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피캇(Magnificat)

한낮의 빛이 (밤의)어둠의 깊이를 어찌 알랴(2)

나뭇잎숨결 2024. 7. 18. 19:49

 

 

순애데레가 탱큐!

 

한낮의 빛이 (밤의)어둠의 깊이를 어찌 알랴(2)

(Wie das Licht des Mittags die Tiefe der Finsternis erfährt)

  -연중16주일, <그들은 목자 없는 양들 같았다>를 중심으로

 

 

 

 

1. 정지용, 「그의 반」

 

내 무엇이라 이름하리 그를/ 나의 영혼 안에 고흔 불/공손한 이마에 비추는 달/나의 눈보다 값진 이/ 바다에서 솟아올라 나래 떠는 금성/쪽빛 하늘에 흰 꽃을 달은 고산식물/나의 가지에 머물지 않고/ 나의 나라에서도 멀다/ 홀로 어여삐 스사로 한가로워 항상 머언 이,/나는 사랑을 모르노라, 오로지 수그릴 뿐/ 때 없이 가슴에 두 손이 여미어지며/ 굽이굽이 돌아나간 시름의 황혼길 위/나 바다 이편에 남긴/ 그의 반임을 고이 지니고 걷노라

 

정지용의 「그의 반」은 절대자(그)를 향한 경외심이 얼마나 투명한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영성시에 해당한다. 영성시란 나는 몸과 마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나는 몸과 마음과 영혼이 있음을 직관하는 눈이라고 할 수 있다.

 

나의 가지에 머물지 않고/ 나의 나라에서도 멀다/ 홀로 어여삐 스사로 한가로워 항상 머언 이,” 에서 절대자를 향한 화자의 시선이 실은 화자가 지닌 영혼의 상태라는 것을 바라볼 수 있다. 그렇다면, 1930년대, 누구나 예외없이 척박한 시간을 통과했을 시인이 “나 바다 이편에 남긴/ 그의 반임을 고이 지니고 걷노라,” 라는 순결한 고백은 어떻게 가능할까?

 

경외의 대상이 곧 화자의 영혼의 상태라는 것에서 그 답을 얻을 수 있다. 어떤 환경에도 지배받지 않는 가장 좋은 것을 자기 내면에서 꺼내놓을 수 있는 시인의 내적 풍요로움에서 비롯되었다면, 이는 마치 흐르는 물이 어떤 흙탕물도 정화시킬 수 있는 자기정화능력의 지녔기에 가능한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2. 자기생산 체계는 자기구성 요소로부터 자기구성 요소를 재생산한다(니콜라스 루만)

 

 

자기 정화능력을 자기 생산이론이라고 바라본 사회학자 니콜라스 루만이 있다.

 

 

독일의 사회학자 니클라스 루만은 ‘나’라는 개별자의 사회화의 장벽을 질투의 심리학 저변에 깔린 집단심리 ‘확증편향성’이 있다고 보았으며, 그것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자기생산(Autopoiesis)’ 이론으로 제시한 바 있다.

 

확증 편향(確證偏向, Confirmation bias)은 원래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신념을 확인하려는 집단적인 경향성이다. 인지심리학에서 확증 편향은 정보의 처리 과정에서 일어나는 인지 편향 가운데 하나이다

 

니클라스 루만은 『체계이론 입문』 & 『사회의 사회』에서 확증편향은 자기애의 실종을 의미한다고 보고 있다. 사회와 소통의 고리가 끊긴 소외와 고립의 가장 중요한 최초의 코드인 ‘나’를 실종했기 때문으로 바라본 것이다. 우리가 어떤 사람과 여행을 하거나 대화를 나누거나 밥을 먹는다고 소통이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타자와의 소통은 얼마나 ‘나’를 그가 소속된 사회속에서 재생산할 수 있는가의 여부로 바라보았다.

 

루만은 생물학자 움베르토 마투라나와 프란시스코 바렐라가 창안한 ‘자기생산(Autopoiesis)’개념을 자신의 이론에 접목하여 ‘자기생산적’ 사회체계 이론을 만들었다. ‘자기생산’이란 단어는 스스로 무(無)에서 무엇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이 개념은 체계가 자신의 고유한 역동성으로부터 체계의 존속을 유지한다고 본 것이다. 이러한 조작적 폐쇄성과 역동적 개방성은 생물학적인 자동생산 체계의 특징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자기생산 체계는 폐쇄적인 동시에 개방적인 체계이다. 자기생산 체계는 구성요소와 작동의 측면에서는 폐쇄 체계이지만, 물질과 에너지의 측면에서는 개방 체계로 볼 수 있다.

