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피캇(Magnificat)

생명의 길, 바이오스(Bios)-> 프쉬게(psyche)-> 조에(Zoe)

나뭇잎숨결 2024. 8. 1. 20:21

 

 

사진작가 분이가 대천에서, 탱큐!

 

 

생명의 길, 바이오스(Bios)-> 프쉬게(psyche)-> 조에(Zoe)

-연중18주,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를 중심으로

 

 

 

 

 

 

1. 박정대, 「그 무엇이 속삭이고 있었다」

 

 

 

다들 돌아가버린 한적한 오후의 도서관에서/내가 생애처럼 긴 담배를 피워물 때/어디서 작은 새들이 날아와/처음 보는 이름으로 움직이고, 꽃들은/낡은 외투에 손을 꿰는 아이들의 손끝마냥/불쑥 피어오르고 있었다, 외상값/정리되지 않은 외상값에 대한 생각처럼/나는, 그 어떤, 나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집요한 상념에 잠기어 있었는데, 비가 내려/내 생각의 한가운데로 비가 내려, 그 무엇이/속삭이고 있었다, 하늘 한구석에서/누군가 또 낚시질을 하고 있군, 글쎄/ 비 내리는 오후는 저녁처럼 어두워져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어두운 하늘에 검은 말 한 마리/ 지나가고 있었다, 저기 저 비에 젖은 별들은/진흙탕의 세월을 지나온 시간의 말발굽이야, 그 무엇이 속삭이고 있었다, / 잔인한 추억이지 뭐/나는 담배를 끄고, 자리에서 일어나/그 나지막한 속삭임에게 들려주었다 / 다 잔인한 추억이지

 

 

박정대의 「그 무엇이 속삭이고 있었다」는 전반부와 후반부에 확연히 달라지는 시간, 바깥(dehors)의 소리를 듣는 화자가 등장한다. 그 소리는 화자의 멜랑꼴리아의 근원이 부재라는 것 외에는 화자를 통과한 시간이 왜 모두 잔인한 추억인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그것은 주체가 명료한 의식 속에서 어떤 것을 표현하거나 설명하고, 그것이 시를 읽는 독자에게로 곧바로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바깥’의 모호한 웅얼거림을 드러내어 보여 주거나 들리게 하는 것이 바로 문학 혹은 시라고 말하는 듯하다. 불확실한 사물의 미결정 상태 속에서 그 불안을, 그 빈곤의 풍요를, 그 공허의 불안전을 되찾고, 한편 시를 읽는 행위는 이러한 불안과 하나가 되고 이러한 빈곤에 동조하면서 욕망을, 고뇌를 그리고 열정의 움직임이 전염된다. 부재의 소환, 오늘이라는 시간 밖에서만 존재하는 바깥(dehors)을 향하는 시선은 모든 시의 운명이 되다시피 했다.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

 

 

 

2. 바깥(dehors)을 향하는 오르페우스의 시선

 

 

바깥(dehors) 의 사유하면 모리스 블랑쇼를 지나칠 수 없다. 블랑쇼의 대표적인 저서인 『문학의 공간』은 작가이자 비평가로 활동했던 블랑쇼의 대표적인 문학비평서로, 블랑쇼는 말라르메, 카프카, 릴케, 횔덜린 등의 작품세계를 깊이 파고들어 그 숨은 의미를 드러내 주면서, 문학의 본질을 바깥(dehors)을 향하는 오르페우스의 시선으로 사유하고 있다.

 

 

『문학의 공간』은 블랑쇼 사상의 전반을 체계적으로 보여 주고 있는 책으로, 블랑쇼 전체 저작 중에서도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성을 갖는다. 블랑쇼가 비교적 명료하게 자신의 사유 방법과 개념들을 서술하고 있다는 점도 『문학의 공간』의 또다른 장점이다. 이 책은 블랑쇼의 이렇게 난해해 보이는 저작들에 대한 중요한 참조점이자 길잡이가 되는 책으로, 바깥, 밤과 낮, 예술, 글쓰기, 작품, 독서, 죽음 등, 블랑쇼가 ‘바깥의 사유’를 전개하면서 사용하였던 주요 개념들이 문학비평의 형식을 빌려 드러나고 있다.

