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피캇(Magnificat)

무슨 꽃으로 문지르는 가슴이기에 나는 이리도 살고 싶은가(2)

나뭇잎숨결 2024. 6. 8. 07:39

 

 

"무슨 꽃으로 문지르는 가슴이기에 나는 이리도 살고 싶은가"(2)

연중10주일,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를 중심으로

 

 

 

 

 

1. 「무슨 꽃으로 문지르는 가슴이기에 나는 이리도 살고 싶은가」(서정주)

 

 

 

이렇게 아름다운 시의 제목은 어떻게 탄생할까?

 

 

아조 할 수 없이 되면 고향을 생각한다./이제는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옛날의 모습들, 안개와 같이 스러진 것들의 형상을 불러일으킨다. 귓가에 와서 아스라이 속삭이고는, 스쳐가는 소리들, 머언 유명에서처럼 소리는 들려오는 것이나 한 마디도 그 뜻을 알 수는 없다. 다만 느끼는 건 너희들의 숨소리. 소녀여, 어디에서들 안재하는지. 너희들의 호흡의 훈김으로써 다시금 돌아오는 내 청춘을 느낄 따름인 것이다. 소녀여 뭐라고 내게 말하였던 것인가? 오히려 처음과 같은 하늘 우에선 한 마리의 종다리가 가느다란 핏줄을 그리며 구름에 묻혀 흐를 뿐, 오늘도 굳이 닫힌 내 전정의 석문 앞에서 마음대로는 처리할 수 없는 내 생명의 환희를 이해할 따름인 것이다 섭섭이와 서운이와 푸접이와 순네라 하는 네 명의 소녀의 뒤를 따라서, 오후의 산그리메가 밝히우는 보리밭 새이 언덕길 우에 나는 서서 있었다. 붉고, 푸르고, , 전설 속의 네 개의 바다와 같이 네 소녀는 네 빛깔의 저고리를 입고 있었다.//하늘 우에선 아득한 고동소리, ......순네가 아르켜준 상제님의 고동소리, ......네 명의 소녀는 제마닥 한 개씩의 바구니를 들고, 허리를 구부리고, 차라리 무슨 나물을 찾는 것이 아니라 절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씬나물이나 머슴둘레, 그런 것을 찾는 것이 아니라 머언 머언 고동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이었다. 후회와 같은 표정으로 머리를 수그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잡히지 아니하는 것이었다. 발자취 소리를 아조 숨기고 가도, 나에게는 붙잡히지 아니하는 것이었다. 담담히도 오래가는 내음새를 풍기우며, 머슴둘레 꽃포기가 발길에 채일 뿐, 쌍긋한 찔레 덤풀이 앞을 가리울 뿐 나보다는 더 빨리 달아나는 것이었다. 나의 부르는 소리가 크면 클수록 더 멀리 더 멀리 달아나는 것이었다 여긴 오지 마......여긴 오지 마......애살포오시 웃음 지우며, 수류와 같이 네 개의 수류와 같이 차라리 흘러가는 것이었다.// 한 줄기의 추억과 치여든 나의 두 손, 역시 하늘에는 종다리 새 한 마리,---이런 것만 남기고는 조용히 흘러가며 속삭이는 것이었다. 여긴 오지마......여긴 오지마......//소녀여 내가 가는 날은 돌아 오련가. 내가 아조 가는 날은 돌아오련가. 막달라의 마리아처럼 두 눈에는 반가운 눈물로 어리여서, 머리털로 내 손끝을 스치이련가.//그러나 내가 가시에 찔려 아파 할 때는, 네 명의 소녀는 내 곁에 와 서는 것이였다. 내가 찔렛가시나 새금팔에 베혀 아퍼헐 때는,어머니와 같은 손가락으로 나시우러 오는 것이였다.// 손가락 끝에 나의 어린 핏방울을 적시우며, 한 명의 소녀가 걱정을 하면 세 명의 소녀도 걱정을 하며, 그 노오란 꽃송이로 문지르고는, 하얀 꽃송이로 문지르고는, 빠알간 꽃송이로 문지르고는 하든 나의 상처기는 어쩌면 그리도 잘 낫는 것이었든가.//정해정해 정도령아/원이왔다 문열어라,/붉은꽃을 문지르면 붉은피가 돌아오고,/푸른꽃을 문지르면/푸른숨이 돌아오고.// 소녀여. 비가 개인 날은 하늘이 왜 이리도 푸른가, 어데서 쉬는 숨소리기에 이리도 똑똑히 들리이는가. 무슨 꽃으로 문지르는 가슴이기에 나는 이리도 살고 싶은가.//몇 포기의 씨거운 멈둘레꽃이 피여 있는 낭떠러지 아래 풀밭에 서서, 나는 단 하나의 정령이 되야 내 소녀들을 불러 일으킨다. 그들은 역시 나를 지키고 있었든 것이다. 내 속에 내리는 비가 개이기만, 다시 그 언덕길 우에 돌아오기만, 어서 병이 낫기만을,그 옛날의 보리밭길 우에서 언제나 언제나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내가 아조 가는 날은 돌아오련가?

