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생양 메커니즘,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본다(르네 지라르)
-주님수난성지주일, “정말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들이었다”를 중심으로
1. 토마스 머튼의 「침묵」 & 막스 피카르트의 『침묵』
마음이 상했지만 답변하지 않을 때, 내 마음, 내 명예에 대한 방어를 하느님께 온전히 맡길 때, 침묵은 ‘양선함’입니다.// 형제들의 탓을 드러내지 않을 때, 지난 과거를 들추지 않고 용서할 때, 판단하지 않고 마음속 깊이 용서해 줄 때, 침묵은 ‘자비’입니다.// 불평없이 고통을 당할 때, 인간의 위로를 찾지 않을 때, 서두르지 않고 씨가 천천히 싹트는 것을 기다릴 때, 침묵은 ‘인내’입니다.// 형제들이 유명해지도록 입을 다물고, 하느님의 능력의 선물이 감춰졌을 때도, 내 행동이 나쁘게 평가되더라도, 영광이 타인에게 돌려지도록 내버려 둘 때, 침묵은 ‘겸손’입니다.// 그분이 행하시도록 침 묵할 때, 주님의 현존이 있기 위해. 세상 소리의 소음을 피할 때, 침묵은 ‘신앙’입니다.// ‘왜’라고 묻지 않고 십자가를 포옹할 때, 그 침묵은 ‘흠숭’입니다.”
토마스 머튼의 「침묵」은 인간의 가장 고귀한 행위는 바로 자기 내면의 깊은 심연, 침묵을 들을 수 있을 때라고 전한다. 머튼에게 침묵은 인간 품위의 모태라고 할 수 있다. 양선함, 자비, 인내, 겸손, 신앙, 흠숭을 낳는 것은 세상의 아우성이 아니라 우리 안의 깊은 침묵, 영성이라고 전한다.
막스 피카르트는 『침묵』에서
“침묵은 결코 수동적인 것이 아니고 단순하게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니며, 침묵은 능동적인 것이고 완전한 세계이다. 침묵은 그야말로 그것이 존재한다는 사실 때문에 위대하다. 침묵은 존재한다. 고로 침묵은 위대하다.”
피카르트는 침묵을 위해 말을 희생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는 말과 침묵이 서로에게 속해있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말은 침묵과의 관련을 잃어버리면 위축되고 만다. 따라서 오늘날 은폐되어 있는 침묵의 세계는 다시 분명하게 드러내어져야 한다. 침묵을 위해서가 아니라 말을 위해서 존재한다.”
침묵은 소리의 끊김이 아니라, 소리를 끌어안고 소리를 다른 차원으로 표출하는 상태라고 전한다. 침묵은 “아직 말해지지 않은 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침묵은 가능성이고, 이미 와 있는 오늘이다. 우리 생을 추동하는 모든 힘들은 바로 자기 내면의 침묵을 들을 수 있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한 말이 힘이 없다면 그것은 침묵에서 길어올려진 말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2. 르네 지라드,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본다』
그렇다면, 우리가 인간의 품위를 결정하는 침묵의 소리를 들을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일까? 아마도 자기안의 결핍, 분리의 두려움일 것이다. 세상의 소란과 소음에 휩쓸리는 불안의 정체라고 할 수 있다. 철학자 르네 지라르는 이를 집단무의식에 가까운 희생양 메커니즘에서 찾는다.
르네 지라르의 『희생양』 표지에는 모로 누운 어린양이 그려져 있다. 양은 곧 죽을 것이다. 왜 죽어야 하는지조차 모른채 죽는다. 인간 문명사의 진정한 결정들에는 모두 희생양이 있었다. 라틴어 <결정하다>는 <희생양의 목을 자르다>에서 비롯되었다. 희생양은 동물만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힘센 자와, 힘센 가치와 힘센 논리가 한 사회를 점령할 때, 그 결정은 힘의 소리, 집단의 무의식을 결정하는 동인으로, 여기에 누워있는 어린 양은 언제나 사회적 약자를 상징한다. 울타리 안에선 살아남은 양들이 각자의 본분과 의무를 향해 풀밭으로 뛰쳐나가길 기다리고 있을 때, 울타리 밖에 선 죽은 양의 털과 껍질을 벗긴 뒤 알맞은 요리를 하는 사람들로 분주하다. 그것이 인간이 파스카라고 말하는 것들이다. 르네 지라르는 문학, 그 가운데 소설을 가장 정직한 목소리라고 칭한다.
