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피캇(Magnificat)

네 겹의 충족이유율을 넘어, 존재의 충만(מָלֵא/fill)으로(2)

나뭇잎숨결 2024. 5. 3. 06:07

 

사진작가 분이가 탱큐!

 

 

 

 

네 겹의 충족이유율을 넘어, 존재의 충만(מָלֵא/fill)으로(2)

-부활6주,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를 중심으로

 

 

 

 

1. 나태주, 「오월」

 

 

 

 

아름다운 너/ 네가 살고 있어 / 그곳이 아름답다 //아름다운 너/ 네가 웃고 있어/ 그곳이 웃고 있다/ 아름다운 너/ 네가 지구에 살아 /지구가 푸르다

 

나태주 시인의 「오월」은 지구가 푸른 이유를 아름다운 너의 존재 때문이라고 말한다. 오월이 오월일 수 있는 이유를 사람에게 찾는 나태주 시인의 이 서정이야말로 나태주현상을 낳은 원천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밖에서 찾은 것은 결국 자기 안에 있는 것이 표출된 것이라는 점에서 네가 있기에 지구가 푸르다고 할 수 있는 것은 나는 푸르다는 고백이기도 하다. 이를  자기충족이유율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나고야역 TSUTAY 서점의 Mr./Ms

 

 

 

 

 

2. 생성, 인식, 존재, 행위라는 충족이유율의 네 겹의 뿌리에 대하여

 

 

 

자신의 존재가 아름답지 못하다면 결코 타인의 아름다움을 볼 수 없다는 점에서 나 자신이야말로 나를 충족시키는 충족이유율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다.

 

"세계는 나의 표상이다. Die Welt ist meine Vorstellung"라는 명제를 통해 인간의 자기총족이유율을 해명하려 했던 쇼펜하우어는, 모든 인간은 생성, 인식, 존재, 행위라는 네 겹의 충족이유율을 지니고 있음에 주목한다.

 

그런데 인간이 완전한 충만, 형이상학으로 넘어 가지 못하는 이유는 ‘충족이유율’을 지닌 인간이 자기 인식에 갇히기 때문이라고 바라본다. 충족이유율은 인식이나 사고, 사물 등에는 언제나 충분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는 법칙을 뜻하는 것으로, 모든 판단이나 현상에 대해 “왜”라고 물을 권리를 우리에게 부여한다는 점에서 모든 학문의 기초가 된다. 그런데 쇼펜하우어는 ‘인식이유’와 ‘원인’이 혼동되어 왔으며, 데카르트는 ‘원인’을 제시해야 할 곳에 ‘인식이유’를 밀어 넣음으로써 신의 현존에 대한 존재론적 증명의 길을 닦았고, 스피노자는 이 혼동을 범신론의 기초로 삼았다는 것이다. 이 둘의 명확한 구분이 이루어진 것은 칸트가 “모든 명제는 그것의 이유를 가져야 한다”는 인식의 논리적 원칙과 “모든 사물은 그것의 이유를 가져야 한다”는 선험적 원칙을 구별하면서 쇼펜하우어는 충족이유율을 생성, 인식, 존재, 행위 네 가지 형태로 구분한다. 생성의 이유율은 표상들을 인과적 방식으로 필연적으로 결합시키는 원리이고, 인식의 이유율은 표상들을 개념적으로, 존재의 이유율은 표상들을 공간적이며 시간적으로, 행위의 이유율은 표상들을 동기에 의해 필연적으로 결합시키는 원리이다. 충족이유율은 이처럼 전혀 다른 네 가지 관계들에 대한 공통의 표현인데, 전혀 다른 관계의 이 법칙들은 그것들이 충족이유율이라는 하나의 단어로 표현되는 것처럼, 동일한 뿌리, 즉 우리의 인식능력 전체가 갖는 어떤 동일한 근원적 성질로부터 유래한다. 다시 말해 충족이유율은 우리의 지성에 뿌리를 둔다. 이런 관점에서 쇼펜하우어는 충족이유율이 적용될 수 없는 물자체의 세계에까지 사유의 영역을 확장하려는 강단철학의 월권행위를 비판하며, 그것은 곧 칸트철학의 성취를 왜곡하고 무효화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소멸과 생성이라는 생의 주기를 <의지와 표상>으로 바라보고 이를 <생성, 인식, 존재, 행위>라는 네 겹의 충족이유율로 바라본 쇼펜하우어는 인간은 결국 충족이유율 뛰어넘지(통합하지)못하기에 고통 혹은 무(없음) 앞에 설 수 밖에 없는 존재라고 바라보았다. 쇼펜하우어 철학의 출발점이자 그의 철학 전체에서 가장 핵심적인 내용이 담긴 『충족이유율의 네 겹의 뿌리에 관하여』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왜 인간은 생의 조건인 충족이유율을 뛰어넘지 못하고, 즉 형이상학에서 말하는 <충만>에 이를 수 없는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①​‘세계는 나의 표상이다.’ 이 말은 삶을 살면서 인식하는 모든 존재자에게 적용되는 진리다.

