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피캇(Magnificat)

본성과 인격의 형이상학적 이원론에서 일엽편주를 타고 바다 건너가기

나뭇잎숨결 2024. 6. 22. 07:00

 

본성과 인격의 형이상학적 이원론에서 일엽편주를 타고 바다 건너가기

연중12주,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를 중심으로

 

 

 

 

1. 오규원, 「고요」

 

 

라일락 나무 밑에는 라일락 나무의 고요가 있다 /바람이 나무 밑에서 그림자를 흔들어도 고요는 고요하다/비비추 밑에는 비비추의 고요가 쌓여 있고/때죽나무 밑에는 개미들이 줄을 지어 때죽나무의 고요를 밟으며 가고 있다/창 앞의 장미 한송이는 위의 고요에서 아래의/고요로 지고 있다

 

 

오규원 시인의 「고요」는 우리 내면의 고요와 접촉하는 방법을 보여준 사물시에 해당한다. 고요하면 떠오르는 내적평점심이라는 관념을 지우고 오직 잠잠하고 고요한 상태란 무엇인가를 드러낸 시이다. 모든 사물은 고요하다는 명제를 던진 셈이다. 시인이 바라본 라일락나무, 바람, 비비추, 때죽나무, 개미, 장미 한송이는 존재하는 것들의 고요를 드러낼 뿐이다. 어떤 행위조차도 그저 고요할 뿐이다. 이는 이 세계를 바라보는 화자의 어떤 존재 상태를 드러낸 것이다. 마음조차도 마음을 넘어선 상태라고 할 수 있겠다.

 

 

 

 

 

 

 

 

 

 

2. Silence and Stillness 침묵과 고요

 

 

 

 

마음조차도 마음을 넘어선 상태를 순수의식으로 바라본 각자, 에크하르트 톨레가 전하는 <고요>를 들어본다.

 

『고요함의 지혜』는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의 저자 에크하르트 톨레의 두 번째 저서이다. 우울증과 자살 충동에 시달리던 젊은이였던 저자는 어느 순간 심오한 깨달음을 얻고 한순간에 삶의 변화를 맞이한다. 그는 정식 수행을 하지 않고도 홀로 깨달음을 얻은 돈오자頓悟者가 된 것이다. 그의 언어는 단순하지만 깊이가 있었고, 어떤 종교에도 속하지 않았으며 일상의 언어이다.

 

이 책은 기록으로 전하는 가장 오래된 가르침인 고대 인도의 경전에서 그 형식을 빌려 현대에 알맞게 바꿨다. 인도의 베다나 우파니샤드, 붓다와 예수의 말씀, 고대 중국의 도덕경의 가르침과 같은 경전은 필요 이상으로 사고를 부추기지 않는다. 이 책의 짧은 글들은 특정한 종교나 전통에 얽매이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가 저자 자신이 깨달음을 얻게 된 과정과 실천 방법을 우리 옆에서 자세하고 친절하게 서술했다면 이 책은 의도적으로 경전의 형식을 취하여 스승이 법상에 앉아 우리가 참구하고 음미해야 할 것들을 간결하게 화두처럼 던져주고 있다. 이 책은 총 10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그 속에는 간결한 가르침들이 들어 있다. 되도록 단순하게, 되도록 짧게, 되도록 많은 여백을 두고 배열되어 있는 가르침들은 상징과 함의와 암시가 풍부하다. 특정 종파나 교리에 동조하지 않는 그의 가르침은 불교, 기독교, 힌두교, 이슬람교, 토속 신앙 등 모든 전통의 핵심과 본질을 포용함과 동시에 어디에도 모순되지 않는다. 그는 모든 위대한 영혼의 스승들이 해왔던 것처럼 우리 스스로 가진 창조의 힘을 경험하게 해주고 더 나은 삶을 살도록 변화시키는 힘의 비밀을 알려준다. 그것은 말 너머에 있는 침묵의 세계, 즉 ‘영원한 현재’이다.