 

 

 

「무슨 꽃으로 문지르는 가슴이기에 나는 이리도 살고 싶은가」(서정주)는 인간의 근원체험에 관한 시로 읽을 수 있다. 이 근원체험은 유년시절 고향에서 만난 네 소녀와 함께 했던 가장 순수한 시간으로 돌아간다. “섭섭이와 서운이와 푸접이와 순네라 하는 네 명의 소녀의 뒤를 따라서, 오후의 산그리메가 밝히우는 보리밭 사이 언덕길 우에 나는 서서 있었다” 그 소녀들과 함께한 시간은 다음과 같이 네 부분으로 축약된다.

 

 

 

아조 할 수 없이 되면 고향을 생각한다.

 

 

 

소녀여 내가 가는 날은 돌아 오련가. 내가 아조 가는 날은 돌아오련가. 막달라의 마리아처럼 두 눈에는 반가운 눈물로 어리여서, 머리털로 내 손끝을 스치이련가.

 

 

 

소녀여. 비가 개인 날은 하늘이 왜 이리도 푸른가, 어데서 쉬는 숨소리기에 이리도 똑똑히 들리이는가. 무슨 꽃으로 문지르는 가슴이기에 나는 이리도 살고 싶은가./

 

 

 

내가 아조 가는 날은 돌아오련가?

 

 

 

고향는 곧 소녀들이었고, 고향에서 만난 소녀들은 화자가 이 세상의 어떤 환란과 격정의 시간에서도 걸어갈 수 있는 힘이었고, 죽으면서도 살고 싶게 만들었고, 시를 쓸 수 있게 했던 바로 그 힘이었다.

 

붉은꽃을 문지르면 붉은피가 돌아오고,/푸른꽃을 문지르면/푸른숨이 돌아오고

 

붉은 꽃은 붉은 피였고ㅡ 푸른 꽃은 푸른 숨이었던 바로 그 시간, 사랑은 사랑이었고, 하늘은 하늘이었고, 들은 들이었고...그 어떤 진실도 비틀리거나 왜곡되지 않는, 설명이 필요 없는 자명한 시간은 누구에게나 주어진다. ‘근원 체험’이다. 그런데 그 근원체험은 사랑의 자기결정권이라는 말로 대체할 수도 있다. 누구나 경험하는 그런 꽃의 시간들을 어제의 사건으로 만들 수도 있고, 오늘의 시간으로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이다.

 

 

 

 

사진작가 분이가 탱큐!

