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환원, 주는 자의 괄호침, 받는 자의 괄호침, 표징에 대한 괄호침
-사순3주,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를 중심으로
1. 이장희, 「봄은 고양이로다」 & 이성부, 「봄」
꽃가루와 같이 부드러운 고양이의 털에/고운 봄의 香氣(향기)가 어리우도다./금방울과 같이 호동그란 고양이의 눈에/미친 봄의 불길이 흐르도다/고요히 다물은 고양이의 입술에/포근한 봄 졸음이 떠돌아라/날카롭게 쭉 뻗은 고양이의 수염에/푸른 봄의 生氣(생기)가 뛰놀아라.(이장희, 「봄은 고양이로다」,1924)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어디 뻘 밭 구석이거나
썩은 물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 판 하고,/지쳐 나자빠져 있다가/다급한 사연 들고 달려간 바람이/흔들어 깨우면/눈 부비며 너는 더디게 온다./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너를 보면 눈부셔 일어나 맞이할 수가 없다./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나는 아무 것도 미리 알릴 수가 없다./가까스로 두 팔을 벌려 껴안아 보는/너,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이성부, 「봄」,1974)
이장희의 「봄은 고양이로다」와 이성부의 「봄」은 봄을 소재로 했을 뿐, 대상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극명한 차이를 드러낸다.
이장희의 「봄은 고양이로다」은 즉물시다. 즉물시는 관념이나 추상적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사물을 감각적으로 묘사하는데 치중하는 보들레드적 시작법이다. 봄의 향기를 고양이의 털에, 봄의 불길을 고양이의 눈에, 봄의 졸음을 고양이의 입술에, 봄의 생기를 고양이에 수염에 비유함으로서 봄과 고양이를 하나로 만들었다. 봄을 통해 고양이를 노래한 것인지, 고양이를 통해 봄을 노래한 것인지 얼핏 구별이 되지 않는다. 고양이의 정적인 이미지와 동적인 이미지를 주름처런 병치시키면서 봄의 감각적 표현에 주목한 시다.
반면, 이성부의 「봄」은 철저하게 관념시다. 봄은 계절의 순환과 섭리에 의해 겨울이 끝나면 당연하게, 자연스럽게 오는 당위적이고 필연적인 시간의 속성을 지닌다. 겨울은 죽음, 시련과 절망의 이미지를 봄은 생명, 부활과 소생의 이미지를 통해 봄은 반드시 도래할 희망이라는 신념을 노래한 것이다. 시인의 전기와 연결하여 흔히 봄을 민주주의와 자유로 바라보기도 한다. 즉 이성부의 봄은 겨울이 지나면 반드시 올 수밖에 없는, 어떤 아픔과 절망도 인간의 의지를 넘어서 사필귀정이 될 것이라는 신념을 노래한 것이다.
이장희의 「봄은 고양이로다」와 이성부의 「봄」은 자신이 본 것이 자신의 시학 혹은 삶을 결정한다는 것을 보여준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2. 삼중의 환원, 주는 자의 괄호침, 받는 자의 괄호침, 선물의 대상성에 대한 괄호침(장 뤽 마리옹)
자신이 본 것이 자신의 삶을 결정한다는 명제는 <선물>이라는 주제로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선물의 ‘불가능의 가능성 impossible possibility’, 데리다에게 있어 해체, 텍스트, 차연, 용서, 환대, 정의, 그리고 선물은 서로 대체가능, 호환가능한 개념이라 할 수 있다. 데리다에게 있어 ‘해체, 텍스트, 차연, 용서, 환대, 정의, 선물’도 환유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리하여 해체가 선물이 되고, 차연이 용서와 환대가 된다. 선물이 환대와 용서와 해체가 되는 것도 하나 이상하지 않다. 데리다는 후기 저작으로 갈수록 ‘무조건적인 것’들에 관심하였다. 그는 무조건적인 환대, 무조건적인 용서, 무조건적인 애도, 무조건적인 선물 등을 말하는데, 사실 이러한 개념들은 현실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불가능한 것’들이다. 데리다는 선물을 언급할 때, ‘혹시 그런 것이 있다면’, 혹은 ‘마치 가능이라도 한 것처럼 as if it were possible’ 같은 표현을 많이 쓴다. 이런 불가능성들이 후기 저작으로 갈수록 빈번하게 등장하면서 우리로 하여금 어떤 ‘불가능의 가능성’을 상상하게 만든다.
이러한 태도는 아내가 있는 사람은 아내가 없는 것처럼,에서 사도 바울이 지녔던 그것과 유사하다. 종말이 오기 전까지 우리들이 지녀야 할 삶의 태도를 바울은 ‘마치~ 아닌 것처럼(as if not)’ 사는 것이라 말한다. 현실 세계 속에서 살면서 ‘마치~아닌 것처럼 사는 것!’ 이것이야말로 법을 무력화시키는 메시아적 현실의 시작이다. 비록 제국의 논리가 판치는 세계 속에 살지만 그것이 나랑은 상관없는 것처럼 사는 것. 자본이라는 물신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지만 그것에 일방적으로 휩쓸려 가지만은 않겠다,는 각오로 사는 것. 체제와 권력이 온갖 권모술수와 모략으로 나를 감싸고 있지만 호락호락 순종하지만은 않겠다, 라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사는 것! 이 말은 자본에 의한 전 지구적 재편이 완성된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놓고 고민하는 우리들에게 많은 생각의 여지를 제공한다..
데리다가 통찰한 선물은 계산 불가능하고 예측 불가능한 무엇이다. 그리하여 선물은 현재와의 단절을 뜻하는 의미가 되었다. 그 현재란 말할 것도 없이 전 지구적 자본의 세계화로 고삐가 풀린 이곳 지구다. 여기서 주의를 요하는 것은 불가능을 가능의 반대어로 협소하게 해석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불가능은 우리가 희망은 할 수 있지만 전망은 할 수 없었던 어떤 것이 예측 너머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우리에게 불가능했던 것이 어떠한 계기와 기회에 시간이 쌓여서, 혹은 누군가의 호의와 사람들끼리의 연대로 가능성의 세계로 변했던 추억들을 우리는 갖고 있다. 크로노스적인 시간이 아니라 카이로스적인 시간이 우리에게 임했던 순간들 말이다.
