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양황금매화 매화나무 접목묘(충북농원)
에토스(Ethos), 파토스(Pathos), 로고스(Logos), 사랑에 미치지 않고서도 사랑이 될 수 있을까?
-사순4주,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를 중심으로
1. 박용하, 「입」 & 「심장이 올라와 있다」
뒤는 절벽이고/앞은 낭떠러지다//돌이킬 수 없는 허공에서/너는 뛰어내린다/너는 그처럼 위험하고/너는 그처럼 아슬아슬하다//돌이킬 수 없는 생처럼/한 번 가버리는 생처럼/뒤돌아봐도 그만인 사람처럼/너는 절대 난간에서 뛰어내린다//아마도 너의 뿌리는/너도 대부분 모를 것이고/너의 착지도 너의 얼굴은 영영 모를 것이다 (박용하, 「입」)
눈에서 빛이 반짝거리는 사람이 있다/그것은 번쩍이지 않고 반짝인다/그런 빛을 보는 날은 벌써 특별하다/눈에서 광채가 번뜩이는 사람이 있다/가까이 하기 힘든 힘이 느껴진다/심장에서 올라온 눈물이 겨울 나뭇가지에/얼음처럼 달려 있는 눈도 있다/퀴퀴한 냄새가 진동하는 눈도 있다/그건 숫제 고인 물웅덩이라고 해야겠다/기름 둥둥 떠다니는 세숫대야라고 해야겠다/어떤 빛도 시들고 암흑만 출렁거리는 눈도 있다/끈적거리는 눈빛과 반질반질한 눈빛,/흐리멍덩하고 퀭한 눈빛,/곧 덮칠 듯이 아슬아슬하게 달려 있는 살기등등한 눈빛.../빛의 족보도 가지가지다/아무 데로도 향하지 않는 빛이 마른 잎처럼 겨우 붙어 있거나/어떤 넋도 올라올 것 같지 않은 폐광 입구 같은 눈도 있다/슬프다, 십분만 사람의 눈을 들여다보면/한 사람의 바닥이 드러난다/깊은 광활함, 아득한 유한......그런 눈빛이 그립다/사람의 눈에는 그 사람의 심장이 올라와 있다/중요한 순간이다 (박용하, 「심장이 올라와 있다」)
박용하의 「입」 과 「심장이 올라와 있다」는 입에서 나온 그 사람의 말, 눈으로 표현된 그 사람의 삶의 지향점에 대한 언어의 육화에 관한 시다. 말하자면 시로 쓴 세한도라고 할 수 있다. 낫을 숯돌에 갈 듯, 언어를 심장에 갈아서 뱉은 해타에 해당한다.
박용하의 「입」은 그 사람에게서 나온 말은 세상에 뛰어내린 그의 실존이라는 명제를 담고있다. 한 사람에게서 발설된 말은 그 사람의 생의 뿌리를 추론하게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래서 말하는 본인은 자신의 말이 어떻게 구천을 떠돌고 있는지 잘 알지 못한다. 그 말이 어디에 착지했는지 정작 이 세상에 뛰어내린 말의 향방은 말을 뱉은 본인은 잘 모른다. 말은 누군가의 심장에 박힌다는 것을, 자신이 뱉은 말이 어디에서 떠돌고 있는지 알았다면,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말 보다는 긴 침묵에 들어갔으리라.
「입」을 변호하는 시가 바로 「심장이 올라와 있다」가 아닌가 싶다. 예컨대 입만 열면 폭력적인 언어를 뱉는 사람의 눈을 가만히 바라본 적이 있다면 알 것이다. 그 사람의 사슴같은 순정한 눈빛을 보았다면, “사람의 눈에는 그 사람의 심장이 올라와 있다/ 중요한 순간이다” 그래서 울고 싶어진 적이 있었다면, 입에서 뛰어내린 말이 그 사람의 과거의 상처 트라우마라면 눈에서 발산된 빛은 그 사람의 영혼의 상태가 아닐까 하는 진단을 하게 된다.
신형철을 덧붙인다. 뒤는 절벽이고 앞은 낭떠러지인 것이 무엇일까. ‘입’일 것이다. 입 속은 절벽이고, 입 바깥은 낭떠러지가 아닌가. 그렇다면 거기서 ‘뛰어내리는 너’는 말일 것이다. 말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너의 뿌리”), 그 말이 어디에 도달할 것인지(“너의 착지”)를 알지 못한다. “사람의 눈에는 그 사람의 심장이 올라와 있다/ 중요한 순간이다”(「심장이 올라와 있다」)
사람의 눈에 심장이 올라와 있다면 사람은 언어로 소통을 하는 것이 아니라, 심장이 담긴 눈빛으로 소통을 한다는 말이 맞으리라. 눈빛의 소통은 폭력적인 말들을 뛰어넘을 수 있는 불립문자의 상태라고 할 수 있다.
남마리안나 수녀님께서, 고맙습니다!
2. 인간의 원초적인 갈망은 사랑받기를 원하는 것이고, 인간의 원초적인 공포는 사랑을 잃지 않을까하는 것이다(요한네쓰 로츠)
사람이 입으로 소통하는 것이 아니라 심장으로 소통하다는 말은 사랑만이 인간을 설득할 수 있다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아우구수티누스는 선한 사랑은 그를 선하게 만들고 악한 사랑은 그를 악하게 만든다고 『그리스도교양』에서 사랑에도 서열이 있다고 다음과 같이 전한다.
