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피캇(Magnificat)

‘이중권력-디바이드 거버먼트(Divided Goverment)’시대에, 신의 초월은 그 초월을 목도하는 인간의 자기-초월을 소환한다

나뭇잎숨결 2024. 3. 15. 08:31

 

 

 

‘이중권력-디바이드 거버먼트(Divided Goverment)’시대에, 신의 초월은 그 초월을 목도하는 인간의 자기-초월을 소환한다

 

-사순5주,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를 중심으로

 

 

1. 복효근, 「틈, 사이」

 

복효근의 「틈, 사이」를 다시 읽어본다.

 

 

잘 빚어진 찻잔을 들여다본다/수없이 실금이 가 있다/마르면서 굳어지면서 스스로 제 살을 조금씩 벌려/그 사이에 뜨거운 불김을 불어넣었으리라//얽히고설킨 그 틈 사이에 바람이 드나들고/비로소 찻잔은 그 숨결로 살아 있어/그 틈, 사이들이 실뿌리처럼 찻잔의 형상을 붙잡고 있는 게다//틈 사이가 고울수록 깨어져도 찻잔은 날을 세우지 않는다/생겨나면서 미리 제 몸에 새겨놓은 돌아갈 길,/그 보이지 않는 작은 틈, 사이가/찻물을 새지 않게 한단다//잘 지어진 콘크리트 건물 벽도/양생되면서 제 몸에 수 없는 실핏줄을 긋는다/그 미세한 틈, 사이가/차가운 눈바람과 비를 막아준다고 한다//진동과 충격을 견디는 힘이 거기서 나온단다/끊임없이 서로의 중심에 다가서지만/벌어진 틈, 사이 때문에 가슴 태우던 그대와 나//그 틈, 사이까지가 하나였음을 알겠구나/하나 되어 깊어진다는 것은/수많은 실금의 틈, 사이를 허용하는 것인지도 모른다//네 노여움의 불길과 내 슬픔의 눈물이 스며들 수 있게/서로의 속살에 실뿌리 깊숙이/내리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복효근, 「틈, 사이」 는 존재론과 관계론을 아우르는 시다.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는 자기 몸을 헤집고 새로운 생명으로 탄생하는 과정에서 틈, 사이 혹은 균혈을 내장한다. 이 틈과 사이, 균혈이 다른 재질을 만나고 받아들일 때, 날카로운 송곳이 되지 않는 이유는 존재론보다는 관계론에 방점을 찍었기 때문일 것이다.

 

잘 빚어진 찻잔은 흙과 불과 물, 바람, 도공의 손이 만나는 과정에 그 재질의 차이 때문에 틈과 사이가 생긴다. 그 사이로 불길과 바람의 길이 만들어지고 실핏줄 같은 균혈이 흔적으로 남으면서 찻물이 새지 않는 찻잔이 된다. 잘 지어진 콘크리트 건물도 그런 양생의 과정을 겪는다.

 

하나 되어 깊어진다는 것은/수많은 실금의 틈, 사이를 허용하는 것인지도 모른다//네 노여움의 불길과 내 슬픔의 눈물이 스며들 수 있게...

 

하물며 사람과 사람의 만남에서 사이, 틈, 균혈은 불가피하게 나타날 수밖에 없는 존재론적 충돌이다. 오히려 이 충돌이 전혀 없는 관계가 이상하다. 만약 이 충돌이 없다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누군가 권력을 행사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이일지라도 서로가 지고가야할 할 생의 무게가 다르므로 틈과 사이와 균혈은 불가피하고, 필연적이다.

 

그런 맥락에서 어떤 관계가 형성되었다는 것은 틈과 사이, 균혈을 안고 깊어진 관계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어떤 관계를 감당하는 것은 틈, 사이, 균혈을 두려워하지 않은 상처에 대한 다른 이해라고 할 수 있다.

 

 

 

 

 사진작가 분이가 탱큐!

 

 

 

 

2. “너는 올바른 방식으로 너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메롤드 웨스트폴, 『초월과 자기-초월』중에서)

 

 

우리가 어떤 관계를 감당하는 것은 틈, 사이, 균혈을 두려워하지 않은 상처에 대한 수용이라 할 수 있다면, 그 관계는 초월과 자기초월을 근본적으로 내장한 실존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신을 믿든 혹은 믿지 않든 믿음으로서 혹은 믿지 않음으로써 우리는 신과 인간과의 관계를 필연적으로 맺고 있다. 

 

메롤드 웨스트폴은 『초월과 자기-초월』에서 신을 전통철학처럼 형이상학적 대상이나 증명을 요구하는 존재자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신을 우리에게 주어지고, 나타나는 체험되어야 할 현상으로 간주하거나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불러일으키는 기호로 바라본다. 이렇게 하면 신과 계시는 증명을 요구하는 대상이 아니라 우리의 세계와 삶에서 풍요로운 의미를 불러오는 독특한 현상이 된다. 이때 우리는 신과 종교를 단지 전통적 교리의 틀에서 벗어나 훨씬 더 자유롭게 사유할 수 있고, 이를 통해 종교 간 대화나 타자와의 대화가 촉진하거나 더 나아가 이방인 환대나 윤리적 책임의 문제도 이런 사유를 통해 더 적극적으로 사유할 수 있다.. 즉, 신-담론은 신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할 뿐만 아니라 신과 신앙에 연루된 우리의 삶의 성격과 태도를 바꿀 수 있는 계기가 된다.

 