 

 When you lose touch with inner stillness, you lose touch with yourself. When you lose touch with yourself, you lose yourself in the world. 내면의 고요와의 접촉하는 법을 잃게되면 그대는 그대 자신과 접촉하는 법을 잃게 된다. 그대 자신과의 접촉하는 법을 잃게 되면 그대는 세상 속에서 그대 자신을 잃게 된다.

 

Your innermost sense of self, of who you are, is inseparable from stillness. This is the “I Am” that is deeper than name and form. 존재의 심연에 있는 나의 자아는 고요함으로부터 분리되어 존재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이름이나 형상보다 훨씬 더 깊은 차원에 존재하는 '나의 실체'이다.

 

 

Stillness is your essential nature. What is stillness? The inner space or awareness in which the words on this page are being perceived and become thoughts. Without that awareness, there would be no perception, no thoughts, no world. 나의 실체는 고요함이다. 고요함은 무엇인가? 바로 지금 내가 읽고 있는 이 글을 인식하고 그 인식을 사고로 변환시켜주는 내면의 허공이며 맑은 마음이다. 맑은 마음이 없다면 나는 인식하거나 사고할 수 없다. 그러므로 맑은 마음이 없다면 이 세상도 없다.

 

You are that awareness, disguised as a person. 내가 바로 맑은 마음이다. 잠시 사람의 모습으로 변장한 맑은 마음이다. The equivalent of external noise is the inner noise of thinking. The equivalent of external silence is inner stillness. 바깥의 소란은 내부 생각의 소란함이요, 바깥의 고요함은 안의 고요이다.

 

Whenever there is some silence around you - listen to it. That means just notice it. Pay attention to it. Listening to silence awakens the dimension of stillness within yourself, because it is only through stillness that you can be aware of silence. 주변에 잠시라도 고요함이 내려앉을 때면 귀를 기울여 보라. 다가온 고요함을 바라보고 주시하라. 밖의 고요함에 귀를 기울이면 안의 고요함이 깨어난다. 마음이 고요해져야 주변의 고요함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See that in the moment of noticing the silence around you, you are not thinking. You are aware, but not thinking. 밖이 고요함을 알아차리는 그 순간 내 안에 아무런 생각이 일어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주시하라. 다만 온 마음으로 바라볼 뿐 아무런 생각도 없다.

 

When you become aware of silence, immediately there is that state of inner still alertness. You are present. You have stepped out of thousands of years of collective human conditioning. 밖의 고요함을 의식하는 순간 안의 고요함이 깨어난다. 비로소 당신은 지금 여기에 존재하게 된다. 그 순간 당신은 수천년 동안 되풀이해온 인류의 습관을 벗어나고 있는 것이다.

 

Look at a tree, a flower, a plant. Let your awareness rest upon it. How still they are, how deeply rooted in Being. Allow nature to teach you stillness. 나무를 보라. 꽃과 풀을 보라. 당신의 맑은 마음을 그 위에 살며시 올려놓아라. 나무는 얼마나 고요한가. 꽃은 얼마나 생명 속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가. 자연에서 고요함을 배우라.

 

 

When you look at a tree and perceive its stillness, you become still yourself. You connect with it at a very deep level. You feel a oneness with whatever you perceive in and through stillness. Feeling the oneness of yourself with all things is love. 나무를 바라보며 그 안의 고요함을 인식할 때 나도 고요해진다. 나는 깊은 차원으로 나무와 연결된다. 고요함 속에서 그리고 고요함을 통해서 인식한 모든 것과 나는 하나가 되었음을 느낀다. 그렇게 세상만물과 내가 하나임을 느끼는 것이 참사랑이다.