 

 

 

1, 자기생산 체계는 자기구성 요소로부터 자기구성 요소를 재생산한다.

 

2, 자기생산 체계는 스스로 환경과 경계를 긋는다.

 

3, 자기생산 체계는 자기구성 요소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통해 자신의 상태를 변형해나가며(자기준거), 다음 단계에서 변형한 지점이나 상태로 진입한다(재투입).

 

 

 

칠레의 생물학자 움베르토 마투라나가 내놓은 ‘자기생산’(Autopoiesis)이라는 개념은 루만 사회학에 중대한 통찰을 주었다. 마투라나는 생명체의 근본특성을 ‘자기생산’으로 보았다. 자기가 자기를 생산하면서 자기를 유지해 가는 것이 생명체다. 이 생명체는 외부 환경의 영향을 받지만 그 환경과는 분리된 자율적 체계다. 체계로서 생명체는 매 순간 신진대사를 하면서 자기의 구조를 스스로 재생산해 나간다. 이 반복되는 신진대사 활동이 멈추면 생명체는 소멸한다. 사회구조나 체계도 이 생명체와 유사한 방식으로 자기동일성을 유지한다. 모든 것을 체계로 설명하려는 이런 야심 때문에 루만은 ‘사회학의 헤겔’이라고도 불린다. ‘정신’으로 모든 것을 설명한 헤겔 철학의 거대 기획을 사회학에서 해낸 사람이 루만이라는 평가다.

 

“모든 현재화된 사건들은 사건으로서의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실현한다. 사회적 체계는 자신의 환경에 대한 자신의 경계다. 이 경계는 모든 개별 사건에서 항상 새롭게 그려져야 한다. 또한 항상 새롭게 논쟁의 여지가 있는 의미경계, 즉 체계가 자신을 성공적으로 재생산하는 동안에는 체계 내에서, 체계에 의해 모든 참여자가 논쟁하는 형식으로 그려지는 경계다”

 

나는 누구인가? “자기(Selbst)”란 다른 것으로부터 자기를 구별하는 작동이다. 자기를 구별하는 작동은 어떤 경우에나 “다른 것-경계-자기”의 복합과, 이 복합이 던져지는 전체 공간을 생성시킨다. 다른 것, 자기, 공동의 경계, 그리고 전체 공간은 언제나 함께 생성되고 함께 소멸된다. 이러한 작동의 논리를 루만은 “구별함-그리고-지시함”의 동시성과 연속성의 차이로부터 도출해낸다. “다른 것-경계-자기”는 “이전-작동-이후” 또는 “상태-작동-상태”의 프레임을 배경으로 하여, 동일한 자기에 의해 지시될 수 있게 된다. (니클라스 루만의 「“자기생산체계”에서의 “자기”의 구조와 과정 및 형식」, 이철, 사회사상과 문화, 21권 2호)

 

니클라스 루만은 에밀 뒤르켐처럼 기독교의 사회적 기능을 연구하였다. 그는 종교 교리가 일면에서 한 집단의 종교적 정체성이 위협을 느낄 때 그 반응으로서 생겨난다고 주장하였다. 즉, 다른 종교체제와 대결과 갈등에서 교리 생성의 원인이 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루만은 교리는 종교 공동체의 자기 반영이며, 공동체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다른 공동체들과의 차별적 관계를 규정한다고 보았다. 하나가 아니라 배타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루만은 현대 사회를 분석하기 위해 사이버네틱스와 생물학에서 차용한 '자기지시적'이며 '자기생산적'이라는 개념을 제안했으며 논리학, 언어이론, 의미이론, 커뮤니케이션이론, 매체이론 등을 결합해 '사회적 체계'란 개념을 만들었다. 사회적 체계는 곧 심리적 체계를 의미한다.

