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피캇(Magnificat)

사랑은 나보다 내 마음이 먼저 도착해서, 나를 기다린다!

나뭇잎숨결 2024. 8. 24. 06:48

 

사진작가 분이가 탱큐!

 

사랑은 나보다 내 마음이 먼저 도착해서나를 기다린다!

-연중21주,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를 중심으로

 

 

 

 

 

1. 고정희, 「더 먼저 더 오래」

 

 

 

더 먼저 기다리고/ 더 오래 기다리는 사랑은 복이 있나니/저희가 기다리는 고통 중에/ 사랑의 의미를 터득할 것이요//더 먼저 달려가고/ 더 나중까지 서 있는 사랑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서 있는 중에/ 사랑의 길을 발견할 것이요//더 먼저 두드리고 더 나중까지 그리워/애통하는 사랑은 복이 있나니/저희가 그리워 애통하는 눈물 중에/ 사랑의 삶을 차지할 것이요//더 먼저 외롭고/ 더 나중까지 외로움에 떠는 사랑은 복이 있나니/저희가 외로움의 막막궁산 중에/ 사랑의 땅을 얻게 될 것이요// 더 먼저 상처받고/ 더 나중까지 상처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랑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상처로 얼싸안은 절망 중에/ 사랑의 나라에 들어갈 것이요// 더 먼저 목마르고/ 더 나중까지 목말라 주린 사랑은 복이 있나니/저희가 주리고 목마른 무덤 중에서라도/사랑의 궁전을 짓게 되리라// 그러므로 사랑으로써 씨 뿌리고 열매 맺는 사람들아/ 사랑의 삼보 상처와 눈물과 외로움 가운데서/솟은 사랑의 일곱가지 무지개 / 이 세상 끝날까지 그대 이마에 찬란하리라

 

 

고정희의 「더 먼저 더 오래」는 은총의 시이자 축복의 시이다. 시를 읽을 순간 눈과 마음이 확 맑아진다. 마치 내가 저런 사랑을 하는 듯한 착시현상이 일어날 정도다. 큰 위로와 용기를 주는 시다.

 

이건 정말 ‘아마도’이다. 아마도 시인도 저만큼의 아가페에 도착해서 시를 쓴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경험과 인류의 사랑을 묵상하고 성찰하다 보니 저토록 아름다운 시가 나오지 않았을까 싶다. 일반화하긴 어렵지만, 본질은 언제나 행위보다 앞서기 때문이다.

 



 

 

 

 

 

 

2. 너의 의지의 준칙이 항상 동시에 보편적 법칙 수립의 원리로서 타당할 수 있도록, 그렇게 행위하라!(칸트)

 

 

 

 

본질은 언제나 행위보다 앞서기 때문이라는 것을 보여준 철학자 가운데 임마누엘 칸트의 정언명령이 있다. 모든 철학은 본질에 대한 갈망이다. 그가 말한 것을 그 역시 살지 못했을지라도 그가 바라본 본질은 본질이다.

 

존재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고민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존재의 본질을 고민하는 것은 행위의 방향, 삶의 궁극적 지점과 닿아 있다. 그것은 누구나 인간은 진정한 행복에 도달하고픈 갈망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고 자신에게 가장 최고의 합당한 행복을 주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흔히 칸트하면 정언명령으로 철저하게 자유를 윤리에 귀속시킨 것으로 절대론적 윤리주의자로 바라보기도 하지만, 그 평가만큼 칸트에 대해 갖고 있는 오해도 없을 것이다.

 

칸트 철학의 출발점이 <자유>라는 것, 우리가 무엇을 한다는 것은 타율개념이 아니라 자율개념이라는 것이 칸트철학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칸트는 선의지에 기반한 인간의 행위를 '신성하다'고 할 정도로 자유의지의 자율성을 주목한 철학자다. 그는 인간이 어떤 경지에까지 이를 수 있는가를 바라본 철학자이다. 보편을 하나의 법칙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은 칸트는 행위라는 결과보다 행위를 유발한 한 인간의 내면에 주목했음을 알 수 있다.

 

칸트는 『도덕형이상학원론』(1785)에서 정언명령 다섯 가지를 제시한다.