메롤드 웨스트폴은 결국 초월을 따라 일어나는 자기-초월이란 자기가 중심이 된 주체가 신과 이웃을 향해 개방된 탈중심화된 주체로 변형된다는 의미다. 이 점에서 종교적 초월은 윤리적 책임이나 사랑과 분리될 수 없음을 재확증해 ‘존재-신학’이란 무엇이고 종교철학에서 왜 그토록 논쟁적인 단어일까? 하이데거는 ‘존재-신학’에 대해서 일종의 계시처럼 받아들여지는 것이 바로 하이데거의 존재-신학 비판이다. 이것은 전통 형이상학의 신-담론이 신을 그저 자기-원인이나 최고 존재자처럼 형이상학의 개념으로, 더 정확하게는 우리가 사유하는 한에서 존재하는, 우리가 사유를 통해 파악할 수 있는 개념화된 신으로 고착시켰다는 비판을 골자로 담고 있다. 이것이 신과 신앙을 사유함에 있어 일대 전기를 마련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형이상학에 입각하면 신은 유일실체나 자기원인, 정신의 현시 가운데 드러나는 절대자처럼 체계를 정당화해주는 하나의 계기 역할을 한다. 그런데 이 신은 성서나 꾸란, 토라에 등장하는 인간의 기도를 듣고, 인간에게 삶의 방향을 알려주는 그런 신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메롤드 웨스트폴은 신의 초월에 관한 물음은 전통적으로 범신론과 유신론 간의 차이로 정립되어 왔다고 바라본다. 범신론은 신이 전적으로 ‘세계’ 내부에 존재한다고 확언한다. 유신론은 신이 세계 ‘내부에’ 있으면서 ‘외부에’ 존재한다고, 내재적이면서 초월적으로 존재한다고 확언한다. 메롤드 웨스트폴은 인간의 자기-초월의 방식과 관련해서 신의 초월을 다시 생각하고자 한다. 하이데거, 스피노자, 헤겔, 아우구스티누스, 위-디오니시오스, 아퀴나스, 바르트, 키에르케고어, 레비나스, 데리다, 마리옹을 다루면서, 웨스트폴의 작업은 존재-신학 비판, 타자성의 중요성, 탈중심화된 자기, 그리고 자율적인 초월적 자아에 초점을 맞춘다. 웨스트폴의 신앙의 현상학은 종교철학의 주요 흐름 속에 안착시킨다.

 

그런데 신학을 한다는 것은 신 담론에 참여하는 것이다. 하이데거와 데리다의 의미에서의 신학이라는 말과 관련해서, 신학의 주제인 신-담론을 탈형이상학적으로 실행할 수 있는 신학을 찾는 일은, 우리가 말을 할 것이며, 어떻게 말하는 것이 최선인지를 물을 것을 전제한다.

 

존재 전체는 우리의 지성으로 충만하게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존재 전체의 의미에서 핵심인 최고 존재가 우리 지성을 초과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이 온전히 신비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맥락에서 신학은 경배의 삶과의 접촉을 잃지 않으며, 다만 기도와 찬양과 (하이데거가 무관심했던 이웃 사랑과) 긴밀하게 연결된다.

 

 

철학이 인간의 가장 높은 가능성이라고 생각한 헤겔과 달리 바르트는 종교가 그 영광을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레비나스는 얼굴을 가진 타자가 이웃일 뿐만 아니라 고아, 과부, 그리고 이방인이라는 점을 계속해서 식별해낸다.

 

키에르케고어에게 이웃 사랑 명령은 그 안에 다음과 같은 다른 명령을 포함한다. 너는 올바른 방식으로 너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 또 그는 이렇게 평한다. “너 자신을 올바른 방식으로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서로 완벽하게 일치한다.”

 

 

그 어떤 인간적 발화자를 넘어서는, 제일의 발화자는 듣는 자에게는 절대 전적으로 투명하게 드러날 수가 없는 내면성과 자유다. 형이상학적 파악 불가능성은 이 더 깊은 진리, 진리의 텔로스, 고유한 본향의 한 측면이자 기대에 불과하다.

 

 

메롤드 웨스트폴은 말하는 초월은 이중적이다. 한편으로 그것은 신의 초월을 가리키면서. 하지만 신의 초월은 절대적 존재의 초월을 확인하는 데서 끝나는 게 아니라 그 초월을 목도하는 인간의 자기-초월을 소환한다는 의미가 있다. 특히 저자가 다시금 이런 초월의 의미를 소환하는 데는 웨스트폴 자신의 근대성에 대한 비판적 이해 − 바꿔 말하면 포스트모던 문제의식 − 가 주요 동기로 작동한다. 말하자면, 근대적 사유에서 가장 큰 영향을 발휘한 몇몇 사유, 특히 이 책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스피노자와 헤겔의 범신론이 신의 초월을 제거하고 덩달아 이 초월과 연동된 인간의 자기-초월의 가능성도 제거하는 데 일조했다는 데 있다.. 그러므로 초월에 대한 복원은 그 자체로 근대성 비판이라는 함의를 가지게 된다. 웨스트폴은 유신론 전통에서도 신을 개념적으로 사유하는 경향이 팽배했다고 보기 때문에, 그 전통을 재해석한다. 우선 그는 부정신학을 매개로 삼아 아우구스티누스, 아퀴나스의 초월의 의미를 파헤치면서 우리가 신을 존재론적 개념을 사용하지 않고서도 말할 수 있는 법을 제안한다. 그런 다음, 칼 바르트, 레비나스, 키에르케고어로 논의를 옮겨간다. 저자가 이해하는 방식대로 하자면, 19~20세기로 넘어가는 이들의 사유는 포스트모던의 통찰을 담고 있는데 여기서 직접적으로 신에 대해 말하지 않는 레비나스가 사유의 동력을 제공한다. 타인인 무한의 절대적 타자성이 어떻게 우리 인식의 지향성을 파훼하고, 전도시키는지를 보여준 것이다. 이를 통해 저자는 키에르케고어의 그리스도교 유신론이 레비나스적 의미의 윤리적 초월과 그리스도교 전통의 종교적 초월을 함께 성취한다고 본 것이다. 즉, 한편으로 우리가 기도하고, 대화할 수 있는 신의 초월의 의미를 갱신함과 동시에 이것이 비단 종교적 영성의 차원에 국한되는 게 아닌, 주체의 윤리적 각성을 일으키게 한다는 점이 결론이다. 즉, 신의 초월은 자기-초월을 일으킴과 동시에 타자성을 향한 개방도 함께 일으킨다는 점이다.

 

메롤드 웨스트폴은 『초월과 자기-초월』에서 서양 철학에서 주요하게 다루어진 초월 개념을 다룬다. 흔히 초월이라고 하면, 무엇인가를 넘어선다는 말, 존재하는 우리 세계 저편의 어떤 것을 가리키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이 책은 바로 그런 초월 개념을 다루며, 저자는 이를 우주론적 초월이라고 부른다. 서양에서는 특히 이런 초월을 신과 더불어 사유했다. 인간과 세계 저편에 있는 것, 다름 아닌 모든 것 너머에 있는 절대적으로 초월적인 것은 바로 신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단지 신의 초월만을 다루는 게 아니라 인간의 자기-초월을 다룬다. 신의 초월을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을 목도하거나 경험하는 인간과 관련해서다. 그리고 인간이 신의 초월을 단지 인지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할 때 인간 안에서는 일종의 자기-초월, 주체의 탈중심화가 일어난다는 것이 이 책이 해명하려는 주제의 기본 골자이다.

