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피캇(Magnificat)

한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보다(서정주)

나뭇잎숨결 2024. 10. 4. 07:06

한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보다(서정주)

- 연중27주일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를 중심으로

 

 

 

남마리안나 수녀님께서, 감사합니다!

 

 

1. 서정주의 「국화옆에서」

 

 

 

한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세는 /그렇게 울었나보다// 한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천둥은 먹구름 속에서/또 그렇게 울었나보다// 그리고 아쉬움에 가슴조이던 / 머언 먼 젊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보다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는 거의 국민애송시라고 할 수 있다. 국화꽃이 필 무렵이 되면 누구나 한번쯤 암송해보는 이유가 무엇일까?

 

서정주의 「국화옆에서」에는 국화에 초점을 맞춰 읽을 것인가? 아니면 3연의 누님을 초점으로 읽을 것인가에 의해 의미가 사뭇 달라진다. 국화가 초점이라면 이 시는 어떤 관계론, 인연설로 읽을 수 있겠다. 그러나 누님이 초점이라면 질풍노도의 시간을 통과한 이의 성숙함으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은 국화에 초점을 맞춰 읽어본다.  한송이의 국화가 피는데 소쩍새, 천둥, 그리고 밤을 지새우는 나는 전혀 과학적으로 인과관계가 없다. 오직 존재하는 하는 모든 것들의 공생의 이유를 수긍할 때만 이해할 수 있다. 그때만이, 한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보다, 라고 말할 수 있다. 

 

 

 

 

 

사진작가 분이가, 탱큐!

 

 

 

2. 사랑은 하늘에서 왔는가, 땅에서 왔는가(릴케)

 

 

사랑은 결코 사유(철학)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사랑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불가능성에 대한 타진이고 그것이 불가능한 것은 사랑은 어떤 범주화가 가능하지 않은 이유이기 때문이다. 인류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는 사랑은 다 다르고. 사랑이라는 총론에서는 같으나 사랑의 각론에 들어가면 사랑하는 A와 B 조차도 다른 사랑의 궤적을 그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사람들이 만나 하나가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사랑하는 것은 하나가 되는 것인가? 하는 명제에 대해 생각해 보기 위해 사랑에 왜 고통이 수반되는 것인가?부터 숙고해 보아야 할 듯하다. 고통은 사랑의 필연적 산물인가? 우연적 상황인가? 롤랑 바르트는 사랑의 어려움과 고통에 직면하여, 더 이상 고통에 짓눌려 어떻게 처리할지 모를 때, 비소유의지, 사람들은 사랑의 취소를 선택한다고 보았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베르테르는 로테를 더 이상 소유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에 자살한다.

 

 

사랑은 고통으로 죽지 않는다. 그렇지 않다면 나는 이 순간에 벌써 죽었을 것이다(스탕달) 내 힘은 내 약함에 있다...당신을 결코 붙잡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신을 단단히 붙잡을 수 있다오(릴케)

 

스탕달과 릴케는 아가서에서처럼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는 것을 알고 바라본 이들이다. 사랑은 필연적으로 죽음과 닿아 있고, 죽음과 같은 상황을 통과한다고 본 것이다. 그러기에 '비소유의지만'이 두 사람의 사랑을 지탱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고통의 이름이 소유에 대한 열망에서 비롯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랑이 구원이라면, 그 구원은 사랑하는 그나 그녀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을 사랑하므로써 사랑자체에서 구원을 바라본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을 사랑하는 자는 고통을 피할 수 없으며, 사랑을 사랑하는 자만 고통을 넘어설 것이라는 전언이다.

 

사랑은 고통만 있는 것이 아니라 기쁨도 있게 마련이다. 그 기쁨의 출발은 상대에 대한 앎에서부터 시작한다. 그 앎은 대상에 머무르지 않고 사랑에 대한 본질적인 앎으로 넘어간다. 그 때만이 사랑은 고통을 넘어서 기쁨이 될 수 있다, 이때 내가 안다는 것을 당신 또한 알고 있다는 것이며, 당신이 알고 있다는 것을 나 또한 알고 있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사랑은 눈을 멀게 한다는 속담은 거짓말이다. 사랑은 오히려 눈을 크게 뜨게 하며 명석하게 만든다. 나는 당신에 대해 당신에 관해 절대적인앎을 갖고 있다.(롤랑 바르트)

 

