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이사야52,7)
-연중 29주일,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라.>를 중심으로
1. 힌용훈의 「정천한해(情天恨海)」
가을 하늘이 높다기로/정(情) 하늘을 따를쏘냐./봄 바다가 깊다기로/한(恨) 바다만 못 하리라.//높고 높은 정(情) 하늘이/싫은 것만 아니지만/손이 낮아서/오르지 못하고,/깊고 깊은 한(恨) 바다가/병될 것은 없지마는/다리가 짧아서/건너지 못한다.//손이 자라서 오를 수만 있으면/정(情) 하늘은 높을수록 아름답고/다리가 길어서 건널 수만 있으면/한(恨) 바다는 깊을수록 묘하니라.//만일 정(情) 하늘이 무너지고 한(恨) 바다가 마른다면/차라리 정천(情天)에 떨어지고 한해(恨海)에 빠지리라.//아아, 정(情) 하늘이 높은 줄만 알았더니/님의 이마보다는 낮다.//아아, 한(恨) 바다가 깊은 줄만 알았더니/님의 무릎보다도 얕다.//손이야 낮든지 다리야 짧든지/정(情) 하늘에 오르고 한(恨) 바다를 건느려면/님에게만 안기리라.
한용운의 「정천한해(情天恨海)」는 인간이 지닌 정(情)과 한(恨)이라는 유한한 사랑이 어떻게 '님'이라는 초월자 안에서 완성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구도(求道)의 시에 해당한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정(情)만 드는 것이 아니라 한(恨)도 쌓인다. 이는 남녀의 사랑만 그런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랑이 그렇다. 주고 싶은 것을 다 줄 수 없고, 받고 싶은 것을 다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정(情)이 높으면 한(恨)도 그만큼 깊어진다. 정(情)이 높은 만큼 한(恨)도 깊어진다고도 할 수 있다. 정(情)만 있으면 좋으련만 정(情) 곁에는 늘 한(恨)도 함께 따라다닌다.
정(情)과 한(恨)은 사랑의 두 얼굴이다. 대립의 개념이자, 그것이 원만하게 풀리지 못한 채 한쪽으로 치우쳐 극에 달하면 상극(相剋)이 된다. 정(情)과 한(恨) 사이에 놓여 있는 심연을 어떻게 건너는가에 따라 정한 (情恨)과 원한(怨恨)으로 갈라진다고 할 수 있다. 정(情)이 한(恨)을 끌어가지 못하면 한의 응어리가 자신도 모르는 원한(怨恨)이 되기도 한다. 정(情)과 한(恨)이 따로 나뉘지 않을 때, ‘님’이라는 절대자를 보게되고 정한(情恨)은 모든 이의 정한을 바라보는 상생(相生)의 문이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한용운 시는 정(情)과 한(恨)을 대립이나 상극의 개념이 아니라 인간의 성정에서 동시에 발생하는 인간사로 바라보고, 어떻게 정(情)과 한(恨), 그 심연을 건널 수 있는지를 모색한다.
1연에서 화자는 정한(情恨)의 정서는 가을하늘 보다 높고 봄바다 보다 깊음을 바라본다. 인간의 사랑, 그 정한(情恨)의 정서가 세상 그 어떤 사물보다도 높고, 깊다고 바라본 것이다.
2연에서 정(情)이 싫은 것도 아니고, 한(恨)이 병 될 리도 없지만 인간은 정(情) 의 하늘도 끝내 오르지 못하고, 한(恨)의 바다도 결국 건너지 못한다고 인간의 유한성을 바라본다. 정한(情恨) 앞에서 인간의 유한성은 그 모습을 드러낸다. 정한(情恨)은 인간으로 하여금 유한, 혹은 한계가 무엇인지 알게 한다고 할 수 있다.