 

첫째로, '보편적 법칙의 법식'(Formula of Universal Law) : "준칙이 보편적인 법칙이 되도록 그대가 동시에 의욕할 수 있도록 하는 그러한 준칙에 따라서만 행위하라"

 

둘째로, '자연법칙의 법식'(Formula of the Law of Nature) : "그대 행위의 준칙이 그대의 의지를 통하여 보편적인 자연법칙이 되어야 하는 듯이 행위하라"

 

셋째로, '목적 자체의 법식'(Formular of the End in Itself) : "그대는 그대 자신의 인격에 있어서건 타인의 인격에 있어서건 인간성을 단지 수단으로만 사용하지 말고 항상 동시에 목적으로 사용하도록 행위하라"

 

넷째로, '자율의 법식'(Formula of Autonomy) : "보편적 법칙 수립적 의지로서의 모든 이성적 존재로서의 의지라는 이념"으로 이는 곧 '각각의 이성적 존재자는 자신의 의지가 보편적 법칙을 자율적으로 수립하는 의지인 듯이 행위 하라’

 

다섯째로, '목적의 왕국의 법식'(Formula of the Kingdom of Ends) : "의지가 자신의 준칙을 통해 동시에 자기 자신을 보편적 법칙을 수립하는 존재로 간주할 수 있도록 행위하라"

 

칸트의 이 다섯 가지의 정언명령은 『실천이성비판』(1788)에서 다시 두 가지로 축약한다.

 

①너의 의식의 준칙이 항상 동시에 보편적 법칙 수렴의 원리로서 타당할 수 있도록, 그렇게 행위하라.

 

②너 자신의 인격에서나 다른 모든 사람의 인격에서 인간성을 항상 동시에 목적으로 대하고 결코 한낱 수단으로 대하지 않도록, 그렇게 행위하라.

 

이 두 개의 정언명령은 <~하라>는 당위 명제의 형식으로 제시되지만, 그 내용은 <~을 할 수 있는> 인간의 자유의지가 바로 <선의지>라는 것에서 비롯된다.

 

칸트에 따르면 인간의 <선의지>는 이타주의나 대의, 혹은 공존을 위한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위한 행위가 아니다. 그것이 옳기 때문이라는 단 하나의 이유 때문에 하는 것이다. 다수에게 이롭기 때문에 <선의지>가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선의지> 그 자체가 가치 있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자유의지에는 이미 선의지와 결합되어 있다는 것은 자유와 인격의 관계를 동시에 전제하는 것이기도 하다.

 

칸트는 이를 의지의 법칙에 대한 자유로운 복종의 형식은 모든 경향성에서, 이성에 의해 가해지는 불가피한 ‘강제’와 결합되어 있는 것으로 무릇 그 법칙에 대한 ‘존경’에서 비롯된다고 보았다.

 

그래서 <선의지>는 감성적 욕구 충족이 아니라 이성에 의한 '실천적 강제'라고 본 것이다. <선의지>가 당위적 형식으로 나타나는 것은 당위는 강요된 행위이고, 그런 뜻에서 필연적이다. 또 이 강제는 밖에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이성에 의한 <’자기강제‘>이므로, 이는 자연법칙이 아니라, 자유로운 <자기강제>의 규칙이기에 보편적이라 할 수 있다. 이 자기경제를 <자율>이라고 보았으며 인격은 이 자율의 힘에 기반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인간이 자연법칙을 뛰어넘는, 즉 사물의 질서를 넘어서는 것이야말로 그 자체로 ‘신성하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인간은 거룩한 신처럼 충분히 신성하지 못하지만 그러나 그의 인격에서 사물의 질서를 뛰어넘는 <자기강제>의 자율성이야말로 인간에게 ‘신성하다’고 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렇기에 <~하라>는 당위명제 형식의 자유의지에서 비롯된 <선의지>는 자유로부터의 법칙 즉 자율적인 인격만이 선택할 수 있는 법칙이므로, 인간과 모든 이성적 인간은 그 자체로 존엄성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자유의지가 그 자체로 존엄하기에 인간은 수단이 아니라 이성적 존재인 인간은 모두 목적 그 자체가 될 수 있다.

 

인간의 실천행위를 규정하는 자유로운 선택은, 가장 기초적인 자율적 인격으로부터 비롯된다. 인격을 지닌 인간으로서 인간은 모든 인간은 자율적 실천을 할 수 있는 인간으로서 대할 수 있다. 그것은 자기 행위에 대해 책임질 수 있는 주체가 바로 인격이기 때문이다. 이성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자율적으로 어떤 행위를 준수함으로써 자유의지를 지닌 인격이 된다.

