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파타(Εφφαθα)! 예수님의 직접적인 육성(ipsissimavox Jesus )을 어떻게 들을 수 있나?(2)
- 연중23주, “예수님께서는 귀먹은 이들을 듣게 하시고 말못하는 이들을 말하게 하신다”를 중심으로
1. 하인리히 하이네, 「고백」
땅거미 앞세우고 저녁은 찾아오고/ 물결은 더욱 거세게 날뛰었다/바닷가에 앉아 하얗게 부서지는/파도의 춤을 바라보고 있지나/ 내 가슴은 바다처럼 부풀어올랐다/그때 너를 향한 사무치는 그리움이/나를 사로잡았다, 너의 아름다움 모습/그 모습 내 주위 곳곳에서 떠돌고/어디에서나 나를 부른다/어디에서나 어디에서나/세찬바람소리 속에서나, 거친파도 속에서나/내 가슴의 한숨 속에서도/나는 가벼운 갈대를 꺾어 모래위에 썼다/“아그네스, 나는 너를 사랑한다”/하지만 심술궂은 파도가/그 달콤한 고백위로 덮쳐와/ 그 말을 흔적도 없이 지워버렸다/나약한 갈대야, 먼지처럼 흩어지는 모래야/사라지는 파도야, 난 이제 너희를 믿지 않겠다/ 하늘은 점점 어두워지고, 내 마음은 더욱 날뛴다/ 나 이제 억센 손으로 노르웨이 숲에서 /가장 커다란 전나루를 뽑아/에트나 화산의 붙타는 분화구에/담갔다가/불에 적신 그 거대한 펜으로/캄캄한 하늘에다 쓰리라/“아그네스, 나는 너를 사랑한다”/ 그러면 매일밤 그 하늘 위에서/영원한 불의 글자가 활활 타올라/후대의 자손들이 대대로 환성을 지르며/하늘에 쓰여진 그 말을 읽으리라//“아그네스, 나는 너를 사랑한다”
하인리히 하이네의 「고백」은 실존과 존재를 넘나드는 시라고 할 수 있다. 세 번이나 반복되는 “아그네스, 나는 너를 사랑한다” 라는 개별적인 고백은 영원한 불의 글자가 되어 하늘에 쓰여진 말로 보편적인 고백의 정수가 된다. 어떻게 이런 비약이 가능할까?
“나는 가벼운 갈대를 꺾어 모래위에 썼다” 와 “불에 적신 거대한 펜으로/캄캄한 하늘에다 쓰리라”는 것은 땅의 언어가 하늘의 언어가 되는 비의는 고백에 피가 섞여 있었는지의 여부, 핍진성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하인리히 하이네의 「고백」은 고백의 내용이 아니라 고백의 핍진성 여부에 따라 유한과 무한으로 갈린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고백(사랑)은 자기부정의 반-명제를 통한 자기긍정에 이르는 길임을 바라볼 수 있다.
2. 자기부정의 ‘반(反)-명제’를 통한 자기긍정의 여정
‘난 널 사랑해’의 내적 논리(롤랑 바르트 & 알랭바디우)를 통해 사랑은 자기부정의 ‘반(反)-명제’를 통한 자기긍정의 길이라는 것을 롤랑바르트와 알랭바디우의 사랑론을 서로에게 ‘반(反)-명제’가 되는 경우에 해당한다.
‘꽃이 핀다’에서 ‘피다’는 자동사다. 목적어가 필요 없다. 그러나 ‘사랑하다’는 ‘주어와 목적어’가 반드시 필요한 타동사다. 그래서 라캉은 『세미나1』에서 ‘난 널 사랑해’는 하나의 문장이 아니라 하나의 단어로 바라봐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사랑도 꽃처럼 홀로 필 수 있다면 사랑의 기쁨, 행복, 충만 옆에, 고통, 위기, 고뇌, 상실, 죽음이라는 과정이 놓여 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꽃을 ‘산화공덕’이라 부른다. 이는 꽃이 피는 것 역시 그 홀로는 수행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최소한 태양과 물이 있어야 꽃도 필 수 있다. 한 송이의 꽃이 피기 위해서도 자기부정의 긴 시간이 필요하다.
