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피캇(Magnificat)

아포스텔로ἀποστελλω사도 파견, 무엇으로부터의 자유에서 무엇에로의 자유로!

나뭇잎숨결 2024. 7. 13. 07:53

 

순애 데레사가, 탱큐!

 

 

아포스텔로ἀποστελλω 사도, 파견 , 무엇으로부터의 자유에서 무엇에로의 자유로!

-연중15주, “예수님께서 그들을 파견하기 시작하셨다.”를 중심으로

 

 

 

 

 

 

1. 폴 엘뤼아르, 『자유』

 

 

 

나의 노트 위에 / 나의 독서대와 나무 위에 /모래 위에 눈 위에/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내가 읽은 모든 책장 위에/모든 백지위에/돌과 피와 종이 혹은 재위에 /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금빛의 이미지 위에/전쟁의 총칼 위에 제왕의 왕관 위에/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정글과 사막 위에/새 둥지 위에, 금작화 위에/내 유년의 메아리 위에/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밤의 경이로움 위에/일상의 흰 빵 위에/약혼시절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나의 쪽빛의 옷 조각 위에/곰팡이 간 쓴 태양의 연못 위에/생기 있는 달의 호수 위에/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들판 위에, 지평선 위에/새들의 날개 위에/그리고 어둠의 풍차 위에/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매번 밀려오는 여명 위에/바다 위에, 배 위에/미친듯한 산 위에/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부드러운 구름 위에/폭풍의 땀방울 위에 두텁고 희미한 빗방울 위에/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반짝거리는 것들 위에/색색이 다른 빛의 종 위에/현실적인 진리 위에/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선명한 오솔길 위에/펼쳐진 커다란 길 위에/넘쳐나는 광장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불이 켜진 등불 위에/불이 꺼진 등불 위에/가족이 모인 집 위에/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둘로 쪼개진 과일 위에/단단한 거울과 내 방 위에/빈 조개 껍데기 내 침대 위에/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게걸스럽고 정다운 나의 강아지 위에/그의 쫑긋 솟은 귀 위에 서투른 뒷다리 위에/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내 문의 발판 위에/친근한 물건들 위에/축복이 가득한 불길 위에/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조화로운 모든 살결 위에/내 친구들의 얼굴 위에/내미는 모든 손 위에/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뜻밖의 소식이 담긴 창문 위에/긴장된 입술 위에/침묵을 넘어/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파괴된 나의 은신처 위에/무너진 등대 위에/내 권태의 벽 위에/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욕망 없는 부재 위에/벌거벗은 외로움 위에/죽음의 계단 위에/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회복된 건강 위에/사라진 위험 위에/추억이 없는 희망 위에/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그리고 말의 힘으로/나는 내 삶을 다시 시작한다/나는 너를 알기 위해/너를 부르기 위해 태어났다, 자유여!

 

폴 엘뤼아르 (1895~1952) 하면 문학사에서 그를 초현실주의자 저항시인이라는 상반된 평가를 하고 있다.

 

시인 허연은 엘뤼아르에 대해 이렇게 쓴다. "우리가 저항시인 엘뤼아르를 기억하는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그가 단 한 순간도 사랑을 저버린 적이 없는 낭만적인 시인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오로지 목표에만 부합하는 구호 같은 투쟁시만 썼다면, 또 만일 시대의 아픔에 눈을 감은 채 감미로운 사랑만 노래했다면 우리는 그를 위대한 시인으로 기억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는 두 가지를 다 노래했다. 둘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시대정신이었고, 그가 살아냈던 삶의 정직한 모습이었으므로. 엘뤼아르는 온 정신으로 그가 살았던 시대를 증거했다.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한 치의 비겁함도 없이 자기가 살았던 시대를 증언했다. 그리고 그 증언은 구호가 아닌 아름다운 '연시(戀詩)'이기도 했다."

 

 

폴 엘뤼아르, 『자유』 는 실존의 양극단을 하나로 바라본 진정 영혼이 자유롭고자 했던 시인 자신의 자기 고백이었다. 자유는 갈망하는 순간 이루어진 상태이기 때문이다. 자유는 어떤 실존적 상황에 묶여 있을 수 없는 인간의 원천적인 고향이기 때문이다. 자유는 정치적이고 실존적인 어떤 상황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고 그의 존재의 <있음>을 지시하기 때문이다.

 

 

 

 

르네 마그리트, 대가족(1963)

 

 

 

 

2. "그는 ‘권위’를 존중하고 그것에 복종하는 경향을 보이지만, 동시에 스스로 ‘권위’의 주체가 되기를 원하고, 다른 사람들을 자신에게 복종하게 만든다." (에릭 프롬 『자유로부터의 도피』중에서)

 

 

 

인간의 자유에 대해 말할 때, 에릭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지나칠 수가 없다.

 

에릭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는 근대인들에게 개인에게 안전을 보장해주는 동시에 개인을 속박하던 전개인주의 사회의 굴레에서는 자유로워졌지만, 개인적 자아의 실현, 즉 개인의 지적· 감정적· 감각적 잠재력의 표현이라는 적극적 의미에서의 자유는 아직 획득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자유는 근대인에게 독립성과 합리성을 가져다주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개인을 고립시키고 그로 말미암아 개인을 불안하고 무력한 존재로 만들었다. 이 고립은 참기 어려운 것이다. 개인이 고립에서 벗어나려면, 자유라는 무거운 부담을 피해 다시 의존과 복종으로 돌아가거나 아니면 인간의 독자성과 개인성에 바탕을 둔 적극적인 자유를 완전히 실현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거나, 둘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 이 책은 예후보다는 진단- 해결보다는 분석- 이지만, 그 결과는 우리의 행동 방침에 영향을 준다. 왜냐하면 자유로부터 도피하려는 전체주의적 경향의 이유를 이해하는 것이 전체주의 세력을 극복하려는 모든 행위의 전제이기 때문이다.

