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피캇(Magnificat)

B(Birth)와 D(Death) 사이에는 ‘M(μενειν, menein머무름)’이 있다(2)

나뭇잎숨결 2024. 4. 26. 07:00

 

 

남마리안나 수녀님께서, 감사합니다.

 

 

B(Birth)와 D(Death) 사이에는 ‘M(μενειν, menein머무름)’이 있다(2)

 -부활5주,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를 중심으로

 

 

 

 

1. 알프레드 디 수자,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춤추라, 아무도 바라보고 있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라, 하번도 상처받지 아니한 것처럼/ 노래하라, 아무도 듣고 있지 않은 것처럼./ 일하라, 돈이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살라,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알프레드 디 수자,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은 언뜻, 사랑과 상처와의 관계에 관한 것으로 읽어볼 수도 있다. 그런데, 춤추라-사랑하라- 노래하라- 일하라- 살라는 청유형 서술어에서 춤, 사랑, 노래, 일, 산다는 것은 거의 동의어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즉 사랑하는 사람만 춤출 수 있고, 사랑하는 사람만 노래할 수 있고, 사랑하는 사랑만 일할 수 있고, 사랑하는 사람만 산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라!는 것은 그것이 사랑이라면 사랑은 결코 상처받지 말아야 한다고 읽힐 수 있다. 사랑에 상처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비록 상처가 있을지언정 상처는 사랑보다 클 수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상처가 있는데 어떻게 상처받지 않을 수 있을까? 그것은 아무리 인간이 진 죄가 클지라도 자비보다 클 수 없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당신의 상처를 제자들에게 보여주셨을 때, 제자들이 기뻐했다고 전한 복음의 한 장면을 기억해 볼 수 있다. 두려움이 기쁨으로 바뀐 이유는 모든 상처를 극복할 수 있는 사랑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그것을 바라볼 수 있는 심안이 열렸기 때문일 것이다. 

 

 

 

 

 

 

 

 

The Long Room, Trinity College, 더블린, 아일랜드 | © scenicireland.com / Christopher Hill Photographic / Alamy 스톡 포토

 

 

 

 

 

 

2. B(Birth)와 D(Death) 사이에는 C(Choice선택)가 있다(사르트르)

 

 

그렇다면,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라는 것은 인간의 자유의지의 선택은 우리에게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임을 전재한다. 자유는 능력이라고 바라본 싸르트르는 B(Birth)와 D(Death) 사이에는 C(Choice선택)가 있다(사르트르)고 말한 바 있다.

 

우리의 존재가 어떤 것이든 그것은 선택이다. 따라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대한 자’로서 선택할 것인지, ‘고귀한 자’로서 선택할 것인지 또는 ‘비열한 자’, ‘비굴한 자’로서 선택할 것인지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

 

인간이 자기의 자유를 의식하는 것은 불안에 있어서이다. 또 말하자면, 불안은 존재의식으로서의 자유의 존재방식이다. 불안 속에서야말로 자유는 그 존재 속에 그 자신을 위한 문제가 된다.

 

두려움은 세계의 존재들에 관한 두려움이고, 불안은 자기 앞에서의 불안이다. 현기증이 불안인 것은, 내가 절벽에서 떨어지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절벽에서 몸을 던지지 않을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어떤 상황은 그것이 밖에서 나의 생명과 나의 존재를 변경할 우려가 있는 한, 두려움을 일으키지만, 내가 이 상황에 대한 나 자신의 반응에 대해 의구심을 품는 한, 이 상황은 불안을 불러일으킨다. 공격에 앞선 준비 사격은 포격을 받는 병사에게 두려움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그러나 그 사람 속에 불안이 시작되는 것은 그가 포격에 대항하여 취해야 하는 행동을 예상하려고 할 때이며, 그가 이 포격에 버티어 낼 수 있을 것인지 자문해 볼 때이다. 마찬가지로 전쟁이 일어났을 때 자기 부대를 찾아가는 징집된 군인은 어떤 경우에는 죽음의 두려움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은 두려움을 느끼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느낀다. 다시 말하면 그는 자기 자신 앞에서 불안을 느끼는 것이다.

