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피캇(Magnificat)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생각 자체를 희생해야만 주체가 될 수 있다(Frank Ruda)

나뭇잎숨결 2024. 9. 14. 07:00

 

 

 

 

 

남마리안나 수녀님께서, 감사합니다.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생각 자체를 희생해야만 주체가 될 수 있다(Frank Ruda)

-연중24주일,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를 중심으로

 

 

 

 

1.  황지우, 「뼈아픈 후회」

 

 

슬프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모두 폐허다/완전히 망가지면서/완전히 망가뜨려 놓고가는것; 그 징표없이는 진실로 사랑했다 말할 수 없는 건지/나에게 왔던 모든 사람들,/어딘가 몇 군데는 부서진 채/모두 떠났다.//내 가슴속에 언제나 부우옇게/바람 이동하의 그둥이 세운 내실에까지 모래가 몰려와 있고/ 뿌리째 굴러가고 있는 갈퀴나무, 그리고/말라 가는 죽은 짐승 귀에 모래 서걱거린다//어떤 연애로도 어떤 광기로도/이 무시무시한 곳에까지 함께 들어오지는/못했다, 내 꿈틀거리는 사막이, /끝내 자아를 버리지 못하는 그 高熱의/신상이 벌겋게 달아올라 신음했으므로/내 사랑의 자리는 모두 폐허가 되어//아무도 사랑해 본 적이 없다는 거;/언제 다시 올지 모를 이 세상을 지나가면서/내 뼈아픈 후회는 바로 그거다;/그 누구를 위해 그 누구를 한번도 사랑하지 않았다는 거 / 젊은 시절, 내가 자청(自請)한 고난도 그 누구를 위한 헌신은 아녔다/나를 위한 헌신, 한낱 도덕이 시킨 경쟁심/그것도 파워랄까, 그것마저 없는 자들에겐 희생은 또 얼마나 화려한 것이었겠는가//그러므로 나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다/그 누구도 걸어 들어온 적 없는 나의 폐허;/다만 죽은 짐승 귀에 모래알을 넣어 주는 바람이 떠돌다 지나갈 뿐/ 나는 이제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다./ 그 누구도 나를 믿지 않으며 기대하지 않는다

 

 

황지우의 「뼈아픈 후회」 는 ‘상실의 리비도’에 관한 시라고 할 수 있다. ‘상실을 상실’할 때만이 자신이 한 사랑이 폐허임을 검허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지젝의 지적처럼 행위주의자, 혹은 파토스가 강한 사람들이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달콤함이 바로 폐허라는 상실이다. 혹은 상실이라는 폐허다.

 

황지우의 「뼈아픈 후회」 는 결국 세 행으로 모아진다. 자기가 주체가 되어 한 사랑이 페허인 이유를 화자는 고백한다. 자기 부정과 자기 합리화가 공존하는 두 겹의 시다. 슬프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모두 폐허다(...)그 누구를 위해 그 누구를 한번도 사랑하지 않았다는 거(...) 나는 이제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다./ 그 누구도 나를 믿지 않으며 기대하지 않는다

 

황지우의 「뼈아픈 후회」 는 아무것도 상실하지 않았는데 거대한 상실을 경험하는 화자가 등장한다. 그것이 상실의 리비도다. 상실은 일종의 정신적 쾌락이다. 왜? 사랑의 주체가 언제나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사랑이 너를 위해 나를 지운 사건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랑이 너를 위한 사건이었다면 상실은 없다.

 

시골의 터미널에서 자주 보는 광경이 있다. 버스를 기다리는 어르신들은 무너지고 부서진 몸을 이끌고 도시의 병원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는 중이다. 그분들의 대화 혹은 익명의 청자들을 향해 던지는 발화를 가만히 듣고 있자면 그분들이 그렇게 몸이 부서진 이유는 두 가지로 나눠진다. 순전이 자식 탓으로 돌리거나 그 누구의 탓도 아닌 노화의 과정이라고 바라보는 시선이 그것이다. 부서진 몸을 노화의 과정이 아니라 자식을 위한 것으로 당신의 입으로 규정하는 한 상실은 보상을 요구한다. 직접 자녀들에게 요구하지 않았을지라도 희생했다는 정신적 보상을 챙긴다. 그것이 상실의 리비도라고 할 수 있다.

 

너의 입장에서 너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나의 입장에서 너를 사랑할 때 이 상실의 리비도, 즉 폐허가 발생한다. 너의 입장에서 너를 사랑했다면 나는 주체의 자리를 너에게 양보했어야 한다. 그때 나의 무능과 한계를 받아들일 수 있다. 성서에서 말하는 <자신을 버리고>고 한 사랑과 끝내 <자신을 버릴 수 없는 사랑>은 겉으로 드러난 <행위>로써는 알 수 없다. 수천번을 십자가에 못박힌 사랑이라 할지라도 자신을 버린 십자가와 자신을 버리지 못한 십자가는 다르기 때문이다. 내가 사랑의 주체가 아니란 것을 알 때만이, 정직하게 나의 한계를 인정할 때만이, 상실이라는 폐허(죽음)위에서 사랑이 <있음-부활>로 존재한다.

 

그런 맥락에서,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생각 자체를 희생해야만 주체가 될 수 있다”(Frank Ruda) 이는 실존주의적 사랑이 무로 귀결되고, 상실의 리비도, 그 극한에서 자살을 선택하는 이유를 추론할 수 있다.

