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사 홍매화
사랑은 죽음‘처럼’ 강하고,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
-주님부활대축일, “예수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
1. 이상, 「절벽」
꽃이보이지않는다. 꽃이향기롭다. 향기가만발하다. 나는거기묘혈을 판다. 묘혈도보이지않는다. 보이지않는묘혈속에나는들어가앉는다. 나는눕는다. 또꽃이향기롭다. 꽃은보이지않는다. 향기가 만개한다. 나는잊어버리고 재차거기에묘혈을판다. 묘혈은보이지않는다. 보이지않는묘혈로나는들어가꽃을깜빡잊어버리고들어간다.나는정말눕는다.아아, 꽃이또형기롭다. 보이지않는꽃이-보이지도않는꽃이
이상의 「절벽」은 꽃으로 상징되는 생과 사랑의 본능과 묘혈로 상징되는 죽음과 파괴의 본능 사이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화자를 절벽에 서 있는 사람으로 비유한다.
꽃도 보이지 않고 묘혈도 보이지 않지만 보이지 않는 그 현상이 보이는 현실보다 더 실재처럼 화자에게는 느껴진다. 그런데 아니러니 하게도 보이지 않는 꽃의 향기를 맡는 순간 묘혈이라는 죽음을 떠올리고 묘혈에 누워있는 순간 꽃을 떠올린다. 죽으면서 살아야겠다고 몸부림하고 주어진 삶을 감당할 수 없어 다시 죽을 수밖에 없다고 절망한다.
이상의 「절벽」은 아아, 꽃이또형기롭다. 보이지않는꽃이-보이지도않는꽃이, 라고 마지막 행으로 수렴되면서 결국 화자는 그래도 나는 살고 싶다고 뭉크처럼 부르짖는 것이다. 이상의 시에서 절벽은 무엇인가? 살고 싶지만 살 수 있는 동인이 없고, 살고 싶지 않지만 동시에 살아보고 싶다는 이중의 욕망일 것이다.
타나토스(Thanatus)
2. 사랑이 죽음보다 위대해지려면 단순한 생명보다 더 커져야 한다.(요셉 라칭거추기경)
왜, 살고 싶다는 욕망은 사랑에서 체험되지 않고 언제나 죽음 속에서 체험되는 것인가? 왜 진정한 사랑은 죽음과 늘 한 쌍인가? 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문제 중에 문제이다. 플라톤 이래 많은 학자들은 사랑은 언제나 타나토스의 충동과 함께 존재한다고 바라본다. 죽음의 형제중에는 아름다움만 있는 것이 아니라 늙음, 고통, 질병, 운명. 기만, 비난, 분쟁, 전쟁등이 존재한다고 본 것이다.
플라톤은 『향연』에서 타나토스의 충동을 에로스에서 그 기원을 찾는다. 인간은 처음부터 필리아나 아가페에 경도되지 않는다. 사랑은 가난의 신과 풍요의 신 사이에 태어났고 자기구원적인 사랑을 만나기전에는 늘 결핍에 처한다고 보았다. 사랑은 풍요의 아버지와 가난의 어머니를 두었다는 것이다.
에로스는 포로스의 아들이지만 페니아의 아들이기도 합니다. 에로스는 언제나 가난하며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듯 부드럽고 아름답기는커녕 사실은 딱딱하고 거칠고 맨발이고 집도 없습니다. 거적도 없이 늘 맨땅에서 자며, 대문밖이나 길바닥에서 노숙합니다. 아프로디테의 생일날 태어난 에로스의 본성을 타고났기 때문에 그에게는 늘 결핍이 따라다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는 아버지를 닮아 아름다운 것, 좋은 것들을 얻는 방편이 되는데 용감하고 대담하고 영민하고 영리한 사냥꾼이고 언제나 새로운 계책을 꾸미고 임기웅변에 강하고 지식을 열망하고 재간이 좋고 평생동안 지혜를 사랑한 영리한 마술사이고 약초다루기와 웅변에도 능합니다.
플라톤의 연장선에서 프로이트는 『쾌락원칙을 넘어서』에서 삶의 본능과 죽음의 본능에 처해진 인간의 아포리아를 주목한다.