 

Silence is helpful, but you don’t need it in order to find stillness. Even when there is noise, you can be aware of the stillness underneath the noise, of the space in which the noise arises. That is the inner space of pure awareness, consciousness itself. 밖의 고요함은 안의 고요함을 찾는 데 도움은 되겠지만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 밖이 소란해도 소란함을 한 꺼풀만 걷어내면 바로 그 아래에 고요함이 있고. 소란함이 생겨나는 공간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곳이 바로 순수의식이 거하는 곳, 온전히 맑은 마음이 거하는 내 안의 허공이다.

 

You can become aware of awareness as the background to all your sense perceptions, all your thinking. Becoming aware of awareness is the arising of inner stillness. 지각 작용과 생각을 한 발짝만 넘어서면 거기 맑은 마음이라는 바탕이 존재함을 알게 된다. 맑은 마음을 알고나면 내면에 고요함이 차오른다.

 

Any disturbing noise can be as helpful as silence. How? By dropping your inner resistance to the noise, by allowing it to be as it is, this acceptance also takes you into that realm of inner peace that is stillness. 실은 밖의 고요함 뿐 아니라 소란함마저도 도움이 된다. 어째서인가? 소란함에 대한 마음의 저항을 털어버리고 소란함을 있는 그대로 존재하도록 내버려둘 수 있을 때 그런 수용이 당신을 내면의 평화로운 허공으로, 고요함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Whenever you deeply accept this moment as it is - no matter what form it takes - you are still, you are at peace. 지금 이 순간이 어떤 모습으로 다가오고 있든 그대로 깊이 수용할 때마다 나는 고요해진다. 나는 평화로워진다.

 

Pay attention to the gap - the gap between two thoughts, the brief, silent space between words in a conversation, between the notes of a piano or flute, or the gap between the in-breath and out-breath. 고요한 순간을 주목하라. 하나의 생각이 가고 또 하나의 생각이 아직 다가오기 전의 고요한 순간, 대화 중에 생겨나는 짧고 고요한 공백, 피아노나 플루트 연주곡을 들으면서 음과 음 사이에 존재하는 고요한 순간, 그리고 들숨과 날숨 사이에 존재하는 고요한 순간을 주시하라.

 

When you pay attention to those gaps, awareness of “something” becomes - just awareness. The formless dimension of pure consciousness arises from within you and replaces identification with form. 그러한 고요한 순간을 주시할 때 '무언가'를 인식하던 마음은 그저 텅 빈 맑은 마음이 되어 내면에 형상을 초월한 순수의식의 차원을 깨운다. 형상이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하던 과거의 당신은 이제 없다.

 

True intelligence operates silently. Stillness is where creativity and solutions to problems are found. 진정한 지혜는 고요함 속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창의력을 개발하고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면 고요함 속으로 들어가라.

 

Is stillness just the absence of noise and content? No, it is intelligence itself - the underlying consciousness out of which every form is born. And how could that be separate from who you are? The form that you think you are came out of that and is being sustained by it. 고요함이란 다만 소음이 없는 것. 안에 내용물이 없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고요함은 지혜이며 모든 형상이 태어나는 근원적 의식이다. 그럴진대 어떻게 그것이 본연의 나와 분리되어 존재할 수 있겠는가? 내가 본연의 나라고 생각하는 나의 형상, 즉 나의 몸이 실은 그로부터 나왔고 그로부터 생명 에너지를 받고 있다.

 

It is the essence of all galaxies and blades of grass; of all flowers, trees, birds, and all other forms. 고요함은 은하계의 뭇 별과 온갖 풀잎들의 실체이다. 이 세상 모든 꽃들과 모든 나무들과 모든 새들과 모든 형상을 가진 것들의 실체이다.

 

Stillness is the only thing in this world that has no form. But then, it is not really a thing, and it is not of this world. 이 세상에서 형상을 여읜 유일한 존재가 고요함이다. 하지만 고요함은 물질이 아니며 이 세상에서 나온 것도 아니다.