데리다의 ‘선물’안에 깃듯 ‘불가능의 가능성’은 크로노스적인 시간에서 카이로스적인 도래와 파국을 기다리고 요청하는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몽상이나 낭만, 혹은 이상화가 아니다. 오히려 불가능성이 변혁의 가능성을 부단히 요청하고 노래하게 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동안 직선적으로 관행적으로 흘러오던 “시간을 탈구시켜(The time is out of joint)” 전혀 다른 지평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자본으로 재편되어 혁명이 불가능해 보이는 꽉 짜여진 세상을 다시 바라보고 회의하게 한다. 그렇게 세상에 나있는 틈과 상처와 균열을 탐색하고 그 틈으로 내가 개입해 들어가다 보면 세상은 조금씩 달라질 것이다. 이것이 데리다의 선물 안에 깃든 불가능성의 가능성이 함의하는 바이고, 그렇다면 선물은 정치적으로, 혹은 윤리적으로 기득권자들의 눈으로 볼 때는 불온한 선물이고 임박한 파국이다.
데리다와 다른 차원에서 선물의 의미를 바라본 장 뤽 마리옹은 『과잉에 관하여』에서 후설, 하이데거, 사르트르, 메를로-퐁티, 레비나스, 앙리의 뒤를 잇는 우리 시대 가장 탁월한 현상학자로, 과도한 현상의 주어짐을 ‘포화된 현상’이라는 개념으로 풀어내며, 우리의 인식 능력마저도 무능하게 만들어버리는 압도적인 현상의 힘에 대해 진단한다.
마리옹의 문제의식은 다음과 질문에서 촉발된다. “현상들은 언제나 의미를 지닌 직관의 현상들에서의, 심지어 더 흔하게는, 직관의 한 결여를 지닌 그 현상들에서의 고요한 충전을 따라 나타나는가? 혹은 어떤 것-포화된 현상-은 우리가 현상들에 부과하고 싶어 하는 모든 개념이나 의미작용에서의 직관의 억제할 수 없는 과잉 덕분에 나타나는 것은 아닌가? 이 물음은 “환원만큼, 바로 그만큼의 주어짐”이라는 원리에서 야기되었고, 주어진 것과 보여지는 것을 펼쳐냄으로써 주어짐을 해방시키는 문제로 이어진다.”
①여기서 다루는 것은 과잉surcro?t-개념에 대한 직관의 초과l’exc?s, 포화된 현상의 초과와 규범을 넘어선 포화된 현상의 주어짐의 초과-에 관한, 곧 재차 거듭되는 과잉에 관한 문제이다. 무엇보다도 이 책은 과잉을 다룬다. 현상은 언제나 하나 또는 여러 의미를 갖는 직관의 고요한 충전을 따라 나타나는가 아니면 직관에 대한 충전으로부터 측정되는 하나의 결여에 의거해서 나타나는가? 그렇지 않다면, 그 현상들 가운데 어떤 것들-역설들-은 우리가 그 역설들에 할당하고자 하는 모든 개념과 의미에 대한 직관의 환원 불가능한 과잉 덕분에(도 불구하고) 나타나는 것이지 않은가?
②이 상황은 우리에게 두 가지 물음을 던지게 한다. 첫 번째 물음은 현상학이 신학자에게 던지는 것이다. 왜 신학자들은 항상 특권화된 존재적, 역사적, 또는 기호론적 해석학을 대신해서, 성서에, 특별히 신약에 기록된 계시를 현상학적으로 읽는 일을 완수하지 못하거나 미미하게만 완수하는가? 두 번째 물음은 신학이 현상학에 던지는 것이다. 만일 나타남이 언제나 “환원만큼, 바로 그만큼의 주어짐”이라는 원리를 따라 주어짐에 질서를 부여하게 된다면, 또 만일 주어지지 않은 것은 어떤 것도 보이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은 그 어떤 것도 주어지지 않는다면, 궁극적으로 자신을 준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③일상의 삶은 나-자신에게로의 접근을 나에게 제대로 주지 못한다. 그것은 실제로 욕망과 욕구 자체를 가지지 못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내가 나와 한 가지 암묵적 협의를 맺었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나-자신에게 접근하기를 요구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나의 세계의 일들과 더불어 자유로운 정신을 다룰 수 있을 만큼 너무나도 흔하게 내 자신에게로의 접근을 입증하는 일로부터 나 자신을 제외시킬 것이다. 내가 여기 (또는 거기) 있는데, 왜 나는 나를 확증하는 일에서 당혹감을 느끼는가? 나는 나-자신에 대한 나-자신의 신실함을 충분히 보증할 것을 나에게 가정하는데, 이를 매 순간 계속해서 증명하지는 않는다. 이런 점에서 이 사태의 과정은 다음과 같이 경과한다. 내가 거기 있는지를 보기에는 나 자신이 너무 확실해서, 나는 나머지 존재자들과 나 자신을 연관시킬 뿐이다.
④신의 이름들에 관한 물음과 관련해서, 그것은 결코 신에게 하나의 이름을 고정시키거나 신에게 ‘아니오’를 대립시키는 일과 연관되는 것이 아니다. ‘이름 Nom’과 ‘아니오 non’는, 그것이 들려지는 경우, 같은 소리를 내는데, 후자만이 아니라 전자 역시 어떤 답도 주지 못한다. ‘부정신학’에서 주장하는 ‘아니오’는 긍정의 길에서 비롯된 ‘이름들’ 그 이상의 것을 말하지 못한다. 만일 아무도 그 이름을 말하지 못한다면, 이는 그것이 단적으로 모든 이름을 능가하고, 모든 본질과 현전을 넘어서기 때문이 아니다. 실제로, 그 이름을 말하지 않는 경우도 이름을 영예롭게 하기에는 충분하지 못할 것이다.
직관을 초과하는 사유의 모험, 주어짐의 현상학과 포화된 현상의 발견에서 ‘과잉’은 일련의 개념이나 일의적 의미부여 작용, 인식의 규범에 포섭되지 않는 것을 지시하는 말로 사용되는데 마리옹은 과도한 현상의 주어짐을 ‘포화된 현상’이라는 개념으로 풀어내며, 우리의 인식 능력마저도 무능하게 만들어버리는 압도적인 현상의 힘을 첨예하게 드러낸다.