 

칸트 철학에서 자유의지-선의지-자기강제-자율성-성스러움-존엄성-인격은 같은 의미의 다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자유의지가 있기 때문에 자유의지를 반납할 정도로 즉 자기강제를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자유로우면서 그 자유에서조차 자유로워진 진정한 자유인라고 할 수 있다. 그 자유가 인간의 본질을 규정하는 <포이에시스(Poiesis>이기 때문이다.

 

 

 

 

 

 

 

 

3.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요한6,60-69

 

 

 

Ⓐ그때에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말하였다. “이 말씀을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당신의 말씀을 두고 투덜거리는 것을 속으로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 말씀이 너희 귀에 거슬리느냐? 사람의 아들이 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게 되면 어떻게 하겠느냐? 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 그러나 너희 가운데에는 믿지 않은 자들이 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믿지 않은 자들이 누구이며 또 당신을 팔아넘길 자가 누구인지 처음부터 알고 계셨던 것이다. Ⓑ이어서 또 말씀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허락하시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고 너희에게 말한 것이다.”66 이 일이 일어난 뒤로, 제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되돌아가고 더 이상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않았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에게,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하고 물으셨다.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라고 전하는 요한6,60ㄴ-69은 카파르나움 담화의 결론으로 예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자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는 예수의 자기계시의 본질이 베드로의 고백을 통해 천명된다.

 

그렇다면, 예수님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지만 즉 예수와의 완전한 인격적 일치를 이루는 것만이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이라는 것이 믿음의 갈림길이 된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는 이미 베드로의 고백 전후의 그의 행적을 알고 있다. 여기서 <예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다. 예수는 하느님의 거룩한 분이시다>는 진리의 완성은 지상교회의 완성을 담보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완성돼서 고백하는 것이 아니고, 고백해서 완성되었다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고백은 완성시점에서 고백되지 않는다. 고백함으로써 완성을 담보하고 있다는 것이 지상교회의 큰 희망이라고 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혹시, 믿음 때문에 울어본 사람이 있는가? 자신이 말하고, 바라본 것과는 턱없이 부족한 믿음 앞에서, 울어본 적이 있는가? 이 글을 쓰는 나는 너무나 많다.)

 

우리의 실존은 물질 세계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 작동원리가 있다. 작동원리가 있다는 것은 힘(Force)이 막강하다는 것이다. 예수가 계시하는 성체성사적인 삶을 살게되는 것 역시 그 작동원리가 있다. 그 힘은 세상의 끌어가는 힘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막강하다. 그 (Power)를 우리는 권능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을 끌어가는 힘과 영적인 힘을 어떤 대척점으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비교의 대상이 아닌데 비교하기 때문에 두려운 것이 많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베드로의 고백과 예수님의 자기계시는 자신의 믿음이 참으로 보잘 것 없어서 울어본 사람은 알 것이다. 자신이 바라본 것과 자신이 살고 있는 것의 괴리 때문에 베드로처럼 울어본 사람은 알 것이다. “그리스도 신앙은 수용이 작위에 선행한다는 태도의 선택”(요셉 라칭거)이라는 것을. 그렇기에 교회는 필연적으로 겸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인류는 용서와 자비에 의탁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 용서와 자비라는 축복보다는 세상을 작동하는 힘의 원리, 육의 원리를 따르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를 성찰하는 것이 연중 21주 묵상의 주제, 은총의 주제라고 할 수 있다.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라고 전하는 요한6,60ㄴ-69, 카파르나움 담화의 결론은 점층적인 세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문제제기-제자의 길1--->Ⓑ부르심의 은총-제자의 길2--->Ⓒ고백의 은총-제자의 길3이다. 제자라고 일컫어지던 이들이 어떻게 육의 논리에 압도당해 예수님을 떠났는지, 그와 반대로 흔들리는 인간이 어떻게 <당신은 영원한 생명의 말씀입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었는지? 떠난 제자들도 우리와 무관하지 않고 믿음을 고백한 제자들도 우리와 무관하지 않다.

 

Ⓐ그때에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60말하였다. 이 말씀을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 61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당신의 말씀을 두고 투덜거리는 것을 속으로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 말씀이 너희 귀에 거슬리느냐? 62사람의 아들이 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게 되면 어떻게 하겠느냐? 63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 64그러나 너희 가운데에는 믿지 않은 자들이 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믿지 않은 자들이 누구이며 또 당신을 팔아넘길 자가 누구인지 처음부터 알고 계셨던 것이다.

