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물머리, BY 石蘭
면형무아(麵形無我), 하나(oneness)라는 영원의 예형론(豫型論.typology)(2)
- 성체성혈대축일,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다”를 중심으로
1. 이수정, 「달이 뜨고 진다고」
달이 뜨고 진다고 너는 말했다. 수천 개의 달이 뜨고 질 것이다. 네게서 뜬 달이 차고 맑은 호수로 져서 은빛 지느러미의 물고기가 될 것이다. 수면에 어른거리는 달 지느러미들 일제히 물을 차고 올라 잘게 부서질 것이다. 이 지느러미의 분수가 공중에서 반짝일 때 지구 반대쪽에서 손을 놓고 떠난 바다가 내게로 밀려오고 있을 것이다.
사랑의 담론으로 ‘태양’에 대한 것보다 압도적으로 ‘달’이나 ‘별’에 대한 글이 많은 이유가 무엇인가? 달은, 부재하는 대상을 소환하는 소재 중 가장 멀리 있으면서 감각으로 확인 가능한 천체, 밝음과 어둠이 공존하는 그러면서 두 겹의 부재를 현전케 할 수 있는 소환의 소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달의 시간은 영원히 순환하는 우주적인 시간에 비유할 수 있다면, 그 달을 바라보는 인간의 시간은 하나의 생의 주기만 있을 뿐이라는 비극적 상속의 의미가 내재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같은 달을 다른 시간에 바라보는 일이란 ‘아름다운 일이자 곧 가혹한 일’ 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수정의 「달이 뜨고 진다고」에서의 ‘달’은 어떤가?
너와 나는 지구 반대쪽에 존재한다. 너는 달이 뜨고 진다고 자연현상을 전하는 것처럼 말한다. 반면 나는 수천 개의 달이 뜨고 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 개의 달이 뜨고 지는 건, 단 하루의 일이겠지만, 수천 개의 달이 뜨고 지는 건 수천 날의 일이다. 그런데, 그렇게 긴 사건이 한꺼번에 일어난다. 이 시의 긴장은 이 지점에서 생긴다. 긴 시간들이 순간처럼 빠르게 돌아간다. 시간 속에 있는 달도 그렇게 빠르게 회전한다. 달을 시 속으로 끌어들이는 것만 아니라 이 달을 생물처럼 ‘활유’시킨 것이다.
너와 나는 동시에 같은 달을 본다. 그런데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은 사뭇 다르다는 것은 그들이 갖고 있는 사랑에 대한 어떤 질감이 다르기 때문이다. 내가 보는 저 달을 너도 보겠지, 라는 순간적인 위로를 이수정 시는 살아있는 감각을 총동원해 은빛 다리를 만들어 너와 나의 거리를 단번에 좁힌다. 네가 본 그 달이 호수에 져서 물고기들의 지느러미를 스칠 때, 그 물고기들이 일제히 달빛 속에서 수면위로 튀어오를 때, 그것은 단순히 수많은 물고기가 아니라 네가 본 그 달빛으로 물든 은빛지느러미가 되어, 빛의 분수가 만들어지고, 그것이 공중에서 일제히 반짝일 때, 손을 놓고 떠난 너는 바다처럼 밀려올 것이다. 은빛다리를 건너서.
너와 나는 서로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지만 관념으로 그리워하는 것과 감각을 총동원해 그리워하는 것은 그렇게 다르다. 서로를 그리워해도 그 그리움의 질감에 차이가 있다. 「달이 뜨고 진다고」에서 보여주는 그 사랑이란, ‘사랑한다는 것은 사람의 능력 이전에 본성이다.’이라는 측면에서, 이수정의 「달이 뜨고 진다고」에서는 그 본성에 능력을 가미해 자기 안의 빛을 감각적으로 점화할 수 있다는 데 있다.
이수정의 시에서 사랑은 관념이 아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매일 매순간이 너를 향한 크리스마스의 초를 밝히는 일이다. 생의 트리를 만드는 일이다. 너를 생각하면서 일어나고, 잠들고, 밥을 먹고, 걷고, 너를 생각하면서 모든 일을 한다. 김연수의 소설처럼 ‘너를 생각하는 것이 나의 일이다’ 이것은 매일 카드를 만들고, 매일 우체국에 가 그 카드를 부치고, 크리스마스트리에 버튼을 누르는 일이다. 온 세상을 빛의 나라로 만드는 일이다. 설레는 일이다.