인간의 내면에는 자기 보존의 본능과 성적 본능이 합쳐진 삶의 본능과 공격적이고 파괴적인 본능으로 구성된 죽음의 본능이 공존한다. 타나토스는 생명을 지닌 생명체가 생명이 없는 무생물로 돌아가려는 본능으로 죽음을 지향하고 파괴하려는 본능을 지닌다. 인간의 몸에는 삶과 죽음이 동시에 공존하고 있다.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이런 타나토스의 충동을 철학자들은 인간의 힘으로는 돌파할 수 없는 난관, 해결할 수 없는 모순, 아포리아aporia라고 부른다. 인간은 자기의 분열을 알고 있지만, 자기분열의 난관을 극복할 수 없기에 인간은 자기구원적 사랑이 필연적으로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이 자기구원적 사랑을 마땅한 사랑, 동등한 사랑, 보편적 사랑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교부문헌총서-아우구스띠누스』에서 이를 이치에 맞는 사랑, 혹은 동등한 사랑이라고 일컫는다.
인간은 그가 알고 있는 것에서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사랑하는 것에 의해서 평가되어야 한다. 오로지 사랑만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다. 선한 사랑은 그를 선하게 만들고 악한 사랑은 그를 악하게 만든다.(...)사물들을 온전히 보는 사람은 이롭고 거룩하게 사는 사람들이다. 그는 또한 이치에 맞는 사랑을 품은 사랑으로써 사랑하지 말아야 할 것을 사랑하지 않고, 사랑해야 할 것을 사랑하는 일 없고 덜 사랑할 것을 더 사랑하지 않고 더 사랑해야 할 것과 덜 사랑할 것을 동등하게 사랑하지 않는다. 동등하게 사랑할 것을 덜 사랑하거나 더 사랑하는 일 없다. 모든 죄인은 죄인으로서는 사랑해서는 안되고 사랑으로서는 하느님 때문에 사랑해야 하며 하느님은 당신 자신 때문에 사랑해야 한다.
요한네쓰 로쯔는 『사랑의 세단계』에서 마땅한 사랑, 이치에 맞는 사랑, 구원받은 사랑이라 부를 수 있는 사랑이란 사랑의 삼각형구조로 통합시킨 사랑이라고 바라본다. 인간은 누구나 육체-본능적인 사랑인 에로스, 인격-교환적인 사랑인 필리아, 신적-은총적 사랑인 아가페를 본성적으로 지니고 있다. 인격적인 파탄을 본성의 파탄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누구든 그가 신을 믿든 믿지 않든 인간은 이 세 가지 사랑의 양식으로 정향되어 있음에 주목한 것이다. 그 맥락에서 에로스-필리아- 아가페 그 어떤 사랑도 희생되지 않는 사랑이 마땅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사랑의 삼각형 구조는 오로지 사랑의 본질이 추구하는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는 충만에 이를 수 있음에 주목한 것이다. 에로스, 필리아, 아가페는 그 어떤 사랑도 소외시키지 않고 하나의 사랑 안으로 삼투할 때만이 인간은 사랑을 하면서 기형적인, 자기분열적인 결핍을 느끼지 않는다고 본 것이다.
한사람이 충만한 사랑을 살면 살수록 그는 사랑이 ‘절대적 줌’이면서 동시에 ‘절대적 받음’이며 ‘절대적 제어’이자 동시에 ‘절대적 자유’이다. 그리스도로부터 십자가에 처해지는 ‘절대적 곤궁’이자 동시에 부활의 ‘절대적 기쁨’이다.
요한네쓰로쯔가 본 사랑의 삼각형, 그 궁극적인 수렴점인 절대적 곤궁이자 절대적 기쁨이 되는 사랑은 부활에 이른 사랑으로, 아가서 8, 6의 예언처럼 <사랑은 죽음과 같이 강하다>에 이른 그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죽음처럼 강하고 죽음보다 강한 사랑이, 사랑의 본질이자 사랑의 역설이라고 한다면 그 상태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체험되는가?
요셉 라칭거추기경는 『사도신경강해』에서 다음과 같이 불사불멸의 사랑을 전한다.(너무나 많은 글에서 인용했고, 개인적으로 부활의 사랑, 하면 라칭거추기경의 통찰에 압도당하고 그리고 그 사랑을 온전히 할 수 없음에 그만큼 절망하기도 한다.)
