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숨결 그리고 숨을 쉬는 한 희망하라!(Dum Spiro Spero)
- 성령강림대축일,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성령을 받아라.”를 중심으로
1. 베르 톨트 브레히트, 「아침저녁으로 읽기 위하여」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에게 말했다./ “당신이 필요해요”//그래서 나는 정신을 차리고 길을 걷는다 / 빗방울까지도 두려워하면서 / 그에 맞아 살해되어서는 안되겠기에
베드톨트 브레히트의 「아침저녁으로 읽기 위하여」는 우리의 존재 이유에 대해 이보다 더 분명한 정의는 없을 듯하다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시다.
“당신이 필요해요”라는 육성은 브레히트 개인의 체험을 넘어 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체험이기도 하다.
우리는 무엇 때문에 살 수 있는가? 그것은 바로 그대라는 님이 있기 때문이다. 그대라는 님은 우리가 맺는 특정한 관계를 넘어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존재이유와 닿아 있다. 그것이 숨을 쉬는 모든 생명체가 지닌 희망의 이유라고 할 수 있다. 희망하는 줄도 모르는 희망이다.
우리가 만나고 싶은 사람들을 다 만나고 살지는 못한다. 그럴지라도 우리는 어느 하늘 아래 그가 존재 한다는 것을 알기에 존재하는 그 자체가 희망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남마리안나 수녀님께서! 감사합니다!
2. 우리가 맺는 관계는 이 세계와의 관계이다
우리가 세상과 관계를 맺는 것이 존재이유라고 할 때, 그 관계는 단지 사람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맺는 관계는 창조된 모든 것과 맺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그 관계는 우주와 맺는 관계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께 속한 이 우주는 우리가 지각하는 분리된 몸들을 모아놓은 하찮은 총합을 훨씬 능가한다. 엄밀히 말해 우리가 직면해 있는 고통이나 문제들은 우주를 구성하는 그 몸들의 존재이유를 간과했기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어떤 장소 어떤 공간은 어떤 사람들에게 존재이유를 주는 문이 되기도 한다.
『토포스: 장소의 철학』은 사회통념으로서의 상식을 넘어 개인과 사회를 관계 짓는 문제를 사유한 철학자 나카무라 유지로가 ‘장소’라는 주제로 풀어낸 철학적 에세이다. ‘장소’라는 개념을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부터 현대 과학이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고찰한다. 수사학, 언어철학, 논리학, 물리학, 생물학 등 여러 분야를 아우르고, ‘장소’, ‘장’, ‘토포스’ 등 다양하게 다루어지고 있는 ‘장소’ 개념을 폭넓게 풀어주고 있다. 다양한 존재론적 질문이 응축된 장이자 생명과학을 비롯한 현대 자연과학의 최첨단의 문제와 맞닿아 있는 ‘장소’의 개념은 생명, 관계, 존재, 형태 등 다양한 주제를, 그리고 삶이 펼쳐지는 수많은 드라마를 다양하게 사유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해준다.
우리들은 신체를 도구처럼 가지는 것이 아니라 신체 그 자체를 살고 있다. 살아 있고 활동하고 있는 이상 의식은 세계를 향해 작용하고 있지만 그러한 의식에 대해서 우리들의 신체는 기반이 되고 있고, 따라서 지평을 형태짓고 있다. 이 기반에 의해, 혹은 이 지평을 얻어야 비로소 의식은 이 세계 속에 자기의 위치를 얻고 각자에 특정한 관점을 갖춘 현실적 의식, 구체적인 나의 의식이 되는 것이다.
게다가 활동하는 신체로서 우리들 각자는 좁은 육체의 틀을 넘어 세계를 향해 열려 있다. 그리고 그런 한에서 우리들의 신체는 피부에 의해 닫혀진 생리학적인 신체가 아니라, 현상학적으로 말해 그 외부까지 확장된다. 우리들은 모두 그 확대된 신체 구석구석까지 감각을 보내 통과시키면서 활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확대된 신체에 의해 외적인 공간도 재파악되고 내면화된다.