롤랑 바르트는 사랑하면 할수록 당신에 대해 절대적인 앎을 갖게 된다고 보았다. 그 앎이란 대상에 대한 앎뿐만 아니라 사랑이 추구하는 그 궁극의 지점, 당신이 지금 하고자 하는 그 사랑이 무엇인지, 당신이란 사람이 누구인지, 그 모든 총체적인 앎을 의미한다. 당신의 가능성, 기쁨, 고통, 좌절, 욕망, 스트레스, 고독, 절망, 소망, 외면...그 모든 것...이것은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베르테르가 자살하면서 외친 말과 같은 맥락이다. 로테가 누구와 결혼 생활을 하든 로테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자신이라는 확신이었다. 로테의 자살은 그 앎을 로테처럼 끌어안고 죽어간 것이라 할 수 있다.

 

가우디움(gaudium)은 현재 어떤 것을 소유하고 있거나 장차 소유할 것이 확실시 될 때 영혼이 느끼는 즐거움이라면, 래티시아(laetitia)는 원하는 것을 소유할 수 없을지라도 인격적으로 명랑한 상태를 유지하여 즐거움을 조절하려는 것을 말한다.(라이프니치)

 

라이프니츠와 스피노자는 '가우디움'과 '래티시아'로 사랑의 기쁨을 분류한다. 사랑할 때 두 가지 기쁨을 체험하는 것인데, 상대를 온전히 소유한데서 얻는 기쁨(가우디움)과 상대에 대한 소유를 포기하면서 얻는 기쁨(래티시아)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소유를 포기한 후자의 기쁨은 베르테르처럼 자살에 이르고 죽음에 이르는 고통일 수도 있겠지만, 그 고통의 이름은 엄밀히 기쁨이 내재된 고통이라고 보는 시각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 어떤 것도 아닌 바로 사랑에서 비롯된 고통이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이것은 물질을 얻기 위한 실존의 고통이 아니라서 다른 고통과 구별되는 모든 고통을 떠받치는 고통이라고 본 것이다. 그렇기에 그것은 고통이자 기쁨인 것이다. 최승자 시인의 시에서 나오는 사랑과 빵이 나란히 병치되어 있을 때 빵을 집어들 수밖에 없는 상황에 내몰린 이들에게 <빵과 장미를>과 다른 상황 같은 맥락의 처방전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사랑은 자유인가? 비혼론자가 대세인 이 시대, 사르트르와 보부아르의 사랑, 벤야민과 아랴라시스의 사랑에서 사랑 앞에 놓여 있는 자유(선택)에 대해 생각해 볼 차례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순간 나의 자유를 온전히 타자에게 맡기는 것인가? 여전히 우리는 자유로운 존재인가? 하는 질문이다.

 

만약 내가 타자에 의해서 사랑을 받아야 한다면 나는 사랑받는 자로써 자유로이 선택되어야 한다. 알다시피 사랑과 관련된 통상적인 용법에 따라 사랑받는 자는 선택된 사람이라고 불린다...사실 사랑애 빠진 자가 원하는 것은 사랑받는 자가 자기를 절대적으로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르트르)

 

사르트르는 타자가 나를 자유롭게 사랑할 수 있다는 것에는 언제든지 그 사랑을 철회할 수도 있다는 것도 있음을 간파했다. 사랑과 자유 그 모두를 충족할 수 있는 것, 그는 보부아르와 제도적 결혼이 아니라 자유결혼을 선택하기에 이른다. 제도권의 결혼이 아니라 제도권을 벗어난 자유결혼만이 둘의 사랑을 가능하게 한다고 본 것이다. 사랑도 자유도 다치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그들이 바라본 사랑의 속성에는 본질적으로 자유가 있다고 본 것이다. 사랑에는 헌신이 아니라 자유가 있다는 것. 그들에게 사랑과 자유 두 개를 선택하는 길은 자유결혼이라는 길밖에 없었다.

 

사르트르가 바라본 것은 사랑과 관련된 중요한 난점은 타자로 하여금 나를 특별한 사람으로 생각하도록 강제할 수 없다는 데 있었다. 사랑에 빠지자마자 우리는 자신뿐 아니라 타자도 자유를 가지고 있다는 중요한 사실을 배우게 된다고 본 것이다. 사랑에 빠진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그 사랑을 지속하기 위해서 할 수 없이 두 사람의 자유를 인정해야 한다고 본 것이다.

