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피캇(Magnificat)

평화의 면적, 두려움에 반비례하고, 고요에 정비례한다

나뭇잎숨결 2024. 4. 5. 09:44

 

 

 

사진작가 분이가 마니산에서 탱큐!

 

 

 

평화의 면적, 두려움에 반비례하고, 고요에 정비례한다

-부활2주, “여드레 뒤에 예수님께서 오셨다.”를 중심으로

 

 

 

 

1. 고재종, 「고요를 시청하다」

 

 

 

초록으로 쓸어놓은 마당을 낳은 고요는/새암가에 뭉실뭉실 수국 송이로 부푼다//날아갈 것 같은 감나무를 누르고 앉은 동박새가/딱 한 번 울어서 넓히는 고요의 면적,/감잎들은 유정무정을 죄다 토설하고 있다//작년에 담가둔 송순주 한 잔에 생각나는 건 / 이런 정오, 멸치국수를 말아 소반에 내놓던/어머니의 소박한 고요/윤기 나게 닦은 마루에 꼿꼿이 앉아 들던/아버지의 묵묵한 고요,//초록의 군림이 점점 더해지는/마당, 담장의 덩굴장미가 내쏘는 향기는/고요의 심장을 붉은 진동으로 물들인다//사랑은 갔어도 가락은 남아, 그 몇 절을 안주 삼고/삼베올만치나 무수한 고요를 둘러치고 앉은/고금(孤衾)의 시골집 마루,//아무것도 새어나게 하지 않을 것 같은 고요가/초록 바람에 반짝반짝 누설해놓은 오월의/날 비린내 나서 더 은밀한 연주를 듣는다

 

고재종의 「고요를 시청하다」는 화자가 고금(孤衾)의 시골집 마루,에서 만난 고요에 대한 직관이다. 화자에게 고요는 어디에나 존재한다. 마당에도, 새암가에도, 감나무에 앉은 동박새에게서도, 덩굴장미에게서도, 무수한 고요가 둘러쳐져 있다. 멸치국수를 소반에 내놓던 어머니에게도 꼿꼿이 앉아 들던 아버지에게도 고요는 무겁고 때론 한없이 가볍게, 정갈하게 은밀한 연주처럼 지천에 널려있다.

 

고재종의 「고요를 시청하다」에서 고요가 어디에나 존재한다는 것은 사실 고요가 화자의 내면에 존재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외부가 고요한 것이 아니라 화자의 내면이 고요하기 때문에 천지의 고요를 읽을 수 있었으리라. 따라서 고요는 미학적이고 정서적으로 고양된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평화의 면적이 곧 고요의 면적이라고 할 수 있다.

 

 

 

 

 

 

 

 

 

 

 

 

 

 

 

2. 고요는 무념무상의 상태인 용서에서 체험된다

 

용서는 모든 격정의 상태가 가라앉은 내적고요, 초시간의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용서 다음에 평화를 느끼는 것은 그런 맥락에서 세상 인과의 언어로써는 설명할 길이 없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용서의 완성(2), 사유의 공백 속에서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받는 것!]에서 인용했던 부분을 다시 읽어 본다.

 

생전에 데리다가 ‘용서’라는 주제로 진행했던 세미나에서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는 것이 용서’라는 아포리아에서 ‘용서’라는 행위가 내포한 다른 여러 아포리아를 하나하나 짚어나간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해 나치가 저지른 반인류 범죄, 제국주의 일본이 식민지를 상대로 벌인 반인류 범죄에 관해 용서를 빌거나 용서를 빌지 않는 행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왜 그것을 용서하거나 용서할 수 없는지, 용서에 관제에 주제에 칸트, 장켈레비치, 코이레, 아렌트 등 철학자의 주장을 소개하며 용서의 역설적 담론을 인류에게 선사했다.

 

자크 데리다는 자신을 무신론자라고 생각한 사람이다. 그럼에도 ‘용서’라는 아포리아는 신이 없으면 성립될 수 없는 차원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데리다는 ‘용서(pardon)'라는 단어의 음절(par-don)에 포함된 의미를 성찰하면서 용서 행위에 포함된 논리적 난점들에 주목한다. 예를 들어 '용서를 빌지 않는 자를 용서해야 하느냐'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에서부터 '피해자 각자가 아니라 집단을 상대로 용서를 구할 수 있느냐, 그럴 권리가 있느냐, 그것이 과연 용서의 의미에 부합하느냐'는 문제, 피해 당사자가 아니라 피해자를 대신해서 제삼자나 국가가 가해자를 용서할 권리가 있느냐는 문제, 유대인 학살처럼 저지른 죄가 너무 커서 ‘인간의 한계’를 넘었을 때에도 용서가 가능하냐는 문제에 이르기까지 철학적·윤리적으로 대답하기 까다로운 주제로 확대해 성찰을 전개한 바 있다.

 

 

여러 아포리아 중 하나만 예를 들어봅시다. 충분히 줄 수 없게, 충분히 환대할 수 없게, 제가 주는 현재와 제가 베푸는 이 대접에 제가 충분히 현존할 수 없게 하는 아포리아 때문에, 저는 주지 않아서, 결코 충분히 주지 않아서, 충분히 베풀거나 대접하지 않아서 항상 용서받을 일이 있을 것 같습니다. 아니, 저는 이것을 확신합니다. 기증에 관한 한 우리는 무언가 늘 잘못했고, 늘 용서받을 일이 있습니다. 주지 않아서, 충분히 주지 않아서 용서받을 일이 있다면, 우리는 또한 이 일로 자신이 유죄라고 느낄 수 있고 그래서 오히려 우리는 뭔가를 줘서 용서를 구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겁니다. 우리가 준 것 때문에 구하는 용서, 그리고 이것은 어쩌면 내가 준 것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라고 상대에게 호소하는 일, 다시 말해 일종의 독, 무기, 주권의 확인, 더 나아가 강력한 힘의 실력 행사 같은 일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순간, 아포리아는 더 심각해집니다.