노(能) 배우가 거의 시야가 보이지 않는 가면을 쓰고도 자유자재로 무대에서 춤출 수 있는 것은 그의 확대된 신체가 약 5.5제곱미터의 무대 전체에 미치고 있으며, 그것을 통해 무대 공간이 그 속에 내면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 익숙한 자동차를 운전하고 있을 때 무의식중에 우리들의 신경은 그 차체 크기의 범위에까지 미치고 있다. 그래서 좁은 도로를 빠져나갈 경우에 무심코 몸을 움츠리거나 하는데, 그것도 우리들 신체가 차체 크기로까지 확장되어 있고 차폭이 신체 속에 내면화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장소가 주체의 반대개념이고 대립개념인 이상 장소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주체를 단지 부정하는 것이라 생각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앞에서도 기술했듯이 나의 경우 장소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공연히 주체를 부정해서 없애기 위함은 아니었다. 그런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주체주의 철학에 의해 무시되고 등한시되어 온 장소를 철저히 생각해서 그것과의 관계로 주체를 재파악하기 위해서였다. 주체를 실체가 아닌 활동으로서 파악, 주체에 정당한 위치를 부여하기 위함이었다. 주체가 경직화하거나 쇠약해지지 않기 위한 조건을 찾기 위함이었다. _
‘장소’ 개념의 계승은 뇌과학이나 인공지능 연구, 생물학, 비선형 과학 등 첨단 과학 분야에서 ‘장’ 개념이 보다 의미론적 색채를 띤 공간으로 진화해 가는 동향에 주목, 기존의 인문학적 장소 개념과 접목하는 것으로 진행되고 있다. 이들 과학 분야의 연구들은 일본 인문ㆍ사상계와의 학제간 연구의 성공적인 결합으로 ‘생명과학’이라는 이름하에 활발하게 진행 중이므로 그 귀추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국에서도 장소가 갖는 정서적 성격을 강조하는 하이데거나 발터 벤야민과 같은 사상가의 철학이 소개되었고 건축과 같은 분야에서 특히 주목받고 있지만, 보다 엄밀한 방법론과 존재론에 바탕해서 ‘장소’ 개념을 주체나 정치철학적 문제까지 포괄하는 개념으로 발전시키려면 생명과학이 이룩하고 있는 성과들과의 대화가 필수적이라고 생각된다. 이미 생물학적 방법론과 존재론에 기반한 ‘공간’ 개념은 물리학의 그것과는 상당히 차이가 나며, 이런 개념적 기초 위에서 보다 현상학적이고 의미론적인 ‘장소’ 개념을 구축해 나가야 할 것이다. 본서에서도 과학적 ‘장’ 개념은 물리학의 ‘중력장’, ‘양자장’을 거쳐 생물학적인 ‘형태형성 장’, ‘생명장’의 개념에까지 이르면 종국에는 수사학적 장소, 언어적 장소 등 인문적 장소 개념과 접촉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철학에서는 흔히 ‘공간’과 ‘시간’을 존재론적 원리들 중 핵심적인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공간에 대한 논의가 삶에 보다 밀착된 형태로 변환되기 위해서는 ‘장소’(場所)를 사유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공간이 추상적이고 사변적인 논의에 적합한 형식이라면 장소는 삶의 실제적 기반을 논의하는 데 적합한 개념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이러한 ‘장소’ 개념을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부터 현대 과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고찰한다. 수사학, 언어철학, 논리학, 물리학, 생물학 등 여러 분야를 아우르고, ‘장소’, ‘장’(field), ‘토포스’(topos) 등 다양하게 말해지고 있는 ‘장소’ 개념을 폭넓게 풀어 주고 있는, 한마디로 말해 ‘장소’에 관한 철학 에세이이다. 장소는 단순히 추상적인 공간도 아니고, 우리가 그냥 머물러 있는 곳도 아니다. 다양한 존재론적 질문이 응축된 장이자 생명과학을 비롯한 현대 자연과학의 최첨단의 문제에도 맞닿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장소’는 삶 전체를 관통하는 사유의 중심에서 바라볼 수 있는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장소론은 왜 필요한가? 장소는 사물이 존립하기 위해서는 없어서는 안 되는 지반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를 현실감 있게 느끼고 살고 있다. 특히 장소가 추상적인 공간과 다른 것은 시간성의 유무 이전에 그것이 균질적이지 않고 방향성을 가졌다는 것, 즉 ‘의미를 띠고 있다는 것’에 있다. 그러한 장소는 전자기장과 같이 객관화시켜 파악할 수도 있지만, 생명장과 같이 환경이나 다른 사물과의 관계에 따라 복잡한 의미를 생성하는 곳으로 볼 수 있다. 