지금부터 우리는 낭만적이라는 용어를 중재자의 존재를 결코 드러내지 않은 채, 그 존재를 반영시키는 작품들에 사용할 것이고, 중개자의 존재를 드러내는 작품들에 소설적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것이다(『낭만작 거짓과 소설적 진실』)
낭만적인 허영심이 많은 사람은 자신의 욕망이 사물의 본성 속에 이미 있다고 언제나 확신하고 싶어하거나 자신이 욕망이 평온한 주체성에서 우러나온 것, 즉 창조라고 확신하고 싶어한다. 새 대상을 보고서 욕망을 느끼게 된다는 것은 욕망이 자신에게서 나온 것과 같은 의미이며 따라서 타인들로부터 욕망을 취하게 되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이 욕망의 도그마는 현대인들이 열렬히 애착을 가지는 것으로 욕망의 자율성이라는 하나의 동일한 환상을 옹호하고 싶어 한다.
지라르는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에서 욕망의 삼각형 구조를 문회인류학적인 시선으로 분석하여, 폭력과 성스러움의 표층을 뚫고 들어가 그 토대와 기원과 뼈대가 어떻게 구성되었는지 삼각형의 욕망구조를 통해 해명한다. 그는 모든 성스러움은 그 기원에 원초적인 폭력을 내장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국가의 성립이든 종교의 기원이든 민족의 등장이든 필연적으로 그 이전의 질서와 응축된 모든 갈등이 폭발하는 계기는 집단적 폭력에 기인한다고 보고 있다. 거기에는 두려움과 분노를 담아내는 희생양이 존재한다. 그 희생양은 두 번의 죽음(사회적 인격 매장, 육체적 죽음이라는)과 한 번의 부활(사후 예찬)을 경험케 한다.
우리가 욕망 혹은 열정이라고 부르는 것은 우연히 혹은 가끔씩 모방적인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항상 모방적이다. 우리의 욕망은 언제나 타인의 욕망에서 나온다. 그런 점에서 욕망은 아주 사회적인 것이다. 한 모방자가 그의 모방들에게서 그들 공통의 욕망의 대상물을 뺏으려 할 때 그 모델은 당연히 저항하게 된다. 이리하여 욕망은 양측에서 모두 강해진다. 그 역도 마찬가지다. 이렇듯 적대자들은 점점 더 같은 것으로 만들면서 갈수록 완벽해져가는 이런 이중 모방속에서 모든 역할을 서로 바뀌고 서로 반사한다. (『그를 통해 스캔들이 온다』)
욕망하는 자가 동조자에서 결국 적으로 바뀌는 순간에 대해, 르네 지라르는 욕망의 주체와 대상에 초점을 맞췄던 기존의 욕망론이 아닌 욕망하는 나와 욕망하는 대상 그리고 그 욕망을 부채질 하는 욕망의 짝패로 이루어진 이 삼각구도에서 폭력의 기원을 찾는다. 이는 문학과 심리학을 거쳐 신화와 종교를 통해 문화인류학의 담론이 만들어지는 순간이다.
한 사회가 모방욕망의 확대 재생산으로 사회적 갈등이 고조되면 이를 없애기 위해 무고한 희생양에 대한 집단적 폭력을 가한 뒤 곧바로 엄습하는 집단죄의식을 털어내고 안정을 찾기 위한 사탄의 매커니즘을 반복해 왔다는 것을 간파한 것이다. 사탄을 밖에 있는 그 무엇으로 지적함으로써 스스로 자신의 영혼을 사탄에게 판 것을 간과한다는 것이다. 혹은 너의 오류와 나의 오류를 파장파장의 오류로 만든다는 것이다. 르네 지라르는 모방욕망과 희생문화의 이종결합을 통해, 폭력과 성스러움의 관계의 유착을 보았고, 그것을 거부한 사람을 인간 예수라고 보았다. 르네 지라르가 가톨릭으로 개종한 이유이기도 하다.