 

복음사가는 6장 전체에 걸쳐 카파르나움 담화의 결론이 제자의 길-신앙의 결단이라는 측면에서 60절에서 64절에 걸쳐 예수의 말씀이 거북하다고 문제제기를 한 이들의 표면적인 이유와 예수가 진단한 실재적인 이유가 대조적으로 제시된다. 예수를 따르는 이들이 어떻게 예수의 말씀 앞에서 갈리고 있는가를 <거북하다- 투덜거리다-거슬리다>라는 형용사적 상태동사를 통해 표출한다.

 

요한복음사가는 예수를 따랐던 이들을 제자라는 이름으로 통칭한다. 그 제자들은 말씀을 받아들인 자와 말씀을 거부한 자로 나누어지고 그 결절점이 영과 육의 갈림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영의 시선으로만,  예수의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고, 믿음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것은 강조하면서, 예수를 따라다니던 수많은 제자들 가운데 처음부터 육의 시선으로 예수를 따라다닌 이들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고 복음사가는 전한다. -믿지 않을 자들이 누구이며, 또 당신을 팔아넘길 자가 누구인지 <처음부터 알고 계셨다>(64절)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는 당신의 메시야의 운명 뿐 아니라 제자들의 영적인 운명까지 <처음부터 알고 계셨다>고 전한다. 우리의 신앙 여정이 이미 운명처럼 주어졌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당신이 전한 진리가 듣기에 거북하다고 투덜거리는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게 되면 어떻게 하겠느냐?”(62절)라고 묻는다. <내려오다-올라가다>는 육화의 신비는 부활하신 후에  아버지께 올가갈 것이라는(20,17) 부활-승천을, 그것은 <전에 있던 곳으로> 라는 것에서, 이 세상이 생기기 이전부터 예수의 근원으로의 (17,5,24) 귀환이며, 예수의 참된 출처(8,28)와 신원, 정체를 밝힌 것으로, 사람의 아들이 들어높여져 영광스럽게 될 때, 비로소 예수의 정체를 알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사람의 아들을 믿는 자는 신앙적으로 더 견고케 되겠지만 믿지 않은 자는 불신으로 가득차게 될 것이라는 측면에서 믿음을 촉구한 것이다. 사람이 아들이, 그 근원이 믿음의 걸림돌이 될 수도 있고 그것이 믿음의 동인이 될 수 있다는 측면에서 그것은 예수님 시대뿐 아니라 지금 이 시대의 믿음의 행보를 예언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어서, "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63절)은 믿음의 결절점이 되는 부분이 바로 영과 육의 갈림이라는 것을 분명히 한다. 영은 생명을 주지만, 육은 그렇지 못하다. 영과 육은 사실 인간의 조건이다. 인간의 조건 자체가 대조어법으로 쓰인 것은 즉 영을 강조하기 위해서 육을 상대적으로 언급한 이 부분을 이해하는 것이 제자의 관건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수단과 목적이 분명히 나누어짐을 의미한다. 예컨데 물질은 축복이다. 그런데 그 축복이 목적이 될 때 그것은 악이 된다. 육은 생명을 주는데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 그렇기에 육은 인간의 조건이지만 지상적 차원이다. 예수는 사실 지상적 차원과 천상적 차원을 다 사신 분이다. 그럼에도 지상적인 차원에서는 예수의 삶을 결코 이해할 수 없다고 하신다. 

 

지상적 지위와 천상적 지위의 차이로 나누는 것은 육 자체가 무용하다는 의미는 결코 아닐 것이다. 예수 자신의 육은 오히려 육화(1,14)에서부터 십자가상 죽음(6,51)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사랑의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육은 소용없다>는 대목은 예수가 천상적인 사람의 아들로써 생명을 준다는 데, 역점을 둔 것이라고 할 것이다. 예수의 말씀은 영과 생명을 지닌 영적인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육적인 말 즉 인간적인 말로 판단하지 않는다면 예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오로지 성령께서만 예수의 지고의 계시를 받아들이게 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예수의 말씀은 영이고 생명이기 때문이다.

