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다”라는 존재의 거룩한 질량, 마음, 목숨, 정신, 힘을 다하여, 나 자신처럼!
-연중31주일,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를 중심으로
1. 도연명의 『귀거래사』
돌아가자!/전원이 잡초가 무성해지려고 하니 어찌 돌아가지 않겠는가/이미 스스로 마음은 몸이 시키는 일을 하고 있으니/ 어찌 실심하여 홀로 슬퍼하기만 하겠는가/ 이미 지나간 낳은 따질 수 없음을 깨닫고/앞으로 올날은 바른 길로 따를 수 있음을 알았노라/ 진실로 길을 잃었으나 멀리 가지 않았으니/ 지금이 옳고 어제는 잘못이었음을 알았노라/배는 한들한들 가벼이 떠 가고/바람은 살랑살랑 옷자락에 불도다/ 길가는 나그네에게 앞 길을 물으니/세벽빛이 희미함이 한스럽도다/ 마침내 조그마한 집을 바라보고 기뻐하며 달려가니/사내아이 종은 환영하고/ 어린 아들은 문에서 기다린다. / 오솔길을 황폐해 졌으니 소나무와 국화는 그대로 남아 있다/어린 아들 손을 잡고 방으로 들어가니/술이 술동이에 가득히 있기에/술병과 술잔을 잡아끌어 스스로 따라 마시고/ 뜰의 나뭇가지를 바라보면서 얼굴을 펴노라/남쪽 창가에 기대어 자유스러움을 부려보니/무릎 들일 만한 곳이 편안함을 알았노라/전원을 날마다 거닐며 취미를 만들고/ 문은 비록 만들어 두었으나 항상 닫혀 있다/ 노인은 자팡이를 짚고 가며 쉬며 하다가/ 때때로 머리를 들어 멀리 바라보니/구름은 무심히 산봉우리에 일어나고/새는 느릿느릿 날다가 돌아올 줄을 나누나/ 해가 뉘엿뉘엿 지려하는데/외로운 소나무를 어루만지며 서성대도다//돌아가자/교제를 그만두고 교유를 끊어야겠다/ 세상이 나와 서로 맞지 않으니/다시 수레를 타고 가서 무엇을 구하겠는가/친척들의 정담을 즐거워하고/거문고와 책을 즐기며 근심을 푸리라/농부가 나에게 봄이 왔음을 알려주니/ 장치 서쪽 밭두둑에 농사일이 있게 되겠구나/ 때로 비단으로 꾸민 수레를 준비하라고 명하고/ 때로 외로운 배를 저어서/ 이미 깊숙이 들어가 골짜기를 찾기도 하고/ 또한 꼬불꼬불 험한 길을 지나기도 하니/나무들은 기쁜듯이 꽃을 피우려하고/만물이 제때를 얻음을 부러워하고/내 인생이 장차 다함을 느끼노라/ 그만두어아!/우주 안에 이 몸을 붙이고 살기를 다시 얼마를 하겠는가/ 어찌하여 마음가는대로 떠나거나 머무르는 것을 맡겨두지 않고/어찌하여 황황히 어디로 가고자 하는가/부귀는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요/신선이 사는 천상세계는 기약할 수가 없도다/좋은 날을 생각하다가/ 그날을 만나면 외로이 가서/혹은 지팡이를 세워두고 김을 매리라/ 동쪽 언덕에 올라 휘파람을 불며/ 맑은 물 굽어보며. 시를 짓노라. / 왜오라지 조화를 타고서 일생을 마치고 말 것이니/저 천명을 즐길 뿐 다시 무엇을 의심하겠는가.
도연명의 「귀거래사 」는 시인이 41세 때, 모든 관직을 내려놓고 고향으로 돌아가 쓴 산문시이다. 전문은 모두 240여 자이며, 각운이 다른 네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귀거래혜(歸去來兮, 돌아가노라"로 시작되는 첫째 단락은 관리생활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는 심경을, 둘째 단락은 집에 도착한 기쁨을. 셋째 단락은 고향에서의 생활과 그곳에서 느낀 안분지족을, 마지막 단락은 자연의 섭리에 몸을 맡겨 살아가려 한다는 소회를 담고 있다.