 

유일한 잘못이나 범죄에 그 피해 당사자가 아니라 타인에게 사죄하거나 피해자가 아닌 다른 사람이 그 가해자를 용서할 수 있을까요? 바로 여기에 우리를 쉴 틈 없이 둘러쌀 수많은 아포리아 중 첫 번째 아포리아가 있습니다. 어찌 보면 바로잡아 회복할 수도 없고 되돌릴 수도 없는 악행을 저지른 자와 그 악행의 피해자가 된 여성이나 남성이 중재 없이 ‘일대일’로 대면한다는 조건에서만 용서를 빌거나 용서해줄 수 있고, 피해 당사자만이 용서의 요청을 들어주거나 거절할 수 있을 듯합니다. 용서의 장에서 오로지 두 당사자만이 마주해야 한다는 여건은 이름 없는 피해자 전체, 때로는 이미 죽은 익명의 피해자들이나 그들의 대표, 자손 혹은 생존자들에게 어떤 공동체, 교회, 기관, 조합의 이름으로 집단적으로 구하는 용서의 의미와 진정성을 박탈하는 듯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용서의 두 당사자 간 절대적 고립성, 더 나아가 거의 용서의 비밀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법적 권리, 징벌과 형벌, 공공기관, 사법적 전략의 지배에서 용서의 경험을 기이한 경험으로 만듭니다.

 

용서! 그런데 그들이 우리에게 용서를 빈 적이 있던가? 단지, 죄인의 낙담과 비탄만이 용서에 의미와 존재 이유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죄지은 자가 우적우적 잘 먹고, 잘 살고, ‘경제적 기적’으로 부유해진다면 용서는 한낱 불길한 농담일 뿐이다. 아니다, 용서는 돼지들과 그 돼지들의 암컷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용서는 죽음의 수용소에서 죽었다. 만약 피고가 우리에게 동정심을 일으킨다면… 엄밀한 의미의 분별력이 납득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공포가 그 동정심이 발생되는 그 순간부터 그것을 억누를 것이다.

 

실제로 속죄 불가능으로 용서할 수 없는 것이 있는 지점, 이로부터 장켈레비치가 용서는 불가능해지고 용서의 역사도 끝났다고 결론짓는 지점, 여기서 우리는 매우 역설적으로 용서의 가능성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런 지점이 그 기원이 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용서가 끝난 것으로 보이는 곳, 불가능해 보이는 곳, 바로 용서의 역사와 용서의 역사로서의 역사가 마지막에 다다른 바로 그 지점에서 오히려 용서가 시작되는 것은 아닐까요?

 

용서라는 것이 있다면, 용서할 수 없는 것, 속죄할 수 없는 것만을 용서해야 하고, 따라서 할 수 없는 일만을 할 수 있다는 아포리아, 형식적으로 비어 있고 말라 있지만 집요하게 까다로워서 빠져나올 수 없는 아포리아를 ‘한 번 이상’ 검토해야 합니다. 용서할 수 있는 것, 사소한 것, 해명할 수 있는 것, 누구나 쉽게 용서할 수 있는 것을 용서하는 것은 용서가 아닙니다.

 

사법 개념인 ‘시효 없음’이 용서의 영역에 속하지도 않고 용서할 수 없음을 의미하지도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저는 회복 불가능이 용서 불가능을 의미한다고 믿지 않습니다. ‘용서할 수 없음’과 ‘시효 없음’을 구분하기 위해, 그리고 비슷하면서도 다른 개념 ‘회복 불가능, 소멸 불가능, 만회 불가능, 역전 불가능, 망각 불가능, 변경 불가능, 속죄 불가능’을 구별하기 위해 되도록 세밀하고 엄격하게 주의를 기울여 접근해야 합니다. 이 개념들을 서로 분리하는 결정적인 차이들에도 이 개념들은 어떤 부정성, ‘~아니다’와 어떤 때는 ‘할 수 없음’이나 ‘해서는 안 됨’을 뜻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두 가지를 모두 의미하는 불가능, 즉 ‘할 수 없으므로 불가능하다’와 ‘해서는 안 되기에 불가능하다’를 의미하는 불가능의 ‘아니다’를 공유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경우에 어떤 과거를 변경해도 안 되거나 그럴 수도 없습니다. 되돌려도 안 되고 되돌릴 수도 없습니다. 과거는 과거고, 사건은 일어났으며, 잘못은 저질러졌고, 이 과거의 기억은 환원 불가능한 것, 어떻게 해볼 수 없는 것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것이 원칙적으로 과거와 관련 없는 기증과 다른 점 중 하나입니다.