자기부정을 통해 자기긍정에 이르는 길을 ‘나는- 너를 –사랑해’라는 고백 혹은 선언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를 롤랑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과 알랭 바다우의 『사랑예찬』에서,
롤랑바르트와 알랭바디우는 사랑하는 것이 왜 고통과 상실을 수반해야 하는가를 치밀하게 성찰한 인문학자들이다. ‘나는 너를 사랑해’를 롤랑바르트는 고백적 차원에서 알랭바디우는 선언적 측면에서 바라본다는 데서 일단 발화의 차이가 발생한다. 그 차이에도 불구하고 사랑 아닌 것과 사랑인 것은 어떤 경계를 ‘넘어’, 혹은 ‘너머’에 있다는 점에서 그들은 같은 곳을 바라보았다고 할 수 있다.
⒜“난 널 사랑해”, 이 문형은 사랑의 고백이나 선언에 관계되는 것이 아닌, 사랑의 외침의 반복적인 발화를 가리킨다. 하나의 한계상황, 즉 주체가 그 사람에 대해 반사적 관계에 정지되어 있는 상황에 고착되어 있는 일문일어의 문장이다.(롤랑 바르트)
바르트는 ‘난 널 사랑해’는 충동으로 간주하기엔 문장화되어 있고, 문장으로 간주하기엔 너무 소리지르는 듯한 문형으로 어떤 언어유형으로도 분류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것은 시나 음악처럼 출처를 밝힐 수 없다는 것이다.
‘난 널 사랑해’는 어떤 사회적 구속력도 받지 않는 모성애적인 문장이다. 어떤 거리감도 뒤틀림도 없이 천진난만한 아이의 발화에 해당한다. 그럼에도 이 단어가 상대에게서 화답되지 않을 때, 발화자를 미치광이로 만든다는 점에서 바람의 언어, 소용돌이 언어에 가깝다고 보았다.
‘난 너를 사랑해’는 라자로가 죽음에서 깨어나듯, 어떤 예측하지 못한 상태에서 상대에게 도달하므로 롤랑 바르트는 이 상태를 ‘샤토리satori’를 경험케 한다고 말한다. 텔레파시 혹은 깨달음 같은 두 개의 힘이 섬광처럼 전대미문의 사건을 발생시킬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럼에도 역설적이게도 이 발화는 상투적인 끝에 위치하여 세속화된다는 점에서 양면적 속성을 지닌다. 소비되는 고백, ‘나는 너를 사랑해’는 발화자의 진심여부와 사랑의 과정에 의해 고귀함과 비천함이라는 낙차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사랑을 두려워하고 의심하는 이들에게 이런 고백은 팜므파탈로 오해받을 수도 있다는 점이다.
‘난 너를 사랑해’는 징후가 아닌 행위의 언어로 노예(노예는 혀가 없다)인가 주인인가를 가늠하는 말이자, 언어의 극단에 위치하면서 아폴론적인 것에 반발한다는 점에서 니체가 바라본 ‘디오니소스’ 적인 것이다. 예수가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듯, 이 말을 발화한 사람은 상대에게 정신적으로 무릎을 꿇은 상태라는 것이다. 제자들은 혁명을 원했고, 예수는 사랑을 원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반면, 알랭 바디우는 ‘나는 너를 사랑해’를 ‘발화’나 고백이라고 말하지 않고 ‘선언’이라고 말한다. ‘나는 너를 사랑해’는 거듭거듭 선언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나는 너를 사랑해”가 어떤 특별한 공인을 필요로 하지 않는 하나의 약속, 즉 만남이 제 우연성에서 탈피할 수 있도록 지속성을 구축하는 약속이라는 사실을, 충실성이 정확히 드러내고 있지 않습니까?(알랭 바디우)
‘나는 너를 사랑해’라는 명명은 충실성을 내재한 언어로 너와 나라는 개별자가 ‘둘’이라는 세계의 문을 열면서 무한을 경험하는 무대에 서게 되는 시발점으로 바라보고 있다.