 

When you look at a tree or a human being in stillness, who is looking? Something deeper than the person. Consciousness is looking at its creation. 지금 나는 고요함 속에 머무르는 나무나 인간을 보고 있다. 여기서 보는 자는 누구인가? 그것은 나라는 사람이 아니라 훨씬 더 깊은 곳에 있는 무엇이다. 여기서 보는 자는 바로 순수의식이다. 순수의식이 손수 창조해낸 것들을 순수의식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다.

 

In the Bible, it says that God created the world and saw that it was good. That is what you see when you look from stillness without thought. 성경에 신이 이 세상을 창조하였고 그것을 보니 좋았더라는 말이 있다. 생각이 끊어진 고요함 속에서 내가 보는 세상 역시 그러하다.

 

Do you need more knowledge? Is more information going to save the world, or faster computers, more scientific or intellectual analysis? Is it not wisdom that humanity needs most at this time? 좀더 많은 지식이 필요한가? 좀더 많은 정보가 세상을 구원하는가? 아니면 좀더 빠른 컴퓨터, 좀더 과학적인 분석이 필요한가? 하지만 인류에게 지금 이 시점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지혜가 아닐까?

 

But what is wisdom and where is it to be found? Wisdom comes with the ability to be still. Just look and just listen. No more is needed. Being still, looking, and listening activates the non-conceptual intelligence within you. Let stillness direct your words and actions. 그렇다면 지혜란 무엇이며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당신이 모든 것을 멈추고 고요해질 때 지혜가 바로 거기 있다. 그저 보고 그저 들어라. 그 이상은 필요 없다. 당신이 고요해지고, 그저 보고 들을 때 생각을 여읜 지혜가 내면에서 깨어난다. 그러니 고요함이 당신의 말과 행동을 이끌어갈 수 있도록 하라.

 

 

진정한 스승은 아무 것도 가르칠 것이 없다. 진정한 스승은 아무 것도 더하거나 줄 것이 없다. 진정한 스승은 새로운 정보나 믿음, 규범 같은 것을 주는 사람이 아니다. 진정한 스승은 당신의 본연의 모습을 가리는 것, 존재의 심연에서 당신이 이미 알고 있는 진리와 당신 사이에 가로놓인 무언가를 스스로 제거할 수 있도록 돕는 사람이다. 스승은 내면의 깊은 차원, 평화로움을 드러내 당신에게 보여주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이다. 만일 당신이 이 책을 찾음에 있어 스승이나 또는 스승을 대신할 무언가 흥미로운 아이디어나 이론 또는 믿음을 얻을 수 있는 지성적인 토론을 원한다면 실망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색의 대상을 찾는다면 이 책에서는 그런 것을 찾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가장 중요한 가르침마저 놓칠 것이다. 진리는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신 안에 들어있다. 이 책을 읽어나가며 그것을 늘 기억하고 종종 실감하기 바란다. 말은 진리로 이르게 하는 길잡이에 불과하다. 말이 가리키는 것이 무엇인지를 봐야 한다. 진리는 사고의 영역에서는 찾을 수 없다. 진리는 당신 안에 존재하는 깊은 차원이며 사고보다 무한히 더 드넓은 것이다. 깊은 차원에는 생동하는 평화로움이 있다. 그러므로 당신이 이 책을 읽어가는 동안 내면에서 평화로움이 샘솟는 것을 느낄 때마다 이 책은 스승으로서의 본분과 기능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은 당신이 잊고 있던 본래 모습을 알려주고 고향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가리켜준다.

 