사랑은 무한을 갈구하고 불멸을 갈구한다. 사랑은 말하자면 그 자체가 무한에 대한 외침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이 외침이 성취될 수 없고 사랑이 무한을 갈구하면서도 줄 수 없음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사랑은 영원을 갈구하면서도 실은 사계에 잠겨있고 사계의 고독 및 파괴력에 갇혀있다. 이런 입장에서만 부활이 비로소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부활은 그 자체로 죽음에 대한 사랑의 우세인 것이다. 아울러 이 사랑은 어떠한 사랑만이 불사불멸의 이룰 수 있는가를 가리켜 준다. 즉 내가 사망한 후에도 남 안에서 지속되는 존재가 그것이다. 사랑의 가치를 생명의 가치위에 두는 사람, 즉 사랑을 위해서는 삶을 사랑에 종속시킬 용의가 있는 사람의 경우에만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고 더 클 수 있다.
위의 사랑의 담론 혹은 통찰은 ‘사랑은 죽음‘처럼’ 강하고,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는 것을 공통적으로 전제하고 있다. 사랑의 위대한 통찰에는 왜 하필 죽음이 소환되는가? 사랑이 죽음보다 위대해지려면 단순한 생명보다 더 커져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모든 인류는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이런 모순된 충동을 인간의 힘으로는 돌파할 수 없는 난관이자, 해결할 수 없는 모순으로 마주한다. 고백하는 줄도 모르고 삶으로 고백한다. 죽음과 생명이 동행하는 생의 절벽, 아포리아aporia 앞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어떤 따뜻함, 남마리안나 수녀님께서, 감사합니다!
3.<예수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 요한 20,1-9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 2 그래서 그 여자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3 베드로와 다른 제자는 밖으로 나와 무덤으로 갔다. 4 두 사람이 함께 달렸는데,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 Ⓑ5 그는 몸을 굽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기는 하였지만,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6 시몬 베드로가 뒤따라와서 무덤으로 들어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7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은 아마포와 함께 놓여 있지 않고, 따로 한곳에 개켜져 있었다. Ⓓ8 그제야 무덤에 먼저 다다른 다른 제자도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 9 사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주님부활대축일, <예수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라고 전하는 요한 20,1-9은 모든 복음에 공통적으로 전하는 신앙의 중심이자, 예수님 강생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다. 믿는 이들에게 뿐 아니라, 믿지 않은 이들에게까지 모두 부활의 기쁨이라는 메시지를 전한 것이다. 여기에, 실존의 상황은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는 데 무엇을 부활의 기쁨이라고 바라보아야 하는가. 이 질문 속에는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면 우리 역시 부활해야 한다는 전제가 담겨있다. 네 부분으로 육신을 부활을 믿으며를 생각해 본다.
(1)예수님의 부활은 부할하신 예수님을 목격한 증인들에 휘한 것이 아니라 놀라운 그분과의 반가운 해후가 (1코린토15,3-8/마르코16,1-10/마태오28,1-10/루카24,1-36/요한20, 1-10) 있었을 뿐이다. 예수임의 부활사화는 라자로나 회당장 야이로의 딸의 소생사화(요한11, 1-44/마르코5,35-43/루카7,11-17)와는 달리 부활경위에 대한 언급이 없다. 이는 실존의 상황속에 매몰된 이들에게 이 부활을 설명할 언어가 없다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부활신앙이 없다면 우리가 전한 모든 것이 헛된 것이라고 전하는 바오로 사도의 그 유명한 1코린토15장에서
Ⓔ만일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는 다시 살아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는 다시 살아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1코린토15,16) 썩을 몸으로 묻히지만 썩지 않은 몸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천한 것으로 묻히지만 영광스런 몸으로 다시 살아납니다.(1코린토15, 42-43)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셔서 죽었다가 부활한 첫 사람이 되었습니다(1코린토15,20)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전한 것도 헛된 것이요, 여러분의 믿음도 헛된 것입니다.(1코린토15, 14)
여기서 바오로 사도의 부활신학을 가만히 묵상해 보면, 바오로의 부활신앙 역시 당시 유대사회의 믿음의 반영, 세상 종말에 사람들이 부활하리라는 묵시문학적 부활신앙 그 연장선에서 부활을 언급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서 바오로는 다마스커스 체험을 자신의 불사조같은 선교신앙이 깊어지면서 온전한 부활신앙으로 녹여낸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경위가 아니라 부활을 목격한 제자들의 증언에 의해, 그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을 변화시겼고, 그 급격한 변화의 여정에서 그리스도 교회가 인류의 역사 안에 출현하게 되었음을 바라볼 수 있다. 부활을 목격한 제자들은 없었지만 부활신앙이 그들을 변화시켰다는 사실이야말로 참으로 부활신학과 신앙에서는 중요한 핵심포인트가 된다는 것이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체험을 하지 않았다면 십자가에 처형당하고 죽으신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로 선포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에서 이를 찾을 수 있다. 예수님의 부활신앙이 그리스도신앙의 실존적 토대라는 점은 우리에게 믿음으로만 이 부활신앙이 중요하다는 것을 시사한다.