 

실제로 특별 사면권보다 더 부당한 것도 없습니다. 칸트는 여기서 매우 중대한 경고를 덧붙입니다. 즉 주권자의 특별 사면권에 내적 한계를 설정합니다. 주권자는 자신을 상대로 저지르지 않은 범죄의 사면에 동의할 권리가 없고, ‘어떤 경우에도 이런 권리를 가져서는 안 되며’, 국민이 서로를 상대로 저지른 범죄 ―따라서 주권자에게는 제삼자인 국민 사이에서 저질러진 범죄에 대해 특별 사면권을 가질 수 없습니다. 이런 처벌 면제는 피해 당사자에게 가장 부당한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용서 문제로 칸트의 사유를 확장하면, 이 중대한 논의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최소한의 가르침은 일반적으로 용서는 피해자만이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용서의 문제는 제삼자에 ‘의해’, 제삼자를 ‘위해’가 아니라, 반드시 가해자와 피해자 두 당사자 간에 혹은 둘의 대면에서 이뤄져야 합니다. 이것이 가능할까요? 둘만이 대면하는 일, 이런 단독 대면이 가능할까요? 어떤 피해자가 근본적으로 용서의 장에 부재하는 경우, 예를 들어 그가 죽었다면, 우리는 이 피해자의 이름으로 절대 용서해서는 안 됩니다. 피해자들이 죽은 범죄를 두고 살아 있는 자들, 생존자들에게 용서를 구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그 가해자들도 죽었습니다. 얼마 전부터 공적인 분야에서 늘어나는 모든 광경, 공식적 참회나 사죄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그에 대한 하나의 접근이 바로 여기에 있을 겁니다.

 

 

유일한 잘못이나 범죄에 그 피해 당사자가 아니라 타인에게 사죄하거나 피해자가 아닌 다른 사람이 그 가해자를 용서할 수 있을까? 바로 여기에 우리를 쉴 틈 없이 둘러쌀 수많은 아포리아 중 첫 번째 아포리아가 있다. 어찌 보면 바로잡아 회복할 수도 없고 되돌릴 수도 없는 악행을 저지른 자와 그 악행의 피해자가 된 여성이나 남성이 중재 없이 ‘일대일’로 대면한다는 조건에서만 용서를 빌거나 용서해줄 수 있고, 피해 당사자만이 용서의 요청을 들어주거나 거절할 수 있을 듯하다. 용서의 장에서 오로지 두 당사자만이 마주해야 한다는 여건은 이름 없는 피해자 전체, 때로는 이미 죽은 익명의 피해자들이나 그들의 대표, 자손 혹은 생존자들에게 어떤 공동체, 교회, 기관, 조합의 이름으로 집단적으로 구하는 용서의 의미와 진정성을 박탈하는 뜻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용서의 두 당사자 간 절대적 고립성, 더 나아가 거의 용서의 비밀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법적 권리, 징벌과 형벌, 공공기관, 사법적 전략의 지배에서 용서의 경험을 기이한 경험으로 만든다.

 

 

 

실제로 속죄 불가능으로 용서할 수 없는 것이 있는 지점, 용서는 불가능해지고 용서의 역사도 끝났다고 결론짓는 지점, 여기서 우리는 매우 역설적으로 용서의 가능성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런 지점이 그 기원이 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용서가 끝난 것으로 보이는 곳, 불가능해 보이는 곳, 바로 용서의 역사와 용서의 역사로서의 역사가 마지막에 다다른 바로 그 지점에서 오히려 용서가 시작되는 것은 아닐까? 용서라는 것이 있다면, 용서할 수 없는 것, 속죄할 수 없는 것만을 용서해야 하고, 따라서 할 수 없는 일만을 할 수 있다는 아포리아, 형식적으로 비어 있고 말라 있지만 집요하게 까다로워서 빠져나올 수 없는 아포리아를 ‘한 번 이상’ 검토해야 한다. 용서할 수 있는 것, 사소한 것, 해명할 수 있는 것, 누구나 쉽게 용서할 수 있는 것을 용서하는 것은 용서가 아니다. 이것이 데리다가 용서를 선물로 규정하는 이유다.

 

 

데리다는 용서를 “교환도 조건도 없는 은혜로운 선물”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신에 의해 주어진, 또는 신적인 규정에 의해 계시된 선물이다. 이러한 순수한 용서, 은혜로운 선물이 인간의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조건 속에 들어 올 때 용서의 혁명을 일어난다. 그 순간 사태가 변화되고 효과가 발휘된다. 데리다에게 용서는 항상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제공하는 순간적이고, 기적적인 ‘선물’과도 같은 사건이다. 이러한 새로움 때문에 용서는 화해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데, 화해는 용서를 새롭게 계속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종결시키는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정한 용서는 무조건적이다. 그에 따르면 용서는 변명할 수도 없고 용서할 수도 없는 자를 용서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용서는 용서를 위한 어떤 이유를 찾아서도 안 된다. 이런 용서는 적용에 있어서 보편성을 원칙으로 하고, 그러므로 어떤 불가능성이나 한계를 알지 못한다.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용서는 ‘광기어린’ 용서에 가깝다. 데리다에게 용서는 불가능한 것이다. 논리와 상식이 들어맞지 않는 역설을 발생시키는 것이 용서이다. 일단 우리들에게는 용서 불가능한 것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역설적으로 그렇기 때문에 용서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무슨 말인가? 만일 용서할 만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진정한 용서의 개념이 작용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들이 흔히 정말 용서해야 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도무지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는 것이다.