 

최근에 읽은 [황지우 <뼈아픈 후회>]에 대한 글이다. 추천한다.

 daswandern.tistory.com DasWandern - 서울과 독일에서

헤겔의 '에덴에서 추방' 해석(Interlude): 우리는 사랑할 수 있을까 ― 황지우 <뼈아픈 후회>

 

 

 

 

 

 

 

 

 

2.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사르트르)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생각 자체를 희생해야만 주체가 될 수 있다”(Frank Ruda)는 명제는 실존주의가 주장하는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는 명제와 왜 충돌하는가?

 

이는 왜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실존주의를 반드시 알아야 되는가? 하는 것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실존주의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철학사조가 아니다. 실존주의는 인류의 집단무의식을 설명하는 가장 설득력 있는 이론이자, 심리학이자, 인간의 방어기제이다.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 사르트르에 의하면, 모든 실존주의자들의 공통점은 모두가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는 것과 인간 주체성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데 있다.

 

 

사람은 이끼나 부패물이나 꽃양배추가 아니라 무엇보다도 주관적으로 자신의 삶을 이어 나가는 하나의 지향적 존재다. 이 지향 이전에는 아무것도 있을 수 없고 하나의 뚜렷한 그 무엇이 있을 리 없다. 그래서 사람은 먼저 되고자 지향한 그것이다. 되고자 원하는 그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보통 우리가 의지라고 부르는 것은 의식적 결정이어서 우리들 대다수에게 스스로가 만들어낸 것 뒤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어떤 정당에 가입하기를 바랄 수 있고, 책을 한 권 쓰고 결혼하기를 바랄 수 있는데, 이 모든 것은 이른바 의지라고 불리는 것보다 더 근본적이고 더 자연적인 선택의 표시에 불과하다.

 

사람이 스스로를 위해서 선택한다고 말할 때 각자가 스스로를 선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또한 각자가 스스로를 선택함으로써 모든 사람을 선택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사실 우리의 행위 중에 우리가 이고자하는 사람을 창조함과 동시에 있어야한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인간의 개념을 창조하지 않는 행위는 하나도 없다. 이것이 될까 저것이 될까를 선택하는 것, 그것은 동시에 우리가 선택하는 것의 가치를 강조하는 것이다.

 

사르트르 과학이란 추상적인 것들이다. 과학은 동시에 추상적인 요인의 변화를 연구하는 것이지 현실적인 인과성을 연구하는 것이 아니다. 요인들의 연결이 연구될 수 있는 차원에서 보편적 요인을 다루는 것, 이것이 문제가 된다. 반면에 마르크스주의에서는 사람들이 어떤 인과성을 찾아내는 유일한 집단에 대한 연구가 문제가 된다. 그것은 과학적 인과성과는 별개의 것이다.

 

 

이창래 교수의 「사르트의의 실존주의론」을 참고해 본다.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는 명제는 사르트르에 의해 인구에 널리 회자되지만 사르트르 고유의 사상은 아니다. 모든 실존주의자들의 공통점은 모두가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는 것과 주체성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 실존주의자들은 예외 없이 실존의 확고한 우위성을 철학적 전제로 채택하고 있다.

 

사르트르는 인간의 본성에 관해 생각할 때에도 그와 같이 생각하려는 경향을 보여왔다고 생각했다. 즉 우리는 인간을 하나의 제조자나 창조자, 또는 신의 산물로 간주해 왔다. 사르트르에 의하면, 우리는 대부분의 경우 신을 최고의 기술자로 생각하고, 그는 자신이 창조하고 있는 것을 정확하게 인식한다는 가정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있다. 신의 정신 속에서의 인간의 개념은 기술자의 정신 속에서의 종이 자르는 칼의 개념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르트르는 '만일 신이 없다면, 본질보다도 앞서는 하나의 존재 또는 어떠한 개념으로도 정의되기 전에 존재하는 하나의 존재가 있게 된다' 고 정의한다. 신이 존재하지 않는 다면 인간본성에 대한 개념을 먼저 지니고 있는 존재도 없을 것이므로 인간본성에 대한 주어진 개념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의 본성은 미리 정의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이 미리 완전하게 전제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단지 실존하고 그 후에야 그의 본질적 자아로 된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그것은 인간이 먼저 세계 속에 나타나 존재하고 떠오르며, 그 다음에야 정의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은 실존한 뒤에야 비로소 그가 무엇이 되고 스스로가 만들어내는 것이 될 것이다. 이처럼 인간본성이란 본래 없는 것이거나 그것을 착상해낼 신이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존재 이후에 스스로를 원하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은 스스로가 만들어가는 것 이외엔 아무것도 아니다. 이것이 바로 실존주의의 제 1 원칙이다. 이것을 또한 인간 주체성이라고 부른다.

 

인간은 자유이다. 사르트르는 '신이 없다면 무엇이고 가능할 것이다'라고 한 도스토예프스키의 말을 빌려 '그것이 바로 실존주의의 출발점'이라고 주장했다. 만일 신이 없다면 인간에게는 모든 신이 허용되기 때문에 인간은 자신의 내부나 외부에 의지할 곳이 없어 고독하게 되어버린다. 우선 어떠한 핑계도 있을 수 없다. 만일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래서 정말로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면, 인간은 절대로 일정하고 응결된 인간성에 의해 설명될 수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 결론이 있을 수 없으므로 인간은 자유로우며, 자유 그 자체이다. 인간은 운명적으로 자유로운 존재인 것이다. 운명적이라고 하는 이유는 인간이 이미 세계 속에 던져진 자기 자신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사르트르는 '인간은 자유의 선고를 받은 존재라고 나는 표현하고 싶다. 인간은 스스로를 창조한 것이 아니므로 선고를 받은 것이요, 세상에 한번 내던져지자 그가 행하는 모든 행위에 대해 책임이 있는 까닭에 자유로울 수밖에 없다.'

