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피캇(Magnificat)

부재의 현존이라는 메타포, 어디에도 없는 님, 어디에나 있는 님!

나뭇잎숨결 2024. 5. 10. 19:43

 

남마리안나 수녀님께서! 감사합니다!

부재의 현존이라는 메타포, 어디에도 없는 님, 어디에나 있는 님!

-주님승천대축일,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를 중심으로

 

 

 

1. 한용운, 「알 수 없어요」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의 파문을 내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탑위의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근원을 알지도 못할 곳에서 나서 돌부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작은 시내는 굽이굽이 누구의 노래입니까.연꽃 같은 발꿈치로 가이없는 바다를 밟고 옥 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날을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입니까.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모든 시는 ‘상처에 대한 보고서’ 라고 할 수 있다. 그 상처의 원인은 ‘님이 부재’한다는 데서 기인한다. 한용운 시 전편에도 ‘님은 부재’한다. 그런데 한용운 시인은 어디에도 없는 님을 천지에 가득한 님으로 만든다. 그래서 한용운의 시에는 ‘눈물’이 없다. ‘님만 부재하는 것이 아니고, 눈물도 부재한다.’

 

「알 수 없어요」의 시는 내용상 ①~⑤----->⑥의 두 부분으로 나눠지는 비연시다.

 

오동잎=발자취, 푸른하늘=얼굴, 향기=입김, 작은 시내=노래, 저녁놀=시를 연결하는 5행은, 자연현상에서 부재하는 ‘님’의 모습을 발견하는 화자가 숨어 있다. 6행에 이르러 화자 '나'가 나타나며 '그칠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님이 부재하는 밤을 밝히는 등불'임이 도출된다. 어디에도 없는 님이, 천지에 가득하다는 깨달음에 이른 결과이다. 여기서 님이 부재하는데, 어찌하여 한용운 시에는 '눈물' 한방울 없는 초연한 자아, 유리알처럼 투명한 자아만 있는가를 해명하는 게 관건일 듯하다. 한용운 시의 자아는 애초에 초월적 자아인가? 라는 질문이다.

 

한용운 시의 자아는 범속한 현상적 자아인 '나'와 초월적 자아인 '님'이 어떻게 합일할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으로부터 출발한다. 부재하는 님, 오감각으로 체험할 수 없는 님의 부재에 대해, 결코 초연한 자아가 아니다. 시 속의 자아가 괴로워하는 것은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의 원천 때문에 정작 님의 '사랑'을 잃게 되는 것을 어쩔줄몰라 하는 자아다. 화자는 님의 부재앞에서 주체할 수 없는 슬픔에 압도당하는 자아다. 펑펑 울면서 님을 찾아 헤매는 자아다. 주저앉아 있는 자아가 아니라, 울면서라도 님이 가신 길을 따라 걸어가고자 하는 자아다. 그래서 온힘을 다하여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이부으려는' 자아다.

 

⑤연꽃 같은 발꿈치로 가이없는 바다를 밟고 옥 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날을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입니까.

 

부재를 현존으로 만드는 한용운 시의 역설의 미학은 ⑤행에서 그 정점에 달한다. ⑥행에서의 타고남은 '재'가 '기름'이 되는 '무용'에서 '유용'의 발견이란, ⑤행의 결과물이다. ①~④까지는 우리가 예민한 감각을 동원하면 공감할 수 있는 시적 세계다. ⑤행은 주관적 변용의 극대화로 '연꽃같은 발꿈치로 바다를 밟고, 옥같은 손으로 하늘을 만진다'는 표현이 나온다. 온 몸으로 지상과 하늘을 연결시키는 '저녁놀'의 '육체화'를 통해, 인간이라는 가난한 존재가 어디까지 다달을 수 있는지 아름다움의 최고치를 보여준 것이다. 숭고미의 절정이다. 지상과 천상을 합일시키는 초월의지란 인간 자신안에 이미 내재한 절대자의 경지를 이끌어내는 힘이라고 할 수 있다. ⑥에서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에서 '나'라는 작디작은 그러나 그칠 줄 모르는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사진작가 분이가 탱큐!