또 ‘공동체’나 ‘환경’과 같이 물질적 바탕이기도 하지만, ‘무의식’과 같이 존재론적으로 의미 깊은 원리로서의 ‘장’을 의미하기도 한다. 즉, ‘장소론’은 공간의 한정된 의미를 넘어 다양한 생명 일반의 근거를 마련해 주는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인간에게 ‘환경’은 존재근거로서의 장소이다. 우리는 인간과 사물을 잇고 있는 공간과 시간이 동일한 것이고, 이 세계는 하나며 그 속에 수많은 생물 등이 채워져 있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개개인의 존재근거로서 중요한 ‘공동체’(사회)나 ‘무의식’은 환경과는 달리 의식적 자아가 성립하기 위한 장으로서 기능하고 있다. 우리는 그 자체로는 자립할 수 없고, 공동체나 무의식을 기초로 해서 그 위에 비로소 성립하기 때문이다. 다른 각도에서 보자면, 우리의 ‘신체’는 그 자체로 장소적인 성격을 드러내 준다. 다른 말로, 활동하는 신체는 우리들 각자의 좁은 육체의 틀을 넘어 세계를 향해 열려 있다. 신체와 밀접하게 연관된 사물과의 감각적 결합을 통해 생리학적 신체가 아니라 현상학적으로 확장된 신체를 통해 외적인 공간을 재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가령, 일본 전통극 중 하나인 ‘노’를 연기하는 배우는 5.5제곱미터의 무대 전체를 내면화하여 그곳에서 자유자재로 춤출 수 있다. 또, 익숙한 자동차를 운전할 때 우리는 무의식중에 우리의 범위가 차체 크기에 미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좁은 도로를 빠져 나갈 때 감각적으로 차체를 자기 몸처럼 다루거나 몸을 움츠리거나 하는 것이다. 차체(그 차폭)를 내면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장소론은 생명, 관계, 존재, 형태 등 다양한 주제를, 그리고 삶이 펼쳐지는 수많은 드라마를 다양하게 사유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준다.
3.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성령을 받아라.>요한 20,19-23
Ⓐ19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20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 Ⓑ21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22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성령강림대축일 복음,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성령을 받아라.>라고 전하는 요한 20,19-23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사명을 부여하시는 부분으로 마태오28,16-20/마르코16, 14-18/루카24, 36-49에 공통으로 나오는 파견소명이기도 하다.
복음사가는 이 파견사화를 세 부분으로 나누어 부활하신 에수님께서 섬세하게 제자들에게 사명을 완수할 수 있는 힘을 불어넣어주는 부분을 초점화하고 있다. 이를 통해, 파견 혹은 사명을 완수한다는 것은 이 세계와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왜 우리는 단독자가 아닌가? 왜 우리는 혼자 왔다 혼자 간다고 말들을 하는데, 이 세계와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답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의 부활, 승천, 그리고 성령 강림은 하늘과 땅이 하나로 관계를 맺듯,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 역시 하나로써 관계를 맺고 있다는 대 전제를 깔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이 생명의 원리고, 관계의 목적이고, 그것이 행복의 비결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표지인 교회를 통해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나라는 것, 그 관계를 맺는 방법을 배운다. 그런 맥락에서 아버지와 내가 하나이듯, 너희도 나와 하나라는 이 관계론의 정점이 성령감림의 축복이 아닌가 싶다. 성령은 우리가 예수님처럼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의 원천을 제공한다. 우리가 세상을 이기지 않고는 우리가 무엇과 관계를 맺고 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성령을 받아라.>라고 전하는 요한 20,19-23은 21절의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로 모아진다.