 

나는 조약돌 위에서 미끄러져 절벽 아래의 심연 속에 떨어질지도 모른다. 오솔길의 무른 흙이 발밑에서 무너질지도 모른다. 이렇게 다양한 예상을 하고 있을 때, 나는 나 자신에게 하나의 사물로서 주어진다. 나는 그런 가능성에 대해 수동적이다. 나 또한 만유인력에 끌리고 있는 이 세계의 하나의 사물인 한, 그 가능성들은 밖에서 나에게 온다. 이것은 나의 가능성은 아니다. 이 순간에 두려움이 나타난다. 두려움은 상황에서 출발하여 나 자신에 관해 파악된다.

 

소설가와 시인들이 강조한 것은 본질적으로 시간의 이 분리적 효력에 관한 것이었으며, 아울러 어떤 의미에서는 시간적 동태에 속하는 비슷비슷한 관념,  모든 지금은 곧 지난날이 될 운명을 가지고 있다는 관념에 대한 것이다. 시간은 갉아먹고 구멍을 뚫는다. 시간은 분리한다. 시간은 달아난다. 또 시간은 분리하는 자로서, 인간을 그의 괴로움에서 또는 괴로움의 대상에서 분리함으로써 치유해 준다.

 

세계는 인간적이다. 우리는 의식이 차지하고 있는 매우 특수한 위치를 안다. 존재는 나를 거역하며 내 주위 곳곳에 있다. 존재는 내 위로 무겁게 덮쳐 온다. 존재는 나를 에워싼다. 나는 끊임없이 존재에서 존재로 지향된다. 거기 있는 이 탁자는 존재이고, 그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다.’ 이 바위, 이 나무, 이 경치는 존재이며, 그 밖에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이런 존재를 파악하기를 원하면서도 이제 밖에 발견하지 못한다.

 

인간존재에 있어서 존재한다는 것은, ‘거기에-있는 일이다. 다시 말하면 거기 그 의자 위에 존재하는 일이고, ‘거기 그 탁자 앞에 존재하는 일이며, ‘거기에, 이 산꼭대기에, 이러이러한 크기로, 이러이러한 방향 따위로 존재하는 일이다. 그것은 하나의 존재론적인 필연성이다.

 

그 밖에도 타인들과 나의 직업적이고 기술적인 관계들이, 나를 또한 누구든 상관없는 누구로서 알려 준다. 카페 종업원에게는 나는 손님이고, 개찰원에게는 나는 지하철 이용자이다. 끝으로 내가 앉아 있는 카페의 테라스 앞 거리에서 갑자기 일어난 사소한 사건 또한, 나를 이름 없는 목격자로서,  이 사건을 하나의 외부로서 존재하게 하는 시선으로서 지시한다. 내가 구경하고 있는 연극, 또는 내가 참관하고 있는 미술전람회가 지시하는 것은, 마찬가지로 이름 없는 관객이다. 또 분명히 내가 구두를 신어 볼 때, 내가 병마개를 딸 때, 내가 엘리베이터를 탈 때, 내가 극장에서 웃을 때, 나는 나를 누구든 상관없는 누구로 만든다.

 

그들의 불행은 그들에게 습관적인 것으로 보이지 않고 오히려 자연적인 것으로 보인다. ‘요컨대 불행은 존재한다.” 불행은 노동자의 조건을 구성하고 있다.’ 그들의 불행은 부각되어 있지 않다. 그들의 불행은 밝은 빛 속에 드러나 있지 않다. 따라서 그들의 불행은 노동자들에 의해 그 존재 속에 통합되어 있다. 노동자들은 괴로워하지만, 그 괴로움에 주의를 집중하지도 않고, 그것에 가치를 부여하지도 않는다. 즉 그들에게 있어서는 괴로워하는 것 존재하는 것은 같은 일인 것이다.