 

 

Ⓑ65이어서 또 말씀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허락하시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고 너희에게 말한 것이다.” 66 이 일이 일어난 뒤로, 제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되돌아가고 더 이상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않았다.

 

두 번째 제자의 길에서 우리가 만나야 되는 축복은 <아버지께서 허락하신>길을 가겠다는 선택이다. 믿음은 선택이기도 하지만 사실 선택했다는 그 자체가 은총이라고 할 수 있다. 은총이기에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감사란 우리가 받은 것을 되돌리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이어지는 65절과 66절에서는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이라는 대 전제로 <예수의 살과 피를 먹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 때문에 더 이상 예수를 따라다니지 않는 제자들의 시선을 제시한다.

 

그분은 아브라함 전부터 있었던 진리 그 자체이기에(8,48-59)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으며(3, 30) 즉 예수를 알아볼 수 없으며, 예수의 음성을 들을 수 없다. 따라서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3, 7). 여기서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은 예수의 신원, 메시야의 운명과 우리신앙의 운명이 함께한다는 것을 바라보게 된다.

 

즉 성령에 힘입지 않고는 우리는 우리의 실존의 조건인 육의 시선을 초월하지 못한다. 그때 생명의 말씀인 그분을 알 수 없다. 그런데, 그분이 이 지상의 삶을 떠나야 성령이 온다는 측면에서 십자가상의 죽음은 예수에게 필연적인 메시아의 길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가 들어올려져야지만,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주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할 것(14, 15-31)이기 때문이다. 예수가 부재해야 예수의 현존을 알 수 있다는 것! 빛으로만 빛을 볼 수 있다. 

 

“하느님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성령을 통해서 인간의 내면에서 예수의 외적 표양과 통교하는 인간이 내적 자유를 작용시킨다”(기스펠트 그레사케 『은총-선사된 자유』)

 

하늘이 준 것을 인간이 받을 수 있느냐?는 것이 두 번째 제자의 길인데, 부제의 현존을 바라보는 이 길 역시 은총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만약 누군가 믿음이 강하다면 그 역시 하늘이 준 선물일 것이기 때문이다.

 

 

 

 

 

 

 

 

 

Ⓒ67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에게,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하고 물으셨다. 68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69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제자가 되는 세 번째 길은 고백의 은총이다. 67-69절은 예수를 떠난 제자들과는 대조적으로 예수 곁에 남아 있는 열두 제자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런데 그 열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은 예수를 떠나는 것 뿐 아니라 예수를 팔아먹을 자가 있다는 점에서 카파르나움 담화는 예수님의 신적정체성 뿐 아니라 제자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거듭해서 촉구한 담화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열 두 제자는 에수님이 친히 뽑으셨다. 그렇다면 누가 끝까지 믿을 사람인지 배신할 것인지 <처음부터 아셨다>는 것에서 베드로의 고백이 예정되어 있었듯, 유다의 배신 역시 <처음부터> 예정되어 있었던 것인가? 하는 질문이 들기도 한다.

 

요한복음에서는 두 번에 걸쳐 그분의 제자를 예수께서 친히 선별했다고 밝힌다. 내가 너희 열둘을 뽑지 않았느냐?(6,70) 내가 뽑은 이들은 나를 안다. 그러나 제 빵을 먹던 그가 발꿈치를 치켜들며 나에게 대들었습니다(13,18)라고, 예수를 따르는 사람 가운데에서 죽음의 계획에 몸 바치는 사람과 생명의 계획에 몸바치는 사람이 있음(13,2,11.27/18,25/21,20)을 이미 알고 계셨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실 예수님께서는 믿지 않은 자들이 누구이며 또 당신을 팔아넘길 자가 누구인지 처음부터 알고 계셨던 것이다.(64절)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68-69)

 

제자(부르심을 받은 이들)의 갈림길, 죽음의 계획에 몸바치는 이들에 대해, 위르겐 몰트만은 『희망의 신학』에서 사랑을 구성하는 요소에는 자유의지가 있다는데서 악(유다 이스가리옷)의 행위를 사랑의 역설로 규정한다.