 

미셸 푸코의 표현처럼 블랑쇼의 사유는 ‘바깥의 사유’라고 부를 수 있다. 블랑쇼의 여러 저작들에서 이 ‘바깥’이라는 주제는 사유의 중심에 놓여 있으며, 그가 전개하고 있는 다양한 주제들 역시 이 ‘바깥’을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 『문학의 공간』 역시 마찬가지로 그 중심에는 ‘바깥’이라는 주제가 놓여져 있다. ‘바깥’은 문학 이전에 놓여져 있는 ‘문학의 기원’이며, 작가가 작품을 향해 끊임없이 다가가야 하는 곳이자 독자의 읽기가 가능해지는 곳이다. 바로 이 ‘바깥’을 보여 주기 위해서, 블랑쇼는 말라르메, 카프카, 릴케, 횔덜린의 작품들 속으로 깊이 파고들어 그 속에서 ‘죽음’, ‘고독’, ‘언어’, ‘작품’, ‘밤과 낮’, ‘이미지’와 같은 주제들을 건져 낸다.

 

블랑쇼 사유의 설계도, 『문학의 공간』이 그리는 명료한 언어들을 따라가다 보면 거대한 ‘부재의 현전’과 마주하게 된다. 이는 블랑쇼가 거푸집을 만드는 방식으로 글을 쓰기 때문이다. 거푸집의 모습을 따라가다 보면 그 빈 공간에서 거대한 ‘바깥’을 보게 되는 것이다. 『문학의 공간』에서 블랑쇼는 이 거푸집을 만들기 위한 다양한 주제들에 대해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그 하나하나의 주제가 완결된 이야기를 통해 ‘바깥’을 드러내 줄 뿐만 아니라, 비교적 명료한 언어로 표현된 그 주제들이 블랑쇼의 다른 저작들에서 변주되며 등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학의 공간』은 블랑쇼의 사유로 진입하기 위한 중요한 통로이자 ‘설계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바깥(dehors)을 향하는 오르페우스의 시선. 블랑쇼는 발문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글쓰기의 본질을 ‘오르페우스의 시선’에서 찾고 있다. 탁월한 예술의 힘으로 명계로 내려가 에우리디케를 데리고 돌아오는 오르페우스. 하지만 오르페우스는 마지막 초조함을 참지 못해 뒤를 돌아보고 에우리디케는 다시 명계로 사라져 간다. 이때 에우리디케의 마지막 얼굴에 닿은 오르페우스의 시선에서 블랑쇼는 문학이 끊임없이 다가갈 수밖에 없는 부재의 순간, 작품에 다다르는 순간에 거기서 쫓겨날 수밖에 없는 문학의 숙명을 읽어낸다.

 

“오르페우스가 내려가는 것은 에우리디케를 향해서이다. 에우리디케는 그에게 있어서 예술이 이를 수 있는 극단이고, 그녀는 그녀를 숨기는 이름 아래, 그녀를 덮은 베일 아래 예술, 욕망, 죽음, 밤이 그곳을 지향하는 듯한 몹시도 어두운 지점이다. …… 이 ‘지점’, 하지만 오르페우스의 작품은 깊이를 향하여 내려가면서 그 지점으로의 접근을 보장하는 데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의 작품, 그것은 그 지점을 낮으로 데려가고, 낮 속에서 거기에 형태, 형상 그리고 현실성을 주는 것이다. 오르페우스는 이 ‘지점’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것을, 밤 속에서 밤의 중심을 바라보는 것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 그는 그 지점으로 내려갈 수 있고, 보다 강한 능력으로 그는 그 지점을 자신에게로 끌어당기고, 자신과 함께 그것을 위로 끌어당길 수 있다. 하지만 거기서 벗어나면서. 이러한 벗어남이 거기에 다가가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것이 밤 가운데 드러나는 숨김의 의미이다. 그러나 오르페우스는 그의 이주의 움직임 속에서 그가 이루어야 할 작품을 망각하고, 그리고 그는 그것을 필연적으로 망각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움직임의 궁극의 요구는 작품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이 지점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서서 그 본질을 붙잡는 것이다. 여기 그 본질이 나타나는 곳에서, 여기 그 본질이 본질적이고 본질적으로 나타난 것인 곳에서, 밤의 한가운데서.”