바디우는 ‘나는 너를 사랑해’는 ‘둘’을 발생시키는 남녀 간의 사랑이 진리를 생산하는 절차라고 단언한다. 사랑은 만남으로부터 발생한다. '하나'를 벗어난 두 개의 성은 '둘'(un Deux)이 된다. 바디우는 이 '둘'이라는 표현에 주목하고 있는데, '둘'은 결국 최초의 다수이다. 다시 말해, 만남은 유아론적인 주체에서 벗어나 '둘'이라는 최초의 다수를 만들어낸다. 최초의 다수가 출현하는 지점, 그것이 바로 만남이라는 사건이며, 사랑이 시작되는 구체적 지점이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이 ‘둘’은 두 입장의 셈으로서의 ‘둘’이 아니다. 이것은 그저 분리된 ‘둘’, 주어진 것으로서의 ‘둘’이다. 분리된 ‘둘’이란 전체적인 ‘분리’, 즉 제3의 입장이 없는 ‘분리’이다. 다시 말해 "두 입장은 둘로 셈해질 수 없다." 사랑은 셋을 모르기 때문에 결코 ‘둘’로 셈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기존의 종교에서 말하는 ‘사랑은 하나’라는 동일자 의식의 반-명제가 도출된다. 바디우는 사랑은 '하나'여야 한다는 것은 전체주의사고라며 강하게 반발한다. 사랑은 끝까지 둘이라고 보는 관점이다.
그래서 바디우는 ‘나는 너를 사랑해’는 고백이 아니라 선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만남, 이 우발적인 얹어짐은 하나의 선언, '사랑한다'는 선언을 통하여 고정되며 공백을 호출한다. 그 공백은 다름 아닌 ‘둘의’ 분리라는 공백이다. 공백으로서의 둘은 개별자인 나 혹은 너라는 ‘하나’를 파괴하고 '둘'을 상황 속에서 위치시킨다. 이를 바디우는 ‘분리를 넘어 분리의 진리로 나아가는 것’으로 보고 있다. ‘둘’의 성립에서 '나는 너를 사랑한다'는 선언은 둘을 위해 하나를 파괴하는 언표로서의 사랑을 상황 속에 유통시킨다.
바디우는 이 ‘둘’의 발생에서 사랑의 고통, 시련, 위기, 고뇌 등 사랑의 ‘다리절기(boiterie)가 발생한다고 보고 있다. 둘은 각자의 생존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완전한 일치가 불가능하며, 둘 중 누군가의 희생 혹은 완급조절이 불가피하며, 두 사람의 타협이 가능했기에 걷게 되는 그 걸음이기 때문에 ’다리절기‘다.
롤랑 바르트가 바라본 ‘나는 너를 사랑해’는 고백하는 자에 초점이 맞춰진 직관라면, 알랭 바디우가 바라본 ‘나는 너를 사랑해’는 둘의 사건 속에서 선언된 사랑의 논리, 실존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왜 ‘나는 너를 사랑해’ 라는 고백이나 선언에서 사랑의 고통이나 상실이 발생할까? 롤랑바르트의 견해는 사랑의 구심력(나 중심적인) 배타성 때문으로 바라보고 있다면 알랭 바디우의 사랑의 확장성 원심력(둘의 사건) 때문으로 보고 있다.
롤랑바르트와 알랭바디우는 ‘나는 너를 사랑해’는 자신과 대상을 ‘넘어-너머’ 서야지만 가능한 행위라고 보고 있다. 분명 사랑은 둘의 행위이지만 무엇인가를 ‘넘어-너머’선다는 것은 자기부정이 가능해야 실현할 수 있는 하나의 행위이기도 하다. 이는 둘은 하나를 극복해야 하고 하나는 극복해야 한다. 이는 사랑이 지닌 소용돌이에 해당한다. 사랑이 자신의 전존재를 뒤흔드는 사건이 되는 것은 자기부정을 통해 자기긍정에 이르는 길이기 때문이다.