 

인간이 자유인 까닭은 그가 곧 자기 자신을 의식하게 되며, 자신의 모든 행위에 책임을 지기 때문이다. 사르트르는 인간의 행동이 격정에 의해 움직여진다는 사고방식을 거부했다. 그러한 격정이란 어떤 행위에 대한 하나의 구실에 불과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인간은 자신의 격정들에 대해서조차도 책임이 있다. 왜냐하면 그의 감정들도 그의 행위에 의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사르트르에 의하면 자유는 또한 전율이다. 자유는 배후에서 나를 어떤 주어진 방식으로 행동하게 해주는 힘이 존재하지 않음을 의미하며 나를 미래로 유혹하는 어떤 형식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은 인간의 미래이다'라는 말에 부연하여 사르트르는 '다만 거기서 미래라는 것이 하늘에 쓰여져 있고, 신이 그것을 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잘못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미 미래가 아닐 것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사르트르에 의하면, 나는 실존하는 유일한 어떤 것이다. 우리는 모두 자유로우므로, 따라서 선택해야 한다. 즉 발명해야 한다. 왜냐하면 어떠한 보편적 도덕률도 우리에게 우리가 해야 할 것을 제시해줄 수 없기 때문이다. 그에 의하면 '선택은 우리의 선택이다. 그리고 존재하는 것은 우리가 선택하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선택하는 자유이다. 즉 우리는 자유롭기를 선택하지 않는다.

 

우리는 원래 자유이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자유는 선택하는 자유이지만 선택하지 않는 자유는 자유가 아니다. 사실상 선택하지 않는다는 것은 선택하지 않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선택은 선택된 존재의 기초이지만 선택하는 행위의 기초는 아니다. 그러므로 자유는 동시에 부조리인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자유롭도록 되어 있으며, 따라서 자유는 자유로운 선택이 아니라 그것이 무가 아닌 한 순수하고 단순한 필연이다. 실존은 자유이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의 부조리적 존재이도록 되어 있다. 그런 부조리를 뛰어넘을 수 있는 자유란 개인의 자유는 전인류에게로 열려 있는 자유이다.

 

사르트르에 의하면 '인간은 만인을 선택함으로써 자신을 선택한다.' '나의 거동은 전인류를 관여하는 것이 된다. 나는 나 자신과 모든 타인에 대하여 책임이 있으며 내가 선택하는 어떤 인간의 개념을 창조한다. 즉 스스로를 선택함으로써 나는 인간을 선택한 것이다.' 인간은 결국 스스로를 결정하는 자일 뿐만 아니라 전인류를 선택하는 입법자인 동시에 자신에 대한 전적이고 심각한 책임의식으로부터도 벗어날 수 없는 존재이다. 바로 여기에 사르트르가 말하는 자유로운 앙가쥬망(참여)의 절대성이 있다.

 

존재의 두가지 양태 사르트르에 의하면, '선택은 하나이며, 우리가 저절로 갖게 되는 의식과 동일한 것이라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의 의식이 우리 자신의 의식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또한 어떻게 無로서의 의식이 한 자아를 알 수 있을까? 그것은 물론 우리가 대자적(對自的) 존재라는 사실에 대한 자각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사르트르는 『존재와 무』에서 존재를 즉자(卽自)와 대자(對自)로 구분한다.

 

즉자란 그 자체 안에 존재하는 존재이며, 그 자신의 의식을 갖고 있지 않아서 다른 의식의 대상이 되는 존재이다. 마치 돌멩이가 존재하는 방식과 다름이 없는 존재이다. 이에 반해 대자는 자기 자신을 의식하며, 자기의식을 떠나서는 그 자체로서 존재할 수 없는 존재이다. 그것은 그를 돌멩이와 구별해주는 하나의 의식적인 주체임을 사르트르는 이와 같은 두가지 종류의 존재양태 가운데서도 대자존재에 대한 설명으로 『존재와 무』의 대분분을 할애했다. 그의 본질적인 관심이 인간의 자유문제라고 한다면 그의 자유이론이 근거하고 있는 것이 바로 대자에 대한 분석이기 때문이다.

 

사르트르에 의하면 모든 의식은 어떤 것에 '대한' 의식이다. 그것은 현상으로서의 존재에 대한 의식이다. 이 경우에 그것은 존재와는 다른 것, 즉 비존재이어야 한다. 그것은 본래 존재의 부정이나 무화를 통해 생겨나야만 한다. 그가 보기에 즉자는 곧 자신과 일치하며, 따라서 사적, 폐쇄적, 과거적이며 완결된 존재이다. 즉자는 어떤 無도 품고 있지 않다. 이에 반해 대자, 즉 의식은 일종의 활동과정이다. 대자는 즉자의 전체적인 무화이다. 대자는 존재의 무화 과정에서의 실재성 이상의 실재성을 내포하고 있지 않다. 의식은 어떤 무엇에 의해 부정이나 무화가 야기되는 그런 것이다.