(2)육신의 부활을 믿으며 영원한 삶을 믿나이다, 라는 사도신경의 고백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는 인간은 자신이 무엇인가를 규정하고 있다는 점을 아울러 바라볼 수 있다. 인간의 존재 구성 요소인 영원한 생명으로부터 인간의 육신을 배제시키지 않았다는 것은 부활신앙은 바리사이파가 주장하는 그 부활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목격자가 없는 부활신앙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이 세계내존재인 인간의 존재양식을 궁극적이며, 명시적으로 규정했다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빈무덤을 향해 달려가는 사도요한과 베드로
토마스 아퀴나스가 『신학대전』에서 영혼이 인간의 유일한 형상이라고 규정하는 그것은 교회의 교의가 된다.
Ⓕ영혼은 인간의 유일한 형상이다. 인간의 육신은 다른 것이 아니라 영혼의 세상적 자기소여성으로 나타나고 있다. 육신이나 영혼이 아니라 단일적이고 전인적인 존재로서의 인간이다. 인간은 육신과 영혼 속에서 한 인간인 것이다. 그로인해 인간은 끊임없이 자기자신에로의 완전한 귀환으로 정향되어 있다.
Ⓖ인간은 자신이 육신 이상임을 증명하는 동시에 자신 안에서 영적 불멸성을 긍정할 때 단지 인간이 생물학적이고 물리적 내지 사회적 조건의 소산으로 덧없는 환각에 속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깊은 진리 자체를 파악하는 것이다.(사목헌장14항)
Ⓗ육신은 영혼 없이 존재할 수 없고 영혼은 육신과의 결합속에서만 실존할 수 있다. 그래서 인간이 육신과 영혼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기 보다 그가 육신이며 영혼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욱 타당하다.(반 퍼슨, 『몸.영혼. 정신』)
(3) 그렇다면 육신의 부활과 육체의 관계는 무엇인가. 인간은 육신과 영혼의 전일체로 구성된 존재이다, 즉 인간이 육신과 영혼이 인간 안에서 분리된 두 개의 존재자가 아니고 하나의 인간 존재를 구성한다는 것은 죽음은 육신과 영혼으로 구별되는 두개의 존재원리가 결합되어 있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육신의 부활이 생물학적인 몸으로 묻혀 부패하여 소멸된 신체의 분자들의 다시 재구성한다는 의미에서 바라보면 안 될 것이다. 676년의 토레도 공의회, 1251년 라테라노공의회를 거쳐, 육신부활은 죽음과 부활이 선후적 차원이 아니라 상이한 본질적 차이에서 이해되어야 함을 명시하고 있다. 생물학적인 종말로서의 죽음은 유한한 인간에게 불가피하게 닥치는 자연적 사건이지만 육신의 부활은 부활하게 될 육신의 동일성과 비동일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음에 주목한 것이다.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한 것에서 이를 바라볼 수 있다.
