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피캇(Magnificat)

너보다 더 네 것이 무엇이며, 너보다 덜 네 것이 무엇이냐?

나뭇잎숨결 2024. 5. 24. 18:41

 

분이가 탱큐!

 

너보다 더 네 것이 무엇이며, 너보다 덜 네 것이 무엇이냐?

(Quid tam tuun quam tu, quid tam non tuum quam tu-아우구스티누스)

- 삼위일체대측일,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가졌다” 를 중심으로

 

 

 

 

1. 피천득, 「5월은」

 

오월은 /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 스물한 살 청신한 얼굴이다. / 하얀 손가락에 끼여 있는 / 비취가락지다.// 오월은 /앵두와 어린 딸기의 달이요,/오월은 모란의 달이다./그러나 오월은 무엇보다도/신록의 달이다./전나무의 바늘잎도/연한 살결같이 보드랍다.//신록을 바라다보면/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참으로 즐겁다./내 나이를 세어 무엇하리./나는 5월 속에 있다.//연한 녹색은 나날이/번져가고 있다./어느덧 짙어지고 말 것이다./머문듯 가는 것이/세월인 것을.//유월이 되면/원숙한 여인같이/녹음이 우거지리라.//그리고 태양은/정열을 퍼붓기 시작할 것이다./밝고 맑고 순결한 오월은 / 지금 가고 있다.

 

 

피천득의 「5월은」 오월 예찬시이자, 신록 예찬시이자, 자연예찬시라고 할 수 있다. 어떤 대상, 무엇을 예찬한다는 것은, 실은 그 대상과 하나가 아니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화자는 오월의 신록 앞에서 자연과 하나가 된 물아일체(物我一體)의 상태를 노래하고 있다. 실은 화자의 마음에 있는 수많은 초록의 물감들이 번지고 있는 중이다.

 

 

피천득의 「5월은」에서 압권은 ​“오월은 /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 스물한 살 청신한 얼굴이다”에서 오월을 스물 한 살 청춘에 비유했다는 것이다. 왜 오월은 스무살도 아니고 스물 두 살도 아닌 스물 한 살 청춘일까? 유월의 초록이 원숙한 여인처럼 짙은 초록이라고 한다면 스물한 살의 초록은 수많은 초록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유월의 신록이 초록의 완성이라면 오월의 신록은 초록의 가능성이다. 우리가 어떤 대상과 하나가 된다는 것은 완성의 하나가 아니고 이미 그러나 아직과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닐까?

 

 

 

 

 

 

 

 

 

 

 

 

2. 페르소나(persona)에서 위격(persona)으로

 

어떤 대상과 하나가 된다는 것이 왜 스물한 살 청춘처럼 설레는 것일까?

이름에 대한 미망은 페르소나persona를 지닌 외적 인격을 지향한다. 익명으로 돌아갔을 때의 그 사람의 행태를 보면 그 사람의 페르소나를 알 수 있다. 골방안에서 그의 전모를 보면 그의 페르소나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외적인격이라 불리는 페르소나는 그리스 어원의 '가면'을 나타내는 말로 '외적 인격' 또는 '가면을 쓴 인격'을 뜻한다. 스위스의 심리학자이자 정신과 의사인 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은 사람의 마음은 의식과 무의식으로 이루어지며 여기서 그림자와 같은 페르소나는 무의식의 열등한 인격이며 자아의 어두운 면이라고 보았다. 인격이라 불리는 자아가 겉으로 드러난 의식의 영역을 통해 외부 세계와 관계를 맺으면서 내면세계와 소통하는 주체라면 페르소나는 일종의 가면으로 집단 사회의 행동 규범 또는 역할을 수행하면서 외적인격을 갖게된다. 예술에서 페르소나는 종종 창작자 자신의 분신이자 특정한 상징을 표현하는 배우를 지칭하기도 한다.

 

이름을 지우고도 남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이 그가 지닌 본질일 것이다. 이름이 환상과 명예를 먹고 자란다면, 그렇다면, 본질 혹은 본체라 부르는 것은 무엇으로 사나? 우리는 그것을 아카페, 사랑이라 부른다. 사랑만이 그가 지닌 본질이 무엇인가를 말해줄 수 있다는 것이다.

 

신도 자신의 본체를 위해 이름을 지울까?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삼위는 각각이면서 그러나 본체적으로 하나인데 그것은 위격 내면에는 대화적 현실이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본 ' 요셉 라칭거추기경은 『사도신경강독』에서 삼위일체 사랑이 세 위격안에만 머물지 않고 인간을 향해 있다는 것을 다음과 같은 세 개의 명제를 통해 전한다.