「귀거래사」는 도연명의 이력과 관련하여 입신양명을 자연귀의와 대척점에서 바라볼 수도 있겠지만, 「귀거래사」를 시인의 이력을 떠나 <돌아간다>는 의미에만 초점을 맞춰 읽는다면, 한 인간의 결단의 여정, 시인이 어디로 정향 定向 되어 있는지로 바라보게 된다.
그는 갈망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결단하여 그 갈망을 자기 것으로 산 존재라는 것이다. 인간은 끊임없이 어떤 근원에 대한 갈망을 지닌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근원에 대한 갈망은 그가 전원에 있든 아님 도시에 있든, 어떤 공간의 문제가 아니라 그의 결단과 선택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막연하게 ‘나는 있다’는 그런 존재로 인간은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있다는 것은, 어딘가로 돌아간다는 것을 전제하며, 자신이 무엇으로 정향定向되어 있는가를 고백하는 것이다.
순애데레사, 탱큐! 해바라기는 해로 정향(定向)되어 있다.
2. 존재는 그 자신으로 가득차 있다. 그 자신을 뚫고 막연하게 ‘나는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가?(레비나스)
그렇다면, 막연하게 ‘나는 있다’는 사실을, 나는 어딘가로 돌아간다는 상태를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가? 타자와의 관계에서 나는 있다 혹은 없다고 말할 수 있다고 바라본 사람, 엠마누엘 레비나스!
타자윤리학 하면 떠오르는 엠마누엘 레비나스는 이를 “철학은 충격과 망설임에서 시작된다”고 말한다. 왜 그에게 철학은 충격이고 망설임이었을까? 레비나스는 철학이든, 사랑이든 타자의 얼굴을 상정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타자는 미래다, 라는 명제에서 엠마누엘 레비나스는 <타자의 얼굴- 얼굴론>을 통해 ‘존재의 무게’가 무엇인지 평생 추구했던 철학자다.
레바나스는 『존재에서 존재자로』(1947), 『시간과 타자』(1947), 『전체성과 무한』(1961), 『존재와 다르게 본질 저 편으로』(1974), 『윤리와 무한』(1982)에서, 나를 나로 규정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타자와의 관계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다.
레비나스는 사람은 어떻게 자족적 실체인 '코나투스'의 상태에 도달하고, 동시에 그곳에 계속 머물러 있을 수 없는 존재인가를 질문한다. 즉 어떻게 나는 나의 삶의 태도를 바꾸어 타자를 내 존재의 무게중심으로 삼을 수 있는가를 고민했던 철학자이다.
레비나스는 하이데거 철학의 극복을 통해 ‘나’를 하나의 질문으로 바라본다. ‘나’란 막연하게 ‘있다’는 사실이자, 사건이므로 <나>는 나를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서 그의 타자론은 시작된다. 그의 철학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나-있다>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를 바라보기 위해 <유한자의 존재-홀로서기-고독의 물질성-코나투스- 빛의 소환-고통과 죽음-타자의 소환-다원주의-초월>등을 통해 타자윤리학이 지향하는 형이상학적 욕망의 다리를 놓고 있다.
존재는 그 자신으로 가득차 있다. 그는 그 자신의 모든 것을 짊어지고 다닌다(41)빛은 플라톤 이래 모든 존재의 조건이다(76)감각과 미학은 사물 자체를 생산한다(87)있음이 만들어 내는 가벼운 소리 그것이 공포다(97)익명적인 있음 속에서 주체는 스로를 확립한다.(『존재에서 존재자로』,1947)
이렇게 나의 있음이 공고히 되었을 때 나타나는 것이 홀로서기이자, 고독의 물질성이다. 내가 나 홀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은, 서양 철학의 전통인 사유가 아니라 경제가 기반이 된 자족적 실체 때문이고, 그것을 <코나투스적 존재론>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또는 <향유적 무아경>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타자와 얽히지 않는 깔끔한 홀로서기의 존재론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 인간은 노동을 하고, 자신의 집을 짓게 된다. 그것이 노동이자 소유를 정초하는 집이기 때문에, 집이 거둬들이고 보관할 수 있는 이동 가능한 것들과 동일한 의미에서의 레비나스에게 집은 소유물은 아니다. 집이 소유되는 것은, 집이 이미 그 소유자를 환대하기 때문이라고 본 것이다. 이것이 집의 본질적 내면성으로, 모든 정주자에 앞서 그 집에 정주하는 정주자로, 진정으로 누군가를 맞아들이는 자로, 맞아들이는 자 그 자체로, 인간은 무의식적으로 향유적 존재 안에는 환대적 존재가 자리한다고 보았다.