사물들을 온전하게 보는 사람은 의롭고 거룩하게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는 또한 이치에 맞는 사랑을 품은 사람으로서 사랑하지 말아야 할 것을 사랑하지 않고, 사랑해야 할 것을 사랑하지 않는 일 없고, 덜 사랑할 것을 더 사랑하지 않고, 더 사랑해야 할 것을 덜 사랑하지 않으며, 더 ᄉᆞᆼ해야 할 것과 덜 사랑할 것을 동등하게 사랑하지 않고, 동등하게 사랑할 것을 덜 사랑하거나 더 사랑하는 일 없다. 모든 죄인은 죄인으로서 사랑해서는 안되고 사람으로서는 하느님 때문에 사랑해야 한다.
플라톤은 『향연』에서 사랑 그 자체를 사랑하게 되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렇다면 어떤 열성과 노력을 다해 사랑스런 것들을 영원히 소유할 수 있을까요?” 벗이여, “모든 인간은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잉태중입니다. 잉태와 출산은 신적인 것입니다. 필멸의 존재 안에 내포된 불사의 요소입니다. 정신적으로 임신한 자는 정신적으로 교감할 수 있는 자와 사귀고 싶어합니다. 그들은 몸으로 낳은 자식보다 더 아름답고 불사적인 지식들을 공유하기 때문입니다.” “지혜로운 디오티마여! 어떻게 그것이 가능합니까?” “먼저 한 사람의 몸을 사랑하여 그 안에 아름다운 담론을 낳아야 합니다. 이로 인해 아름다운 것을 식별하게 되면 사랑의 신비를 향해 올바로 나아가거나... 한 아름다운 몸에서, 두 아름다운 몸으로, 두 아름다운 몸에서. 모든 아름다운 몸으로. 모든 아름다운 몸에서, 아름다운 활동으로, 아름다운 활동에서, 아름다운 지식으로, 아름다운 지식에서 아름다움 것 자체만을 대상으로 하는 저 특별한 지식으로 나아감으로써 드디어 아름다운 것 자체가 무엇인지 알게 되는 것이라오.”
이 부분은 2020년 사순4주 [한인격이 한 인격에게]라는 글에서 재인용한 것이다.
요한네스 로쯔는 플라톤과 아우구스티누스를 종합한 연장선에서 『사랑의 세 단계』를 집필한다. 그는 <마음과 목숨과 정신을 다하여>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에로스-필리아-아가페>의 관계를 통해 사랑을 하나로 통합시킨다. 마음은 에로스와 밀접한 관련을 갖고, 정신은 필리아와 목숨은 아가페와 관련되며 이 세 사랑의 방식은 결국 하나로 모아진다.
하나의 사랑이 에로스(질료적, 감각적, 경험적, 가시적), 필리아(정신-인격적 사랑) 그리고 아가페(신적-은총적)의 세 가지 양식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이 세 양식들은 다시 하나의 사랑 안으로 삼투한다. 이 삼투를 통해서 사랑이 비로소 계발된 전체로서 드러나고 이 전체 속에서 오직 사랑이, 온전한 사랑 자체가 된다고 본 것이다.
한 사람이 이 삼각형 속에서 직관화되는 사랑의 충만 속에서 깊이 생활할수록 그는 사랑이 절대적 시여(absolutes Geben)이면서 동시에 절대적 수혜(absolutes Empfangen)이며, 절대적 제어이자 동시에 절대적 자유이며, 그리스도로부터 십자가형에 처해지는 절대적 곤궁이자 동시에 부활의 절대적 기쁨이라는 것을 더 확실하게 체험하게 될 것이다. 관건이 되는 것은 에로스에 대한 모든 부당한 편견을 없애고 꼭 필요한 생산적 힘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 중심 역할은 필리아가 수행한다. 필리아는 한편으로는 에로스를 정화하고 에로스의 온전한 인간적 면모를 보전시키며 인격적 사랑으로서의 아가페를 위한 길을 마련한다. 인간으로부터 상승하고 자체적으로는 구원을 필요로 하는 에로스와 필리아라는 이 두단계의 사랑과 하느님으로부터 은총으로 내려오는 아가페가 유대된다. 이 아가페는 다른 두 단계의 사랑에게 구원을 가져다줄 뿐만 아니라 인간에게 사랑의 새로운 공간을 열어준다.(요한네스 로쯔는 『사랑의 세 단계』)
인간은 사랑의 세 단계 속에서만 비로소 사랑의 충만에 이르게 된다. 여기서 관건이 되는 사랑의 단계란 매 단계가 다른 두 단계들을 배제하거나 또는 한 단계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다른 한 단계를 희생해야하는 그런 의미의 단계가 아니다. 이 단계들은 오히려 하나요, 동일한 사랑의 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부분, 국면들은 서서히 계발되고 서로 보완함으로써 성숙되며, 이 성숙의 정도에 따라 서로 더 내적으로 깊이 침투하며, 그럼으로써 인간을 전면적으로 사랑하는 자가 된다.
