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피캇(Magnificat)

존재의 무게, 완벽주의자의 고독의 물질성에 ‘십자가’는 있는가?

나뭇잎숨결 2024. 8. 30. 06:55

 

순애데레사가 탱큐!

 

존재의 무게, 완벽주의자의 고독의 물질성에 십자가는 있는가?

-연중22주,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킨다”를 중심으로

 

 

 

 

 

1. 누군가의 죽음에 빚진 목숨이여!(복효근)

 

 

복효근의 「누우떼가 강을 건너는 법」을 읽어본다.

 

건기가 닥쳐오자/풀밭을 찾아 수만 마리 누우떼가/강을 건너기 위해 강둑에 모여 섰다/강에는 굶주린 악어떼가/누우들이 물에 뛰어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때 나는 화면에서 보았다/발굽으로 강둑을 차던 몇 마리 누우가/저쪽 강둑이 아닌 악어를 향하여 강물에 몸을 잠그는 것을/악어가 강물을 피로 물들이며/누우를 찢어 포식하는 동안/누우떼는 강을 다 건넌다/누군가의 죽음에 빚진 목숨이여, 그래서/누우들은 초식의 수도승처럼 누워서 자지 않고/혀로는 거친 풀을 뜯는가/언젠가 다시 강을 건널 때/그중 몇 마리는 저쪽 강둑이 아닌/악어의 아가리 쪽으로 발을 옮길지도 모른다

 

아프리카 초원에 사는 누우(gnu)는 소과에 속하는 포유동물이다. 그들은 풀을 찾아 이 초원에서 저 초원으로 이동한다. 머나 먼 거리를 이동하다보면 강이 가로막게 되고 건너야 되는 그 강물엔 악어떼가 우글거린다. 과연 누우는 무슨 수를 써서 강을 건너갈 것인가?

 

시인에 따르면 아마도 누우 떼들은 몇 마리의 누우를 악어들에게로 보내고 악어들이 그 누우들을 포식하는 동안 누우떼가 유유히 강을 건너는 모양이다. 시인은 희생물이 된 누우 떼들에 대하여 "누군가의 죽음에 빚진 목숨이여, 그래서 /누우들은 초식의 수도승처럼 누워서 자지 않고 /혀로는 거친 풀을 뜯는가"라고 찬탄해 마지않는다.

 

복효근의 「누우떼가 강을 건너는 법」은 그 독해가 여러 가지로 갈린다. 복효근의 「누우떼가 강을 건너는 법」은 '누군가의 죽음에 빚진 목숨이여!'로 모아지는, 인-파이터의 시이기 때문이다.

 

집단을 위해 개인의 희생을 강요하는 사회에 대해, "나는 아름다운 독배를 거부한다"(안병기)라고 이 시를 읽을 수도 있다. 전체주의에 희생된 개인이라는 강요되고 집단무의식된 희생컴플렉스로 읽을 수도 있다. 누군가는 내가 죽어야 네가 살고, 네가 죽어야 내가 산다는 것을, 도킨스는 불멸의 이기적 유전자 때문(도킨스)이라고 보기도 한다. 이기적 유전자의 이타적 행위를, 동양에서는 천지불인(天地不仁) 자연무심(自然無心)으로 읽기도 한다.

 

또 내가 죽어야 네가 살고, 네가 죽어야 내가 산다는 것, 그것이 생명의 법칙으로 읽을 수도 있다. 삶은 죽음을 딛고 사는 것. 삶이란 끊임없이 누군가의 죽음에 빚져야 하는 것. 생명은 그렇게 역설적인 것이며. 그것이 복효근 시가 보여주는 자연이고, 자연으로 보여주는 인간세계의 한 단면이다. 타자윤리의 근거는 곧 자연으로 연역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우리가 풀어야 할 존재의 무게게라고 할 수 있다.

 

 

 

 

 

 

순애데레사가 탱큐!

 

 

 

2. “철학은 충격과 망설임에서 시작된다”(임마누엘 레비나스)

 

 

 

타자윤리학 하면 떠오르는 엠마누엘 레비나스는 “철학은 충격과 망설임에서 시작된다”고 말한다. 왜 그에게 철학은 충격이고 망설임이었을까? 레비나스는 철학이든, 사랑이든 타자의 얼굴을 상정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철학은 관념이 아니라 철저하게 타자를 아는 길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타자는 미래다!라는 명제에서 엠마누엘 레비나스는 <타자의 얼굴- 얼굴론>을 통해 ‘존재의 무게’가 무엇인지 평생 추구했던 철학자다. 하이데거의 형이상학을 비판하며 자신은 무신론자라고 주장했던 그는 누구보다 <십자가>의 의미를 잘 알고 있었던 찰학자다.