 

 

 

 

 

 

예수의 상처를 확인하는 토마스

1250년, 채색 삽화, 쾨니리흐 도서관, 브뤼셀, 벨기에

 

 

 

 

3.<여드레 뒤에 예수님께서 오셨다.> 요한 20,19-31

 

 

 

19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20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 21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22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 24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 았다. 25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토마스는 그들에게,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 26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토마스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말씀하셨다. 27 그러고 나서 토마스에게 이르셨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28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의 주님저의 하느님!” 29 그러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30 예수님께서는 이 책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많은 표징도 제자들 앞에서 일으키셨다. 31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 20,19-31에는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는 인사가 세 번 나온다. 죽음에서 부활하신 분의 첫일성이 평화의 인사라는 것은 살아 있는 사람들끼리 전하는 유대인들의 인사법과는 다른 차원의 상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죽음을 극복하고 자신이 영원한 생명에 합류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상태가 바로 평화의 상태일 것이기 때문이다. 평화는 예수님 부활의 선물이고 인간의 관습적인 인사법을 넘는 본질적인 인간의 어떤 존재 상태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면, 그 또한 그 평화는 준다고 받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님도 아울러 알 수 있다.

 

사실 그런 맥락에서 평화는 인간의 언어적 차원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많은 부분 우리가 진리의 영역이라고 칭하는 부분들은 언어적 차원을 넘어서 있다고 할 수 있다. 언어적 차원에 있는 것들은 모두 어떤 칠정의 정서를 동반한다. 평화는 칠정(희노애락애오욕)의 정서적 차원으로 접근할 수 있는 은총이 아니라 존재의 어떤 상태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평화에서 맛보는 기쁨 역시 격정적인 환호가 아니라 모든 존재의 심연을 떠받치는 무념무상에 가까운 내적 고요에 이른 상태라고 할 수 있다.

 

“부활2주일 복음은 매우 중요한 신학적 내용들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평화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 서시며”라는 표현과 함께 세 번(완전함을 상징)되풀이함으로써 이 평화는 예수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실 때에만 주어짐을 강조합니다. 둘째는 새 창조입니다. 셋째는 상처입니다. 넷째는 1인칭 고백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비입니다."(미리내 성모 성심 수녀회,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여드레 뒤에 예수님께서 오셨다.> 라고 전하는 요한 20,19-31은 창세기 2,7과 연결하여 창조론과 구원론이 하나로 맞물려 있는 축복임을 평화를 통해 전한다.

 

복음사가는 <두려움-평화-상처-평화-파견-성령-용서-평화-상처-믿음-영생>이라는 연쇄적인 키워드를 통해 부활의 축복, 자비주일의 궁극적인 의미는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임을 전한다. 그것을 믿는 것이 영생에 이르는 길음을 역설한 것이다. 우리는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이 평정심이 아닌 평화의 상태로 타인에게 평화를 전할 수 있는 존재의 거듭남임을 알고 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가 무려 세 번이나 반복된다는 것에서 부활의 완성은 평화에서 그 정점에 이른다. 그만큼 평화가 파견의 조건이자, 용서의 조건이자, 재창조의 조건임을 명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는 인사는 참 쉬운 축복의 인사이자 가장 어려운 인사라고 할 수 있다. 제일 쉬운 인사라는 것은 온누리에 부활하신 그분이 계시다면 평화 역시 온누리에 가득할 것이기 때문이고, 평화가 가장 어렵다는 것은 아무리 평화가 온누리에 가득해도 그 평화를 받는 그릇이 없다면 받을 수 없는 축복일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아느냐 불을 지르러 왔다"는 것에서 평화를 누리기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알 수 있다. 평화는 이 세상의 오욕칠정이 잠잠해진 상태에서만 체험되는 부활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영면하신 분들의 평화를 비는 것은 그분들이 삶에서 지고왔던 태워야 할 것들에 해당하는 모든 비실재들을 죽음의 강을 건너면서 모두 태웠기를 바라는 것이다.

 

따라서 평화는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내면 깊숙이 이미 본성 안에 자리잡은 축복의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하느님에 속한 것은 모든 것에 해당하듯, 그 평화는 파견의 선물이기에 확장을 그 목적으로 한다고 할 수 있다. 파견-확장이라는 말 안에는 하느님이 창조한 그 모든 피조물과 <하나>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그렇기에 하늘과 땅 그 어느 것 하나라도 분리된 상태로는 평화-파견이라는 축복을 받아누리기가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가 평화를 갈망하는 것 같지만 실은 우리 자신이 평화의 장애를 초래하는 것은 아닌지 하는 성찰을 해야하며 평화의 장애가 되는 상태를 내려놓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바라보게 된다. 부활의 선물을 고백적 차원인 언어적으로 받아들일 것인지, 신앙적으로 내재화한 것인지를 성찰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부활2주의 은총의 그릇이라는 점이다. 신앙은 언제나 우리의 취향을 저격한다. 우리와 취향이 비슷한 이들과는 평화 그렇지 않은 이들이게는 니 맘대로 살아라, 라는 식의 카테고리로는 부활의 선물로 주어진 평화를 알 길도 없고 살길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평화는 천국의 상태를 우리가 이 지상의 순례 여정에서 미리 맛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평화를 갈망하면서 평화를 가로막는 우리 자신의 어떤 상태들에 대해 성찰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런 맥락에서 19-20절에 나오는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는 인사에서 평화와 기쁨과 상처(십자가)의 관계를 먼저 성찰해 볼 수 있겠다.