사랑의 본질은 우리의 파악능력으로부터 벗어난 아무리 해도 결코 완전히 규명할 수 없는 감추인 신비로 나타난다...사랑에 대해 말하는 것은 그래서 달변이 아니라 눌변이다. 플라톤은 <향연>에서 "인간 속에서 홀연히 정열적인 모습으로 나타나 불가항력적인 운명으로 인간을 엄습하는 힘"으로 묘사한다. 논리나 이성이나 의지로 제어하지 못하는, 통제할 수 없는, 무모한 것이 사랑이다. "당신의 부활, 그 사랑" 예수님의 사랑을 보면 알 수 있다.
사랑은 인간이 지닌 모든 에너지들을 움직이고 활성화시키거나 마비시키는 기본적인 힘이요, 이 에너지들을 선하고 건설적인 방향으로 이끌거나 파괴적인 방향으로 이끌수 있는 기본능력이다. 하여, 사랑은 인간의 다른 어떠한 힘보다도 더 '결정적 운명'이 된다. 그래서 한 사람의 궁극적인 '인격 평가'는 그의 사랑에 의해 결정된다.
사랑은 우리가 오랫동안 그나 그녀를 만나기전, 간절하게 기다려야만 다가오는 선물이고 은총이다. 누구나 사랑을 원한다. 원하는지도 모르는 원함이다. 우리는 좌절하고 희망을 접거나 성공에 대한 미련을 버리기도 하지만 그러나 사랑을 포기하지는 않는다. 사람이 곧 사랑이기 때문이다. 사랑의 대상이 없을 때에도 우리는 사랑한다. '사랑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렇게 사랑은 삶의 동력이나 목적 같은 것이기도 하다. 구체적 대상을 만나기 전에도 우리는 사랑이라는 이미지에 사로잡혀 있다. 우리는 늘 머리와 가슴속에 사랑을 그리며 산다. 우리는 사랑이 촉발시킨 그 이미지에 맹목적으로 사로잡힌다. 그런 맥락에서 사랑은 익명의 대상에 대한 그리움이라 할 수 있다
또 그 그리움은 이미지에 대한 그리움이기도 하다. 그 이미지는 그리스 신화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를 닮아 있다. 사랑의 이미지는 죽음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이 이미지는 눈앞에서 볼 수 없는 것에 대한 그리움이고, 산 자는 물론이고 특히 죽은 자에 대한 그리움이기도 하다. 죽음이 있는 곳에 이미지가 있고, 그 이미지가 있는 곳에 그리움이 있다. 사랑은 시각적 은유 속에서 살아나고 살아남는다.
사랑이 왜 죽음의 이미지와 닿아 있는지에 대해서 좀 더 부연이 필요하다. '난 -널 -사랑해'에 대한 대상의 태도는 동시에 똑같은 무게로 '나도 당신을 사랑해'로 돌려질 수 없다. '분명한 거절' 혹은 '대답없음' 혹은 '불충분한 대답' 이라는 것으로 돌아왔을 때, 그 어느 것도 불면의 밤 속에서 자맥질하다 불쑥 솟아 오른 최초의 발화에는 닿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랑은 모두 '사계'에 잠겨 있다 라자로처럼 '뜻밖의 깨어남'을 경험한다. 사랑은 동시적이기보다 대부분 '사후적'이다. 부재의 현존이다. 우리가 경험한 수많은 사랑, 예수님의 인류에 대한 사랑을 보면 알 수 있다.
사랑의 대상이 없을 때는 부재하는 이에 대한 욕망을 낳지만. 대상이 있을 때는 현존하는 이에 대한 부재를 낳는다. 대상이 있어도 사랑의 결핍을 체험한다. 사랑은 아가페에 도달하기 까지는 채워질 수 없는 텅빈 우주다. 류시화 시인은 이를 "그대가 곁에 있어도 그대가 그립다"라고 말한다. 이런 측면에서 사랑은 대상을 초과한다. 절대적 충만에 도달하려는 '무한에 대한 갈구'가 사랑이다. 삶의 차원이 아니라 죽음의 차원까지 넘어서려는 것이 사랑이다.
더불어 사랑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가장 잘 증명한다. 자신이 사랑하는 그 대상은 어떤 항목으로도 분류할 수 없다. 자신의 (욕망의) 특이함에 부응하려 온 유일한 이미지다. 그런 면에서 사랑은 이 세상의 상투성을 과감히 벗어난다. 계급을 허물고, 상황을 박차고, 사회의 중심부 담론을 허문다. 현실적으로 줄 수도 없고, 받을 수도 없음에도 사랑한다. 볼 수 도 없고, 만질 수도 없음에도 사랑한다. 사랑하면 할수록 멀어져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한다. 사랑은 혁명이다.
요한네스 로쯔는 사랑의 세 단계로 이 '사랑'을 기술한다. 하나의 사랑이 에로스(감각적 가시적 아름다움), 필리아(정신-인격적 사랑) 그리고 아가페(신적-은총적)의 세 가지 양식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이 세 양식들은 다시 하나의 사랑 안으로 삼투한다. 이 삼투를 통해서 사랑이 비로소 계발된 전체로서 드러나고 이 전체 속에서 오직 사랑이, 온전한 사랑 자체가 된다. 한 사람이 이 삼각형 속에서 직관화되는 사랑의 충만 속에서 깊이 생활할수록 그는 사랑이 절대적 시여(absolutes Geben)이면서 동시에 절대적 수혜(absolutes Empfangen)이며, 절대적 제어이자 동시에 절대적 자유이며, 그리스도로부터 십자가형에 처해지는 절대적 곤궁이자 동시에 부활의 절대적 기쁨이라는 것을 더 확실하게 체험하게 될 것이다.