2. "자아는 자기 자신을, 비아에 의해 제한된 것으로 정립한다 "(피히테)
설렘의 실체가 오기 전에도 설레고, 설렘의 실체를 알기 전에 미리 설렌 이 설렘의 근원은 무엇일까? 자아가 하나로 통합되었을 때, 설레다고 말하는 어떤 이들이 있다.
요한 고틀리프 피히테(1762~1814)하면 『독일 국민에게 고함』으로 국가주의자 민족주의로 인식되거나, 『신의 세계통치에 대한 우리들의 믿음에 대하여』라는 글에서, '무신론 논쟁'에 휘말리게 되어 교수직을 사임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는 신을, 우리의 '지의 추구'에 있어서 우리가 향해야 하는 ‘절대자’로 바라보고, 그 절대자아로 통합되었을때, 우리는 모든 오욕칠정에서 자유로워지고 그 자유로움에서 모든 기쁨이 통합된다고 보았다. 그것을 복된 삶이라고 보았다.
피히테는 절대적 자아에서 경험적 자아가 도출되는 과정이 지식의 원칙이라고 다음과 같이 정립한다.
Ⅰ. 자아는 근원적이고 전적으로 자기 자신의 존재를 정립한다. ( Das Ich setzt ursprünglich schlechthin sein singenes Seyn.)
Ⅱ. 자아에 대하여 비아가 전적으로 반정립된다. ( ... wird dem Ich schlechthin entgegengesetzt ein Nicht-Ich.)
Ⅲ. 나는 내 속에, 가분적 자아에 대립해서 가분적 비아를 정립한다. ( Ich setze im Ich dem teilbaren Ich ein teilbares Nicht-Ich entgegen.)
ⅰ. 자아는 자기 자신을, 비아에 의해 제한된 것으로 정립한다. ( ... das Ich setzt sich selbst, als beschränkt durch das Nicht-Ich.)
ⅱ. 자아는 비아를, 자아에 의해 제한된 것으로 정립한다. ( Das Ich setzt das Nicht-Ich, als beschränkt durch das Ich.)
『전 학문론의 기초』에서 피히테는 '지적 직관을 통해 정립된 절대적 자아가 무제약적으로 스스로를 산출하고 다시 통합하는 역동적인 활동을 모든 지식의 기초로 두고자 한다. 활동은 도식 상으로 3가지 원칙을 따른다. 우선 동일한 하나의 절대적 자아를 정립한다. 이와 동시에 그 외부 대상인 비아(세계) 역시 정립된다. 그리고 '절대적 자아'와 '비아(세계)'의 사이에서, 경험하는 자아(경험적 자아)와 경험당하는 자연(일부 세계)이 정립한다.
따라서 절대적 자아에서 경험적 자아가 도출되고, 그 경험적 자아를 통해 다시 절대적 자아로 인간은 회귀하게 된다고 본 것이다.
첫째, 자아는 스스로를 정립한다. 둘째, 자아에 대하여 비아가 정립된다. 셋째, 자아는 가분적 자아로 가분적 비아를 정립한다. 피히테는 자아와 비아의 투쟁을 통해 인간이 궁극에 도달하고 싶어하는 지점이 절대적자아라고 말한다.
피히테의 전기 철학은 칸트의 선험적 통각(순수 통각)을 순수한 자아의식으로 이해했다. 피히테는 선험적 영역에서의 순수한 통각을 '절대적 자아'라고 인식했다. 하지만 후기로 갈수록 사유에 변화가 생긴다. 그는 학문론의 후기 원고에서, 자아와 비아의 분열을 넘어서 절대자 속에 있는 통일의 원리에 이르고자 한다. 이 때의 절대적 자아는 곧 절대자, 신을 뜻하기도 한다. 즉, 피히테는 학문론에서처럼 모든 경험적 의식의 근저에 있으면서 경험을 가능케 하는 선험적 의식으로서의 절대적 자아를 이야기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절대자, 신이라는 의미로 절대적 자아를 사용하고 있다. 왜냐하면, 절대적 자아는 유한한 자아(경험적 자아)에게 있어서 하나의 이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나는 나"라고 하는 절대적인 통일에 이를 수 있는 것은 오직 신적인 경지에서만 가능한 것이고, 유한한 인간에게 있어서 그것은 도달할 수 없는 하나의 이상에 불과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유한자인 인간의 자아에 있어서 비아는 궁극적으로는 부정될 수 없는 한계로서 남게 된다. 그러므로 그 자연을 이해하려는 절대적 자아는 엄밀한 의미에서 '신의 자아'일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피히테는 '비아의 절멸을 향한 무한한 추구'라는 초기의 입장에서 돌아서서, 자신의 후기 철학으로 갈수록 추구의 방향을 '절대자와의 합일'이라는 것으로 입장을 바꾼다. "불변자와 하나가 되고자 하고 융해되고자 하는 이 충동은 모든 유한한 현존재자의 가장 내밀한 뿌리다." 이러한 절대자와의 합일에 의하여 복된 삶을 얻을 수 있다고 그는 말한다.