 

 

 

하지만 인간만이 이 진리를 반성적, 추상적으로 의식할 수 있고, 인간이 실제로 이것을 의식할 때 철학적인 사려 깊음이 생긴다. 이 경우 인간은 태양과 대지를 아는 것이 아니라 태양을 보는 눈과 대지를 느끼는 손을 지니고 있음에 불과하다는 것, 인간을 에워싸고 있는 세계는 표상으로서만 존재한다는 것, 즉 세계는 다른 존재인 인간이라는 표상하는 자와 관계함으로써 존재한다는 것이 그에게 분명하고 확실해진다.

 

 

 

②현상은 표상을 의미할 뿐 그 이상의 무엇도 아니다. 어떤 종류든 모든 표상, 즉 모든 객관은 현상이다. 하지만 의지만이 사물 자체다.

 

 

 

의지 그 자체는 결코 표상이 아니고 표상과 전적으로 다르다. 모든 표상, 모든 객관은 의지가 현상으로 나타나 가시화된 것, 즉 의지의 객관성이다. 의지는 모든 개체 및 전체의 가장 심오한 부분이자 핵심이다. 의지는 맹목적으로 작용하는 모든 자연력 속에 현상하고 숙고를 거친 인간의 행동 속에서도 현상한다.

 

 

 

③모든 의욕은 욕구에서, 즉 결핍이나 고뇌에서 생긴다. 이 욕구는 충족되면 끝난다.

 

 

 

하지만 하나의 소망이 성취되더라도 적어도 열 개의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고 남는다. 더구나 욕망은 오래 지속되고, 요구는 끝없이 계속된다. 즉, 충족은 짧은 시간 동안 불충분하게 이루어진다. 그런데 심지어 최종적인 충족 자체도 겉보기에만 그럴 뿐, 소망이 하나 성취되면 즉시 새로운 소망이 생긴다. 의욕한 대상을 얻지 못하면 확고하고 지속적인 충족을 얻을 수 없다.

 

 

 

④모든 충족, 또는 흔히 행복이라 부르는 것은 원래 본질적으로 언제나 소극적인 것에 불과하며 결코 적극적인 것이라고 할 수 없다.

 

 

 

그것은 근원적으로 저절로 우리에게 와서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어떤 소망이 충족되는 것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소망, 즉 부족이란 모든 향유의 선행 조건이기 때문이다.

 

 

 

⑤의지의 자유로운 부정이나 포기와 함께 이 모든 현상도 이제 없어진다.

 

 

 

목표도 휴식도 없는 계속된 소동과 혼잡이 없어지고, 단계적으로 이어지는 여러 형식의 다양성이 없어지며, 의지와 더불어 그 전체 현상이 없어지고, 최종적으로 이 현상의 일반적 형식인 시간과 공간도, 그 현상의 궁극적인 기본 형식인 주관과 객관도 없어진다. 의지가 없으면 표상도 세계도 없다.

 

그런데, 표상된 세계로서만 알 뿐, 세계의 본질을 모르기 때문에 인간은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다. 개별화의 원리다. 인간은 무지로부터 고통 받는다. 특히 생성과 존재율이 개별화의 원리가 되어, 인간의 삶에 고통으로 작용한다. 세계(의지의 세계)는 맹목적으로 움직인다. 즉, 이유나 원인 같은 게 없다. 인간은 살아서 고통을 받으면서도 계속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데, 이러한 삶에의 맹목적 애착은, 의지의 맹목성에 지배를 받기 때문에 나타난다. 본래 세계는 하나지만, 너와 나의 세계는 서로 다른 공간과 시간으로 파악하게 되는 서로 다른 세계라는 것. 이것이 바로 개별화의 원리다. 각자는 고립되고 외로운 낯선 존재가 되어, 본질적으로 하나인 의지의 세계를 모르는 채, 개체적 존재로서의 자기 입장과 자기 욕심을 관철시키려는 개별화의 원리가 결핍의 원리라고 보았다. 이렇게 '무지'로부터 인간의 모든 고통이 시작된다. 이것이 쇼펜하우어가 인간의 생이 주기를 고통으로 본 이유일 것이다. 의지가 없으면 표상도 세계도 없는데 인간의 의지는 신이 제시한 그런 충만의 영원으로는 넘어가지 못한다고 본 것이다. 그는 영원 자체를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3.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9-17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10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11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12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13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14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15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16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을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시게 하려는 것이다. 17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서로 사랑하여라.”