 

사랑하는 자는 연인의 결점에만 매달리는 것도 아니고 연인의 변덕이나 약점에만 매달리는 것도 아니다. 얼굴의 주름살과 기미, 낡아버린 옷이나 기우뚱거리는 걸음거리가 모든 아름다움보다 더 오래 사정없이 그를 사로잡는다...우리의 느낌은 사랑하는 연인의 그늘진 주름살과 ㅍ위를 잃어버린 몸짓, 눈에 안 띄는 육체의 결점으로 도피한다. 그리고 이곳에서 감각은 은신처인양 안심하며 움츠린다. 그냥 스쳐지나가는 사람들은 바로 이곳에, 말하자면 결함 많고 흠 있는 곳에 사랑을 경애하는 자의 화살처럼 빠른 동요가 둥지를 튼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다(발터 벤야민)

 

우리가 타자와의 사랑만 아니라 자유에 대해서도 바라보게 만드는 그 시점, 사랑에 빠졌다고 말하게 하는 이 특별한 타자는 어떻게 우리에게 오는가? 사랑은 우리가 특정한 타자를 특정한 방식으로 느끼고, 그 타자가 우리를 특별한 방식으로 생각해 주기를 바라는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타자를 어떻게 만났는가?

 

라캉은 상상(이미지)속에서 우리가 지닌 결여 때문에 그나 그녀를 사랑한다고 보았다. 자기 자신에게서 결여를 느끼는 한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다고 본 것이다. 이에 대해 보드리야르는 그 결여의 이름은 존재하지 않은 것을 존재하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드는 상상임신과 비슷하다고 보았다. “시뮬라크르란 결코 진실을 감추는 것이 아니라 진실이야말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사실을 숨긴다. 시뮬라크르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존재하는 것처럼 만들어놓은 인공물을 지칭한다”라고 결여의 이름에 대해 말해준다.

 

 

 

발터 벤야민은 이 특별한 사랑의 관계는 객관적일 수 없고 결여일 수도 없고 시뮬라크일 수는 더더욱 없고, 순전히 내적이고 주관적인 그러나 그 누구도 주체가 될 수 없는 아예 주체라는 말이 성립되지 않는 신비한, 순전히 불가항력적인 끌림일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마치 일방통행로처럼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본 것이다. 사랑하거나 사랑하지 않거나, 당신이거나 당신이 아니거나 그 무엇도 선택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미 사랑에 빠졌다는 자체가 자유를 무화시켰다고 본 것이다. 타자를 사랑하는 그 순간 사랑의 제단에 고스란히 자유를 봉헌하는 행위라고 보았다. 그래서 사랑은 어떤 범주화도 가능하지 않으므로 철학이나 사유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여러 층위를 가진 사랑은 하나인가, 둘인가? 그렇다면 사랑은 하나가 되는 것인가? 아님 영원히 둘인 것인가? 아니 하나가 되는 것이 사랑의 완성일까? 헤겔은 사랑은 하나가 되는 것이라고 보았다면 알랭 바디우는 사랑은 끝까지 둘의 사건이라고 보았다.

 

사랑을 이루는 첫 번째 계기는 내가 오직 나만을 위한 독립적인 인격이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만약 그럴 수만 있다면 내가 스스로를 결함을 지닌 불완전한 인간으로 느낀다는데 있다. 두 번째 계기는 내가 자신을 타자 안에서 발견하고 이 타자 안에서 인정을 얻는다는 것, 그리고 역으로 그 타자도 역시 내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인정을 얻는다는 데 있다(헤겔)

 

헤겔은 사랑의 첫 번째 조건으로 타자와 사랑에 빠졌다는 것은 나는 더이상 홀로는 완전해 질 수 없다는 고백이라고 보았다. 두 번째 조건으로 타자 역시 그 마음 안에 내가 깃들어 있다고 바라보게 된 동시적 사건으로 보았다. 여기서 헤겔은 쉽게, 당연히, 사랑에 빠졌다면 타자와 하나라는 변증법적 합일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헤겔은 사랑의 경험을 통해서 하나가 된다는 것이 결코 만만치 않은 것임을 알게 된다. 하나라는 결합이 생물학적이고 사회적이고 정신분석학적으로 완전히 다른 두 사람에게서 낭만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음에 주목한 것이다. 그래서 부부사이에서 사랑은 아직 객관적이지 않다고 말한다.