일상을 압도하는 계시의 방식, 즉 일상적 삶에서 갑작스레 나타나는 사건들은, 삶의 일상성을 넘어 우리를 낯설게 하고 당혹스럽게 만든다. 시간을 때우기 위해 미술관에 할 일 없이 거닐면서도, 작품에 대한 특별한 지식이 없으면서도, 우리는 어떤 작품 앞에 시선을 빼앗기고, 그 작품의 색, 면, 묘사가 뿜어내는 강도 앞에 사로잡혀 한동안 멍하니 머물기도 한다.
그때 우리를 사로잡은 작품은 단순히 그 작품을 만들어낸 예술가의 이름과 그 작품을 지칭하는 제목으로만 우리의 기억에 남는 것이 아니다. 일의적 의미 규정을 넘어서 나에게 주어지고 나타나며 자신을 내보여준 작품의 현상이 나를 시선을 사로잡아 당혹감을 불러일으키고, 경탄하게 만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어떤 현상에 대해 규범을 제시하지 못한 채로 그 현상의 주어짐이 너무 과도해서 빚어진 사건 속에서의 나의 한 모습인 것이다.
이러한 현상의 주어짐을 포화된 현상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마리옹에 의하면, 그것은 어떤 경우에는 삶의 사건으로, 우상처럼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는 그림으로, 다른 어떤 유비적 의미로도 풀어낼 수 없이 오직 나 자신만을 촉발시키는 고통과 쾌락의 살의 경험으로, 나의 시선에 도덕적이고 실존적인 명령을 부화하는 타인의 얼굴이라는 아이콘으로, 그리고 가장 강력한 방식으로 나를 압도하는 계시의 방식으로 주어진다.
마리옹이 제안한 포화된 현상의 이론은 다른 그 무엇보다도 현상의 주어짐 그 자체를 특권화하는 현상학의 논리를 가장 급진적으로 밀어붙여 우리의 인식 능력마저도 무능하게 만들어버리는 압도적인 현상의 힘을 첨예하게 드러낸 사유의 모험이라고 할 수 있다. 현상학자답게 저자는 이 이론을 단지 역사적-개념적으로 정당화하는 것을 넘어 그 현상이 실제적으로 주어지는 사례에 대한 기술(description)을 시도한다. 철학의 역할 중 하나가 새로운 개념의 창조임을 감안하다면, 그의 사유의 과단성은 과히 주목할 만하다. 마리옹은 현상 자체의 권위를 온전히 인정하기 위해서 대상성이나 현존재의 이해 지평 내지 존재사건으로의 환원이 아닌, 순수한 주어짐 그 자체로 돌아가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런 사전 작업을 기반으로 마리옹은 본격적으로 자신의 고유한 현상학으로서의 주어짐의 현상학을 개진한다. 여기서 그는 현상학적 원리에 대한 규정을 반복하고, 자신이 내세운 규정을 따라 ‘환원된 주어짐’에 대한 더 새로운 이해를 제안하는데, 그것이 바로 ‘순수한 주어짐/주어진 것으로의 환원’이다.
이 환원을 설명하기 위해 그는 선물의 모형을 제시한다. 그는 선물이 가진 특성, 곧 누군가에게 어떤 것을 줌/받음이라는 특성을 고려할 때, 경제적 교환체계로 소급되지 않는 순수한 줌으로서의 선물이 가능하다면, 순수한 현상의 환원 역시 가능할 것이라는 논지를 편다. 즉, 마리옹은 이른바 삼중의 환원, 곧 주는 자의 괄호침, 받는 자의 괄호침, 선물의 대상성에 대한 괄호침을 통해 순수한 선물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비록 일차적으로 순전한 사고실험에 불과하다고 하더라도, 선물과 관련해서, 데리다가 사유한 선물의 불가능성을 넘어 가능성으로의 길을 제안했다는 점에서 우리는 그 유의미함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3.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요한 2,13-25
Ⓐ13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가 가까워지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14 그리고 성전에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과 환전꾼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15 끈으로 채찍을 만드시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쫓아내셨다. 또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 버리시고 탁자들을 엎어 버리셨다. 16 비둘기를 파는 자들에게는,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하고 이르셨다. 17 그러자 제자들은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집어삼킬 것입니다.”라고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생각났다. Ⓑ18 그때에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당신이 이런 일을 해도 된다는 무슨 표징을 보여 줄 수 있소?” 하고 말하였다. 19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20 유다인들이 말하였다. “이 성전을 마흔여섯 해나 걸려 지었는데, 당신이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는 말이오?” 21 그러나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22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그분께서 이르신 말씀을 믿게 되었다. Ⓒ23 파스카 축제 때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는 동안, 많은 사람이 그분께서 일으키신 표징들을 보고 그분의 이름을 믿었다. 24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신뢰하지 않으셨다. 그분께서 모든 사람을 다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25 그분께는 사람에 관하여 누가 증언해 드릴 필요가 없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사람 속에 들어 있는 것까지 알고 계셨다.
3-1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라고 전하는 요한 2,13-25은 성전 정화(13-22) 부분은 공관복음(마태오21,12-13/마르코11,15-17/루카19,45-48)에도 동시에 실려 있는 말씀으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표징을 예표하고 있다. 요한복음은 바로 앞절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있었던 포도주의 표징(2, 1-12)과 연속성에서 표징은 단순히 신적 능력이 아니라 신적정체성과 함께 표징을 바라보는 이들의 믿음의 단계를 알 수 있는 신자정체성을 묻는 부분이다. 포도주라는 물리적인 기적과 성전정화라는 정신적인 표상은 성전은 곧 하느님의 집이자, 예수 자신이라는 공적계시를 드러내는 <거륙함>의 포석이 된다. 바로 이어지는 <모든 사람을 아시는 예수님>(23-25)은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표징과 믿음의 관계>를 통해, 요한복음 전체에서 반복되어 제시되는 <믿음의 단계>를 상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내 믿음은 어느 단계인가>를 성찰케하는 은총의 초대라고 할 수 있다.