 

레비나스는 서양철학과 전쟁 사이에 유사성이 있다고 보았다. 타자를 주체에 흡수해온 서양철학의 전통이 상대를 말살하려는 전쟁과 전체주의에 길을 열어주지 않았느냐는 문제의식이다. 여기에는 유대계 철학자로서 그 자신이 독일군에게 포로로 수용되고, 가족과 지인의 죽음을 목격한 경험, 즉 국가사회주의의 출현과 2차 세계대전 발발에서 그가 철학자로서 받은 충격은 바로 <타자> 였다. 인간은 타자로부터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이다. 타자가 나의 근거이기 때문이다.

 

레비나스는 파르메니데스부터 하이데거까지, 서양철학이 ‘타자의 흡수’를 지양해왔다고 비판했다. 타자가 없는 형이상학으로 서둘러 넘어갔다는 것이다. 타인의 타자성을 이해할 수 있는 정도로 축소한 후 흡수하여 주체의 근거를 확립해왔다는 것이다. 이때 타자는 도구일 뿐이다. 레비나스에게 철학의 역사에서 ‘타자의 흡수’는 곧 타자성의 삭제였다고 바라본 것이다. 레비나스 사유의 독창성은 그가 철학이 주체를 개념화해온 방식을 비판하면서도 주체성을 부정하지 않았다는 데서 출발한다. 레비나스는 자아나 주체성을 소멸시켜야 한다는 주장에 강력히 반대했다. 대신 타인을 수용하고 환대하는 주체성, 타인의 고통을 대신 짊어지는 주체성을 모색했다. 서양철학의 전통과 과감히 단절하면서도 포스트모던 철학과는 거리를 두어 자신만의 길을 제시한 것이다.

 

레비나스는 주체의 내용을 기존과는 다른 방식으로 채우기 위해 ‘존재론적 모험’을 시도한 것이다. 출발은 ‘홀로서기’다. 주체의 홀로서기는 존재의 익명성에 매몰되지 않고 존재를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데 고독의 물질성이 수반된다. 타자를 배제한 홀로서기는 흠없는 나무처럼 매끈하다. 그것은 홀로서기가 아니라 물질로 자신을 환원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타자윤리학을 상정하는 순간 우리는 매끈한 삶을 살 수 없다.

 

레바나스의 주 저서, ① 『존재에서 존재자로』(1947), ②『시간과 타자』(1947), ③ 『전체성과 무한』(1961), ④『존재와 다르게 본질 저 편으로』(1974), ⑤ 『윤리와 무한』(1982)에서 일관되게 타자윤리학을 주장한다.

 

레비나스는 사람은 어떻게 자족적 실체인 '코나투스'의 상태에 도달하고, 동시에 그곳에 계속 머물러 있을 수 없는 존재인가를 질문한다. 즉 어떻게 나는 나의 삶의 태도를 바꾸어 타자를 내 존재의 무게중심으로 삼을 수 있는가를 고민했던 철학자이다.

 

레비나스는 하이데거 철학의 극복을 통해 ‘나’를 하나의 질문으로 바라본다. ‘나’란 막연하게 ‘있다’는 사실이자, 사건이므로 <나>는 나를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서 그의 타자론은 시작된다. 그의 철학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나-있다>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를 바라보기 위해 <유한자의 존재-홀로서기-고독의 물질성-코나투스- 빛의 소환-고통과 죽음-타자의 소환-다원주의-초월>등을 통해 타자윤리학이 지향하는 형이상학적 욕망의 다리를 놓고 있다.

 

①존재는 그 자신으로 가득차 있다. 그는 그 자신의 모든 것을 짊어지고 다닌다(41)빛은 플라톤 이래 모든 존재의 조건이다(76)감각과 미학은 사물 자체를 생산한다(87)있음이 만들어 내는 가벼운 소리 그것이 공포다(97)익명적인 있음 속에서 주체는 스로를 확립한다.(『존재에서 존재자로』,1947)

 

이렇게 나의 있음이 공고히 되었을 때 나타나는 것이 홀로서기이자, 고독의 물질성이다. 내가 나 홀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은, 서양 철학의 전통인 사유가 아니라 경제가 기반이 된 자족적 실체 때문이고, 그것을 <코나투스적 존재론>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또는 <향유적 무아경>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타자와 얽히지 않는 깔끔한 홀로서기의 존재론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 인간은 노동을 하고, 자신의 집을 짓게 된다. 그것이 노동이자 소유를 정초하는 집이기 때문에, 집이 거둬들이고 보관할 수 있는 이동 가능한 것들과 동일한 의미에서의 레비나스에게 집은 소유물은 아니다. 집이 소유되는 것은, 집이 이미 그 소유자를 환대하기 때문이라고 본 것이다. 이것이 집의 본질적 내면성으로, 모든 정주자에 앞서 그 집에 정주하는 정주자로, 진정으로 누군가를 맞아들이는 자로, 맞아들이는 자 그 자체로, 인간은 무의식적으로 향유적 존재 안에는 환대적 존재가 자리한다고 보았다.