 

 

작가는 작품을 향하여 나아가지만 그가 이루는 것은 한 권의 책일 뿐이고, 그는 곧 작품에서 쫓겨난다. 블랑쇼는 바로 이러한 부재가 문학의 본질이라고 생각했다. 주체가 명료한 의식 속에서 어떤 것을 표현하거나 설명하고, 그것이 독자에게로 곧바로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바깥’의 모호한 웅얼거림을 드러내어 보여 주거나 들리게 하는 것이 바로 문학이라는 것이다. <바깥(dehors)을 향하는 오르페우스의 시선>은 블랑쇼가  인간의 운명과 글쓰기의 본질을 같은 측면으로 바라보았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오르페우스의 시선’에서 그 단초를 찾고 있다. 그리스 신화에서 음악의 신으로 나오는 오르페우스는 탁월한 음악의 능력으로 모든 죽음의 상태를 물리치고 명계(죽음, 冥界)로 내려가 사랑하는 에우리디케를 데리고 돌아오지만. 오르페우스는 자신의 ‘초조함’을 참지 못해 ‘바깥(뒤)’를 돌아보게되고 에우리디케는 다시 명계(冥界)로 사라져 간다.

 

오르페우스의 ‘초조함’으로 그의 오랜 기다림은 완성되지 못했다. 이때 에우리디케의 마지막 얼굴에 닿은 오르페우스의 시선에서 블랑쇼는 우리는 어떤 기다림으로 끊임없이 대상을 찾아 헤메다, 결국 그 대상을 찾아내지만 대상을 찾은 순간에 거기서 쫓겨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숙명을 읽어낸다. 오르페우스의 비극은 문학이든 인간 관계든 “바깥(dehors)”으로 시선이 옮아갈 때, 열정적으로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추구했던 사람들이 마지막에 건너가게 되는 운명의 갈림길을 지시한다. 이 ‘바깥’은 타자에 의해 진행되는 사건이 아니라 자신이 자신을 추방시겼다는 점에서, 자신의 기다림을 자신이 배신했다는 점에서, 주로 완벽하다고 평가되는 이들에게서 나타난다는 점에서, 완벽함이 지닌 위대함과 위태로움을 동시에 바라볼 수 있다. 위대함 속에 내재된 위태로움. 완벽함 속에 내재된 차가움에 대한 적시(摘示)가 그것이다.

 

성서의 <소돔과 고모라>, <백제의 망부석 설화>, <용소와 며느리바위 전설>에는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 신화>에서 나오는 이런 공통된 화소가 등장한다. 선과 악이 나뉠 때, 삶과 죽음으로 갈릴 때, 사랑과 이별로 운명이 결정되는 마지막 순간에 소위 열심한 사람들, 착한 사람들, 완벽주의자로 일컬어지던 이들이 ‘뒤’를 돌아다보는 순간에 ‘이별’하거나, ‘바위’로 변했다는 점이다. 그들의 불행을 ‘금기’를 어겨서라고 일괄적으로 해석하는 이런 이야기가 전해지는 이유는 ‘기다림’은 우리에게 어떤 본질적인 자세를 요구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위와 같은 급박한 상황에서만 ‘뒤’(밖)를 돌아다보는 그런 상황이 연출되는가? 아니다. 모든 사랑에는 그런 시간들이 주어진다. 사랑의 경우는 두 사람이 같이 뒤를 돌아다보는 경우인데, 시간의 동시성이 아니라 시간의 선후관계를 갖고 누군가가 먼저 뒤를 돌아보게 되고 누군가도 결국엔 뒤를 돌아다보게 된다는 연쇄반응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사랑의 두려움을 <사랑의 큰 그림>이란 틀로 덮이면서 두 사람이 함께 설 공간이 사라지는 것이다, 사랑으로 사랑의 자리가 사라지는 역설이 발생한다. 그것이 관계의 화석화이고 이별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사랑의 화석화를 경험하는 이들은 대부분 완벽에 가까운 사람들이란 사실이다. 너무나 옳기 때문에, 너무나 의롭기 때문에, 너무나 완벽하기 때문에, 너무나 순결하기 때문에, 너무나 논리적이기 때문에, 이별의 구조 자체도 완벽하다. 이건 아닌데, 정말 이건 아닌데 하면서 왜 아닌지를 자기 심장에 설명 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한 논리적 구조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돌이 되었다’는 ‘화석화’란 심리적으로 빠져나갈 수 없는 미궁과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오르페우스의 어떤 ‘초조함’이 ‘바깥(뒤)’를 돌아다보게 하였을까. 자신의 기다림을 자신이 배신한 그 지점이 무엇일까. 오르페우스는 오랜 시간 모든 역경을 딛고 죽음의 피안으로 넘어간 그녀를 애타게 그리워했고 찾아 헤멨다, 그때 오르페우스는 오직 ‘사랑’이라는 본질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그래서 모든 위험한 고비를 뚫고 죽음의 세계까지 내려갈 수 있었던 것이다. 사랑의 위대한 힘이다.