 

메롤드 웨스트폴은 이런 기본적인 주제 의식 아래 서양 철학에서 초월이 은폐 혹은 탈은폐되는 철학의 사건을 다룬다. 특히 이 작업을 감행할 때 저자는 탈근대 철학과 전근대 철학의 공명을 꾀하는 독특한 사유를 보여준다. 이는 근대철학에서 신을 개념화하는 사건을 문제시한다. 이 책에 따르면 그러한 개념화는 신 자체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게 하는 것은 물론이고, 인간 주체의 주체성을 강고한 자아로 만드는 데 일조한다고 진단한다. 즉, 저자는 근대철학, 특히 스피노자와 헤겔의 범신론에서 신의 초월이 제거되었는데, 그리하여 인간 자아를 더 겸허하고 신과 타자에게 개방된 주체로 만들 수 없게 되었다고 본 것이다. 이에 초월적 신과 그 신의 부름을 듣는 인간의 자기-초월을 탁월하게 사유한 철학의 거장들을 저자는 세심하게 분석한다. 그들이 바로 아우구스티누스, 위-디오니시오스, 아퀴나스, 칼 바르트, 레비나스, 키에르케고어다.

 

메롤드 웨스트폴은 철학자들의 텍스트를 꼼꼼하게 독해하면서, 이들이 어떻게 개념적으로 사유되는 신을 넘어 인간과 대화하고 소통하는 무한과 초월의 신을 드러냈는지 해명한다. 더 나아가 이러한 초월적 신과 관계 맺는 인간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함께 검토한다. 이 과정에서 레비나스의 타자성의 초월에 대한 사유에 의존하면서 아우구스티누스로부터 시작한 초월 개념에 대한 검토를 키에르케고어로 마무리 짓는다. 왜 키에르케고어인가? 서구 전통, 특히 그리스도교가 지배적인 서구 전통에서 신의 초월은 단지 사변철학의 체계를 넘어서는 신을 칭송하고 찬미하기 위해 고안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성서의 최고 계명, 신에 대한 사랑과 이웃 사랑을 함께 성취하는 탁월한 계기의 역할을 한다. 이 점에서 저자는 결국 초월의 재발견에서 우리가 복원하는 것은 다름 아닌 타자성과 이 타자성에 개방된 주체성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이때 타자성은 이중적인 것으로써, 신의 타자성과 이웃의 타자성을 함께 지시한다. 즉, 신의 초월과 맞물려 자기-초월을 경험한 주체는 신과 이웃을 사랑하는 데 개방된 주체성을 함양하며, 이를 가장 잘 보여준 것이 바로 키에르케고어라고 본 것이다. 키에르케고어로 가는 길은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아우구스티누스, 위-디오니시오스, 아퀴나스를 거친다. 여기서 우리에게 다소 생소한 부정신학의 전통을 환기해낸다. 고중세 철학에서 가장 위대한 신비주의자 중 한 사람으로 칭송되는 위-디오니시오스는 그 누구보다도 신에 대한 부정적 진술의 의미를 잘 해명한 이로 통한다. 그리고 이 위-디오니시오스를 매개로 삼아 아우구스티누스와 아퀴나스가 한 편에 설 수 있게 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위-디오니시오스의 사상을 선취하여 신을 파악할 수 없는 자로, 개념화할 수 없는 자로 이해하고, 아퀴나스 역시 신을 우리의 사유로 충분히 이해될 수 없는 자로 이해한다. 이때 활용되는 신에 대한 부정적 접근은 ‘신은 ~이 아니다’라고 진술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신을 부르기 위해 개념이 아닌 새로운 말을 고안해낸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 말을 찬양과 기도로, 아퀴나스는 유비로 이해한다. 즉, 부정신학에서 초월적 신을 말하는 방식은 단지 신에 대한 부정적 진술을 하는 게 아니라 신을 찬양, 기도, 유비 등을 통해 새로이 신을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웨스트폴에 의하면, 초월에 관한 이러한 사유 방식은  스피노자와 헤겔의 범신론에서 단절된다. 양자 모두 신을 자연이나 정신의 체계 속에 욱여넣음으로써 신을 초월이 아닌 내재성 안에서의 계기나 일종의 전체성으로 파악한다. 이때 신은 철저히 인간 정신이나 지성, 또는 인간이 파악할 수 있는 자연의 실체로만 파악되며, 이 경우 인간은 자신의 지성에 입각해 철저히 이성적인 방식으로 신을 파악하고 이해하는 데 그친다. 이때 인간은 자연의 원리에 입각하건 정신의 체계에 입각하건 이성과 정념을 따라 자신의 삶을 개척하고 구성하는 자가 되고, 이때 인간에게 인간 바깥의 타자는 절대적 계기로 떠오르지 못한다. 바로 이 지점이 웨스트폴이 레비나스와 키에르케고어를 소환하는 이유다.

 

신 담론에서 타자성과의 단절은 단지 초월적 신과의 단절만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인간, 곧 이웃으로서의 타자에 대한 접근도 가로막는다. 물론 범신론에도 이웃의 존재는 있다. 하지만 그것은 레비나스처럼 절대적인 성격을 가진, 유한한 나에게 무한의 가르침을 전달하는 타자로 나타나지 않는다. 고립된 자아가 자신을 가두고 있는 알을 깨고, 상식이나 실정법, 규범을 넘어서까지 이웃에 대한 사랑을 현실화하는 것은 나의 유한한 본성이 아닌 이웃의 명령에서 비롯한다. 즉, 우주론적 초월은 단지 신의 초월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에 대한 사랑을 명령한다는 점에서 윤리적-종교적 초월의 성격을 가진다. 이 가운데 윤리적 초월의 성격을 새롭게 각인시킨 것이 다름 아닌 레비나스이고, 여기에 종교적 초월의 의미를 부과한 것이 그의 고민이다.

 

 

 

 

 

 

 

 

 

3.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0-33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라고 전하는 요한 12,20-33은 요한복음에만 있는 단독문형으로 요한복음사가는 예수의 공생활에 관한 보도를 마무리 지으면서 공관복음에 나오는 게쎄마니전승(마르코14,32-42/마태오26,36-46/루카22,39-46)과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에 대한 자기 계시를 통하여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이들에게  밀알-열매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요한 12,20-33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찾다(20-26절), Ⓑ사람의 아들은 들어올려져야 한다(27-29), Ⓒ보편적인 구원의지(30-33)등 세 부분으로 나누어 십자가는 믿는 이들에게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가를 성찰케 한다. 왜 구원의 보편적인 메시지, 영원한 생명이 꼭 십자가여야 하는가?라는 성찰을 요구한 것이다.