 

②존재의 무게(...)아픔과 괴로움과 고통 속서 우리는 고독의 비극을 형성하는 결정적 요소를 가장 순수한 모습으로 다시 보게 된다. 이 결정적 요소는 향유의 무아경으로을 통해서도 끝내 극복할 수 없는 것이었다. 고통꽈 죽음은 타자의 현현과 마찬가지로 계산할 수 없는 미래다. 타자는 타자라로써 높음과 비천함에 스스로 처해 있다. (『시간과 타자』,1947)

 

그런데 인간은 나라는 존재의 무게, 빛만을 감당하는 것이 아니다. 나 홀로 존재하기 위해 자족적 실체의 환경을 만든다는 것은 불가피하게 유한한 자본과의 투쟁을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향유적 무아경에서 빛만을 초대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일하기 싫은 사람은 먹지도 말라>는 명제로 정식화한다. 이로써, 인간은 만인의 만인에 투쟁 속에 살게 되고, 고통과 죽음에 직면한 시간의 주인이라는 것과 마주하게 된다. 고통과 죽음은 인간의 무기력, 무력함, 불가항력의 환경 앞에 자신을 세우게 된다. 여기서 향유의 존재론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환대로써의 존재론이 표면화 된다. 타자를 받아들이기 된다. 타자와 고통과 죽음은 그 전모를 알 수 없다는 점에서 <신비>라는 공통분모를 지닌다.

 

③다원론은 타자의 근본적 타자성을 전제한다. 이 타자성은 내가 단순히 나에 대한 관계에 따라 떠올리는 타자성이 아니라, 나의 에고이즘으로부터 출발해서 내가 마주하는 타자성이다. (『전체성과 무한』, 1961)

 

그런데 타자는 우리는 <하나다>로 단순하게 환원될 수 없는 나와는 다른 얼굴을 지닌 존재, 알 수 없는 신비처럼 마주한다. 더욱이 타자성은 나에게 주인과 하인의 관계, 섬김의 관계를 요구한다. 자신을 돌볼 책임을 요구한다. 타인의 타자성은 그에게 있지, 나에 대한 관계에 따라 있지 않기 때문이다. 타인의 타자성은 스스로를 계시한다. 하지만 내가 타인의 타자성에 접근하는 것은 나로부터 출발하는 것이지, 나와 타자의 비교에 의한 것이 아니다. 내가 타인의 타자성에 접근하는 것은 내가 그와 함께 유지하는 사회로부터 출발해서지, 나와 타자라는 항들을 반성하기 위해 이 관계를 떠남으로써가 아니다.

 

④내 책임에 명해졌지만 내가 놓친, 잘못한 그-자신의 흔적, 그의 죽을 수밖에 없음이 내 책임이고 내가 살아남은 것이 내 죄인 듯한 그의 흔적?-?이것이 얼굴이다. 얼굴은 직관적 지향의 올곧음에 주어진 이미지의 직접성보다 더 팽팽한 무시원적 직접성이다. 근접성 속에서 절대적인 타자,  “내가 배지도 낳지도 않은” 이방인인 그를 나는 이미 두 팔로 안은 셈이다. ( 『존재와 다르게 본질 저 편으로』, 1974)

 

여기서 타자의 얼굴이 왜 낯선지? 그것이 무엇인가가 떠오른다. 레비나스의 사상에서 자주 언급되는 얼굴은 눈 색깔, 코의 형태, 뺨의 불그스레함 따위가 아니라 신의 말이 울려 퍼지는 방식으로의 얼굴이다. 신(무한)의 말로 격상되는 얼굴과의 관계는 초상화와 같은 조형적 형태가 아니라 처음에 타인이 나와 무슨 관계인지를 묻지 않는 비대칭적 관계이고, 절대적으로 약하고, 벌거벗은 것과의 관계이며, 극도의 외로움을 겪는 것과의 관계다. 양심을 건드리는 관계이며, 정의를 요구하는 관계이다.

