님을 찾아냈다>라고 전하는 루카 2,41-52은 하늘과 땅이 어떻게 하나가 되는가를 보여주는 여정이라고 할 수 있다.
사도 요한은 그 완성의 여정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요한9, 30)-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16, 16-33)-다 이루어졌다(요한19,30)-여인아 왜 우느냐(요한20,15)-평화가 너희와 함께!(요한20,19)로 이루어지는 여정이라고 할 수 있다.
성가정의 완성은 30년의 나사렛의 은둔과 3년의 공생활 개방의 여정이라고 할 수 있다.
“누가 내 어머니이고 형제냐”(마태오12, 46-50/마르코3,33/루카8,19-21)에서,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어서 그 제자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요한 19,26-27)
성가정의 완성이 은둔과 개방의 여정이라는 것은 우리의 신앙여정 역시 은둔과 개방의 역사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모든 것을 마음에 새겼던 마리아가 아들 예수를 온전히 이해하는 길도, 요셉이 마리아와 예수를 완전히 이해하는 길과 상응한다. 마리아는 적어도 예수님 부활 이후에 성령강림을 통해 제자들과 함께 교회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통해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생생하게 이해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요셉은 예수님 사후, 사도요한이 에페소에서 15년 동안 성모님을 모신 것으로 보아 피안으로 건너간 후에 모든 것을 완벽하게 이해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도 있다.
(이것은 순전히 개인적 경험의 피력이다. 나는 어머니가 살아생전 어머니는 하느님의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아버지는 하늘나라로 떠나신 후에야 하느님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어머니의 은총은 살아생전에 나에게 활짝 개방되었고, 아버지의 은총은 살아생전에 나에게 철저하게 은폐되었다.)
예수마리아요셉의 성가정의 중심에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은 은총의 개방성과 은폐성에서 찾을 수 있다. 총론總論은 알아도 각론各論은 알 수 없는 은둔隱遁과 개방開放의 동시성synchronicity同時性에 성가정의 축복이 놓여 있고, 우리 신앙의 순례도 그와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이 주변인이 되고, 그렇지 않은 이들이 중심부 담론을 이끌어가는 것을 흔히 있는 일이다. 억울해 할 필요가 없다.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부모는 율법교사들 가운데 있는 예수님을 찾아냈다”에서 율법교사는 당대 종교의 중심부 담론을 이끌어가는 이들이었다. 결국 그들에 의해 당신(이) 아들이 죽어야 한다는 것을 예수 자신(계시적-선험적으로는 알 수 있었겠지만 인성으로는 알 수 없었을 것이다)도 예수의 부모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사실, 은폐를 감당할 수 없다면 개방은 자기우상화의 길로 접어드는 지름길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을 복음사가는 순종이라고 표현한다. 내 가족조차 내가 누군지 몰라도 된다. 그리고 정말 서로, 끝내 모를 수도 있다. 그렇기에 의사여! 네 병이나 고쳐라(루카4,16-30)라는 은폐의 역사는 개방의 해자(垓字)에 해당한다. 은총이라는 성을 보호하기 위해 성 주위에 담이나 호수를 쌓는 것과 다르지 않다.
예수마리아요셉의 성가정은 서로를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뜻이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그 뜻에 자신의 여정을 온전히 맡긴이들이 꾸려간 공동체다. 모든 불행이 우리 가족을 비켜가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하는 가족주의가 아니다.
성가정은 세상 사람들이 겪어내는 고통과 시련을 동시에 맛보면서 이것이 하느님이 뜻일까? 아니면 저것이 하느님의 뜻일까를 묻고 또 물으면서, 곰곰이 생각하거나 가슴에 새기면서, 결국 하느님이 세상을 이겼다는 것을 믿고 희망하면서, 자비와 용서를 구하는 <상처와 영광>이 공존하는 작은 교회라고 할 수 있다.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있고,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되는 신비의 여정 속에는 옳고 그름이 아니라 애증으로 서로에게 스며드는 관계가 가족이라고 할 수 있다. 존재하는 모든 이들의(것들의) 초기값은 바로 하느님의 창조(사랑)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글을 마치며,
Ⓐ41 예수님의 부모는 해마다 파스카 축제 때면 예루살렘으로 가곤하였다. 42 예스님이 열두살 되던 해에도 이 축제 관습에 따라 그리로 올라갔다. 43 그런데 축제 기간이 끝나고 돌아갈 때에 소년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남았다. 그의 부모는 그것도 모르고 44 일행 가운데 있으려니 여기며 하룻길을 갔다. 그런 다음에야 친척들과 친지들 사이에서 찾아보았지만 45 찾아내지 못하였다. Ⓑ그래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그를 찾아다녔다. 46 사흘 뒤에야 성전에서 그를 찾아냈는데, 그는 율법교사 가운데에 앉아 그들의 말을 듣기도 하고 그들에게 묻기도 하고 있었다. 47 그의 말을 듣는 이들은 모두 그의 슬기로운 답변에 경탄하였다. Ⓒ48 예수님의 부모는 그를 보고 무척 놀랐다. 예수님의 어머니가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하자, 49 그가 부모에게 말하였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50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한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51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사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52 예수님은 지혜와 키가 자랐고 하느님과 사람들의 총애도 더하여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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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하늘 새땅, 새예루살렘은 위로부터의 영성과 아래로부터의 영성의 통합 (0) | 2024.11.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