 

 

(1)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20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19-20)

 

상처의 치유는 우리가 십자가를 어떻게 질 것인가를 다시금 상기시킨다. 우리가 십자가를 질 때, 상처를 입게 되는 세 가지 끌어당김의 법칙에서 멀어질 것을 요구한 것이라고 하겠다. 먼저, 죄책감의 매력이다. 사랑은 결코 죄책감을 보지 않는다. 죄책감에 끌렸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행위에 방점을 찍었다는 것이다. 나라는 약함에 방점을 찍어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는 눈을 멀게 하는 것이 바로 죄챔감이다. 그로인해 연약한 자신 속에 무거운 돌을 매단채 창조의 미완성인 자기 심연으로 침몰하게 이끄는 것이 바로 죄책감이다.

 

여기서 유다와 베드로의 눈물을 생각해 볼 수 있겠다. 두 사람은 모두 예수를 배신하고 울었으나 한 사람은 그 눈물을 극복했고 한 사람은 죄책감을 견디지 못해 자신을 스스로 벌했다. 베드로는 자신의 행위를 넘어 그분의 사랑을 보았다면, 유다는 자신의 행위를 결코 넘을 수 없었다. 믿음의 여정은 약하고 약한 누구에게나 있는 ‘가시’, 즉 약한 자신을 수없이 넘어 부활한 그리스도가 승리한 죽음의 괴정에 동참하는 것이다. 바오로 사도는 그 유명한 가시를 통해 우리의 약함을 넘어서라고 요구한다. 자기자신만 보면 절망하지 않을 수 없다. 믿음은 제자들처럼 그런 자신을 수없이 넘어서는 것이다. 희망없이 희망한다는 바오로의 표현은 사실 자신을 클로즈업헤 보면 희망이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부활한 그분을 보면 희망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두려워한다는 것은 자신의 힘을 믿는 것이다.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시간들이 그분의 사랑에 의해 유지되었음을 바라본다면, 자신의 약함에 통한의논물을 흘릴지언정 생의 끈을 놓치는 않는다. 우리에게 주어진 생은 그렇게 준엄한 것이다. 

 

“너는 내 은총을 넉넉히 받았다.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리스도의 힘이 나에게 머물 수 있도록 나의 약점을 자랑하렵니다(2코린토12, 9-10)

 

 그리스도의 자비가 아니라 자기 약함에 방점을 찍는 죄책감의 끌어당김을 끊는 것은 다른 말로 고통의 매력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고통을 싫어하는 것 같지만 실은 고통을 포기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고통은 자기연민과 타자에 대한 보복과 분노를 합리화시키기 때문이다. 이 심리적 기재는 육체를 목적(주인)으로 섬긴다는 자기고백이 내포되어 있다. 육체는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다. 평화나 죄책감은 마음으로 얻게 되는 어떤 생태다. 몸이 줄 수 없는 것을 몸에게 요구할 때 우리는 생노병사 이상의 고통을 자신에게 경험하게 만든다. 육체를 통해 쾌락을 추구하면서 고통을 피하기란 불가피하다. 자신을 육체와 동일시하는 것은 고통을 초대하는 것이자 고통이 주는 매력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에게 자주 위에서 오는 것을 추구하라고 권고한다. 저 위의 것을 추구하라는 것은 우리의 시선이 육체를 떠날 때 가능하다. 이것은 몸과마음과영혼의 질서를 추구하는 일이다. 자신을 육체에 국한시키는 한 고통은 불가피한다. 고통을 느낄 때 그것은 언제나 정서적 물질적으로 경험한다는 것이 그를 말해준다, 고독과 고통의 물질성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육체가 아니라 육신을 지닌 영혼이다. 자신을 영으로 인식하는 자만이 영원한 생명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자명하다. 육체는 그 영을 알 수 있게 하는 소통의 매개체일 뿐이다. 몸이 삶의 중심이 될 수 없다는 것이 고통의 매력에서 자신을 해방시키는 길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몸이 우리의 중심에서 벗어날 때, 숱한 상처를 극복하는 것이며 우리는 그런 흔적의 존재론을 산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진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죽음의 매력에 자신을 넘겨주지 않는 선택이자 결정에 해당한다. 공동체의 실존을 나눠지는 것이 십자가라면, 우리에게 죽음은 다른 이름이 된다. 육체는 소멸의 과정을 겪을지언정 우리의 영혼은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에 부활을 믿는 이들은 영원히 산다. 그 누구도 스스로 죽음을 택하지 않는 이상 죽을 수 없다. 죽음처럼 보이는 것은 사실 죽음에 대한 매력이라고 할 수 있다. 죽음은 그림자다. 살아있는 이들에게 그림자는 생명에서 멀어지라고 속삭이는 소리에 자신을 내준 것이다. 성령의 목적을 받아들일 때, 육체적으로는 죽어가면서도 영원한 생명을 선택할 수 있는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제자들이 부활한 예수님을 만나 십자가의 상처를 보고도 상처에 방점을 찍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 전체를 볼 수 있었던 것이 바로 평화의 제1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에서 우리 삶의 중심이 그분이 될 때 우리는 그분이 주신 부활의 선물인 그 평화를 비로소 살 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의 다음 단계는 파견이자 용서의 삶을 살 수 있는 은총이라고 할 수 있다. 첫단계의 평화가 자신과 그리스도와의 종적인 관계 정립이 초점이라면 두 번째 평화의 단계는 타자와 나는 어떤 관계인가, 횡적인 관계를 정립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평화는 애주애인의 다른 이름이라고 부를 수 있다.