 

⑤윤리는 자아를 통한 자아의 주권의 자리 없음에서, 가증스러운 자아의 양태에서 의미하지만 또한 어쩌면 영혼의 정신성 그 자체, 그리고 확실히 존재의 의미 곧 자기 자신을 정당화하라는 존재의 부름에 대한 물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윤리는 무조건적이고 심지어 논리적으로 분간할 수 없는 동일성의 절정 곧 모든 기준 너머에 있는 자율의 절정에서 나로 불리는 동일성의 애매성을 통해 그러나 바로 이 무조건적인 동일성의 절정에서 또한 자기가 가증스러운 자아임을 고백할 수 있는 동일성의 애매성을 통해 의미한다.”(『윤리와 무한』, 1982)

 

그렇기에 타자의 얼굴 앞에서 우리는 윤리적 존재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된다. 윤리란 “인간적인 것으로서의 인간성”이고 “인간이 자기보다 타자에게 우선권을 줄 가능성”이다. 예컨대, 성서에서 동생 아벨을 죽인 형 카인이 유지한 입장, 즉 나는 나이고 그는 그이다, 라는 존재론적 분리에 결핍된 것이 바로 윤리다. 레비나스는 윤리를 이렇게 정의한다.

 

이 윤리 또는 윤리적 관계가 레비나스는 지향적 의식이라고 부른다. 레비나스는 지식과 지배와 함께 정립되는 존재 안에서의 정립의 정의(justice) 그 자체인 지향적 의식 대신에 비지향적 의식, 즉 처음부터 타자의 얼굴에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의식을 경험한다. 이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의식이 바로 '내가' 되는 것이며, 동시에 그렇기 때문에 나로서의 나의 존재에 대한 긍정 속에서 나의 <존재할 권리>를 책임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너를 섬기면서 내가 누군지 알게되는 것!

 

여기서 무한이란 개념이 나온다. 무한의 관념은 타자와 관련한 동일자의 분리를 전제한다. 그러기에 타자와의 평화가 모든 것에 앞선 나의 일이 된다. 네가 평화롭지 않으면 나는 무조건 평화롭지 않다. 네가 평화로울 때만 너를 떠날 수 있다. 이별을 허락하지 않는 관계, 무관심하지-않음, 말함, 책임, 다가감은 책임질 수 있는 유일한 자, 종속이 나의 해방이다. 그러기에 내가타자 앞에 출현하는 방식은 '출두'다. 나는 격변화할 수 없는 '소환의 수동성' 속에 그냥 나를 위치시킨다. 이것이 나 자신이다.

 

타자에 대해 나는 책임이 있고, 이 타자 앞에 나는 책임으로 있다. “내가 여기 있습니다”라고. 타인은 이렇게 나를 강박하는 이웃이며, 이미 얼굴이며, 비교할 수 있는 것인 동시에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는 유일한 얼굴이자, 다른 얼굴들과 관계하는 얼굴, 정확히는 정의에 대한 염려 속에서 가시적인 얼굴인 것이다.

 

만약, 이것을 사랑이라 부른다면, 레비나스는 이 문제를 두 가지로 압축한다. 첫째, 신-인간 사상은 신의 낮아짐,  “가느다란 침묵의 목소리처럼 자기의 비천함에서 나타나는 진리의 관념, 곧 박해받은 진리의 관념”으로서 “초월의 가능한 유일한 형태”라고 말한다. 구체적으로 신은 얼굴과 결합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신은 동화할 수 없는 타자성, 절대 차이이다. 신은 절대적으로 지나간 흔적이다. 그 흔적은 나의 이웃의 얼굴에서의 신의 근접성이다. 둘째, 신-인간 사상은 창조주의 피조물로의 실체변화로서 동일성의 원리를 훼손하는데 어느 정도 타자들을 위한 대속과 속죄, 인간의 인간성을 표현한다. 그것은 내 안에 시작하는 존재 안에서의 이 절정―‘자기의 존재를 보존하는’ 존재의 전복―이다.”

 

그렇다면 레비나스 타자론에서 사랑과 정의, 자비는 무엇인가. 얼굴과 유일한 타인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구성인 정의는 사랑에서 나오며, 정의와 자비는 낯설어 보이지만 분리할 수 없고 동시적이다. 정의는 자비가 없다면 변질되고 자비는 정의가 없다면 불가능하게 된다. 사랑과 정의, 자비는 동시에 출몰하는 타자론이다. 레비나스는 구체적으로 경제 정의의 활동이 정신적 존재의 서막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정신적 존재를 완성한다고 주장한다. 낯선 얼굴의 타자론을 전제로 한 레비나스의 사상은 우리를 불편하게 만들기에 찬사와 비난에 모두 열려 있다.