성전정화의 표징은 가나의 혼인잔치가 파스카 표징의 예표이고 앞당김이라는 것에서 표징(세메이온)의 어떤 유형을 보여준다. 요한복음 사가는 예수께서 행한 기적들을 권능 혹은 능력이라는 측면보다는 예수의 신적정체성과 관련된 표징이라고 부른다. 이는 공관복음에서 예수의 놀라운 능력을 뒤나미스(Dynamis/Potentia)라고 하였던 것과 차이를 드러낸다. 요한복음에서는 기적 혹은 표징을 세메이온(Shmeion)이라고 부른 것에서 <거룩함> 혹은 <영광>과 관련된다. 이는 예수가 베푸는 기적이 예수의 영광이자 하느님 곁에 누린 영광(1,14)의 현시이며, 예수께서 창조이전에 누리던 바로 그 영광(Dovxa)(17, 5-24)이라는 점에서 요한복음 전체를 관통하는 선험적인 선재사상의 피력이라고 할 수 있다. 더욱이 예수의 성전정화의 표징은 유대인들의 해방절이 다가오자라는 것에서 파스카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가를 성찰하게 이끈다고 할 수 있다.
이것들을 여기서 치워라. 내 아버지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16절)
전승에 의하면, 당시 성전마당에서 행해지던 상점은 키드론 골짜기나 올리브산 언덕에 있던 산헤드린의 상점과 경쟁하던 대제관 가야파의 소유로 알려져 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자기들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 종교지도자들이 하느님팔이를 하였다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정경유착을 문제 삼지만 요한복음 사가는 교경유착을 문제 삼은 것이다. 교경유착은 하느님에 대한 근본적인 몰이해를 바탕으로 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과격하리만치 성전에서 장사하는 장사꾼과 황금상을 쫒아내는 것은 돈과 종교의 결탁은 하느님 사랑의 근본적인 왜곡으로 이어지고, 믿음의 여정에서 바로잡아야 하는 가장 우선적인 인식전환이 요구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돈과 종교가 손을 잡을 때, 어떤 현상이 야기되는가? 생명의 하느님은 사라지고 인간에게 희생제물을 요구하는 두려운 하느님이 된다는 점이다. 유다의 종교인들은 두려움의 하느님을 성전에서 버젓이 유포시켰다는 것이다. 교회가 부자가 되는 순간 그것은 성전정화와 같은 문제상황에 놓인 것이라고 보면 된다. 이때 하느님에게서 오는 평화와 세속이 주는 평정심을 신자들은착각하게 되고 돈으로 통제할 수 있는 세속의 평정심만을 추구하게 만든다. 이는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과 대척적인 것으로 하느님에 대한 오독, 두려움과 경외심의 혼선을 야기시킨다.
공관복음에서 <성전(기도하는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지 말라>는 메시지를, 요한복음사가가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는 것으로 신학적 무게를 다르게 표현한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성전이 단지 기도하는 집, 그 이상이라는 의미가 있다고 것이다. 내 아버지의 집이라는 것은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10,30)라는 것을 공식화하는 공적계시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성전정화를 통해 예수 스스로 하느님의 아들임을 공적으로 계시하는 것은, 예수를 통해서만 하느님을 알 수 있는 신앙의 근본을 드러낸 것이자(5,17-26/5,32.37/7,30/14,10) 그것은 아들은 곧 아버지와 같은 존재라는 신적 현현을 드러낸 것이며. 이는 향후 신성모독죄의 발단이 된다는 점에서 중요한 성찰의 주제라고 할 수 있다.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집어삼킬 것입니다(18절)
이는 제자들의 훗날, 시편69,10절을 기억하고 정당화하는 것으로 아버지의 집에 대한 열정이 바로 예수 자신을 <집어삼켰다> 라는 동사를 쓸 정도로 아버지의 뜻에 대한 예수의 전적인 봉헌이 그의 죽음의 동기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성전정화는 십자가의 수난과 고통, 죽음을 거친 부활의 표지라고 할 수 있다. 사순3주에 성전정화를 묵상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어지는 유다인들과의 대화에서 이를 분명히 하신다.
당신이 이런 일을 해도 된다는 무슨 표징을 보여줄 수 있소?(18절)-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19절)
18절과 19절의 유다인들과의 대화는 예수께서 당신의 부활을 예고하신 것으로 유대인들은 하늘의 기적을 요구하고, 예수는 그들의 요구를 한창원 높여 기적의 궁극에 해당하는 신적 계시를 드러낸 것으로, 그분의 죽음과 부활은 예수의 신성과 아버지의 사랑의 완성체임을 드러낸 것이다. 유대인들이 말하는 성전은 기원전 20-19년에 기공해 46년에 완성된 공간적 의미인 가시적인 예루살렘 성전을 의미한다면, 예수는 당신이 수난하고 부활하실 몸을 유일한 성전이라고 공식화한 것이다. 예수는 죽음으로부터 부활할 당신의 몸을 성전이라고 일컫는 것에서 성전정화사건은 강생의 신비에 대한 신학적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하느님의 현존이 지상의 장소가 되도록 하셨다는 점에서, 말씀이 사람이 되신 신비와 십자가 신학이 만나는 접점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내 아버지의 집이 성전이고, 내 몸이 성전이라는 도식에서 예수 자신이 곧 하느님의 현존을 의미함을 알 수 있다.
이어지는 23-25절에서 요한복음 사가가 바라보는 표징의 의미가 보다 분명해 진다. 유대인들의 믿음이 어느 정도인가가 문제였던 것에 그치지 않고, 예수를 따르는 많은 이들의 믿음이 무엇인가를 요약하여 제시함으로써 요한복음 사가는 믿음의 어떤 단계를 설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마치 바오로 사도가 셋째하늘이라고 하늘의 어떤 차원을 다르게 체험한 것처럼, 복음사가는 믿음의 어떤 단계적 차원에 관한 것을 역설한 것이다.
Ⓒ파스카 축제 때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는 동안, 많은 사람이 그분께서 일으키신 표징들을 보고 그분의 이름을 믿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신뢰하지 않으셨다. 그분께서 모든 사람을 다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그분께는 사람에 관하여 누가 증언해 드릴 필요가 없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사람 속에 들어 있는 것까지 알고 계셨다.