 

(2)21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22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21-23)

 

평화와 파견의 관계, 성령과 용서의 관계는 부활의 선물인 평화와 타자와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해야 받을 수 있는 축복인가를 전제한다고 할 수 있다. 복음사가는 22절에서 그들에게 죄를 용서해 줄 수 있는 권한을 주셨다는 것은 사람을 살리는 권한을 주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을 새롭게 살리는 일에는 언제나 용서가 내재하고 그것이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라고 창세기와 구원신앙이 실은 하나라는 것을 전한 것이나 다름없다. 부활의 경험은, 평화의 경험은, 다시 쓰는 창세기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용서하기 어려운 타자를 용서할때 그와 용서의 힘을 나누는 것이다. 

 

부활은 예수님에게 우리에게도 천지가개벽에 해당하는 대변혁의 사건에 해당한다. 위에서 살펴본, 죄책감의 매력, 고통의 매력, 죽음의 매력은 사실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이 그 바탕에 깔려있다고 할 수 있다.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을 우리를 총체적인 분리로 이끈다. 하느님에 대한 분리는 타자와의 분리와 밀접한 관계를 내재하고 있다. 제자들에게 용서의 권한을 주셨다는 것은, 타자의 허상을 완전히 용서함으로써 그 분리가 극복될 수 있음을 전제하는 것이다. 타자와의 분리의 관계에서는 평화를 알 수 없고 알 수 없기에 살 수 있다. 평화롭게 산다는 것은 애주애인을 하며 사는 삶이기에 평화는 심리적인 장애를 극복할 것을 우리에게 요구한다. 

 

그것이 평화를 갈망하면서 평화를 제한하는 자신을 성찰해 보아야할 이유다. 우리가 생존의 그 어떤 두려움을 직시할 때, 그 두려움의 출처는 사실 타자와 얽혀있는 실존의 두려움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내 노년, 내 건강, 내 고독, 내 경제적 상태 등으로 두려움은 표출되지만 그 두려움은 실은 하느님의 존재방식, <있음>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있음을 비실재화하는 데서 오는 두려움의 상태에서는 그 어떤 평화도 누릴 수 없다. 그 두려움을 극복하는 길로 복음사가는 평화-성령- 용서라는 트라이앵글을 권한다. 용서는 오직 성령의 선물임을 알 수 있다. 타자의 인격, 그 허상이 실재가 아님을 바라보지 않는다면 그 누구도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을 정직하게 직시할 수 없다. 타자에 대한 완전한 용서안에서 우리는 평화가 진정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용서가 완성된 그 누구도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을 가질 수 없다. 자비와 연민으로 타자를 바라보지 않는 한 우리는 타자를 온전하게 볼 수 없고 타자를 볼 수 없는 한 하느님은 언제나 두려운 하느님이 된다.

 

타자를 그가 지닌 본래의 그, 본성으로 바라보지 않고 사회적 인격으로 그를 국한시키는 한 타자를 온전하게 볼 수 없다. 복음사가는 제자들이 유대인이라는 타자가 두려워 다락방에 문을 잠그고 있다고 서술한다. 타자를 온전히 용서하고 대하기 전에는 타자와 두려움을 공유한다고 할 수 있다. 타자를 두려워하기에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제자들만 유대인들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 유대인들 역시 예수를 두려워했다. 그 대상을 죽여야 할 정도로 예수를 두려워했다. 우리는 우리가 용서하지 않는 자들을 실은 우리 두려움의 투사라는 것을 알고 있다. 두려워하는 자는 두려움을 유발하는 자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게 두려움을 곁에 두고는 사랑을 볼 수 없다. 타자를 두려워한다는 것은 자신에게서 자신을 보는 것을 다치지 않게 하려고 투사를 하는 것임도 잠재적으로 인식하고 있다. 정직하게 자신을 바라본다면 그 두려움은 우리 자신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것을 고백하게 된다. 그것을 넘는 길이 바로 용서의 완성이다. 그런 맥락에서 우리의 평화가 타자의 손에 달려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다. 용서할 것이 남아있는 한 평화의 장애는 우리 자신이라는 것이다. 용서의 관문을 넘지 않고는 결코 평화를 알 수 없다.

 