타자의 무게는 존재의 무게다. 존재의 무게(...)아픔과 괴로움과 고통 속서 우리는 고독의 비극을 형성하는 결정적 요소를 가장 순수한 모습으로 다시 보게 된다. 이 결정적 요소는 향유의 무아경으로을 통해서도 끝내 극복할 수 없는 것이었다. 고통꽈 죽음은 타자의 현현과 마찬가지로 계산할 수 없는 미래다. 타자는 타자라로써 높음과 비천함에 스스로 처해 있다. (『시간과 타자』,1947)
그런데 인간은 나라는 존재의 무게, 빛만을 감당하는 것이 아니다. 나 홀로 존재하기 위해 자족적 실체의 환경을 만든다는 것은 불가피하게 유한한 자본과의 투쟁을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향유적 무아경에서 빛만을 초대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일하기 싫은 사람은 먹지도 말라>는 명제로 정식화한다. 이로써, 인간은 만인의 만인에 투쟁 속에 살게 되고, 고통과 죽음에 직면한 시간의 주인이라는 것과 마주하게 된다. 고통과 죽음은 인간의 무기력, 무력함, 불가항력의 환경 앞에 자신을 세우게 된다. 여기서 향유의 존재론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환대로써의 존재론이 표면화 된다. 타자를 받아들이기 된다. 타자와 고통과 죽음은 그 전모를 알 수 없다는 점에서 <신비>라는 공통분모를 지닌다.
다원론은 타자의 근본적 타자성을 전제한다. 이 타자성은 내가 단순히 나에 대한 관계에 따라 떠올리는 타자성이 아니라, 나의 에고이즘으로부터 출발해서 내가 마주하는 타자성이다. (『전체성과 무한』, 1961)
그런데 타자는 우리는 <하나다>로 단순하게 환원될 수 없는 나와는 다른 얼굴을 지닌 존재, 알 수 없는 신비처럼 마주한다. 더욱이 타자성은 나에게 주인과 하인의 관계, 섬김의 관계를 요구한다. 자신을 돌볼 책임을 요구한다. 타인의 타자성은 그에게 있지, 나에 대한 관계에 따라 있지 않기 때문이다. 타인의 타자성은 스스로를 계시한다. 하지만 내가 타인의 타자성에 접근하는 것은 나로부터 출발하는 것이지, 나와 타자의 비교에 의한 것이 아니다. 내가 타인의 타자성에 접근하는 것은 내가 그와 함께 유지하는 사회로부터 출발해서지, 나와 타자라는 항들을 반성하기 위해 이 관계를 떠남으로써가 아니다.
내 책임에 명해졌지만 내가 놓친, 잘못한 그-자신의 흔적, 그의 죽을 수밖에 없음이 내 책임이고 내가 살아남은 것이 내 죄인 듯한 그의 흔적?-?이것이 얼굴이다. 얼굴은 직관적 지향의 올곧음에 주어진 이미지의 직접성보다 더 팽팽한 무시원적 직접성이다. 근접성 속에서 절대적인 타자, 즉 “내가 배지도 낳지도 않은” 이방인인 그를 나는 이미 두 팔로 안은 셈이다. ( 『존재와 다르게 본질 저 편으로』, 1974)
여기서 타자의 얼굴이 왜 낯선지? 그것이 무엇인가가 떠오른다. 레비나스의 사상에서 자주 언급되는 얼굴은 눈 색깔, 코의 형태, 뺨의 불그스레함 따위가 아니라 신의 말이 울려 퍼지는 방식으로의 얼굴이다. 신(무한)의 말로 격상되는 얼굴과의 관계는 초상화와 같은 조형적 형태가 아니라 처음에 타인이 나와 무슨 관계인지를 묻지 않는 비대칭적 관계이고, 절대적으로 약하고, 벌거벗은 것과의 관계이며, 극도의 외로움을 겪는 것과의 관계다. 양심을 건드리는 관계이며, 정의를 요구하는 관계이다.