 

 

 

 

2. 시간이란 무엇인가?

 

 

부재의 현존을 이해하는 키워드는 시간과 영원에 대한 인식에서 그 정점에 이른다고 할 수 있다.

 

①시간의식의 분석은 기술적 심리학과 인식론의 매우 오래된 교차점이다. 여기에 놓여 있는 극히 곤란한 점들을 깊이 깨닫고 이러한 문제에 필사적으로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던 최초의 사람은 아우구스티누스였다. 『고백록』 11권 14장에서 28장까지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시간문제에 몰두하는 모든 사람들이 근본적으로 연구해야 하는 부분이다. 자연적 태도에서 주어지는 객관적 시간은 초월론적 주관의 의식에 의해 지향된 대상으로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에드문트 후설)

 

 

②마음은 기대. 지각. 기억이라는 기능을 통하여 기대한 것으로 지각하고 지각한 것을 기억해 두는 것이다. 사실 미래의 것이 존재하지 않음을 누가 부정하겠는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은 미래의 일에 대한 기대를 이미 하고 있다. 또한 과거의 것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을 누가 부정하겠는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은 과거의 일에 대한 기억을 아직도 하고 있다. 또한 현재의 시간은 순간적으로 존재하다가 지나가는 것인 까닭에 길이가 없다는 사실을 누가 부정하겠는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은 지각하는 기능을 계속 수행하는 까닭에 미래의 존재는 그것을 통과하여 과거의 존재로 변천해 가는 것이다.(아우구스티누스)

 

 

 

①에서 후설은 <시간 문제>를 성찰하려면 반드시 아우구스티누스를 우회할 수 없다고 술회한다. 에드문트 후설의 『내적 시간의식의 현상학』에서 전개된 후설의 현상학적 시간론은 객관적 시간(자연적이고 사회적인 시간)을 그것이 의식에 어떻게 주어지는지에 초점을 맞추어 해명하는 것이다. 자연적 태도에서 주어지는 객관적 시간은 초월론적 주관의 의식에 의해 지향된 대상으로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따라서 시간의식의 현상학은 초월론적 현상학적 환원의 방법을 사용하여 시간과 시간의식의 상관관계를 해명하고 여러 차원의 시간과 여러 차원의 시간의식을 체계적으로 해명함을 목표로 한다. 다차원적 시간의식과 그를 통해 경험되는 다차원적 시간을 해명하는 내적 시간의식의 현상학은 체계적이고 총체적인 현상학의 전개를 위해 꼭 필요한 분야이며, 현상학의 전체 체계에서 특수한 위치를 차지한다. 시간의식은 그것과 결부되지 않은 의식이 없다는 점에서 보편적인 의식이며, 의식의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작동하는 근원적인 의식이기 때문이다.

 

 

 

②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우리가 시간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주관적인 것이며 ‘기대-지각-기억’, 즉 마음이라는 체에 걸러진 것만을 시간으로 인식한다고 보았다. 과거는 현재의 과거이고, 현재는 현재의 현재이며, 미래는 현재의 미래라는 관점이다. 그는 “시간은 미래에서 현재로 오는 경우, 어느 그윽한 곳에서 오고, 현재에서 과거로 갈 경우 어느 그윽한 대로 흘러, 미래인 어디로부터 현재인 어디로 해서, 과거인 어디로 흐르며, 현재인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를 통하여 지나가는가”라고 묻고 있는 것이다.

 

 

 

③우리들을 현실 자체에 직면시켜야 한다. 내가 기다려야 하는 시간은 물질계의 모든 역사에 걸쳐 적용되는 수학적인 시간이 아니기 때문이다...그 시간은 나의 조바심, 다시 말하면 마음대로 더 늘일 수도 없고 더 줄일 수도 없는 나에게 속하는 지속의 어떤 부분과 합치하고 있다. 그것은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체험적인 것이다. 모든 행동은 미래를 조금씩 잠식하는 것이다. 이미 더 이상 없는 것을 붙잡는 것, 아직 오지 않은 것을 예상하는 것, 이것이 바로 의식의 첫 번째 기능이다. 의식에게 있어서 현재란 없다.(앙리 베르그손)