 

그러나 그녀를 죽음의 세계에서 데려오면서 돌연 그를 사로잡은 ‘수많은 생각’들이 사랑을 덮는다. 사랑의 도그마가 만들어지는 순간이다. 사랑에 대한 의심, 자신에 대한 의심, 그녀에 대한 의심이 그를 사로잡는다. 죽음의 세계를 경험한 그녀와 사랑을 계속 할 수 있을까? 그녀도 나처럼 사랑을 원할까? 이 사랑이 나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이 사랑을 하게되면 잃어야 하는 것이 무엇일까? 등등... 의심의 이름은 수도 나열할 수 없이 많았을 것이고 그 의심을 상대를 보면서 확인받고 싶었을 것이다. 자신의 불안함을 그녀를 보면서 확인하고픈 마음에 ‘뒤’를 돌아다봤을 것이다. 상대에게 듣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생각의 소리를 자신이 확정하기 위해서이다.

 

여기서 사랑의 반대는 ‘의심’이라는 것을 추론할 수 있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 는 J의 언명은 사랑의 초조함에 대한 답이다. 사랑의 반대는 증오가 아니라 어쩌면 ‘의심’이라고 할 수 있다. 믿음이 없는 사랑은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랑의 ‘바깥’으로 시선을 돌렸을 때 그 중심엔 ‘의심’이 있고 의심의 중심엔 ‘계산’이 있다. 의심하고 계산했다고 고백할 수 없으므로 사랑의 큰 그림을 둘 사이에 놓아두는 것이다. ‘사랑해서 헤어진다’는 말은 그래서 멋있는 말이지만, 사랑의 트릭스터들이 자주 애용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것은 냉정하게 사랑 고유의 그 본질적인 측면이 아니라 사랑의 도그마에 갇혔다는 것이고, 내 생각이 만든 사랑의 도그마가 나를 덮쳤다고 고백하는 것이 정직한 고백일 것이다.

 

 

 

 

 

 

 

 

 

 


3.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요한6,24-35

 

 

 

 