 

결국 부부는 자녀를 통해 그 객관성을 갖게 된다고 보았다. 마침내 두 사람은 자녀안에서 두 사람의 사랑의 합일을 목격하게 되므로 그는 끝끝내 사랑은 ‘하나’라는 것을 고수했다. 사랑에 대한 이런 낙관적인 견해에 대해 수많은 학자들이 헤겔의 관념론이 세계를 변증법으로 통합하려다 사랑마저도 자유를 간과한 채 변증법으로 통합하려는 기계론적변증법에 갇혔다고 지적한다.

 

사랑은 그 자체가 비-관계, 탈-결합의 요소 속에 존재하는 이 역설적 둘의 결합이다. 사랑이란 그런 둘의 ‘접근’이다. 만남의 사건으로부터 기원하는 사랑은 무한한 또는 완성될 수 없는 경험의 피륙을 짠다(알랭 바디우)

 

벤야민의 제자인 바디우는 헤겔의 합일에 대한 관점을 ‘황홀한 하나’란 단지 다수를 제거함으로써 둘 너머에 설정 될 수 있을 뿐이며, 동일자를 타자의 제단에 올려놓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사랑은 둘이 있다는 후-사건적인 조건 안에 이루어지는 세계의 경험 또는 상황의 경험이라고 본 것이다. 차라리 비-관계, 탈-관계라고 보는 것이 실상을 바라보는 것이라는 견해다. 사랑은 끝끝내 하나가 아니라 둘이라는 것. 하나를 주장하는 것에는 하나여야만 한다는 망상, 결혼 이데올로기에 갇힌 것이라는 지적이다.

 

바디우가 말하는 사랑은 두 사람이 만나 씨줄과 날줄처럼 피륙을 짜는 노동과 같으며, 그 피륙의 무늬는 같지 않고 색도 같지 않다. 바디우는 사랑예찬에서도 결코 하나가 될 수 없음에도 사랑이라는 원 안에서 두 사람이 편입되기를 바라는 것이 사랑이 지닌 자유의 혁명적 성격임을 강조한다. 따라서 사랑과 자유를 결혼과 가족으로 상징되는 기존의 결혼제도로 편입함으로써 사랑과 자유가 지닌 고유한 혁명성을 훼손하고 있다고 본 것이다.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주어졌다는 것은 종교적 지침이 아니라 사랑을 할 수 있는 생명의 지침이라는 주장이다. 그때 사랑은 하늘에서 왔는가? 땅에서 왔는가? 라는 답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김태희와 비 ----

 

 

 

 

 

3.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마르코 10,2-16

 

 

Ⓐ그때에 2 바리사이들이 와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하고 물었다. 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모세는 너희에게 어떻게 하라고 명령하였느냐?” 하고 되물으시니, 4 그들이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리는 것’을 모세는 허락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5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모세가 그런 계명을 기록하여 너희에게 남긴 것이다. 6 창조 때부터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7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8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9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10 집에 들어갔을 때에 제자들이 그 일에 관하여 다시 묻자, 1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혼인하면, 그 아내를 두고 간음하는 것이다. 12 또한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와 혼인하여도 간음하는 것이다.” 13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들을 쓰다듬어 달라고 하였다. 그러자 제자들이 사람들을 꾸짖었다. 14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보시고 언짢아하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어라.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 16 그러고 나서 어린이들을 끌어안으시고 그들에게 손을 얹어 축복해 주셨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라고 전하는 마르코 10,2-16은 혼인과 이혼의 대한 기르침(마태오19, 1-9/루카16,18)과 어린이에 대한 가르침(마태오19,13-15/루카18,15-17)을 연결하여 복음사가는 당시 가부장적 사회에서 중심부에서 소외된 계층, 생존자체가 위험한 사각지대로 내몰린 이혼당한 여자들과 아이들을 연결하여 창조의 사랑과 하느님 나라에 대한 메시지를 전한다.