신화는 박해자에게는 죄가 없고 희생물한테 죄가 있다고 표현함으로써 자신을 완전히 뒤바꾸고 있다(...)우리는 또 신화의 주인공이나 신성한 존재들의 특징이자 이들이 희생양으로 선택되는 조건도 볼 수 있다. 또한 그리스도 ‘파르코스’의 선택되는 조건도 볼 수 있다. 이 조건으로는 불구자, 육체적 사회적 결합을 들 수 있다. 희생 제의에 나오는 모든 인간 희생양들의 특징과 이들은 일치한다. 복수를 피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인들은 거주자가 없는 사람, 불구자, 버려진 노인같이 사회적으로 가치가 없는 사람들을 주로 선택한다. 문화권이 달라도 이 특징은 같다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본다』중에서)
이런 집단 주술은 처음에는 공동체를 와해시키고, 그다음에는 만장일치의 희생양을 통해 그 공동체를 다시 재생시키는 폭력의 악순환과 스캔들 이론을 다른 말로 표현한 것이 사탄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 폭력의 주요 기원은 모방적 경쟁관계에서 비롯된다. 인간의 폭력은 우연한 결과도 아니고 공격본능이나 상극충동은 더더욱 아니다. 모방적 경쟁 관계는 심해지면 경쟁자들은 서로 상대방의 가치를 떨어뜨리는데 혈안이 된다. 경쟁자들이 서로의 소유물을 비하하고, 이어서 가치관을 공격하고, 서로의 배우자를 유혹하고, 심지어는 살인마저 마다하지 않는 지경에 이른다.
모방 욕망 때문에 공동체가 파멸의 위기에 빠지게 되면 보방경쟁으로 증폭된 폭력을 인류가 해결하는 방법은 지역과 문화의 차이를 넘어 공통된 폭력 해소방법에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폭력이 동원된다. 저 사람이 나쁜 사람이다. 모두 저 사람의 잘못이지. 라고 슬쩍 한마디만 유포하면 된다. (...) 이로써 희생제사는 공동체 전제를 대체하고 전체에게 봉헌되는 제물이 된다. 다시 말해 희생제의는 공동체 전체를 그들의 폭력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이다. 폭력의 방향을 공동체 전체로부터 돌려서 외부의 희생물에 향하게 한다. 희생제의는 도처에 퍼져 있는 분쟁의 씨앗을 희생물로 집약시킨다. 분쟁의 씨앗에서 부분적인 만족감을 주어서 방향을 딴 데로 돌려버린다.(『폭력과 성스러움』 중에서)
소수의 희생양을 만들어 그에게 사회적 분노와 폭력을 집중한다. 모든 잘못은 희생양에게 돌리고 그들을 처형함로써 사람들은 그간에 쌓인 폭력성과 스트레스를 소거한다. 희생양의 죽음을 통해 사회구성원의 파멸로부터 구원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 희생양은 보복의 힘마저 없는 사회적 약자여여 한다. 희생양은 죽어 마땅한 존재이거나 신성한 순교자로 만들어야 한다. 그렇게 그들은 죄책감마저 집단적으로 희석시킴으로써 언제나 스스로 의인이 된다.
인간들은 그가 속한 사회에 위험이 닥칠 때 특정 집단에 책임을 뒤집어 쒸우고 희생시킴으로써 갈등을 일시적으로 봉합하고 해소하고 질서를 구축하려는 욕망을 표출한다. 그 희생제물로 선택되는 집단은 늘 약자이다. 보복할 능력조차 없는 자를 희생시킴으로써 정치적 종교적 사회적 제물로 삼고 때론 신성한 제사로 둔갑시킨다. 공통적으로 가해자의 입장에서 희생양 만들기의 도그마가 작동된 것이다. 르네 지라드는 집단 무의식에 가까운 이 희생양 메커니즘을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본다”라고 말한다. 희생양 매커니즘은 예수의 죽음을 필두로, 개인이나 집단이 자신들의 문제, 실패, 고통, 불만들을 다루는 방식중의 하나로 부정적인 상황이나 책임을 다른 개인이나 집단에게 돌리는 방법이다. 역사적으로 유대인학살(20세기), 정치적 맥카시즘(20세기), 레이디경제(16세기), 마녀사냥(15~18세기)등에서 볼 수 있었다. 지금도 모든 정치, 종교, 국가 간의 전쟁은 이 집단무의식, 집단지성이라 이름 붙은 ‘거룩한 전쟁’이라는 띠를 두르고 있는 것이다.
3.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마르코14,1-15,47)
3-1
마르코14장과 15장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이다. 이 수난 사화는 네 복음서에 모두 실려 있는 역사적 사건으로, 열아홉개의 극적인 사건들이--->8개의 국면들로 모아지고--->다시 두 개의 상반된 심층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마르코복음사가는 수난사화를 통해 인간의 집단무의식과 개인의 자유의지, 그리고 신의 침묵에 대해 전한다.