3. <예수님께서는 귀먹은 이들을 듣게 하시고 말못하는 이들을 말하게 하신다>(마르코7,31-37)
Ⓐ그때에 31 예수님께서 티로 지역을 떠나 시돈을 거쳐, 데카 폴리스 지역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갈릴래아 호수로 돌아오셨다. Ⓑ32 그러자 사람들이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에게 손을 얹어 주십사고 청하였다. 33 Ⓒ예수님께서는 그를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셨다. 34 그러고 나서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신 다음, 그에게 “에파타!”곧 “열려라!” 하고 말씀하셨다. 35 그러자 곧바로 그의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다. Ⓓ36 예수님께서는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그들에게 분부하셨다. 그러나 그렇게 분부하실수록 그들은 더욱더 널리 알렸다. 37 사람들은 더할 나위 없이 놀라서 말하였다.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
<예수님께서는 귀먹은 이들을 듣게 하시고 말못하는 이들을 말하게 하신다>라고 전하는 마르코7,31-37은 전형적인 치유이적사화로써 이방인 지역에서 행해진 사건이다. 여기서 ‘전형적’이라는 표현은 '획일적'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예수님의 치유가 지닌 고유한 사랑의 방식- 개별적인 사건이 어떻게 보편적인 사건이 되는가? 하는 표징에 관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귀먹은 이들을 듣게 하시고 말못하는 이들을 말하게 하신다>(마르코7,31-37)
는 치유이적사화는 상황묘사(31-32)-기적적 치유(33-34)-치유실증(35)-목격자들의 반응(37)으로 네 부분으로 엮어져 개인에게 행해진 치유가 보편적구원이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31절에서 그분은 띠로와 시돈 데카폴리스 등 이방인 지역을 거쳐 갈릴레오로 돌아오신다. 띠로와 시론 하면 우리는 자신의 딸을 구하기 위해 자신을 강아지에 비유했던 한 이방인 여인을 떠올릴 수 있다. 이는 예수님의 복음이 특정 지역이나 종교의 카테고리를 넘어섰다는 것뿐 아니라 <나>라는 사람에게 일어난 기적이 어떻게 세세대대 전수될 수 있는 보편적 기적인지 하는 기적의 연속성에 관한 것이다.
"주님께서는 유대인들을 떠나 티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셨습니다. 유대인들을 버려두고 다른 민족들에게로 가신 것입니다. 그분께서 버려두고 떠나신 이들은 황폐함 속에 남아 있고, 그분께서 찾아가신, 소외되어 있던 사람들은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 땅에서 한 여인이 나와 그분께 이렇게 외쳤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이 얼마나 위대한 신비입니까! 주님께서 유대인들로부터 떠나오시자 이방 민족들의 땅에서 가나안 여인이 나옵니다. 주님은 유대인들을 떠나셨고, 여인은 우상 숭배와 불경한 삶의 방식을 떠났습니다. 그들이 잃어버린 것을 여인은 찾았습니다. 그들이 율법 안에서 거부한 분을 여인은 믿음을 통해 고백했습니다. (라틴인 에피파니우스 『복음서 주해』 58).
Ⓑ32절에서 “그러자 '사람들이'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에게 손을 얹어 주십사고 청하였다.”에서 들음과 말함이라는 치유의 시작은 누군가의 간정한 염원으로부터 시작됨을 알 수 있다. '사람들'과 '귀먹고 말 더듬는 사람'의 '감응'안에서 ‘에파타(열려라)’의 기적이 일어난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치유를 받아야할 대상 보다는 사람들에게 초첨을 맞추어 치유의 문을 연다. 이는 '에파타(Εφφαθα)'라는 말씀이 무엇에 갇혀있는 그 누군가를 그분의 사랑과 연결시키는 '마리아'가 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귀먹고 말 더듬는 그 사람뿐 아니라 그 사람을 그분과 연결시키는 '사람들'을 동시에 포괄하는 해방의 메시지가 치유의 사랑이 된다. 개별적인 사건이 보편적인 사건으로 확장되는 순간이다.
그분은 갈릴레야 주변의 이방인 지역을 통과해 이방인 지역의 한가운데에서 치유기적을 행하신 것에서 그분은 필요한 곳에 언제나 계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분은 늘 움직이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귀먹은 반벙어리를 고쳐주기를 요청한다. 사람들은 타인의 치유를 자기의 치유처럼 여겨 예수와 아픈 사람을 연결해 준 것이다. 하늘의 움직임과 땅의 움직임이 만난 곳에서 기적이 일어난다. 기적의 원리다. 누군가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마리를 내어 놓아야 오천명을 먹일 수 있는 기적이 일어나듯 말이다.