3.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다.> 마르코 14,12-16.22-26
12 무교절 첫날 곧 파스카 양을 잡는 날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스승님께서 잡수실 파스카 음식을 어디에 가서 차리면 좋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13 그러자 예수님께서 제자 두 사람을 보내며 이르셨다. “도성 안으로 가거라. 그러면 물동이를 메고 가는 남자를 만날 터이니 그를 따라가거라. 14 그리고 그가 들어가는 집의 주인에게, ‘스승님께서 ′내가 제자들과 함께 파스카 음식을 먹을 내 방이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하여라. 15 그러면 그 사람이 이미 자리를 깔아 준비된 큰 이층 방을 보여 줄 것이다. 거기에다 차려라.” 16 제자들이 떠나 도성 안으로 가서 보니, 예수님께서 일러 주신 그대로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파스카 음식을 차렸다. 22 그들이 음식을 먹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받아라. 이는 내 몸이다.” 23 또 잔을 들어 감사를 드리신 다음 제자들에게 주시니 모두 그것을 마셨다. 24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 2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가 하느님 나라에서 새 포도주를 마실 그날까지, 포도나무 열매로 빚은 것을 결코 다시는 마시지 않겠다.” 26 그들은 찬미가를 부르고 나서 올리브 산으로 갔다.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다.>라고 전하는 마르코 14,12-16.22-26은 성찬례 제정에 관한, 성체성혈의 축복에 대해 마태오26, 26-30/루카22, 14-20/ 1코린토11, 23-25에 동시에 전하는 복음이며, 요한복음 6, 22-59와 연결하여 우리는 예수님께서 무한히 무한히 그 한계를 정할 수 없을 정도로 당신의 모든 것을 주시는 축복 앞에서 서 있게 되었음을 감사하게 된다.
마르코 복음에서는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과 사천명을 먹이신 두 개의 기적사화를 통해서- 빵을 들고 축복하신 다음 떼어 주셨다(6,41) 빵을 들고 사례하신 다음 떼어서 주셨다(8,6)에서, 성찬의 이 잔치는 메시야 시대의 축복이며, 그 빵은 바로 메시야 자신임을 분명히 하신다.
“그들이 음식을 먹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받아라. 이는 내 몸이다.” 또 잔을 들어 감사를 드리신 다음 제자들에게 주시니 모두 그것을 마셨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
마르코 14,12-16.22-26에서 무한한 사랑만큼 무한한 묵상을 우리에게 건네시지만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떼어-떼다(Klao)”에 초첨을 맞추어, 떼다의 원형이 부서트린다는 뜻으로, 당신의 몸을 준다는 것은 산산히 부서진다는 십자가의 죽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다는 것은 당신 아들의 생명을 어둠에게 넘겨주어 우리와 일치하시는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일임을 알 수 있다. 여시서 모세를 통한 계약과 성체성사의 연속성을 통해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과 하나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묵상하게 된다.
성체 하면 우리는 <떼어서- 부서트린다>에서 자기 몰아의 사랑을 만나게 된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정서나 감성의 측명이 아니라 생명과 연결된 것이기에 <면형무아>를 자아 초월적 가치의 내면화, 라는 것을 조금 더 묵상해 볼 필요가 있겠다.
성체성형의 신비를 체험하는 성찬례는 천국의 계시가 담겨있는 부분이다.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 사천명을 먹이신 기적은 그 표징 이후에 생명의 빵과 영원한 생명의 말씀은 우리가 그토록 궁금해 하는 하늘나라 혹은 천국은 무엇인가를 계시한다.
성서해설서들은 이 성찬례를 제정하시는 부분을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먹은 만나의 완성, 그 예형이라고 전한다. 그 예형의 풍요로움이 어떻게 천국의 예표인가?