 

 

인간은 이미 인간적인 것밖에 만날 수가 없다. 더 이상 인생의 저 너머란 존재하지 않는다. 죽음은 하나의 인간적인 현상이다. 그것은 인생의 최종 현상이기는 하지만 또한 인생이다. 이런 것으로서 죽음은 거꾸로 인생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인생은 인생에 의해 한계가 정해진다. 인생은 아인슈타인의 세계와 마찬가지로 유한하기는 하지만, 한계가 주어지지 않는 것이 된다. 죽음은 종결화음이 멜로디의 의미인 것과 마찬가지로 인생의 의미가 된다. 거기에는 기적적인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죽음은 해당 계열의 하나의 항()이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어떤 계열의 각각의 항은 그 계열의 모든 항에 대해 언제나 앞서서 존재한다. 그러나 이렇게 회복된 죽음은 단순히 인간적인 것으로 머물러 있지 않는다. 죽음은 나의 것이 된다. 내면화됨으로써 죽음은 개별화된다. 그것은 이미 인간적인 것에 한계를 지니도록 하는, 위대한 불가지(不可知)의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나의 개인적인 인생 현상이며, 이 현상이 이 인생으로 하여금 오직 하나뿐인 인생, 즉 두 번 다시 되풀이할 수 없는 인생, 결코 다시 새로 수정할 수 없는 인생으로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나의 인생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나의 죽음에 대해 책임이 있는 자가 된다.

 

싸르트르는 실존주의 모태라고 부르는 『존재와 무』의 서론 존재의 탐구에서 “현상은 본질을 숨기고 있지 않고, 본질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한다. 일반적으로 사물의 본질은 배후에 숨겨져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사르트르는 그것을 부정한다. 사물은 그저 그것 자체로 있을 뿐이며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 아무 것도 의식하지 않고 그저 ‘있을’ 뿐이다. 이러한 존재를 ‘즉자존재(卽自存在)’라고 부른다.

 

그에 비하여 인간은 ‘대자존재’라고 부른다. ‘대자’란 의식과 연결된다. 인간은 의식과 함께 있는 존재이며, 또한 자기 자신을 대상화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렇게 되면 인간은 사물처럼 편하게 존재할 수는 없게 된다. 의식은 언제나 무언가에 대해 의식함으로써 의식되는 것과의 사이에 끊임없이 틈을 만든다. 왜냐하면 내가 무언가를 의식하는 것은 그것을 나를 내가 아닌 것으로서 의식하고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의식은 끊임없이 ‘~가 아니다’(無)를 흩뿌린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의식이 자기 자신을 하나의 대상으로 보는 한, 자신이 완전하게 자신이 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다는 것이다. 웃거나, 혹은 울고 있는 자신을 보고 있는 또 하나의 자신이 있다거나, 기쁜 일이 있어도 마음속으로 기뻐하지 못한 채 퇴색하고 있는 또 하나의 자신이 있는 것이다. 의식은 동시에 자기에 대한 의식이기 때문에, 그 속에는 언제나 틈이 생기는 것이다.

 

사르트르는 인간이 과거의 자신과 현재의 자신을 부정하고, 이제부터의 미래에 자신을 내던져가는 ‘탈자적(脫自的)’인 존재라고 보았다. 인간은 아찔할 만큼 자유를 가지고 있다. 인간의 의식(대자존재)이 없다는 것은, 인간은 그 누구도 아닌 존재라는 것이다. 이를 자유라고 할 수 있다. 사르트르는, 인간은 그 누구도 아니기 때문에 오히려 자유라고 주장했다. 자신이 그 누구도 아닌 것이야말로, 인간은 지금의 모습에 고정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미래를 지향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아직 실현되지 않은 본연의 모습을 향해 현실을 뛰어넘어 힘차게 나아가는 자유를 가질 수 있다. 물건(즉자존재)은 우선 그 본질(물건을 자르는 도구)이 부여되었기 때문에 실존(존재)한다. 그러나 인간의 본질은 정해져 있지 않다. 세상에 먼저 실존하고 나서 자기 자신의 본질을 만들어간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것이다. 이는 인간이 한없이 자유라는 것을 의미하지만, 동시에 자유롭다는 것은, 인간은 그만큼 선택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과연 없는 것을 선택하는 존재인가? 아님 이미 주어져 있는 것을 다만 발견하는 것인가? 여기서 산택을 무엇으로 볼 수 있는가는 인간은 무엇이라고 규정할 것인가와 연결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안젤로스, <포도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 1450년경, 목판에 템페라, 77x79cm, 크레타.