 

3-1

 

Ⓐ20 축제 때에 예배를 드리러 올라온 이들 가운데 그리스 사람도 몇 명 있었다. 21 그들은 갈릴레아의 벳사이다 출신 필립보에게 다가가, “선생님, 예수님을 뵙고 싶습니다.” 하고 청하였다. 22 필립보가 안드레아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아와 필립보가 예수님께 가서 말씀드리자, 2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때가 왔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25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 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26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찾다(20-26절)라고 전하는 부분은 예루살렘 입성시 예수님께 환호한 군중보다는 예수의 말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그러나 예수께 호의적인 시선을 가진 그리스(이방인) 군중을 매개로 마지막으로 제자교육을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전승에 의하면, 이들은 유일신 신앙은 받아들여 안식일법과 음식 규정들을 지켰으나 할례를 받지 않은 이들로 경건한 자들이라고 칭하는 이들이었다고 전해진다(사도행전10,2/13,43/17,4) 이들은 이미 예수의 말씀과 행적에 관해서 들었던 이들로 그들의 국적을 그리스도인이라고 칭한 것은 특히 열두사도 가운데 필립보와 안드레아를 연결하여 두 사도의 이방인 선교를 시사한 것으로 추론해 볼 수 있다. 그리스인들과의 대화가 생략된 점으로 보아, 또한 이방인들에 대한 선교는 예수의 부활이후에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그 부분은 예수의 죽음으로 인하여 보편적인 구원(24-26,32)이 이루어졌음을 전하고자 하는 복음사가의 신학적인 의도로 바라볼 수 있겠다.

 

여기서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이 지닌 피동성과 능동성을 알 수 있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시간이 왔다는 것은 얼마 후에 일어날 예수의 죽음을 가리킨다. 그 영광은 하느님께 들어올려짐이고, 인간 사랑에 결속되어 있으며, 예수의 영광은 사람을 위한 구원의 행위로 예수께 주어지는 충만한 능력을 시사한다. 십자가의 수난이 예수의 영광이라는 것은 예수가 성부께로 돌아가기 때문만이 아니라 예수의 이 죽음으로 인해 하늘과 땅이 하나로 연결되겠기 때문이다. 그것은 밀알의 죽음을 의미하며 들어올려진 자로써 그것을 바라본 이들에게(믿는 이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기 때문이다.

 

여기서, 십자가를 바라본다는 의미는 예수를 믿는다는 의미와 동의어가 된다. 밀알은 예수의 죽음에서 보여준 결실의 구체적인 비유이자 선교의 풍요로운 결실과 연결되어, 예수의 죽음이 필연적이라는 데에 있음으로 피동적인 고통 <희생당함>을 초월한다. 피동을 능동으로 바꿀 수 있는 사건이, 십자가의 영성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의 죽음은 멸망이 아니라 참된 생명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에서 십자가의 의미는 일반적인 수난과 고통의 의미를 초월한 것이다. 또한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내가 있는 곳에 함께 있을 것이라는 의미에서, 아버지의 영광이 아들 예수의 참된 고향으로의 귀환이며 그를 따르는 이들 역시 예수의 귀환에 동참한다는 자기본연의 자리찾기하고 할 수 있다. 아버지께서는 당신 아들을 사랑한 이들 역시 동등하게 사랑하신다는 점에서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9, 30)는 완전한 일체의 실현, 믿는 이들에게 하나의 공동체가 제시된 것이다(16, 27)

 

Ⓑ27 “이제 제 마음이 산란합니다.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합니까? ‘아버지, 이때를 벗어나게 해 주십시오.’ 하고 말할까요? 그러나 저는 바로 이때를 위하여 온 것입니다. 28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십시오.” 그러자 하늘에서 “나는 이미 그것을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겠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29 그곳에 서 있다가 이 소리를 들은 군중은 천둥이 울렸다고 하였다. 그러나 “천사가 저분에게 말하였다.” 하는 이들도 있었다.

 

27절은 공관복음에 나오는 게쎄마니전승에 의한 것으로 인성을 지닌 예수의 공포와 아버지의 뜻에 따르는 아들의 신성이 동시에 보도된다. 산란하다는 말은 인성을 지닌 예수 자신의 죽음을 마음 속 깊이 체험했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죽음에 대한 공포만 강조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빛과 어둠의 내적인 투쟁이 시사되었다는 것이 초점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의 시간은 죽음의 시간만이 아니라 영광의 시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는 이 시간을 면하게 해달라는 간청이 아니라, 그 시간을 목도하면서, 이미 그 시간을 예견했음에서 십자가의 의미는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려는 아들의 예언적 사랑이 된다. 아들 예수는 세상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을 스스로 계시함으로써 예수의 죽음은 바로 삼위일체 하느님 사랑의 계시의 표지가 된다. 예수를 통하여 이중권력에서 인간의 선택이 어떠한 것일 수 있는지 예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버지와 아들은 언제나 일치되어 있기에 영광이란 단어는 요한 복음사가의 십자가신학에 자주 쓰이는 신학적 용어에 해당한다. 아버지의 영광이 동시에 아들의 영광이 된다는 것은 예수는 창조이전의 빛의 실체로 바라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요한복음1장) 그 사랑은 아버지와 아들의 영광에 멈추지 않고 아들을 통해 드러난 아버지의 영광과 아버지로 인해서 드러난 아들의 영광은 그를 믿고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모든 믿는 이들과 내적으로 결속되어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여기서 아들과 아버지의 소통을 천둥이나 천사의 소리로 알아들은 것은 그리스사람들로 대표되는 이방인들이 십자가 사건을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드러낸다. 십자가 사건을 영광으로 바라볼 수 있는 것은 그 자체가 이미 어떤 초월, 은총이 아니면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30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그 소리는 내가 아니라 너희를 위하여 내린 것이다. 31 이제 이 세상은 심판을 받는다. 이제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밖으로 쫓겨날 것이다. 32 나는 땅에서 들어 올려지면 모든 사람을 나에게 이끌어 들일 것이다.” 33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으로, 당신께서 어떻게 죽임을 당하실 것인지 가리키신 것이다.

 

그 소리는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위한 것이라는 것에서 청중에게 십자가의 영성에 대한 믿음을 촉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늘의 소리는 청중을 깨치기 위한 것이다. 이 세상의 두목은 요한 복음에서에 사탄, 악마로 표현되며 이 세상을 지배하는 어둠의 세력에 대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악의 세력은 추방됨으로써 심판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이 세상의 어둠이 예수의 십자가상의 사랑 앞에서, 즉 빛 앞에서 무력해짐을 의미한다. 이제 인간은 더 이상 어둠 뒤에 숨거나 빛을 차단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제라는 말에서 구원의 현재성, 은총의 현재성을 강조한 것이다.