가나의 혼인잔치와 성전정화 표징 후에, 왜 많은 사람이 예수의 이름을 믿었다고 전하면서 그러나 예수는 동시에 그들을 신뢰하지 않았는지? 그것은 예수를 믿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들은 예수의 기적에 탄복한 것이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로 믿지 않았다는 것에서 이 시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의 표징밖에는 보여줄 수 없다는 것을 다르게 진술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주님, 주님 부른다고 모두 하느님 나라에 갈 수는 없다는 것을 다르게 표현한 것으로 요한 복음사가가 믿음의 어떤 단계를 설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교경유착이 왜 문제인가를 더 심도 있게 다시 한 번 되짚었다고 할 수 있다. 성전에서 온갖 예물을 다 바친다고 예수님이나 하느님을 믿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우리의 믿음이 산헤드린 차원의 믿음인가? ⒝두려움을 유포하는 유다지도자들의 상징 가야파 차원의 믿음인가? ⒞표징을 요구하는 사람들의 믿음인가? 아님 ⒟그분의 말씀에 머무르는 표징마저 초월한 진정한 믿음인가?’를 묻는다고 할 수 있다. 그점에서, 사람의 마음속까지 환히 알고 계신 분, 머리카락숫자까지 세시고 계신분, 사람의 본성을 훤히 알고 계시다는 표현이 의미하는 것이, 너의 믿음은 지금 어디인가?를 묻는 사순3주 성찰의 무게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요한복음 2,23-32은 표징과 믿음을 통해 요한복음의 구원론을 정립한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요한복음서는 첫 장에서부터(1,12) 마지막 장에 (20,31)에 이르기까지 구원을 얻기 위한 방법으로 믿음을 강조한다. 구원은 믿음과 거의 동의어로 쓰인다. 그렇기에 믿음의 동기로써 표징(세메이아)를 언급한(20,30) 것에서 표징과 믿음은 요한복음의 신학사상의 핵심 뿌리라고 할 수 있다.
요한복음서에서 믿음은 명사로 사용되지 않고, <믿는다>라는 동사로만 사용된다. <믿는다>는 것은 <안다>는 동사와 병행하여 주로 나타난다.(6,69/17,80) 그뿐 아니라 믿음으로써 (16,30) 알게 되고, 앎으로써 믿게 된다(10, 38)는 안셀무스의 『모놀로기온』과 같은 맥락에서, 나는 너를 모른다 혹은 너를 안다와 동행한다. 이 경우 <믿는다>와 <안다>라는 동사는 동일한 대상을 목적으로 한다(11,42/17,3/8,248,26/14,11/14,20) 믿는 행위가 계속 유지될 때, 믿음은 아는 것과 동의어가 된다(8,31-32) 아는 것과 믿는 행위, 곧 신앙에 있어서 하나의 구조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주목할 것은 아는 것이 행위로 표출될 때, 믿는다고 할 수 있으나 그 역은 성립되지 않는다. 아는 것은 육화를 요구한다. 알기만 한다면 그것은 어두운 영과 다르지 않다. 따라서 <믿는다>와 <안다>는 것이 동의어로 사용될 때 <믿는다>는 것은 정신적인 인식이나 각성이 아니라 결단과 더불어 말씀의 육화로 삶으로 표출된 것으로 <생각과 말과 행위>가 하나가 되어 분열되지 않은 상태를 의미한다.(3,14-16/1-,25-27)
사실상 요한복음 사가는 <믿는다>는 동사는 주로 예수그리스도를 대상으로 한다.(5,46-47/12,35-36/14,1) 그만큼 믿는다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는 완벽하게 아버지와 하나인 상태를 지칭하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믿음이 강조되는 것은 예수를 파견한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동일시되기 때문이다.(6,35/8,46/11,27/11,42/17,21/16,27)
복음사가가 강조하는 믿음은 또한 하느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한다는 것을 믿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12,44)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하나로 결속되어 있으며(14,1.6/17,3) 예수그리스 안에서 하느님을 본다는 것(14,9)이야말로 안다는 것이 믿음으로 표출된 것이다. 이 모든 것을 알게 하는 것이 성령의 일(14, 15-31)이기에 믿는다는 것은 결국 삼위일체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며, 수난의 수락은 삼위일체 하느님 사랑의 절정을 의미한다.(5,31-47)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보내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할 것이다(14,26)
Ⓔ너희가 나를 알지 못할 뿐 아니라 나의 아버지도 알지 못한다. 너희가 나를 알았드라면 나의 아버지도 알았을 것이다(8, 19-20ㄱ)
따라서 요한복음에서 믿음은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자, 삼위일체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예수의 정체성과 사명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십자가 수난과 죽음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 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17, 3)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합니까?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6, 28-29)
따라서, 예수의 자기 계시 안에서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핵심으로 제시된다(14,6) 그러므로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신적인 일, 하느님의 역사하심으로 향방되고(5,17.19) 특히 표징과 관련되어 나타난다.(3,2/7,305/11.47)
따라서 복음사가는 믿음과 관련되어 있는 표징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독자인 신앙인들에게 주문한 것이기도 하다. 요한 복음에서에서 기적은 두 가지로 묘사된다. 하나는 예수가 행한 일들(에네르기아, 창조하는 힘), 다른 하나는 기적이라 부르는 표징들이다. 이 일들은 모두 예수안에서 하느님이 행하시는 일들이기 때문에 하느님과 함께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불러일으킨다(10,37-38/14,11) 그것은 하느님께 순명하심으로써 하느님의 일을 하는(4,34) 아들의 사명이며, 이는 아버지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는 하느님의 뜻으로 구체화된다(14,10)
이와 같이 하느님의 일은 예수 안에서, 예수를 통해서 영광의 일치를 이루며 완전한 영속성을 지닌다. 예수를 아브라함 이전부터 계신 분, 창조이전에 함께 계신 분으로, 예수의 종체성을 선재사상으로 복음사가가 기록한 이유라고 할 수 있다(요한복음1장, 8,48-59) 따라서 예수의 일은 자기 자신에 대한 계시이자 믿는 행위가 된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활동하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유일한 방법내지는 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표징은 하느님의 능력보다는 영광을 드러낸다는 의미가 강하다고 할 수 있다.