Ⓐ그때에 24 군중은 예수님도 계시지 않고 제자들도 없는 것을 알고서, 배들에 나누어 타고 예수님을 찾아 카파르나움으로 갔다. 25 그들은 호수 건너편에서 예수님을 찾아내고, 라삐, 언제 이곳에 오셨습니까?” 하고 물었다. 2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27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람의 아들을 인정하셨기 때문이다.”  28 그들이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묻자, 2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30 그들이 다시 물었다. 그러면 무슨 표징을 일으키시어 저희가 보고 선생님을 믿게 하시겠습니까? 무슨 일을 하시렵니까? 31 ‘그분께서는 하늘에서 그들에게 빵을 내리시어 먹게 하셨다.’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습니다.” 3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빵을 내려 준 이는 모세가 아니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참된 빵을 내려 주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 33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 34 그들이 예수님께, 선생님, 그 빵을 늘 저희에게 주십시오.” 하자, 35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라고 전하는 요한6,24-35은 생명의 빵으로서의 예수의 자기 계시를, 카파르나움 담화자와 네 개의 담화를 엮어, 지상의 양식과 천상의 양식에 대한 대비를 통해 불멸의 생명을 얻기 위해서 힘쓰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복음사가는 <내가 생명의 빵>이라는 에고 에이미의 선언을 통해 신앙의 여정은 <비오스(Bios)->프쉬게(psyche)-> 조에(Zoe)>라는 인간의 조건인 세 생명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전한 것이다.

 

라삐, 언제 이곳에 오셨습니까?” 하고 물었다. 2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27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람의 아들을 인정하셨기 때문이다.”

 

24절부터 26절에는 <찾다>라는 동사가 세 번이나 나온다. 빵의 기적을 목격한 그들은 애타게 예수를 찾았지만 <라삐>라는 호칭 속에서 그들이 오천명을 먹이신 표징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했음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명을 비오스(Bios)의 단계로 인식했음을 알 수 있다. 프쉬게(psyche)를 넘어 조에(Zoe)의 단계에서만  빵의 기적이 보여주는 표징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한 복음사가는 치밀하게 담화 네 개를 연결한다.

 

빵의 기적에서 보여준 표징-즉 예수의 강생의 신학, 육화한 말씀의 영광과 그의 초월성과 신적 본성을 드러내는 사건을 읽어내지 못했다는 것은 나는 육체다, 라고 자기 정체를 고백한 것이나 다름없다.  여기서 썩어없어질 양식과 영원한 생명의 양식이 대조된다. 그 대조는 그들의 생물학적인 생명 자체를 폄하한 것이 아니다. 생물학적인 생명에 초점을 맞추는 한 영원한 생명을 그들은 결코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임이 초점의 주안점이다. 영원한 양식을 줄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 사람의 아들이며, 그것은 아버지 하느님께서 아들을 인정하셨기 때문이다. 하느님 아버지란 표현은 아들이 갖고 있는 영원한 생명의 출처가 어디인가를 분명히 드러낸다.

 

 28 그들이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묻자, 2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이어지는 28절과 29절의 담화를 통해 군중들은 <힘쓰다>는 것을 육체의 행위로 바라본다. 생명의 양식을 얻기 위해 필요한 일은 오직 하나, 예수를 믿는 것뿐이라는 대답은, 표징과 믿음의 관계가 다른 차원에서 천명된 것이다. 하느님께서 파견하신 이를 믿는 것, 하느님나라를 소유하기 위해서는 곧 믿음이 오직 하느님의 일이라는 놀라운 규정이 나온다. 그리고 그 믿음은 곧 무상의 선물이 된다. 다음주 복음의 주제인 <믿음의 시혜적 수혜자>,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이는 누구나 내게 올 것이라는 것에서 사실 믿음은 은총이고 선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30 그들이 다시 물었다. 그러면 무슨 표징을 일으키시어 저희가 보고 선생님을 믿게 하시겠습니까? 무슨 일을 하시렵니까? 31 ‘그분께서는 하늘에서 그들에게 빵을 내리시어 먹게 하셨다.’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습니다.” 3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빵을 내려 준 이는 모세가 아니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참된 빵을 내려 주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 33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

 

가파르나움의 대담자들은 30절에서 모세의 만나를 들어 표징을 요구한다. 가파르나움의 대담자들이 믿겠다는 발언은 신앙을 표징위에 세우기를 원하는 왜곡을 보여준 것이다. 가파르나움의 대담자들이 요구한 모세를 통해 먹은 만나는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주신 것이다. 더 나아가 육체적 굶주림을 면하게 한 만나는 결정적인 선물이 아니며, 신적인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이 아님을 강조한 것이다. 이 역시 그들의 육체적인 생명의 소용없다거나 모세의 역할을 축소 해석한 것이 아니다. 신적 생명의 유일한 계시자인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뜻을 세우기 위하여 하늘에서 내려온 메시야이며, 그가 하늘에서 내려온 영원한 생명의 빵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생명의 샘이며(6,51), 세상의 죄를 없애는 하느님의 어린양이며(1,29) 세상의 구원자(4,42)이며, 이 세상을 단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하기 오신 메시야(3, 16-17)이다.