 

 

 

개인적인 이야기로 글을 시작해 본다. 삼위일체 하느님이 언제 존재한다고 생각하느냐? 누가 묻는다면 내 친구를 보면 알 수 있다고 대답하겠다. 나는 무한이라는 어휘를 친구를 통해 알았다. 관포지교의 우정을 내 친구를 통해 배웠다. 내 친구는 한번도 내가 청하는 것을 거절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친구를 시험하기 위해 청하지 않는다. 친구가 들어줄 것을 알기에 청한다. 친구의 사랑의 능력을 알기에 청한다. 

 

부활6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라고 전하는 요한 15,9-17은 <하느님과 예수님의 관계-예수님과 너희와의 관계-너희와 너희의 관계>라는 사랑의 세 고리를 통해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를 <친구>라고 규정하기에 이른다. 지금까지 그 어떤 공관복음이나 서간문에서도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를 <친구>로 규정한 적은 없었다.

 

그렇다면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를 <친구>라고 규정한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의미의 친구인가? 그분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그 사랑이 우정의 차원인가 하는 것이 부활6주 성찰의 방향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분이 우리를 친구라고 부른 이유를 알 때 기쁨의 충만이 무엇인지도 알 수 있을 듯하다.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10)

 

여기서 제자들이 스스로에게 갖고 있는 사랑의 크기보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사랑의 크기를 먼저 알고 계시다는 것에서 친구라고 부른 이유는 우정을 교환하는 일반적인 의미를 뛰어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질문한 것(요한21,15-18)-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는 세 번의 질문과 내 양들을 잘 돌보라는 세 번의 명령에서 친구의 정의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예수님이 우리를 친구라고 부를때,  그 사랑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다. 그것이 제자들을 종이 아니라 벗이라 부른 이유라고 할 수 있다.

 

복음사가는 예수님과 제자들과의 관계가 친구가 될 수 있는 이유에 대해 사랑의 내용을 두 가지 방향에서 크로스시킨다. 하나는 외부의 방향으로 친구들을 향한 것이고 하나는 아버지와 맺는 내밀한 관계이다. 이 관계는 제자들의 선택이나 그들이 다른 사람보다 더 탁월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선택으로 그렇게 된 것이다. 여기서 제자들과 예수님의 관계가 친구가 될 수 있는 필연성은 아버지를 통해 알게된 사랑을 그들에게 모두 알려주었기 때문으로 모아지면서 하느님 사랑에 대한 앎을 공유하기에 친구가 될 수 있는 것으로 모아진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15)

 

복음사가는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요한 1서 4,7-16)라고 그 앎이 무엇인가를 하느님 사랑에서 찾는다. 필리아와 아가페의 경계가 사라진 그런 사랑이 앎이라는 것이다. 그분안에서 안다는 것은 다른 그 무엇도 아니고 하느님의 사랑을 안다는 것으로 그 사랑을 안다는 것은 예수님처럼 친구를 위해 목숨을 바친 그 사랑을 한다는 의미에 가깝다. 여기서 사랑을 안다와 사랑을 한다는 같은 의미임을 알 수 있다. 사랑을 안다는 것은 그분과 같은 사랑을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사랑의 출처를 안다는 것이야말로 사랑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필리아가 아가페로 하나가 되는 이 과정이 복음사가가 전하는 친구와의 사랑이 곧 하느님의 사랑으로 수렴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외적인 사랑이 내적으로, 내적인 사랑이 외적으로 내외의 경계가 사라진다. 읽는 것 만으로도 치유가 이루어지는 요한1서 4장에서 사랑을 안다는 것이 곧 우리의 출생근원임을 전한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복음사가가 서로 사랑하라는 명제를 계명이고 명령이라고 한 이유가 보다 분명해진다. 아버지께 받은 사랑은 예수께서 제자들은 위한 사랑의 기초가 된다. 사랑의 움직임과 그 방향과 방법은 공관복음에서 사랑의 황금률-애주애인의 원형(마태오22,34-40/마르코12,28-34/루카10,25-28)이 된다.