 

 

 

3.<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요한15,1-8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 “나는 참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2 나에게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쳐 내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모두 깨끗이 손질하시어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 3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한 말로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 Ⓑ4 내 안에 머물러라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6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잘린 가지처럼 밖에 던져져 말라 버린다. 그러면 사람들이 그런 가지들을 모아 불에 던져 태워 버린다. Ⓓ7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 너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청하여라.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8 너희가 많은 열매를 맺고 내 제자가 되면그것으로 내 아버지께서 영광스럽게 되실 것이다.”

 

 

 

부활5주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라고 전하는 요한15,1-8은 예수님의 두 번째 고별사로 요한복음에만 있는 단독 문형이다.

 

<나-예수-포도나무- 하느님-농부- 제자들-포도나무 가지들>의 관계를 통해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조건과 열매를 맺을 수 없는 조건을 비유로 말씀하신 그 저변에는 하느님과 예수님과 제자들의 결속관계가 예수님과 하느님과의 관계-예수님과 제자들과의 관계-제자들과 하느님과의 관계가 결국 어떻게 <하나>의 관계인지를 바라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무엇을 선택해서 하나인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였음을 발견하는 것이 믿는 이들의 선택이라는 점에서 이는 인간은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를 내장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내가 형제들과 맺는 관계는 결국 나와 예수님과의 관계이고, 예수님과 하느님의 관계는 결국 나와 하느님과의 관계와 같은 것이라는 점에서, 하느님-예수님-나는 영원히 하나라는 점에서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자기정체성에 대한 본질적인 답이라고 할 수 있다.

 

흔히 요한복음을 태초이전에 계셨던 분을 제시하는 선재사상이라고 부른다. 이는 단지 예수님의 정체성이 창조이전에 계신 분이라는 것뿐 아니라 인간의 정체성 역시 예수님의 선재사상에서 연역된 것임을 알 수 있다. 1, 2, 3, 4...n을 했기 때문에 인간이 아니라 인간은 이미 인간이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요한 복음 전체는 프롤로그에 해당하는 1장에 대한 반복적 복기라고 할 수 있다.

 

복음사가는---참되다-깨끗하다-머무르다-열매를 맺다-는 은총의 고리들을 엮어서 어떻게 하느님의 영광으로 점층적으로 하나의 관계로 모아지는 지를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다.

 

예수는 당신 자신을 포도나무라는 형상으로 제시하여 문이나 목자로서의 자기계시와 같은 맥락으로 <머물다와 –열매를 맺는다>는 15장의 주제를 통해, 그분 안에서 맺어진 열매로 인해 내 아버지께서는 영광스럽게 된다로 모아진다. 인간이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할 수 있다? 이 선언이야말로 인간에 대한 새로운 규정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예수님 안에 머물러 열매를 맺으면 무엇이든지 청하는 것을 모두 이룬다는 것은 포도나무의 비유의 세 주체가 아버지를 중심으로 하나라는 것을 천명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시편80에서는 포도나무는 하느님의 백성을 상징한다. 복음사가는 예수님 당신을 참된 포도나무라고 규정한다. 예수님 당신이 유대인들이 기다리는 마지막 예언자 그리스도일 뿐 아니라 중개자로, 당신 스스로 신적 정체성을 선언한 것으로, 부활4주에 살펴본 바대로 나는 ~이다는 자기 선언은 하느님으로 비롯된 예수님의 정체성의 선언에 그치지 않고 제자들의 정체성을 동시에 천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느님-예수님-제자들의 이 정체성의 결속관계는 형용사 참된(알레테나)으로부터 시작된다. 참됨은 진리라는 개념과 같은 의미로 쓰이는 단어이다. 참됨이라는 표현은 포도나무의 질적인 특성과 유일무이성을 시사한 것으로 하느님은 농부, 예수는 포도나무, 제자들은 열매를 맺는 가지로 하느님 중심적인 관계의 진실성을 강조한 것이다. 이 참됨은 진실(알레테스)과 연결되어 사건의 실재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주로 쓰였던 법적인 용어다. 일반적인 어휘인 참됨은 존재의 실재성을 확증하는 영적 실재가 무엇인가를 지시하는 의미로 전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참됨이 실재하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 여기서 주목할 것은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들 모두가 열매를 맺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로부터 실재와 비실재가 무언인가로 갈리고 있음을 바라볼 수 있다. 예수라는 가지에 붙어있는 것이 열매를 맺는 필요충분조건이 아니라는 이 사실이야말로 실재가 무엇인가를 지시하며, 부활5주의 성찰의 메인 포인트라고 할 수 있다.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들의 생산성과 그리스도와의 관계는 1차적으로 깨끗하다(카타이로)와 연결되어 있다. 이 깨끗하다는 형용사는 하느님과 연결된 상태라는 것이 참으로 주목할 만하다. 깨끗함과 많은 열매를 맺는 생산성과의 관계는 2절과 3절에서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를 통해 드러난다. 결국 예수님 안에 머무르는 것은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를 아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열매를 맺는 가지는 모두 깨끗이 손질하시어 더 많은 열매를 맺게하신다(2절)- (그런데)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한 말로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3절)