사랑의 세 단계 속에서만 비로소 인간은 충만에 이르게 된다. 여기서 관건이 되는 사랑의 단계란 매 단계가 다른 두 단계들을 배제하거나 또는 한 단계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다른 한 단계를 희생해야하는 그런 의미의 단계가 아니다. 이 단계들은 오히려 하나요, 동일한 사랑의 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부분 국면들은 서서히 계발되고 서로 보완함으로써 성숙되며, 이 성숙의 정도에 따라 서로 더 내적으로 깊이 침투하며, 그럼으로써 인간을 전면적으로 사랑하는 자로 만든다.
관건이 되는 것은 에로스에 대한 모든 부당한 편견을 없애고 꼭 필요한 생산적 힘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 중심 역할은 필리아가 수행한다. 필리아는 한편으로는 에로스를 정화하고 에로스의 온전한 인간적 면모를 보전시키며 인격적 사랑으로서의 아가페를 위한 길을 마련한다. 인간으로부터 상승하고 자체적으로는 구원을 필요로 하는 에로스와 필리아라는 이 두단계의 사랑과 하느님으로부터 은총으로 내려오는 아가페가 유대된다. 이 아가페는 다른 두 단계의 사랑에게 구원을 가져다줄 뿐만 아니라 인간에게 사랑의 새로운 공간을 열어준다.
철학에서 최초로 ‘사랑’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은 플라톤의 <향연-대화편>이다. 그는 인간의 이성을 향한 성향이자 다른 반쪽인 연인과 결합하여 하나가 되려는 열망을 에로스라고 하였다. 그가 논하는 에로스의 본질은 ‘하나’가 되려는 열망과 추구이다. 플라톤은 인간의 영혼은 이데아의 세계에 속하는 것으로써 현실계의 육체의 속박한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이데아의 본질을 잊지 않는다고 보았다. 따라서 우리는 감각적인 사물안에서 아름다움이 이데아를 회상하게 되고 이러한 회상이 영혼 안에 있는 에로스를 일깨운다. 즉 에로스는 현실계에 잠시 머문 영혼이 이데아의 세계의 에로스를 회상함으로써 실현된다.
그리하여, 사랑'할' 수 있다면 그 자체로 지복인 것이다. '사랑함'이 곧 '사랑받음'이란 역설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사랑하는 자의 인격은 한 인격에서 다른 인격으로 넘나들며 확장되며,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한 처음' 그 '있음existence'으로 고양되고 수렴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사랑의 원래 자리이자, 사람이 있던 원래 자리다. 사람=사랑이다. 우리는 지금 원래 '하나Oneness'였던, 바로 그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다.
3.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요한 3,14-21
Ⓐ그때에 예수님께서 니코데모에게 말씀하셨다.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15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16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17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18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 19 그 심판은 이러하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20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21 그러나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3-1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라고 전하는 요한 3,14-21은 요한복음에만 있는 단독지문으로 다시 태어남의 의미(3,1-13)와 연결하여, 영원한 생명(3,14-21)이 어떻게 가능하며, 그것이 믿는 이들에게 왜 구원의 기쁨인가를 성찰하게 만드는 복음 중의 복음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난주, 사순3주에 살펴본 대로 니고데모는 예수께 호감을 갖고 있는 많은 유대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유대인들뿐 아니라 하느님을 모르는 착한 이들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복음사가는 니고데모를 통해 십자가신학을 성전정화와는 다른 측면에서 반복해서 전한다. 니고데모는 존경받는 바리사이로 훗날, 예수님을 믿지 않는 수석사제들과 바리사이파들이 예수를 잡아들일 궁리를 모의하는 자리에서 예수를 변호하거나(7,51) 예수님이 묻히실 때, 몰약에 침향을 섞은 것을 가져올 정도로(19,39) 신앙의 어떤 단계를 겪으며 예수를 그리스도로 온전히 믿는 인물에 해당한다. 한순간에 그가 빛의 자녀가 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니고데모가 그들에게 말했다. 우리 율법에는 먼저 본인의 말을 들어보고 또 그가 하는 일을 알아보고 난 뒤에야 그 사람을 심판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요한7, 51)
Ⓔ언젠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던 니코데모도 몰약과 침향을 섞은 것을 백리트라쯤 가지고 왔다(19,39-40)
그런 맥락에서, 니고데모는 요한복음사가가 설정한 신앙의 어떤 단계를 거치는 인물에 해당한다. 요한복음 3장에 등장하는 니코데모는 예루살렘사람들처럼 영과 육의 싸움, 육적인 눈으로 예수를 바라봄으로 예수께 깊은 신앙으로 인간 본성의 한계를 뛰어넘은 인물은 아니라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럼에도 그를 통해 십자가 신학이 아버지의 사랑이며 영원한 생명이라는 대주제를 전하는 인물로 설정되어 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굳이 복음사가가 니코데모를 설정된 것은 법없이 착한 사람들이라 불리는 이들이 세속의 가치관에 입각한 자기 의로움 때문에 예수를 믿기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시사한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할 수 없는 사람은 삼위일체 하느님을 믿기가 어렵다. 죄가 많은 곳에 사랑도 많다는 것은 니코데모를 통해서도 추론할 수 있는 은총이다.