용서란 말은 그리스어로 ‘놓아버리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상대방에 대한 분노로 자신을 어찌하지 못하고 과거에만 머물러 앞으로 나가지 못하는 건 자신을 위한 일이 아니기에. 용서는 이타적인 행위 속에 자기애를 실현하는 길이라고 할 수 있다. 데리다가 간파한 대로 용서는 가해자의 사과 또는 피해보상과 상관없이 피해자의 심중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가해자의 사과를 받았다고 용서가 쉬워지는 것도 아니다. 모든 용서는 타인에 대한 것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가해자에게 그런 큰 피해를 입도록 방치한 스스로까지 용서할 수 있어야만 진정한 용서가 일어날 수 있다는 데 초점이 놓여 있다. 데리다는 용서를 “교환도 조건도 없는 은혜로운 선물”이라고 말한 그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신에 의해 주어진, 또는 신적인 규정에 의해 계시된 선물이 용서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순수한 용서, 은혜로운 선물이 인간의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조건 속에 들어 올 때, 용서는 혁명의 기폭제가 된다. 그 순간 사태가 변화되고 용서의 효과가 발휘된다. 그것이 평화다. 용서는 항상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제공하는 순간적이고, 기적적인 ‘선물’과도 같은 사건이다. 이러한 새로움 때문에 용서는 화해를 목적으로 하지 않기에, 성령을 통한 용서는 화해조차 구하지 않는다. 화해는 보너스다. 화해는 용서를 새롭게 계속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종결시키는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정한 용서는 그냥 무조건적이다. 용서는 변명할 수도 없고 용서할 수도 없는 자를 용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용서는 용서를 위한 어떤 이유를 찾아서도 안 된다. 이런 용서는 적용에 있어서 보편성을 원칙으로 하고, 그러므로 어떤 불가능성이나 한계를 알지 못한다.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용서는 ‘광기어린’ 용서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인간에게 용서는 불가능한 것이다. 성령의 도움이 없으면 가능하지 않다. 논리와 상식이 들어맞지 않는 역설을 발생시키는 것이 용서이기 때문이다. 일단 우리들에게는 용서 불가능한 것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만일 용서할 만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진정한 용서의 개념이 작용되지 않는 부분이라는 것을 바라본다. 우리들이 흔히 정말 용서해야 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도무지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용서는 평화의 마지막 관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성령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부분이다. 왜 교회에 용서의 권한이 주어졌는지? 그런 맥락에서 용서는 평화에 이르는 열쇠라고 할 수 있겠다.

 

평화가 상처의 극복, 용서의 완성을 통해 영원한 생명의 길에 이르렀다는 것은 우리의 믿음이 보는 차원이 아니라 표징조차 넘어선 상태임을 말해준다.

 

 

 

 

 

 

이제 토마스를 통해 보여준 믿음의 궁극적인 지점이 평화와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생각해볼 차례다. 토마스를 흔히 불신앙의 전형으로 바라보는 것은 신앙을 기계적으로 재단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 토마스는 바로 오늘 우리 자신의 신앙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21세기형 사도에 해당한다. 

 

(3)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토마스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말씀하셨다. 27 그러고 나서 토마스에게 이르셨다.(26-27)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28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의 주님저의 하느님!” 29 그러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부활을 체험한 사람만 부활을 전할 수 있다. 부활을 체험한 사람은 원하는 삶이 아니라 주어진 삶을 살 수 있다. 그런데 주어진 삶이 결국 자신이 원하는 삶이었음을 알게 되는 순간이 있다. 주어진 삶(하느님의 뜻)이 결국 원하는 삶이 되었을 때, 그 상태는 이분법을 넘어선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선이고 저것은 악이고, 이것은 아름다움이고 저것은 추함이고, 이 사람은 내 편이고 저 사람은 다른 편, 등등 세상을 이분법으로 바라볼 때, 평화는 그 모든 이분법을 훌쩍 넘어선다. 이분법을 넘어섰다는 것은 평화는 선물로 주어진 것이라는 점을 바라보는 것이고 그것이 믿음의 도약임을 알게 된다.

 

평화와 믿음의 관계, 믿음과 영생의 관계를 설정하는-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에서,

 

먼저, 성경에 따르면, 노아의 홍수 때 40일 동안 밤낮으로 비가 내렸습니다(창세 7,12). 또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인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까지 40년 동안 광야에서 살았습니다(민수 14,33). 엘리야는 밤낮으로 40일을 걸어 하느님의 산 호렙에 이르렀고(1열왕 19,8),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기 전에 밤낮으로 40일 동안 단식하며 지내셨습니다(마르 1,13). 여덟(8) : 여덟은 구원, 새로운 출발, 재창조를 의미합니다. 노아의 홍수 때 살아남아 구원받은 사람은 8명이라고 합니다(1베드 3,20). 아브라함의 아들 이사악이 할례를 받은 것이 태어난 지 여드레 만이었고(창세 21,4), 예수님이 할례를 받으신 것도 태어난 후 여드레 만이었습니다(루카 2,21).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도 주간 첫째 날, 달리 말하면 제8일 새벽이었습니다. 이렇게 8은 완전함을 의미합니다. 

 

이어서 복음사가는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라고 부활의 어떤 상태를 시공간을 초월한 상태로 그분의 주도적인 선물임을 전한다. 그렇기에 부활의 축복은 예외없이 토마스로 상징되는 인류에게 전해질 것이다. 제자들이 부활의 목격자라면 토마스는 사도들을 통해 전해진 믿음의 후예, 오늘 우리의 부활체험을 상징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복음사가는 토마스를 통해 증거와 표징을 요구하던 믿음의 단계에서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는 토마스의 고백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를 다시금 재정리하고 있다. 토마스처럼 부활한 예수 안에서 하느님을 보게되었음을 고백함으로써 주님이며 하느님이신 예수그리스도의 정체는 분명해 진다(5,18/8,56-59/10,31-31)

 

또한 부활체험은 보편안에서의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나의> 하느님 체험이 된다. 1인칭 고백이 갖는 함의는 믿음의 보편적-특수성의 시사한 것이다. 토마스의 고백은 예수에 대한 다양한 고백의 절정에 이르고 복음사가가 전하고자 하는 그리스도론이 보다 분명해 진 지점이다. 여기서 <너는 보고야 믿느냐?>라는 말은 지난주에 살펴본 <보다>의 연장선에서 부활한 예수를 체험한 일체의 경험까지도 뛰어넘는 것임을 시사한다. 이는 오늘 우리의 믿음, 보지 않고도 믿는 이들은 복되다는 확정은 표징의 확장, 말씀으로만 믿음을 가지된 믿음의 후예인 오늘 우리에 대한 축복을 선언이라고 할 수 있다.