윤리는 자아를 통한 자아의 주권의 자리 없음에서, 가증스러운 자아의 양태에서 의미하지만 또한 어쩌면 영혼의 정신성 그 자체, 그리고 확실히 존재의 의미 곧 자기 자신을 정당화하라는 존재의 부름에 대한 물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윤리는 무조건적이고 심지어 논리적으로 분간할 수 없는 동일성의 절정 곧 모든 기준 너머에 있는 자율의 절정에서 나로 불리는 동일성의 애매성을 통해 그러나 바로 이 무조건적인 동일성의 절정에서 또한 자기가 가증스러운 자아임을 고백할 수 있는 동일성의 애매성을 통해 의미한다.”(『윤리와 무한』, 1982)
그렇기에 타자의 얼굴 앞에서 우리는 윤리적 존재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된다. 윤리란 “인간적인 것으로서의 인간성”이고 “인간이 자기보다 타자에게 우선권을 줄 가능성”이다. 예컨대, 성서에서 동생 아벨을 죽인 형 카인이 유지한 입장, 즉 나는 나이고 그는 그이다, 라는 존재론적 분리에 결핍된 것이 바로 윤리다. 레비나스는 윤리를 이렇게 정의한다.
이 윤리 또는 윤리적 관계가 레비나스는 지향적 의식이라고 부른다. 레비나스는 지식과 지배와 함께 정립되는 존재 안에서의 정립의 정의(justice) 그 자체인 지향적 의식 대신에 비지향적 의식, 즉 처음부터 타자의 얼굴에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의식을 경험한다. 이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의식이 바로 '내가' 되는 것이며, 동시에 그렇기 때문에 나로서의 나의 존재에 대한 긍정 속에서 나의 <존재할 권리>를 책임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너를 섬기면서 내가 누군지 알게되는 것!
여기서 무한이란 개념이 나온다. 무한의 관념은 타자와 관련한 동일자의 분리를 전제한다. 그러기에 타자와의 평화가 모든 것에 앞선 나의 일이 된다. 네가 평화롭지 않으면 나는 무조건 평화롭지 않다. 네가 평화로울 때만 너를 떠날 수 있다. 이별을 허락하지 않는 관계, 무관심하지-않음, 말함, 책임, 다가감은 책임질 수 있는 유일한 자, 종속이 나의 해방이다. 그러기에 내가타자 앞에 출현하는 방식은 '출두'다. 나는 격변화할 수 없는 '소환의 수동성' 속에 그냥 나를 위치시킨다. 이것이 나 자신이다.
타자에 대해 나는 책임이 있고, 이 타자 앞에 나는 책임으로 있다. “내가 여기 있습니다”라고. 타인은 이렇게 나를 강박하는 이웃이며, 이미 얼굴이며, 비교할 수 있는 것인 동시에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는 유일한 얼굴이자, 다른 얼굴들과 관계하는 얼굴, 정확히는 정의에 대한 염려 속에서 가시적인 얼굴인 것이다.
만약, 이것을 사랑이라 부른다면, 레비나스는 이 문제를 두 가지로 압축한다. 첫째, 신-인간 사상은 신의 낮아짐, 곧 “가느다란 침묵의 목소리처럼 자기의 비천함에서 나타나는 진리의 관념, 곧 박해받은 진리의 관념”으로서 “초월의 가능한 유일한 형태”라고 말한다. 구체적으로 신은 얼굴과 결합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신은 동화할 수 없는 타자성, 절대 차이이다. 신은 절대적으로 지나간 흔적이다. 그 흔적은 나의 이웃의 얼굴에서의 신의 근접성이다. 둘째, 신-인간 사상은 창조주의 피조물로의 실체변화로서 동일성의 원리를 훼손하는데 어느 정도 타자들을 위한 대속과 속죄, 인간의 인간성을 표현한다. 그것은 내 안에 시작하는 존재 안에서의 이 절정―‘자기의 존재를 보존하는’ 존재의 전복―이다.”