Ⓘ아담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모두 죽은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살게 될 것입니다(1코린토15, 20-22)
이 초자연적 생명은 하느님의 사랑으로 베풀어지는 구원의 선물이다. 인간의 행위로 얻어지는 실적의 결과가 아니다. 어떤 인간도 자신을 죽음에서 구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존재의 총체적 변형으로서의 부활은 인간이 열망하는 것이 이 세계 안에서 실현된 인격적 이상향으로 이해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인간의 총체적 변화로서의 지향점이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 안에서 영원한 생명으로의 변형가능성을 보게 된다. 이 부활은 인간들이 십자가의 죽음에 참여하는 정도로 부활희망의 보편적 구원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가 부활의 신앙을 가질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이타적 희망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만큼 변화될 수 있다는 것은, 내가 변화되었다면 그누구라도 변화될 수 있다는 희망을 지니는 것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본받으면 새 사람이 됩니다. 낡은 것이 사라지고 새 것이 나타났습니다(2코린토5, 17/갈아디아서3, 27)
이는 우리가 새 하늘 새 땅을 경험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나는 새 하늘 새 땅을 보았습니다 이전의 하늘과 이전의 땅은 사라지고 바다도 없어졌습니다(...)하느님께서는 친히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하느님이 되셔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주실 것입니다. (요한묵시록21. 1-4)
새하늘 새 땅을 본다는 것은 죽은 다음이 아니라 이미 지금 여기서 시작된 선물로 주어진 은총이다.
Ⓛ여기서 부활의 체험은 테초의 창조처럼 존재하지 않은 것을 존재에로 부르시는 하느님의 새로운 창조사업으로 생각될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 우리는 하느님께서 인간과 세계의 창조자이면서 또한 완성자이기도 하다는 것을 참으로 바라고 믿을 수 있다. 육신의 부활을 통한 인류의 완성이란 “차안세계로부터 공간적으로 분리되어 있는 피안세계로 귀환이 아니라, 인류의 세계가 질적으로 새로운 충만에 이르게 됨을 의미한다.(심상태, 「”육신의 부활을 믿으며“에 대한 교의신학적 고찰」)
(4)따라서 이 부활체험은 육체적 체험이 아니고 영적인 체험이라는 점에서 결과적으로 빈무덤체험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의 부재가 곧 편재라고 바라보아야 한다는 점이다. 부재가 현존이이자 편재라는 것을 <보다>라는 동사 -블레포, 쎄오레오, 호라오를 통해 인식과 믿음의 어떤 단계를 보여준 것이다.
Ⓜ마리아막달레나는 무덤의 돌이 치워진 것을 보고 요한은 무덤 안에 아마포가 있는 것을 봅니다. 조금 늦게 도착한 베드로는 무덤 안에 들어가 아마포와 수건이 놓여 있는 상태는 유심히 살펴봅니다. 베드로와 뒤이어 무덤에 들어간 요한은 이 상황이 무엇을 의미하는 가를 보고 믿습니다. 보여주는 것을 그대로 믿는 것은 은총입니다. 빈무덤이라는 예수님의 부재는 사실 어디에나 두루 계시는 편재의 시작임을 믿는 것, 빈무덤이야말로 부활의 가장 분명하고도 명백한 증거가 되는 현장임을 고백하는 것, 이것이 바로 부활을 통하여 우리가 가지게 될 새로운 봄(시각)입니다(미리내성모성심수녀회,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부재가 현존이라는 것, 빈무덤 체험은 온누리에 주천주가 계시다는 사실을,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어떤 상황에서도 나와 함께 계시는 그분을 바라보는 것이다. 요한 20,1-9에 나타나는 “보다”라는 동사를 통해 단계적으로 이 '바라 봄'의 단계를 보여준다.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돌이 옮겨진 것을 본 것과, 요한이 무덤에 들어가지 않고 보았을 때 사용된 동사는 “브레포우βλεπω”라고 할 수 있다(요20:1, 5) 이 단어는 대상을 그냥 표면적으로 볼 때 사용되는 말이다. 막달레나가 무덤 문이 열려진 것을 본 것이나, 요한이 처음 무덤의 상태를 본 것은 그냥 겉으로 드러난 현상만을 표면적으로 목격한 것이다. 요한보다 뒤늦게 달려온 베드로가 보았다고 하였을 때 사용된 동사는 “세오레오θεωρεω”(요20:6)로 그 의미는 “지성이나 이성을 통하여 보다”, “자세히 관찰하다”라는 뜻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파생된 영어가 이론을 의미하는 theory이다. 이것은 베드로가 예수님의 수의가 놓인 상태를 이성을 통하여 자세히 보았다고 할 수 있다. 무덤의 수의가 잘 정리되어 있다는 것은 누군가 시신을 몰래 훔쳐갔거나 운구해가지 않았음을 증명한다는 것이다. 많은 신학자들이 부활의 증거로 '정리된 수의'를 주목한 이유라고 할 수 있다. 다시 요한이 무덤 속의 상태를 보았을 때 사용된 동사는 “호라오ὸραω”(요20:8)로 이 뜻은 “이해한다”, “깨닫는다”라는 뜻이다. 우리의 관심을 끄는 대목은 바로 두 번째와 세 번째 사용된 <보다>라는 동사일 것이다.