Ⓒ33~35절까지, 예수님의 치유행적은 이전과 다르다. 말씀뿐 아니라 어떤 행위가 동반된다. 복음사가는 이토록 33절에서 치밀하게 치유이적의 상황을 묘사하고 있는 것에서 개별적인 치유의 사랑을 볼 수 있다. 보편적인 사랑은 언제나 개별적인 사랑에서 비롯됨을 알 수 있다. 예수께서는 손가락을 귀에 넣고 침으로 바르며 하늘을 쳐다보고 숨을 내쉬는 것은 당대 유대계 및 이방계 이적사화에 흔히 나오는 치유행위와 비슷하다. 침은 물, 피, 술, 기름과 더불어 액체 약품에 속한다. 랍비 사회에서는 침은 안질에 특효약으로 여겼다. 하늘을 쳐다보는 것은 하늘의 기운을 얻으려는 것이요, 한숨을 쉬는 것은 그 기운으로 병마를 물리치려는 것이다. 구약성서에서는 의술에 의존하는 것을 금하지 않았으나. 우상숭배 성격이 짙은 마술행위는 금하였다. 마술행위와 다르게 병에서 벗어나 죄인의 상태가 아닌 치유로 인류의 아픔을 덜어 주시기 위하여 예수는 인류 문명에 동참하신 것이다.
여기서 에파타!, 곧 열려라!는 ‘곧바로’ 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다는 점일 것이다. 우리가 멈추어야 할 부분은 ‘곧바로’라는 부사가 지시하는 '오늘'의 사랑이다. 그 언젠가로 유예된 사랑이 아니다.
이어지는 34절에서 에파타! 열려라는 말씀은 귀가 열리다는 뜻을 갖고 있지만 동시에 하늘이 열리고 있음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모든 기적은 하늘이 열린 사건이기 때문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존재이유가 <에파타>라는 말씀을 통해 존재의 자리를 찾는 것이다.
하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것이 귀먹어거리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지 못하는 것이 반벙어리라는 것에서 이사야의 예언처럼 “벙어리도 혀가 풀려 노래하리라”는 종말론적인 약속이 예수를 통해 실현되었음을 강조한다. 지난 주 모든 음식이 깨끗하듯, 모든 인간은 흠없이 깨끗한 자라는 것을 예수를 통해서 실현된 것이다.
그렇다면 에파타(Εφφαθα)! 예수님의 직접적인 육성(ipsissimavox Jesus )을 어떻게 들을 수 있나?
우리는 구약성서가 히브리어로, 신약성서가 그리스어로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대부분 알고 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오늘 도착한 성경은 번역의 번역을 거친 몇 번의 누군가의 입김이 쌓인 번역서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성서에 예수님 모어(mother tongue)로 알려진 아람어가 그리스어로 '번역되지 않은 채' 그대로 기록되고 그 뜻이 설명되는 몇몇 어휘들이 남아 있다.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ܐܠܗܝ ܐܠܗܝ ܠܡܢܐ ܫܒܩܬܢܝ)
에파타(ܐܬܦܬܚ) 탈리타 쿰(ܛܠܝܬܐ ܩܘܡܝ) 마라나 타(ܡܪܢ ܐܬܐ)...등등
성서학자들의 일반적인 견해에 의하면, 역사 속의 예수가 썼던 말은 아람어이며,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히브리어(구약)와 그리스어(신약)를 어느 정도 썼다고 본다. 일단 예수가 살았던 마을인 나자렛과 활동무대였던 카파르나움은 아람어가 쓰였던 지방이었으므로 아람어가 예수의 모어임에는 이론(異論)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예수가 당시 히브리어로만 되어 있던 구약성서를 읽는 구절이 성경에 기술된 것으로 보아 히브리어에 대한 지식이 상당했음을 추측할 수 있다.(루카 4장 16-17절) 또한 이방인 지역에서 주로 쓰이는 그리스어. 로마상류층이 사용하는 라틴어 등을 종합해보면 예수가 일상에서 일차적으로 썼던 말은 아람어이고, 히브리어와 그리스어를 구사할 줄 알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에파타(ephatha)!’는 예수의 모어인 아람어이다. 그리스어로 기록된 성서에 예수님 자신의 직접적인 육성(ipsissimavox Jesu)에 해당하는 에파타(ephatha)! 가 번역되지 않고 들어왔다. 번역할 수 없는 생생한 그분의 육성에서 우리는 무엇을 들어야 할까?