 

본질과 개입하거나 분리하는 것이 전혀 없다. 의식 자체는 비존재이면서 무화 과정으로서의 활동을 한다. 다른 현상들을 무화함으로써 의식은 다른 것들을 무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사르트르에 있어서 의식은 자신에 관한 실체적인 어떤 것도 소유하지 못하면서도 그것이 단지 자신에게 명백해질 때에 실존한다. 그러므로 의식은 결핍과 공허와 무를 자신의 중심부에 전제하는데 無란 의식이 즉자가 아니라는 바로 그 증명인 것이다. 의식은 無를 창조하며, 이는 의식이 無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無는 존재와 동일한 것이 아니라 존재에 내재하며 '기생충처럼 존재의 가슴에 기생해 있다'는 것을 인지한다. 無는 그 자신을 폐기하거나 무화되거나 한다. 따라서 無는 세상에 나타나게 된 수단적 존재이며, 존재 그 자체는 결핍, 즉 일종의 無인 것이다. 대자의 발생을 가능케 하는 것도 즉자의 무화이다. 대자는 즉자의 무화에서 발생되며, 이는 즉자를 향한 기투의 형태를 취하는데, 이 무화된 즉자와 기투된 즉자 사이의 대자는 無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無적인 것을 목적하는 대자로부터 無적인 것에 의해 분리된, 또는 무화된 즉자를 소유한다. 즉 우리는 사실상 無적인 것에 의해 분리된, 또는 무화된 즉자를 소유한다. 즉 우리는 사실상 無적인 것에로 지향된 대자를 소유한다.

 

본래 즉자와 대자는 결코 합의될 수 없다. 그것들은 대자가 더 이상 대자이기를 그만 두고 즉자 속으로 떨어질 때만 결합될 수 있다. 무화된 즉자인 대자가 그것을 지향하는 대자와 융화될 때에만 완전한 전체성을 기대할 수 있다. 의식이 결여된 채 응결된 즉자는 자유롭지 않다. 그러나 존재와 분리되어 있는 대자(즉 의식)는 즉자에 의해 결정될 수 없으며, 본질적으로 자유로운 존재이다. 사르트르에게 있어 자유는 인간의 본질적인 속성이다. 그것은 의식적 존재의 구조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유는 인간 실재의 존재와 구별될 수 없다. 다른 사물들과 달리 인간은 먼저 실존하고, 그 뒤에 본질을 구성한다. 따라서 인간의 자유도 인간의 본질을 설명한다. 인간은 스스로를 만든다. 여기서 사르트는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라는 명제를 도출한다. '사람은 자유로운 앙가쥬망의 바탕 위에서라면 무엇이고 선택할 수 있다.' 선택은 절대적으로 자유로우며 어떠한 토대도 없이 형성되었다. '선택은 모든 이유가 자유선택에 의해 세계내에 존재하게 되는 충분한 이유에 대한 충분한 이유없이 이루어진다.' '인생에 뜻을 부여하는 것은 우리들이 선택하는 그 뜻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이로서 인간의 공통성을 창조할 가능성이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이처럼 사르트르는 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인간을 가치창조의 장본인으로 내세웠다.

 

 

 

 

 

 

 

 

 

 

3.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어야 한다.> 마르코 8,27-35

 

그때에 27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카이사리아 필리피 근처 마을을 향하여 길을 떠나셨다. 그리고 길에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28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 29 예수님께서 다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베드로가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30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에 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다. 31 예수님께서는 그 뒤에,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32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명백히 하셨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다. 33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을 보신 다음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며 꾸짖으셨다. 34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군중을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35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어야 한다.>리고 전하는 마르코 8,27-35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시다(마태오16,13-20/루카9,18-21)와 수난과 부활을 처음으로 예고하시다(마태오16,21-23/루카9,22)를 연결하여 예수는 어떤 메시야인가? 또한 그분을 주님이라 부르고 따르고자 하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두 겹의 질문을 던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마르코 8,27-35은 지금까지 예수의 권위와 능력이 말씀과 행적으로 부각되었다면 필립보의 가이사르를 기점으로 고난당하는 메시야, 수난과 죽음의 길이 부각된다. 베드로가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라고 고백했으나, 제자들에게 함구령이 내려진 이유가 무엇인가?를 성찰해야할 이유다. 그것을 베드로의 입장이 아니라 오늘 우리의 입장에서 <주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함구령은 해제되었는가를 성찰의 초점이라고 할 수 있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세 차례의 수난과 부활에 대한 예고(8,31-33/9,30-32/10,32-34)를 통해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신앙의 여정에서 고난을 당하시고 부활하시는 그리스도임을 거듭하여 강조다하여 들려준자. 이는 예수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따름의 본질을 밝히신 것이라 할 수 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는 두번의 질문은 참으로 외로운 하느님의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의 행적을 지켜봤던 사람들이 당신을 일컬어 세례자 요한이나 엘리야, 혹은 다른 예언자 중에 하나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면 그들은 예수가 베푸는 수많은 표징의 의미, 예수의 정체를 결코 알지 못했음을 추론할 수 있다.

 

나아가 베드로의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라는 답 역시, 이어지는 33절에서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에서, 베드로의 고백이 그리스도의 본질을 알고 대답하지 않았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이 앞뒤가 맞지 않는 베드로의 고백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던 베드로가 수난받는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은 다만 베드로만의 문제인가? 하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수난 받는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있는가? 하는 질문이다.