 

 

 

 

 

2. 르네 지라드,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본다』

 

 

 

어제와 오늘로 갈라지는 시간의 얼굴, 그 사랑의 자기결정권은 다른 말로 <사람아 너의 품위를 생각하라>(발터 카스퍼)는 말로 대신할 수 있다. 내가 누구인가를 결정하는 그 오늘의 소리는 어디서 들리는가? 바로 우리 내부에 현존해 있다. 즉 우리 영혼의 소리를 듣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인간의 품위를 결정하는 영혼의 소리를 들을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일까? 아마도 자기안의 결핍, 분리의 두려움일 것이다. 세상의 소란과 소음에 휩쓸리는 불안의 정체라고 할 수 있다. 철학자 르네 지라르는 이를 집단무의식에 가까운 희생양 메커니즘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

 

르네 지라르의 『희생양』 표지에는 모로 누운 어린양이 그려져 있다. 양은 곧 죽을 것이다. 왜 죽어야 하는지조차 모른채 죽는다. 인간 문명사의 진정한 결정들에는 모두 희생양이 있었다. 라틴어 <결정하다>는 <희생양의 목을 자르다>에서 비롯되었다. 희생양은 동물만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힘센 자와, 힘센 가치와 힘센 논리가 한 사회를 점령할 때, 그 결정은 힘의 소리, 집단의 무의식을 결정하는 동인으로, 여기에 누워있는 어린 양은 언제나 사회적 약자를 상징한다. 울타리 안에선 살아남은 양들이 각자의 본분과 의무를 향해 풀밭으로 뛰쳐나가길 기다리고 있을 때, 울타리 밖에 선 죽은 양의 털과 껍질을 벗긴 뒤 알맞은 요리를 하는 사람들로 분주하다. 그것이 인간이 파스카라고 말하는 것들이다. 르네 지라르는 문학, 그 가운데 소설을 가장 정직한 목소리라고 칭한다.

 

 

 

지금부터 우리는 낭만적이라는 용어를 중재자의 존재를 결코 드러내지 않은 채, 그 존재를 반영시키는 작품들에 사용할 것이고, 중개자의 존재를 드러내는 작품들에 소설적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것이다(『낭만작 거짓과 소설적 진실』)

 

 

 

낭만적인 허영심이 많은 사람은 자신의 욕망이 사물의 본성 속에 이미 있다고 언제나 확신하고 싶어하거나 자신이 욕망이 평온한 주체성에서 우러나온 것, 즉 창조라고 확신하고 싶어한다. 새 대상을 보고서 욕망을 느끼게 된다는 것은 욕망이 자신에게서 나온 것과 같은 의미이며 따라서 타인들로부터 욕망을 취하게 되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이 욕망의 도그마는 현대인들이 열렬히 애착을 가지는 것으로 욕망의 자율성이라는 하나의 동일한 환상을 옹호하고 싶어 한다.

 

 

 

지라르는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에서 욕망의 삼각형 구조를 문회인류학적인 시선으로 분석하여, 폭력과 성스러움의 표층을 뚫고 들어가 그 토대와 기원과 뼈대가 어떻게 구성되었는지 삼각형의 욕망구조를 통해 해명한다. 그는 모든 성스러움은 그 기원에 원초적인 폭력을 내장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국가의 성립이든 종교의 기원이든 민족의 등장이든 필연적으로 그 이전의 질서와 응축된 모든 갈등이 폭발하는 계기는 집단적 폭력에 기인한다고 보고 있다. 거기에는 두려움과 분노를 담아내는 희생양이 존재한다. 그 희생양은 두 번의 죽음(사회적 인격 매장, 육체적 죽음이라는)과 한 번의 부활(사후 예찬)을 경험케 한다.