 

 

 

④어떤 방식으로도 나의 손아귀에 쥘 수 없는 것은 미래다. 미래의 외재성은 미래가 절대적으로 예기치 않게 닥쳐온다는 사실로 인해서 공간적 외재성과는 전혀 다른 성격을 띤다. 베르그손에서부터 사르트르에 이르기까지 모든 이론들이 마치 시간의 본질적 특성인 것처럼 일반적으로 인식해왔지만 사실 이것은 미래의 현재에 지나지 않을 뿐 진정한 미래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미래, 그것은 타자다.(레비나스)

 

 

 

⑤시간을 자각한다는 것은 본래적 자신을 되찾는 행위이다. 타인의 지배에 놓여 있는 일상세계로부터 떨어져 나와 유한하고 고독하고 불안으로 가득찬 세계, 그곳이야말로 우리의 본래적인 세계이며 그곳에서 비로소 사유하는 존재의 의미를 밝힐 수 있다. 존재는 시간 속에서 주어지므로 유일하고 변하지 않으며 모든 시대의 문화에 통용되는 존재란 없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의 시간 속에서 존재의 부름에 각자의 방법으로 응답하는 것이다. 그 응답이 감사이며 반향이다.(하이데거)

 

 

 

⑥현재는 과거로부터 파생한다. 그리고 현재는 미래를 조건 짓고 있으며 미래로 넘어가고 있다. 이것이 과정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주에 들어있는 냉혹한 하나의 사실이다. 미래는 현재가 그 자신의 본질 속에 그것이 미래에 대해서 가지게 될 관계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현재 속에 내재(內在)한다. 현재가 미래에 대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하나의 가능성으로서 현재 속으로 선취(先取) 되어 내재한다. 현재는 자신을 부단히 넘어섬으로써 과거를 만들고 그것을 자신 속에 지양, 보존하면서 세계 속으로 나아간다(화이트헤드)

 

 

 

③에서 ‘창조적 진화’를 주장했던 베르그손은 우리가 체험된 시간(질적)과 시계의 시간(양적)을 동시에 살지만 우리가 체험하는 시간인 질적인 시간만 ‘실재적인 지속’ 이므로, 그 시간만 미래적인 의미라고 보았다. 베르그손과 같은 맥락에서 사르트르 역시 인간의 미래란 인간의 자유, 즉 미래에 기투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 때문에 미래가 가능하다고 보았다.

 

 

 

④에서 레비나스는 베르그손과 사르트르의 시간의 주인으로서 주체적 시간관과는 달리 시간은 어떤 방식으로든 ‘타자’에 의해 좌우된다고 보았다. 홀로있는 주체라는 사르트르의 관점이나 베르그손이 바라본 ‘순수한 지속의 의미인 시간이 아닌, 나치의 수용소에서 『시간과 타자』를 쓴 레비나스에게 시간에 대한 기대나 예측의 주체는 내가 아니라 타자라고 보았던 것은 당연하다. 타자는 항상 나의 기대나 예측을 배반하고 예측불허의 시간 속에 출현하는 존재이므로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서만 시간을 바라볼 수 있다고 본 것이다.

 

 

 

⑤하이데거는 레비나스와 다른 시간관을 통해 시간을 자각한다는 것은 본래적 자신을 되찾는 행위로 보았다. 시간 앞에서의 ‘나’의 유아론적 주관주의를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 무차별적으로 ‘있음’ 속에 포섭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있음’에 주목하고 관여할 때만이 존재자에 속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가 그 자신의 존재에 속한다는 특권이 나오므로 비로소 존재자에 떠맡겨진 존재임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있음’을 자각하는 것이야말로 시간 속에서 이 세계의 모든 존재를 긍정하는 문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이들에게서 시간은 실존과 존재론은 확연히 구획되는 영역이 아닌 바, 과거-현재-미래 역시 분절적 시간으로만 바라보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그들은 물질의 우주와 영혼의 우주를 넘나들며, 시간 앞에 호명된 자로서 그들이 지닌 의식의 층위에서 어떤 시간과 영원의 내적 지평을 추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3.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마르코16,15-20

 

 

 

마르코16,15-20의 예수님의 승천사화는 제자들에게 준 복음선포의 사명(15-18)과 그 사명이 예수님 승천 후에 어떻게 결실을 맺는지(19절-20)를 통해 교회의 서막을 연다.