3연에서 화자는 정(情)의 하늘은 높을수록 아름답고 한(恨)의 바다는 깊을수록 묘하다는 정한의 다른 얼굴을 보게된다, 일반적으로 정한(情恨)을 고통이나 상처로 바라보지만 화자는 오히려 정한(情恨)은 죽을만큼 힘들고 높고 깊을수록 아름답고 묘하다고 말한다. 그 고귀함에도 불구하고 화자는 그 곳에 오를 수도 없고, 그 것을 건널 수도 없다. 그 이름을 알아도 다다를 수 없다는 두겹의 한계 앞에서,
4연에 이르러 화자는 ‘정(情) 하늘이 무너지고 한(恨) 바다가 마른다면. 즉 정한(情恨)이 너무 힘들고 사무쳐서, 정한(情恨)을 유발하는 사랑이 사라진다면 차라리 정천(情天)에 떨어지고 한해(恨海)에 빠지리라고 말한다.
정한(情恨)이 아무리 힘들지라도 정한이 없는 세계에 살 바에야 차라리 삶 자체를 반납하는 게 낫다고 한다. 화자는 정과 한을 존재의 이유로 긍정한다. 정(情)만 원하지도 한(恨)을 버리지도 않는다. 대부분의 초극은 현실이 변화되어서 그 상황을 넘어선다면 여기선 정한(情恨), 그 상황자체가 인간의 존재이유임을 바라본 것이다.
이 정도의 정의 극에 이르고, 한의 극에 이르면 그 다음은 어떤 상태일끼? 현실에서 이 정도에 이르면 정한에서 손을 놓게 된다. 사랑 자체에 두 손을 들게 된다. 다시는 사랑하지 말자, 라는 말이 절로 나오게 된다.
여기서 한용운 시의 역설이 나타난다. 정한(情恨)에서 손을 놓게 된다는 것은 자포자기가 아니라 주의기도 할 때처럼 두 손을 하늘을 향해 들어올리는 것처럼 순리에 따르겠다는 것과 같다.
이 정한(情恨)은 화자로부터 시작하였으되 극한에 오른 정한(情恨)은 이제 정한 그 자체로 넘어간다. 정한(情恨)의 극은 혼자서는 능히 이루지 못하는 경지이기 때문이다. 사랑을 나눈 두 사람이 끝까지 정한(情恨)을 쥐고 있을 때, 모든 극極에 다다른 것들이 보여주듯, 다른 차원으로 넘어간다. 물이 얼게 되고 물이 끓게되는 임계점을 넘어서는 것과 같다.
5연과 6연에서 아아, 라는 탄식은 극極에 이른 정한(情恨)에서, 정(情)의 하늘이 ‘님’의 이마보다 낮고 한(恨)의 바다가 ‘님’의 무릎보다 얕다는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 그토록 아름다운 정의 하늘이 님의 이마에 미치지 못하고, 그토록 묘한 한의 바다가 님의 무릎보다 낮다는 습명(襲明:돌연 갑자기 밝아짐)이 이루어진다.
님의 정한(情恨)은 얼마나 더 높고 깊기에...? 여기서 한용운 시의 역설의 미학, 그 ‘비틀림’이 시작된다. 대부분의 역설은 곧바로 인간사에서 초월의 세계로 수직상승한다. 그러나 한용운의 시의 역설은 이 ‘비틀림’을 통해 ‘인간사-인간사- 초월자’라는 수평이동을 시도한다. 단순이 인간의 정한은 초월자에 의해서만 완성된다고 서둘러 변증법을 시도한다면 이 또한 억지스럽다. 다 줄 수도 없고 다 받을 수도 없는 저 심연 속에서, 정한(情恨)의 비틀림, 그 문이 열린다.
아아, 아아...라는 저 두 번의 탄식이 안고 있는 정한(情恨)의 크기를 염두해 둘 때, 인간의 정한(情恨)에서 어떻게 절대자인 ‘님’이 개입되는지 바라보게 된다. 애뜻한 정이 크면 클수록 세상의 정이 무한한 것임을 바라보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이 바라본 것만 이 세상에 가득한 것으로 바라보게 된다. 화자는 천지에 정한(情恨) 아닌 것이 없음을 보게 된다. 화자는 정(情)의 눈으로 정(情)을 바라보게 되고, 한(恨)이 깊어진 만큼 한(恨)의 바다가 건널 수 없는 바다임을 알게 된다. 세상의 어떤 생명도 정한(情恨)이 아닌 것이 없음을 보게 된다.