 

이어서, 참됨은 깨끗하다와 연결된다. 깨끗하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을 들은 제자들은 이미 그 자체로 깨끗해져 있다는 것에서, 들음이 깨끗함을 보장한다. 아버지는 모두 깨끗하게 손질하셨기 때문에 더 많은 열매를 맺고 있다는 선후관계는 같은 상황이 된다. 여기서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선험적 축복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에게 이미 주어진 신망애 삼덕의 은총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선택이라는 개념 자체가 실존주의와는 다른 시각을 요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선택은 여러 선택지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존재상태를 선택하는 것이라는 사실에서 우리의 자유의지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요구한다고 할 수 있다. 자유의지는 오직 진리를 혹은 사랑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라는 사실이다. 이미 선택된 것을 선택하는 것만이 선택이라고 바꾸어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이 두 번째 고별사에서 제자들의 흔들림을-스승과의 이별의 상황을 받아들이지도 이해하지도 못하는 제자들에게 성령강림이후의 제자들의 상태를 미리 예표한 것에서 이미 우리는 가장 좋은 것을 선택하게 되어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말이다. 여기서 예수와 제자들의 상호내재적인 실존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 중요하게 떠오른다.

 

이는 요한1서1,7-9에서 예수의 피가 이뤄내는 결과를 가리킨다. 요한복음사가는 13,10-11에서 제자들을 이미 깨끗하다고 하심으로 그들의 선택의 결과들을 그들의 행위가 아니라 그들의 존재성에서 비롯됨을 알 수 있다. 

 

깨끗하다는 것이 정화작업과 연결되어 있으나, 그것은 행위보다 더 큰 존재의 범주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복음사가는 미래시제와 현재시제를 (혼용함) 무차별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이 정화작업은 이미 깨끗하여졌다는 것을 바라보는 것으로부터 시작한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고별사 이후에 벌어질 제자들의 나약한 행위들이 열매의 생산성을 가늠하는 제1조건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살아있으라! 그러면 언젠가는 열매를 맺을 것이다, 라는 맥락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예컨대 사람들이 가끔 묻는다. 늘 희망이 있으세요? 이런 질문을 받으면 예전에는 좀 망설이다 대답을 했는데, 요즘은 그 즉시 대답이 나온다. 네! 희망합니다! 왜냐하면 내 행위나 의지 때문에 신망애 삼덕을 갖게 된 것이 아님을 알았기 때문이다. 내 원의 때문에, 내 갈망때문에 신망애삼덕이 선물로 주어진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주어진다는 것은 이미 주어진 것을 바라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빛으로만 빛을 본다는 것!