 

승천의 메시지인 복음선포의 사명, 혹은 교회의 시작이라는 보편적 축복을, 개별적인 우리 자신의 축복으로 어떻게 내재화할 수 있는지, 승천의 축복이 우리에게 어떤 은총의 초대인가를 생각해 보기로 한다.

 

승천복음 바로 앞부분 14절에는 부활하신 당신을 본 이들의 말을 믿지 않은 것에 대해 열한제자의 불신과 완고함을 꾸짖는 부분이 나온다. 그리고 믿음이 어떤 기적을 낳는지를 구체화하신다. 믿음이 낳은 이 땅의 표징은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를 바라보는 바탕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이후에도 복음선포의 대상과 주체가 모두 완벽한 믿음이 있는 이들이 아니었다. 예수님의 완성과 제자들의 미완성의 만남이 승천축복의 시작이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요구한 것은 오직 믿음이었다. 그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희망인가? 믿는 이들에게는 구원이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단죄를 받을 것이라는 16-18절은 믿음이 구원의 절대성이자 표징의 절대성을 낳는 보고가 된다는 점에서 우리는 승천의 축복을 개별적인 축복으로 바라볼 수 있는 어떤 문을 열 수 있다. 그리고 믿는 이들에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주어지는 구마와 새로운 언어의 은사, 뱀과 독으로부터 보호받는 치유이적사화의 표징들을 통해 그 믿음으로 인해 부재의 현존을 확증하신 그 사랑 역시 바라볼 수 있다.

 

마르코 복음서에는 표징에 관해 두 개의 상반된 시선이 나온다. 부활승천사화에서 예수님이 보여주신 그리고 제자들이 보여준 표징과 바리사이들이 요구한 표징이 그것이다. 표징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는 믿음의 정도를 측적하는 바로미터가 된다. 표징은 믿음의 선물이지 믿음을 요구하는 소여 원칙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당신이 하느님 아들이라는 표징을 요구하였을 때(마르코 8, 11-13/ 마태오16,1-4/ 루카11, 29-32), 표징을 요구하는 이들에게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 유일한 표징이라고 하셨던 것에서 종적인 믿음을 강조하셨다면, 승천하신 후의 표징은 오직 타자를 살리는 이타적인 사랑의 수단으로 사용하셨다고 할 수 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마르코8, 11-12)

 

악하고 절개없는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의 표징밖에는 아무런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요나가 사흘 밤낮을 큰 물고기 배속에 있었던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밤낮을 땅 속에 잇을 것이다. (마태오12,40)

 

요나가 니네베 사람들에게 표징이 된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이 세대 사람들에게 그러할 것이다(루카11, 29-32)

 

 

그런 맥락에서 표징은 복음의 진실을 증명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일 뿐 목적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예수님이 주신 유일한 표징은,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십자가의 사랑임을 거듭 확인 할 수 있다. 

 

“요나가 배에서 던져져 큰 물고기의 배속으로 들어간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십자가에서 내려져 무덤으로 죽음의 심연 속으로 들어가셨습니다”(성 아우구스띠노)

 

“모든 표징 중의 표징은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하늘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내려오심, 그리고 부활과 승천으로 올라가십입니다.”(테레사 알리시아 노블)

 

제자들의 불신과 완고함을 넘어 부활의 증인 된 복음선포의 사명은 19절과, 20절에서,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시면서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시어,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 주셨다“(20절)고 전한다. 주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다음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 쪽에 앉으셨다(19절)

 