 

 

 

 

 

우리가 욕망 혹은 열정이라고 부르는 것은 우연히 혹은 가끔씩 모방적인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항상 모방적이다. 우리의 욕망은 언제나 타인의 욕망에서 나온다. 그런 점에서 욕망은 아주 사회적인 것이다. 한 모방자가 그의 모방들에게서 그들 공통의 욕망의 대상물을 뺏으려 할 때 그 모델은 당연히 저항하게 된다. 이리하여 욕망은 양측에서 모두 강해진다. 그 역도 마찬가지다. 이렇듯 적대자들은 점점 더 같은 것으로 만들면서 갈수록 완벽해져가는 이런 이중 모방속에서 모든 역할을 서로 바뀌고 서로 반사한다. (『그를 통해 스캔들이 온다』)

 

 

 

 

 

욕망하는 자가 동조자에서 결국 적으로 바뀌는 순간에 대해, 르네 지라르는 욕망의 주체와 대상에 초점을 맞췄던 기존의 욕망론이 아닌 욕망하는 나와 욕망하는 대상 그리고 그 욕망을 부채질 하는 욕망의 짝패로 이루어진 이 삼각구도에서 폭력의 기원을 찾는다. 이는 문학과 심리학을 거쳐 신화와 종교를 통해 문화인류학의 담론이 만들어지는 순간이다.

 

 

 

한 사회가 모방욕망의 확대 재생산으로 사회적 갈등이 고조되면 이를 없애기 위해 무고한 희생양에 대한 집단적 폭력을 가한 뒤 곧바로 엄습하는 집단죄의식을 털어내고 안정을 찾기 위한 사탄의 매커니즘을 반복해 왔다는 것을 간파한 것이다. 사탄을 밖에 있는 그 무엇으로 지적함으로써 스스로 자신의 영혼을 사탄에게 판 것을 간과한다는 것이다. 혹은 너의 오류와 나의 오류를 파장파장의 오류로 만든다는 것이다. 르네 지라르는 모방욕망과 희생문화의 이종결합을 통해, 폭력과 성스러움의 관계의 유착을 보았고, 그것을 거부한 사람을 인간 예수라고 보았다. 르네 지라르가 가톨릭으로 개종한 이유이기도 하다.

 

 

 

신화는 박해자에게는 죄가 없고 희생물한테 죄가 있다고 표현함으로써 자신을 완전히 뒤바꾸고 있다(...)우리는 또 신화의 주인공이나 신성한 존재들의 특징이자 이들이 희생양으로 선택되는 조건도 볼 수 있다. 또한 그리스도 ‘파르코스’의 선택되는 조건도 볼 수 있다. 이 조건으로는 불구자, 육체적 사회적 결합을 들 수 있다. 희생 제의에 나오는 모든 인간 희생양들의 특징과 이들은 일치한다. 복수를 피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인들은 거주자가 없는 사람, 불구자, 버려진 노인같이 사회적으로 가치가 없는 사람들을 주로 선택한다. 문화권이 달라도 이 특징은 같다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본다』중에서)

 

 

 

이런 집단 주술은 처음에는 공동체를 와해시키고, 그다음에는 만장일치의 희생양을 통해 그 공동체를 다시 재생시키는 폭력의 악순환과 스캔들 이론을 다른 말로 표현한 것이 사탄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 폭력의 주요 기원은 모방적 경쟁관계에서 비롯된다. 인간의 폭력은 우연한 결과도 아니고 공격본능이나 상극충동은 더더욱 아니다. 모방적 경쟁 관계는 심해지면 경쟁자들은 서로 상대방의 가치를 떨어뜨리는데 혈안이 된다. 경쟁자들이 서로의 소유물을 비하하고, 이어서 가치관을 공격하고, 서로의 배우자를 유혹하고, 심지어는 살인마저 마다하지 않는 지경에 이른다.