일단, 모어는 언제 우리가 사용하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ܐܠܗܝ ܐܠܗܝ ܠܡܢܐ ܫܒܩܬܢܝ) 에파타(ܐܬܦܬܚ) 탈리타 쿰(ܛܠܝܬܐ ܩܘܡܝ)마라나 타(ܡܪܢ ܐܬܐ)...우리가 경험하는 가장 절실하고 절박한 순간에 자신 안에서 모어는 단발마처럼 튀어나온다. 걸러져서 말해진 것이 아니라 심장에서 즉물적으로 튀어나온 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에파타(ephatha)! 예수님 자신의 직접적인 육성(ipsissimavox Jesu)을 오늘, 우리는 어떻게 알아들을 수 있을까? 그동안 수많은 병자들을 치유하면서 그 병자의 상태에 맞는 말씀이 동시에 주어졌던 것을 기억해보자. 모든 치유는 개별적인 사건이다. 치유라는 개별적인 행위 다음에 '너의 믿음이 너를 살렸다, 그러니 편안히 가라'는 보편적인 믿음에 대한 확증이 뒤따른다. 그렇기에 '에파타(Εφφαθα 열려라)' 는 치유라는 개별적인 사건이 동시에 포괄적이고 보편적인 기적이 되는 비의는 한 개인의 믿음의 결과라고 할 수 있 다. 개별적인 사건이 보편적인 사건이 되는 것이 그리스도의 치유가 보여주는 기적의 두번째 원리라고 할 수 있다.
Ⓓ36절과 37절에서 초점은 “예수님께서는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그들에게 분부하셨다.” 와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 의 치유의 평가는 치유대상자 입에서가 아니라 치유행위를 목격한 이들에게서 발화된다. 한 사람의 치유가 어떻게 보편적 사건일 수 있는가? 그것은 바로 창조의 사랑으로 수렴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청중들의 반응 가운데 <그분이 모든 것을 좋게 하셨다>는 것은 <보시니 참 좋았다> (창세기 1,31)의 대응은, 귀먹은벙어리 치유이적사화는 지금까지 나온 기적사화를 총정리하는 것으로 예수를 통해 놀라운 힘이 드러나고, 그분 안에서 하느님의 통치가 이미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 그것이 바로 창조의 사랑이다.
글의 서두에서 복음사가는 보편적 구원론을 펼쳤다는 그 의미는 다시 부연하자면, 치유는 획일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획일적이지 않은 데 보편적이 된다는 이 역설은 치유는 단지 하느님의 능력을 드러내는 것에 초점이 놓인 것만이 아니라 인간의 고유한 본성인 자유에 초점이 놓여 있음을 의미한다. 여기서 전형적인 치유이적사화라는 것은 33절에서 보듯, 예수님의 치유행위는 일괄적으로 행하지 않으셨다는 점이다. 지금 인류가 84억이라면 그 84억 한 사람 한사람에게 모두 고유의 치유행위를 하고 계시다는 것이다. 의사가 유명해지면 의사는 굳이 환자를 만나러 갈 필요가 없다. 일정한 곳에 자리잡고 그의 명성에 의하여 환자 스스로 그분을 찾아오도록 하면 된다.