 

여기서 ‘심리적 체계’란 ‘의식을 지닌 인간’을 가리키는 루만식 표현이다. 그렇다면 ‘사회적 체계’란 무엇인가. 사회적 체계는 사회관계에서 형성되는 온갖 형태의 체계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 사회적 체계를 루만은 ‘상호작용’, ‘조직’, ‘사회’ 세 가지로 구분한다. 여기서 짐작할 수 있듯이 루만이 말하는 ‘사회적 체계’는 거시적 구조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아주 짧은 순간이라도 어떤 관계가 형성되면 ‘사회적 체계’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사회적 체계의 작동 방식이다. 루만은 사회적 체계가 ‘소통’(커뮤니케이션)의 방식으로 작동한다고 말한다. 소통은 정보를 알려주고 그 정보를 이해하는 과정을 가리키는 말이다. 소통은 ‘정보-통보-이해’의 세 단계로 이루어진다. 루만은 진화론적 관점에 서서, 사회가 성장하고 진화하며 그 결과로 세계사회가 필연적으로 성립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사회는 사회라는 주체가 자기를 기술하는 역설적 작업이며, 불가능해 보이는 프로젝트이기도 하다. 루만이 ‘자기기술’이라는 역설에 대해 스피노자의 정리에 따라 기술하고 있는 이 책의 제목이 ‘사회의 사회’인 까닭이기도 하다.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이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라며 미치광이가 되어 갔지만 루만이 보기에 사회는 바로 ‘내가 누구인지를 말해야 하는 자’들의 집단으로 본 것이다. 자신이 누구인지 말할 수 없는 집단은 이미 죽음이 지배한 집단이라는 것이다.

 

 

 

 

 

 

 

 

 

3. <그들은 목자 없는 양들 같았다.> 마르코 6,30-34

 

 

Ⓐ그때에 30 사도들이 예수님께 모여 와,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을 다 보고하였다. 31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오고 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던 것이다. 32 그래서 그들은 따로 배를 타고 외딴곳으로 떠나갔다. Ⓑ 33 그러자 많은 사람이 그들이 떠나는 것을 보고, 모든 고을에서 나와 육로로 함께 달려가 그들보다 먼저 그곳에 다다랐다. 34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그들은 목자 없는 양들 같았다.>라고 전하는 마르코 6,30-34은 마태오14,13-21/루카9,10-17/ 요한6,1-14, 네 복음이 공통으로 전하는 예수 성심에 관한 사화로 다음 주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의 프롤로그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오병이어의 기적앞에 놓여 있는 파견받았던 제자들과 군중들을 대하는 예수님의 마음에서 목자와 양의 관계를 통해 예수성심의 근원이 무엇인가를 성찰케 한다.

 

Ⓐ그때에 30 사도들이 예수님께 모여 와,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을 다 보고하였다. 31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오고 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던 것이다. 32 그래서 그들은 따로 배를 타고 외딴곳으로 떠나갔다.

 

30절에서 31절까지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는 파견받은 자가 파견한 분에게 돌아와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일들을 보고하는 장면이다. 그런데 초점은 행위에 대한 칭찬보다는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라고 제자들에게 다시 쉼을 요구하신다는 것이다. 당연히 일했으니 쉼이 필요할 것이라는 상식선에서 이를 바라보지 않았다는 것이 연중 16주의 성찰의 포인트라고 할 수 있다.

 

일과 쉼은 일차적으로 창조의 순환- 패러다임에 해당한다. 외딴 곳에서의 쉼이라는 의미는 이어지는 33절과 34절에서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성찰하는 키워드에 해당한다. 제자들에 대한 애뜻한 마음이 실은 군중들을 향한 가엾은 마음과 동일선상에 있는 예수 성심임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성심의 근원은 하느님의 일과 쉼이 생명의 싸이클로 순환되는 사랑의 원본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라는 것이 단지 육체적 차원의 휴식 그 이상의 차원이라는 것은 이어지는 33절과 34절에서, 군중들에 대한 가엾은 마음의 근원이 무엇인가를 바라보는 마중물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33 그러자 많은 사람이 그들이 떠나는 것을 보고, 모든 고을에서 나와 육로로 함께 달려가 그들보다 먼저 그곳에 다다랐다. 34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34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는 것에서 군중들에 대한 가엾은 마음이 든 이유가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라고 복음사가는 전한다. 우리는 이미 인류역사의 갈피속에서 구세사를 통해 목자 없는 양의 실체가 무엇인가를 헤아릴 수 없이 보았다.

 

예언자 예레미야와 바오로 사도는 목자와 양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한다.