 

여기서 보편적인 구원의지가 다시금 언급된 것은,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하느님의 빛의 세계로 들어올려지게 됨으로써 이 세상의 어둠이 사라지고 예수의 보편적인 구원의지가 이 세상을 다스리게 되는 통치의 근간임을 강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땅에서 들어올려진다는 것은 십자가상의 죽음을 뜻하는 것뿐 아니라, 그 사랑을 영적으로 목격한 이들의 자기초월의 영성을 소환한다. 십자가의 수난이 모든 인간을 구원하는 보편적인 구원론이 된 이유다.

 

예수가 보여준 사랑의 극치야말로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어오는 결과의 원인이 되며 그것은 예수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 역시 예수의 십자가와 영광에 동참한다는 의미이다. 즉 예수와 인격적인, 영적인 결속관계를 의미한다. 즉 하느님의 영광뿐 아니라 예수 자신의 영광이자 그를 따르는 이들의 영광으로 이끈다는 것이다. 여기서 예수는 자신에게 닥칠 죽음을 이미 알았을 뿐 아니라 그 죽음이 지닌 의미까지 알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기에 예수의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은 모든 사람을 위한 보편적인 구원의지를 재확인시키고 있다고 할 수 있으며 십자가 수난의 방향성을 분명히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3-2

 

그렇다면, 인간의 보편적인 구원의지가 왜 굳이 십자가여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질문해야 한다. 사실 십자가신학을 이해하지 않고는 신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두 개의 힘에 무차별적으로 노출된 채 이 실존의 순레를 하고 있다.

 

우리는 정치적인 용어로 여소야대에서 주로 사용하는 ‘이중 권력’ - ‘디바이드 거버먼트(Divided Goverment)’ 시대를 살고 있다. 21세기를 통과하는 이들은 돈과 사랑, 혹은 이름과 사랑의 이중권력에 지배받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선악이 분명하거나 빛과 어둠이 확연히 갈리면 하나를 취하면 된다. 그런데 돈과 사랑은 그것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선택하고 결정하는 이의 선택과 결정, 절제에 따라 빛과 어둠 선과 악이 된다는 점이다. 실존 자체가 십자가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십자신학에 대한 의미를 분명히 해야 한다고 할 수 있다.

 

이 부분은 [보라,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정호승의 <봄길>)]을 보충하여 썼다.

 

『하느님은 왜 사람이 되셨는가?』(안셀무스)라는 질문은 한 개인의 질문이 아니라 인류의 질문이다. 인류 역사가 시작한 이래, 그동안도, 오늘까지도, 앞으로도 계속될 이 질문에 대해 교회는 조직신학의 인간론에서 속죄론에 대한 다양한 통찰이 반론과 반론으로 이어지면서 예수성심으로 수렴되었다. 신학적으로 속죄론의 패러다임을 바꾼 신학자들의 사유를 살펴보는 것은 우리 신앙의 여정을 확인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오르게네스(185-254)는 『원리론』에서 총체적 구원론인 <속량이론>을 통해 강생의 원리와 인간구원을 설명하려 했다. 그의 <속량이론>에 따르면 사탄이 인간들을 인질로 잡았기 때문에 인간에게 자유를 되돌려주려고 성자께서 인간이 되시어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셨다는 것이다. 오르게네스의 이론은 교회 안팎에서 그 자신조차 위기에 처하게 했지만, 오르게네스의 영성이라는 말이 오늘날도 회자될 정도로 속량이론이 초기 교회를 끌어갔다고 할 수 있다.

 

①악마의 권세 아래서 행동하며 악마의 사악에 복종하는 이 계층들 가운데 어떤 존재들은, 자신들 안에 자유의지와 능력으로 말미암아 미래의 시대에는 언젠가 선으로 돌아올 수 있는가? 아니면 계속되고 고질화된 사악이 습관이 되어 마침내 본성처럼 죽어지는가?

 

 

그러나 겐테버리의 대주교 안셀무스(1033-1109)는 『하느님은 왜 사람이 되셨는가?』에서 육화된 신비를 인간 구원과 관련해서 <속량이론>에는 이성적 근거가 부족하다고 바라보았다. <속량이론>이 악마의 권리를 지나치게 인정하여 하느님의 절대적인 권능을 위협하는 듯하다는 것에서 안셀무스는 출발한다. 안셀무스는 하느님이 인간 본성의 비천함을 회복하고자 받아들인 ‘필연적인 이유’를 이성적으로 설명하려 했다.

 

②“죄에 대해 하느님께 빚진 것을 사람이 갚지 않는 한, 그 빚은 해결 될 수 없었다. 그 빚은 너무나 커서 하느님만이 갚을 실 수 있었다. 따라서 똑같은 인물이 사람인 동시에 하느님이어야 했다. 하느님께서 필연적으로 자신의 단일한 인격안에 인성을 취하셔야 했다. 그의 본질상, 갚아야 하지만 갚을 수 있는 분 안에 있게 하기 위해서이다.(....) 결국 하느님은 그 어떤 것도 필연에 의하지 않는다. 신이 자신의 불변성으로 인해 그가 시작한 일을 완성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안셀무스는 <속량이론>이 아니라 <대속이론>을 발전시켰다. 안셀무스에 따르면 하느님이 창조하신 세상의 아름다운 질서가 파괴된 것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잘못 썼기 때문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인간이 저지른 이 죄악은 너무나 커서 인간의 죽음으로 보상할 수 없다. 그런데 삼위일체 하느님은 본래 인간이 하느님을 직관하는 가장 큰 행복에 이르도록 지복직관의 상태에 이르도록 인간을 계획하셨다. 이 계획이 실현되려면 파괴된 세상 질서가 복구되어야만 한다. 즉 손상된 하느님의 정의와 명예가 회복되어야만 하는데, 그러려면 하느님만큼 무한한 가치를 지닌 존재의 자발적인 보상이 필요하기에 성자의 강생-육화가 필연적이라고 보았다. 성부께서 시작하신 구원업적을 이루기 위해 하느님의 말씀인 성자가 자원하여 인간의 구체적 역사적인 인격적 본성을 취했다는 것이다. 이 육화를 통해 신적-로고스 안에서 인간의 본성이 치유되도록 구원받게 된 것이라고 설명한다.