Ⓝ‘아무도 하느님을 본적이 없다.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 하느님이신 그분께서 알려주셨다(요한1,18)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마5:8). 너희는 내가 한 말로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요한15, 3)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와서 ‘보라’(1,39).그들은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다(...)그러자 그들은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루카24,13-32)
‘보다’ 라고 번역된 그리스말 성경에 ‘호라오’(ὁράω )는 깨달아 안다는 의미에서 ‘눈으로 보다, 마음으로 보다, 인지하다, 알다, 경험하다, 주의하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헬라어에는 ‘보다’ 라는 뜻을 가진 단어는 ‘옵타노마이’(ὀπτάνομαι)는 ‘그냥 응시하다, 보여지다.’ 라는 말로 주로 사용된다. ‘에이도’(εἶδω)는 단지 기계적이고 수동적이거나 우연한 응시를 표현하는 ‘겉을 보고 깨닫다, 지식을 갖다, 확신하다, 발견하다, 보다, 알다, 확신하다’ 라는 말이다. 이 단어에서 바로 ‘우상’이라는 ‘에이돌론’(εἴδωλο)이 유래되었다. 이와 같이 눈에 보이는 형태, 외모를 보고 확신해 버리면 그것이 우상이 된다. ‘데아오마이’(θεάομαι)는 좀 더 진지하게 본다는 의미에서 ‘가까이서 보다, 지각하다, 주목하다, 보고 배우다, 방문하다’ 라는 뜻을 가진 말이다. ‘블레포’(βλέπω)는 크게 뜬 눈으로, 현저한 어느 것을 향한 것처럼 자발적인 관찰이라는 의미에서 ‘경험으로 알다, 마음의 눈으로 보다, 이해하다, 생각하다’ 라는 뜻을 가진 단어이다. 이렇게 ‘보다’ 라는 뜻을 가진 헬라어 단어들을 정리하면, 단지 응시하는(ὀπτάνομαι)단계에서 보이는 그대로 보고 판단해 버리는(εἶδω) 단계로 좀 더 자세히 보아(θεάομαι) 경험과 마음으로 아는(βλέπω) 단계를 통하여 드디어 깨달아 알게 되는(ὁράω ) 믿음의 단계로 넘어간다. 그런 맥락에서 ‘나’ 의 말이 사라지고 그리스도의 말씀이 나의 중심이 되었을 때, 비로소 세상 끝날까지 함께 계시겠다고 하신 그리스도의 현존을 <볼 수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영안의 열림이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디아2, 20).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요3.36)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120,31)
여기서 믿는다는 것은 본다는 것이며, 본다는 것은 믿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영적으로 본다는 것은 자신이 빛임을 바라보는 것이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두 속을 걷지 아니하고 생명을 빛을 얻을 것이다.(요한8,12-13)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17,25-33)
믿는다는 것, 본다는 것은, 내가 빛이라는 사실을 안다는 것이며 이는 이 순례여정에서의 나의 유일한 역할임을 아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부활을 체험한 사람들은 누구나 이제부터 자신이 사는 것이 아니고 자신 안에서 그리스도가 산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를 조금 더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것은 우리 스스로 세상을 이기고 빛으로 사는 삶으로 우리 자신의 방향을 설정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 은총은 성령이 우리와 함께 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삶이 기적이라는 것을 바라볼 수 있는 은총이 부활체험이자, 그때, 그분의 부재가 현존임을 알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왜 부활의 사랑은 죽음‘처럼’ 강하고,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고 할 수 있을까?를 연역해 볼 수 있다.