 

Ⓐ10, 1-12절까지 이혼에 대한 바리사이들의 질문에 대한 답과 Ⓑ10,13-18의 아이들을 제지하는 제자들에 대한 하느님 나라에 대한 가르침은 그 맥락상 혼인과 이혼, 아이들이라는 이질적인 대상과 주제를 연결한 듯하지만 그 심층에는 우리가 관계를 맺고 있는 이들은 누구인가? 하는 창조의 관계론에 초점이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에서 바리사이들이 던진 질문의 주제는 이혼이다. 당시에 이혼에 대한 다양한 논란의 중심에는 이혼을 인정하되 남편이 아내를 버릴 요건이 무엇인가하는 것이었다. 이에 편승하여 바리사이 그들은 예수께 배우려고 묻지 않고 그분을 시험하려 이혼에 대한 질문을 한 것이다(8, 11절에 하늘의 표징을 보여달라는 요청 이후에) 여기서 예수가 이혼에 대한 어떤 의견을 피력한다 할지라도 그들은 예수는 그냥 한 사람의 스승이지 메시야는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할 것이며, 다른 하나는 율법자체를 거부하면 기존 유대사회의 적으로 간주하면 된다.

 

바리사이 그들이 신명이 24,1-4의 모세의 규정을 근거로 들자, 예수께서도 창세기1,27과 창세기 2, 24절을 통해 "하느님이 짝지워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된다"라는 답을 하신다. 그분은 언제나 하느님의 창조질서 안에서, 즉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가에서  답을 내리신 것이다. 이혼은 율법에 기인하지만 혼인은 창조에 근거한다는 것이다. 율법준수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창조질서를 은총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혼에 대한 모세의 율법규정조차 창조질서를 훼손하려는 것이 아니라 남성중심적인 사회에서 최소한의 여성을 보호하려는 것이었기 때문임도 분명히 하신다. 그분께서는 창조때 하느님이 마련하신 혼인의 목적과 그곳에 깃든 하느님의 선한 뜻을 주목하라고 답을 하신 것이다.

 

이혼에 대한 질문을 결혼에 대한 답으로 하신 예수님의 의도는 무엇인가? 남녀의 창조는 상호보완적인 관계이자 우열의 관계가 아님을 분명히 하신 것이다. 그렇기에 결혼은 자유로운 자유동의에 의해 한 몸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으로써 혼인은 남녀쌍방이 동일한 권리와 책임을 지닌 대등한 주체임을 밝히신 것이다. 실로 그둘은 하느님께 함께 상속받은 사람(1베드로3,7)이라고 힐 수 있다.

 

 

 

 

 

 

 

이어지는 Ⓑ에서 아이들의 접근을 막는 제자들을 예수는 언짢아하시면 제자들과 다른 차원으로 아이들을 바라볼 것을 가르치신다. 예수와 제자들은 얼마 있으면 예루살렘 입성을 앞에 놓고 있는 상황이다. 하느님 나라에 대해 예수 친히 제자들에게 심화교육을 시키는 중이시다. 그런데 제자들이 아이들을 보는 시선과 예수께서 아이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너무 다르다. 예수께서는 아이와 같이 보잘 것 없는 이들이 당신께 오는 것을 가로막지 말고 그대로 두라고 적극적으로 아이들을 대하신다. 하느님나라는 이런 이들의 것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어린아이처럼이 무엇을 의미하는가가 초점이라고 할 수 있다. 아이들처럼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은, 아이들이 지닌 속성의 여러 측면,  단순함, 솔직함, 순수함, 열린 마음, 모든 일에 경탄하는 능력, 현재에 집중 할 수 있는 단순함, 그리고 의존성을 아이들의 속성으로 들기도 하지만,

 

마르코 복음의 흐름상, 이혼당한 여자들과 어린 아이들은 생존 그 자체가 의존적인 상황이었다는 데 그 초점이 놓인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성서 맥락상 같은 주제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부정적 사회에서 여성만 소외된 계층이 아니라 아이들 역시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린아이처럼>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진다.

 

어린아이의 속성이 아니라 어린아이처럼 받아들임이 초점이라고 할 수 있을 때, . 기존사회에서 내쳐졌던 부정한 자, 나병환자, 병자, 이방인들이 바로 어린아이처럼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인 이들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 나라는 그 어떤 대가나 보상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자비하신 하느님께서 아무런 공로도 없는 이들에게 주는 무상의 은총이라는 것에 초점이 놓여 있기에 그렇다.