그렇다면 레비나스 타자론에서 사랑과 정의, 자비는 무엇인가. 얼굴과 유일한 타인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구성인 정의는 사랑에서 나오며, 정의와 자비는 낯설어 보이지만 분리할 수 없고 동시적이다. 정의는 자비가 없다면 변질되고 자비는 정의가 없다면 불가능하게 된다. 사랑과 정의, 자비는 동시에 출몰하는 타자론이다. 레비나스는 구체적으로 경제 정의의 활동이 정신적 존재의 서막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정신적 존재를 완성한다고 주장한다. 낯선 얼굴의 타자론을 전제로 우리는 생명의, 존재의 무게를 가늠할 수 있다. 그 무게를 감당하느냐 비켜가느는 우리가 “나는 있다”는 것을 스스로 규정한 것이나 다름없다. 나는 있다는 것은 너는 있다는 말을 함유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가 어디로 정향되어 있는 가를, 혹은 어디로 정향되고 싶은가를 고백하는 것이다.
3.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르코12,28-34
그때에, 율법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청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그러자 율법학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훌륭하십니다. 스승님, ‘그분은 한 분뿐이시고 그 밖에 다른 이가 없다’하시니, 과연 옳음 말씀이십니다. 또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재물보다 낫습니다.” 예수님께서 그가 슬기롭게 대답하시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그리 멀리 있지 않다”하고 이르셨다. 그 뒤에는 누구도 감히 그분께 묻지 못하였다.
연중31주,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라고 전하는 마르코12,28-34은 마태오22, 34-40과 루카 10,25-28에 공통으로 전해지는 사랑의 아중계명으로 예루살렘 입성 후, 예루살렘 성전에서 벌어진 다섯 번의 논쟁 가운데 네 번째 논쟁에 해당한다. 논쟁은 토론이 아니라 가르침이다.
이 논쟁이 진행된 그때는, 예루살렘 입성 후 삼일후라고 전해진다. 3은 완전한 숫자다. 다섯번의 논쟁은 (예루살렘 3일 후에 있었던) 결국 이 네번째 논쟁으로 수렴되고 완성된다고 할 수 있다. 예루살렘에 예수께서 입성하셨다는 것은 당신 스스로 인류를 위하여 자신을 제헌하시겠다는 메시야로써의 결단의 시간이 가까웠음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예루살렘에서의 다섯 번의 논쟁은 예루살렘 입성 전에 단순히 제자들과 군중들만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이제, 자칭 인류의 종교지도자들에게 메시야로써 그분이 공개적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공적인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그 다섯 번의 가르침은 오늘 종교를 갖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필수적인 정체성의 문제와 닿아 있다고 할 수 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벌인 다섯 번의 논쟁의 주제는 다음과 같다.
①첫째 논쟁: 11,27-33 대제관, 율법학자, 종교원로들이---(성전정화사건)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들을 하십니까? 누가 당신에게 이런 일을 할 그 권한을 주었습니까? -성전이란 무엇을 하는 곳인가?
②둘째 논쟁: 12,13-17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황제에게 주민세를 바쳐도 좋습니까? 혹은 바치지 말아야 합니까?--세상을 이끌어 가는 주인은 누구인가?
③셋째 논쟁: 12,18-27 사두가이파—부활 때 그 부인은 (일곱형제 가운데) 그들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부활은 있는가?
④넷째 논쟁: 12,28-34 율법학자-모든 계명 가운데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한 분이신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⑤다섯째 논쟁: 12,35-44 예수께서 그들에게---다윗 자신이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불렀는데, 어떻게 그리스도가 다윗의 아들이 되겠습니까?--인류가 기다린 메시야는 누구인가?
예루살렘 성전에서 다섯 번의 논쟁 가운데 네 번째 논쟁의 주제는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라는 율법학자의 질문은 은총의 은총에 관한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 세 번의 논쟁은 누가 봐도 예수의 권위를 문제삼는 당대 종교지도자들의 도전적인 어조였다면 네번째 논쟁은 마치 스승의 가르침을 묻는 제자의 어조처럼 들린다. 그런데 복음사가는 온유하게 질문하고 슬기롭게 대답한 율법학자가 예수님의 가르침에 감복하였지만 즉시 예수를 따랐다는 문장을 쓰지 않은 것으로 보아,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그리 멀리 있지 않다”하고 이르셨다는 것에 주목하게 된다.