Ⓐ----------------->Ⓑ<----------------------Ⓒ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일은 먼저 Ⓐ19-20절에서 제자들의 두려움을 치유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제자들의 비겁함과 소심함과 배신으로 인해 스스로 상처받은 부분을 파견에 앞서 먼저 치유하신다는 점이다. 그로인해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이라는 인사는 유대사회의 인사법을 넘어 하늘과 땅의 인사법이 된 것이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이 주신 평화는 상처의 흔적을 통해 상처는 우리에게 무엇인가?에 관한 성찰을 이끌면서 파견의 1차 조건은 자기 상처의 치유로부터 시작된다는 점이 초점화 한다.
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상의 죽음이라는 과정에서 받은 그분의 상처의 흔적을 제자들에게 보여줌으로써,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는 것에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겪어내는 상처나 고통이나 죽음의 이름, 그 자리를 찾게 만든다. 상처가 흔적으로만 있다는 것은 물리적인 흔적은 있을지언정 영적 상처를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사랑하는 사람은 상처받을 수 없다는 명제가 도출된다. 타인에게 상처를 주지 말라는 말을 흔히 말하지만 상처받지 말라는 말은 잘 하지 않는다. 이는 상처를 확대재생산하지 말라는 의미로, 십자가의 길에서 예루살렘 부인들을 위로하면서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와 네 자녀들을 위해 울어라는 맥락과 같은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을 <절망을 모르는 현실>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사랑을 안다는 것은 함부로 상처받지 않고, 함부로 절망하지 않는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여기서 이 세계와 관계를 맺는 그 관계의 핵심에 십자가의 사랑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그 사랑은 불가피하게 상처받은 치유자로써 상처받은 세계를 치유하게 만든다는 것으로 이어진다. 상처받은 예수님만이 상처받은 제자들을 치유할 수 있다는 말은 사랑은 상처받을 수 없다는 말과 언뜻 충동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사랑을 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상처가 필연적이라는 측면에서의 상처이지, 어둠에 무차별적으로 노출된 인간이 자기를 아프게하는 일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렇기에 상처에 대한 치유는 이 세계에 파견되기 전에 하늘과 맺는 관계가 무엇인가를 아는 것과 다르지 않다. 사랑의 황금률인 애주애인의 두 축은 애주로부터 시작된다. 하늘과 우리의 관계를 아는 것이 치유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치유는 무엇이 실재인가를 우리 자신이 알게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자기자신의 중심으로 들어가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영혼의 움직임에 집중할 수 있을 때, 산다는 것이 사랑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는 사랑에서 태어났기에 사랑할 수 있고, 우리의 생명이 거저 주어진 것이기에 타인에게 줄 수 있으며, 우리의 마음보다 훨씬 더 큰 마음을 가지신 분에 의해서 자유롭기 때문에 타인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 (헨리 나우웬, 『상체 입은 치유자』)
요한복음사가는 상처라는 키워드를 통해 파견에 앞서 우리가 받은 것만을 우리는 줄 수 있다는 것을 아주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다. 그분께 치유받은 사람만이 치유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세상에 파견되었다는 것은 상처받은 세상의 치유자가 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치유는 받음과 줌의 법칙을 우리에게 제시한 셈이다. 달리 말해 우리가 세상에 파견되었다는 사실을 인식하기 어렵다는 것은 우리가 무엇을 치유 받았는지를 모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직 치유받을 것이 남아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마리아막달레나의 부활체험이 이른 새벽 빈무덤체험이듯, 사도들의 부활체험은 주간 첫날 저녁의 체험으로 서술된다. 이른새벽에서 저녁까지의 시간은 두려움의 시간이고 그 두려움은 다른 말로 상처의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상처는 어둠을 절대화하는 시간이다. 복음사가는 새벽과 저녁이라는 시간차를 통해 두려움과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제시한 셈이다. 마리아막달레나는 사랑의 상처를 받았을지언정 그 상처를 두려워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상처를 받는 것과 상처를 두려워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다른 의미이다. 예수님은 상처를 받았을 지언정 상처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상처를 두려워한다는 것은 1의 상처를 1000개의 상처로 만들어 상처를 확대대생산하는 것이다. 받은 상처에 감정이라는 밥을 주지 말라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자기 스스로는 결코 자신의 상처를 치유할 수 없다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생존의 상황에서 받은 상처는 우리 스스로 이길 수 없다. 두려움은 오직 어둠만을 보게 만들기 때문이다. 상처를 준 너는 악이고 상처를 받은 나는 선이라는 이분법은 누구의 목소리인가? 부활하신 예수님의 현존체험은 상처의 두려움을 극복한 상태를 의미한다. 따라서 두려움을 치유받은 사람이 바로 파견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21절에서 두번째 평화의 인사에서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라는 이 파견의 소임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아들과 제자들의 관계와 같은 것임을 강조함으로써 두려움을 극복한다는 의미가 무엇인가를 더 구체화한다.