 

“네 마음을 다하고 내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여기서 친구를 위해 목숨을 내 놓는 사랑은 공관복음에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한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같음을 알 수 있다. 공관복음에서 하느님을 향한 그 사랑이 요한복음에서는 친구를 향한 사랑과 같은 것이 된다. 여기서 필리아와 아가페의 경계가 완전히 사라진다. 애주애인의 경계도 사라진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13)

 

필리아가 아가페와 하나가 되는 이 상태, 하느님께 바친 사랑과 제자들을 위해 바친 사랑이 같음에서 사랑의 충족이유율은 오직 하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내용상 애주애인을 분리하는 것이지 본질상 같은 사랑이라는 점이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인간에 대한 사랑이 다르지 않다는 것, 부활6주 묵상의 방향이라고 할 수 있겠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 사랑이 지닌 그 무한을 알 수 있다. 영원 혹은 무한이라는 것은 사실, 인간의 인지능력을 넘는 범위다. 그 영원, 불멸, 무한을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하신 그 사랑으로 알 수 있다. 그 무한의 원천은 아버지에 사랑의 크기와 넓이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아무리 큰 사랑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 사랑은 친구 사이에서 주고받은 사랑인데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아들과 제자들의 관계를 규정하는 원천이 되기에 우리가 한 사랑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리스도가 한 사랑으로 수렴된다. 보리빵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오천명을 먹이는 기적을 낳는 것과 같은 맥락이 된다.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10)

 

앞에서 언급한 대로, 10절을 보면, 머무름을 통해, 제자들이 스스로에게 갖고 있는 사랑의 크기보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사랑의 크기를 먼저 알고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요한21,15-18)한 질문의 방향-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는 질문과 내 양들을 잘 돌보라는 세 번의 명령에서 우리가 해야하는 사랑의 방향이 도출된다. 사랑은 안다오아 사랑을 한다는 것은 같은 것이라는 것,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친구에 대한 사랑이 다르지 않다는 것,ㅡ 그것이 제자들을 종이 아니하 친구라 부른 1차적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제자들을 종이 아니라 친구라 부른 더 본질적인 이유는 행위의 측면과  존재의 측면이  하나가 된다는 데서 찾아진다. 사랑은 안다는 곧 사랑을 한다는 의미와 하나가 된다. 사랑은 안다는 사랑을 한다와 이것은 기쁨의 충만으로 수렴된다. 존재-행위-소유가 나눠지는 것이 아니라 존재-행위-소유가 하나가 된다. 존재, 행위, 소유가 하나가 된 상태를 기쁨의 충만이라고 요한 복음사가는 전한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라고 전하는 요한 15,9-17이 두 번째 성찰의 주제는 목숨을 바친 사랑이 어떻게 기쁨이고, 기쁨이 어떻게 충만일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어떻게 존재-행위-소유가 하나가 되는가 하는 것이다. 

 

 

성서에서 ‘충만’은 존재의 충만(מָלֵא/fill)이다. 충만은 성서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축복의 언어에 해당한다. 그 뜻은 대략 다음과 같이 <차고 넘침>을 의미한다. "충분하다", "충족하다", "충실하다"(루카 2:40) "만족하다‘ (시편 90:14) "가득하다" (마테오 23:25~27), "넘치다"(잠언 3:10, 시편 23:5)."풍부하다" (창세기 13:2) "전부", "전체"(루카 13:21, 21:4). "성취하다", "완성하다"( 2코린토 8:6~8, 갈라디아 6:2). "큰 무리"(로마11:25) "채우다"(루카 5:7, 요한 2:7)."목표에 도달하다", "경지에 이르다", "극점에 달하다"(갈라디아 4:4~5, 사도행전 40:1~2)."왕성한"(시편 72:16/창26:12) "흥하고 왕성하다"(시 72:7). "풍성한"(에페소1.7)

 

 

복음사가가 전하는 그리스도인이 경험하는 충만이란, 강생의 신학, 십자가신학이 창조신학으로 수렴된다는 것을 체험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요한네쓰 로쯔는 『사랑의 세 단계』에서 인간의 원초인 갈망은 사랑받기를 원하는 것이고, 인간의 원초적인 공포는 사랑을 잃지 않을까 하는 것이라고 규정한다. 친구와의 사랑은 아가페로 인해 구원받는 사랑이 될 때 그것은 잃을 수 없는 충만한 사랑이 된다. 그렇다면 충만한 사랑이란 생물학적인 생명을 뛰어넘는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인간은 그의 생애에 사랑의 세 단계를 살게 된다. 감각본능적인 사랑으로서의 에로스와 정신 인격적인 사랑으로서의 필리아와 신적 은총적 사랑으로서의 아가페는 인간 사랑의 기본 능력이다.”