Ⓐ예수님을 죽일 음모를 꾸미다(마르코14, 1-2/마태오26,1-5/루카22, 1-2/요한11, 45-53
Ⓑ어떤 여자가 예수의 머리에 향류를 붓다(마르코14,3-9/마태오26,6-13/요한12,1-8)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하다(마르코14,10-11/마태오26,14-16/루카22,3-6)
Ⓓ최후의 만찬을 준비하다(마르코14,12-16/마태오26,17-19/루카22,7-122,7-13)3)
Ⓔ제자가 배신할 것을 예고하시다(마르코, 14,17-21/마태오26,20-25/루카22,21-25/요한13,21-30)
Ⓕ성찬례를 제정하시다(마르코14,22-26/마태오26,26-30/루카22,14-20/1코린토11,23-25)
Ⓖ베드로가 당신을 모른다고 할 것을 예고하시다(마르코14,27-31/마태오26,31-35/루카22, 31-34/요한13, 36-38)
Ⓗ겟세마니에서 기도하시다(마르코14, 32-42/마태오26,36-46/루카22,39-46)
Ⓘ잡히시다(마르코14, 43-50/마태오26,47-56/루카22,47-53/요한18,1-11)
Ⓙ알몸으로 달아난 젊은이(마르코14,51-52)
Ⓚ최고의회에서 신문을 받으시다(마르코14, 53-64/마태오26,57-66/루카22,54.66-71/요한18,12-14/19-24)
Ⓛ예수님을 조롱하다(마르코14,65/마태오26,67-68/루카22,63-65)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다(마르코14, 66-72/마태오26,69-75/루카22,55-62/요한18,15-1.25-27)
Ⓝ빌라도에게 신문을 받으시다(마르코15,1-5/마태오271-2.11-14/루카23,1-5/요한18,28-38)
Ⓞ사형선고를 받으시다(마르코15,6-15/마태오2715-26/루카2313-25/요한18,38-19,16)
Ⓟ군사들이 예수님을 조롱하다(마르코15, 16-20/마태오27,27-31/요한192-3)
Ⓠ십자가에 못 박히다(마르코1521-32/마태1-2/요한11,45-57)오,27,32-44/루카23,26-43/요한19,16-27)
Ⓡ숨을 거두시다(마르코15, 33-41/루카23,44-49/요한19,28-30)
Ⓢ묻히시다(마르코15,42-47/마태오27,57-61/루카25,5-56/요한19,38-42)
이 19개의 사건은 다시 8개의 장면으로 모아진다.
⒜예수의 죽음이 준비되다(14,1-11)-⒝예수, 마지막 만찬을 나누시다(14,12-26)-⒞예수 게세마니아에서 기도하시고 체포되시다(14,27-52)-⒟예수, 최고 의회에서 심문 받으시다(14,53-72)-⒠예수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으시다(15,1-20)⒡-예수, 십자가형을 받으시다(15,21-41)-⒢예수, 숨지시다(15,33-41)-⒣예수, 무덤에 묻히시다(15,42-47)
이 8개의 장면은 예수의 죽음을 향해 다시 두 개의 힘으로 접근한다. 그것은 사랑으로 모이는 그룹과 두려움으로 흩어지는 그룹이다.
이 수난사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예수의 죽음을 획책한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 예수의 머리에 향유를 부은 어떤 여자, 예수의 열두제자, 최후의 만찬장 주인, 대사제의 시종들, 예수를 잡는 무리, 군중, 빌라도, 좌도와 우도, 군인들과 백인대장, 키레네 사람 시몬, 아리마태아 출신 요셉, 그리고 예수를 따르던 여인들 등이다.
예수께 호의적이든 적대적이든 예수의 십자가상의 수난과 죽음을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예수 자신조차도 막을 수 없었던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십자가사건을 예측했지만 막을 수 없었다. 여기서 십자가 수난사화 속에 내재한 하느님의 대침묵을 바라보아야 한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십자가형이라는 구체적 사건의 심층을 끌어가는 아버지의 침묵이 있다는 것이다. 그 침묵은 사랑을 강요하지 않는 자유의 원천이다.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끝까지 아버지의 사랑을 보여줄 아들의 사랑이 섭리의 핵심이자 침묵의 핵심일 것이기 때문이다. 십자가상의 죽음은 아들을 통해 보여준 아버지의 대침묵의 사랑이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은 표면적으로 적대자들이 제시한 예수가 공식적으로 죽어야 할 이유- 신성모독(14,64)을 들고 있으나, 그 근원적인 이유는그들의 두려움과(11,18.32)과 시기(15,10)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배반한 제자, 예루살렘 입성시 환호하던 군중들의 돌변한 태도와 유대의 지도자들 모두 교경유착의 전형들이며, 그들의 심층에는 생존에 대한 강한 두려움이 공통적으로 깊이 깔려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어둠에 복무하게 된 이유는 다음 장에서 살펴볼 분리의 두려움이자 결핍의 두려움이라고 할 수 있다.