 

제1독서에서 <나는 살아남은 양들을 다시 모아들여 그들을 돌보아 줄 목자들을 세워 주리라.>(예레미야서 23,1-6)

 

1 불행하여라, 내 목장의 양 떼를 파멸시키고 흩어 버린 목자들! 주님의 말씀이다. 2 ─ 그러므로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내 백성을 돌보는 목자들을 두고 말씀하신다. ─너희는 내 양 떼를 흩어 버리고 몰아냈으며 그들을 보살피지 않았다. 이제 내가 너희의 악한 행실을 벌하겠다. 주님의 말씀이다. 3 그런 다음 나는 내가 그들을 쫓아 보냈던 모든 나라에서 살아남은 양들을 다시 모아들여 그들이 살던 땅으로 데려오겠다. 그러면 그들은 출산을 많이 하여 번성할 것이다. 4 내가 그들을 돌보아 줄 목자들을 그들에게 세워 주리니, 그들은 더 이상 두려워하거나 당황하지 않고, 그들 가운데 잃어버리는 양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이다. 5 보라, 그날이 온다! 주님의 말씀이다. 내가 다윗을 위하여 의로운 싹을 돋아나게 하리라. 그 싹은 임금이 되어 다스리고 슬기롭게 일을 처리하며 세상에 공정과 정의를 이루리라. 6 그의 시대에 유다가 구원을 받고 이스라엘이 안전하게 살리라.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주님은 우리의 정의’라고 부르리라.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신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에페소서 2,13-18)라고 전함에서 목자와 양의 관계는 이 세계를 하나라는 프레임으로 바라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이 바로 부활의 선물인 평화라고 할 수 있다.

 

형제 여러분,13 이제, 한때 멀리 있던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하느님과 가까워졌습니다. 14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몸으로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시고 이 둘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셨습니다. 15 또 그 모든 계명과 조문과 함께 율법을 폐지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여 당신 안에서 두 인간을 하나의 새 인간으로 창조하시어 평화를 이룩하시고, 16 십자가를 통하여 양쪽을 한 몸 안에서 하느님과 화해시키시어, 그 적개심을 당신 안에서 없애셨습니다. 17 이렇게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오시어, 멀리 있던 여러분에게도 평화를 선포하시고 가까이 있던 이들에게도 평화를 선포하셨습니다. 18 그래서 그분을 통하여 우리 양쪽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예레미야와 바오로의 통찰에서 양과 목자의 관계가 보다 분명해진다. 분열과 일치라는 이 상반된 상황은 어떤 국가 사회 혹은 집단에 국한시킬 수 없다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자기 안에서 일치를 이룰 수 없는 사람이 세계 안에서 일치를 이룰 수 있을까?

 

일과 쉼은 자기 안에서 일치를 이루는 창조의 리듬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활동과 기도의 균형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마르타와 마리아의 통합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일과 쉼이라는 균형이 깨지만 인간은 도구적 존재로 전락하게 된다. 혹은 자기우상화나 일 중독증, 워크홀릭에 빠지게 된다.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31절) 오고 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던 것이다.(31)

 

이를 헨리 J.M. 나웬 신부님은 보편적 사도직에 대해 『상처 입은 치유자』에서 다음과 같이 전한다.

 

치유는 환대로부터 시작된다. 환대는 우리가 마음속에 있는 두려움이라는 편협성을 타파하고 구원이 우리에게 지친 나그네의 모습으로 올지도 모른다는 직감에서 낯선 사람에게 우리 집의 문을 열어주도록 하는 미덕이다. 그러므로 환대는 불안한 재자들을 그리스도의 힘 있는 증인으로 만든다. 의심이 많은 소유자를 관대한 시혜자로 만들며, 폐쇄적이고 종파심이 강한 사람을 새로운 생각과 통찰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잘 받아들일 수 있는 개방적인 사람으로 만든다. 그렇기에 치유력으로서의 환대는 첫째로 자기 집에서 편안하게 쉬는 주인이 필요하다. 둘째로 그는 예기치 않는 방문객을 위한 자유롭고 두려워 할 것이 없는 자리를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환대는 집중과 공동체라는 두 가지 개념을 내포하고 있다.

 