공관복음서에서 표징은 능력이자, 종말론적인 의미로 사용된 것과 다른 차원의 맥락이다(마르코13,4./마태오24,3-30/루카21,7.11.25) 요한복음서에서 표징은 믿음을 불러일으킨다(2,11/12,37/20,30-31) 기적자체가 곧 종말론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종말론적인 사건으로서의 공관복음서와 요한복음서의 차이는 전자는 예수의 자기계시가 감추어진 오로지 종말론적인 사건- 미래적인 의미를 지니지만, 후자는 예수의 자기 계시는 오늘, 여기서 이루어지는 예수와 함께하는 영원한 문이 된다. 요한복음의 표징은 지금 여기서 일어난 사건이라는 측면에서 믿음과 직결된 요한복음 신학의 바탕이라고 할 수 있다. 표징은 예수 안에서 하느님의 영광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는 예수에 대한 영광과 믿음을 불러일으킨다. 이렇듯 표징은 예수의 정체와 사명을 드러내는 데에 기여한다. 기적이 표징으로서의 의미를 가지게 되는 예수의 자기계시와 예수에 대한 믿음에 초점이 놓인 바탕이다. 이런 믿음은 예수를 믿기 위해서 표징을 요구한다는 것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바라보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예수는 유다인들의 교경유착만 비판한 것이 아니라 표징 때문에 당신을 추종하는 군중들의 믿음에 대해서도 경계한 이유이기도 하다.(2,23-25/4,48)
Ⓗ이 세대는 악한 세대이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한 것이다(루카11,29-32/마태오12,38-42/마르코8,11-120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사람들에게는 걸림돌이지만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코린토 1서 1,22-25)라고 전한다.
Ⓘ유다인들은 표징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 그렇지만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 하느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더 지혜롭고 하느님의 약함이 사람보다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11,12)
예수께서는 치유기적사화나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이후에 당신을 따라다니는 군중들을 향해, 당신들은 표징들과 기적을 보지 않고서는 결코 믿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경계하면서, 또한 예수가 행한 일들 때문에 가지는 믿음을 요구하는 것에서, 예수를 믿지 않더라도 예수가 행한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으라고 촉구하기조차 하는 것에서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역설한다(10,37-38/14,11) 어떻게든지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가 되라는 것, 이것은 믿음의 단계를 설정하여, 더 깊은 차원의 믿음으로 표징과 일을 뛰어넘을 수 있는 상태가 가능함을 공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 어떤 왕궁의 관리 아들의 치유사화(4,4-42/4,46-54)등에서는 그 어떤 표징도 없이 오로지 예수의 말씀만 듣고 믿는 실천적인 믿음의 예표로 서술된 것에서 알 수 있다. 따라서 참된 믿음은 단지 예수의 기적이나 표징들과 일들로 인한 믿음이 아니라, 예수의 말씀에 대한 전적인 머무름과 응답의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아무도 하느님을 본적이 없다.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들님, 하느님이신 분께서 하느님을 알려주셨다(1, 1-18)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20,24-28)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한 말씀에서, 구원에 이르는 결정적인 단계는 표징조차 괄호를 칠 수 있는(뛰어넘는) 말씀에 대한 네, 머무름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의 말씀을 듣고 머무름에서 드러나는 믿음이 예수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진정한 믿음이라고 할 수 있다.(15,1-17)
3-2
그렇다면 믿음의 여정에서 표징조차 괄호치고 넘어설 수 있는 궁극적 믿음은 어떻게 가능한가?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라고 전하는 요한 2,13-25에서, 표징조차 넘어설 수 있는 믿음, 그것이 우리에게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는 것을 교경유착의 이형태(본질은 같으나 표출된 예는 다름)에서 찾을 수 있다.
단계적인 믿음을 설정한 요한 복음사가에게 성전에서 장사를 하던 이들, 교경유착을 유포한 이들의 믿음은 무엇인가? 앞에서 언급하였듯, 인간에게 희생제물을 요구하는 하느님, 하느님의 이름만 아는 두려운 하느님은 믿음의 초기단계(구약의 하느님)라고 할 수 있다. 이 단계는 자신은 물론 다른 이들도 하느님 나라에 가지 못하게 막는 믿음의 장애가 된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 신앙의 여정에서 두려움의 하느님에 대한 신앙은 사라진 것인가? 하는 성찰이 무엇보다 요구된다. 평화와 평정심을 같은 것으로 바라보는 것은 아닌가? 하는 점이다. 생각과말과행위가 분열을 겪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다. 어떤 분열된 인격을 믿음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총체적인 믿음에 대한 성찰이 요구된다.
특히, <교경유착>은 오늘날도 여전히 존재하는 두려움의 원인에 해당하는 두려움의 메두사로 다양한 이형태로 나타난다. 나는 성전에서 장사를 하지 않거든? 그러니까 난 아니지?가 아니다. 자신에게 그 어떤 두려움이 다양한 형태로 출몰한다면 교경유착의 이형태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제1독서에서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주어졌다>라고 전하는 탈출기.20,1-17에서 제시하는 십계명의 의미는 바로 너는 무엇을 두려워하는가?를 묻는 것이다.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하느님이 문제가 아니라 자신이 두려움이 없는 온전한 믿음의 상태에 있음을 의미한다. 사랑의 반대는 두려움이기에 애주애인의 상태란 바로 두려움이 없는 상태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 무렵 1 하느님께서 이 모든 말씀을 하셨다. 2 “나는 너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주 너의 하느님이다. 3 너에게는 나 말고 다른 신이 있어서는 안 된다. 4 너는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든, 아래로 땅 위에 있는 것이든, 땅 아래로 물속에 있는 것이든 그 모습을 본뜬 어떤 신상도 만들어서는 안 된다. 5 너는 그것들에게 경배하거나, 그것들을 섬기지 못한다. 주 너의 하느님인 나는 질투하는 하느님이다.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는 조상들의 죄악을 삼 대 사 대 자손들에게까지 갚는다. 6 그러나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이들에게는 천대에 이르기까지 자애를 베푼다. 7 주 너의 하느님의 이름을 부당하게 불러서는 안 된다. 주님은 자기 이름을 부당하게 부르는 자를 벌하지 않은 채 내버려 두지 않는다. 8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라. 9 엿새 동안 일하면서 네 할 일을 다 하여라. 10 그러나 이렛날은 주 너의 하느님을 위한 안식일이다.