 

안셀무스의 <대속이론>은 많은 신학자들의 비판에 직면했다. 안셀무스 자신에게 익숙했던 사회법적인 정의-교환정의에 따라 구원을 축소한 해석을 내놓았다는 것이다. 게르만족의 명예회복관습에 따르면 명예가 손상된 자의 품위에 따라 그에 상응하는 보상이 주어져야 한다. 화해할 능력이 없는 인간을 위해서 인간이 되신 하느님이신 그리스도가 오직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용서와 화해를 성취했다는 것은 아가페의 무조건적 사랑을 간과했다는 반론이었다.

 

안셀무스는 강생의 이유에 더 나아가 하느님의 육화는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된 인간을 행복하게 만드시려는 것이기에 하느님의 이 계획은 실패할 수 없는 없으리라는 것이 '필연적인 이유'라고 덧붙인다. 각 사물에는 올바름 즉 신적인 조화가 존재하므로 모든 피조물에 내재한 올바름은 하느님께서 전능하신 언제나 올바른 것을 원하시기에 최종적으로 결코 실패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이론은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아들이 자원하여 죽음을 받아들임으로써 섭리의 필연성과 인간의 자유의지와 조화를 이룬다는 것에 주목하여 11세기 이후, <대속이론>이 교회의 교의를 이끌게 된다.

 

그러나 성자의 죽음이 지닌 효력만을 강조하다보니 그리스도의 고통이 갖는 구원론적 가치를 충분히 조명되지 못했다는 비판이 항상 제기되었다. 또한 죄없이 돌아가신 성자의 업적과 죄지은 인간의 차이를 강조하다보니 교부들이 주장하는 그리스도와 신자들과의 관계 <머리와 지체의 관계>를 설명할 길이 실종되었다는 것이다. 안셀무스의 <대속이론>이 죄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그리스도와 인간 사이의 유기적 연결을 찾기가 어렵다고 본 것이다. 안셀무스의 <대속이론>은 하느님과 외부세계를 본질적으로 반대되는 위치에 놓고 있다는 점에서 교회사 안에서 복음주의와 자유주의는 늘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강생의 신비와 십자가신학을 아우르는 사랑이 인간의 이성으로는 해명할 수 없는 초자연적 신비이며 이를 해명해야 하는 숙제를 인류에게 안겨준 셈이라고 할 수 있다.

 

페투르스 아벨라드두스(1079-1142)는 『속죄의 본질』에서 안셀무스의 대속이론에 대해 <창조신앙>으로 비판한다. 인간의 이성으로만 사랑이신 신 존재증명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아가페 사랑은 이성의 측면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는 것에서, 하느님이 자신을 위해 자신을 속죄제물로 바쳤다는 것에 대해 마치 십자가의 죽음을 하느님의 정의의 실현으로 둔갑시켜 구약으로 시간을 돌려놓음으로 교회는 <영원한 생명>을 말하지만 실은 <영원>이 실종되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피가 어떻게 인간의 죄를 정화시켜주었는지? 신의 정의가 충족되어야지만 신의 자비가 실행되는 것인지? 사랑보다 더 큰 죄가 있는지? 등을 안셀무스가 간과했다는 것이다. 인간의 어떤 죄보다도 하느님의 사랑이 씻을 수 없는 죄는 없다는 <자비론>이 핵심이다.

 

③“하느님은 사랑입니다. 요한 1서에 35이나 나오는 바로 그 사랑이십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느님이 사람을 살리기 위해 사람으로 나신 것보다 더 큰 사랑이 있겠습니까?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자기 목숨을 내주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이 있겠습니까. 하느님이신 예수님이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은 하느님의 속성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속성을 행사하는 것을 포기하신 것입니다. 전능을 빼버린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을 없습니다. 그것이 강생한 예수가 보여준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페투르스 아벨라드두스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으신 것만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다는 것이 강생신학과 십자가신학을 아우르는 총론이라고 바라본 것이다. 하느님이 창조한 인간을 죄지은 인간으로만 국한시킬 수 없다는 창조신학이 그 바탕이다. 인간이 죄를 짓는 순간조차도 인간은 더 큰 인간의 위의가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죄가 아무리 클지라도 하느님의 사랑보다는 클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느님의 사랑은 그 어떤 교환행위를 바탕으로 하고 있지 않는 아가페라고 바라본 것이다.

 

인간의 죄는 인간의 한계를 의미한다. 인간의 한계와 신의 사랑의 무한은 교환불가능하기에 비교불가능하다는 것이 초점이다. 신은 분명 마리아를 통하지 않고도 이 세상에 올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이 있었을 것이다. 같은 맥락으로 십자가의 죽음이 아니고도 당신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하실 수 있으셨을 것이라는 게 안셀무스 이론에 대한 반론의 초점이다. 굳이 십자가여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오직 조건없는 사랑이라고 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사랑이라는 빛으로 어둠이라는 죄의 사슬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으로 창조신앙의 원천인 사랑에 방점을 찍었다고 할 수 있다.

 

신학자 몰트만은 십자가의 수난과 고통에 대해, 인간은 그 자체로 유한하기 때문에 고통이 불가피하다고 바라본다. 창조신앙에서 고통과 수난의 방향성을 바라본 위르겐 몰트만은 온전한 인성이 온전한 신성과 어떻게 닿아 있는지를 창조신앙에서 바라본 것이다.

 

④인간이 겪는 고통은 인간 존재의 유한성 자체에 대한 근원을 가지고 있으며, 창조 자체에 근원을 갖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사랑은 항상 고난당하는 사랑이다. 사랑에는 오직 무죄한 고난만이 존재할 뿐이다. (위르겐 몰트만,『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신학자 몰트만은 인간의 고통에 대해, 인간은 그 자체로 유한하기 때문에 고통이 불가피하다고 바라본다. 우리는 그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유한한 인간끼리의 생존의 현장에서 언제나 이타적 유전자가 작동되지 않기에 고통을 주고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런데, 고통이 창조자체에 그 근원을 두고 있다고 바라본 것을 무슨 이유일까. 몰트만은 창조때,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의지는 어둠을 상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데서 고통의 근원을 찾는다. 자유의지는를 제대로 쓸 수 없는 인간에게 창조의 선물로 자유의지가 주었다는 것은 사랑의 대 모험이라는 것이다. 사랑에 자유가 없다면 그것은 사랑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유를 쓸 수 없는 사람에게 자유가 주어졌다는 것은 자유의 딜레마라는 것이다. 신에게는 선악의 대립이 문제가 되지 않지만, 인간에게는 그것을 뛰어넘고 통합할 수 있을 때까지, 사랑은 항상 고난당하는 사랑일 수밖에 없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사랑은 그 자체로 고난당하는 사랑이라고 바라본 것이다.