 

존 듀이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의 민주주의를 심각하게 위협하는 것은 해외에 있는 전체주의 국가가 아니다. 우리 자신의 개인적 태도와 우리 자신의 제도 속에는 외적인 권위와 규율, 획일성, 외국의 지도자에 대한 의존이 승리를 거둘 수 있게 해준 조건들이 존재하고, 바로 그것이 우리의 민주주의를 심각하게 위협한다. 따라서 싸움터는 이곳, 우리 자신과 우리 제도의 내부에도 존재한다.

 

원초적 유대는 그의 완전한 인간적 발달을 방해한다. 그것은 인간의 이성과 비판력의 발달을 방해한다. 원초적 유대는 인간이 자신과 타인을 인간으로 인식하지 않고, 씨족이라는 사회적· 종교적 공동체에 참여하는 방법을 통해서만 자신과 타인을 인식하게 한다. 다시 말하면, 원초적 유대는 인간이 스스로 결정을 내리는 자유롭고 생산적인 개인으로 성장하는 것을 방해한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의 측면일 뿐이고, 다른 측면도 있다. 자연과 씨족, 종교와 자신을 이렇게 동일시하는 것은 개인에게 안도감을 준다. 그는 구조화된 전체에 속해 있고, 거기에 뿌리를 내리고, 그 전체 속에 의심할 여지 없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는 굶주림이나 억압에 시달릴 수는 있지만, 모든 고통 중에서도 가장심한 고통-완전한 고독과 의심-은 겪지 않는다.

 

인간의 자유가 성장하는 과정은 우리가 개인의 성장 과정에서 본 것과 같은 변증법적 성격을 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힘과 통합이 증대되는 과정, 자연을 지배하고 인간의 이성이 더욱 강해지고 다른 사람들과의 연대가 강화되는 과정이다. 하지만 이 개체화는 또 한편으로는 고독과 불안이 늘어나고 그로 말미암아 세계에서 자기의 역할에 대한 의심, 자기 삶의 의미에 대한 의심이 강해지고, 그와 함께 개인으로서의 자기가 너무 무력하고 하찮다는 느낌이 강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루터가 설교의 대상으로 삼은 사회 계급에는 자신의 존재가 보잘것 없다는 느낌이 이미 널리 퍼져 있었다. 루터는 이 느낌을 분명히 드러냈을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해결책까지 제시했다. 개인은 자신의 무의미함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극도의 굴욕감을 주어 개인의 의지를 흔적도 남지 않도록 모두 버리면, 그리하여 개인의 힘을 포기하고 비난하면, 신에게 받아들여지기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루터와 신의 관계는 완전한 복종의 관계였다. 심리학적으로 말하면, 믿음에 대한 그의 개념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갖고 있다. 즉 당신이 완전히 복종하고 개인의 무의미함을 인정하면, 전능한 신은 기꺼이 당신을 사랑하고 구해줄 것이다. 당신이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지극히 겸손한 태도로 자신의 개인적 자아를 없애고 그 자아가 지닌 모든 결점과 의혹도 함께 없애버리면, 당신은 자기 존재가 보잘것없다는 느낌에서 해방되어 신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다. 이렇게 루터는 사람들을 교회의 권위에서 해방시켰지만, 그보다 훨씬 압제적인 권위에 복종시켰다. 그것은 바로 신의 권위였다. 신은 인간을 구원해주는 본질적 조건으로 인간의 완전한 복종과 개인적 자아의 절멸을 강요한다. 루터의 '믿음' 은 자신을버리면 사랑을 받게 된다는 확신이었다. 이것은 국가와 '지도자' 에게 개인은 완전히 복종해야 한다는 주의와 많은 공통점을 갖고 있는 해결책이었다.

 

앞 장에서 우리는 프로테스탄티즘의 주요 교리들에 대해 그 심리적 의미를 분석해보았다. 그 분석에 의하면 새로운 종교의 교리는 중세 사회체제의 붕괴와 자본주의의 등장으로 초래된 정신적 요구에 대한 해답이라는 것이다. 또한 이 분석은 두 가지 의미에서 자유라는 문제에 집중했는데, 중세 사회의 전통적 유대 '로부터' 해방된 것은 독립이라는 새로운 느낌을 개인에게 주었지만, 그와 동시에 고독과 고립을 느끼게했고, 회의와 불안으로 그를 가득 채웠으며, 결국 그를 새로운 복종과 강박적이고 비합리적인 행동으로 몰아넣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프로테스탄티즘의 교리를 통해 인간은 근대의 산업 사회 체제에서 자신이 맡아야 할 역할에 대한 심리적 준비를 갖추었다. 이 사회 체제와 그 실제, 그리고 그 체제에서 생겨나 삶의 모든 측면에 파급되는 정신은 인간의 인격 전체를 형성했고, 우리가 제3장에서 논한 모순을 더욱 강조했다. 근대의 사회 체제는 개인을 발달시켰지만 그를 더욱 무력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자유를 증가시켰지만 새로운 종류의 의존을 낳았다. 우리는 자본주의가 인간의 성격 구조 전체에 미친 영향을 설명하려고는 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 일반적인 문제의 한 측면, 즉 자유가 성장하는 과정의 변증법적 성격에만 중점을 두기 때문이다. 우리의 목표는 근대 사회의 구조가 동시에 두 가지 면으로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즉 인간은 더 독립적, 자립적, 비판적이 되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더 고립되고 고독해지고 두려움에 사로잡혔다는사실이다. 자유라는 문제 전체를 이해하려면, 자유의 성장 과정이 지닌 두 측면 가운데 한쪽을 따라가느라 다른 한쪽을 놓치는 일이 없이 양면을 모두 볼 수 있어야 한다.