예형론(豫型論.typology)은 성서에 주석을 다는 성서 해석에 관한 이론 체계 중 하나로, 신약 성서의 내용을 구약 성서의 예언이 성취된 것으로 해석하는 방법이다. 더 나아가 인류 역사 혹은 한 인간의 생에서 어떤 반복되는 패턴을 이해하는 해석론도 여기에 속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먹은 만나의 완성, 그 예형이라고 한다면, 만나의 완성은 무엇인가? 만나의 완성은 하느님이 신앙의 선조들을 통해 약속하신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이기에. 이는 오늘 우리가 그토록 갈망하는 하늘나라 혹은 천국에 대한 예형이 무엇인가를 바라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먼저, “나는 나다”라는 것부터 생각해 본다. "나는 나다"는 것은 신의 신원의식뿐 아니라 그분을 신앙하는 이들의 자아초월의 예형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있는 자로다" 라고 할 때, '있는' 은 존재상태를 의미하는 것이지 어떤 이름이라고 할 수 없다. 신은 이름이 없다. 그렇기에 나란 자아성취를 통한 타자와 구별하는 내가 아니고 나를 없앤 보편적인 나라는 의미에서 이것은 불가피하게 십자가의 죽음을 통과한 이후에 절대적 자아인 그분과 하나가 된 나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예수님-성령-나, 이런 도식이 성립한다는 것이다.
하나라는 도식이 의미하는 바를 좀 더 바라보기 위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우리가 하느님을 부를 때, 그 갈망이 우리 내면의 깊은 심연에서 길어올려진 생명일 때(고백적 차원이 아니라), 우리 뼛속까지 스며든 들숨 날숨의 모든 순간이 된, 아버지! 하느님!이 될 때, 전인격적 차원에서 나온 부름이라면, 우리는 지금 여기서 이미 도래한 하늘나라 혹은 천국을 체험했어야 한다.(사실 모든 기도는 아버지! 하느님!이라는 부름만으로 족하다. 아버지와 하느님이 내 안에 가득찼다고 생각들 때까지 부르는 게 기도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의 순례의 여정은 십자가의 죽음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축복은 언제나 십자가와 부활을 동시에 살아내는 여정이기에 그렇다.
축복은 언제나 어떤 길과 함께 한다. 당신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라고 선언하신 성체성혈의 신비, 그 축복을 오롯이 받기 위해서 우리 역시, 십자가의 길과 부활의 길을 동시에 걸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십자가의 길은 면형무아의 길이라 한다면 부활의 길은 평화무한의 길이라고 할 수 있다. 전자는 우리의 이름을 지우는 길이요, 후자는 우리의 이름이 하느님의 이름과 같아지는 길이다. 이 두 길은 그 어느 길도 생략할 수 없다.
먼저, 우리의 이름을 지우는 면형무아의 길이 무엇인가부터 생각해 보기로 한다. 성체성혈 하면 고 방유룡 신부를 통해 수도자의 정신으로 제시된 면형무아麵形無我의 길을 걷는것과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자아초월의 가치를 내면화하는 길이라고 할 수 있다.