성서에서 <두려워하지 말라>라는 구절은 신구약을 통틀어 가장 많이 나오는 명령형이자 청유형에 해당한다. 두려움이 무엇이 문제인가? 두려움이 있다는 것은 우상숭배의 상태에 자신이 있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이에 두려움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한다.
두려움은 하느님과 사람 사이에 현세적인 가치가 끼어들었다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이는 십계명 가운데 1~3계명에 관한 것을 어긴 형태가 두려움으로 표출된다. 흔히 <간음하지 말라>라는 표현은 인간과 인간 사이에 이루어진 것으로 간주하지만 성서에서 우상숭배는 자주 음탕한 여인에 비유한 것에서 하느님과 사람 사이에 다른 무엇이 끼어들었다는 것으로 추론해 볼 수 있다. 사랑과 사랑 사이에 제3자가 끼어든 상태처럼 분리가 우상숭배라는 두려움을 낳는다고 할 수 있다. 이는 하느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다면 그것은 내가 듣지 않기로 선택한 것이라는 점에서 모든 우상숭배는 결국 자기 우상숭배라고 할 수 있다. 사실 믿음은 이 두려움을 얼마나 극복했는가라는 자가진단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믿음이 없어, 라는 말은 나는 무엇인가를 두려워해, 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두려움은 언제나 몸이라는 육체성을 갖고 표출된다. 말씀도 육화한다는 점에서, 이는 육체와 육신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와도 맞물린다.
두려움은 <생각과 말과 행위>의 분열로 나타난다. 고백의 기도에서 세 측면에서의 성찰을 권고하는 이유다. 이는 두려움의 시작은 마음이며, 두려움은 죄를 유발한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에 해당한다. 두려움이 있다는 것은 행동을 바꿀 것이 아니라 마음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주문한다. 그렇기에 두려움에서 해방시켜 달라는 요청은 두려움의 책임을 외부로 전가시키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두려움은 자유의지를 지닌 내가 선택한 것이기 때문이다.
두려움의 상태는 마음의 치유가 필요한 상태를 의미한다. 생각과말과행위가 분리되어 있다는 내적 갈등, 자기분열에 대한 진단이기에 그렇다. 두려움은 어떤 압박감의 표시로 트라우마의 치유가 보류된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두려움이 있다는 것은 치유가 필요하다는 말이기도 하다. 즉 원하는 것과 행하는 것이 충돌할 때 두려움은 일어난다. 물론 본인은 난 아무것도 두려워지 않아, 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더 두려운 상태인 것이다. 자기가 분열된 자는 공동체의 분열을 야기하기 때문이다. 마음은 행동을 유발하고 상충된 마음은 다양한 분노의 형태, 두려움으로 표출된다. 분노는 단지 화를 표출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형태를 띠고 반그리스도적으로 나타난다. 절망과 자살은 두려움의 이형태다. 해가 지기 전에 분노에서 벗어나라는 것은 분노는 다양한 형태, 심지어 꿈으로 표출되며 그것은 생각과 말과 행동을 연쇄적으로 표출하게 만든다. 프로이드가 『꿈의 해석』에서 역설하듯, 모든 꿈은 자기 무의식이라는 말과 상통한다.
현실에서 전적으로 하고 싶지 않지만 해야만 되는 갈등은 두려움으로 반복적, 강박적으로 표출된다. 표출된 행동은 일관성을 갔지만 그 일관된 행동은 압박감에서 유발된 일관성으로 강박적인 행동으로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어떤 경우이든 두려움은 모두 마음과 말과 행동이 일치되지 않았다는 자기 증명이다. 두려움이 있다면 십계명에서 권하는 1~3계명을 어긴 것인데, 하느님을 유일하게 나의 주님으로 삼지 않은 분리에서 비롯된 아담의 죄라고 할 수 있다. 나는 하느님으로 인해 충족될 수 없다는 것이 두려움인 아담의 죄다. 아담처럼 분리의 결과는 마음의 혼란과, 평화와 평정심을 착각하고, 사랑에 집중하지 못하게 하고, 쾌락의 대체물을 찾는 변덕스러움을 노출시킬 수밖에 없다.
두려움은 사랑의 대체물을 찾게한다. 두렵다고 고백할 수 없기에, 끊임없이 충족의 대체물을 찾는 것이다. 성령은 내가 행하겠다고 하는 것 이상을 우리에게 요구하지 않는다. 성령은 우리의 자유의지를 강제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두려움에서 해방되야 하는 것은 나의 의지다. 내가 나의 강함에 기대는 한 두려움은 수시로 출몰한다. 우리 마음의 깊은 곳, 하느님의 음성, 영혼의 소리를 듣기 전에는 수시로 두려움을 체험한다.
그런 맥락에서, 믿음은 생각과말과 행위가 분열되지 않은 상태를 의미한다. 하느님의 뜻이 곧 나 자신의 뜻일 때 두려움을 없다. 여기서, 오직 마음만 두려움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음은 엄청난 에너지를 갖고 있다. 마음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갈등할 때, 원함과 행함의 불일치로 인해 불가피한 압박감을 유발하며 강박적으로 두려움을 불러 일으킨다. 이는 하느님 나라라는 통합된 목표를 받아들일 때만 교정할 수 있다. 모든 우상화는 결국 자기우상화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을 해제하는 방법은 먼저 내적 갈등이 두려움의 표현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식으로든 사랑하지 않기로 결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두려움은 하느님(사랑의) 결핍에서만 일어난다. 사랑의 결핍은 완전한 사랑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다. 완전한 사랑이 곧 속죄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다. 그래서 표징은 전적으로 하느님으로 존재하는 자가 존재자에게 표하는 존경임을 바라보는 것이다. 두렵다는 것은 아직 자신 안에서 온전한 징표와 속죄를 받아들이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사람은 누구나 어떤 두려움을 느끼는데, 마음의 진정한 힘을 완벽하게 인식하는 사람은 드물고, 늘 완전하게 인식하는 사람은 더 드물기 때문이다. 이 세대에 과연 어디서 믿음을 찾아볼까? 라는 예수께서 질문하신 이유라고 할 수 있다.