 

예수가 주로 몸담았던 갈릴래아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닌 제3의 길에서 던지는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라는 질문은 예수의 정체를 안다는 것은 곧 우리 자신의 믿음의 현주소, 나를 안다는 것과 밀접한 연관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예수께서는 베드로의 고백에 사용한 그리스도 대신 사람의 아들, 인자라고 지칭하신 것이 바로 그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마르코 복음서에서 예수가 당신 자신을 지칭하는 용어는 오직 사람의 아들, 인자뿐이다. 이는 그리스도에 대한 정의를 십자가의 길을 통해 친히 밝힌 것이나 다름없다. 그렇다면 <반드시> 인간의 구원에 십자가가 필요한 이유가 무엇인가? 다른 방법은 없는 이유가 무엇인가?

 

31에서, 예수님께서는 그 뒤에,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

 

<반드시>라는 부사는 십자가의 길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시고 이 구원계획은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십자가 사건은 하느님의 사랑의 역사에 피할 수 없는 필연적인 사건이라고 바라볼 수 있는가?

 

여기서 우리는 연거푸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다. 어떻게 인간구원의 계획이 십자가에서 사람의 아들을 희생하는 것이어야만 하는가? 하는 점이다.

 

이 점에서 예수가 보여주는 그리스도는 베드로의 고백과도 상당히 거리가 있으며, 더욱이 당시 유대의 모든 종교지도자들뿐 아니라 그분을 따랐던 군중들까지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고난-버림받음-죽음- 부활의 여정은 베드로에게 명한 함구령의 의미를 분명해 졌다고 할 수 있다. 베드로에게 내린 함구령은 아는 것을 함구하라는 것이 아니라 모르고 있음으로 함구하라는 것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다. 메시야에 대한 오해와 환상으로는 결코 예수그리스도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8,32-33에서 베드로와 예수님의 갈등은 <알고 있음과 알 수 없음>을 통해 제자의 길이 무엇인지 다시금 강조된 것에 해당한다. 베드로는 마치 예수의 후견님처럼 행세한다. 끌어당기고 나무라다---그러나 예수는 십자가를 부정하는 베드로를 향해 내 뒤로 물러가라 사탄아, 라고 강력한 제자의 도를 규정하신다.

 

‘사탄은 무엇인가? 사탄 (Satan)은 Saṭänä; 아랍어: شيطان, Šayṭān, Ge'ez: ሳይጣን Sāyṭān, 터키어: Şeytan)에서 따온 말로 ‘야훼’에게 대항하는 영적(靈的) 무리의 우두머리를 일컫는 이름이다. 그 사탄(하 사탄, Ha-Satan) 역시 같은 존재를 일컫는데, “고발하는 자”혹은 "참소하는 자" “대적하는 자” “방해하는 자” “분리하는 자”라는 뜻을 갖고 있다.

 

베드로가 생각하는 메시야는 원로들과 대제관 당시 사람들이 생각하는 메시야관과 동일하였다. 이는 베드로의 이해부족, 무능력, 오해로 국한시킬 수 없고, 고난받는 메시야를 이해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반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내 앞이 아니라 내 뒤에 서라는 것은 하느님의 일을 먼저 생각하라는 것인데, 그 의미는 또 무엇인가?

 

이어지는 34-9,1 에서 제자들과 군중들을 가까이 부르시어 그리스도의 길과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의 길이 같음을 이야기 하신다. 예수께서 제자직으로 내 놓은 것은 세가지 조건이었다; 자기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예수의 뒤를 따르는 것이다.

 

바오로와 요한에게 예수를 따르는 길은 그리스도로 믿는 것이었다면, 마르코 복음사가에게 예수를 따르는 길은 그분이 가신 십자가의 길을 뒤따라 가는 것이라는 것을 34-35절에서 분명히 한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34)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35)”

 

여기서 자신을 버리고 목숨을 버리고 등에서 강조되는 자기 비허는 금욕주의나 증오, 자기 배척, 자진 순교가 아니고 자발적이고 능동적으로 자기를 비우는 일이라고 바라보게 된다. 즉 실재를 부정하고 비실재를 실재화 하지 말라는 말로 말이다. 나의 <있음>, 존재의 근원으로 돌아가라는 것은, 자기의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잃고 목숨을 잃는 사람은 구한다는 명제로 구체적으로 제시된다. 예수의 제자의 길, 세 가지를 따르는 길은 곧 십자가의 길임을 명시한 것이다. 이는 인간 실존을 뒤흔든 명제가 아닐 수 없다.

 

여기서 실존주의와 크리스도교에서 인간을 바라보는 시선의 차이가 무엇인가를 극명하게 갈린다. 사르트르의 시대뿐 아니라 21세기에도 여전히 실존주의가 던지는 명제는 인기가 대단하다. 인기의 이유는 두 가지다. 실존주의는 유신론적 실존주의자들이건, 무신론적 실존주의자이건 모든 실존주의자들의 공통점은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는 것과 <인간 주체성>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데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그 반대로 <본질은 언제나 실존에 선행>하는 것이며, <인간의 주체성을 오히려 비우고 정체성>을 확립할 것을 요구한다. 예수께서 제자직으로 내 놓은 조건 세가지에서 인간의 주체성이 아니라 제자의 정체성을 요구했음에서 그를 알 수 있다. 즉 자기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예수의 뒤를 따르는 것에서 베드로의 고백은 그리스도교적 고백이 아니라 실존주의적 고백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이는 31절에서 강조한 <반드시>를 이해하는 키워드가 된다.