 

모방 욕망 때문에 공동체가 파멸의 위기에 빠지게 되면 보방경쟁으로 증폭된 폭력을 인류가 해결하는 방법은 지역과 문화의 차이를 넘어 공통된 폭력 해소방법에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폭력이 동원된다. 저 사람이 나쁜 사람이다. 모두 저 사람의 잘못이지. 라고 슬쩍 한마디만 유포하면 된다. (...) 이로써 희생제사는 공동체 전제를 대체하고 전체에게 봉헌되는 제물이 된다. 다시 말해 희생제의는 공동체 전체를 그들의 폭력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이다. 폭력의 방향을 공동체 전체로부터 돌려서 외부의 희생물에 향하게 한다. 희생제의는 도처에 퍼져 있는 분쟁의 씨앗을 희생물로 집약시킨다. 분쟁의 씨앗에서 부분적인 만족감을 주어서 방향을 딴 데로 돌려버린다.(『폭력과 성스러움』 중에서)

 

 

 

소수의 희생양을 만들어 그에게 사회적 분노와 폭력을 집중한다. 모든 잘못은 희생양에게 돌리고 그들을 처형함로써 사람들은 그간에 쌓인 폭력성과 스트레스를 소거한다. 희생양의 죽음을 통해 사회구성원의 파멸로부터 구원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 희생양은 보복의 힘마저 없는 사회적 약자여여 한다. 희생양은 죽어 마땅한 존재이거나 신성한 순교자로 만들어야 한다. 그렇게 그들은 죄책감마저 집단적으로 희석시킴으로써 언제나 스스로 의인이 된다.

 

 

 

인간들은 그가 속한 사회에 위험이 닥칠 때 특정 집단에 책임을 뒤집어 쒸우고 희생시킴으로써 갈등을 일시적으로 봉합하고 해소하고 질서를 구축하려는 욕망을 표출한다. 그 희생제물로 선택되는 집단은 늘 약자이다. 보복할 능력조차 없는 자를 희생시킴으로써 정치적 종교적 사회적 제물로 삼고 때론 신성한 제사로 둔갑시킨다. 공통적으로 가해자의 입장에서 희생양 만들기의 도그마가 작동된 것이다. 르네 지라드는 집단 무의식에 가까운 이 희생양 메커니즘을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본다”라고 말한다. 희생양 매커니즘은 예수의 죽음을 필두로, 개인이나 집단이 자신들의 문제, 실패, 고통, 불만들을 다루는 방식중의 하나로 부정적인 상황이나 책임을 다른 개인이나 집단에게 돌리는 방법이다. 역사적으로 유대인학살(20세기), 정치적 맥카시즘(20세기), 레이디경제(16세기), 마녀사냥(15~18세기)등에서 볼 수 있었다. 지금도 모든 정치, 종교, 국가 간의 전쟁은 이 집단무의식, 집단지성이라 이름 붙은 ‘거룩한 전쟁’이라는 띠를 두르고 우리 내면의 목소리, 영혼의 소리를 학살하는 일은 자행한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선택할 자유가, 결정한 자유가 나 자신에게 있다는 점에서 사랑의 자기결정권은 누구에게도 양도할 수 없는 인간의 품위라고 할 수 있다.

 

 

 

 

 

 

 

 

 

 

 