 

 

 

 

 

 

 

 

3.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킨다.> 마르코 7,1-8.14-15.21-23

 

 

Ⓐ그때에 1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예수님께 몰려왔다가, 2 그분의 제자 몇 사람이 더러운 손으로, 곧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을 보았다. 3 본디 바리사이뿐만 아니라 모든 유다인은 조상들의 전통을 지켜, 한 움큼의 물로 손을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않으며, 4 장터에서 돌아온 뒤에 몸을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않는다. 이 밖에도 지켜야 할 관습이 많은데, 잔이나 단지나 놋그릇이나 침상을 씻는 일들이다. Ⓑ5 그래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어째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 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사야가 너희 위선자들을 두고 옳게 예언하였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7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8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14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다시 군중을 가까이 불러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모두 내 말을 듣고 깨달아라. 15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 21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22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 23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

 

 

 

연중 22주,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킨다.>라고 전하는 마르코 7,1-8.14-15.21-23 (마태오15, 1-20)은 <애주애인>이라는 하느님 법과의 대척점에서 거론되는 인간의 전통에 대한 논쟁으로, 예수님 시대의 종교와 반종교의 행태에 관한 것으로 국한하여 바라볼 수 없다.

 

복음 묵상은 언제나 <오늘> 우리의 현주소를 묻는 것이 때문이다. 21세기 종교인으로 자처하는 이들 안에서 자행되는 하느님 계명의 본질과 비본질이 무엇인가하는 질문이 <오늘> 우리에게 넘겨졌다고 할 수 있다. 마음과 행위의 법칙이 무엇인가를 성찰하는 것은 모든 시대, 모든 종교인들에게 주어진 성찰의 공통주제, 열정의 방향이기에 그렇다.

 

마르코복음사가는 예수께서 갈릴레아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서 점점 거세지는 세 번의 논쟁을 공간화하여 보여준다. 갈릴레아 출신들(2,1-3,60)과 예루실렘에서 내려온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7,1-23)과, 그리고 예루살렘종교지도자들(11,27-12,34)과의 논쟁은, 예수에 대한 반대가 결국은 십자가의 죽음으로 귀결되었음을 전한다. 율법준수 논쟁은 결국 예수의 십자가 죽음으로 귀결되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는 본질과 비본질에 관한 명제는 예수님 시대의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를 비판하는 수준에서 끝날 수 없음을 시사한 것이다. <오늘도> 십자가 사건은 진행 중인 사건이기에 그렇다. 그것도 예수를 믿는 종교인들 안에서 말이다. 그렇기에 우리 마음에 담겨있는 본질과 비본질이 무엇인가를 철저하게 성찰할 것을 요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법과 다른 세상의 조류를 비판하기는 쉽지만, 종교를 가진 자기 자신을 냉정하게 하느님의 법, 애주애인 앞에 자신의 삶을 고스란히 성찰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쉽지 않다. 자신을 의인이라고 자처하는 이들은 신앙인에게 가장 중요한 이 성찰을 비껴같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다. 

 

마르코는 복음서중 유일하게 유대인들의 정결예법 가운데 손씻는 전통을 자세히 다루고 있다. 이는 아마도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을 대상으로 선교의 최일선에 있었던 복음사가의 체험, 바오로와 베드로의 최측근이었던 그가, 초기교회 바오로와 베드로의 갈등을 알고 있었던, 복음사가의 문제의식과 닿아 있다고 할 수 있다.(사도10,9-16/ 11,5-10/ 로마14,13/ 갈라디아2,11-14)

 

유다인들은 바빌로니아 유배를 겪은 후, 유배의 원인을 사회-역사-종교적인 역학관계로- 즉 총체적인 관점으로 바라보지 않고, 하느님과의 관계, 즉 선민사상의 관점에서 자아성찰을 했다. 그것이 율법준수의 제의적 근거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렇게 철저한 반성위에 도출된 율법준수가 오히려 하느님과 멀어지는 결과를 낳았다는 것이 무엇을 시사하는가? 그들이 진단한 유배의 원인, 성찰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었다. 성찰한 내용을 실천할 때, 성찰의 방향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간과했다는, 그들의 문제가 바로 <오늘> 모든 종교인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 초점이다.

 

기원전 2세기에 유대사회가 분석한 유배의 원인은 대략 세 가지 정도였다. ⑴하느님의 계약을 충실히 지키지 못한 부정, ⑵하느님의 정의를 실천하지 못한 부정, ⑶하느님의 거룩함을 더럽힌 부정 등으로 유배의 원인을 진단하고 분석했다. 유배 이후에 형성된 유대사회는 이 분석에 기초해 하느님 앞에서 “거룩한 백성이 되어야 한다”(레위기20,7)는 것이 근본규범으로 자리 잡기에 이른다. 성찰 자체는 본질을 짚었으나 그러나 그들의 행위는 성찰과 반대로 비-본질로 흘러갔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 마르코 7,1-8.14-15.21-23에게 우리에게 던지는 묵직한 성찰의 주제라고 할 수 있다.