 

여기서, 하느님의 은총은 과거-현재-미래라는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원인과 결과가 함께 있다는 이 사실이야말로 유일한 은총의 실재라는 것도 알 수 있다. 이것이 영원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단초가 된다. 시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는 것은 과거-현재-미래라는 일상적인 시간이 아니라 영원이라는 초시간을 이미 살고 있음 을 의미한다. 따라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신앙의 여정은 상대적인 시간과 절대적인 두 시간을 동시에 사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어로 '크로노스(Kronos)'는 연속적이고 순환적인 상대적인 시간을, '카이로스(Kairos)'는 순간이나 주관적인 절대적인 시간을 뜻한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동일하지만 그것을 자신만의 특별한 시간으로 만든다는 측면에서 '카이로스'는 기회의 시간(혹은 신)으로 불리기도 한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로다>는 예수님의 자기계시이자 하느님과의 결속을 강조한 가운데 선험적으로 주어진 은총은 바로 크로노스의 시간이 아니라 카이로스의 시간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카이로스의 시간이 크로노스의 시간을 끌어간다고 말할 수 있다.

 

복음사가는 이를 인간의 자유의지로 다시 한번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란 어떤 상태를 선택한 것인가를 통해 강조한다.

 

나무에 붙어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는 사람들에 의해 잘려지고 그 잘려진 가지처럼 밖에 던져질 것이다. 혹은 말라버린다, 태워버린다(6절)는 표현에서 인간의 자유의지가 영적 은총을 좌우하고 있다고 전한다는 데 있다. 하느님의 주도적인 은총에서 인간자유의지의 선택으로 열매의 생산성이 좌우된 것처럼 표현된 이유는 무슨 의미인가?

 

이는 너희는 나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7절)에서 예수가 어떤 중개자인가가 제시된다. 열매의 생산성을 주도하는 하느님의 사랑의 표현 <깨끗하다>와 제자들의 <머무르다>는 자유의지가 <나는 포도나무다>라는 예수님의 사랑과 맺는 관계안에서 시간은 영원으로 포괄된다고 할 수 있다.

 

그를 확증하는 단어가 머무름이다. <내 안에 머무르시오 나도 여러분 안에 머물겠습니다>에서 <머물다>라는 동사로 모아진 이 상태,  이 머물다라는 동사는 신약에만 118번 이상 나오는 중요한 신학적인 관계론을 가리키는 용어다. 

 

열매의 생산성이 하느님 주도에서- 제자들의 머무름에서 - 다시 예수님의 주도로 넘어간 듯 보인다. 여기서 포도나무의 비유에 등장하는 하느님-예수님-재자들, 이 세 주체가 결국 하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상대적인 시간과 절대적인 시간이 섞이듯, 하느님-예수님-제자들의 경계가 사라진다. 그것이 많은 열매를 맺는 이유이고 무엇이든지 청하면 이루어지는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삼위일체 하느님이 신적능력의 독점이 아니고 신적능력의 확산이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가 전하는 메인 메시지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제자들 사이에 있는 상호내재적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열매를 맺는 것, 즉 영적인 열매는 그리스도라는 참된 포도나무와의 일치에서 달려있기 때문이다.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는 삼일체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믿음의 소통이 필요함을 역설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영적인 열매는 예수라는 인격과의 일치에서, 제자들의 인격이 규정된 것이다. 나아가 그분 제자들 사이의 상호긴밀한 관계로 그 인격이 확장된다.

 

이 머무름에서 필요한 본질적 동기는 나 없이는 여러분은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에서 초자연적인 관계성이 다시금 강조된다. 이는 성령의 도움이 없으면(3,5)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가망이 없으며 아버지가 이끌어 주지 않으면 그리스도께 간다거나 믿을 수 없다는 것으로, 이 열매는 그리스도와 일치되어 있지 않으면, 가치있는 일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처럼,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은 마치 단죄받은 것 같은 <없음>의 운명에 처해진다는 사실이다.

 

이는 다른 표현으로 주님안에 머물러 있으면 제자들의 모든 청을 들어준다는 것은(16,23)그분과의 일체는 곧 하느님과의 일체이며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수렴된다는 점에서 자유의지는 오직 선을 선택할 수 있도록 주어져 있음 역시 알 수 있다.