여기서 이 모든 것을 주재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은 하느님의 오른 쪽에 앉아 계시기에 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른쪽에 앉아계신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셨다는 의미이기에, 그것은 하늘과 땅이 같아졌다는 의미와 연결된다. 그로인해 하늘과 땅이 같아졌다는 의미는 시간과 영원의 교호작용에 대해 깊은 성찰을 할 것을 요구한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우리도 우리의 원래 자리로 돌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복음선포의 사명은 네 복음이 공통적으로 전하는 것이지만 승천사화는 루카, 사도행전(루카24,50-53/사도1,9-11)에서만 전한다. 특히 마르코 복음사가의 복음의 서술은 예수님의 공생활에 초점을 맞춘 것이었다. 이 승천사화는 예수님이 하신 일과 제자들이 하는 일이 결코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교회의 연속성의 바탕이라는 것을 통해 이 지상의 순례는 예수님의 가신 길을 함께하는 축복의 순례가 된다. 

 

이제 주님! 저들의 위협을 보시고 주님의 종들이 주님의 말씀을 아주 담대히 전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저희가 그렇게 할 때, 주님께서는 손을 뻗으시어 병자들을 고치시고, 주님의 거룩한 종 예수님의 이름으로 표징과 이적들이 일어나게 해 주십시오, 이렇게 기도를 마치자 그들이 모여 있는 곳이 흔들리면서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 하느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했다(사도행전4, 29-31)

 

저 사람들의 일에 관여하지 말고 그냥 내버려 두십시오. 저들의 계획이나 활동이 사람에게서 나왔으면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나왔으면 여러분이 저들을 없애지 못할 것입니다. 자칫하면 여러분이 하느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 것입니다(사도행전5,38-39)

 

사도행전의 저자는 이를 성령의 시대임을 분명히 하며, 예수님의 공생활이 제자들을 통해 그대로 연속되어 있음을 전한다. 예수님의 당신의 자리로 돌아가셨듯, 우리도 우리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 이 지상의 순례 여정의 복적지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승천이후의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에 대해 부재의 현존이라는 메타포로 자주 바라본다. 하늘과 땅이 같아졌다는 것은 시간과 영원이 같아져야 한다. 이는 달리 말해 땅이 하늘을 듣고 하늘이 땅을 듣는 것이 가능해야 한다. 그렇기에 승천사화는 하늘과 땅의 완전한 하나의 소통구조라는 것을 부재의 현존이라는 메타포로 설명될 수 있다.

 

부재는 언제나 현존과 연결되고 떠남은 새로운 시작과 연결됩니다. 누군가의 부재에 대한 깨달음은 역설적으로 현존에 대한 갈망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승천은 결코 떠남이나 멀어짐이 아니라 오히려 그 어떠한 시간이나 공간의 제약도 없이, 인간과 더 깊은 유대와 공존의 관계를 맺으려는 도약입니다.(미리내 성모 성심 수녀회,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부재의 현존에 대해, 요셉 라칭거 추기경은 『사도신경강해』에서 부재의 현존이라는 의미를 영원과 시간의 관계로 전할 수 있는지를 예수는 우리와 함께 시간이고 하느님과 함께 영원이기 때문이기 때문이라고 전한다. 

 

“주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다음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 쪽에 앉으셨다”(19절)와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시면서 표징들이 뒤따르게 함께 일하시면서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시어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헤 주셨다(20절)를 연결하여 영원을 사시는 예수님과 시간을 사는 제자들이 어떻게 하나일 수 있는가를 성령의 시대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지만, 성령의 시대를 우리가 살고 있는지의 체험 여부를 시간과 영원으로 바라본다.

 

이는 시간을 사는 우리가 어떻게 영원을 알 수 있는가를 이해하는 것이 승천의 메시지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전하기만 하는 주체가 아니라 전함을 받는 객체이기 때문이다. 이는 다른 표현으로 우리는 그분을 들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분이 우리는 듣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는 물음과 닿아 있다.

 

<예수는 우리와 함께 시간이고 하느님과 함께 영원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을 음성을 듣듯, 그분도 우리를 듣고 있다는 것이다. 기도가 이뤄졌다는 것은 하늘과 땅이 같아진 것이기에 이것은 하늘과 땅이라는 공간의 차원이 아니라 시간과 영원의 차원으로 바라본 것이다.