마르코 복음 사가는 사랑과 두려움으로 나눠지는 이 결절점에 대해, 최후의 만찬 상에서 제자들 모두가 “저는 아니겠지요?”라는 질문을 하였다고 전한다. 다른 복음서에서 결과론적으로 전하는 유다의 배신을 다른 맥락에서 조명하고 있는 것이다. 신학자들이 아버지의 침묵과 연결하여 십자가사건 그 발원지에 대해 신적인 수동태라고 바라보기도 한 것과 맥락을 같이한다. 십자가 사건에서 신의 침묵은 인간이 꾸민 희생제의보다 더 큰 사랑을 담고 있다는 점이다. 인간의 행위만 보아서는 십자가사건의 진의를 결코 알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 나와 함께 음식을 먹고 있는 자가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그러자 그들은 근심하며 차례로 ”저는 아니겠지요?“라고 묻기 시작했다“(4,18)
예수에게 일어나는 일 그 어느 것 하나도 하느님의 섭리가 아닌 것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도 그 연속성의 한 국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예수를 팔아넘긴 유다는 필요악인가? 혹은 예수의 죽음을 획책한 유다종교지도자들의 고발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 제기될 수도 있다. 하느님의 섭리로 모든 사건은 진행되지만 그 사건의 방향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 책임이라는 것을 복음사가는 저는 아니겠지요?라고 제자들이 한 익명의 질문에서 찾을 수 있다고 전한다. 하느님께서는 늘 사람을 통하여 일하고 계시기 때문이고,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 역시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는 점이다. 마르코복음의 초점은 그 누구라도 유다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필아넘기다”혹은 “넘겨지다”는 것은 배반, 부인, 도망 가운데 배반을 가장 비극적인 사건으로 바라본 것이기도 하지만, 이를 신의 수동태라고 할 수 있다면, 배반, 부인, 도망은 같은 두려움의 표출이기에 그것을 요한복음은 두려움의 극대화-희생양 매커니즘으로 거짓고발과 같은 맥락으로 조명하고 있다.
최고의회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정했다(마르코14,1-2/ 마태오26,1-5/루카22,)라고 전하는 부분은 라자로의 소생사화를 보고받은 최고의회의 수석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의회를 소집하고 예수를 죽이기도 결정한 그 근원에 그들 역시 희생제의가 숨어 있었다는 것이다. 바오로 사도가 바라본 십자가의 희생제사는 하느님과 인간의 화해의 제사였다면, 유다종교지도자들이 획책한 사건은 하느님과 인간의 분리의 희생제사라고 할 수 있다. 똑같은 사건이지만 그 사건을 누구의 시선으로 바라볼 것인가? 하는 점에서 그들은 그들 자신의 현주소를 스스로 세상에 드러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십자가 죽음의 두 방향- 사랑의 발로인가? 아님 두려움의 발로인가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저 사람이 저렇게 많은 표징을 일으키고 있으니,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소? 저자를 그대로 내버려 두면 모두 그를 믿을 것이고 로마인들이 와서 이 거룩한 곳과 우리 민족을 짓밟고 말 것이오” 그해애 대사제인 가야파가 말하였다 “여러분은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온 민족이 멸망하는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을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요한11,45-53)
이런 일련의 사건들은 표면적으로 적대자들은 예수를 공식적으로 죽여야 할 이유로 죽어마땅한 신성모독죄(14,64)을 몰아가고 있으나, 그 근원적인 이유는 그들의 두려움과(11,18.32)과 시기(15,10)라고 할 수 있다. 성전을 지킨다는 미명하에 성전을 허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말씀을 전한다는 미명하에 말씀을 전하는 이들의 소임을 막은 것이라도 할 수 있다. 예수를 배반한 제자, 예루살렘 입성시 환호하던 군중들의 돌변한 태도와 유대의 지도자들 모두 교경유착의 전형이며, 교경유착의 심층에는 생존에 대한 강한 두려움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마르코복음 사가는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1,1)에서 “정말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들이었다”(15,39)로 예수의 공적여정의 결론을 맺는다. 예수님의 수난사화는 역사적 전승에 의해 네 복음서에 모두 담겨있다. 복음사가는 14, 36에서 하느님을 < 아빠! 아버지!>로 부름으로써, 그 부름 안에 하늘과 땅을 여는 <하나Oneness>의 문을 열었다고 할 수 있다.