 

31에서, 예수님께서는 그 뒤에,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

 

실존주의적 그리스도론과 그리스도적 그리스도론의 차이, 그 시선의 차이를 낳는 것은 사랑의 본질에 내재하는 역설, 인간이 스스로 자존하려는 욕망의 아이러니에서 바라보기도 하고, 주체성과 관련하여 창조의 자유의지에서 바라보기도 한다. 또 심리적-철학적으로 실존주의를 밀고 나가는 이들이 <무(無)-없음 존재하지 않음>에 봉착하여 자살을 선택하는 이유에서 추론하기도 한다. <나는 ‘있는’ 나다- ‘있는’ 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탈출기3, 14-15)를 믿는 이들이 고백하는 <주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고백에는 실존주의적 그리스도론과는 엄청난 차이가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요셉 라칭거 추기경은 『사도신경강해』에서 다음과 같이 전한다.

 

“사랑은 무한을 갈구하고 불멸을 갈구한다. 사랑은 말하자면 그 자체가 무한을 찾는 외침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이 외침이 성취될 수 없고, 사랑이 무한을 갈구하면서도 줄 수 없음은 사실이다. 사랑은 영원을 요구하면서도 실은 사계에 잠겨있고, 사계의 고독 및 파괴력에 갇혀있다. 이런 입장에서만 비로소 부활이 무엇인가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부활은 그 자체가 죽음에 대한 사랑의 우세인 것이다. 아울러 사랑은 어떠한 것만이 불사불멸을 이룰 수 있는가를 가리켜 준다.”

 

인간은 영원히 살지 못하고 죽음에 내맡겨진 존재다. 사랑은 불사를 확립하고, 불사는 오직 사랑에서만 온다. 불사불멸은 오직 불사불멸의 사랑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점에서, 사랑의 본질을 정립할 때만이 십자가 사랑과, 죽음과 부활의 의미에 다가갈 수 있다고 본 것이다.

 

 

 

 

 

 

 

 

2021년, 2023년 [사랑은 십자가가 아니지만, 십자가는 사랑이다]라는 글을 올린바 있다. 그 글의 한 부분을 재인용한다.

 

먼저 창세기 1장으로 시작해 본다.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창세기1,26)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창세기1, 27)

 

창세기에서 우리와 비슷한 인간이란 이미 불사불멸한 인간이라는 규정이 전제된 것이다. 여기서 표면적으로는 십자가는 창조의 사랑이 아니라는 것이 전제된다. 십자가는 어떤 실존의 결과물이다. 그런데, 십자가의 근원으로 돌아가면, 원인에 원인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면 그곳에 창조의 사랑을 만날 수 있다. 창조의 사랑 속에 있는 자유를 만날 수 있다. 자유의지의 남용, 그 뒤틀림이 실존의 충돌을 낳았다. 그렇기에, 십자가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선적으로 우리가 바라보아야 하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창조의 선물인 자유의지를 바라보아야 한다.

 

십자가는 사랑이 무엇인지만 보여주는 것뿐 아니라 자유가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계시한다. 십자가는 사랑과 자유의 관계를 보여준다. 사랑은 언제나 자유로운 두 존재들 사이에서 가능한 사건이다. 사랑의 필연적 관계론이 인간의 본질적인 구성요소이듯, 자유 역시 인간의 본질적인 구성 요소가 된다. 그런데 인간에게 선물로 주어진 자유는 인간이 자신을 유한자로 구성하는 요인이 되었다. 인간비극의 서막이다. 여기서 우리를 닮은 인간을 만든 신의 계획은 무산된 듯 보인다. 그 무산된 계획을 십자가의 사랑은 치유한다. 다시 창조의 사랑으로 돌린다.

 

우리를 닮은 인간을 만들자!라는 창조의 사랑은 마치 유한자에게 주어진 쓸 수 없는 자유처럼 오해된다. 유한자에게 자유가 주어졌다는 것은 참으로 의혹이 아닐 수 없다. 유한과 자유는 함께 동행할 수 없는 상태이기에 그렇다. 그렇다면 이 유한은 누가 준 것인가? 유한자에게 준 자유? 그 자유는 유한한 것처럼 보이기에 자유가 아니다. 여기서 유한은 인간이 선택한 결과라는 것부터 이해해야 한다. 사랑의 창조주께서 인간에게 자유를 준 것이 지고의 진선미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아니라 모든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되는 순간 인간은 죽음을 선택하여 스스로 유한에 갇히게 된다는 사실이다. 유한을 통해 무한으로 가는 것이지, 무한을 통해 무한으로 가는 것이 아니다. 지고지선한 신은 악을 모른다. 그런데 인간은 자유의 다양한 쓰임 중에서 스스로의 선택으로 무한한 존재가 되려다 유한한 존재, 죽음에 갇힌다.