 

“악은 하느님이 존재하지 않도록 명령하시기 때문에 존재한다. 사랑은 오로지 무죄한 고통만이 존재한다. 사랑은 항상 고난당하는 사랑이다”

 

반면, 요셉 라칭거 추기경은 『사도신경 강해』에서 불안전한 인간의 신앙고백이 어떻게 신앙의 완성일 수 있는가를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리스도 신앙은 수용이 작위(스스로 만든 행위)에 선행한다는 태도의 선택이다”(요셉 라칭거)

 

<예수님 당신은 영원한 생명의 말씀입니다>라는 베드로의 고백은 실은 <네>라는 수용이다. 수용은 <뜻> 혹은 존재의 <의의>가 있다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 신앙 고백이 신앙의 완성을 가능케 한다는 측면에서, 이것은 베드로 개인이 만든 뜻이 아니라는 것에 초점이 놓인다. 베드로는 선험적으로 이 앎을 고백한 것이다. 그것이 또한 은총이다. <예수는 영원한 생명이다>는 그 뜻을 베드로가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뜻에 나를 맡기겠다는 것이 베드로의 고백이자, 오늘 우리의 신앙 고백이다. 우리는 사실 그분의 뜻을 모를 때도 있고, 그 뜻이 나를 어떻게 끌어갈지 모를 때도 많다.

 

그럼에도 나는 예수를 믿겠다는 고백은 <뜻>이 지닌 은총을 내가 딛고 설 수 있는 땅으로 받아들이겠다는 선택이다. “너희는 믿지 않으면 서지도 못한다”(이사야7,9) 내가 딛고 설 수 있는 땅, 서 있을 수 있고, 걸어갈 수 있는 땅이라는 것은 신앙의 핵심적 고백을 낳는다. <나는 무엇을 믿는다>가 아니고 <나는 너(예수)를 믿는다>이다. “믿음은 인간 예수와의 상봉이고 그 상봉 안에서 세계의 뜻인 예수의 인격(Person)전체를 현존하는 생명으로 체험하는 일”이라고 라칭거 추기경은 덧붙인다.

 

“스스로 만들어 놓은 뜻은 궁극적인 뜻이 되어주지 못한다. 뜻이란 우리 존재가 전체로써 딛고 서 있을 수 있고, 인간이 그 위에 살 수 있는 바탕이 되어주어야 한다. 사람이 이 뜻은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나와 이 세상의 바탕이 되어주는 뜻에 의존하고, 그 뜻을 땅으로 받아들이겠다는 결정이다.”

 

결정함으로써 결정되는 그 뜻은 객관적으로 뜻이 있다는 것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그 뜻은 개별자인 나를 알고, 나를 사랑하고, 영원히 아이인 내가 나를 온전히 내 맡길 수 있는 유일한 이버지, 하늘이자 땅이라는 것을 믿고 아는 것이다. 그 뜻의 디테일을 모를지라도 그 뜻의 전체가 지닌 무한한 품을 안다는 것이다. 따라서 믿는다는 것은 곧 안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베드로의 고백,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라는 것에서 베드로는 믿음과 앎을 연결시킨다. 베드로가 받은 사랑이 무엇인지 완벽하게 잘 알지 못하지만 베드로는 모든 것을 버리고 그분을 따를 정도로 그분 사랑에 속수무책으로 끌렸다. 베드로 역시 유다이스카리웃과는 달리 배신의 아이콘이면서도 그분에게서 벗어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베드로의 고백- 그 고백으로 그가 거꾸로 십자가형을 받을 때까지 그는 그가 어떤 길을 가게 될지 알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68-69)의 결어를 그는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했지만 고백함으로써 그 고백은 완성되었다. 그런 맥락에서  “하느님의 사랑은 그리스도를 통해 베드로(나)의 그 마음이 먼저 도착해서, 베드로(나)를 기다렸다”("사랑은 나보다 내 마음이 먼저 도착해서, 나를 기다린다!", 오승원 이냐시오 신부님, 2019년,  『완성해 가는 주일 강론 중에서 재인용 ) 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글을 마치며,

 

그때에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말하였다. 이 말씀을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당신의 말씀을 두고 투덜거리는 것을 속으로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 말씀이 너희 귀에 거슬리느냐? 사람의 아들이 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게 되면 어떻게 하겠느냐? 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 그러나 너희 가운데에는 믿지 않은 자들이 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믿지 않은 자들이 누구이며 또 당신을 팔아넘길 자가 누구인지 처음부터 알고 계셨던 것이다. 이어서 또 말씀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허락하시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고 너희에게 말한 것이다.”66 이 일이 일어난 뒤로, 제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되돌아가고 더 이상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않았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에게,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하고 물으셨다.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