이 책은 첫 페이지부터 끝 페이지까지 읽고 난 다음 한쪽에 제쳐두는 그런 책이 아니다. 이 책은 종종 집어 들고 책에서 시키는 대로 해봐야 하는 책인 것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가끔씩은 이 책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또는 책을 읽고 있는 시간보다 그저 손에 들고 있는 시간을 더 늘리는 일이다. 한 문단이나 단락이 끝날 때마다 당신은 자연스럽게 읽었던 것을 멈추고 차분히 내면을 성찰하며 고요함을 느낄 것이다. 언제나 읽는 것보다는 멈추는 것이 더 중요하다. 책이 제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습관적으로 생각의 쳇바퀴를 돌리는 오랜 습관을 떨쳐버릴 수 있기 바란다. 이 책은 기록으로 전하는 가장 오래된 가르침인 고대 인도의 경전에서 그 형식을 빌려 현대에 알맞게 바꾸었다. 경전은 비유법이나 짧은 경구 등을 사용하여 진리를 가리킬 뿐 지적 개념을 설하지는 않는다. 베다나 우파니샤드, 붓다의 말씀은 모두 경전 초기의 성스러운 가르침이다. 예수의 이야기도 서술적 맥락을 제거하고 나면 경전으로 볼 수 있고, 고대 중국의 지혜를 담은 도덕경의 심오한 가르침 역시 그러하다. 경전에서는 필요 이상으로 사고를 부추기지 않는다. 경전에서는 말한 것보다 말하지 않은 것이 더 중요하다. 무엇을 가리키고 있느냐가 더 중요하다. 이 책의 글은 경전의 성격을 가지며 특히 제1장의 간결한 단락들은 더욱 그러하다. 제1장은 책 전체의 핵심을 담고 있기 때문에 일부 독자들은 1장만 읽어도 충분할 것이다. 나머지 장들은 좀더 많은 길잡이를 필요로 하는 독자들을 위한 것이다.

 

고대 경전이 그러하듯이 이 책의 글도 성스럽다. 모두 다 내면의 고요함 즉 순수의식의 상태에서 나온 글이다. 한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이 책의 글이 특정 종교나 전토에 속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이 글에는 약간의 긴박감이 더해졌다. 이제 인간 의식의 전환은 더 이상 소수의 개인에게만 가능한 사치와 같은 것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 자신을 완전히 파괴하지 않으려면 지금 당장 의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현대는 낡은 의식의 몰락과 새로운 의식의 등장이 한꺼번에 가속화되고 있다. 역설적이긴 하지만 모든 것이 나빠지면서 동시에 또 좋아지고 있는 것이다. 비록 나빠지는 것이 심히 소란을 떨기 때문에 좀더 눈에 띄기는 하지만 말이다.

 

이 책에 담긴 말도 읽는 도중에 당신의 마음속에서 생각으로 변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들은 평범한 생각이 아니다. 시끄럽고 되풀이되고 자기도취적이고 주의를 산만하게 하는 그런 생각이 아니다. 모든 스승과 고대 경전이 그랬듯이 이 책에 담긴 생각은 '나를 보라'고 말하지 않고 '나를 초월하여 보라'고 말한다. 이 책에 담긴 생각은 고요함에서 나왔기 때문에 힘이 있다. 그 힘은 자신이 솟아나온 그 고요함으로 당신을 데려간다. 고요함은 또 내면의 평화로움이다. 고요함과 평화로움은 당신의 생명의 실체이다. 이 세상을 구하고 변화시킬 주인공은 바로 당신 내면의 고요함이다.

 

 

 

 

 

 

 

 

 

 

 

 

3.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마르코 4,35-41

 

 

 

Ⓐ35 그날 저녁이 되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자.” 하고 말씀하셨다. 36 그래서 그들이 군중을 남겨 둔 채, 배에 타고 계신 예수님을 그대로 모시고 갔는데, 다른 배들도 그분을 뒤따랐다. Ⓑ37 그때에 거센 돌풍이 일어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쳐서, 물이 배에 거의 가득 차게 되었다. 38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며,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39 그러자 예수님께서 깨어나시어 바람을 꾸짖으시고 호수더러,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하시니 Ⓓ바람이 멎고 아주 고요해졌다. Ⓔ40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하고 말씀하셨다. Ⓕ41 그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 서로 말하였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라고 전하는 마르코4,35-41은 공관복음에 공통으로(마태오8,23-27/루카8,22-25)으로 실려 있는 복음이다. 우리가 실존에서 직면하는 두 힘, 세상의 힘에 대한 그분의 힘의 현존, 현현, 권능은 우리에게 어떤 믿음을 요구하는가? 하는 성찰로 이끈다.