상처받은 치유자만이 이 파견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은 실재와 비실재를 보다 분명히 알게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어둠은 비실재다. 빛은 실재다. 여기서 자기 자신조차 추스르지 못한 제자들에게 성령이 너희들에게 임하면 너희는 나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다고 전하는 의미를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요한14, 12에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
요한 복음 16,7에는 “너희에게 진신을 말하니,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가 너희에게 오시지 않으리라”
아버지의 구원계획은 제자들에게 성령을 파견하는 것이고, 사람의 아들의 영광에 종속시켰기에(요한7, 39) 더 큰 일들은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이루는 일들로써 (15, 5) 예수가 아버지께로 가기 때문에 제자들을 통해서 예수의 일들은 계속 지속된다는 의미라고 할 수다. 그 제자들을 통해 또 오늘 우리를 통해서 세세대대 하느님의 일은 끝이 없다는 뜻에서 더 큰 일로 언급되었다고 할 수 있다.
예수의 이름으로 행하는 모든 일들이 얼마나 큰 일인가는 그 영속성으로 인해 확증된다고 할 수 있다. 더 크다 혹은 더 작다라는 사랑의 크기는 연속성으로 알 수 있다. 그 일은 하기 위해선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시겠다는 그분의 현존체험에서만 가능하다는 전제가 내포되어 있다. 나보다 더 큰 일은 <그리스도로 통해서,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가능하기 때문이다.
Ⓒ에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성령을 받아라.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복음사가는 20장과 21장에 거쳐 용서의 의미를 파견의 사명으로 구체화하신다. 우리는 성령하면 성령의 은사(1코린토12, 1-11)와 성령의 열매(갈라디아서5, 13-26)를 떠올리고 복음전파하면 바오로사도를 떠올리고 진리를 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구체적으로 그것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
그런데 요한복음사가는 예외적으로 <용서>에 초점을 맞췄다는 것이다. 여기서 <용서>는 주님의 평화를 받기위한 마지막 관문이라는 사실을 성찰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한다. 복음사가는 파견의 소명을 <용서>로 조명함으로써 실존의 치유 뿐 아니라 영적 치유까지도 성령의 은사로 주신다.
복음사가는 <용서>를 통해 창조의 사랑이 무엇인가를 깨우치게 한다. 창조신앙과 구원신앙이 하나임을 숨을 불어넣으시어, 사람을 살게 하시는 창조주 하느님처럼(창세기2, 7) 부활하신 주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며 성령으로 재창조 하신다.