 

근대인의 고독감과 무력감은 그의 모든 인간관계가 지니고 있는 특징 때문에 더욱 강해진다. 개인과 개인의 구체적인 관계는 직접적이고 인간적인 성격을 잃고, 속임수와 수단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모든 사회적 관계와 개인적 관계를 지배하는 규칙은 시장의 법칙이다. 경쟁자들 사이의 관계가 상대에 대한 인간적 무관심에 바탕을 두어야 하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러지 않으면 그들 가운데 누군가는 경제적 과업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게 된다. 그들은 서로 싸워야 하고, 필요하다면 상대를 경제적 파멸로 몰아넣는 일도 불사하게 될 테니까.

 

이제 나는 핵심적인 문제에 도달했다. 피학적 도착과 피학적 성격 특성의 뿌리는 각각 무엇인가? 그리고 피학적 충동과 가학적 충동의 공통된 뿌리는 무엇인가? 그 대답이 놓인 방향은 이 장 첫머리에 이미 암시되어 있다. 피학적 충동과 가학적 충동은 둘 다 개인이 견딜 수 없는 고독감과 허무감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주는 경향이 있다. 피학적인 사람을 정신분석적으로 또한 경험적으로 관찰해보면, 그들이 외로움과 허무감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숱한 증거를 통해 알 수 있다(여기서 그 증거를 인용하자면 이 책의 범위를 넘어설 수밖에 없다). 이 감정은 의식되지 않는 경우가 많고, 흔히 탁월함과 완벽함이라는 보상적 감정으로 은폐된다. 하지만 그런 사람의 무의식적인 움직임을 깊이 꿰뚫어보면 그 감정들을 반드시 발견하게 된다. 개인은 자기가 부정적인 의미에서 '자유롭다'는 것. 즉 자신의 자아와 함께 혼자서 서먹서먹하고 적대적인 세계와 맞서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 상황에서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나오는 뛰어난 서술을 인용하면, "인간이라는 불운한 동물은 자유라는 타고난 선물을 되도록 빨리 넘겨줄 수 있는 누군가를 찾고 싶은 욕구보다 더 긴급한 욕구를 갖고 있지 않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개인은 자신의 자아를 붙들어맬 수 있는 사람이나 사물을 찾는다. 그는 자신의 개체적 자아로 존재하는 것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 자아를 제거하고 이 부담에서 벗어나 다시 안전감을 느끼려고 미친 듯이 애쓴다.

 

권위주의적 성격의 본질은 가학적 충동과 피학적 충동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으로 설명되었다. 가학증은 타인에 대해 파괴성이 다소 섞인 무제한의 지배력을 지향하는 것으로 이해되었고, 피학증은 압도적으로 강한 힘 속에 자신을 용해시켜 그 힘의 영향력과 영광에 참여하기를 지향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가학적 경향과 피학적 경향은 둘 다 고립된 개인이 고독을 참지 못하고 그 고독을 극복하기 위해 공생 관계를 필요로 하는 데에서 생겨난다.

 

자발적인 활동이 어째서 자유라는 문제의 해답이 될 수 있는가? 앞에서 우리는 소극적인 자유가 개인을 고독한 존재로 만들고, 그래서 개인과 세계의 관계는 멀어지고 불신으로 가득 차며, 개인의 자아는 약해지고 끊임없이 위협받는다고 말했다. 자발적인 활동은 인간이 본래 모습을 희생하지 않고 고독의 공포를 극복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이다. 자아를 자발적으로 실현함으로써 인간은 자신을 다시 세계와-인간과 자연 및 자신과-통합하기 때문이다. 사랑은 그런 자발성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요소다. 이 사랑은 자신을 다른 사람 속에 용해시키는 것으로서의 사랑도 아니고, 다른 사람을 소유하는 것으로서의 사랑도 아니고, 다른 사람을 자발적으로 긍정하는 것으로서의 사랑, 개체적 자아를 보존하는 것을 토대로 하여 그 개인을 다른 사람과 결합시키는 것으로서의 사랑이다. 사랑의 동적인 성질은 바로 이 양극성에 있다. 사랑은 분리를 극복하고 싶은 욕구에서 생겨나 완전한 일체로 이어진다. 하지만 개인이 제거되지는 않는다. 일은 자발성을 이루는 또 하나의 구성요소다. 이 일은 고독에서 벗어나기 위한 강박적 활동으로서의 일도 아니고, 부분적으로는 자연을 지배하고 부분적으로는 인간의 손으로 만든 생산품을 숭배하고 그 생산품으로 자연을 노예화하는 관계로서의 일도 아니고, 인간이 창조 행위를 통해 자연과 하나가 되는 창조로서의 일이다. 사랑과 일에 적용되는 것은 모든 자발적 행동에도 적용된다. 감각적 행동에는 모두 적용된다. 감각적 쾌락을 자각하는 것이든 공동체의 정치 활동에 참여하는 것이든 자발적 행동에는 모두 적용된다. 그것은 자아의 개별성을 확인하는 동시에 인간과 자연을 자아와 결합시킨다. 자유에 내재하는 기본적인 양분성, 즉 개성의 탄생과 고독의 고통은 인간의 자발적인 행동으로 더 높은 차원에서 해소된다.