십자가상의 우도에게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카23,43)라는 분명히 어조와는 다른 차원이기 때문이다. 하느님 나라에게 그리 멀리 있지 않다는 것은 하느님나라에 들어갈 가능성일 뿐이다. 이는 예루살렘 입성후 예수가 하느님 나라를 위하여 어떤 여정을 갔는지를 염두한 복음사가의 집필의 방향과 맥을 같이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를 묻은 율법학자가 하느님 나라의 가능성의 타진에만 머무른 이유가 무엇인가를 성찰할 수밖에 없다. 율법학자는 부자 청년과 마찬가지로 계명에 대한 철저한 이해를 하고 있었지만 그것이 예수를 따르는 행위로 이어지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목숨을 다하여>를 거론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알다시피 유대교의 계명은 무려 613개의 조항이 있었다. 그 가운데 248개 조항은 ~하라는 명령이고, 365개 조항은 ~하지 말라는 금령이다. 예수님시대 전후에서 유대교 식자들은 이 613개의 조항 가운데 가장 중요한 으뜸 계명이 무엇인가를 그들 여러 집단 안에서 자주 토론의 주제로 삼았다. 그러나 그들이 모든 계명 가운데 으뜸 계명이 무엇인가를 토론한 이유는 다른 계명을 지켜야 하는 근거로 보기위한 것이지 그를 준거로 다른 계명을 비판하거나 무효할 의도가 전혀 없었다.
따라서 모든 계명을 사랑의 이중계명으로 환원시킨 예수의 가르침과는 맥락상 다른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으뜸계명 가운데 예수가 첫째계명이라고 지목한 것은 신명기 6,5절에 있는 것으로 유대인들이 아침저녁으로 바치는 신앙고백문으로 애주는 있으나 애인은 없다. 종교의 근본주의자들이 범하는 우는 여기서부터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라고 전하는 마르코12,28-34에서 첫째계명은 신명기 6, 5절, 둘째계명은 레위기 19,18절에서 약간의 첨삭이 들어있다. 이 첨삭을 성서학자들은 어록에 전해지던 것을 마르코 복음사가의 의도적인 가필이라고 보기도 한다. 그렇다면 복음사가는 무엇을 초점으로 맞추기 위해 이 이중계명을 전하고 있는지가 오늘 우리에게 건네는 성찰의 주제라고 할 수 있다.
50년 전후 바오로의 서간문이 쓰여진 이후, 70년 전후 최초의 복음서를 쓴 마르코 복음 사가는 누구인가? 단적으로 그는 처음 복음을 집필한 사람이고(70년 전후) 베드로의 통역관이자(에우제비우스 교회사/1베드로5,13) 바오로의 1차전도여행과 (사도12,12/25), 3차전도여행(필레24/골로사이4,10)의 전교 동반자이며 바오로 사도 순교후 디모테오서4,11에 전해지는 것으로 보아 그는 유대교 그리스도인으로 보고 있다. 또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재물보다 낫습니다.”라는 첨언을 감안한다면 성전 중심의 신앙이 아니라 주로 디아스포라 이방계 그리스도인을 위해 복음서를 집필한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여기서 복음사가의 첨삭은 한 분이신 하느님을 섬겨야 한다는 대상의 변화가 아니라 어떻게 섬겨야하는지의 방법론의 첨삭인 것에서 그를 추론할 수 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진행된 세 번의 논쟁을 지켜본 율법학자의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대해 예수님의 대답은 첫째와 둘째로 그 계명을 나누어 첫째계명과 둘째계명의 관계까지 말씀하신다. 사랑의 이중계명이라 불리는 이 첫째와 둘째는 종속관계이자 보완관계처럼 보인다. 으뜸은 가장 이라는 의미로 하나여야만 한다. 그런데 둘을 합쳐 으뜸이라고 하였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 계명은 나누어질 수 없는 계명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사랑을 하지 않는 사람도 없고, 사랑을 싫어하는 사람도 없다. 그리고 사랑은 하느님을 믿는 신자들의 전유물도 아니다. 생명자체가 이미 사랑이 아니고서는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사랑은 인간의 전유물도 아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사랑을 추구한다고 할 수 있다. 사랑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보편적인 추구의 본성이다. 그렇다면 굳이 보편적인 존재이유에 해당하는 이 사랑이 으뜸 계명인 이유가 무엇인가?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청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신명기6,5)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레위기19,18)
Ⓒ “훌륭하십니다. 스승님, ‘그분은 한 분뿐이시고 그 밖에 다른 이가 없다’하시니, 과연 옳음 말씀이십니다. 또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재물보다 낫습니다.”