실생활에서 우리는 수많은 관계를 맺는다. 그 수많은 어떤 관계든 예외없이 치명적인 상처들을 주고받는 시간들과 풍요로운 기쁨을 주고받는 시간들이 함께한다. 의사죽음의 상태를 체험한다고 할 수 있다. 대부분의 관계는 인상주의적으로 규정된다. 천개의 아름다운 날들과 한 개의 죽음과 같은 날들 가운데 한 개의 죽음과 같은 날들에 방점을 찍는다는 것이다. 빛보다는 어둠으로 관계를 규정하는 것은, 본성보다는 사회적 인격을 그 사람의 전부로 자리매김 하기 때문일 것이다.
안타깝게도 여기에 부할은 없다. 부활은 시간간념과 공간관념이 사라진 상태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본성적으로 완벽하고 인격적으로 불완전한 존재다. 토마스아퀴나스의 통찰처럼 본성으로든 인격으로든 완전한 자기귀환의 여정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본성도 완벽하고 인격도 완벽한 사람들과 관계의 공동체를 이루려면 사막의 은수자가 되는 수밖에 없다. 모든 성인성녀들 곁에서 평범한 일상을 나누었던 사람들이 한결같이 그 사람이 성인 성녀라면 나도 할 수 있겠다고 한 것은 바로 그런 의미를 시사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부활의 기쁨은 평화와 함께 한다. 평화가 곧 부활의 기쁨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기쁨은 용서의 완성에서 체험된다. 평화는 천국의 상태이기에 분명 하늘의 선물이다. 그런데 그 천국의 상태인 평화는 용서라는 그릇에 담긴다. 평화와 용서는 인과결과가 아니라 동반관계라고 할 수 있다.(평화와 용서의 관계는 다음주 부활2주에 보충) 용서는 예수님의 가상칠언에서의 기도처럼 죽음을 통과한 인증에 해당한다. 이 용서를 통과하지 않은 부활은 없다. 용서의 관계는 비단 타인과의 관계만이 아니라 내가 나와 맺는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용서의 완성은 나의 용서까지 포함되기 때문이다. 이상만 절벽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나라는 사람의 절벽을 수시로 경험한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주신 평화-십자가의 상처의 흔적-평화-성령-용서라는 이 연속적인 키워드는 요한 사도의 부활신학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제자들이 부활을 체험하는 과정이자 우리가 바로 현실에서 부활을 체험하는 과정이기도 하다.(요한20,19-23)
엄밀히 말해 모든 관계는 죽음의 관계이자 상처의 관계라고 할 수 있다. 부활의 체험은 수많은 용서를 통해 우리 삶 안에서 십자가가 완벽하게 만들어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용서의 완성만이 십자가의 의미를 통찰한다고 할 수 있을 정도다. 예수님의 부활은 언제나 십자가와 함께 한다. 그분을 따르는 이들에게 예수님의 체험-수난죽음부활 그 어떤 과정도 생략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만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함께하기 때문에, 그분이 내 안에서 살기 때문에 무거운 생존의 조건들을 가볍게 지는 것뿐이다. 부활의 첫 증인인 마리아 막달레나와 함께 벅찬 기쁨을 노래하자고 전하는 부활 입당송인 “그리스도 나의 희망 죽음에서 부활했네. 알렐루야, 알렐루야.”는 용서의 펠리칸이 되지 않으면 바라볼 수 없는 은총의 선물이라고 할 수 있다.
글을 마치며.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 2 그래서 그 여자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3 베드로와 다른 제자는 밖으로 나와 무덤으로 갔다. 4 두 사람이 함께 달렸는데,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 Ⓑ5 그는 몸을 굽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기는 하였지만,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6 시몬 베드로가 뒤따라와서 무덤으로 들어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7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은 아마포와 함께 놓여 있지 않고, 따로 한곳에 개켜져 있었다. Ⓓ8 그제야 무덤에 먼저 다다른 다른 제자도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 9 사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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