 

마르코4,35-41절은 기적사화의 일반적인 구조에, 예수님의 질타에 가까운 질문과 제자들의 놀라운 반응이 첨가되어 있다.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 이후에 나오는 물위를 걸으신 기적과 같은 선상에서 예수님의 수많은 기적을 목격한 제자들에게 예수는 누구인가? 믿음은 무엇인가? 라는 본질적인 질문 속에는 창조의 사랑이 무엇인가가 함의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시간적 공간적 상황(35-36)-Ⓑ문제발생(37-38)-Ⓒ문제해결(39)—Ⓓ기적의 증거(39)-Ⓔ예수님의 질문(40절)-Ⓕ제자들의 놀라운 반문(41절)

 

마르코4,35-41에서 전하는 희망은 거친 풍랑위에 일엽편주 같은 배를 타고 순례하는 우리와 그분은 언제나 함께 한다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이 세상의 풍랑을 건너가는데 풍랑이 아예 없는 것이 은총이 아니라 즉, 세상의 가치관에서 나온 어떤 힘이 없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힘 앞에서 그분의 음성을 듣고 그 세계를  건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하시니 바람이 멎고 아주 고요해졌다.”는 것이 메시지의  핵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분이 "내가 세상을 이겼다"라고 말씀 하신 것을 삶으로 체험하는 것이 그분의 현존을 실재화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승리는 전쟁이 없는 승리가 아니라 그 어떤 전쟁보다 치열한 전쟁을 치른 승리라고 할 수 있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16, 33) 내가 너희를 구원하면 너희는 복이 되리라. 두려워말고 힘을 내어라(즈카리야8,1-13)

 

그렇기에 성인 반열에 오르지 않는 우리가 그분의 현존을 내 삶에서 실재화하는 것은 즈카리야나 엘리야가 하느님을 체험한 사건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죽음의 위기에서 그분은 우리가 생각하는, 우리가 기대하거나, 기획하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그분의 현존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것이 조용하고 부드러운 그분의 음성이다.

 

“나와서 산 위, 주님 앞에 서라” 바로 그 때에 주님께서 지나가시는데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할퀴고 주님 앞에 있는 바위를 부수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바람 가운데 계시지 않았다. 바람이 지나간 뒤에 지진이 일어났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지진가운데에도 계시지 않았다. 지진이 지니간 뒤에 불이 일어났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불 속에서도 계시지 않았다. 불이 지나간 뒤에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가 들려왔다.(열왕기상19,11-12)

 

불이 지나간 뒤에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엘리야가 들은 그 부드러운 소리를 어떻게 매 순간 들을 수 있을까? 일엽편주를 타고 수시로 몰아치는 풍랑을 헤치고 이 세상을 순례하는 우리 곁에서 예수님은 침묵하고 주무시는 것 같은 상황을 누군들 경험하지 않았을까? 이 세상을 순례하면서 가장 예수님께 하고싶은 말이 많은 부분이 마르코4,35-41이 아닐까 싶다.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38절)라는 탄원조자 할 힘이 없는 그런 경험을 누군가는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모든 풍파가, 그 모든 것이 지나가리란 것을, 어느새 지나갔음을 수시로 경험하면서, 그럼에도, 누군가 오래 살았다는 말은 그만큼 더 수많은 풍파에 시달렸다는 말과 거의 동의어로 들리기조차 한다는 것이다. 지난 시간을 반추해보면 결국 우리 안에서 그분이 세상을 이겼다는 것을 항상 경험하면서도 여전히 세계의 힘 앞에서, 풍랑 앞에서 어떤 두려움을 느끼는 이유가 무엇인가? 오늘의 일용할 양식을 우리 힘으로 만들지 않았다는 것을 사후적으로 안다는 것을 어떻게 그분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자신에게 이해시킬 수 있을까? 결국엔 하느님 뜻대로 되었어! 라는 고백을 왜 오늘, 지금은 할 수 없는 것일까?  실제로 풍랑이 몰아쳐서 두려움을 경험하기도 하지만 경험에 비추어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두려움까지 왜 미리 경험하기도 하는 것일까? 왜 두려움은 항상 믿음보다 더 큰 힘으로 다가오는 것일까?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라고 전하는 마르코 4,35-41에 나오는 상황을 중심으로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40절)라고 물으시는 그분 앞에 두려움과 믿음의 관계는 대척적인 관계라기보다는 태풍이 만들어지는 기압의 차이처럼 공존의 관계처럼 보이기도 한다. 성서에 두려워하지 말라가 365번 이상, 가장 많이 나오는 어휘라는 것에서 어떤 상황 앞에서 인간이 두려움을 느낄 것이라는 것을 그분도 이미 알고 계신다는 것을 추론할 수 있다. 우리는 두려움과 믿음은 함께 있을 수 없어야 할 당위처럼 생각한다. 그런데 우리는 이 두려움과 믿음을 '함께' 경험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동시에' 경험한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 성찰의 포인트가 아닌가 싶다. 함께는 동시에가 아니다???