3. <사탄은 끝장이 난다.> 마르코 3, 20-35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20 집으로 가셨다. 그러자 군중이 다시 모여들어 예수님의 일행은 음식을 들 수조차 없었다. 21 그런데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22 한편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 학자들이, “그는 베엘제불이 들렸다.”고도 하고, “그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도 하였다. 23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부르셔서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어떻게 사탄이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 24 한 나라가 갈라서면 그 나라는 버티어 내지 못한다. 25 한 집안이 갈라서면 그 집안은 버티어 내지 못할 것이다. 26 사탄도 자신을 거슬러 일어나 갈라서면 버티어 내지 못하고 끝장이 난다. 27 먼저 힘센 자를 묶어 놓지 않고서는, 아무도 그 힘센 자의 집에 들어가 재물을 털 수 없다. 묶어 놓은 뒤에야 그 집을 털 수 있다. 2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29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 30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사람들이 “그는 더러운 영이 들렸다.”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 31 그때에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왔다. 그들은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을 불렀다. 32 그분 둘레에는 군중이 앉아 있었는데, 사람들이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스승님을 찾고 계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33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셨다. 34 그리고 당신 주위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35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연중 10주, <사탄은 끝장이 난다.>라고 전하는 마르코 3,20-35은 예수님과 베엘제불(마태오12, 22-32/루카11, 14-23;12,10), 예수님과 참 가족(마태오12,46-50/루카8,19-21)이라는 표면적으로 다른 듯 보이는 두 주제는 참으로 사람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자아실현이나 자아완성은 무엇인가 하는 성찰로 우리를 이끈다. 이것은 엄밀히 종교도 이데올로기나 이념이 될 수 있음을 경계하라는 엄중한 뜻이 담겨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두 성찰의 주제는 너는 무엇을 믿는가? 하는 질문으로 수렴된다고 할 수 있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직선적으로 믿음의 화두를 꺼내 않고, 가파르나움에서의 하루, 그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집으로 가셨다, 라고 일상의 어떤 순간을 포착한다. 그 집은 누구의 집인가? 대부분의 성서해설서는 그 집은 가파르나움에 있는 베드로의 집이라고 전한다. 이미 예수와 제자들은 교회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어지는 내용, 그리고 군중들이 몰려와 그분 일행은 빵을 먹을 수도 없는 지경이었다(20절)는 것에서 그 때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근본적인 배고픔을 안고 메시야를 찾아 헤메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마르코 3, 2—35는 예수를 찾아 헤메는 사람들과 예수를 부정하는 사람들을 나란히 배치하여, 마르코복음 전체를 관통하는 두 개의 주제를 제시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29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28-29)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셨다. 34 그리고 당신 주위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35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35)

 

 

⒜는 죄와 용서에 관한 ⒝는 영적 관계에 관한, 전자는 종적이고 후자는 횡적인 관계론을 전하면서 믿음은 무엇인가? 라는 대주제를 이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29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28-29)에서

 

복음사가는 경고의 서두에 “내가 진실로(Amen) 너희에게 말한다” 라는 말을 배치한다. 예수님이 전하는 극히 중요한 말씀앞에 놓이는 "진실로"는  특히 마지막 심판 등을 선언하실 때, 권위, 축복, 저주, 맹세 등 장중한 주제를 전파할 때, 쓰는 부사어이자 명사형 서술어이다. 진실로는 예수께서 신적인 권위와 능력을 지니고 말씀하신다는 것을 강조한 강조어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강조어법이 전하는 첫 번째 주제는 성령과 용서의 관계다. 일찍히 베드로를 통해 무한한 용서를 하라고 하신 그분께서, 왜 어떤 죄는 용서받고 어떤 죄는 용서받을 수 없는가?라는 한계를 정하셨는가? 라는 질문이 제기되는 부분이다. 특히 에수님과의 관계가 아닌 성령과의 관계에서 용서의 한계를 설정하고 계신가? 하는 것이 우리가 성찰할 첫 번째 주제라고 할 수 있다.

 

성서전반에 거쳐 인간이 저지른 모든 윤리도덕적인 죄는 용서받을 수 있었으나, 성령을 모독한 죄는 용서받을 수 없다는 것에서, 용서받을 수 없는 죄(히브리서6,4-6/10,26/ 1요한5,16)로 언급된 것은, 모든 죄로부터 자유롭게 하시고자 오신 메시야의 정체성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 그 근원에 대한 거부와 왜곡은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의 범주에 스스로 자기를 집어넣었기 때문임을 알 수 있다.

 

왜 성령을 모독하는 죄는 용서받을 수 없을까? 를 조금 더 생각해 본다.