 

스스로에게 죽음을 주었다는 사실을 인지하면서도 동시에 무한한 사랑과 행복을 추구하는 딜레마에 인간은 놓이게 된 것이다. 이를 인간의 주체성으로 확립 할 수 있다고 외친 것이 실존주의고 그것은 인간 스스로 회복할 수 없다고 바라본 것이 예수그리스도다. <내 뒤에 서다>라는 동사가 지정하는 자리다. 예수의 뒤에서라는 것은 <앞과 뒤>는 서열의 자리가 아니다. 인간 스스로 인간이 될 수 없다는 인간 규정에 가깝다. 십자가는 재창조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유한자인 피조물의 상태를 스스로 선택했음에도 불구하고 무한한 창조상태의 행복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인간은 하느님을 지향하도록 창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 말은 인간이 지닌 유한한 자유가 하느님을 상실했다면 완전한 충만이나 행복을 기약할 수 없다는 사실을 함축한다. 여기에 자유의지의 역설이 있다. 완벽한 충만을 추구하던 인간이 그 충만을 스스로 채울 수 없을 때, 즉 유한자로 전락한 인간이 스스로 무한한 사랑을 추구할 때, 실존의 역학관계로 인해 십자가는 만들어진다. 스스로를 구원하지 못한 사랑은, 사랑의 죽음을 만든다. 여기서 십자가는 바로 자유의지의 역설을 드러내는 축복과 죽음의 결절점이 된다.

 

그런 맥락에서 십자가를 창조의 근원에로 소급해 바라보는 신학자들이 있다. 인간이 겪는 고통은 인간 존재의 유한성 자체에 근원을 두고 있으며, 나아가 창조 자체에 근원을 두고 있다고 바라보는 시선은 바로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의지로부터 그 원인을 소급할 수밖에 없다고 본 것이다.

 

인간에게 자유의지란 무엇인가를 해명할 수 있을 때, 십자가는 단지 인간의 고통이 아니라 신의 고통까지도 관통한다고 본 것이다. 여기서 강생의 신학과 십자가 신학이 하나라는 사실과 만나게 된다. 인간이 자유의지를 창조의 질서에 맞게 올바르게 사용할 수 있었다면 굳이 신이 인간 역사에 개입할 필요가 있었겠는가 하는 점이다.

 

인간을 창조한 신이 인간의 고통에 무감각한 창조주가 아니라 인간 역사에 구체적으로 개입할 수밖에 없는 하느님, 신의 (사랑의) 자기구속성이라는 말이 여기서 나온다.

 

그러기에 십자가는 사랑의 사건이다. 이 사랑의 사건은 인간 구원을 위한 대속의 구원론적 관점에서 바라볼 것인가? 하느님과 하느님 사이의 관계론으로 바라볼 것인가?에 따라 십자가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러나 그 어느 관점으로 바라보든 그것은 하느님의 창조의 사랑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사랑은 항상 고난당하는 사랑>이라는 관점에서,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은 십자가 사건을 창조에서 종말까지를 연결하여 바라본다. 인간 역사의 모든 파노라마를 인간 혼자 겪어내는 사건이 아니라고 본 것이다. 위르겐 몰트만은 아우구스티누스, 에라스므스, 칼 라너, 보에티우스로부터 삼위일체론과 위격개념을 받아들여 삼위일체 하느님 사랑이 어떻게 십자가신학과 연결되는지, 구체적으로 인간역사 안에서 삼위일체 하느님을 바라볼 수 있는지를 다음과 같이 전한다.

 

“골고타에서 일어난 십자가 사건은 하느님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 미치며, 따라서 영원 가운데 계신 하느님의 삼위일체적 존재에 영향을 미친다"

 

칼 라너의 삼위일체론에서 하느님은 내적이며 동시에 경세적인 존재양태를 드러낸다는 것을 받아들여 몰트만은 경세적인 삼위일체의 극점이 바로 십자가 사건이라고 바라보고 있다. 여기서 형이상학에 갇힌 정적인 삼위일체론이 아니라 인간 역사에 구체적으로 함께 하시는 역동적인 삼위일체론이 나온다. 십자가 사건을 인간의 죄를 대신하는 대속의 의미를 넘어서. 인간의 역사와 함께하는 임마누엘의 하느님, 즉 경세론적 삼위일체론을 구축한다고 본 것이다. 십자가 신학을 이해하려면 삼위일체론을 가져오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삼위일체를 예수의 십자가 고난과 죽음 안에 있는 사랑의 사건으로 이해한다면 삼위일체는 결코 하늘에 있는 자기 폐쇄적인 공동체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비롯된 지상의 인간들을 위해서 개방된 종말론적인 과정이다"

 

십자가는 성부의 고통, 성자의 죽음, 성령의 탄식이 십자가 사건을 구성하는 사랑의 트라이앵글이라고 본 것이다. 그동안 인류는 십자가가 인간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만 바라보았다. 그런데 동시에 십자가는 세 위격을 지닌 하느님 자신들에게 무슨 의미였나를 바라보아야 구원사의 큰 그림을 볼 수 있다는 견해다. 따라서 삼위일체론이 교리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전례주기에 맞춰 몇 번 가끔 조명할 차원이 아니라고 본 것이다.

 

위르겐 몰트만은 십자가 사건을 칼라너의 삼위일체론으로부터, 존재론적 삼위일체론에서 경세론적 삼위일체론을 구축하였음을 바라보았다. 십자가 사건 속에서 하느님이 예수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고, 에수와 성령이 하나가 되면서,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를 교회에 부여하여, 종말론적 하느님의 역사를 교회에 부여한다는 것이 구원사의 총론이라는 것이다.