정한(情恨)이 극에 이르러 뭇 생명의 정한(情恨)으로 흘러가게 될 때, 화자의 눈물이 누군가의 눈물과 합쳐져 정의 손끝이 저 하늘에 닿을 듯 하고, 한의 다리가 저 바다를 건널 듯하다. 그때 화자의 정한(情恨)은 이 세상의 정한을 다 바라보지 못한 정한이요, 그로인해 화자는 자신의 정한이 ‘님’이라는 ‘세계’의 그 이마보다 낮고 님의 무릎보다 낮은 것임을 보게 된다.
정한의 극에서 모든 생명이 살아낸 그 길의 이름이 다름 아니라 정한(情恨) 이었음을 보게 될 때, 정의 극에서 정을 보고, 한의 극에서 한을 보는 ‘습명-혼현 깨달음’이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상극(相剋)에서 생극(生剋)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5연과 6연의 비약은 한용운 시인 전 생에 걸친 구도의 깨달음이 과감하게 생략되어 담겨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님'은 수평적 세계의 타자라는 그 님이자, 수직적인 세계의 초월자라는 그 님이라 할 수 있다. 정(情)과 한(恨)의 정반합(正反合)을 통해 두 ‘님’에 도달하는 변증법을 통해 정한(情恨)은 모든 이들의 정한(情恨)을 바라보는 길이 된다.
그로인해, 7연에서 화자의 조건이 어떠하든, ‘님의 품에 안겨서’ 정(情)의 하늘에 닿고 한(恨)의 바다를 건너 정한(情恨)을 완성 하겠다고 한다. 그때, 화자의 정은 모든 정의 정이요, 모든 한의 한이 된다.
이렇듯, 「정천한해(情天恨海)」는 1연~4연이 정한의 인간사를 통해 5연~7연에 이르러 ‘님’이라는 초월자의 세계 속에서 정한(情恨)이 어떻게 완성되는지를 보여준다. 한용운은 인간사를 무가치한 것으로 바라본 후, 그 대척점에서 절대자인 ‘님’을 예찬하는 것이 아니라 情과 恨이라는 인간사를 통해 초월자인 ‘님’을 만나는 과정을 보여준다. 정한(情恨)의 극한에서 님(세계)을 만날 수 있다는 초월의 미학이라 할 수 있다.
2. 비워야 채울 수 있다는 것이 긍휼compassion의 역설이다 (헨리 나우웬, 『긍휼compassion』)
정한(情恨)의 변증법이 있듯, 긍휼compassion의 역설도 있다. 긍휼compassion은 단순히 타자를 불쌍히 여기는 측은지심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의 운명을 긍휼compassion로 바라볼 때, 가능한 행위다. 긍휼compassion의 사전적 의미는 불쌍하고 가엽게 여겨서 타자의 빈 곳을 채워줌 이라는 의미가 있다. 긍휼compassion은 그의 빈 곳을 알아야 채워줄 수 있다. 비워야 채울 수 있다는 것이 긍휼compassion의 역설이다. 그렇기에 긍휼은 상향성의 삶을 성취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동정 어린 태도를 취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그들이 되도록 되는 것이라는 점에서 긍휼compassion은 용서처럼 신적-행위애 해당한다. 긍휼compassion은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선포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렇기에 긍휼compassion은 진인사대천명과는 조금 다른 맥락의 의미다. 모든 관계의 바탕에는 바로 이 긍휼compassion이 있다.
영성에 관심이 있는 이들에게 헨리 나우웬 신부 하면 상처받은 치유자의 길을 걸어간 사제로 기억되고 있다. 나우웬 공동체라는 말이 있듯, 나우웬 신부의 영성을 집약하는 것은 어머니적인 치유의 힘, 「긍휼compassion」이라고 할 수 있다.
①긍휼은 우리에게 상처가 있는 곳으로 가라고, 고통이 있는 장소로 들어가라고, 깨어진 아픔과 두려움, 혼돈과 고뇌를 함께 나누라고 촉구한다.
긍휼은 우리에게 비참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울부짖고, 외로운 사람들과 함께 슬퍼하며, 눈물 흘리는 자들과 함께 울라고 도전한다.