첫째계명의 출처인 민수기 6장의 주제는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주제이고, 둘째 계명의 출처인 레위기 19장의 주제는 <거룩한 백성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거룩한 백성이 되는 것이라는 전제가 복음사가의 의도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예수님 말씀, Ⓑ모세의 계명, Ⓒ율법학자의 재해석에서 첫째계명은 종적인 하느님에 관한 사랑이고 둘째계명은 횡적인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이 두 사랑은 크로스되는 십자가의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종적인 사랑만을 황금률로 믿고 있는 이들에게 이 이웃사랑은 종속적인 계명이자 보완적인 계명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사랑의 방법론에서 그들은 예수를 시험의 대상이지 신앙의 대상으로 바라보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에서 예수님의 말씀에 덧붙여진 부분은 <정신을 다하고> 라는 부분이다. 마음과 정신을 나누어서 강조한 이유가 무엇인가? 마음은 선택과 결정, 완전한 소통과 연결되어 있다면 정신은 의지와 연결된 부분이다.
Ⓒ에서는 율법학자의 재해석은 <목숨을 다하고>를 빼고 <생각을 다하여>로 교체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재물보다 낫습니다.”는 것이 첨언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은 마음, 목숨, 정신, 힘을 다하여 사랑하라고 전한다. 인간의 조건 - 존재를 다하여 사랑하라는 것, 즉 목숨에 대한 개념 자체를 바꾸지 않으면 가능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인간의 충족 충만, 행복이 하느님으로 정향되어야 함을 가르친 것이라 할 수 있다.
또 이웃 사랑은 나를 어떻게 사랑하느냐의 여부와 연결되어 있으며, 그때 나를 사랑한다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 때, 이웃 사랑이 진정 가능함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마음, 목숨, 정신, 힘을 다하여 사랑하라는 첫째 계명은 결국 나라는 인간이 어떤 조건을 지닌 존재이며, 그것은 각기 어떻게 통합한 사랑하는 것인가를 아는 것으로부터시작된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때, 율법학자의 재해석인 이웃사랑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다는 의미와 부합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나 중심적인 사랑과 나를 제대로 사랑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나 중심적인 사랑은 내가 어떤 존재인줄 모르는 상태의 충족을 욕구하는 상태라고 한다면, 나를 제대로 사랑하는 것은 마음과 목숨과 정신과 힘을 지닌 나라는 존재의 무게를 아는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마음과 목숨과 정신과 힘은 우리 존재의 무게이며, 하느님으로 정향될 수 있다는 점에서 거룩한 질량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계명을 지키면 첫째계명을 지킬 수 있고, 둘째 계명을 지킨다면 첫째 계명을 지킬 수 있다는 호환관계임을 알 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교부문헌 총서』에서 모든 사물의 자리를 찾아주는 것이 애주애인이 말하는 사랑이라고 전한다.
“사물들을 온전하게 보는 사람은 외롭고 거룩하게 사는 사람이다. 그는 또한 이치에 맞는 사랑을 품은 사람으로서 사랑하지 말아야 할 것을 사랑하지 않고 사랑해야 할 것을 사랑하지 않는 일 없고 덜 사랑할 것을 더 사랑하지 않고 더 사랑해야 할 것을 덜 사랑할 것을 동등하게 사랑하지 않는다. 동등하게 사랑할 것을 덜 사랑하거나 더 사랑하는 일 없다.”