요한 3,14-21은 Ⓐ(14-15절), Ⓑ(16-18절), Ⓒ(19-20절)를 나누어 십자가 신학의 의미, 구원과 심판에 관하여, 빛과 어둠의 선택을 통해 영원한 생명이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며, 어떤 기쁨을 주는 가를 전하고 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니코데모에게 말씀하셨다.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15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14절과 15절을 통해, 인간 예수를 광야에서 모세에 의해 높이 들려졌던 구리뱀과 비교하는 것은(민수기 21, 4-9) 십자가 위의 예수가 보여준 사랑이 어떻게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지, 그 사랑의 의미를 분명히 한다. 여기서 <들어올려져야 한다>라는 당위에 호소하는 어조는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 반드시 이행되어야 한다는 필연성을 강조한 것이다. 이는 십자가를 바라보는 이들 안에서 이루어지는 영원한 생명에 대한 사도요한의 영성이 공관복음과의 차이를 드러낸 부분이다. 공관복음은 세 번에 걸쳐 십자가수난에 대한 예고를 하지만 요한복음에는 십자가 사랑이 공생활 벽두부터 등장한다는 것에서 요한복음의 구원론은 창조론과 연결되어 있음을 바라볼 수 있다. 여기서, 동사 들어올리다는 것은 십자가 사건의 피동성과 능동성이 중의적으로 결합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이중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그로인해 십자가 사건은 하느님의 영광을 높이면서 예수의 영광스런 열광 역시 절정에 이른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9,30)는 의미가 구체환된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신성한 사랑을 공인하기 위한 조건이(8, 28) 십자가는 모든 사람을 하느님 사랑으로 이끄는 계기가 되기 때문(12, 32)이라고, 창조의 완성이 십자가의 사랑에서 완성된 것이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올린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달을 뿐 아니라, 내가 스스로는 아아무것도 하지 않고 압저지께서 가르주신 대로만 말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8, 28)
Ⓖ나는 땅에서 들어 올려지면 모든 사람에게 나에게 이끌어 들일 것이다(12,32)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사건은 예수의 인간성을 강조함으로써 인간의 구원은 즉 영원한 생명은 인간 예수의 인성을 통해서 얻을 수 있음 역시 강조한 것이다. 사람의 아들은 인간 구원의 유일한 중개자라는 것을 십자가 사건으로 표명된 것이다. 이는 인간 구원이 아들 예수를 통해 하느님이 구원의지라는 것을 천명한 것이자, 그를 믿는 이들에게서 십자가의 사랑이 완성될 수 있음을 개방한 것이다. 여기서 영원한 생명은 요한복음에서 하느님 나라와 동의어가 된다. 육화된 말씀은 신적생명과 구원의 문이 된다. 십자가 사건에서 예수는 온전히 하느님의 아들임과 동시에 온전히 사람의 아들임을 드러낸 것이다.
Ⓑ16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17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18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16절과 17절에서 예수를 세상에 보낸다는 표현은 파견하다는 의미로 파견의 목적은 하느님 사랑으로 인한 인간 구원이 그 목적이라는 것에서 파견의 의미가 단지 세상에 보냈다는 의미가 아님을 알 수 있다. 파견은 메신저다. 메신저와 메시지가 같다. 여기서 그리스도교는 타력종교임을 알 수 있다. 사람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심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게하여 모든 사람을 영원히 살게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는 하느님의 사랑의 의지를 볼 수 있는 것으로 예수를 믿는 것이 영원한 생명이며 이 사랑은 대속과 구원을 필요로 하는 인간을 위한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것을 복음 사가는 거듭 강조한 것이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이토록 사랑하셔서,라고 하느님의 사랑을 반복해서 강조한 것에서 인간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하느님의 계획은 인류가 영원한 생명을 누리도록 당신이 가지고 있는 사랑을 우리에게 아낌없이 내어 주셨다.
그렇기에 18절에서는 구원과 심판의 현재성이 나타난다. 그리스도교는 분명 타력종교지만 그러나 자력종교이기도 하다는 것을 다르게 표현한 것이다. 영원한 생명을 받아들이지 않는 상태가 이미 자신이 자신을 심판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심판은 단죄나 처벌이 아니라 자유의지의 결정, 심판의 어떤 상태를 의미한다. 어둠의 지배를 자신에게 허용한 것이야말로 심판이라고 할 수 있다. 세상에 아들을 파견하신 하느님의 목적은 세상구원에 있다는 보편적인 하느님의 구원의지를 스스로 거부한 것이기에 그렇다. 하느님은 인간의 심판을 결코 원치 않으나 이미 심판이 주어졌다는 것은 심판을 자초한 것은 지금 이곳에서 이루어진 구원과 심판의 현재성을 드러낸다. 예수를 믿지 않아 어둠을 자신에게 허용하는 것은 곧 악의 지배하에 자신을 놓은 것이다. 여기서 믿지 않는다는 것은 그 어떤 방법으로도 살길이 없음을 의미하며, 하느님 사랑과 인간 사랑이 크로스되는 것이 십자가 사랑임을 강조한 것이다. 영원히 살려면 그 유일한 길을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믿는 것이다.