 

유대시회는 모세의 율법 중 248개의 행령(行令)과 365개의 금령(禁令) 모두를 똑같은 비중으로 여겼다. 613개의 행령과 금령을 어김없이 지켜 다시는 유배의 아픔을 겪지 않으려 했던 그들이 간과했던 것은 그릇된 열정의 방향이 비본질을 본질로 착각하게 하는 인간의 욕망을 건드려 그들은 여전히 유배상태라는 것을 1차적으로 우리에게 전한다.

 

바리사이들은 기원전 2세기경에 생겨난 이민족에 동화된 이들과 반대로 순수혈통으로 신앙갱신운동의 참여한 구성원들로써 그들은 신앙의 순수혈통이자 부유한 계층에 속했다. 그들은 유대사회의 전통인 이 정결법을 시나이산의 계명과 비견하며 동일하게 그 권위를 주장하였다. 전통을 지키는데 철저해 율법의 율타리라고 부르기조차 했을 정도였다. 바리사이파는 613개의 율법이 모두 모세의 시나이산의 율법에서 근거했다고 주장하며 율법의 시행세칙들을 점점 늘렸다. 율법이 무거운 짐이 되면서(마태오23,4) 유대사회는 다시 차별과 분열을 자초했다. 다시금 그들 스스로 하느님과 멀어진 신앙의 유배자가 된 것이다. 역사적 유배자에서 신앙의 유배자가 된 것이다. 이름만 달랐지 그들은 여전히 유배 상태였다고 할 수 있다.

 

이에, 예수께서는 어떤 인간의 법도 하느님의 법과 동등할 수 없다고 밝히시면서 인간의 법으로 하느님의 법을 대체하면서 하느님의 법을 무력화 시켰다고 그들을 비판하신다(골로사이2,22) 바리사이파나 율법학자들을 향해, 스스로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고 다른 이들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이며, 위선자이며, 진복팔단의 대척점에 서 있는 자들로 불행하여라!라고 불행선언을 하기에 이른다. 예수의 선언은 하느님의 계명과 인간의 전통을 갈라놓으며 고백적 차원의 신앙과 진심으로 섬기를 공경을 구분하신 것으로, 예수께서 십자가형에 처하는 결정적인 빌미를 종교지도자들에게 제공한 것이다.

 

바리사이와의 논쟁 이후에 예수는 청중을 대상으로 진정으로 거룩함(깨끗함)이란 무엇인가를 반복하여 가르치신다. 깨끗함과 더러움 자체를 없앤 것이 아니라, <거룩함>은 몸의 문제가 아닌 마음의 문제로 보신 것이다. 바리사이파가 정결을 제의적 행위로 바라보았다면 예수는 그 행위에 깃든 속마음이 거룩함의 실체라고 본 것이다. 네 마음 깊은 곳에 네 신앙이 있다는 명제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바오로가 코린토 전서13장에서 설파한 열정의 방향, 사람의 행위 깊은 곳에서 무엇을 지향하고 무엇을 본질로 삼고 있는지를 문제 삼은 것이다. 즉 거룩함의 문제는 마음의 문제라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은 선과 악의 갈림길이라는 점에서 사탄, 마귀, 악을 세상의 문제로 국한시키지 말라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예수가 율법을 폐기한 것이 아니라 율법을 완성하러 왔다는 맥락에서 율법의 근본의도는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우리에게 던진 셈이다. 이는 깊은 데로 저어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루카5, 4), 저에게 축복해 주시지 않으면 놓아드리지 않겠습니다(창세기32, 27)라는 맥락과 어떻게 닿아있는지, 성찰해야할 주제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마태 5,17-19).”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신명기 6,5)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레위기 19,18)는 것이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마태22,37-40)

 

마태오는 마르코와 같은 맥락에서 행위의 준칙이 언제나 <애주애인>에 있음을 강조한다. 그것이 깊은 대로 배를 저어나가는 것과 다르지 않으며, 마르타(활동)와 마리아(관상)를 통합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자기의 마음을 알기 위해 밤새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기 위해서, 천사와 씨름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율법 교사는 예수님께 가장 큰 계명인 하나의 계명이 무엇인지를 물었을때, 예수님께서는 두 계명인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첫째와 둘째는 중요도의 순서가 아니라 '나열된 순서'라는 것이다. 이 나열은 '가장 큰 계명이 하나가 아니라 둘이라는 역설'이다. 예수님의 이 역설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결코 분리될 수 없는, 분리되어서는 안 되는 하나의 사랑'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서민기 신부)

 