 

자유가 근대인에게 이중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이 책의 주제였다. 즉 근대인은 전통적 권위로부터 해방되어 '개인' 이 되었지만, 동시에 고독해졌고 무력해졌을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이나 타인들로부터 소외되어 자기 바깥에 있는 목적의 도구가 되었다는 것, 더욱이 이 상태는 그의 자아를 은밀하게 해치고, 그를 약화시키고 위협하여 새로운 종류의 속박에 기꺼이 복종하게 한다는 것이다. 반면에 적극적인 자유는 능동적이고 자발적으로 사는 능력과 함께 개인의 잠재력을 충분히 실현하는 것과 동일하다. 자유는 임계점에 도달했다. 이 임계점에 도달하면, 자유는 자체의 활력이 지닌 논리에 떠밀려 정반대로 바뀔 위험이 있다. 민주주의의 미래는 르네상스 이래 근대 사상의 이념적 목표였던 개인주의의 실현에 달려 있다. 오늘날의 문화적· 정치적 위기는 개인주의가 너무 많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개인주의라고 믿고 있는 것이 빈겹데기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자유의 승리는 민주주의가 발달하여 개인 및 그의 성장과 행복이 문화의 목표이자 목적이 되는 사회, 성공 따위로 삶을 정당화할 필요가 없는 사회, 또한 개인이 국가든 경제 기구든 자기 바깥에 있는 어떤 힘에도 종속되거나 휘둘리지 않는 사회, 끝으로 개인의 양심과 이상이 외부 요구의 내재화가 아니라 정녕 '자기 것'이고 그의 자아가 지닌 독특성에서 비롯된 목표를 표현하는 사회가 이루어져야만 가능하다. 이런 목표는 근대 이전에는 충분히 실현될 수 없었다. 진정한 개인주의가 발달하는 데 필요한 물질적 토대가 부족했기 때문에, 그 목표는 거의 이념적 목표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자본주의는 이 전제를 만들어냈다. 생산 문제는 적어도 원칙적으로는 해결되었고, 우리는 경제적 결핍 때문에 경제적 특권을 얻으려고 싸울 필요가 없는 풍요로운 미래를 상상할 수 있게 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문제는 조직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인간이 사회적 · 경제적 힘의 노예 신세에서 벗어나 그 힘의 주인이 될 수 있도록 그런 힘들을 조직화하는 것이다.

 

『소유냐, 존재냐』, 『사랑의 기술』등을 통해, 인간이 직면한 존재론적 층위를 예리하게 짚었던 철학자이자 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의 주저 『자유로부터의 도피』는 에리히 프롬의 육성과 숨결을 현대인의 정신적 상황에 대한 강력한 통찰 자유로부터의 도피는 중세 사회의 붕괴로 생겨난 인간의 불안이라는 현상을 분석한 책이다. 중세 사회에는 많은 위험이 존재했지만, 인간은 그 안에서 보호를 받으며 안전하다고 느꼈다. 수백 년 동안 열심히 노력한 끝에 인간은 꿈도 꾸어보지 못했던 물질적 부를 쌓아올리는 데 성공했다. 인간은 세계 곳곳에 민주주의 사회를 건설했고, 최근에는 전체주의의 새로운 책동에 맞서 자신을 지키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근대인이 아직도 불안하다는 것이다. 불안한 인간은 온갖 부류의 독재자들에게 자신의 자유를 넘겨주거나, 스스로 기계의 작은 톱니가 되어 호의호식하지만, 자유로운 인간이 아니라 자동인형 같은 인간이 되고 싶은 유혹에 사로잡힌다.

 

인간에게는 두 개의 길이 있다, 자유는 근대인에게 독립성과 합리성을 가져다주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개인을 고립시키고 그로 말미암아 개인을 불안하고 무기력한 존재로 만들었다. 그 세계에서의 모든 사람과 모든 사물이 도구화되었고, 그는 자기 손으로 만든 기계의 일부가 되어버렸다. 그는 자기가 생각하고 느끼고 원해야 한다고 믿는 것을 생각하고 느끼고 원한다. 바로 이 과정에서 그는 자신의 자아를 상실하지만 자유로운 개인의 진정한 안전은 모두 그 자아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 개인이 고립에서 벗어나려면, 자유라는 무거운 부담을 피해 다시 의존과 복종으로 돌아가거나 아니면 인간의 독자성과 개인성에 바탕을 둔 적극적인 자유를 실현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거나,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 그중 하나의 길을 통해서 그는 적극적인 자유로 나아갈 수 있고, 사랑과 일 속에서 자신의 감정적·감각적·지적 능력을 진정으로 표현하면서 바깥 세계와 자연스럽게 관계를 맺을 수 있으며, 그리하여 자신의 개체적 자아의 독립성과 본래의 모습을 포기하지 않고도 인간과 자연 및 그 자신과 다시 일체가 될 수 있다.