Ⓒ 19 그 심판은 이러하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20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21 그러나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19절과 20절은 구원과 심판의 상태를 빛과 어둠이 무엇인가를 통해 다시 한번 강조한다. 심판은 단죄나 처벌이 아니라 심판의 상태를 의미한다. 이것은 하느님의 사랑 못지 않게 인간의 자유의지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다시 한 번 상기시킨 것이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을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1, 4-5)
그리고 그 심판은 죽은 다음이 아니라 이미 여기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구원의 현재성에 초점이 놓여 있다. 예수로부터 나오는 빛이 미래의 부활에서만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각 개인의 역사적- 지상적 삶 안에서 이미 이뤄지고 있다는 것이다. 영원이라는 초시간의 개념은 요한복음에서 중요한 영성 포인트다. 죽음 다음에 지옥과 천국으로 갈리는 것도 아니고, 베드로 사도가 넌 천국문을 지키면서 넌 천국으로, 넌 지옥으로 보내는 것도 아니다. 오직 순례의 여정에서 자유의지를 지닌 본인의 선택이다.
악을 저지르는 자는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는 것이, 자기 행실을 숨기는, 아담의 죄라고 할 수 있다. 악은 빛을 피해 어둠을 좋아한다. 우리 개인적인 역사와 반그리스도를 선택 했던 비극적인 사건들은 역사적으로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예를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나 진리로 향하는 이들은 빛으로 거침없이 나아간다. 진리를 향하는 이들이 빛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자신의 행실이 하느님께 그 기원을 두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사람들을 예수께 인도하는 이는 사실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시는 사람은 모두 나에게 올 것이고, 나에게 오는 사람을 나는 물리치지 않을 것이다(6, 37)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주지 않으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 그리고 나에게 오는 사람은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릴 것이다(6, 44)
그런 맥락에서 빛으로 가는 길을 알고 있는 이들이 느끼는 기쁨이 그리스도인의 기쁨이다.
Ⓚ즐거워하여라, 예루살렘아. 그를 사랑하는 이들아, 모두 모여라. 슬퍼하던 이들아,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위로의 젖을 먹고 기뻐 뛰리라.(이사 66,10-11)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필리비4,4-5)
우리는 Ⓐ~Ⓚ를 통해, 사순4주 믿는 이들의 기쁨과 즐거움이 무엇인가를 추론해 볼 수 있다. 십자가를 바라볼 수 있는 것, 하느님이 아들을 통해 보여주신 사랑, 그리고 빛을 선택할 수 있는 영원한 생명이 그리스도인의 기쁨의 실체라는 것을 말이다. 그 영원한 생명을 죽은 다음이 아니라, 오늘, 이미, 여기서 누리는 은총의 현재성으로, 그리스도인들이 누리는 영원한 기쁨의 실체라고 할 수 있다.
3-2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요한복음 사가가 전하는 그 기쁨, 이사야나 바오로사도의 전언대로 어떻게 실존의 상황적 맥락을 뛰어넘어 늘 기뻐할 수 있으며, 환호할 수 있을까?
Ⓚ즐거워하여라, 예루살렘아. 그를 사랑하는 이들아, 모두 모여라. 슬퍼하던 이들아,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위로의 젖을 먹고 기뻐 뛰리라.(이사 66,10-11)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필리비4,4-5)
역대기하와 시편 저자는 바빌론 유배라는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해방을 기쁨의 실체로 전한다. 그것은 유배와 유배상태에서 벗너날 수 있는 것이 모두 하느님과의 분리의 소산이었음을 전하며, 분리가 해결된 것이 기쁨의 실체라고 바라본 것이다. 하느님과 분리된 상태가 바로 자기유배라고 할 수 있다.
Ⓛ주님께서는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고,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의 마음을 움직이셨다. 그리하여 키루스는 온 나라에 어명을 내리고 칙서도 반포하였다. 23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는 이렇게 선포한다. 주 하늘의 하느님께서 세상의 모든 나라를 나에게 주셨다. 그리고 유다의 예루살렘에 당신을 위한 집을 지을 임무를 나에게 맡기셨다. 나는 너희 가운데 그분 백성에 속한 이들에게는 누구나 주 그들의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기를 빈다. 그들을 올라가게 하여라.” (역대기하 36,14-16.19-23)
시편저자 역시(137(136),1-2.3.4-5.6) 바빌론 유배라는 역사적인 상황에서 하느님이 주신 무상의 선물, 자유와 해방을 기쁨의 실체로 전한다.
Ⓜ 우리 어찌 남의 나라 낯선 땅에서 주님의 노래 부를 수 있으랴? 예루살렘아, 너를 잊는다면, 내 오른손이 굳어 버리리라. 내가 만일 예루살렘 너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너를 가장 큰 기쁨으로 삼지 않는다면, 내 혀가 입천장에 달라붙으리라.