②이것은 새로운 자아, 새로운 정체성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성취할 수 있는 바에 달려 있지 않고 우리가 받고자 하는 바에 달려 있다.
긍휼은 태생적인 자아가 아니라 후천적 자아다.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는 예수님의 명령은 하느님의 긍휼에 우리도 동참하라는 명령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경쟁적인 자아라는 환영과도 같은 가면을 벗어 버리고, 자아 정체성의 근원으로서 상상에 근거한 자신만의 특징에 집착하지 말고, 예수님이 하느님과의 사이에서 경험하셨던 것과 동일한 하느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취하라고 요청하신다.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삶의 신비다.
③긍휼은 직접 그 사람들에게로 다가가 고난이 가장 극심한 곳으로 들어가 거기에 자리 잡는 것이다.
긍휼은 특권적인 위치에서 허리만 구부려 소외된 자들에게 향하는 것이 아니다. 긍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에 있는 좀 더 불운한 자들에게 손을 뻗치는 것이 아니다. 긍휼은 상향성의 삶을 성취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동정 어린 태도를 취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되는 것이다.
④인내는 시계 시간을 쫓아내고 새로운 시간, 즉 구원의 시간을 드러낸다. 이 시간은 시계나 달력으로 측정되는 추상적이고 객관적인 단위의 시간이 아니라, 내면에서 충만하게 살아 내는 시간이다.
그러기에 긍휼의 시간은 인내의 시간이다. 이 인내의 시간이 역설적으로 인간의 가장 충만한 시간체험과도 관련되어 있다. 영원한 시간의 문이 궁휼이다. 위대한 사건들은 모두 인내로써 충만을 이룬 시간 속에서 일어났다.
⑤긍휼과 기도, 기도란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하느님은 우리를 통해서 무엇이든 하실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제자된 우리는 하느님 안에서 우리의 힘, 소망, 용기, 확신의 전부-일부가 아니라-를 발견한다. 그러므로 기도야말로 우리의 가장 우선적인 관심사가 되어야 한다.
기도는 긍휼에 다가가는 길이다. 빈손으로, 벌거벗고 나약한 모습으로 하느님의 현존 앞에 서서, 하느님 없이는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선포하는 것이다. 이런 태도는 “최선을 다하라. 그리하면 나머지는 하느님이 알아서 하실 것이다”라고 충고하는 오늘날의 지배적인 분위기에서는 쉽지 않은 일이다.
⑥ 많은 사람들은 ‘기도’를 생각할 때 다른 사람들과의 분리를 연상하는 경향이 있지만, 진정한 기도는 동료 인간들과 더 가까워지게 해 준다. 기도는 긍휼에서 첫 번째요, 없어서는 안 될 훈련 덕목이다. 왜냐하면 기도야말로 인간들 사이의 결속의 첫 번째 표현이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우리 안에서 기도하시는 영은, 모든 인류를 하나로 불러 모으시는 영이기 때문이다. 평화와 연합과 화해의 영이신 성령은 자신을 끊임없이 우리에게 드러내시되, 그 능력을 통해서 가장 다양한 사회적ㆍ정치적ㆍ경제적ㆍ인종적ㆍ민족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을 같은 그리스도의 자매요 형제로서 그리고 같은 하느님 아버지의 딸과 아들로서 한데 모으시는 분으로서 드러내신다.
⑦긍휼 어린 기도는 긍휼 어린 행동을 이끌어 낸다. 그러므로 기도와 행동은 절대로 모순되거나 상호 배타적이지 않다.
행동 없는 기도는 무력한 경건주의가 되기 쉽고, 기도 없는 행동은 의심스러운 조작으로 전락해버린다. 기도가 우리를 긍휼 어린 그리스도와의 좀 더 깊은 관계로 인도한다면 그것은 항상 구체적인 섬김의 행위를 동반한다.
⑧ 우리가 표현하는 모든 ‘아니오’는 우리 자신의 회심을 요구한다. 이런 의미에서 맞대결은 항상 자신과의 맞대결을 포함한다.