 

그에게 열려 있는 또 하나의 길은 뒤로 물러나 자신의 자유를 포기하고, 그의 개체적 자아와 세계 사이에 생겨난 간격을 제거함으로써 자신의 외로움을 극복하려고 애쓰는 것이다. 이 두 번째 길은 그가 개인으로 결합되기 전과 같은 방식으로 세계와 그를 다시 통합시키지 못한다. 그와 세계의 분리는 결코 되돌릴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 두 번째 길은 참을 수 없는 상황에서 벗어나는 길이다. 그 상황이 오래 계속되면 도저히 살 수가 없기 때문에 거기에서 도피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두 번째 길을 특징짓는 것은 그 강박적인 성격이다. 또 다른 특징은 개성과 자아의 본모습을 완전히 포기하는 것이다. 인간은 이제 더 이상, 자기가 만든 세계의 주인이 아니다. 반대로 인간이 만든 세계가 그의 주인이 되었다.

 

심리학적인 각도에서 자유의 문제에 접근하다. 프롬이 서 있는 심리학적 입장은 이른바 신프로이트학파 또는 프로이트 좌파라고도 불리는 입장이다. 간단히 말하면 신프로이트학파는 사회학화된 프로이트주의다. 프로이트는 리비도를 생물학적이고 성욕에 뿌리를 둔 근본 충동으로 가정하고 있지만, 신프로이트학파에서는 사회적인 인간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충동이나 욕구를 상정함으로써, 프로이트의 모든 것을 성으로 뒤덮어버리는 범성주의(汎性主義)를 극복하고 있다. 이런 극복을 통해 프로이트의 천재적 통찰을 충분히 살리는 동시에 프로이트의 사회적 반동성을 극복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역사를 움직이는 힘은 과연 무엇인가? 프롬에 따르면 그것은 사회경제적 조건, 이데올로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회적 성격'이다. 이 사회적 성격이라는 개념을 새로 제시한 데 이 책의 큰 매력이 있다. 이것은 ‘부록’으로 딸린 ‘성격과 사회 과정’에 자세히 나오지만, 여기에서 세 명의 거인 사상가인 마르크스, 막스 베버, 프로이트를 인용하고 있는 점에 유념해주기 바란다. 말할 것도 없이, 역사를 움직이는 최종적인, 또는 특히 유력한 요인으로서 사회경제적인 것을 생각한 사람은 마르크스이고, 이데올로기적인 것을 생각한 사람은 베버이고, 인간의 심층 깊숙한 곳에 있는 근원적 충동(여기에서 개성이라는 개념과 사회적 성격이라는 개념이 생겨난다)을 생각한 사람은 프로이트이다. 프롬은 그중 어느 것이 결정적인 최종적 요인이라고 단정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프롬이 특히 주의를 환기시키려 한 것은 사회경제적 요인과 이데올로기와 함께 역사에서 맡고 있는 사회적 성격의 역할이었다.

 

자유의 심리학적 측면을 분석하다. 문제의 중점은 르네상스 및 종교개혁 이래 인간을 종래의 속박으로부터 해방해온 자유의 원리와 인간에게 고독감과 무력감을 주는 부정적 측면이 서로 얽혀 있었다는 것을 지적하는 데 있다. 그 결과 인간은 자유의 부담을 견디다 못해 나치즘 같은 전체주의 이데올로기를 적극적으로 희구하게 되기까지 한다. 그래서 자유가 무거운 부담이 되는 곳에서는, 민주주의 사회에서도 나치즘이나 파시즘의 심리적 온상이 존재한다. 프롬이 현대인의 운명에 대해 논하고 있는 점은, 충분히 민주주의적이지도 않고 충분히 기계주의적이지도 않은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도 충분히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충분히 민주주의적이지 않은 사회에서는 위에서 강제된 ‘민주주의’는 더욱 획일적이 될 것이고, 충분히 기계주의적이지 않은 사회에서는 간신히 작동되는 기계는 더욱 불쾌한 독소를 내뿜을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매스컴이 조장하고 있는 현대인의 최면 상태는 동서양을 불문하고 공통된 현상이다. 따라서 자유가 주어져 있느냐 하는 문제와 함께 자유를 보람 있게 쓸 수 있느냐가 당연히 큰 과제가 된다.

 

 

 

 

 

 

제임스 티소, <제자들을 두 명씩 파견하시다>

 

 


 

 

3. <예수님께서 그들을 파견하기 시작하셨다.> 마르코 6,7-13

 

 

 

그때에 예수님께서 7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8 그러면서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9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시작하셨다.8 그러면서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10 그리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디에서나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고장을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물러라. 11 또한 어느 곳이든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으면, 그곳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밑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 12 그리하여 제자들은 떠나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하였다. 13 그리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 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파견하기 시작하셨다.>라고 전하는 마르코 6,7-13은 마태오13, 54-58/루카4, 16-30에 공통으로 전하는 열두제자의 파견사화로 제자들이 어떻게 예수님의 지체로 거듭날 수 있었는지, 또 억압되어 있는 이들을 어떻게 거듭나게 했는지를 통해 제2의 창조가 무엇인가? 하는 포괄적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한다.

 

마르코 6,7-13가 전하는 파견사화의 전체적인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안식일에 있었던 세 번의 회당사건과 제자들의 선택과 파견, 그리고 이어지는 세례자 요한의 죽음이라는 사건 안에서 제자들의 파견사화가 갖는 복음의 연속성에 무게중심이 놓여 있음을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복음의 연속성은 바로 오늘 우리가 매 미사 때마다 파견되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에서 제자들의 파견사화는 곧 오늘, 우리의 파견됨으로 연결된다고 할 수 있다.