파견의 임무는 예수를 닮는 사람이 되는 것, 곧 하느님을 닮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창세기1,26-27, 5,1) 여기서 사람을 살리는 일과 죄를 용서하는 권한은 동일한 사랑이 된다. 용서는 사람을 살리는 일의 전형이라는 것을, 베짜타 못가의 병자를 고치셨을 때도, 그의 몸뿐 아니라 그의 죄도 용서하셨음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의 죄를 용서하면서 새 삶의 길을 열어주셨던 것에서. 무엇보다 십자가상에서 당신을 못박는 사람들을 용서해 달라는 용서의 기도에서 용서가 영원한 생명을 여는 열쇠임을 알 수 있다. 생물학적인 생명보다 더 영원한 생명으로의 초대가 용서라는 점에서 용서는 관계의 정점임을 알 수 있다. 숨을 불어넣으시며 성령을 주셨다는 것과 용서의 권한을 동시에 연결하신 것은 사람을 살리는 일이 무엇인가를 성찰하게 이끈다.
성령의 은사와 성령의 열매는 공동선이라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그것이 공동선이라는 것은 <숨을 불어넣으며>에서 공동선의 궁극적인 목적이 창조된 모든 것을 살게 만드는 것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복음사가는 그 살게 만드는 것이 생물학적인 삶이 아니라 영원한 삶이라는 것을 용서를 통해 강조한 것이다.
요한복음 16, 8에는 용서의 구체적인 항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한다.
보호자께서 오시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히실 것이다. 그들이 죄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나를 믿지 않기 때문이고, 그들이 의로움에 관하여 잘 못 생각하는 것은 내가 아버지께 가고 너희가 더 이상 나를 보지 못할 것이며, 그들이 심판에 관하여 잘 못 생각하는 것은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이미 심판을 받았기 때문이다
협조자 성령의 특수한 소임은 예수가 누구인가를 우리에게 밝히 알려주는 것이다. 즉 예수의 신적 존재를 우리로 하여금 알게 하는 것이다. 우리가 성령을 변호자이신 성령이라고 부르는 이유라고 할 수 있다. 9절에서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이 죄이며, 그리고 예수님이 아버지께 간다는 것이 의로움이라고 말한다. 아버지와 같은 의미로 예수는 의로우신 하느님이시며, 그 의로움은 역사 속에서 당신을 계시하시는 아버지의 초월성을 가리키는 의로움이라고 할 수 있다. 진리의 영은 예수의 의로움을 우리로 하여금 알게 함으로써. 내가 세상을 이겼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세상이 심판을 받았다는 것은 사람의 아들이 십자가에 높이 달림으로써 예수는 세상을 이겼다는 의미를 구체화한다. 여기서 용서는 단지 윤리적인 측면이 아니라 영적인 측면에서의 재창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죄와 의로움과 심판은 용서가 왜 평화를 바라는 인간이 할 수 있는 마지막 관문인가를 우리에게 강조한다. 예수가 누구인가를 안다는 것은 내가 누구인가를 안다는 것이며, 결국 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창조물들의 이름을 밝히 아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창조된 모든 것의 이름을 안다는 것은 호칭이나 명칭의 분류가 아니라 그 존재 이유를 밝히 아는 것이다.
우주에 존재하는 것들의 존재이유를 안다는 것은 하느님 창조의 사랑을 안다는 것이다. 여기서, 성령은 성부성자성령의 관계론으로(다음주 묵상주제) 하느님의 존재양식인 삼위일체 하느님의 존재이유를 우리에게 알려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의 존재이유도 삼위일체의 연장선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존재 이유를 모르는 것이 우리의 불행이며, 고통의 근원이기에, 복음사가는 <평화-성령- 용서>의 트라이앵글을 통해 성령이 누구이며, 평화가 무엇인가를 알게하고, 살게 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용서의 완성은 선택상황이 아니라 평화의 문을 여는 열쇠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용서의 완성? 용서는 아우구스띠노 성인의 통찰처럼 <신적인 행위>이다. 용서는 우리가 하느님을 닮은 존재라는 것을 우리 자신에게 각인시키는 것으로 우리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용서는 정서의 측면이 아니다. 용서는 이성의 측면이 더 강하다고 할 수 있다. 용서, 하면 우리는 타자를 용서하는 것으로 국한시키고 정서적으로 수납하지 못하는 대상은 용서의 대상에서 제외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용서의 완성은 결국 타자가 아니라 <나-자기용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용서하면, 타자의 행위를 문제삼지만 실은 나의 행위하지 않음을 문제삼지는 않는다. 성령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죄와 의로움과 심판이 무엇인지 알았다면 우리는 모르고 저지른 어떤 사람의 행위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행위하지 않음-칠죄증의 경향에서 해태, 게으름, 혹은 착한마마리아인법에 초점을 놓게 된다.