 

요셉프 라칭거 추기경(베네딕토16세교황, 1927-2023)은 십자가에서 보여준 그 사랑은 무엇인가에서 1코린토 15장 45절을 인용하여 바오로의 영성과  같은 맥락에서 예수를 마지막 아담, 궁극의 인간이라는 십자가의 사랑에 주목한다.

 

⑤십자가는 계시이다. 십자가는 아무것이나 계시하는 것이 아니라 신과 인간을 계시한다. 십자가는 신이 누구이며, 인간이 누구인가를 드러내준다(...) 액체 호모(ECCE homo) 보라, 이것이 그 사람이다(요한19,5) 인간이란 이런 것이다.(...) 인간적 실패의 심연에서 그보다 훨씬 그지없는 사랑의 심연이 드러나는 것이다.(159,231)

 

요셉라칭거 추기경은 사도신경강해에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신앙안에서 십자가는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는가? 라는 질문에 모든 신앙인은 어떤 식으로든 답해야 한다는 전제하에, 밀알의 죽음이 무엇을 의미하며,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른다는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해, <본시오 빌라도 치하에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묻히셨으며>를 가톨릭 교리의 근간을 이루는 대속개념과 보속개념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세 측면에서 전한다.

 

⒜세상 창조 이전부터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시어 저에게 주신 영광을 그들도 보게 하여는 것입니다(요한17, 24) 하느님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과 화해 하셨다(2코린5, 19) 그리스도의 봉헌은 우리가 드리지 않으면 하느님이 갖지 못할 그 무엇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전적으로 받는 자가 되어 우리 자신을 하느님이 온전히 차지하도록 하는 데에 있다. 하느님으로 하여금 우리 실존 안에서 역사하도록 하는 일, 이것이 그리스도적 봉한과 감사의 핵심이다.(요셉 라칭거)

 

그리스도적 봉헌은 달리말해 하느님과의 화해이란 무엇인가?를 바라보는 것이며, 이는 그리스도적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적 정의에 대해, 우리 죄를 대신하여 수난하고 죽으심, 그 죽음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필요하다고 역설한 것이다. 인간이 신에게 나아가 자신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신이 인간에게 내려와 인간에게 자신의 사랑을 알려주었다는 강생의 신비가 십자가의 방향성을 지시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십자가에서 보여주는 그리스도적 정의는 세상의 정의가 아니라 무상의 은혜와 은총이 된다.

 

하느님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과 화해 하셨다(코린토후서, 5, 19)라고 전하는 것에서 그 의미가 분명해진다.  하느님과 인간의 화해의 초점은 십자가는 인간 스스로 정의를 구현할 수 없다는 점에 방점을 찍으며, 희생이 정의구조의 작용이 아니라 십자가는 자신을 남김없이 주는 사랑의 철저성으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에 초점을 맞춘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적 실존의 출발점이고 십자가 신학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 강생의 신학과 십자가 신학의 접점인 사랑의 방향이 일관된다고 할 수 있다. 아래에서 위로 향하는 사랑이 아니라 위에서부터 아래로 내려온 신의 사랑이 바로 <들어올려짐>의 의미인 것이다. 하느님의 어리석은 사랑이 스스로를 줌으로써 십자가는 우리가 공로로 얻을 수 있는 보상이나 데속이 아니라 그분이 인간을 향한, 인간을 위한 자비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화해는  그분의 사랑에 감사(Eucharistia)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덕행이나 업적을 하느님께 바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도리어 그 무상의 선사를 받음으로 인해, 그 사랑을 온전히 받음으로써 이 감사는 화해의 제물이 된다. 그렇기에 십자가신학의 최종의 정점은 인간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께 바침으로써 하느님만을 기리는 것이 아니라 선사로 받은 것을 온전히 인간이 받음으로써 하느님을 유일한 주님으로 알아모시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봉헌은 우리가 드리지 않으면 하느님이 갖지 못할 그 무엇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전적으로 받는 자가 되어 우리 자신을 하느님이 차지하도록 하는 데에 있다.  그것은 하느님으로 하여금 우리 실존 안에서 역사하도록 하는 일, 이것이 그리스도적 봉헌과 감사의 핵심이자 십자가 신학의 방향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시던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요한 13,1) “염소와 송아지의 피가 아니라 단 한번 성소로 들어가시어 영원한 해방을 얻으셨습니다”(히브리서9.12) 십자가를 통하여 양쪽을 한 몸 안에 서 하느님과 화해시키시어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함께 지어지고 있습니다(에페소2, 11-22)인간과 하느님의 화해의 중개로 드리는 십자가의 신비는 모든 것을 주는 사랑의 표출, 하느님에게 드린 참 화해의 제물이 된다.(요샙 라칭거)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이들이 자신에게 설득해야 하는 십자가 신학에 대해, 제자들의 예에서 알 수 있듯,  십자가는 예수성심에 대한 영성과 연결된다. 이는 예수의 부활이 비록 제자들에게 이 세상의 어둠을 지배하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십자가의 수난이 왜 꼭 필요했는지? 인간과 하느님의 화해에 왜 당신 아들의 죽음이 필요한 것인지? 십자가의 수난이 무슨 소용이 있었는가를 해명하는 문제를 남겨주었기 때문이다.

 

예수의 십자가상의 수난과 죽음이 어떻게 화해의 제사로 볼 수 있는가? 예수는 당신 스스로의 피로 하늘과 땅의 화해를 이루었다는 의미가 무엇인가. 십자가 상에서 흘린 피는 하나의 물질적 제물, 물량적으로 헤아릴 수 있는 속죄수단으로 보고 한 말이 아니라 끝까지 간다고 한 그 사랑(요한13,1)의 구현으로 볼 수 있을 때 비로소 십자가의 영성이 무엇인지 바라볼 수 있다. 예수가 흘린 피는 그의 사랑이 온전함의 표징, 즉 자기 자신 이상도 이하도 바치지 않는다는 총괄적 표현에 해당한다. 모든 것을 주는 사랑의 표출로 이것이 세상과 참 화해를 가능케하는 진정한 제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느님께는 대한 인간의 <!>만이 참 제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랑에서 나온 <네>만이 하느님이 원하는 유일한 제물이 된다. 그것만이 의의를 지닌 참다운 제물이고, 올바른 화해의 제사가 된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관계에서 이미 예표된 그 믿음이 화해의 의식인 것이다. 인간이 하느님께 자신을 수락하는 행위는 대속의 개념을 죄에 방점을 찍은 것이 아니고 순명과 사랑과 믿음에 방점을 찍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자 빌라도가 그들에게 “자, 이 사람이오(Ecce homo)”라고 말하였다(요한19,5)그 시대가 지난 뒤에 내가 이스라엘 집안과 맺어 줄 계약은 이러하다. 주님의 말씀이다. 나는 그들의 가슴에 내 법을 넣어 주고, 그들의 마음에 그 법을 새겨 주겠다. 그리하여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그때에는 더 이상 아무도 자기 이웃에게, 아무도 자기 형제에게 “주님을 알아라.” 하고 가르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낮은 사람부터 높은 사람까지 모두 나를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의 허물을 용서하고, 그들의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겠다.(예레미야서31,31-34) 예수님께서는 순종을 배우셨고,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히브리서 5,7-9)십자가는 자기 계시이다. 십자가는 아무 것이나 계시하는 것이 아니라 신과 인간을 계시한다(요셉 라칭거)