 

하느님의 숨결인 성령의 현존을 거부한다는 것은 삼위일체 하느님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숨결 즉 하느님 안에서 숨쉬려 하지 않는 자가 도달하는 곳은 죽음이라는 점에서 자기방임, 자기처벌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하느님은 영원한 생명이다. 죽음을 선택하는 이에게 성령의 도움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성령의 인도를 받을 수 없기에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와 용서로 나아갈 수 없는 것은 자명하다. 하느님의 사랑은 인간을 강제하지 않는다. 따라서, 자비와 용서의 은총은 그것이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할지라도 인간을 강제할 수 없다. 용서 자체가 인간에게 자유를 주는 통로이기에 부자유로 자유를 줄 수는 없다. 하느님의 모든 축복과 은총은 언제나 수단과 목적이 일치한다.  그런 맥락에서 용서받고자 하는 자의 자유로운 결정이 없다면 그는 자신을 그냥 물질, 몸으로 규정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본인은 부정하겠지만 죽음을 선택하고 생명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용서는 이 땅에서 하느님의 사랑의 퍼즐을 완성하는 마지막 퍼즐에 해당한다. 용서를 통과하지 않고 그분의 주는 부활의 평화를 알 수 없다. 그런 맥락에서  용서는 단지 타인과의 관계를 규정하는 데 그치지 않고 내가 누구인가? 하는 근원과 연결되어 있다. 우리가 성령을 통해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받음을 알고 자비와 용서를 믿는다는 것은 나라는 인간은 무엇인가? 라는 심층적인 자기결정, 자기인식, 정체성을 내포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용서는 다른 말로 사랑의 자기결정권이라고 할 수 있다.

 

 

 

수유리 가르멜 수도원 성모자상

 

 

 

 

⒝에서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셨다. 34 그리고 당신 주위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35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그분의 가족 그분의 형제들이라고 지칭된 부분, 그리스어에서 형제는 친형제부터 사촌과 먼 친척 나아가 동료시민까지 가리키는 폭넓은 의미를 갖는다. 그분의 가족, 그들은 예수의 일행이 있는 그 집에 들어가지 않는다. 이미 예수와 거기에 모인 사람들을 죄인이라고 규정했기 때문일 것이다. 예수는 당신의 가족들이 당신을 찾는다는 군중들의 전언을 듣고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야말로 당신의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라고 선언한다.

 

그 선언은 혈연이라는 근본적인 사회관계가 하느님 나라는 필연의 관계가 아님을 강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말씀은 단순히 혈연관계를 뛰어넘으라는 요구를 넘어서 예수를 믿는다고 자부하는 공동체에 대한 경고의 말씀으로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예수의 친척들이나 예루살렘에서 온 율사들 모두 열혈 종교인들이었다. 이는 베엘제불과 혈연관계의 예를 들어 종교가 자칫 이데올로기나 관념이 될 수 있다는 엄중한 경고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의 믿음에 하느님의 뜻이 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성찰의 주제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나는 무엇을 믿는가? 라는 것으로 수렴된다.

 

이를 제1독서에서는 <나는 네 후손과 그 여자의 후손 사이에 적개심을 일으키리라.> (창세기 3,9-15)라고 전한다. 그 적개심은 믿느냐 믿지 않느냐의 갈림길이라고 할 수 있다.

 

창세기 저자는, 사람이 나무 열매를 먹은 뒤, 주 하느님께서 그를 부르시며, “너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라고 전한다. 하느님이 아담이 지금 어는 공간에 있는지를 몰라서 물으셨을까? 너는 생존의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무엇에 의지했는가? 라는 본질적인 질문을 던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때 아담이 먹은 열매는 하느님의 현존을 부정하는 모든 엑소시스티즘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예수님 시대에 그렇게 많던 사탄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믿음의 트릭스터 속에 숨었다고 할 수 있다. 믿음의 트릭스터? 믿음의 파토스, 그 열정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두려움이 있을 때 어디로 도피하는가?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있을 때, 누구에게서 그 답을 찾고 있는가? 등등... 사랑의 출처를 모르는, 사랑의 출처를 왜곡하는, 사람이니까 그렇지! 라고 두리뭉실 추종으로 장식된 것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우리의 구원은 모직 믿음에서 가능하다고 거듭해서 전한다. 그런데 그 믿음은 무엇인가? 그의 입에서 발설되는 것이 말인가? 말씀인가? 바오로 사도는 <믿습니다. 그러므로 말합니다.>(코린토 2서, 4,13─5,1)라고 믿음에서 비롯된 말씀과 말을 구분한다. 