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것을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십시오. (마르 14,36)
여기서 예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은 십자가의 수난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의해 두 갈래- 빛과 어둠으로 나눠진다. 빛의 세력이 있고 어둠의 세력이 있다. 십자가 사건은 어둠의 세력이 폭력을 수단으로 기세등등하지만 끝까지 십자가를 바라본 이들에게서 남아 있는 희미한 빛이 어떻게 승리하는가 하는 믿음과 희망의 전초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그 하나는 이름 없는 여인이 예수의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적대자들과 제자가 꾸미는 음모 사건이다. 또 다른 하나는 예수의 곁을 멀찍이 떨어져 끝까지 따라가 십자가에서 눈을 떼지 않고 지키는 여인들이요, 다른 하나는 예수께로부터 도망치는 제자들이다. 그만큼 십자가사건은 공포의 사건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하나는 진정한 파스카 새 계약의 영원한 생명의 양식을 마련하는 만찬이며, 다른 하나는 그분의 희생제물로 삼아 교경유착의 거짓 질서를 마련했다는 점이다. 전자는 빛의 세력이고 후자는 어둠의 세력이다. 십자가는 신이 누구이며 인간이 누구인가를 그렇게 계시한다.
3-2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언제나 집단의 희생물인가? 우리 안에 집단무의식에 가까운 이 희생양 메커니즘은 어떻게 작동되는가?
수난사화는 수많은 묵상과 성찰의 주제로 바라볼 수도 있겠지만 결국 두려워하는 자는 두려워하지 않는 자를 왜 죽여야 하는가? 라는 성찰의 주제를 우리에게 던졌다고 할 수 있다. 두려움을 표출하는 방식이 르네 지라르가 언급한 집단무의식에 가까운 희생양 매커니즘이라는 것에서, 우리는 이 성찰을 어떤 국가 사회의 거대담론의 흐름을 분석하는 도그마뿐 아니라, 우리 자신의 신앙을 성찰하는 내 안의 희생양은 무엇인가를 살펴보아야 한다는데 초점이 놓여 있음을 알 수 있다.
“저 사람이 저렇게 많은 표징을 일으키고 있으니,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소? 저자를 그대로 내버려 두면 그를 믿을 것이고 로마인들이 와서 이 거룩한 곳과 우리 민족을 짓밟고 말 것이오” 그 해애 대사제인 가야파가 말하였다 “여러분은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온 민족이 멸망하는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을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요한11,45-53)
두려움은 결핍이다. 그 결핍은 분리로부터 나온다. 사랑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자가 체험하는 자신은 오직 결핍이고 그 결핍은 욕망으로, 그 욕망은 끝내 채울 수 없다는 것에 직면하여 두려움으로 표출된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모른다. 두려움이 있다면 거기에는 완전한 사랑은 없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오직 완전한 사랑만이 존재한다. 두려움이 있다면 두려움을 경험하는 이는 두려움이 있는 상태를 표출한다. 두려움은 침묵을 견디지 못한다. 침묵은 자기 내부로 들어가는 통로이다. 두려움은 자기내부로 들어가는 통로를 봉쇄한다. 그것이 두려움이 던지는 함정이다. 두려움은 소란을 견딜 수 있지만 침묵은 견딜 수 없게 만든다. 말하기와 행위 이면에 자신이 누구인지 그 존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분리가 두려움을 낳는다면 이 분리의 기원은 창조자체를 무화시키는 것이다. 두려움은 오직 육체의 수준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분의 모상으로 우리가 지음 받았다면 그것은 우리의 육이 아니라 우리의 영이기 때문이다. 행위가 아니라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영의 수준에서는 두려움은 없다. 나는 아무 것도 두려워할 것이 없다, 라고 고백하는 것은 나는 내 강함을 믿지 않는다는 고백이기 때문이다. 그 고백은 나는 지금까지 하느님의 사랑으로 살아왔다는 고백이기도 하다. 사랑의 출처를 안다는 것은 두려움이 없다는 것과 동의어다. 그러기에 사랑의 출처를 모르는 두려움은 죽음이며, 없음이다. 사랑은 있음이고, 생명이고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것과 무 사이에 어떤 타협점도 없는 이유이다.