 

첫 제자를 부르심(1,16-20)과 첫 번째 가파르나움 회당사건(1, 21-28), 열두 제자의 선정(3,13-19)과 두 번째 가파르나움 회당사건(3, 1-6), 지난주에 묵상한 나자렛 회당사건(6,2-6)과 12제자 제자 파견(6, 7-13), 그리고 이어지는 세례자 요한의 죽음(6,14-29)은 유대교 공동체가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 나라의 복음전파에 큰 장애를 초래하는 공동체라는 점에서 제자공동체와 대척점에 놓이게 된다. 그것은 유대공동체가 인간의 근원적인 하느님의 자유를 매개로 하지 않고, 인간의 온갖 고통과 억압을 고착화하면서 선민사상을 독점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이어지는 세례자 요한의 죽음에서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면 알 수 있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은 결국 예수의 최후에 대한 선험적 죽음을 예표한다는 점에서 열두 제자의 파견은 복음의 연속성에서 메시야의 시대란 곧 사도의 시대라는 중첩과 변곡점를 시사한다고 할 수 있다. 그 중첩과 변곡점을 끌어가는 단어가 <권위와 파견>이라는 어휘의 근원에 다가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복음사가는 제자 파견이 갖는 복음의 연속성에서 파견하는 분이 바로 예수에게서 나오는 <권위>임을 몇 번에 걸쳐 거듭 강조한다.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7절)에서 예수의 권위와 권능, 즉 말씀에 온전히 순응하였을 때, 제자들은 예수의 지상생활을 그대로 재현할 수 있었다는 것이 초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더러운 영들에 사로잡히지 않는 자만이 파견의 임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제자들에게 위임되었던 ‘권한’은 곧 영적인 자유의 또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둘씩' 짝지어 파견하셨다는 것(7절)에서, 증언의 타당함(신명기17,6), 신앙공동체의 본보기로써(사도8,14/15,36-40) 파견받은 제자들이 소명을 다할 때, 즉 예수의 대리인으로 일할 때, 얻어지는 복음의 열매란. 개인의 카리스마에 의해 열매 맺는 것이 아님 역시 시사한 것이다. 파견된 두 사람이 하나가 된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님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는 나는 무엇이 부족한 사람이고, 너는 무엇이 결핍된 사람이라는 것이 복음 전파에 장애가 아니란 사실과 연결된다.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가 한 팀이 되어 파견되었다고 가정해 보면 알 수 있다. 완전히 자유로워진 다음에 파견되는 것이 아니라 파견됨으로써 자유로워진다는 점에서 파견의 주체와 객체는 사실 구분되지 않는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현존이란 무엇인가를 파견된 자가 먼저 나로부터, 구리고 너와 나로 자유를 체험해야 함을 적어도 인식하는 겸손이 있어야 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야 바오로 사도의 통찰처럼 하느님 나라를 향해 다른 사람들에게 달리자고 해놓고 자신이 실격되는 모순을 범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8절)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9절)

 

이어지는 7절과 8절에서, 제자들에게 아무 것도 지니지 말라고 하신 무소유 혹은 청빈의 지침은, 복음전파는 스승 예수처럼 길위의 노마드라는 사실을 1차적으로 강조한 것이다. 그들이 지닌 자원은 예수께 받은 권위가 전부라고 할 수 있다. 이 권위는 무소유 혹은 청빈에 대한 지침으로 제자들의 고행에 초점이 아니다. 왜 파견된 자에게 청빈을 요구하는가를 묵상하는 것은 권위의 궁극적인 원천은 물질조차 넘어선, 창조의 근원이고 그 창조의 근원에서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무엇인가에 대한 깊은 은총을 만나게 된다.

 

그렇기에 물질적 자원에서 영적 자원으로 인식이 바뀔 때, 길위의 사람은 먼 길을 떠나 파견의 의무를 다하기 보다는 아주 가까운 주변의 사람들에게서부터 복음의 메시지를 전해야 한다는 것과도 만나게 된다. 물질적인 고행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복음의 기쁨이 그 무엇보다 복음전파에서는 중요한 메시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디에서나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고장을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물러라.(10절)

 

파견의 여정에서 어느 지역에 들어가서든 자신들에게 호의를 베푼 첫 임지에서 머물러야지 좀 더 나은 편의를 구하기 위해서 이리저리 떠돌지 말아야 한다는 지침 역시 정신의 무소유를 요구하신다는 점에서 물질의 청빈과 같은 무소유의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제자들의 마음과 에너지가 오로지 복음전파의 사명 완수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과 지역교회 공동체를 여는 바탕이 무엇인가를 제시한 것이기도 하다. 복음 선포에서 '더 좋은 곳'과 ' 덜 좋은 곳'이 없다는 점이다. 어디든 계시는 그리스도의 현존을 체험하고 전하는 것이 파견된 자의 유일한 기쁨일 것이기 때문이다. 명동성당으로 발령받는 것이 승진이고, 시골 본당이나 공소에 부임되는 것이 죄천이 아닌 것과 같은 맥락이다. 