 

이를 베네딕또 16세 교황이자 라칭거 추기기경은 “의혹을 무릎쓰고 믿는다”는 표현을, 프란치스코 교황은 “불확실성의 확실함”이라고 하신 바 있다. 이를 바오로 사도는 죽음과 부활의 불가분의 관계를 사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새로운 창조라고 규정하기도 한다.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땅이 아직 꼴을 갖추지 못하고 비어있었는데, 어둠이 심연을 덮고 하느님의 영이 그 물위를 감돌고 있었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빛이 생겨라 하시자 빛이 생겼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그 빛이 참 좋았다. 하느님께서는 빛과 어둠을 가르시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셨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첫날이 지났다“(창세기1,1-3)

 

제1독서에서 <너의 도도한 파도는 여기에서 멈추어야 한다.>(욥기 38,1.8-11)는 것에서 <여기에서>는 고통의 상한선이 정해진듯 보인다. 고통의 상한선? 고통의 상징인 욥이 하느님을 망각하지 않는 상태까지라고 할 수 있다. 즉 자기 영혼을 부정하지 않는 상태까지라고 할 수 있다. 기적이 없이는 도저히 살 수 없는 상태! 여기서 세상이 가하는 고통에 무차별적으로 노출되어 있다손 치더라도 그 고통의 원인까지 궁구하지 말아야 멈출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사랑이 신비이듯, 고통도 신비의 영역이 아닐까 싶기 때문이다. 

 

1 주님께서 욥에게 폭풍 속에서 말씀하셨다. 8 “누가 문을 닫아 바다를 가두었느냐? 그것이 모태에서 솟구쳐 나올 때, 9 내가 구름을 그 옷으로, 먹구름을 그 포대기로 삼을 때, 10 내가 그 위에다 경계를 긋고 빗장과 대문을 세우며 11 여기까지는 와도 되지만 그 이상은 안 된다. 너의 도도한 파도는 여기에서 멈추어야 한다.’ 할 때에 말이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코린토 2서 5,14-17)라고 신앙의 여정은 죽음과 부활의 여정이라는 것에서, 이 세상 순례란 그 어느 상황도 생략할 수 없음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형제 여러분, 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다그칩니다. 한 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돌아가셨고 그리하여 결국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 우리가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15 그분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 살아 있는 이들이 이제는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자기들을 위하여 돌아가셨다가 되살아나신 분을 위하여 살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16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부터 아무도 속된 기준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속된 기준으로 이해하였을지라도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이해하지 않습니다. 17 그래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 것을 지나갔고, 새것이 되었습니다”라는 전언을, 칼 라너는 「그리스도적 고행의 철학적 신학적 기초에서」 모든 인간이 지닌 본성과 인격이라는 측면에서 왜 바람과 파도에게 재갈을 물려 고요하게 하실 수 있는 분께서 바람과 파도 자체를 아예 없애지 아니하시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다음과 같이 풀어간다. 사랑의 신비를 알 수 없듯, 고통의 신비를 결국 알수는 없을지라도 그 신비를 풀어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가 전하는 진리가 가설의 단계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이건 신비야, 그러니 알려고 하지마! 라고 말할 수 없다.  사랑은 사랑하는 대상을 알려고 하는 근본적인 원의가 있기 때문이다. 그분은 우리의 머리카락의 숫자까지 아신다. 안다는 것은 사랑이다.