그런데, 이 죽음이라는 무의 심연을 건넌 사람이 39절에 나온 백부장이다.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들이었다”(15,39)
복음사가는 어떤 마음으로 백부장이 저런 고백을 했는지 그 어떤 부연설명도 하지 않는다. 벡부장 앞에는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의 비참한 죽음이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수난당하고 죽는 이가 하느님의 고귀한 아들이었음을 바라보는 유일한 사람은 예수의 십자가를 마주보고 있으면서 사형을 집행했던 백부장이었다는 것이 시사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방인인 그가 예수가 돌아가신 뒤 그리고 성전 휘장 둘로 찢겨진 뒤에야 인간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진실을 볼 수 있었다는 것! 그의 눈을 열어준 것이 무엇인가? 예수의 능력이 아니라 예수의 죽음이었다. 남을 위해 자신을 바치는 이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빛을 백부장은 본 것이다. 죽음은 거대한 침묵이다. 죽음으로 표현된 침묵이다. 이 세상의 소란가운데, 거대한 침묵의 소리를 그는 들은 것이다.
여기서 백부장은 그분의 죽음 앞에서 그분을 하느님의 아들로 알아보았지만 반면, 제자들은 그분의 현존 앞에서, 더욱이 모든 것을 버리고 3년 동안 그분과 동거동락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정체를 파악할 수 없었던 이유가 무엇인가? 그들이 만든 메시야상이다. 왜 그들은 자신들이 만든 메시야상에서 도망친 것인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 나와 함께 음식을 먹고 있는 자가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그러자 그들은 근심하며 차례로 ”저는 아니겠지요?“라고 묻기 시작했다“(4,18)
위에서 언급한대로 18절의 팔아넘길 것이다, 에서 넘겨지다는 동사는 대부분 수동형으로 표기된다. 실제로 예수를 넘겨주는 주체가 하느님이심을 에둘러 표현한 것이라고 많은 신학자들은 바라보고 있다, 넘겨주다는 신적 수동태는 인간의 마지막 절망인 죽음마저도 극복하기를 바라신다는 점에서, 죽음을 주도하는 것은 인간이지만, 실은 인간의 손에 넘겨졌다는 것은 인간의 시선이고, 인간이 마지막 건너야 할 강, 예수에게 주어진 것은 죽음에 넘겨졌다는 의미로 바라보아야 한다고 할 수 있다. 죽음을 건너가야할 사명이 예수에게 주어진 마지막 공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4장 18절에는 그것을 다른 맥락으로 반복하여 제시한다. 최후의 만찬상에서 어떤 복음에서도 볼 수 없는 “저는 아니겠지요?”라는 행위 당사자가 자신의 행위를 타자인 예수에게 묻는 기이한 장면이 노출된다. 이는 복음사가가 누구라도 예수를 팔아넘길 수 있었음을 시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신망애 향주삼덕을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근원이 무엇인가를 역설적으로 말해준다.
너희는 모두 떨어져나갈 것이다. 성경에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고 기록되어 있다(14, 27/ 즈카리야13,7/이사5,3.6.10) 그러나 나는 되살아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레아로 갈 것이다(14, 28절)
최후의 만찬 후 게쎄마니아로 가는 도중에 제자들의 배반을 예고한 부분으로 <걸려넘어지다>, <모두 떨어져 나갈 것이다> 라는 말은 그리스도인들 모두 그분의 현존에 머물지 않을 때, 그렇게 이 세상의 권세 앞에 두려움으로 인해 형편없이 걸려넘어질 것이기에, 그리스도의 수난은 여기서 하느님께서 주도하신 섭리임을 다시금 반복해 들려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어지는 28절에서 그리스도라는 빛이 아니고는 그 누구도 빛으로 나갈 수 없다는 것을 각인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마르코복음사가는 다른 복음에는 없는 예수를 따라갔던 어떤 청년이 사람들에게 붙잡히자 알몸으로 달아났다고 스캔들처럼 에피소드 하나를 소개한다(51-52) 그 청년이 누구인가에 대해 교부들과 학자들은 수많은 추측기사를 썼다. 사도요한이 아닐까? 야고버가 아닐까? 마르코 복음사가가 아닐까? 그 기사의 초점은 그 청년이 누군지보다 앞뒤 안가리고 도망갈 정도의 공포가 그들을 압도했다는 것의 실례라고 할 수 있다. 아마포를 매개로 예수의 무덤가에 앉아 있던 사람(16장,5-7)을 연결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그 부분은 그분에게서 도망치는 우리 안의 세 가지 희생제물에 초점이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이 주님 수난 성지 주일에 성찰 할 대주제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이 자신을 위해 바친 희생제물은 무엇인가? 그 희생제물은 누가 만들었는가?