그러나 그분이 먼저 당신이 필요한 곳, 이곳 저곳을 다니시며 치유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그의 고유한 인격에 맞게 치유를 하셨다는 점이다. 인격을 통해 본성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36절의 함구령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거시적인 차원에서는 하실 일이 아직 많이 남아있기 때문에 그분의 행동이 제약을(십자가의 죽음) 받으면 안 된다는 측면도 있겠지만, 다른 측면으로는 그 어떤 기적도, 치유도 획일적이고 동일하게 행사되지 않았다는 측면에서 바라볼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공장에서 나온 소모품이나 조립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어떤 사람도 같지 않다. 그것이 하느님 창조의 사랑일 것이다. 구원은 보편적이지만 구원의 방법은 모두 다른 까닭일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37절에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는 것은 바로 <보시니 참 좋았다>는 창조의 사랑과 대응된다는 점에서 그리스도의 치유는 재창조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아가 그분이 치유기적에 관한 금지령은 그분이 지상에서 하셔야 하는 ‘오늘’의 사랑을 모두 완수하시기 위함일 것이다. 그럼에도, 그럴수록, 그분의 소문은 널리 퍼진다. '저 분이 하신 일은 모두 휼륭하다'는 이 목격담은 ‘저분의 사랑은 끝이 없구나'로 바뀔 때까지 '에파타'의 열쇠가 우리에게 맡겨졌음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열어야 하는 것은 사랑에 닫혀있는 우리의 믿음이다. 이는 우리가 지금까지 했던 사랑의 반명제를 스스로 쓸 수 있는가의 여부로 연결된다.
에파타(Εφφαθα)는 누구에게나 주어진 하늘의 언어다. 그러나 그 언어를 누가 사용하는가에 따라 에파타의 진정성에 도달하는가의 여부를 가늠한다고 할 수 있다. 즉 오늘, 지금 여기서, ‘곧바로’ 이루어지는 오늘의 사랑이 되기도 하고, 그 언젠가 이루어질 유예된 사랑이 되기도 한다는 점이다.
요아킴 예레미아스는 『예수의 比喩』 (분도출판사, 1974)에서,
Ⓔ"만일 우리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원래 형태를 회복할 수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바로 비유에서 예수님 자신의 직접적인 육성(ipsissimavox Jesus )을 들을 수 있게 된다.”라고 전한다.
비유조차도 직접 들을 수 있다면 그분의 직접적인 말씀은 더욱 그 육성을 직접 들을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들을 수 있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의 품위와 본성을 비로소 알게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발터 카스퍼 추기경의 『사람아, 그대의 품위를 깨달으라』에서 그분의 육성을 듣는다는 것은 바로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한 우리의 품위라고 전한다.
Ⓕ'사람아, 너의 신비를 생각하라!' '오, 그리스도인이여, 그대의 품위를 깨달으십시오. 여러분이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 되었음을 명심하십시오!'(강론 XXI, 3)
기쁜 소식을 한마디로 표현한 위의 문장은 “에파타(ephatha)!”의 육성을 들은 사람의 상태를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그 날이 언제이든 자신 안에서 하늘과 땅이 열렸다는 '에파타'를 경험한 사람은 모든 날이 성탄이자 부활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사람이라는 자신의 품위가 무엇인지, 우리의 본성이 누구의 본성에 기인하는지 알게 된 기적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1차적으로 우리는 에파타(ephatha)! 열려라!라는 저 말씀이 함축하는 바, 듣지 못하고 닫혀있는 것은 사랑하기 어려운 우리 마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떻게 우리의 닫혀있는 마음을 열고 그분의 육성을 직접 들을 수 있을까?그것은 들을 수 있을 때. 그것을 들어야 하는 이들에게 우리도 ‘곧바로’ <에파타>를 들려줄 수 있을 것이다. 들려주지 못했다는 것은 그분의 육성을 듣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에파타(Εφφαθα)는 들음-말함의 연쇄 어령에 해당한다. 그것이 그리스어로 번역되지 않은 이유일 것이다. 에파타(Εφφαθα)를 들을 수 있었다면, 당연히 누군가에게 들려주게 된다는 것이다. 듣는다는 것은 곧 들려준다는 것은 동시에 함유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들음의 문제에서 무엇이 문제인가? 