 

34 그들이 예수님께, 선생님, 그 빵을 늘 저희에게 주십시오.” 하자, 35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이어지는 34절에서 가파르나움의 대담자들이 요구한 그 빵을 항상 우리에게 달라는 말은 언뜻 그들이 생명의 양식을 갈구하고 예수만이 그 생명의 양식임을 알아들은 것처럼 보이지만, 예수 앞에 있는 그들이 여전히 배고프고 목마르다는 사실로 하여금 그들이 그토록 찾고 있는 생명의 양식의 실체가 무엇인지 여전히 바라보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가파르나움의 대담자들과 네 번에 걸친 담화는 언뜻, 동문서답에 해당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이 담화는 왜 필요한 것인가? 하는 질문을 하게 된다.

 

제1독서에서는 <내가 하늘에서 너희에게 양식을 비처럼 내려 주리라.> (탈출기16,2-4.12-15)에서 가파르나움의 대담자와 같은 선상에서 바이오적인 생명을 사는 이스라엘 백성이 등장한다. 시편저자는 78(77, 4ㄱㄹ.23-24.25와 54)에서 “주님은 하늘의 양식을 주셨네....천사들의 빵을 사람이 먹었네. 주님이 양식을 넉넉히 보내셨네. 당신의 오른팔이 마련하신 이 산으로, 당신의 거룩한 영토로 그들을 데려오셨네.”라고 영적인 생명을 바라본다.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은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창조된 새 인간을 입어야 합니다.>(에페소4,17.20-24)라고 먹는다가 아니고 입는다라는 표현을 쓴다.

 

형제 여러분, 17 나는 주님 안에서 분명하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더 이상 헛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다른 민족들처럼 살아가지 마십시오. 20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그렇게 배우지 않았습니다. 21 여러분은 예수님 안에 있는 진리대로, 그분에 관하여 듣고 또 가르침을 받았을 줄 압니다. 22 곧 지난날의 생활 방식에 젖어 사람을 속이는 욕망으로 멸망해 가는 옛 인간을 벗어 버리고, 23 여러분의 영과 마음이 새로워져, 24 진리의 의로움과 거룩함 속에서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창조된 새 인간을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가파르나움의 대담자와의 대화에서,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35절)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내가 생명의 빵이다”라는 선언애 담긴 <생명>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작성자 말씀에]는 이렇게 생명을 세 단계를 구분하여 생명의 말씀이 무엇인가를 전한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라고 오늘 예수님은 선언하신다. 예수님이 빵이라는 말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다. 그러기에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수근거리기 시작한다. 글자 그대로만 보면 말이 안 되는 말씀이다. 글자가 아닌 뜻을 보아야 하고, 그 뜻은 물리적 차원이 아니라 신앙 차원에서 드러난다. 말씀을 헤아릴 열쇠가 '생명'이라는 단어에 담겨있다. 성경의 그리스어에는 '생명'을 지칭하는 용어가 몇 가지 있는데 그 의미가 서로 다르다. 먼저 '비오스(bios)'는 피조물의 자연적 생명, 물리적 생명을 가리킨다(이 단어에서 현대의 생명공학, 생명 과학 등을 뜻하는 '바이오'라는 단어가 유래한다). 다른 단어로 '프쉬게(psyche)'는 심리적 생명을 의미한다(여기서 'psychology 심리학'이라는 단어가 파생했다). 그런데 복음 말씀 "생명의 빵"에 사용한 단어 "생명"은 '조에(zoe)'로서 요한복음에서 52회 등장하는 중요한 개념이다. 이 단어 "조에(생명)"는 생명의 원리, 살아있음, 삶의 질, 생명의 충만, 살아갈 이유, 약동하는 생명의 기쁨 등을 나타내는 말이다. 즉 예수님이 말씀하신 생물학적으로 무병장수하게 하는 불로초가 아니고, 심리적인 마음의 양식도 아니다. "생명의 빵"은 살아갈 이유가 분명하기에 기쁨에 넘쳐 생생하게 약동하는 삶을 살게 하는 원동력을 의미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라는 말씀에서 '영원'이란 표현 역시 물리적 언어가 아니라 신앙의 언어다. 즉 수명이 천년만년 이어진다는 뜻이 아니라 하느님은 영원하신 분이다. 우리가 강생하신 하느님인 예수님을 모심으로 예수님과 하나가 되면,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고 그분의 영원하심에도 참여한다. 그것이 영원한 삶이다. 우리를 영원히 살게 하신다는 말씀은 살아갈 이유를 주시어 충만한 삶을 살게 하시는 주님을 받아들이면, 주님은 우리를 영원하신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시키신다는 놀라운 소식이다.