 

형제 여러분, “나는 믿었다. 그러므로 말하였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와 똑같은 믿음의 영을 우리도 지니고 있으므로 “우리는 믿습니다. 그러므로 말합니다.”

 

믿으면서 믿음을 부정하는 믿음의 딜레마에 대해 요셉 라칭거 추기경(베네딕또16세 교황)은 『사도신경강해』에서 아무도 남에게 하느님과 그의 나라를 여기 있소 하고 대령할 수 없고, 자기자신에게도 할 수 없다고 전하면서, 믿는다고 말하면서 굶어죽지는 않는지? 혹은 믿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굶어죽지는 않는지? 에 대해서,

 

"그 아무도 의혹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고, 그 아무도 믿음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 신자에게는 의혹을 '무릅쓰고' 믿음이 있으며, 불신자에게는 의혹을 '통해서', 그리고 의혹이라는 '형태로' 믿음이 있는 것이다."

 

신자에게는 불신자의 운명에 동참하는 운명이 되어주고, 불신자에게는 신앙이 회피하지 못할 도전이 되어준다는 점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움명이자, 도전이라고 할 수 있다. 왜 그런 믿음의 도전이 있는 것인가? 하느님은 본질적으로 감각적 차원에 현존을 확인할 수 없다. 믿음은 가시와 불가시 사이의 심연에, 또 어제와 오늘 사이의 심연에 겹쳐진다.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는 말은 그래서 그가 무엇을 믿고 있는가의 자로미터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신앙은 태도와 이해사이에 걸쳐있는 심연이기도 하다. 외적으로 드러난 태도와 내적인 이해가 믿음에서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태도는 행위지만 이해는 존재함이다. 존재와 행위가 하나가 되는 것, 이해란 우리를 에워싸고 있음으로써 어떤 뜻을 부여한다.

 

그리스도적 신앙자체가 <아멘>이라는 짤막한 말 한마디로 표현될 수 있다면, 이 표현에는 신뢰, 의탁, 선의, 확고함, 든든한 바탕, 정립, 진리 등, 여러 뜻이 함께 담겨있다. <아멘>은 믿음의 딜레마를 겪고 있는, 인간이 궁극적으로 딛고 설 수 있는 유일한 땅이 무엇인가를 말해준다. 인간에게 뜻이 되어줄 수 있는 것은 오직 진리일 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무엇을 믿는다가 아니라 나는 너(예수)를 믿는 것이다. 믿음은 인간 예수와의 상봉이고 이 상봉 안에서 세계의 뜻이 인격임을 체험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산다는 것은 정말 만만치 않은데, 믿는다는 것은 더 만만치 않은데, 나는 왜 이렇게 살고 싶은가? 나는 왜 제대로 믿게 해달라고 기도하는가? 믿는 것은 나인데 마치 그분이 믿는 것처럼 주객전도의 기도를 하는 것인가? 믿어서 행복하게 살고 싶다고 기도하는가. 그것도 영원히 함께 행복하게 살고 싶다고 말이다. 그렇다면, 하느님은 당신 자녀인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실까? 더 많은 희생? 더 많은 고통? 더 많은 봉사? 정진적 추기경님이 남긴 유언,  "하느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오직 행복이니, 그러니 행복하십시오!" 라는 전언이 절절하게 들리는 아침이다. 물론 여기서 행복은 행복주의가 아니라 하느님 나라가 확장되는, 만인이 그분안에서 동등하게 누리는 그 행복일 것이다.  그렇기에 산상설교에서 전하는 행복이 하느님의 뜻이라고 할 수 있겠다.

 

 

글을 마치며,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29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28-29)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셨다. 34 그리고 당신 주위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35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