바오로 사도가 전하는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보편적인 상황, 즉 죄와 죽음에서의 해방을 기쁨의 궁극적인 실체로 전한다. 설사 역사적인 유배상태에 놓여있더라도, 혹은 실존의 고통 속에 놓여 있다하더라도 진정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사랑 때문에 기쁨을 살 수 있다는 역설이다. <잘못을 저질러 죽었던 여러분은 은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에페소서 .2,4-10)라고 전하는
Ⓝ자비가 풍성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으로, 5 잘못을 저질러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습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은총으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 6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그분과 함께 일으키시고 그분과 함께 하늘에 앉히셨습니다. 7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에게 베푸신 호의로, 당신의 은총이 얼마나 엄청나게 풍성한지를 앞으로 올 모든 시대에 보여 주려고 하셨습니다. 8 여러분은 믿음을 통하여 은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는 여러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9 인간의 행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니 아무도 자기 자랑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우리는 선행을 하도록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창조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선행을 하며 살아가도록 그 선행을 미리 준비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수난이 점점 다가오고 있는 오늘, 우리의 시대, 21세기, 이 시점에 도대체 교회는 무엇을, 어떻게,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일까?
Ⓛ인간이 살아가면서 가장 기쁜 순간 가운데 하나는 누군가의 사랑을 확인하였을 때가 아닐까 합니다. 십자가 ‘위’에 달리신 분을 ‘올려다보며’ 그 사랑을 기억하고 그렇게 날마다 ‘위’로부터 그 사랑으로 새롭게 태어난 것, 그것만이 우리를 살게하는 참다운 삶의 ‘기쁨’입니다(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요한 복음 사가는 십자가를 바라볼 수 있는 근원을 빛과 어둠의 선택으로, 그리스도인의 기쁨과 행복의 실체를 바라본 연장선에서 내가 받은 사랑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 기쁨의 실체라고 김혜윤 수녀는 전한다. 그것은 내가 하는 사랑의 실체를 아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볼 때, 단순히 역사적인 예수가 아니라 우리 각자의 역사에 함께하신 하느님의 사랑을 바라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 십자가는 고통이 초점이 아니라 사랑이 초점이라는 것을 통찰할 수 있다.
20절과 21절에서,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아니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너희는 나를 알지 못할 뿐 아니라 나의 아버지도 알지 못한다.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나의 아버지도 알았을 것이다(8,12-20)
그렇다면, 요한복음사도가 전하는 빛으로 나갈 수 있는 기쁨의 실체에 대해, 좀 더 생각해 보아야 한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는 선언은, 나는 진리를 따르겠다는 결정이며, 나는 성령과 이 일을 완수하겠다는 자기소명에 대한 확신이라고 할 수 있다. 그곳에서 그리스도인의 기쁨과 평화의 원천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나는 빛이다라는 것은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고백과 동의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는 일이 바로 빛을 사는 일이라면, 그것은 빛이 생겨라!라고 하신 창조의 본성을 회복하는 일과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빛은 요한 복음 프롤로그 1장을 통해 복음 전체를 관통하는 창조의 사랑이다. 그 사랑이 신앙인들이 누리는 기쁨과 평화의 근원이라고 역설한 것이다. 따라서 나는 빛이다,라는 것은 단순이 예수님의 신원의식이 아니라, 우리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그분의 뒤를 따르는 모든 믿는 이들의 자기정체성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십자가를 바라보는 모든 그리스도인들 역시 그리스도와 같은 고백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하느님이 창조하신 우리 자신에 대한 본성의 기억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진리에 대한 통찰이라고 할 수 있다. 세상의 빛이 바로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유일한 역할이라고 할 수 있기에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진정한 교만 오만, 무지라고 할 수 있다. 크리스챤의 겸손은 자신이 세상의 빛임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나는 빛이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 영혼에서 하느님이 말씀하시는 그 음성을 알아듣고 받아들였으며 영혼이 온전히 치유되었다는 고백인 것이다. 그것은 구원받은 우리의 위치를 확인하는 걸음으로 그것은 우리 자신이 모조한 이 세상에 대한 환상, 유혹에 대한 완벽한 답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자신이 만든 모든 형상을 진리 앞으로 가져가려는 결단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선택이기에 결단이다.
나는 빛이다,라는 이 결단은 사실 우리를 빛으로 인도하는 그분에게서 나온 은총이다. 빛으로 빛을 본 것이기에 타력과 자력이 만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 나의 유일한 역할은 나는 빛이라는 인식, 그것은 마음의 중심으로 들어가는 길을 발견한 것이다. 이로써, 나의 인격 너머 근원적인 본성을 바라보는 것이며, 이 세상을 순례하는 나의 역할과 유일한 목표를 바라보는 길이다. 그렇기에, 자신이 빛이라는 사실을 안다는 것은 구원을 받았음을 확신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자신이 빛임을 알 때, 우리에게서 어떤 일이 일어나나? 빛은 용서의 완성에 대해 갈망하게 만든다. 요한복은 20장에서 부활하신 주님이, 평화-성령- 용서를 제자들에게 맡기신 그 사랑에서 그것을 확증한다. 그렇기에 용서를 완성하지 않고 나는 빛이라고 말할 수 없다.