나우웬 신부는 우리가 인종차별의 불의를 보고 ‘아니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우리 자신의 완고함을 직시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전한다. 우리가 세상의 굶주림에 대해 ‘아니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부요함을 깨달을 것을 촉구한다. 우리가 전쟁에 대해 ‘아니요’라고 말한다면 우리 자신의 폭력성과 공격성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압제와 고문에 대해서 ‘아니오’라고 말하려면 우리는 자신 자신의 타인의 고통에 대해 무감각함을 솔직하게 다루어야만 한다.
긍휼의 영성을 끊임없이 세상에 전한 헨리 나우웬(1932년~1996년)신부는 궁휼은 인간의 무력함을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이 무력함 가운데서 하느님의 사랑의 무한함을 계시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고 전한다. 여기서 우리는 긍휼의 진정한 의미를 보게 된다. 긍휼compassion은 우리에게 연약한 사람들과 함께 연약해지고, 상처 입기 쉬운 자들과 함께 상처 입기 쉬운 자가 되며, 힘없는 자들과 함께 힘없는 자가 될 것을 요구한다. 그가 그 자신이 얼마나 아름다운 사람인가를 일깨우어 주는 것, 그가 참으로로 좋은 하느님의 사람이라는 것을 일깨워 주는 것! 그러기에 긍휼이란, 인간됨이라는 상황 속에 푹 잠기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맥락에서 사실 모든 그리스도인의 사명인 전교는 긍휼compassion을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3.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라.> 마태오 28,16-20
Ⓐ그때에 16 열한 제자는 갈릴래아로 떠나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산으로 갔다. Ⓑ17 그들은 예수님을 뵙고 엎드려 경배하였다. 그러나 더러는 의심하였다. Ⓒ18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가가 이르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20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라.>라고 전하는 마태오 28,16-20은 마르코16,14-18/루카24, 36-49/요한20,19-23/사도1.6-8에 공통으로 나오는 부활과 승천메시지에ㅡ 해당한다.
마태오 28,16-20은 예수님 부활 후에 제자들에게 사명을 부여하시는 부분으로 전교주일과 예수승천대축일에 동시에 묵상하는 복음으로 강생의 신학-십자가신학- 부활신학으로 이어지는 믿음의 트라이앵글을 어떻게 하나의 선상에서 바라볼 수 있는지를 시사한다는 점에서 그리스도인의 비젼이라고 할 수 있다.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은 역사적인 사실이다. 그러나 부활의 신학은 역사를 초월한 초역사적사건이다. 초역사적인 사건을 역사적인 사건으로 현재화하는 것이 전교라고 할 수 있다.
그분의 부활을 믿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지는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라.>라는 사명과 파견은 초역사적 사건을 역사화 하는 징표 중에 징표라고 할 수 있다. 예수는 자주 공생활 중에 유다인들에게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징표를 보여주라는 요구를 받았다. 예수가 보여준 징표가 십자가의 사랑이라면, 그리스도의 징표의 최종 목적지는 바로 우리 자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마태오 28,16-20에서 먼저 바라보아야 할 부분은 우리의 출발점이 바로 갈릴래아라는 지명이 지니는 의미일 것이다.
Ⓐ그때에 열한 제자는 갈릴래아로 떠나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산으로 갔다.(16절)
갈릴래아는 예수와 제자들에게 특별한 공간이다. 갈릴래아는 이방인들의 땅이다. 세례자 요한이 잡혔을 때, 예수가 복음의 전열을 정비하려 머무른 장소이자 베드로를 포함한 제자들과 예수를 따르던 여인들의 출신지이며, 그들의 일상생활의 장소이다. 그들이 예수님께 처음 부름받은 장소이자. 사도로 파견되고 하느님 나라에 관한 가르침을 받은 곳이 갈릴래아다. 갈릴래아로 가라는 것은 그분의 사람으로 다시 시작하라는 의미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의 삶을 다시 시작하라는 또 하나의 부르심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그들은 곧바로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그분을 따랐다(4,12-22)그러나 나는 되살아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갈 것이다”(마태오26,26-35)
예수께서는 전에 여러분에게 말씀하시대로 여러분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실터이니, 여러분은 거기서 그분을 거기에서 보비게 될 것이다(마르코16,7-8)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사도행전1,11)
갈릴래아는 최후의 만찬에서 언급한 장소이자, 예수 승천의 장소로 언급된 것에서 바로 시작한 곳에서 다시 시작하라는 근원의식을 상기시킨다. 그런 의미에서 갈릴래아는 신앙의 모태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시작한 곳에서 다시 시작하라는 의미는 초심으로 돌아가라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예수를 따르겠다고 결단한 어떤 날, 어떤 시간, 어떤 계기의 은총지위를 우리 자신의 결단이 아니었음을 바라보라는 의미가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예수님을 뵙고 엎드려 경배하였다. 그러나 더러는 의심하였다.(17절)
부활은 언제나 경배와 의심 사이에 있다. 이것은 믿음과 불신 사이에 그분이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경배와 의심은 내가 그분을 따르려고 결단했던 그 지점이 내가 주체인가 그분의 은총이었나를 바라보는 결절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의심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만나를 먹여준 이가 모세라고 생각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만나는 모세가 내려준 것이 아니라 하늘이 내려준 것이다. 전교의 초심은 바로 이 전교의 주체가 누구인가를 바라보는 것에서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바오로 사도의 고백처럼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라는 현존체험을 확산시킨다는 점에서 그렇다.