 

그런 맥락에서 십자가 신학은 진정한 파스카축제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자기초월이 파스카의 의미라는 것에서, 자기초월(Ek-stase)은 자신을 무한히 넘어 이를테면 찢어지다시피, 인간이 가늠할 수 있는 영역을 넘어선,  가능해 보이는 한계를 넘어선, 확장되어야 하는 한, 그만큼 십자가의 고통은 찢김이며, 죽음에서만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밀알이 된다. 그 고통안에 내재한 희생원칙은 파괴가 아니라 사랑에 있다. 그리고 그 사랑이 열고 헤치고 십자가에 못박고 찢길 때만 고통의 요소가 희생에 속할 수 있다.

 

여기서, 신이 없다는 무신론의 세계와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을 연결하는 단 하나의 길을 십자가 밖에 없다는 말이 성립된다. 언제나 그리스도적 고난을 통하여 우리 스스로 그 사랑을 체험(코린토2, 4, 10)하게 됨으로써. 십자가가 뜻하는 이 찢김, 이 결렬 안에서 모든 찢김과 상처를 아물게 하기 위해서 그것을 몸에 지녔든 분, 그 결렬을 먼저 몸에 받으셨기에 분리와 결렬을 그치게 하신 분, 그분은 한 극에서 다른 극으로 연결한 사랑이 바로 십자가에서 보여준 그 사랑의 양극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십자가의 방향이다. 궁극적으로 고통이란 게쎄마니아의 기도, 하늘에서 지옥까지 이르는 사랑의 확장이며 구현이다. 누구나 하느님 안에 잠겨있으면서 동시에 하느님에게 다가갈 수 없는 피조물의 비참에 잠겨있도록 자신의 존재를 확장하려는 이는 그야말로 자신의 실존안에서 찢어짐을 경험하게 된다. 참으로 사랑의  십자가 못 박히게 된다. 이렇게 사랑으로 인해 자기 균혈을 감당하는 것이 밀알의 사랑이며 그것이 양극을 잇는 사랑의 실현이며 그 사랑이 이루는 폭의 구체적 표현이다. 이를 인간이라는 최소의 것에 담긴(contineri a minimo) 신의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밀알의 사랑, 십자가의 들어올려짐에서 우리는 고통의 향방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하게된다. 그것은 그리스도적 수난이란 자기자신이 자기로부의 탈출이 되는 파스카의 체험이라고 할 수 있다. 울;가 건너가야 하는 홍해바다는 바로 심연에 덮혀 있는 우리 자신인 것이다. 사랑으로 인한 자아초월 혹은 몰아의 사랑에서, 신과 인간을 향하는 쌍방향의 이 십자가의 사랑은 전적으로 인간 중심적인, 인간에게 관련된 신 중심으로 나아가는, 신에게 인간 자체를 내 맡기는 일이 된다. 여기서 십자가는 무엇이 신이며 무엇이 인간인가를 동시에 계시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밀알의 사랑이란 자기-초월이며, 온전한 자기귀환이며, 진정한 파스카의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십자가의 수난에서 보여주는 신의 초월은 절대적 존재의 초월을 확인하는 데서 끝나는 게 아니라, 그 초월을 목도하는 인간의 자기-초월을 소환한다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앞에서 언급하였듯, 정치적인 용어로 ‘여소야대’에서 주로 사용하는 ‘이중 권력’ - ‘디바이드 거버먼트(Divided Goverment)’ 시대를 살고 있다. 21세기를 통과하는 이들은 에외없이 돈과 사랑 혹은 이름과 사랑 등 이중권력에 지배받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돈 때문에 죽거나 우는 사람은 있지만, 사랑 때문에 죽거나 우는 사람은 적다. 선악이 분명하거나 빛과 어둠이 확연히 갈리면 하나를 취하면 된다. 그런데 돈과 사랑은 그것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선택하고 결정하는 이의 선택과 결정, 절제에 따라 빛과 어둠, 선과 악이 된다는 점이다. 이미 우리의 실존 자체가 틈과 사이, 고통과 상처를 내장한 십자가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십자가위에 높이 들어올려진 그분을 바라보고 따른다는 것은 실존의 방향을 ‘매순간’ 그분의 목표와 사랑에 일치 시키겠다는 부단한 결단이라고 할 수 있다.

 

글을 마치며,

 

Ⓐ20 축제 때에 예배를 드리러 올라온 이들 가운데 그리스 사람도 몇 명 있었다. 21 그들은 갈릴래아의 벳사이다 출신 필립보에게 다가가, “선생님, 예수님을 뵙고 싶습니다.” 하고 청하였다. 22 필립보가 안드레아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아와 필립보가 예수님께 가서 말씀드리자, 2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때가 왔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25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 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26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27 “이제 제 마음이 산란합니다.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합니까? ‘아버지, 이때를 벗어나게 해 주십시오.’ 하고 말할까요? 그러나 저는 바로 이때를 위하여 온 것입니다. 28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십시오.” 그러자 하늘에서 “나는 이미 그것을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겠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29 그곳에 서 있다가 이 소리를 들은 군중은 천둥이 울렸다고 하였다. 그러나 “천사가 저분에게 말하였다.” 하는 이들도 있었다. Ⓒ30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그 소리는 내가 아니라 너희를 위하여 내린 것이다. 31 이제 이 세상은 심판을 받는다. 이제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밖으로 쫓겨날 것이다. 32 나는 땅에서 들어 올려지면 모든 사람을 나에게 이끌어 들일 것이다.” 33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으로, 당신께서 어떻게 죽임을 당하실 것인지 가리키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