용서는 바로 세상의 빛으로서의 나의 유일한 역할이기 때문이다. 용서는 세상을 넘고 타자의 인격의 껍질을 뚫고 그의 영혼을 만나는 유일한 루트다. 우리가 용서를 완성하는 순간 우리 안의 그리스도의 강함-저 사람들은 자신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니 용서하소서!라는 용서의 기도가 비로서 체험된다. 이것은 우리 자신의 나약한 피로감을 너머서는 일로써 두려움과 죄책감, 아픔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상처입을 수 있는 본성을 회복시키는 길이다. 용서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행복해 질 수 있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빛으로써 용서를 완성하고자 할 때 나는 모든 사람들에 평화를 가져올 수 있음을 알게 된다. 용서는 언제나 평화를 가져온다는 것을 체험하는 일이 빛으로써의 우리의 유일한 역할임을 아는 것이다. 존재자체가 걸어가는 평화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모든 마음에 평화를 가져올 수 있는 길이 바로 빛으로써 용서가 우리의 역할이다. 세상의 빛은 나의 용서로써 세상에 평화를 가져온다. 우리가 어둠을 선택하는 한 우리는 이 평화와 기쁨이 기적임을 볼 수 없다. 우리가 은총 중에 있을 때 삶의 모든 순간들이 빛 속에서 감지된다. 그 빛은 바로 하느님의 현존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빛으로서 용서를 완성하는 길이 우리 자신을 이 세상에 내어 놓을 수 있는 그리스도인의 기쁨이라고 할 수 있다. 빛이 있다는 것은 용서를 완성했다는 것이며, 그것은 평화와 기쁨을 누릴 수 있다는 연쇄적인 축복이라고 할 수 있다. 용서와 진리, 기쁨과 평화는 언제나 빛과 동행한다. 성령과 함께한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내가 누구인가를 인식하는 것으로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습니까?(로마서8, 35-39)라고 피를 토하듯 고백했던 바오로의 영성이 바로 사도요한의 영성이고 모든 복음사가의 영성이고 빛을 선택한 모든 믿는 이들의 영성임을 알 수 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아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끼?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저희는 온종일 당신 때문에 살해되며 도살당할 양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내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로마서8, 35-39)
사순4주 성찰과 묵상을 마무리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에서 청중을 설득하는 세가지 방법으로 에토스(Ethos), 파토스(Pathos), 로고스(Logos)를 설정한다. 에토스는 발화자의 신뢰성이나 권위를 구축하는 방법으로 윤리적인 카리스마로 설득의 1단계라면, 파토스는 인간의 가장 뜨거운 부분인 감정을 자극하여 청중을 설득하는 두 번째 단계이다. 로고스는 논리와 이성을 바탕으로 청중을 설득하는 세 번째 방법으로 우리가 로고스라고 하는 것은 여기에서 유래되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에 설득당하지 않았다면 사실 하느님의 사랑, 성령의 역사에 설득당했다고 말할 수 없다. 아가페 사랑에 설득당했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에 설득당할 수 있는 사랑이 바로 십자가의 사랑이라는 점에서 십자가위에 높이 달리신 그리스도를 바라보지 않고서는 우리가 아무리 사랑을 좋아해도 우리의 사랑은 교환적인 사랑, 이 땅의 사랑, 필리아에 그칠 수밖에 없다. 사랑을 찾아 헤매지만 결국 우리는 두렵고 고독한 사막을 홀로 걸어가는 단독자의 순례를 하게 된다고 할 수 있다. 아가페라는 무조건적이고 몰아적인 신적-은총적 사랑에 설득 당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가 보여준 십자가의 사랑에서 찾을 수 있다. 그 사랑은 사랑에 빠진 것이 아니고 사랑에 미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상에서 보여준 그 사랑은 바오로 사도의 통찰처럼 에토스 파토스를 넘어 로고스조차 훌쩍 넘어섰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설득당하지 못했고, 우리가 설득하지 못한 사랑이 세상 도처에 늘비하다. 즐비하다. 밥이 없어 굶어죽는 사람보다 하느님의 사랑을 몰라서 굶어죽는 사람이 훨씬 더 많다. 이 땅에서 100세를 살기를 원하지 영원한 생명은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것을 반증한다. 자신이 이 세상을 떠난 뒤, 가루가 되어서라도 경치좋은 납골당을 원해도 하느님 곁에 영원히 사는 삶은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슬프다. 육체의 병을 치료하지 못해서 두려운 사람보다 영혼이 있는지 조자 몰라서 두려움에 떠는 사람들이 더 많다는 사실이. 자신이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또 얼마나 많은가. 즐비하다. 그런 사람들에게 십자가의 사랑은 얼마나 어리석음인가?
그런데 문제는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그분을 바라보면서, 그 영원한 생명을 자기 가족, 자녀들에게조차 설득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돈에 미친 사람은 돈을 벌 것이며, 사랑에 미친 사람은 사랑을 얻을 것이다. 하느님께서 당신 아들 예수를 세상에 파견했다는 표현은 신앙은 문화다원주의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신앙은 빛과 어둠의 절충론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렇기에 사순4주 그리스도의 사랑에 설득당하지 않고서도 사랑이 될 수 있을까?를 십자가를 바라보면서도 그 사랑에 턱없이 미치지 못한 우리 자신의 심연을 향해 내 탓이오!를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영원한 생명이신 분께 용서와 자비를 구하며, 온전한 빛의 자녀가 되게 하소서!를 기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빛으로만 빛을 살 수 있는 은총이 믿는 이들의 기쁨이기 때문이다.
글을 마치며,
Ⓐ그때에 예수님께서 니코데모에게 말씀하셨다.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15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16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17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18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 19 그 심판은 이러하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20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21 그러나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마니피캇(Magnificat)'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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