면형무아麵形無我란 성체 축성으로 밀떡의 실체는 없어지고 그 형상만 남은 면형에 그리스도께서 오시어 면형이 그리스도의 몸인 성체가 되듯이 내 인간적인 본성이 없어진 無我에 하느님께서 오시어 하느님과 내가 하나됨을 의미한다. 면형무아의 영성은 결국 성사의 삶으로 자기를 비우고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며 살아가는 삶이다.(한국 순교복자 수녀회 영성 중에서)
<뗀다-부서트린다>는 영원한 생명은 하나로 돌아가는 생명이기에 개별자의 이름이 없다. 아마도 성체성혈의 의미는 바로 그런 하나로 돌아가는 삶이 무엇인가를 말해준다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고유한 인격과 위격을 모두 지운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신마저도 이름을 지운 순간이 바로 성체성혈의 의미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름을 지운 그 사건이 어떻게 영원한 생명을 열 수 있는 문인가는 이미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계시되었듯, 수난에 머무르기 위함이 아니라 면형무아의 길만이 우리에게 천국이 무엇인지 말해주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상징의 세계 속에서 상징에 의해서 산다. 우리가 보는 모든 것에 이름을 붙인다. 이름이 붙은 것들은 각각이 고유한 세계가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름으로 식별되는 개체가 된다. 우리 각자에게 붙여진 고유한 속성들은 그 개체를 둘러싼 공간을 구획하여 다른 존재들과 공간적으로 구분한다. 사물에 붙인, 사건에 붙인, 이름 사이에는 몸과 몸 사이를 분리하는 공간이 생긴다. 사물과 사물 사이에도 공간이 생기고 나와 모든 사물 사이에도 공간이 생긴다. 그리하여 분리 속에서 생명이 주어졌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 개체가 지닌 이름을 지운다는 것은, 이름을 지워야 하늘을 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모세의 이름을 지워야 만나가 하늘의 사랑임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하늘의 사랑을 알아야 우리는 빵만으로 사는 존재가 아님을 바라볼 수 있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 는 말과 같은 맥락일 것이다. 이름만 지우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선하다는, 내가 사랑이 많다는 영적포만감까지 탐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성체를 영하는 것은 면형무아의 삶을 사는 것으로, 마리아의 수태고지의 수락처럼 진정한 겸손을 실천하는 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짐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아들의 마음이 면형무아의 궁극적인 지점이라고 할 수 있다. 아버지의 뜻은 모든 생명체가 오직 <하나oneness>가 되는 것에 있었다. 이름을 지우는 것은 오직 하나임을 알고 살기 위해서다. 바오로 사도가 말한 그리스도를 머리로한 지체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개별자아로 이 세상에 온 것인가? 라는 질문을 할 수 있다. 형체를 통해 형체너머에 있는 영원한 생명을 경험하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다. 영원과 하나는 나눠지지 않은 상태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라는 예수님의 선언은 나는 영원이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그러기에 우리가 하나라는 것은 우리 역시 영원을 체험하는 일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 몸과 마음과 영혼을 지닌 삼중의 존재로 왔다. 우리 자신을 하나로 통합하는 것도 사실 어렵다. 그런데 모든 생명체가 하나가 된다는 것은 하늘이 준 축복이 아니고는 가능하지 않은 사건이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내가 영혼을 지닌 존재라는 것을 바라보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마음의 표층인 에고는 이름을 지향하고 영혼은 이름대신 하나를 추구한다. 즉, 평화, 사랑, 기쁨, 자유를 추구한다고 할 수 있다. 평화, 사랑, 기쁨, 자유는 하나가 되지 않고는 알 수 없는 축복의 상태들이다. 천국은 바로 영혼을 지닌 존재인 내가 모든 것과 하나임을 체험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oneness)라는 이름의 영원
그렇다면 하나가 되는 것이 어떻게 영원한 생명인가를 조금 더 생각해 보기로 한다. 성체성혈의 신비인 그분의 현존체험은 우리로 하여금 어떻게 하나가 곧 영원한 삶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에 대한 어떤 예형의 길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체험할 수 있나?
"너희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것과는 달리,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58절)
영원이란 이미 그 삶이 가능해야 영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조상들은 왜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를 먹고도 죽은 것일까? 에 어떤 안티테제가 숨어있을 것이다.
요한6장 32-33에는 “하늘에서 너희에게 빵을 내려준 이는 모세가 아니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빵을 내려주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
신명기 8, 2-16에서는 “그분께서는 너희를 낮추시고 굶주리게 하신 다음, 너희도 모르고 너희 조상들도 몰랐던 만나를 먹게 해 주셨다. 그것은 사람이 빵으로만 살지 않고,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너희에게 알게 하려는 것이었다.”