우리에게 성령의 역사로 예수가 누구인가를 진실로 알았다면 우리는 더 많은 공동선에 이바지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았드라면 하는 회한의 서사를 지우고 싶어하지 않았을 것이다.
셩령이, 혹은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현존한다는 것은 우리의 약함이나 타인의 약함에 방점을 찍어서는 결코 알 수 없다. 그리스도의 강함, 성령의 공동선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용서의 길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모두 어둠의 자식이 아니라 빛의 자녀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용서하기 어려운 타자가 있다고 가정해 보자! 우리가 어떤 타자에게서 그의 행위에 방점을 찍어 그를 어둠의 자식으로 규정하는 한 그는 정서적으로 우리의 세계에서 배제된다. 창조의 한 귀퉁이가 무너지는 것이다. 우리가 누군가를 나의 세계에서 배제하는 한 창조의 사랑은 결코 알 수 없다. 창조의 사랑은 취향의 저격이 아니다. 더구나 십자가의 사랑은 알 수 없다. 그의 행위 너머에 그가 지닌 존재의 빛을 볼 수 있다면, 일만데니리온을 빚진 사람이 백 달란트를 빚진 사람을 문제삼고 있다는 것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마르코복음 18,21-22에는 베드로가 형제가 죄를 지으면 몇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하느냐고 물었을 때, 일곱 번이 아나라 일흔일곱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신 용서의 무한이 나온다. 용서의 한계를 두지 말라는 것! 이어지는 23-35절에는 1만탈렌트를 빚진 사람이 백 데나리온을 빚진 사람과의 관계를 비유로 들어 무한한 용서, 용서의 한계를 정하지 말라고 거듭 전한다. 우리가 생명의 주인으로부터 용서받은 것이 1만달렌트에 해당한다면, 우리가 살면서 어떤 관계로 인해 받은 고통이나 상처는 백데나리온에 불과하다.(1탈렌트는 6천데나리온이다. 이를 환산하면 1만틸렌트는 오늘 우리 돈으로 3조원에 해당한다. 백 데나리온을 빚진 사람이 500만원을 빚진 사람이라고 한다면, 하느님께 받은 생명과 자비 3조원은 갚을 길 없는 빚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성령강림대축일 복음으로 요한 복음 20장과 21장에서 <용서>를 성령의 선물로 전한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용서라는 관문을 통하지 않고는 우리는 결코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을 알 수 없다. 부활의 선물인 평화를 알 수 없다. 창조의 사랑을 알 수 없다. 십자가의 사랑, 부활의 사랑을 알 수 없다는 것은 반복해서, 그것은 그분이 주는 평화를 알 수 없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현실을 통제하는 데서 오는 평정심과 부활의 선물로 주어지는 평화는 다르다. 타자를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실재하지 않는 것을 실재화 하는 것이다. 즉 오욕칠정을 절대화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용서는 사랑을 실재화하는 것이고 창조를 실재화하는 것이며 사랑을 실재화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용서는 감성의 측면이 아니라 이성의 측면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용서는 간과, 혹은 오버룩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용서가 신적인 이유다.
성령강림 대축일! 우리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으로 다시 태어난 생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로인해 숨, 숨결 그리고 숨을 쉬는 한 희망하라!(Dum Spiro Spero)고,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의 존재이유를 우리 자신의 행복과 연결시킬 수 있다.
오소서! 성령이여! 믿는 이들 마음을 충만케 하시고 그들 안에 사랑의 불을 놓으소서! 아멘!
글을 마치며,
Ⓐ19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20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 Ⓑ21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22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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