들을 수 있다면 말할 수 있다. 듣는다는 것과 말한다는 것은 거의 동시적 능력이라 할 수 있지만, 무슨 말을 할까?가 먼저가 아니라 무엇을 들어야 할까가 먼저라고 할 수 있다. 들으면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들어야 하는 목소리는 '내가 너에게 말한다', 고 하시는 바로 그분의 육성일 일 것이다. 우리는 늘 듣고 있다. 듣지 않은 순간이란 없다. 그분의 음성을 듣는가? 아님 내 에고가 속삭이는 소리를 듣는가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분의 육성은 그 사랑은 정의로운 사랑이 아니라 자비로운 사랑일 것이며, 사랑하는 이들이 '가고자 하는 그 길'을 말없이 지켜주는 사랑일 것이다. 정의를 통한 자비가 아니라 자비를 통한 정의일 것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오 16,13-23)
Ⓗ “탈리타 쿰!”이는 번역하면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는 뜻이다. 그러자 소녀가 곧바로 일어서서 걸어 다녔다. (마르코 5,21-43)
Ⓘ우리의 이 지상 천막집이 허물어지면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건물 곧 사람의 손으로 짓지 않은 영원한 집을 하늘에서 얻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압니다(2코린토5,1)
“에파타(ephatha 열려라)!”라는 이 해방의 언명은 이천년전에는 그분에 의해, 오늘은 우리에 의해서 여전히 살아 있는 치유의 언어다. 에파타가 치유의 언어가 되기 위해서 우리가 만나는 이 세계를 우리 역시 과감히 풀어주어야 한다. 그것은 내가 알고 있는 사랑의 명제를 뒤집어 보는 반명제의 길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나눠갖고 있는 베드로의 열쇠를 통해, 하늘의 축복과 땅의 축복을 아낌없이 빌어주려면 말이다 내 소원은, 바로 당신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라고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예수님 자신의 직접적인 육성(ipsissimavox Jesus)’인 ‘내가 너에게 말한다’는 이 정취의 상황에 집중해야 한다고 할 수 있다. '듣는 것은 말하는 것보다 훨씬 힘들다. 그러나 하늘과 땅을 일필휘지로 연결하는 말은 침묵보다 비교할 수 없이 더 어렵다.' 그런 맥락에서 우리 순례의 여정은 ‘에파타(Εφφαθα열려라)에서 탈리타 쿰(Ταλιθα κουμ일어나라) 까지’라고 말 할 수 있다. 그것은 그 언젠가로 유예된 사랑이 아니라 오늘 ‘곧바로’ 즉 우리게 주어진 모든 정취의 상황에서 온 인격으로 들어야 할 사랑의 언어를 듣고, 굳어진 혀가 풀려 '에파타(Εφφαθα열려라)'의 자리를 찾아 주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자신이 알고 있던 사랑의 명제를 모두 포기하는 일이기도하다. 내가 모래에 쓴 사랑이 아니라 그분이 가르쳐 주는 하늘의 언어를 받아들여야 한다. 내가 지은 내 욕망과 꿈이 지은 지상의 집이 무너지는 것을 바라보아야 한다. 나의 이미지를 포기해야 한다. 나는 좋은 엄마이고 싶고, 좋은 이웃이고 싶고, 좋은 신자이고 싶다는... 평생 좋은 무엇이고 싶다는 갈망과 질주, 그 모두가 무너져버린 그 폐허위에서 그분의 육성 <에파타>를 들을 수 있는지? 내가 지은 지상의 건물이 무너질 때, 천상의 집이 지어진다는 것을 믿는지? 예루살렘이 무너져야 예루살렘을 볼 수 있다는 역설 앞에서, 그분만이 하늘의 언어를 우리에게 들려 줄 수 있음을 믿어야 한다. 그런데 그 믿음은 사람으로서의 품위를 갖고 살고 싶다는 간절한 갈망이 있어야 할 것이다.
글을 마치며,
그때에 31 예수님께서 티로 지역을 떠나 시돈을 거쳐, 데카폴리스 지역의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갈릴래라 호수로 돌아와셨다. 32 그러자 사람들이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에게 손을 얹어 주십사고 청하였다. 33 예수님께서는 그를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셨다. 34 그러고 나서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신 다음, 그에게 “에파타!” 곧 “열려라!”하고 말씀하셨다. 35 그러자 곧바로 그의 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다. 36 예수님께서는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그들에게 분부하셨다. 그러나 그렇게 분부하실수록 그들은 더욱더 널리 알렸다. 37 사람들은 더할 나위 없이 놀라서 말하였다.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 귀먹은 이들을 듣게하시고 말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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