 

같은 맥락에서 C.S. 루이스는 『순전한 기독교』에서 생명을 바이오스(Bios) vs. 조에(Zoe)로 구분한다.

 

"인간이 하나님과 다른 점들이 여러가지가 있지만 가장 근본적인 것은 바로 ‘생명’에 대한 것이다. 생명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자연을 통해 우리에게 오는 생물학적인 종류의 생명인 ‘바이오스(Bios)‘ 와 자연 세계 전체를 만들어낸 생명 그 자체인 ’조에(Zoe)‘이다. 우리는 창조물로서 ’바이오스‘ 밖에 갖지 못한다. 하지만 예수님을 통해, 예수님께 붙어있으면 하느님과 동일한 속성인 ’조에(Zoe)‘를 갖을 수 있다는 것이 바로 기독교가 말하는 생명이다.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아들이시고 그의 생명에 동참하면 우리도 하느님의 아들이 된다. 그리스도는 자신이 가진 이 생명을 사람들에게 퍼뜨리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 이를 위해 이미 나신 예수님이 사람으로 태어나시게 되었다."

 

여기서 <비오스(Bios)->프쉬게(psyche)-> 조에(Zoe)>는 생명의 진화단계를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 세 생명을 모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조건은 몸과 마음과 영혼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요한6,24-35 가 전하는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라고 전하는 축복의 메시지는 영적인 생명인 조에(Zoe)를 살 때만이 알 수 있는 은총의 상태다. 조에(Zoe) 는 생명의 세 겹을 볼 수 있는 영원한 생명프리즘이라고 할 수 있다. 앞에서 인용한 대로, "생명의 빵"에 사용한 단어 "생명"은 '조에(zoe)'는 요한복음에 52회 이상 등장하는 중요한 개념으로 "조에(생명)"는 생명의 원리, 살아있음, 삶의 질, 생명의 충만, 살아갈 이유, 생명의 기쁨, 영원한 생명을 살 수 있는 원천이고, 그 생명은 예수를 믿음으로써 얻게되는 무상의 은총이라고 할 수 있다.

 

 

 

글을 마치며,

 

그때에 24 군중은 예수님도 계시지 않고 제자들도 없는 것을 알고서, 배들에 나누어 타고 예수님을 찾아 카파르나움으로 갔다. 25 그들은 호수 건너편에서 예수님을 찾아내고, “라삐, 언제 이곳에 오셨습니까?” 하고 물었다. 2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27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람의 아들을 인정하셨기 때문이다.” 28 그들이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묻자, 2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30 그들이 다시 물었다. “그러면 무슨 표징을 일으키시어 저희가 보고 선생님을 믿게 하시겠습니까? 무슨 일을 하시렵니까? 31 ‘그분께서는 하늘에서 그들에게 빵을 내리시어 먹게 하셨다.’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습니다.” 3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빵을 내려 준 이는 모세가 아니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참된 빵을 내려 주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 33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 34 그들이 예수님께, “선생님, 그 빵을 늘 저희에게 주십시오.” 하자, 35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