 

또한 '어느 곳이든'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으면, 그곳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밑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11절)

 

또한 제자들이 전한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에는 발밑의 먼지를 털어버리라는 유대인의 제의적 불결함에 대한 행위를 끌어들여, 제자들이 하는 행위의 공식적인 증거와 친교의 중요성, 복음을 거부하는 이들에게 닥칠 위험에 대한 경고를 동시에 드러낸다. 이 역시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이 당할 불행, 달리 말하자면 예수의 권위가 단지 무서운 복종의 의미가 아니라 자유의 의미에 초점을 맞춘 것임을 시사한 것이다. 너희는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아서 벌 받는다가 아니고, 복음을 모르기에 진정한 자유를 결코 알 수 없다는 것이 초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복음을 전하는 이들은 씨뿌리는 농부처럼 말씀을 받아들이는 이들의 결정이나 반응이 얼마나 중대한 선택인가를 도와주어야 하되, 그들의 반응이나 결정, 결과에 연연하지 말라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복음을 선포하는 자는 그 열매가 아니라 자신들이 예수의 권위와 말씀에 전적으로 동참했는가의 책임만 있을 뿐이다. 달리말해  복음을 전하면서, 그로인해 그대는 자유로워졌는가 하는 것이 초점이라고 할 수 있다. 궁극적으로 선교의 주체는 하느님 혹은 성령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도 고향사람들에게 배척받으셨을 때, 그들을 설득하려 하지 않고 다른 마을에서 가서 복음을 전하셨듯, 제자 공동체 역시 예수의 선교방식을 그대로 모델링 할 것을 요구한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예수의 공생활 전체가 그 무엇에도 억압되지 않는 자유였듯, 복음을 전하는 자, 그 누구라도 진정 자유롭거라, 라는 제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떠나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하였다.(12절) 그리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 주었다.(13절)

 

제자들은 떠나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하였다는 12절은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접점이기도 하다. 광야에서 회개하라고 외쳤던 세례자 요한, 자유인 가운데 자유인 이었던 세례자 요한, 그 제자들이 이미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듯, 회개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역시 복음의 연속성이라는 측면에서 바라볼 수 있다. 제자들은 예수의 권위에 힘입어 마귀를 쫒아내고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주면서 병자성사의 기원을 열었다.(야고5,14)

 

여기서 파견된 자, 즉 제자들의 면면을 우리는 이미 잘 알 고 있다. 그들을 통해 하느님의 권능이 어떻게 드러날 수 있는가(2코린토12, 9-10), 하느님의 일을 완수하는 것은 우리의 능력이나 역량이 아니라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내려주시는 하느님의 힘, 성령께서 이뤄 주신 은총(권위)임을 알 수 있다.

 

선교의 주체가 곧 하느님의 권위가 수렴되는 곳, 아모스 예언자와 바오로 사도는 다음과 같이 파견하신 분이 누구신가? 또 파견의 열매는 누가 맺으시는가?라는 파견의 완성에 대해 전한다.

 

<가서 내 백성에게 예언하여라.> (아모스 7,12-15)에서, 나는 예언자도 아니고 예언자의 제자도 아니다. 나는 그저 가축을 키우고 돌무화과나무를 가꾸는 사람이다. 15 그런데 주님께서 양 떼를 몰고 가는 나를 붙잡으셨다. 그러고 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여라.’”

 

<하느님께서는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 (에페소서 1,3-14)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속량을, 곧 죄의 용서를 받았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그 풍성한 은총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 8 하느님께서는 이 은총을 우리에게 넘치도록 베푸셨습니다. 당신의 지혜와 통찰력을 다하시어, 9 그리스도 안에서 미리 세우신 당신 선의에 따라 우리에게 당신 뜻의 신비를 알려 주셨습니다. 10 그것은 때가 차면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머리로 하여 한데 모으는 계획입니다. 11 만물을 당신의 결정과 뜻대로 이루시는 분의 의향에 따라 미리 정해진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한몫을 얻게 되었습니다. 12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이미 그리스도께 희망을 둔 우리가 당신의 영광을 찬양하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연중15주, <예수님께서 그들을 파견하기 시작하셨다.> 라고 전하는 마르코 6,7-13과 “나는 예언자도 아니고 예언자의 제자도 아니다. 나는 그저 가축을 키우고 돌무화과나무를 가꾸는 사람이다. 15 그런데 주님께서 양 떼를 몰고 가는 나를 붙잡으셨다.”(아모스 7,12-15),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 (에페소서 1,3-14)가 공통으로 전하는 메시지는 하느님의 권위와 파견은 곧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연결되어 있음을 바라볼 수 있을 듯하다.

 

먼저, 권외와 파견의 관계로부터 어떻게 자유가 생성되는지 생각해 보기로 한다. 게르하르트 킷털외, 『신약성서 신학사전』, X.레옹뒤푸르, 「사도」, 『신학전망』46 (1979/9)에서,

 

권위(權威)는 제도나 이념 또는 인격이나 지위 등이 그 가치의 우위성을 공인해 주고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부여한 능력이나 위신을 말한다. 권위는 자신이 주장한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보통 신약성서에서 말하는 권세나 권위는 '엑수시아(ἐξουσία)'에서 나온 말로 엑수시아(ἐξουσία)는 에크(ἐκ)와 에이미(εἰμί)의 합성어로. (ἐξουσία = ἐκ + εἰμί) 에크(ἐκ)는 영어의 from(~로부터)의 의미이고, 에이미(εἰμί)는 to be(~이다) 즉, '존재하다'라는 뜻이다. 권위는 행위명사가 아니라 존재명사라는 할 수 있다. 

 

결국 권위는 외부에서 오기보다는 내부 '존재'로부터 나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내부존재란 바로 그리스도의 현존의 여부에 달려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현존이 그리스도인의 권위를 보증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권위'와 '권위적'이라는 말은 엄격하게 구분해야 한다. 하느님에게로부터 나온 권위인지 세속적인 가치관에 입각한 권위적인 것인지를 가늠하는 것은 파견의 의미와 연결된다.