분명히 모세는 만나를 하늘이 내려준 만나임을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 광야를 건넜던 이스라엘 조상들은 모세가 만나를 내려준 것으로 받아들임으로, 만나를 단지 육체의 배고픔을 채우는 일회적 사건으로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를, 그들이 먹고도 근본적인 배고픔을 해결하지 못했다는 것은 만나 자체와 만나를 전하는 메신저와 그것을 받아들이는 이의 의지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우리에게 시사한다. 하늘의 의지와 땅의 의지가 만나 영원의 문을 연다는 것을 말이다. 이스라엘 조상들이 하늘을 지우고 그 자리에 모세의 이름을 넣은 것은 그들은 근본적으로 하느님을 원하지 않았다는 의미다. 육체의 충족을 원한 것이지 영적 충족을 원한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전자가 하늘을 갈망하지 않는 자의 귀결이라면 하늘을 전하는 자의 자세는 무엇인가? 민수기에서 모세는 결국 약속의 땅을 목전에 두고도 그 땅으로 들어가지 못한 것에서 그를 추론할 수 있다. 가나안땅 앞에서의 모세의 역할을 여러 측면에서 추론할 수 있겠지만 만나와 연결하여 모세 자신의 이름을(능력을) 결정적 순간에 지우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바라볼 수 있다. 이는 하늘의 메신저들이여! 이름(분노) 때문에 하늘을 가리지 말라는 엄정한 요구라고 할 수 있다. 하늘을 바라보아야 하는 이들에게 하늘을 지운 모세의 분노, 여기서 하늘의 의지와 땅의 의지가 결렬되었다는 것은 하늘의 의지는 땅의 의지를 강제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전한다.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민수기 20장 10절)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백성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민수기 20장 12절)"
요한 6장 35절에서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라고 전한다. 이 짧은 한 문장은 십자가의 수난 죽음 부활을 모두 담고 있는 문장이다. 예수님 이름이 지워진 사건의 결과보고서에 해당한다. 이름을 지운다는 것은 하늘을 연다는 의미가 있기에 그렇다.
그런 맥락에서, 우리가 그분의 말씀에 머물렀을 때, 우리 생의 근본적인 배고픔과 목마름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면형무아의 정신에서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바로 구약의 완성, 영원한 생명을 주는 빵으로 오신 만나의 예형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예형은 본질의 완성을 지향한다. 그 완성이란 그분을 믿는 이들의 구체적인 삶에서 확증된다고 할 수 있다. 하느님에게 나온 말씀은 그 뜻을 실현하지 않고는 다시 하느님께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에서, 성체를 영하는 우리가 성체적 삶을 살지 않고는 성체성혈의 신비를 결코 알 수 없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성서에 나오는 모든 말씀이 우리 삶에서 체험되지 않는다면, 우리 역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말씀을 앞에 두고 굶어죽는 사태를 초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오늘이 없는 영원이 있을까?를 우리 자신에게 엄중하게 물어야 한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다른 말로 우리 삶 안에서 천국의 신호음, 그 예형을 발견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미 여기서 오늘 천국을 사는 길이, 주어졌다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 축복이기에 그렇다. 하나 혹은 영원은 신학적 혹은 교리적 어휘에 머무르지 않는다. 만나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영원한 생명으로 완성되었듯, 우리 삶에서 그분의 삶이 체험되어야(완성) 우리는 그분을 그리스도로 확증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이 개별자아의 이름을 지우고 하늘을 여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갖지 않으면 줄 수 없다. 준다는 것은 가졌다는 증거이다. 성체성혈의 축복을 받았다면 우리도 이미 그 축복을 전하고 있을 것이다. 주는 것이 받은 것의 확증이기 때문이다. 참 어려운 말이지만, 우리도 이미 누군가에게 성체가 되는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 또한 그런 삶을 살 수 있는 것은 누군가의 성체된 삶을 나누어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분 말씀에 머무른 그 상태란 영적 신호음을 알아들은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성서를 읽고 말씀을 체험한다는 것은 어떤 가시적인 체험뿐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 파동과 같은 사랑을 체험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늘의 음성을 듣는 것, 그것을 영적감수성을 작동하는 것이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미사 감사송을 바칠 때, 온 누리에 주 하느님! 하늘과 땅에 가득한 그 영광! 을 노래한다. 온누리에 주 하느님이 가득 하다면, 바로 오늘, 온 누리가 이미 천국일 것이고, 천국의 자장 속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는 전언일 것이다.