첫번째, 자기 일생의 가장 중요하고 결정적인 순간에 잠들어 있는 무관심과 안일함이 자신이 자신을 위해 만든 희생물이라고 할 수 있다. 악을 피한다고 선을 행하지 않는 게으름의 희생물이다. 두번째는, 부지런함의 희생물이다. 세속적인 측면에서 상찬, 자기 열정의 노예가 되는 자기우상화, 전시증, 노출증, 과시욕망이다. 나 봐, 나 잘하지? 라고 너무 열정적이어서, 혹은 너무 완벽해서 타인도 신도 개입할 수 없는 고독의 물질성이다. 세 번째는 고통이 올 때 고통과 거래하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2020년 사순3주 오신부님 강론중에서). 세속적인 평정심을 그분이 준 평화라고 착각하는 착시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믿음과 희망이 실종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깨어있음, 세속에서의 열정, 그리고 고통의 거래는 따로 다니는 것이 아니라 엄밀히 말해 한 쌍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주님의 수난사화를 통해 유다인들과 제자들의 행위를 비난할 수 있지만, 정작 우리 자신의 삶이 <희생양 메커니즘,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본다(르네 지라르) 의 그 예는 아닌지? 깊은 성찰을 지나치는 것은 아닌지 물어야 한다. 즉 신망애-삼덕으로 몰입되어있는가를 물어야 한다고 할 수 있다. 침묵 중에서 그분의 음성을 듣고 있는지 말이다. 만약 향주삼덕이 유일한 삶의 지향점이라면 그것이 얼마나 큰 은총 중의 은총인가를 알고 있는가를 물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은총의 상태를 바오로 사도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너의 후손이 저렇게 많아질 것이다, 하신 말씀에 많은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을 믿었습니다(로마서 4, 18) 마지막으로 파멸되어야 하는 원수는 죽음입니다(...)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실 것입니다(1코린토15, 12-34)
우리는 생존이라는 현실 앞에만 마주한 것이 아니라 유한한 생, 죽음이라는 실존의 마지막 관문 앞에도 마주할 것이다. 마르코14장과 15장에서 보여주는 우리 주님의 수난사는 죽음 앞에 마주할 단독자인 인간의 운명이 어디로, 어떻게 수렴되는 가를 보여준다. 누가 배신했느냐? 누가 예수를 죽음으로 몰아갔느냐? 그 모든 어둠을 감싸고 있는 것은 영원한 빛이고, 생명이고, 무한한 사랑이다. “그러나 나는 되살아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레아로 갈 것이다”(28절)라는 부활의 선물이다.
그런 맥락에서, 삼위일체 하느님 사랑에 대한 신앙을 가졌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다 가진 것이고, 영원한 성공을 한 것이다. 향주삼덕을 우리 삶의 유일한 목표로 삼는 것은 빛이 우리와 함께하고 있다는 현존체험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세상의 소음이 걷힌 깊은 침묵속에서 그분의 음성을 듣는 것이고, 그분 안에 머무름(요한15장)이라고 할 수 있다.
글을 마치며,
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때는 아침 아홉 시였다. 그분의 죄명 패에는 ‘유다인들의 임금’이라고 쓰여 있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강도 둘을 십자가에 못 박았는데, 하나는 오른쪽에 다른 하나는 왼쪽에 못 박았다. 지나가는 자들이 머리를 흔들며 그분을 이렇게 모독하였다. “저런! 성전을 허물고 사흘 안에 다시 짓겠다더니. 십자가에서 내려와 너 자신이나 구해 보아라.” 수석 사제들도 이런 식으로 율법 학자들과 함께 조롱하며 서로 말하였다. “다른 이들은 구원하였으면서 자신은 구원하지 못하는군. 우리가 보고 믿게, 이스라엘의 임금 메시아는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시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도 그분께 비아냥거렸다. 33 낮 열두 시가 되자 어둠이 온 땅에 덮여 오후 세 시까지 계속되었다. 오후 세 시에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부르짖으셨다.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 이는 번역하면,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라는 뜻이다. 곁에 서 있던 자들 가운데 몇이 이 말씀을 듣고 말하였다. “저것 봐! 엘리야를 부르네.” 그러자 어떤 사람이 달려가서 해면을 신 포도주에 적신 다음, 갈대에 꽂아 예수님께 마시라고 갖다 대며 말하였다. “자, 엘리야가 와서 그를 내려 주나 봅시다.” 예수님께서는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을 거두셨다. 그때에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갈래로 찢어졌다. 그리고 예수님을 마주 보고 서 있던 백인대장이 그분께서 그렇게 숨을 거두시는 것을 보고 말하였다.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 여자들도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들 가운데에는 마리아 막달레나,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살로메가 있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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