 

어디에서 권위가 유래되었는가를 강조점은 파견한 사람에게 있다(1사무6,8).

 

파견받은 사람은 그가 어떠한 사람이든 간에 파견한 사람의 뜻과 그를 대리할 때만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그 뜻은 무엇인가? “파견받은 이”, " 아포스텔로ἀποστελλω" 주로 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 약 135회 사용되었고(대부분 사도행전에서 사용됨) 이 단어의 의미는 일상적인 의미보다 오로지 성서의 문맥 안에서 하느님이 당신 자신의 권위를 대리하고, 당신을 섬기도록 파견자를 보내는 것을 나타내는 신학적인 어휘가 되었다. 

 

파견된 자, “사도” 아포스톨로스ἀποστολος라는 용어는 신약성서에서 79회 정도 사용되었는데 사도 바오로와 루카 계열에서 주로 사용된다. ‘열둘’이라는 명사는 사도라는 말과 동일시되는데 루카는 사도의 개념을 항상 도데카δοδεκα라는 ‘열두 제자단’에 한정하여 사용하고 있다. 이 열둘이라는 명사는 예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후 ‘그들을 사도라 부르셨다’(루카6,13)에서 언급된 것처럼 곧바로 사도(ἀποστολος)라 불려졌다.

 

반면 사도 바오로는 자신을 지칭할 때 사도로 표현하며, 자신의 사도직을 두 가지 요소로 강조한다. 첫째는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보았다는 것’(1코린9,1)과 그 주님에 의해 부르심을 받고 파견되었다’(로마1,1;갈라1,1) 사실을 들면서 보편적인 사도직을 강조한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사도가 아니라 열두 제자라고 지칭함으로써 바오로의 연속성의 신학을 따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결국 사도는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에 의해 파견된 사명을 받은 사람들(마태28,19;마르16,16;루카24,47;요한20,23)이라는 점에서 권위와 파견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권위와 파견의 메시지가 지닌 그리스도인의 빛은 무엇인가?

 

11절에서, 또한 어느 곳이든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으면, 그곳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밑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11절) 는 것에서 파견은 마치 이리 가운데 양떼를 보내는 것과 같다고 하신 그분의 말씀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이리 가운데 파견되는 양떼의 어려움이 아니라, 이리가 양을 닮을 수 있다는 것이 초점일 수도 있다. 바오로 사도처럼 박해자가 하느님의 파견자가 될 수 있다는 광의의 의미이기도 하다. 특히 오늘날은 더욱 그렇다. 

 

그렇기에, 파견된 자, 즉 씨뿌리는 사람은 그 결과까지 책임 질 필요가 없다. 파견의 결과, 복음 전파의 열매들은 하느님이 친히 정하신 때에 거두신다는 것에서, 파견의 완성은 성공과 실패로 가늠하고 평가할 수 없다는 것이다. 복음은 양적인 크기가 아니라 질적인 크기와 넓이, 깊이이기 때문이다. 바오로 사도는 그것은 '때가 차면'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머리로 하여 한데 모으는 계획입니다.라고 하느님 나라의 완성이라는 큰 그림, 역시 하느님의 고유한 권위의 시간임을 전한다.

 

아무것도 지니지 않고 파견된 자, 호의와 거부에서조자 자유로운 자, 즉 성공과 실패에 대한 것으로부터 자유로울 때, 우리는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믿고 희망하는 진정 자유로운 영혼으로 파견된 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기에 연중 15주의 키워드 <권위와 파견>은 곧 그리스도인의 <영적 자유>로 수렴된다고 말할 수 있겠다.

 

이를 심상태 신부님은 『그리스도와 구원』에서 <구원받은 자는 곧 자유로운 자라고 할 수 있다>는 명제를 통해 다음과 같이 파견의 궁극적인 지점이 자기로부터 해방에서 타자에로의 자유로운 이행이라고 전한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나사렛 예수는 바로 인간에게 다가와 더 이상 능가할 수 없는 양식으로 인간을 자유롭게 해방시킨 자유자체로서의 하느님의 현존이다. 예수의 자유는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전폭적인 신뢰와 사랑에 입각하여 만인을 위한 자유로 나타난 것이다. 인간의 자유 역시 하느님께 선물로 받은 것이다. 절대적인 진리안에서 자기자신으로부터 자유롭게 된 인간은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 있다. 예수의 자유의 본질은 자기 헌신이고 자기 포기이다.”

 

그런 맥락에서, 파견받는 자는 진정으로 자유로운 사람이고, 무엇보다 진정으로 자기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의 처신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파견은 그리스도로 인해 진정으로 모든 것으로부터(물질, 사람, 질병, 어둠, 평가) 자유로운 영혼이, 실존의 상황에서 어떤 억압이나 노예상태를 겪고 있는 사람들을 자신처럼 자유롭게 해 주려는 그리스도의 현존-나눔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파견이라는 이름의 자유는 하나의 소명이자, 제2의 창조에 가깝다. 파견이라는 자유는 사랑이기에 한계를 부인한다. 자유롭다는 말은 내가 진리안에서 나로부터 자유롭기에 사랑으로 타자 역시 진리안에서 그 자신으로부터 자유롭게 돕겠다는 의미이다. 텅빈 층만이다.

 

 

글을 마치며,

 

그때에 예수님께서 7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8 그러면서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9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시작하셨다.8 그러면서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10 그리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디에서나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고장을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물러라. 11 또한 어느 곳이든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으면, 그곳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밑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 12 그리하여 제자들은 떠나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하였다. 13 그리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