 

존재의 본질로서의 삼위일체적인 하느님의 존재양태는 <페리코레시스perichoresis>에 의해 표현되고 있다는 견해다. 요한1서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와, 요한복음에서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는 것은 바로 상호침투- 상호관입의 하느님 안에서의 하나oneness라는 관점이다. (위르겐 몰트만, 『십자가에 살리신 하느님』, 『삼위일체와 하느님 나라』)

 

이는 “그들도 우리 안에 있도록”(요한 17,21)에서 몰트만은 삼위일체 교리는 위격의 신비에만 머문 것이 아니라, 신약성서 전반에 나타나는 십자가 사건의 관통이기에 <반드시> 구체적인 하느님의 역사하심으로 바라본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경세적 삼위일체는 내세적 삼위일체이며, 그 반대의 경우도 사실(칼 라너)이라는 것을 위르겐 몰트만은 초기의 저서에서 동일성을 후기의 저서에서는 종말론적 입장을 추가하여(확장하여) 그 차별성을 전제한다.

 

“아버지께서 늘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는, 요한복음의 전언처럼 삼위일체 하느님은 인간 역사 안에서 언제나, 늘 살아계신다. 인간 역사에 언제나 개입하여 살아계신 하느님은 성부-성자-성령(교회) 이라는 단 하나의 존재양식이 아니라 성자-성령-성부(창조론), 성부-성자-성령(강생과 부활), 성령- 성자-성부(재림)으로 구체화하여 언제나 살아계신다고 본 것이다.

 

하느님, 주님의 신적 위격들은 서로에 대한 관계성 속에서만이 아니라, 요한의 진술에서 보여주듯이(요한 복음16장, 17장의 긴 고별사) 성부가 성자 안에, 성령이 성부와 성자 안에, 그리고 성부와 성자가 성령 안에 <페리코레시스perichoresis>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서로 안에 위격들이 이러한 친밀한 내주와 완전한 침투이기에 <십자가 사건은 하느님의 고난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의 고난을 의미한다> 성부, 성자, 성령은 십자가를 다르게 경험하고 사랑 안에서 ‘하나0neness’로 통합한다. 십자가 사건은 인성을 취한 신이 당신이 무한한 사랑의 신임을(불사불멸하는) 경험하는 사건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성자는 게세마니의 기도처럼 성부의 버림 속에서 죽음의 고통을 당하지만, 성부는 성자의 죽음에 상응하는 성자의 죽음을 침묵함으로써 고난을 당하신다. 또한 성령께서 몸소 말로 다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우리를 대신해 간구해주시며 부활로 응답한다.(로마서8, 26-30)”

 

많은 신앙공동체의 일원이 의문시하는 것이 여기서 해명된다. 공생활 전반에서 함께 하신 하느님께서 게쎄마니아 동산에서 피땀 흘리는 그 시간에 당신 아들께 아버지는 왜 침묵하셨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다. 그 침묵을 삼위의 위격의 차이에서 바라 볼 수 있다. 하느님의 침묵은 아들 죽음에 대한 수수방관이 아니라 강생이라는 육체를 지닌 예수만이 십자가에 자신을 못 박힐 수 있다는 사실에서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성부와 성령은 인성을 취한 존재가 아니다. 십자가는 인성을 지닌 실존의 역학관계에서 나타난 악이기 때문에 성자 홀로 그 몫을 감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즉 십자가의 죽음은 강생하신 사람의 아들 예수만이 감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성부와 성령은 육체의 고통으로써가 아니라, 창조의 고통에서 이를 함께 겪어낸다고 본 것이다. 따라서, 십자가 사건은 하느님의 죽음이 아니라 하느님이신 성자의 인성이 죽은 사건이라고 본 것이다.

 

“성부, 성자, 성령이 서로 안에 위격들의 이러한 친밀한 내주와 완전한 침투는 이것은 하느님의 고난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의 고난을 의미한다.”

 

여기서 인간이 겪는 십자가의 고통은 인간 존재 스스로 초래한 유한성 자체에 근원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창조 자체에 그 근원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자유가 인간에게 선물로 주어졌다는 것이다. 인간이 생각하는 인간보다 신이 생각하는 인간이 너무 크다는 것이다. 여기서 “악은 하느님이 존재하지 않도록 명하시기 때문에 존재한다”는 역설적 명제가 도출되기도 한다. 그 명제로부터 “사랑에는 오로지 무죄한 고난만이 존재할 뿐이다”는 사랑론이 나온다. 즉 사랑은 항상 고난당하는 사랑이다!는 결론에 결론에 이른 것이다.

 

그 고난당하는 십자가의 사랑은 아름답지 않다. 형태 미학과는 거리가 멀다.  인류가 원래의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는 그 날까지, 즉 원래의 은총지위를 되찾을 때까지, <우리를 닮은 인간을 만들자>는 창조의 사랑이 완성될 때까지, 항상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계속된다는 것이 십자가 사건이 우리에게 전하는 사랑과 희망의 메시지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십자가는 창조의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베드로의 <스승님께서는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고백에 함구령을 내린 이유의 한 측면이라고 바라볼 수 있겠다.

 

 

 

글을 마치며,

 

그때에 27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카이사리아 필리피 근처 마을을 향하여 길을 떠나셨다. 그리고 길에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28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 29 예수님께서 다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베드로가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30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에 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다. 31 예수님께서는 그 뒤에,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32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명백히 하셨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다. 33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을 보신 다음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며 꾸짖으셨다. 34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군중을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35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