 

 

 

 

 

 

 

 

 

여기서 생명의 원천인 그리스도와 분리되어 있는 제자는 초자연적이고 신적인 영역에서 살 수 없고 일할 수도 없는 원천적인 무능력에 처해진다. 이는 자기단죄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영적 무능력은 비실재라고 할 수 있다.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영적 능력은 실재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실재와 비실재의 명제 속에, 

 

요한복음사가가 자주 쓰는 머무르다는 동사는 실재가 무엇인지 자명하게 알 수 있고, 알 수 있기에 살 수 있다는 점에서, 머무르다는 이 자유의지는 선과 악 가운데 무엇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빛을 선택하는 능력만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고 바라볼 수 있겠다. 많은 선택지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선택은 주어졌고 그 선택을 할 것인가 안 할 것인가만 남아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어지는 요한 복음 15, 9-17에는 머무르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를 다음과 같이 들려준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한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안에 머물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우리가 선택할 것은 오직 그분이 하신 사랑만을 선택할 수 있는 이유에 대해 바오로 사도는 로마서 8장35-39에서 다음과 같이 선택할 수 없는 선택, 선택할 수 있는 선택에 대해 전한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그 어떤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여준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있는 것은 하늘과 땅, 그 어디에도 없다는 전언이야말로 인간이 지닐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의 근거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결국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라고 할 수 있다.

 

니체는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인간을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인간은 아직 고정되지 않은 동물, 과도기 존재, 즉 짐승과 초인 사이에 쳐진 밧줄로서 심연위에 결려 있는 존재다. 인간은 짐승과 초인 사이에 매어진 하나의 밧줄이다. 하나의 심연 위에 걸쳐진 밧줄이기에 위험천만한 돌아봄이며, 위험천만한 도상에 있는 것이며, 위험천만한 전율이며, 정지함이다. 인간에게서 위대한 것은 그가 다리일 뿐 목표가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에게서 사랑받을 수 있는 것은 그가 과도이며, 쇠퇴한다는 점이다.”

 

인간에 대한 규정을 파스칼은 『팡세』에서

 

“인간은 이 세상에서 연약한 하나의 갈대이다. 그러나 생각하는 갈대가 인간이다. 인간은 파멸시키기 위해서 우주가 무장할 필요는 없다. 인간을 살해하기 위해서 한 입김의 바람이나 물 한방울이면 충분하다. 하지만 인간을 우주가 파멸시킨다 하더라도 인간은 우주가 그를 파멸하는 것보다 더 고상하다. 그는 자신이 즉는다는 것을 알며, 그는 그를 능가하는 우월성을 알고 있다. 그러나 우주는 이것을 전혀 모른다. 인간은 내가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갈대이기 때문이다.”

 

이를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학대전』에서

 

“인간은 영혼이 있다. 영혼이 인간의 유일한 형상이기에 인간은 육신은 다른 것이 아니라 영혼의 세상적 자기소여성으로 나타난다. 이를 자기 자신에로의 완전한 귀환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 이유다. 자기 자신에로의 귀환을 성취시키는 이 능력은 감성에 대한 지성의 결정적인 탁월성이다.”

 

『사목헌장 21항』에서는 "인간의 수많은 질문에 대해 답하실 분은 오직 인간을 높은 사색과 탐구로 부르시는 하느님 한 분 뿐"이라고 규정한다.

 

부활5주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라고 전하는 요한15,1-8은 우리가 그분 안에 머물고 그분이 우리 안에 머물러야지만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사실에서 B(Birth)와 D(Death) 사이에는 C(Choice선택)가 있다(사르트르)는 명제는 B(Birth)와 D(Death) 사이에는 ‘M(Mevnw머무름)’이 있다는 것으로 치환해 바라볼 수 있다. 그리고 그 머무름은 이미 선택된 것을 선택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는 인간을 무엇으로 규정할 것인가를 바라볼 수 있을 때, 머무르다는 이 선택의 의미는 보다 분명해 진다고 할 수 있다.

 

 

 

글을 마치며,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 “나는 참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2 나에게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쳐 내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모두 깨끗이 손질하시어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 3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한 말로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 4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6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잘린 가지처럼 밖에 던져져 말라 버린다. 그러면 사람들이 그런 가지들을 모아 불에 던져 태워 버린다. 7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 너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청하여라.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8 너희가 많은 열매를 맺고 내 제자가 되면, 그것으로 내 아버지께서 영광스럽게 되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