모든 사물의 자리를 찾아주는 것, 그것을 레위기에서는 이웃과의 사랑을 거룩한 백성이 되는 길이라고 전한다. 그것을 마태오 복음 사가는 사랑의 이중 계명은 우리에게 완전한 사람이 되라고 전하며 요한 복음 사가는 나는 아버지와 하나9요한9,30)라고 전한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한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마태오5,48)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혹은 완전한 사람이 되는 것은 하느님으로 정향되어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다른 말로 거룩함이라 부를 수 있다. 사랑의 아중 계명은 모든 관계를 거룩하게 하라는 것이기에, 거룩하다는 것은 우리의 힘의 근원이 무엇인가를 또한 말해준다. 이는 거룩함은 인간에게 시간을 사용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음을 말한다. 과거나 미래에 사로잡힌 시간을 살것인가? 지금 이 순간 현재를 살 것인가 하는 것이다. 또한 생각과 목숨과 정신과 힘은 모두 물질 혹은 육신을 떠난 존재 상태임을 알 수 있다. 이 사랑의 주체는 엄밀히 물질을 초월한 관념이기에 존재하는 것과 무한한 소통을 할 수 있다. 보고 만지지 않고도 믿을 수 있는 상태다. 그리고 그 사랑의 근원은 하느님이고 그것의 구체화는 타자화의 관계다. 이는 사랑은 다른 말로 하늘과 땅과의 완전한 소통을 의미한다. 사랑을 구체화하는 것은 존재하는 모든 것들과 소통이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사랑의 이중계명은 바오로 사도의 전언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기 위해서”(1코린토9,22) 그분은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1코린토15,28) 에서, 존재하는 모든 것과의 완전한 소통을 의미한다.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을 사랑하라는 사랑의 이 이중계명은 그렇기에 모든 사랑(소통)은 용서를 필연적으로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형제에서 나오는 빛을 볼 수 있는 것은 그의 에고가 표출한 과거의 행위를 넘어서야 하기 때문이다. 행위의 어둠이 아니라 존재 자체의 빛을 볼 수 있는 것은, 그건 엄밀히 하느님이 우리에게 준 사랑의 권능, 힘일 것이다. 성령의 은사다. 그렇기에 사랑의 이 이중계명은 성령이 우리를 도와주지 않으면 가능하지 않은 존재이유라고 할 수 있다.
종교유무와 상관없이 사랑을 좋아하는 인간의 장애물은 모두 유한한 것들에 집착하기 때문에 사랑을 정서의 차원, 혹은 에로스의 차원으로 국한시킨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한계를 모르는 사랑의 이중계명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우리의 약함에 의존하지 말라는 언명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혼자 이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사랑은 그분이 내 안에 살지 않으면 가능하지 않은 사랑이다. 우리가 삼위일체의 은총에 힘입어 사랑의 이 이중계명을 살려면 우리가 만난 모든 관계들은 우리를 완성하는 퍼즐과 다름없음을 수용해야 한다. 이 역시 성령의 은사다. 사랑은 왜 교회가 필요한 가를 우리에게 말해준다.
연중31주,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라고 전하는 마르코12,28-34은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에 관한 은총의 메시지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어디로 정향되어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안다는 것! 그것이 사랑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언제 “나는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에 대한 자기증명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랑은 내가 누군지 아는 것이다. 나는 왜 그분을 아버지, 주님이라고 부르는지 아는 것이다. 하느님과 이웃을 온전히 사랑하는 것은 나 자신을 알지 못하면 할 수 없는 사랑이고 설사 그것을 안다할지라도 삼위일체의 도움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사랑이다.
사랑은 빛속을 걸어가는 것이기에 그렇다. 빛을 살기 위해 빛이 있어야 한다. 빛 속에서만 나는 내가 누군지 자명하게 알 수 있다. 그리고 나의 생명을 주신 그분이 누군지 ‘희미하게’ 그러나 “분명히‘ 알 수 있다(1고린토13장) 그렇기에 애주애인은 빛의 체험, 삼위일체의 거룩한 현존 체험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자신이 하늘과 땅을 온전히 사랑할 만큼 그렇게 큰 존재라는 것! 한계를 정하지 않은 삶에 투신하는 것. 마음과 목숨과 정신과 힘을 지닌 존재라는 것!
그런 맥락에서, 애주애인, 사랑의 이중계명은 나라는 존재의 거룩한 무게를 알고 그 무게를 감당하는 일이나 다름없다. 우리는 “나는 있는 나다”(탈출기3,14)라고 한 그분을 아버지로 부르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돌아가야 할 근원을 아는 사람들이다. “없음(무)”이 아니라 “있음”이다. <“있다”는 존재의 거룩한 질량, 마음, 목숨, 정신, 힘을 다하여, 진정으로 나 자신처럼!> 되는 것이 우리가 돌아가야할 바로 그 곳이다.
글을 마치며,
그때에, 율법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청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그러자 율법학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훌륭하십니다. 스승님, ‘그분은 한 분뿐이시고 그 밖에 다른 이가 없다’하시니, 과연 옳음 말씀이십니다. 또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재물보다 낫습니다.” 예수님께서 그가 슬기롭게 대답하시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그리 멀리 있지 않다”하고 이르셨다. 그 뒤에는 누구도 감히 그분께 묻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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