 

예수는 우리와 함께 시간이고 하느님과 함꼐 영원이기 때문이다. 영원이란 시간 이전부터 있었던 태고가 아니라 전혀 다른 현실로 모든 지나가는 시대에 그 시대의 오늘로 관계를 맺고 또 참으로 그 시대의 오늘인 것이다. 그리고 영원은 그 자체가 이전 이후로 막혀있지 않고 오히려 모든 시간에서의 현재의 힘이다. 영원은 시간 곁에 묵묵하게 존립하지 않고 모든 흐르는 시간을 자체의 현재로써 포괄하여 시간의 존립을 가능케 해주는 모든 시간의 창조적 근거가 되어주는 힘이다.(251)

 

승천은, 영원한 신과 시간적 인간을 한 위격에 일치시킨 예수 안에서의 신의 육화는 신의 시간 권능의 궁극적 구체화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은 예수의 인간적 실존이라는 점에서 시간을 포착하여 당신 자신의 아들을 끌어들였다. 하느님의 시간권능이 예수의 육화로 인해 즉 우리와 함께 시간이 된 그에게서 우리는 동시에 영원자를 접할 수 있다. 또한 예수 안에서 시간을 사는 우리는 시간을 사는 모든 동시대인들과 시간을 나눔과 동시에 영원을 나눌 수 있다. 예수는 우리와 함께 시간이고 하느님과 함께 영원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신은 인간을 듣는다>에서 <신을 인간을 들어준다>는 것으로 예수의 공생활이 곧 제자들의 복음전파와 같아진 이유이며 부재의 현존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로 본 것이다.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는 『예수를 읽다』에서 시간을 초월한 것이 영원이 아니라 영원자가 유한자를, 영원자가 시간에 놓인 자를 들을 수 있는 근거로 바라볼 때 시간과 영원의 관계를 알 수 있다고 전한다. 하느님의 위대함은 영원 앞에서의 찰라라는 이 작은 시간의 티끌이 결코 작지 않고, 최대의 것도 너무 크지 않은 것과 같아진다.

 

신이 로고스로서 모든 것을 말하는 분이기도 하지만 또한 모든 것을 듣는 지혜라고 말할 수 있을 때, 하늘은 땅에서 일어나는  어떤 작은 것도 미소하다고 하여 배제됨이 없는 분이시다고 고백할 수 있다. <신은 들을 줄 안다---> 신이 들어 줄줄 안다>는 것이야말로 승천의 완벽한 소통구조를 <하나>로 바라본 것이라는 점이다.

 

예수의 지상생애가 시간을 초월하는데 있지 않았고 시간내 존재로서의 길을 가셨다는 데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 안에서 하느님을 위한 시간이 있는 아들 자신이 바로 하느님이 이 세상을 위해 시간을 내는 원천이 된다.  아들에서가 아니라면 달리 하느님은 이 세상을 위해 시간이 없다, 그러나 아들 안에서는 얼마든지 시간이 있다.

 

이 모든 논의를 종합해 보자면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는 승천의 메시지는 찰라에 불과한 이 지상의 삶이 어떻게 믿음으로, 영원을 만나고 있는가를 확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소명이 어떻게 그리스도인의 충만일 수 있는지 에 대해 바오로 사도는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사명을 다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에 다다르게 됩니다.>(에페소서4,1-13)라고 전한다.

 

완벽한 우리에게 사명이 담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역할을 주님의 현존안에서 다하고자 갈망할 때, 땅과 하늘이 같아지는 충만을 살 수 있다는 축복의 메시지다. 즉, 예수는 우리와 함께 시간이고, 하느님과 함께 영원이기 때문이기에, 우리는 시간과 영원을 동시에 살 수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글을 마치며,

 

 

 

그때에 예수님께서 열한 제자에게 나타나시어 15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16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 17 믿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표징들이 따를 것이다. 곧 내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들을 말하며, 18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며, 또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 19 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다음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 20 제자들은 떠나가서 곳곳에 복음을 선포하였다.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시면서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시어,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 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