Ⓒ18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가가 이르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20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18절에서 20절 까지를 보면 전교의 주체가 누구인지가 보다 분명해 진다. 전교의 주체는 언제나 그분이다. 우리는 언제나 전교의 대상이라는 점이다. 전교의 대상이 전교의 대상을 만나 즉, 그리스도를 모르는 이들에게 그분을 알리면서 우리는 비로소 우리가 고백한 진리들을 우리 것으로 체화한다는 점이다. 나누지 않고는 우리가 무엇을 갖고 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18절)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20절)
18절과 20절에서 보듯, 전교의 시작은 그렇기에 우리는 빈손으로 벌거벗고 나약한 모습으로 하느님의 임재 앞에서 하느님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선포하는 것으로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최선을 다하라 그러면 나머지는 하느님의 알아서 하실 것이다. 와는 다른 차원의 영성이다. 그런 영성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는 그분이 우리의 자원이 다 고갈된 다음에 의지하는 마지막 보루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그분을 다시금 희생양으로 만드는 것이다.
18절에서 20절에 걸쳐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는 선교의 영성은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하느님은 우리를 통해서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것이 모든 민족, 즉 세상에 파견된 자의 영성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그 영성을 바오로 사도와 소화데레사의 상반된 선교 영성에서 그 공통점을 확인할 수 있다. 바오로 사도의 전교와 소화데레사 성녀의 전교는 확연히 다른 양상에서 시작되었지만 그러나 그 결과는 같았다. 특히 소화데레사 성녀를 전교의 주보성인으로 공경하는 것은 우리에게 전교의 영성에서 시사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알려주었다고 할 수 있다. 갈릴래아는 바로 우리의 일상의 삶의 장소라는 점이다. 바오로 사도는 공간의 확장 속에서 소화데레사 성녀는 공간의 폐쇄 속에서 전교의 사명을 수행했다. 전교란 일상의 모든 순간에 하느님 안에서 우리의 힘, 소망, 용기, 확신의 전부를 발견하는 것으로 그렇기에 전교의 영성은 진정한 부활의 영성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복음과 사도행전과 서간문에 나타난 제자들에게 준 사명은 제자들이 갖고 있는 능력에 의지한 것이 아니었음을 다시금 알 수 있다. 전교의 주체가 누구인가를 아는 것이 전교의 시작이다. 완성된 상태가 아니라 완성되기 위해서 피견되었다는 점이다. 그것이 전교의 완성을 담보한다.
마르코복음은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 믿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표징들이 따를 것이다. 곧 내이름으로 마귀들을 쫒아내고 새로운 언어들을 말하며, 손으로 뱀을 집어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헤를 입지 않으며, 또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16, 15-18)
루카복음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 다시 살아나야 한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그리고 보라,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분을 내가 너희에게 보내주겠다. 그러니 너희는 높은데서 오는 힘을 입을 때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어라.”(24, 46-48)
요한복음은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주면 그가 용서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20, 19-23)
사도행전은 “성령께서 너희에게 내리시면 너희는 힘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 그리고 땅 끝에 이르기까지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1,8)
전교의 주체가 누구인가를 아는 것, 인간의 능력에 기반한 전교가 아니었음을 아는 것은 하느님 나라의 완성에서 찾을 수 있다. 전교의 영성은 부활의 영성이자, 부활의 영성은 하느님 나라를 완성하는 로드맵이다. 이사야는 <모든 민족들이 주님의 산으로 밀려들리라.>(이사야서 2,1-5)라고 종말론적인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전한다.