여기서 미사전례의 그 감사송을 살아있게 하는 주체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우리가 영적 감수성의 주파수를 누구에게 맞춰야 그분의 현존을 말잔치의 범주에서 벗어나게 하는지. 그것을 행복의 자기결정권, 혹은 사랑의 자기결정권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우리가 이 순례의 여정에서 영원의 신호음을 알아듣지 못했는데 죽은 다음에 그 신호음을 알아차릴 수 있을까? 우리는 성체성혈을 반복적이고 소비적인 전례의 한 과정으로 국한시키는 것은 아닐까? 아님 성체성혈의 신비는 오직 예수님을 찬송하는 예찬적 문장인가?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진 자유의지는 육체적으로 살아있을 때의 시한부적인 선물일까? 이 네 개의 질문은 나눠진 질문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사랑의 자기결정권 혹은 행복의 자기결정권>이라는 영적 감수성을 통해 <성체성혈의 신비>를 현재화 하는 것이 우리의 몫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것 안에서' 그분을 만나기 위해선 아주 사소한 찰라를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우리 생에 누구에게나 주어진 '보리빵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에 비유되는 '최소의 사랑'이라는 천국의 예표가 있다. 이 생에서 생존이라는, 삶이라는 십자가만 지는 것이 아니고 부활도 함께 체험한다는 것을, 완벽한 천국이 아니라 천국의 예표를 수시로 체험한다는 것을. 나의 약함만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강함도 체험한다는 것을. 그분이 세상끝까지 함께하시겠다는 약속을 실현시키는 것이 나의 영적감수성이라는 것을. 사람마다 모두 다양하게 그 기쁨을 받아 누리면서 산다. 연주로, 노래로, 꽃을 키우면서, 농사를 지으면서, 빵을 만들면서, 음식을 만들면서, 옷을 만들면서, 커피를 내리면서, 여행을 하면서, 사진을 찍으면서, 글을 쓰면서, 연구실에서....평화, 사랑, 기쁨, 자유...등등 ...그런 느낌들은 모두 어디서 온 것일까?를 생각해 보면, 그것은 하늘에서 온 것임을 알 수 있다. 어떤 메신저를 통해서 왔지만 그 출처는 하늘이다. 그것을 전해준 어떤 이름들은 하늘의 전령, 메신저일 따름이다. 그런 찰라의, 조각같은 설레임의 퍼즐들이 모여서 생이 풍요로워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두 손을 모고, 하늘을 우러러 감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그분의 현존 싸인을 읽지 못한다면, 어떻게 아버지와 내가 하나라는 것, 삼위일체 하느님과 하나라는 것을 알 수 있을까? 그분의 말씀이 살아있다는 것은 누가 수행하는 것일까? 그분의 의지와 우리의 의지가 하나가 되는 순간이 아닐까?
모든 전례, 모든 인연, 모든 일, 모든 자연, 모든 사물, 모든 사건은 우리에게 다양하게 그분의 현존 싸인을 보낸다. 그 찰라의 신호음을 알아듣는 것이 말씀을 현재화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말씀을 현재화하기 위해선 우리 마음의 여백이 있어야 한다. 마음에 세상 것으로 가득차 있다면 어떻게 그분의 음성을 그분의 현존을, 그분의 신호음을 체험할 수 있을까? 그래서 성체성혈 하면 마음을 비우는 연습, 면형무아의 정신-여백이 거론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성체성혈은 애주애인의 사랑을 먹는 축복이자 그분의 현존을 구체화하는 축복이다. 더불어 예수님의 길을 따라 살려고 하는 우리가 영적 감수성을 어떻게 작동시키는지에 대한 안내서라고 할 수 있다. 면형무아는 모든 것을 다 내려놓는 힘든 고행의 길만 걷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팍팍한 이 삶 속에서 영원한 행복을 만날 수 있는가에 대한 예표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행복 혹은 사랑의 자기결정권을 행사하는 것으로, 내가 누구이며, 내가 무엇을 해야 그분의 현존을 세상에 드러낼 수 있는지? 그에 대한 고요한 답, 유일한 음성을 듣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글을 마치며,
12 무교절 첫날 곧 파스카 양을 잡는 날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스승님께서 잡수실 파스카 음식을 어디에 가서 차리면 좋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13 그러자 예수님께서 제자 두 사람을 보내며 이르셨다. “도성 안으로 가거라. 그러면 물동이를 메고 가는 남자를 만날 터이니 그를 따라가거라. 14 그리고 그가 들어가는 집의 주인에게, ‘스승님께서 ′내가 제자들과 함께 파스카 음식을 먹을 내 방이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하여라. 15 그러면 그 사람이 이미 자리를 깔아 준비된 큰 이층 방을 보여 줄 것이다. 거기에다 차려라.” 16 제자들이 떠나 도성 안으로 가서 보니, 예수님께서 일러 주신 그대로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파스카 음식을 차렸다. 22 그들이 음식을 먹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받아라. 이는 내 몸이다.” 23 또 잔을 들어 감사를 드리신 다음 제자들에게 주시니 모두 그것을 마셨다. 24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 2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가 하느님 나라에서 새 포도주를 마실 그날까지, 포도나무 열매로 빚은 것을 결코 다시는 마시지 않겠다.” 26 그들은 찬미가를 부르고 나서 올리브 산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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