마음은 매우 강력하고 어느 순간에도 결코 창조의 권능을 잃지 않는다. 마음은 결코 잠들지 않으며 매순간 마음은 자기 행위를 창조한다. 생각과 말과 행위가 결합한 힘이 말 그대로 산을 움직일 수 있는 믿음이라고 할 수 있다. 생각이 두려워서 실제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믿음은 죄의식을 덜어줄 수 있지만 믿음에 영향을 미칠 수는 없다. ㅡ이것은 우리 마음을 무능한 것으로 치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외상이 아닌 모든 병은 마음의 병이다, 라는 것은 그런 맥락이다.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은 분리하여 생각한다면 원인과 결과의 근본적인 법칙을 건드리는 것이다. 생각의 힘을 과소평가한다면 스스로를 돕지 못하게 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생각의 힘을 완전하게 알아차리는 것이 무엇보다 두려움을 물리치는 것이다.
따라서 기적이나 표징은 시간의 목적을 붕괴시킨다고 할 수 있다. 표징은 참된 원인과 결과를 존중한다. 기적과 두려움은 생각에서 온다. 기적은 사랑에 아무것도 끼어들지 않은 상태를 의미한다.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길은 생각과 말과 행위로 자주 죄를 지었으며, 라는 고백의 기도를 성찰하고 기억하는 마음공부인 것이다. 하느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모든 사람과 모든 것을 두려워 하다는 의미이다. 두려움은 죄와 죄책감의 근원이기에 그렇다.
사랑의 원인은 하느님이고 사랑의 결과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두려움은 없다. 그러므로 세상의 두려움은 잘못된 창조에 대한 승인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두려움은 잘못된 창조에서 표출되고 하느님의 사랑은 완전한 창조로 우리 영혼에 내재한다. 그렇기에 내적 갈등은 사랑과 두려움 사이의 갈등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아무것도 없다는 무와 모든 것이 있다는 것은 공존할 수 없다.
두려움의 결론은 무이며, 사랑은 모든 이의 모든 것이 되는 것이다. 바오로 사도의 통찰처럼 모든 것과 무 사이에는 그 어떤 타협점도 없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사랑하사 외아들을 주셨으니는, 하느님께서는 아들이 오직 하나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라는 말은, 에수님의 독점이 아니라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하는 이유다. 하느님과 나는 하나라는 말은 두려움이 사라지기 전에는 알 수 있는 은총의 상태다. 이를 알기 위해 회개의 완성이 필요하고, 믿음의 여정에서 일차적으로 완성할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이 글의 제목에 대해 생각해 볼 차례다.
[표징과 믿음의 환원, 주는 자의 괄호침, 받는 자의 괄호침, 표징의 대상에 대한 괄호침-사순3주,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를 중심으로]
사순3주 요한2, 13-25에서는 성전정화 사건을 통해, 성전은 바로 예수님의 몸이라는 표징을 통해 믿음의 네 단계를 설정하여, 표징마저도 요구하지 않는 믿음의 상태가 무엇인가를 전한다. 유다인처럼 교경유착의 두려운 하느님에 대한 믿음, 표징을 요구하는 믿음, 표징마저도 초월한 믿음 등을 통해, 성전을 도둑의 소굴로 만들지 말라는 것은 교경유착의 이형태, 그 내면에는 희생제물을 요구하는 두려운 하느님이 계시다는 유언비어를 세상에 유포하지 말라는 지시라고 할 수 있다. 이는 평화와 평정심을 왜곡하는 것으로, 표징마저도 요구하지도 않는 믿음을 우리에게 요구한 것이다. 여기서 주는 자의 괄호침, 받는 자의 괄호침, 받은 대상에 대한 괄호침이라는 순수함 믿음이 우리에게 가능함을 시사한다. 경외심이 아니라 두려운 하느님을 전하는 것은 가장 매력적이지 않은 선교에 해당한다. 치유받지 못한 믿음이 완장을 차고, 판단이라는 도구를 이용하여, 가장 하느님답지 않은 하느님을 전하게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요한10, 30)라는 바로 그 몰아의 상태를 기억하라는 것으로, 성전정화사건은 표징조차도 뛰어넘는, 생각과말과행위가 분열되지 않은 상태, 그 어떤 것도 하느님과 나 사이에 개입하지 않은 순수한 믿음이 바로, 자기치유이며, 자기확신이며, 하느님 사랑의 끌어당김의 법칙이며, 그리스도를 통한, 성령의 도우심에 의한 구원이라는 메시지를 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글을 마치며,
Ⓐ13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가 가까워지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14 그리고 성전에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과 환전꾼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15 끈으로 채찍을 만드시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쫓아내셨다. 또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 버리시고 탁자들을 엎어 버리셨다. 16 비둘기를 파는 자들에게는,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하고 이르셨다. 17 그러자 제자들은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집어삼킬 것입니다.”라고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생각났다. Ⓑ18 그때에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당신이 이런 일을 해도 된다는 무슨 표징을 보여 줄 수 있소?” 하고 말하였다. 19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20 유다인들이 말하였다. “이 성전을 마흔여섯 해나 걸려 지었는데, 당신이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는 말이오?” 21 그러나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22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그분께서 이르신 말씀을 믿게 되었다. Ⓒ23 파스카 축제 때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는 동안, 많은 사람이 그분께서 일으키신 표징들을 보고 그분의 이름을 믿었다. 24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신뢰하지 않으셨다. 그분께서 모든 사람을 다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25 그분께는 사람에 관하여 누가 증언해 드릴 필요가 없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사람 속에 들어 있는 것까지 알고 계셨다.
'마니피캇(Magnificat)'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중권력-디바이드 거버먼트(Divided Goverment)’시대에, 신의 초월은 그 초월을 목도하는 인간의 자기-초월을 소환한다 (0) | 2024.03.15 |
---|---|
에토스(Ethos), 파토스(Pathos), 로고스(Logos), 사랑에 미치지 않고서도 사랑이 될 수 있을까? (0) | 2024.03.08 |
본성과 인격의 형이상학적 이원론을 넘어선 십자가의 존재론적 필연성 (0) | 2024.02.23 |
81억개의 목숨과 81억개의 유혹, 그리고 단 하나의 상황! (0) | 2024.02.16 |
축복과 천형(天刑)의 변증법, 코나투스 세세 콘세르우디(conatus sese conservandi) (0) | 2024.02.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