 

진실로 이르거니와 세리들과 창녀들이 여러분보다 먼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것입니다(마태오21, 31) 와 같은 맥락에서 바라보아야 할 듯하다. 그리고 그분은 말씀을 구체적으로 행동으로 보여주신다. 그분은 어린아이들을 껴안으시고 그들을 축복하신다. 마르코 복음사가가 말하늗 공동체는 이혼당한 여성들이나 어린아이처럼 중심부 담론에서 제외된 보잘 것 없는 이들의 공동체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유대공동체가 율법의 근본정신이 애주애인이라는 것을 자명하게 아는 그들이 이렇게 작고 보잘 것 없는 이들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인격을 지니고 있는가? 하는 것이 우리가 성찰할 주제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맺는 관계의 본질에서 바라보아야 할 듯하다. 우리가 맺는 관계는 모두 하느님과의 관계라고 보면 마땅하다.

 

나그네를 대접했다가 천사를 대접했던 아브라함의 마음, 그와 대척적인 관점에서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라고 아우를 살해했던 카인의 비극은 우리 곁을 지나가는 이들에게, 우리집 처마밑에 비를 피하고 제비집을 짓고 사는 이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알려준다고 할 수 있다. 누가 내 어머니며 형재냐는 질문은 가족주의에 매몰되어 타인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는지를 우리에게 질문한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람으로 완성되는 과정에서 수많은 경험과 사건과 사람들을 만난다. 그때 초점이 내가 만난 그  사람들이 누구의 사람들인가? 하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사람도 관계의 낙차가 있다. 그 낙차가운데 그 사람의 가장 좋은 빛이 드러나는 부분이 있다. 그런데 그 빛을 보기가 어렵다. 그래서 관계가 쉽게 깨지거나 일회적이 되기도 한다. 모든 관계는 십자가를 지는  관계다. 모든 관계는 유한한 인간이 부단히 영원한 사랑을 담으려 하기 때문이다. 

 

라칭거 추기경은 유한한 인간에게 영원한 사랑이 담기는 데 균혈이 불가피함을 다음과 같이 피력한다.

 

“누구나 하느님 안에 잠겨있으면서 동시에 하느님에게 버림받은 피조물의 비참에 잠겨있도록 자신의 존재를 확장하는 자는 그야말로 찢어지게 된다. 참으로 십자가에 못박힌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찢기는 것은 사랑과 동일하다. 인간과 하느님과의 연관을 지어주는 사랑의 폭이 중요하다.”

 

칼 라너는 인간이 본성만 있다면 그 어떤 관계에서든 고통은 없지만,그러나 그가 형성한 사회적 인격이 있기 때문에 고통을 불가피하다고 바라본다.

 

“본성과 인격의 형이상학적인 이원론은 고난이 가능하다는 존재론적 가정이 된다. 순수한 본성은 자기를 반격해서 돌입하는 이 전체적 실재의 개입을 느낄 수 없다. 순수하게 유한한 인간도 고통을 받을 수 없다. 이는 자유결정에 선행할 어떤 외적인 운명에 따라야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인격이 있는 곳에서만 고통이 있을 수 있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라고 전하는  마르코 10,2-16은 단지 결혼과 이혼에 대한 메시지만 전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모든 관계는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관계라는 것이 초점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보다(서정주) 라는 싯귀는 단순히 국화꽃에 대한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모든 존재하는 것들을 어디에서 왔나? 우리에게 오는 사람, 가는 사람 모두는 어디에서 왔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현실에서 만나는 관계이든 아니든 말이다. 성인과의 통공이 가능하다면 말이다. 모든 존재하는 것들에게 평화가 있기를!!! 평화의 사도 프란치스코 성인에게 기도해 본다. 

 

 

 

 

 

 

 

 

 

 

 

 

글을 마치며,

 

Ⓐ그때에 2 바리사이들이 와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하고 물었다. 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모세는 너희에게 어떻게 하라고 명령하였느냐?” 하고 되물으시니, 4 그들이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리는 것’을 모세는 허락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5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모세가 그런 계명을 기록하여 너희에게 남긴 것이다. 6 창조 때부터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7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8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9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10 집에 들어갔을 때에 제자들이 그 일에 관하여 다시 묻자, 1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혼인하면, 그 아내를 두고 간음하는 것이다. 12 또한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와 혼인하여도 간음하는 것이다.” 13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들을 쓰다듬어 달라고 하였다. 그러자 제자들이 사람들을 꾸짖었다. 14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보시고 언짢아하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어라.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 16 그러고 나서 어린이들을 끌어안으시고 그들에게 손을 얹어 축복해 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