 

요한 1서에서는 말씀만으로 믿음의 대열에 합류한 이들에 대해 <세상을 이겼다>라고 표현한다. 요한복음에서 <내가 세상을 이겼다> 라고 전한 그 연장선이다. 표징도 없이 말씀으로만 믿는다는 것 자체가 세상을 이긴 것이라고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는 참으로 복음사가의 놀라운 통찰이라고 할 수 있다. 믿는 것은 세상을 이기는 것이다. 

 

나는 혼자가 아니다.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soo가 세상을 이겼다(요한17,25-33)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모두 세상을 이기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이긴 그 승리는 바로 우리 믿음의 승리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까? 그분께서 바로 물과 피를 통하여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물만이 아니라 물과 피로써 오신 것입니다. 이것을 증언하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곧 진리이십니다.(요한 1서 5,1-6)

 

<평화가 너희와 함께 있기를!>의 세 번의 축복은 30절과 31절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수렴된다. 평화의 완성은 영원한 생명이다. 제자들 앞에서 행한 예수의 지상활동을 표징이라는 말로 복음사가를 집약시킨 바 있다. 그 표징은 생전과 생후를 총망라한 것으로 확장된다. 이제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하나의 표징이 된다. 이것이 파견의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이 책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많은 '표징'도 제자들 앞에서 일으키셨다.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30-31)

 

그 표징은 1차적으로 세상에서 행한 예수의 행적(2장에서 12장에 걸쳐)과 그 결론에 해당하는 12장 37절에서 <그토록 많은 표징을 일으켰지만, 그들은 그분을 믿지 않았다>로 수렴된다. 여기서 표징은 이중적 의미로 사용된다. 표징은 믿음을 키워주는 긍정적인 의미이자 표징을 요구하는 것을 불신의 표현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20장에 이르러 표징의 의미는 원래의 표징과는 달리 예수의 자기 계시로 모아진다. 부활에 이르러 믿음과 불신의 이중적 의미를 넘어서 표징의 포괄적 차원이 계시된 것이다. 예수의 지상적인 기적만이 아니라 부활사건 역시 표징의 범주에 넣음으로서 표징은 믿음을 가지고 있는 공동체 안에서 영원으로 전수된다.

 

기적이라는 시간의 차원에 머물렀던 표징이 영원한 생명이 되는 문을 연 것이다. 이제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믿는 이들이 그분의 표징이 되는 것이다. 그를 믿는 이들에 의해 표징의 확장은 시간 속에서 진행되나 시간을 넘어서는 영원이 되는 것이다. 이 세상이 온전히 하느님의 나라가 될 때까지 그 표징은 계속되기 때문이다. 이는 그리스론적인 고백의 절정으로 부활하신 예수는 그리스도요 하느님의 아들로서 예수의 초인격(위격)을 담보하고, 또한 그를 믿는 이들의 인격으로 하나가 된다. 예수와 인격적으로 분리된 상태에서 그분의 평화를 살수는 없다. 따라서, 부활을 경험한  인격은 사회적으로 형성된 불완전한 인격과 구분되는 것으로 본성과 자아가 하나가 되는 영원한 생명이라고 할 수 있다. 복음사가가 궁극적으로 전하고자 하는 바는, 예수와의 위격과 인격의 결속관계에서 얻은 평화와 생명만이 영원한 생명이 된다고 전하는 그리스도론의 실체라고 할 수 있다.

 

[평화의 면적, 두려움에 반비례하고, 고요에 정비례한다]

-부활2주, “여드레 뒤에 예수님께서 오셨다.”를 중심으로

 

평화의 상태, 영원한 생명의 상태는 우리가 표징을 봄으로써 뿐 아니라 표징을 뛰어넘음으로써 믿는 이들이 그리스도의 표징이 되는 사건이다. 사실 개인적으로 부활의 체험은 언제나 죽음 체험 다음이었다. 그 의시죽음의 체험 다음에, 나를 봐라, 바로 내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표징이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봄으로써가 아니라 전인격으로 들음으로써 가능하다. 평화는 시간 안에 사는 우리가 시간을 뛰어넘을 수 있음을 알려주는 바로미터라고 할 수 있다. 평화는 말씀을 듣는 은총의 면적이자, 우리의 소리가 잠잠해진 고요의 면적이라고 할 수 있다. 평화는 칠정의 정서를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신망애 삼덕이 하나가 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분이 주는 평화를 한번이라도, 찰라라도 경험한 이라면 이런 기도를 올리게 된다.

 

평화의 주님! 오직 원하는 것은 부활의 선물인 주님의 평화입니다. 평화를 가로막는 제 연약한 목소리가 침묵하게 하소서! 저로 하여금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고 고백을 할 수 있도록 당신의 강력한 음성에 귀기울이게 하소서! 그리하여 용서와 자비의 메신저, 평화의 메신저,  영원한 생명의 메신저가 되게 하소서!

 

 

글을 마치며,

 

19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20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 21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22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 24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 았다. 25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토마스는 그들에게,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 26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토마스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말씀하셨다. 27 그러고 나서 토마스에게 이르셨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28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의 주님저의 하느님!” 29 그러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30 예수님께서는 이 책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많은 표징도 제자들 앞에서 일으키셨다. 31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