 

 

 

제1명제: <위는 셋이요, 본체는 하나>라는 역설은 단일성과 다수성의 원리에 대한 물음에 속한다.(135)

 

 

 

우리 믿음의 대상인 하느님은 분명 유일신이다. 그런데 성부인 하느님, 성자인 하느님, 성령인 하느님이라 부른다면 이 다수성은 무엇인가?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창세기1, 26)에서 알 수 있듯, 신의 단일성은 다수성 안에 그 창조의 풍요를 담고 있다. 이 풍요에서 사랑의 본질이 담겨있다. 사랑은 나눠진다는 것과, 사랑은 나눠짐 속에서 일치를 지향한다는 것이다. 사랑은 이름보다는 본질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사랑에서 비롯된 사람은 자족적 실체일 수 없다고 말한다.

 

 

 

 

 

제2명제: <위는 셋이요, 본체는 하나>라는 역설은 위격개념과 상관되며 위격개념에 함축된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136)

 

 

 

위격(persona)이라는 언어적 의미는 <~으로부터 ~을 뚫고 들려옴> 혹은 < ~무엇을 뚫고 누구에게 >라는 것에서 신에게 부여된 인격과 차별화된 신격을 표현하는 단어다. 그런데, 그 신에게 부여된 위격이 단수일 수 없다는 것은 위격의 기원은 언제나 <우리와 같은 사람을 만들자>로부터 파생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위격을 위격이게 할 수 있는 지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있음”의 존재는 실존과 존재로 나눠진다고 보는 것이다. 천상천하유아독존은 실존의 용어이지 위격이 향하고 있는 존재론의 지향점이 아니라는 것이다. 위격은 신에게 부여하는 흠숭의 용어이지만 흠숭의 대상이 없다면 그 흠숭은 불교에서 말하는 <무>라고 할 수 있다.

 

 

 

제3명제: <위는 셋이요, 본체는 하나>라는 역설은 절대와 상대의 문제에 속하며 상대 및 상관의 절대성을 뚜렷이 해준다(137)

 

 

 

위격은 나눠지지만 그런데 본체(substantia)로는 하나이면서 내면에는 대화적 현실, 상대 및 상관의 절대성이 제시된다. 이것은 신의 존재방식이 창조의 사랑이기 때문이라고 본다. 사랑은 나눠진다. 생성한다. 그리고 그것은 끝을 모른다. 무한을 지향한다는 것에서 사랑은 인간의 존재방식이자 신과 인간의 존재방식이기도 하다. 사랑의 존재태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아가페만이 본체의 의미, 관계론적, 대화적 의미가 무엇인가를 해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라칭거 추기경은 이렇게 덧붙인다. '자신을 참으로 이해하는 존재는 자신으로부터 나아가서 관계로서 자신의 참 근원성을 되찾음으로써 비로서 자기자신이 될 수 있다'고 전한다. 자존하는 이타존재가 인간이라는 것이다.

 

 

 

 

 

 

 

3.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어라.> 마태오 28,16-20

 

 

그때에 16 열한 제자는 갈릴래아로 떠나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산으로 갔다. 17 그들은 예수님을 뵙고 엎드려 경배하였다. 그러나 더러는 의심하였다. 18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가가 이르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20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어라.>라고 전하는 마태오28,16-20절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복음선포의 사명을 부여하시는 부분으로 마르코16, 14-18/루카24, 36-39/요한20,19-23/사도행전1,6-8에 공동으로 전하는 파견사화이다.

 

마태오28,16-20절은 삼위일체 하느님의 현존을 순례의 여정중에 어떻게 체험할 수 있을까?

 

삼위일체론은 그리스도교의 정체성과 독특성이 무엇인지 담지하고 있다. 종교로서 그리스도교는 무신론이 아니며 유신론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교는 불교와 구별된다. 유신론이지만 다신론이 아니고 단일신론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교는 수많은 신으로 추앙되는 이교도의 신들과 구별된다. 단일신론이지만 삼위일체론 때문에 유대교나 이슬람교와도 구별된다. 이처럼 삼위일체론은 대외적으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그리스도교의 독특성을 드러내고, 대내적으로 신자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는 표지가 된다.

 

그렇다면, 삼위일체가 드러내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그 표지는 무엇인가?

 

제1독서에서 <주님께서 위로는 하늘에서, 아래로는 땅에서 하느님이시다. 다른 하느님은 없다.>(신명기4,32-34.39-40)라고 전하는 모세의 증언에서, 십계명 가운데 1,2,3계명을 통해 전능하신 천주 성부 천지의 창조주를 믿나이다,라는 사도신경의 고백에서 말하는 믿음은 무엇인가를 성찰하게 이끈다.

 

제2독서에서 <여러분은 여러분을 자녀로 삼도록 해 주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이 성령의 힘으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성령께서 몸소,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우리의 영에게 증언해 주십니다. 자녀이면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상속자입니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동 상속자인 것입니다>(로마서8,14-17)라고 전하는 바오로 사도의 증언에서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르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더불어 하느님의 상속자라는 것은 무엇으로 알 수 있을까?