율법의 근본인 <애주애인>은 분리돨 수 없다는 것은 우리에게 <거룩하다>의 근거, 행위의 법칙안에 언제나 <애주애인>이 있는가? 하는 것을 물었다고 할 수 있다. 율법자체를 거룩함이라고 바라보는 것은 사실은 하느님도 이웃도 없고 행위로 하느님과 딜을 하고, 타인에게 의인으로 보이고 싶은 자아만족 혹은 자아 도취, 자신의 홀로서기, 즉 고독의 물질성이라고 할 수 있겠다. 완벽주의를 지향하는 자기예찬의 미망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킨다.> (마르코 7,1-8.14-15.21-23)라고 전하는 하느님의 계명과 사람의 전통이라는 이 대척적인 관계의 초점이 분명히 드러난다. 그것은 우리의 행위가, 우리의 열정이 무엇을 전제하고 있는가? 하는 것으로 수렴된다고 할 수 있다. 사람의 전통을 지켜서 하느님을 만나면 좋지만 그럴수 없다는 것이다. 행위는 언제나 마음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생각과 말과 행위>는 그 순서를 바꿀 수 없다. 그것은 행위를 유발한 우리 자신의 무의식까지 문제삼았다고 할 수 있다. 행위로 가려지고, 윤색되고, 과장된 그 마음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다. 순수한 감사와 비교의 감사는 다른 것처럼, 행위를 유발할 그 마음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하느님 앞에서 그 누구도 스스로 의인인 사람은 없다. 이 성찰의 주제는 정의를 실현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유대인들이 바빌론 유배의 체험을 분석한 그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닌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 유배의 현장에서 벗어나기 위해 하느님을 불러야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유배 기간 중에도 그들은 하느님을 만났어야 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내게서 마음이 떠나있다>  <사람을 더럽힌다>는 것은 같은 맥락의 공경의 의미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는 것에서 그렇게 바라볼 수 있다.

 

그렇다면 신앙인에게 신앙의 <유배>의 표지는 무엇인가, 이는 자신의 <한계와 무능, 실패와 좌절, 죽음과 절망>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야 한다는 것, <아래로부터의 영성>을 말한다.

 

Ⓑ“어째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 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사야가 너희 위선자들을 두고 옳게 예언하였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7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8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14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다시 군중을 가까이 불러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모두 내 말을 듣고 깨달아라. 15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 21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22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 23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

 

Ⓑ, Ⓒ에서 보여주는 열정의 방향, <거룩하다>  <애주애인>의 하느님 법은 유배중에 있든 유배를 벗어났든 그 어떤 공간에 좌우되는, 상황에 좌우되는 행위의 법칙이 아니라, 마음의 법칙이라는 것을 역설한다. 유배지에 있는 이들에게 어떤 처지에서든 감사하고 기뻐하라고 전한 이유가 그것이다. 

 

열정의 방향은 자기 마음의 행로를 보여준다는 이 대응에 대해 인간은 언제나 스스로 자신의 정체를 규정한다는 신자정체성과 닿아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시대의 종교의 배타성, 선민의식에 대한 성찰의 주제에 대해 안셀름 그린 신부는 『아래로부터의 영성』에서 진정한 겸손이 바로 <거룩함>의 실체라고 전한다.

 

스스로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완벽주의로는 결코 하느님을 만날 수 없고, 따라서 타자를 만날 수 없다는 말이다. 십자가의 길은 아름다운 길이 아니라는 점이 그것을 말한다. 인간이 가장 가고 싶지 않은 길을 걷는 것이, 가장 지고 싶지 않는 타자를 짊어지는 것이 십자가의 길이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길을 걷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부활은 다만 고백적 차원으로만 즉 말로만 말하게 된다는 것이다.은 데로 나아가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으라는 것은 네 십자가를 지고 하느님 나라를 전하라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아래로부터의 영성>을 겪지 않고, 깊은 데로 나아가 그물을 던질 수 없다. 또 야곱처럼 에사오(세상)가 무서워 밤새도록 축복을 받기 위해 천사와 겨룰 수도 없다는 일침이다. 신앙인이 언행일치를 해야한다는 것은 그 행위의 방향을 뒤틀지 말라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칼 라너는 자신의 한계와 무능 안에서, 실패와 좌절 안에서, 절망과 죽음 앞에서 하느님을 만난다는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한다.(안셀른 그린 신부, 『아래로부터의 영성』에서 재인용)

 