1 아모츠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하여 환시로 받은 말씀. 2 세월이 흐른 뒤에 이러한 일이 이루어지리라. 주님의 집이 서 있는 산은 모든 산들 위에 굳게 세워지고 언덕들보다 높이 솟아오르리라. 모든 민족들이 그리로 밀려들고 3 수많은 백성들이 모여 오면서 말하리라. “자, 주님의 산으로 올라가자. 야곱의 하느님 집으로! 그러면 그분께서 당신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시어 우리가 그분의 길을 걷게 되리라.” 이는 시온에서 가르침이 나오고 예루살렘에서 주님의 말씀이 나오기 때문이다. 4 그분께서 민족들 사이에 재판관이 되시고 수많은 백성들 사이에 심판관이 되시리라. 그러면 그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거슬러 칼을 쳐들지도 않고 다시는 전쟁을 배워 익히지도 않으리라. 5 야곱 집안아, 자,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자!
시편 저자 역시 이사야서와 같은 맥락에서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전한다.(시편 98(97),1-6)
“우리 하느님의 구원을, 온 세상 땅끝마다 모두 보았네. 주님께 환성 올려라, 온 세상아. 즐거워하며 환호하여라, 찬미 노래 불러라. 비파 타며 주님께 찬미 노래 불러라. 비파에 가락 맞춰 노래 불러라. 쇠 나팔 뿔 나팔 소리에 맞춰, 임금이신 주님 앞에서 환성 올려라.”
바오로 사도는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파견되지 않았으면 어떻게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로마서 10,9-18)라고 장엄하게 전교의 영성을 부활신앙에서 전한다.
예수님은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셨다고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10 곧 마음으로 믿어 의로움을 얻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습니다. 13과연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는 모두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14 그런데 자기가 믿지 않는 분을 어떻게 받들어 부를 수 있겠습니까? 자기가 들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15 파견되지 않았으면 어떻게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16 그러나 모든 사람이 복음에 순종한 것은 아닙니다. 사실 이사야도 “주님, 저희가 전한 말을 누가 믿었습니까?” 하고 말합니다. 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18 그러나 나는 묻습니다. 그들이 들은 적이 없다는 것입니까? 물론 들었습니다. “그들의 소리는 온 땅으로, 그들의 말은 누리 끝까지 퍼져 나갔다.”
연중29주일이자 전교주일 복음인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라.>라고 전하는 마태오 28,16-20은 삼위일체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 인간과 인간의 관계, 그 하느님 나라의 완성은 부활신학이자, 그분의 현존체험이라고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전교의 주체와 대상이 누구인가를 분명히 하신다.
그렇다면 완벽하게 복음화되지 않은 미완의 우리에게 준 사명, 전교의 대상인 우리가 마치 전교의 주체처럼 하느님 나라, 그 완성의 필연성 안에 우리가 초대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우리의 자유의지를 그분이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는지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창조의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보시니 참 좋았다의 결정체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늘은 우리의 처지를 언제나 대긍정으로 바라보신다는 것에서 긍휼compassion이 모든 피조물을 감싸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복음화는 복음을 전하지 않고는 완성되지 않는다는데 있을 것이다. 복음화되기 위해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의사여 네 병이나 고쳐라! 라고 말하는 세상으로 걸어갈 수 있는 힘은 우리를 전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는 대긍정 앞에서, 이런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사람이 당신 눈에 얼마나 아름답기에 하느님 나라의 완성에 미완의 사람을 초대합니까?
글을 마치며,
그때에 16 열한 제자는 갈릴래아로 떠나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산으로 갔다. 17 그들은 예수님을 뵙고 엎드려 경배하였다. 그러나 더러는 의심하였다. 18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가가 이르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20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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