 

“누구나 인간은 본성과 인격, 본질과 실존 사이에서 근본적으로 극복할 수 없는 이원론을 지닌 채 산다. 그것만으로도 고난의 존재론적인 기초가 될 수 있다. 본성과 인격의 형이상학적인 이원론은 고난이 가능하다는 존재론적 가정이 된다. 순수한 본성은 자기를 반격해 돌입하는 이 전체적 실재의 개입을 느낄 수 없다. 순수하게 유한한 인간도 고통을 받을 수가 없다. 이는 자유결정에 선행할 어떤 외적인 운명에 따라야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격은 세상에 개방되어 있다. 결론적으로 고난에 개방되어 있다. 그러므로 고난은 인격적 형상으로 존재한다.”

 

믿음의 여정에서 전혀 파도나 풍랑에 비유되는 세상이 가하는 힘에 두려움을 느낄 수 없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 복음사가는 예수는 누구인가? 우리는 그분을 믿는가? 라는 본질적이고 보편적인 질문을 던짐으로써 그분의 현존이 무엇인가?라는 답을 우리에게 역으로 제시한다. 하느님이신 그분이 우리의 순례에 늘 함께 하신다는 사실, 그리고 부활하신 그분이 결국 세상을 이겼다는 사실을 우리가 믿는가?라는 질문의 형식으로 제시한 것이다. 언뜻, 이것은 폭풍의 시간을 걸어가는 우리의 질문에 대한, 우리가 듣고 싶어하는 답이 아닌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연중12주,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라는 제자들의 놀라운 반응은 <본성과 인격의 형이상학적 이원론에서 일엽편주를 타고 바다 건너가기>의 여정에 있는 우리의 질문이자 동시에 답이기도 하다. 질문안에 이미 답이 있다. 본성으로는 심연과 어둠에서, 빛이 창조된 창조의 첫날이지만, 인격으로는 세계와의 투쟁 중에 있기 때문이다. 아직도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창조의 완성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 완성의  투쟁을 잠시 쉬고(창조의 7일처럼), 그러나 살아 있는한 그 투쟁은 다시 반복된다.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이 영적 투쟁은 그 어떤 전쟁보다 치열하다. 붉은 피가 아니라 백색 피를 흘리는 투쟁이기에 그렇다. 그 거듭되는 실존의 투쟁을 그분과 함께 한다는 것이 우리에게 무상으로 주어진 은총이고, 부활하신 그분께서 세상 끝날까지 함께하시기에 세상을 이겼다는 명제는 승리의 예정된 전언이라고 할 수 있겠다.

 

 

글을 마치며,

 

Ⓐ35 그날 저녁이 되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호수 저쪽으로 건너가자.” 하고 말씀하셨다. 36 그래서 그들이 군중을 남겨 둔 채, 배에 타고 계신 예수님을 그대로 모시고 갔는데, 다른 배들도 그분을 뒤따랐다. Ⓑ37 그때에 거센 돌풍이 일어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쳐서, 물이 배에 거의 가득 차게 되었다. 38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며,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39 그러자 예수님께서 깨어나시어 바람을 꾸짖으시고 호수더러,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하시니 Ⓓ바람이 멎고 아주 고요해졌다. Ⓔ40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하고 말씀하셨다. Ⓕ41 그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 서로 말하였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