집중과 공동체라는 것에서, 파견받은 사람은 상처가 없는 사람이 아니다. 파견받은 사람은 자신이 어떤 수혜자의 위치에 있는지를 바라보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신이 타인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가에 초점이 맞춰지면 그는 자칫 기형적인 파견자가 될 수 있다. 자기자신이 신으로부터 어떤 사랑을 받고 이 세상에 파견받았는지를 아는 것이 집중이라고 할 수 있다. 자기 영혼의 움직임에 집중할 수 있을 때, 산다는 것이 사랑하는 것임을 알게 된다. 아무런 의향도 갖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주위를 기우리려는 사람은 자기 집에서(하느님의 집에서) 편안하게 있어야 한다. 즉 그는 자기 인생의 중심을 자기 마음속에서 발견해야 한다. 그것이 쉼이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의 상처를 치유의 원천으로 만드는 데는 개인의 표면적 고통을 나누는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고통과 고뇌는 모든 사람과 함께하고 있는 인간 상황의 ‘깊은 데서’ 나타나는 것으로서, 사랑의 상처와 고통을 기꺼이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인간상황의 깊은 데서는 나도 당신과 똑같은 고통을 경험을 해서 아는데, 라는 피상적인 공감이나 조언이 아니다. 밤새 고기를 잡지 못하던 제자들에게 루카 복음에서는 ‘깊은 데로 저어 나아가’, 요한 복음에서는 ‘오른쪽으로’ 등으로 다르게 표현하고 마르코 복음사가는 ‘외딴 곳에서의 쉼’이라고 표현한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루카5,4) 어부를 제자로 부르시다는 부분에서 그물을 배 오른쪽으로 던져라. 그러면 고기를 잡을 것이다(요한21,6)라는 부분에서 알 수 있듯, 쉼은 그분의 음성을 듣는 시간이다. 자신의 영혼을 체험하는 시간이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34절)

 

여기서 34절에서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는 것에서 군중들의 어떤 근본적인 배고픔이 무엇인가를 그분이 보셨을 거라는 것을 추론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제자들에게 쉼이 그들의 활동을 완성하는 생명의 싸이클이라는 사실을 보았다면 군중들의 가엽게 여기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는 희랍어 동사 스플랑크니조마이(σπλαγχνίζομαι)로 ‘창자가 움직이다’, ‘창자가 끊어지도록 감동을 받다’, ‘측은지심(가엾은, 불쌍한 마음)이 들다’로 번역된다. 우리말 중에 ‘애 끓는다’는 표현과 비슷하다. 예수님에게 ‘본다’와 ‘마음의 움직임’은 나눠져 있지 않다. 본다는 것은 다가가는 것과 동일하다. 스플랑크나는 내장, 애타는 마음, 사랑에서 유래되었으며 이것은 심장, 폐, 간 같은 신체부위를 뜻하며, 몸과 마음과 영혼이 하나가 된 사랑의 상태(상처)를 의미한다. 미사 중에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 긍휼의 의미라고 할 수 있다. 군중을 보고 가엾이 여기시며(마태오14,14), 눈먼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며(마태오20,34), 나병환자를 불쌍히 여기시고(마르코1,41), 아버지께 돌아온 탕자를 측은히 여겨(루카15,20), 등에서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예수성심의 그 원천에 인간을 바라보는 <가엾은 마음>이 있다는 것을 바라볼 수 있다.

 

그렇다면 군중들을 바라보고 가엾은 마음이 든 이유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해 본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다는 것은 31절의 결여에서 바라볼 수 있다. 어느 시대나 그 시대의 양들을 이끌고 가는 목자들이나 지도자들이 있다. 그들이 내세우는 대의명분은 모두 예레미야 예언자가 예언한 대로 정의와 공정이다. 그러나 그 화려한 대의명분을 실현하려는 이들에게 쉼이 없었다는 것이다. 쉼은 정의와 공정이 어디서 유래되었는지 그 출처를 심장에 각인하고 성찰하는 시간을 필요로 한다.

 

쉼이 단순이 어디 경치 좋은 곳에 가서 같은 문화를 공유하는 이들끼리의 여행이 아니다. 쉼은 창조의 방향키를 잡는 고독과 심연의 시간이다. 사실 일보다 쉼이 더 어렵다고 할 수도 있다. 군중들이 가여웠던 것은 다음주 복음인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의 근본적인 동인을 해명하는 키워드에 해당한다. 군중들은 배고픔이라는 집단무의식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것을 그분은 쉽게 간파하셨을 것이다. 그들 자신도 모르는 배고픔! 그것은 군중을 이끄는 목자들이 철저하게 세상에 세뇌당했다는 것을 반증한다. 배고픈 사람을 또 다른 배고픈 이가 헤어날 수 없는 배고픔으로 끌고 갔다는 것이다. 인류의 배고픔을 고착화 시켰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자신의 배고픔을 안다는 것은 진정한 활동과 깊은 쉼 속에서 바라보게 되는 은총의 순례이기도 하다.

 

 

 

글을 마치며,

 

그때에 30 사도들이 예수님께 모여 와,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을 다 보고하였다. 31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오고 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던 것이다. 32 그래서 그들은 따로 배를 타고 외딴곳으로 떠나갔다. 33 그러자 많은 사람이 그들이 떠나는 것을 보고, 모든 고을에서 나와 육로로 함께 달려가 그들보다 먼저 그곳에 다다랐다. 34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