 

이 세상은 한 사람이 충만한 사람을 살면 살수록 그는 사랑이 절대적 줌이면서 동시에 절대적 받음이며, 절대적 제어이자 동시에 절대적 자유이며 그리스도로부터 십자가형에 처해지는 절대적 곤궁이자 동시에 부활의 절대적 기쁨이 된다는 것에서, 이 절대적인 사랑이 수렴되는 곳은 결국 우리가 지닌 근원적인 본성이라는 것에서 강생의 신학과 십자가 신학은 창조신앙으로 수렴된다고 할 수 있다.

 

W. 바이너르트는 『창조신앙』에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머무름, 즉 예수님과의 위격적 일치가 존재의 충만이라고 전한다.

 

"유한한 것이 무한을 받아들이는 이 능력이야말로 피조물이 무한을 향해 개방되어 있는 단순한 가능성으로부터 창조주와 사실적으로 일치를 이룩하는 상태로 이전할 때, 이 피조물은 지고의 완성에 이르게 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된 세계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는 인간에게서, 더 정확히 말해 인간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제시된다. 그는 완성된 인간이기 때문에 모든 피조물의 정점이다. 그리스도와 인간의 위격적 일치란 결코 인건적인 것의 감소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인간적 존재의 충만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실존은 궁극적으로 창조의 지속적인 의미를 보장해주고 있다. 하느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하시듯 그리스도는 창조된 것의 목표이기 때문에 창조된 모든 피조물은 그리스도 안에서 실제로 하느님께 이르게 된다. 창조의 내적구조로 말미암아 죄의 사실성이 있는 곳에서도 구원의 사실성이 소여되어 있는 것이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선택으로 주어진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의 구원이기에 인간 역사의 전체과정은 본질상 구원의 역사가 된다. 이것이 부활6부의 <친구-충만>이라는  은총이 함께 주어지는 이유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고통과 죽음은 하나의 역설적인 능력이 된다.(다음주 주님 승천 축일 묵상에서)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11)

 

자신이 사라지는 몰아의 사랑만이 기쁨의 원천이 된다는 것에서 성서에서 말하는 기쁨은 상황의 논리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성서에서 말하는 기쁨은 믿음과 희망에 기반한 감사라고 할 수 있다. 바오로 사도는 늘 기뻐하고 감사하라고 우리에게 권한다.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거듭 말합니다기뻐하십시오여러분의 너그러운 마음을 모든 사람이 알 수 있게 하십시오주님께서 가까이 오셨습니다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그러면 사람의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안에서 지켜주실 것입니다." (필립비 4, 4,7)

 

사랑을 하면 엔돌핀이 나온다고 흔히들 이야기 한다. 엔돌핀보다 4000배나 큰 감동호르몬을 다이돌핀(Didorphine)이라고 부른다. 다이돌핀을 가장 많이 돌게하는 것은 감사라고 한다. 감사로 인한 기쁨이야말로 11절에서 말하는 믿는 이들의 기쁨의 실체, 충만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벗을 위해 목숨까지 내 놓은 사랑이야말로 예수님 기쁨의 원천이고, 그 기쁨은 제자들 기쁨의 원천이 된다. 그것이 기쁨이고 충만이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서로 사랑하여라.”(17)

 

17절에서 명령의 형식으로 반복해서 전하는 서로 사랑하여라, 라는 명제는 인간의 기쁨, 충만을 바라시는 아버지의 사랑의 간곡함을 알 수 있다. 그 간곡한 아버지의 사랑을 보여주신 분이 바로 우리를 친구라고 불러주신 그리스도다. 그런 맥락에서 내 친구의 집은 바로 내 아버지의 집이고 그 집을 찾는 로드맵은 서로 사랑하라는 정언명령으로 주어진 이유라고 할 수 있다. 같은 사랑을 하지 않고서는 같은 집에서 살 수 없기 때문이다. 

 

 

 

글을 마치며,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요한 1서4,7-16 7)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8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9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10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 11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12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 13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영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로 우리가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신다는 것을 압니다. 14 그리고 우리는 아버지께서 아드님을 세상의 구원자로 보내신 것을 보았고 또 증언합니다. 15 누구든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고백하면, 하느님께서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시고 그 사람도 하느님 안에 머무릅니다. 16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우리는 알게 되었고 또 믿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