 

이를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 인간과 함께 하시려고 어떤 일을 하셨는지? 삼위일체의 결정적 사랑의 신비를 <관계적 신비>라고 전한다.

 

“일반적으로 삼위일체는 ‘신비’라고 하는데, 이해할 수 없는 애매함 때문이 아니라 관계 안에서 사랑을 통한 체험으로 인식되고 확인되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삼위일체의 결정적 신비는 오늘 복음의 마지막 선언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에 내포되어 있습니다. ‘세상 끝날까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지금 내 삶과 주변에서 구체적으로 체험하지 못한다면 삼위일체의 관계적 신비는 당연히 이해되지 않을 것입니다”(미리내 성모 성모 성심 신심회, 김혜운 베아트릭스 수녀)

 

삼윌일체의 관계적 신비를 아우구스티누스는 『삼위일체론』에서 로고스(Logos)-그리스도론에서 대화(Dia-logos)적-그리스도론을 끌어낸다. 삼위일체의 사랑은 일방적인 로고스의 명령이 아니라 끊임없는 대화의 사랑이라는 것이다.

 

삼위일체의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를 닮은 사람을 만들자”(창세기1, 26)에서 삼위의 하느님은 로고스(Logos)일 뿐 아니라 대화(Dia-logos)다. 유일신인 그가 아버지라 불리는 것은 자신과 관련해서가 아니라 오직 아들과의 관계 때문이다. 또 아들은 아버지와 관련에서 메시야 일 수 있다. 아들은 아무것도 자진해서 할 수 없다(요한5, 19).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요한10,30) 나 없이는 당신들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요한15,6) 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이 사람들도 하나가 되게 해주십시오(요한17, 11) 아버지 나를 보내셨듯, 나 또한 당신들을 보냅니다(요한 13, 20)에서 알 수 있듯, 나는 그저 나만이 아니라 나는 내 것이 아니라 나는 다른 분의 것이다. 로고스-그리스도론은 너보다 더 내 것이 무엇이며, 너보다 덜 네 것이 무엇이냐?는 대화의 그리스도론이기에 그리스도-존재론이리고 할 수 있다. “그대가 사랑을 본다면 그대는 바로 삼위일체를 뵙는 것이다!”

 

자신을 참으로 이해하는 존재는 자신으로부터 나가서 관계로서 자신의 참 근원성을 되찾음으로써 비로서 자기 자신이 무엇이고, 무엇이 될 수 있음을 알게 된다, 이는 자신을 참으로 이해하는 존재는 자존(自存)하는 가운데 자신에게 속하지 않는 존재의 역설을 알아듣는 사람이다, 자신을 참으로 이해하는 존재는 자신으로부터 나가서 관계로서 자신의 참 근원성을 되찾음으로써 비로소 자기 자신이 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우리에게 예수님이 공생활 중에 하신 모든 일을 할 수 있는 힘을 삼위일체 사랑으로 전하고 있다. 전한다는 것은 내 자신이 그 체험을 해야 가능하다. 내가 갖고 있지 않은 것을 누군가에게 전하거나 나눌 수는 없기 때문이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그렇다면 어떻게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세상끝날까지 나와 함께 있다는 관계의 신비를 체험할 수 있을까?

 

이것은 삼위일체론을 접하는 후대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삼위일체 교리는 어려운 것도 아니고 복잡한 것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여준 하느님의 사랑을 알면 다 알 수 있는 진리에 해당한다. 그런데 삼위일체 교리 앞에 <어렵다>는 전제가 붙는 것은 신의 존재양식으로 삼위일체를 바라보려 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너보다 ‘더’ 네 것이 무엇이며, 너보다 ‘덜’ 네 것이 무엇이냐?”

(Quid tam tuun quam tu, quid tam non tuum quam tu-아우구스티누스)

 

 

나를 존재케 하고 너를 존재케 하는 것은 <더>나 <덜> 이라는 비교우위가 아닐 것이다. <더>와 <덜>을 재단하는 한 우리는 나도 모르고, 너도 모르고 그래서 세상 끝날까지 누가 우리와 같이 있는지 그 있음의 근원을 잊을 수밖에 없다. 근원을 잊었다는 것은 관계의 신비를 잊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아버지와 나는 하나>라는 축복을 예수님의 축복으로 국한시키기도 한다. 

 

 

하느님께서 인간과 함께 하시려고 무슨 일을 하셨는지? 그 질문을 보편적 질문으로 하지 않고 내 삶을 총체적으로 바라보며 한다면, 하느님은 나와 함께 하시려고, 너와 함께 하시려고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성찰한다면,  <내 영혼아 주님이 베푼 은혜 하나도 잊지 말라?>는 감사의 기도를 드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글을 마치며, 

 

 

그때에 16 열한 제자는 갈릴래아로 떠나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산으로 갔다. 17 그들은 예수님을 뵙고 엎드려 경배하였다. 그러나 더러는 의심하였다. 18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가가 이르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20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