"우리가 세상 삶에서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거나 사람의 고통을 많이 느낄 때에 하느님을 사랑하려고 시도한 적이 있는가? 그리고 죽음과 절대적인 허무(虛無)에 사로잡혔을 때, 아무 응답도 없고 텅 비어 있는 것처럼 느끼거나 밑바닥이 보이지 않는 끝없는 나락으로 추락하는 거 같고 모든 것이 파악불가능하고 의미가 없어질 때, 하느님을 사랑하려고 한 적이 있는가? 손으로 잡을 수 있고, 설명할 수 있을 것 같고, 사용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가라앉거나 모든 것이 몰락과 죽음의 세계로 빠져든 것처럼 여겨질 때, 그리고 모든 것이 특별한 색깔이나 특징도 의미도 없는 세계로 접어드는, 바로 그러한 때 성령이 우리 안에서 활동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때가 은총의 시간이다. 밑바닥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심연을 가진 존재로 경험하는 우리의 실존은 바로 그러한 때에 하느님의 무한성을 의미하는 것이 된다. 하느님은 무한하시기 때문에 그 깊이를 다 알 수 없는 무(無)와 같은 모습으로 우리에게 체험되는 것이다."

 

칼 라너와 안셀름 그린 신부는 묻는다. 지옥에서 하느님을 만나지 못했는데, 천국에서 하느님을 만날 수 있겠는가? 이는 <아래로부터의 영성>에서 걱정과 불안 두려움, 상처와 아픔, 실패와 절망, 허무와 죽음은 모두 의미가 있다고 본 것이다. 그것은 상처 속에서만 진주가 만들어진다는 자연의 이치와 같다. <아래로부터의 영성>에서 <위로부터의 영성>으로 넘어가지 않는 신앙의 열정은 십자가 없는 부활을 탐닉하는 것이고, 따라서 그는 하느님의 길이 아니라 열정을 지닌 실존주의의 길을 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표면적으로는 참으로 잘 살았던 실존주의자들이 결국 자살을 선택한 이유가 무엇인가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저 집은 저렇게 불행한데 우리 집은 이렇게  말짱해서 참으로 감사하다는 기도의 출처는 어디인가? 저 사람은 늘 저렇게 라자로처럼 구걸하면서 사는데 나는 참으로 누구에게도 굽힐 필요가 없는 부자로구나!의 감사의 기도가 모두 하느님께 상달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십자가를 모르기에 부활을 알 수 없다. 행위의 법칙에 <애주애인>을 삭제하고, 스스로 <나는 의인이다>, <나는 거룩하다>, <나는 완벽하다>는 자기 중독 내지는 자기 예찬의 홀로서기는 그렇기에 고독의 물질성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고독은 사람이 없는 고독이 아니다. 사람과 자신을 차별화하는 고독이다.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공』에서는 <굴뚝 청소를 하기 위해 굴뚝 안으로 내려간 모든 사람은 모두 검은먼지를 뒤집어쓰고 나올 수밖에 없다> 말한다. 이는 하느님과 행위로 천국을 거래할 수 없다는 말과 상통한다.

 

자신의 이미지를 내려놓고, 자신의 이름을 지워야 하는 <몰아의 사랑> 앞에, <이만큼이면 충분했어>라는 사랑의 상한선을 스스로 긋는 한, 사실 십자가는 없다. 십자가가 없다면 부활도 없다. 따라서 마르코가 전하는 복음 묵상이 이천년의 바라시아나 율법학자를 비판하자는 것이 초점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는 것을 진정 전인격으로 받아들이고 사는지? 정말 <무한을 알고 있는지>, <영원한 생명이고자>하는 갈망이 있는지 물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주님! 주님! 부른다고 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며, 하느님의 적은, 예수님을 오늘도 십자가에 못박는 안티-크리스트는 저 세상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주님을 부르는 교회 안에 있다는 엄중한 경고라고 할 수 있다. 내 마음 안에 모든 것이 있다는 무거운 성찰 앞에, 모든 종교인은, 종교의 열정은, 회사에 출근하는 것처럼 출근 바코더를 찍는 것이 아님을 기억하라는 말이다. 즉 자기 열정의 방향이 무엇인가를 성찰할 것을 주문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애주애인>이 바로 모든 종교인의 존재의 무게, 십자가이기 때문이다.

 

 

 

 



 

 

글을 마치며,

 

Ⓐ그때에 1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예수님께 몰려왔다가, 2 그분의 제자 몇 사람이 더러운 손으로, 곧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을 보았다. 3 본디 바리사이뿐만 아니라 모든 유다인은 조상들의 전통을 지켜, 한 움큼의 물로 손을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않으며, 4 장터에서 돌아온 뒤에 몸을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않는다. 이 밖에도 지켜야 할 관습이 많은데, 잔이나 단지나 놋그릇이나 침상을 씻는 일들이다. Ⓑ5 그래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어째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 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사야가 너희 위선자들을 두고 옳게 예언하였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7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8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14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다시 군중을 가까이 불러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모두 내 말을 듣고 깨달아라. 15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 21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22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 23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